[도시탐구] ‘원조 강남’ 영등포가 간직한 다양한 모습
삼백산업의 중심지, 그리고 우리나라 맥주의 시작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영등포는 교통의 요충지다. 영등포역은 지방으로 향하는 열차와 전철이 정차하고 역 앞을
지나는 경인로는 인천이나 경기 서남부 지역을 오가는 차량으로 붐빈다. 영등포는 다양한 모습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오랜 철공소와 공장이 자리한 동네가 있는가 하면 고층 건물이 즐비한 곳도 영등포에 있다.
여러 색깔을 지닌 만큼 영등포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근대사의 여러 순간을 직접 목격한 지역인 것은
분명하다.
(2022. 10. 19) 영등포역. 철길 사이로 양쪽 지역이 단절된 느낌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원조 강남 영등포
오래도록 경기도 시흥 땅이었던 영등포는 1936년에 서울이 되었다. 그런데 경성부에서 영등포를 편입하려 할 때 반대하는
지역 유지가 많았다고 한다. 영등포가 인천과 경성을 이어주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였고, 공장이 많아 지역 경제가 탄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성부에 편입되기보다 영등포부라는 독립된 시로 승격하기를 바랐던 것.
아무튼 영등포는 그 후로 한강 남쪽 서울의 중심지가 된다.
나중에 강남으로 불리게 되는 ‘영동’의 어원도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을 지녔었다.
<조선일보> 1971년 7월 11일의 ‘서울의 낙도 영등포 편입지구’ 기사는 당시 영등포의 규모를 보여준다.
인구가 120만 명이 넘어 대구보다 많고, 면적도 서울의 5분의 1을 차지한다고. 당시 영등포구 관할이었던 지금의 서초구
일대가 낙후되었다고 지적하는 기사였지만 영등포가 서울에서 차지하는 지역적 위상을 밝히는 기사이기도 했다.
경성시가지계획 평면도(1936). 한강 남쪽 영등포 지역의 시가지 개발 계획도 담겼다.
지도 좌측 하단에 자리한 영등포는 1936년에 경성으로 편입되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사실 영등포는 약 100년 전부터 강남으로 불린 곳이었다.
1925년부터는 영등포를 ‘강남’으로 칭하는 신문 기사를 볼 수 있는데 그 기사들에서 ‘강남발전회’가 자주 언급된다.
강남발전회는 노량진 등 영등포 지역의 개발을 촉구하는 영등포의 일본인 유지들이 결성한 압력단체였다.
이렇듯 과거 신문 기사들을 참고하면 영등포가 원조 강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원조 강남 영등포는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했다.
삼백산업의 중심지 영등포
삼백산업(三白産業)은 흰색을 띠는 세 가지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을 말한다.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업, 설탕을 만드는 제당업, 그리고 면직물을 만드는 면방직 공업. 영등포에는 삼백산업 공장들이 모여 있었는데 현재는 대선제분 영등포 공장과 경성방직 영등포 공장 등 두 곳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대선제분 영등포 공장.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영등포역 앞 경인로를 따라 문래동 방향으로 가다 오른쪽 공장지대 너머로 대선제분 공장이 보인다.
86년 역사의 공장인 만큼 시간의 흐름이 보이는 건물과 시설이 남아 있다. 건물 외벽에 한문으로 쓰인 공장 이름도
오래된 회사라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대선제분은 현 위치의 공장에서 1958년에 창업했다. 그런데 제분공장으로서 이 공장의 역사는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제분 회사인 ‘일청제분주식회사’가 영등포에서 제분공장을 설립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제분’이 귀속재산을 불하받았다. 그러니까 대선제분은 조선제분을 인수한 것이다.
하지만 대선제분 영등포 공장은 2013년부터는 밀가루를 생산하지 않는다.
현재는 복합문화공간이 되기 위해 리모델링 중이다. 밀가루 공장에서 문화 공장으로 변신하겠다는 계획이다.
영등포의 경방 타임스퀘어.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영등포역 건너편, 신세계 백화점 옆에는 ‘경방 타임스퀘어’가 있다. 예전에 ‘경성방직’ 공장이 있었던 자리다. 1994년에
공장 터 일부에 경방필백화점이 들어섰고, 그 자리가 복합 쇼핑몰로 개발되어 2009년에 경방 타임스퀘어로 개장했다.
경성방직은 인촌 김성수가 1919년에 한 방직회사를 인수한 것을 그 시작으로 본다. 조선인 노동자를 많이 고용하고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한 기업이었다. 경성방직 영등포 공장은 1923년에 열었고 1933년에 증축해 대규모 방직업체로 성장하게 된다.
서울시가 발간한 구술 자료집 <영등포 공장지대의 25시>를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영등포 방직공장지대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가난을 면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온 이들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온갖 서러움을 겪은 사연이 그들의 목소리로 기록되어 있다.
타임스퀘어 한편에 예스러운 건물이 한 동 있다. ‘영등포 경성방직 사무동’ 건물이다.
옛 공장 건물들을 다 허물고 남은 흔적이다. 1936년에 건축한 건물로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성방직 사무동 건물.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우리나라 맥주의 시작점 영등포
영등포는 열차가 지나는 만큼 철길을 사이에 둔 지역이 단절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육교나 지하도를 이용해야 하는 만큼 두 지역 사이에 뭔가 선이 그어진 느낌이다.
경인로에서 육교나 지하도를 이용해 영등포역 철길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공원과 아파트 단지 등 주택가가 나온다.
그곳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를 생산하던 공장들이 있었다. 영등포는 삼백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맥주 산업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오비맥주 공장 부지는 영등포공원이 되었다. 조형물은 맥아와 홉을 끓일 때 쓰던 담금솥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영등포역 철길 건너편, 혹은 영등포역 동쪽에 자리한 영등포공원에는 오비맥주 공장이 있었다. 1933년 일본의 기린맥주가
이곳에 자회사인 ‘쇼와기린맥주’ 공장을 세운 것이 그 시초다. (나중에 두산그룹 창업자가 되는) 박승직이 주주이기도 했는데 해방 후 귀속재산이 된 공장을 1952년에 그의 아들인 박두병이 불하받았다. 기업명은 ‘동양맥주’ 제품명은 ‘오비’였다.
1997년 오비맥주 측은 영등포 공장 부지를 서울시에 매각했다. 서울시는 이 땅에 ‘영등포공원’을 조성했다.
공원 한쪽에 뚫어뻥(?)으로 보이는 거대한 조형물이 있는데 맥아와 홉을 끓일 때 쓰던 ‘담금솥’이라고 한다.
조형물이 아니라 실제로 쓰던 솥이었다.
영등포공원에서 주택가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예전에 크라운맥주 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1933년에 일본에서 삿포로맥주를 생산하던 대일본맥주가 영등포에 ‘조선맥주주식회사’를 세운 것이 그 시초다.
이 공장에서는 아사히맥주와 삿포로 맥주를 생산했다. 해방 후 귀속재산이 된 조선맥주를 과거 주주의 후손이 인수했다.
크라운맥주는 1990년대에 하이트맥주를 생산하며 인지도가 크게 오르게 된다. 이 공장은 1999년에 철거되었고 2003년에
대우드림타운, 지금의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맥주 공장이 있었다는 흔적은 단지 안 공원에 술통
모양을 한 조형물로 남았다.
크라운맥주 공장 부지는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단지 내 공원에는 맥주 술통을 형상화 한 조형물이 맥주 공장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한강 남쪽 서울의 중심지였던 영등포
1970년대 초반까지는 영등포구 관할 지역에 지금의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는 물론 서초구도
속했었다. 그 넓은 지역을 품을 수 있었던 여력은 영등포가 공업 중심지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이른 시기부터 공업 지대로 개발된 영등포는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먼저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개발된 영등포의 동쪽 강남보다 여러모로 뒤처지는 것은 사실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모습이다.
이를 이유로 영등포 일대 개발에 관해 많은 논의가 오가고 있고 당사자인 주민들 의견도 분분하다.
한때 한강 남쪽 서울의 중심지였던 영등포가 어떻게 바뀌어 갈 것인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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