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과학-81] "당신, E.L.E에 대해 뭘 알고 있습니까?"
톰 백 미국 대통령(모건 프리먼)은 야심 찬 여성 앵커 제니 레너(테아 레오니)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질문을 던진다. 취재원에게서 엘리란 이름을 들은 레너는 재무장관이 모종의 스캔들에 연루됐다고 의심하고 취재를 진행 중이었다.
극중 레너가 우연히 들은 엘리는 여자 이름(Ellie)이 아닌 ELE(Extinction Level Event)로 인류가 멸망할 만한 대사건을 의미한다. 대통령은 대중적 공황 상태를 우려해 국가 기밀에 붙인 엘리(ELE)에 대해 레너가 얼마나 아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의 속을 떠본 것이다.
▲ 1998년 개봉한 영화 딥 임팩트. 소행성 충돌 위협을 다룬 이 영화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사진=위키피디아
1998년 개봉한 영화 '딥 임팩트'는 혜성 충돌에 직면한 상황 앞에 놓인 개인들의 일상을 그려냈다. 영화에선 각각 지름 2.4㎞와 9.6㎞로 뉴욕시 크기와 맞먹는 무게 5000억t의 소행성이 지구로 향한다. 상상이 안 갈 정도의 엄청난 크기이지만 인류라고 그저 손놓고 있을 순 없는 법. 충돌 1년 전 소행성을 발견한 미국 정부는 러시아와 손잡고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 우주선을 만들어 발사한다. 우주인들의 임무는 소행성을 핵폭탄으로 산산조각 내는 것.
▲ "인류를 구하러 갈 시간이군" 1998년 딥 임팩트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아마겟돈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소행성을 폭파하려 한다. /사진=유투브 캡쳐
'딥 임팩트'보다 두 달 늦게 개봉한 '아마겟돈'도 비슷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텍사스 크기의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국장은 우주인을 소행성에 착륙시켜 구멍을 뚫은 뒤 핵탄두를 집어넣고 폭발시켜 쪼개는 방법을 고안하고 유전 시추 전문가들로 조직된 '특공대'를 소행성으로 보낸다.
'딥 임팩트'나 '아마겟돈' 모두 영화다 보니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주인공들의 영웅적 희생 덕에 인류는 소행성의 위험으로부터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 14일 기준으로 향후 지구에 근접할 것으로 추정되는 5개의 소행성 목록. NASA는 지구와의 거리가 750만㎞ 이하인 소행성들의 크기와 지구 근접 일시, 지구를 지나갈때 예상거리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자료 = NASA
영화는 영화일 뿐일까. 불행히도 소행성 충돌은 실제로 인류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NASA는 최근 소행성 충돌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기구 수립을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앞선 영화들에 나온 '주인공(?)'인 소행성들은 NASA가 분류하는 지구근접천체(near-Earth objects·NEO)에 해당한다. NEO는 지구로 접근하는 소행성을 의미하는데 NASA는 NEO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NASA 산하에 '지구방위총괄기구(Planetary Defense Coordination Office·PDCO)'를 두기로 했다. PDCO는 NASA의 예산이 투입되는 모든 소행성 추적 연구를 총괄하게 된다.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정부기관 간 혹은 각국 정부 간 협업을 조율하는 기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인류는 지금까지 다양한 크기의 NEO 1만3500여 개를 발견했다. 이 중 95%는 1998년부터 NASA가 비용을 댄 연구에 의해 이뤄졌다. 매년 약 1500개의 새로운 NEO가 발견되고 있다. 존 그룬스펠드 NASA 해외협력부 국장은 "혜성을 발견·추적하고 지구와의 충돌을 막는 것은 NASA와 전 세계 관련 기관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라며 "현재 당면한 위협은 없지만 2013년 러시아 첼랴빈스크 유성우나 최근 핼러윈 유성우를 떠올린다면 우리가 왜 우주에 관심을 갖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천문학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천체망원경을 통해 NEO를 발견·관측하고 있다. NASA의 네오와이즈(NEOWISE) 적외선 망원경을 통해 우주에서도 실시간 감시가 진행 중이다. 이렇게 수집한 데이터는 NASA가 지원하는 국제천문연맹(IAU)의 소형행성센터(Minor Planet Center)에서 집중 분석한다. 발견된 물체들에 대해선 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의 NEO 연구센터인 CNEOS에서 정밀 추적 조사가 이뤄진다.
NASA는 NEO 중 지름이 1㎞가 넘는 것들의 90% 이상을 파악했다. NASA는 이제 축구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지름 140m)의 NEO들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행성을 탐지·추적하는 연구 외에 NASA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소행성에 대응할 기술도 연구하고 있다. 지구를 향하는 소행성의 방향을 돌려 지구를 비켜가게 만드는 것이 대표적이다. NASA는 이를 위해 중력이 거대한 물체를 활용해 소행성을 잡아당겨 지구와 충돌하는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 중이다. 유럽우주국(ESA)과 함께 '혜성 충돌과 궤도 변경 평가'란 계획도 마련했다. 소행성 외부에 충격을 가해 소행성이 원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드는 계획이다. 만약 혜성을 막지 못한다면 대피 계획도 필요하다. NASA는 이를 위해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과도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소행성이 떨어질 시간과 충돌 지점을 알아야 정확한 피해를 산정하고 제때 대피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NASA의 NEO 프로그램 예산은 2015년보다 1000만달러 늘어난 6000만달러로 결정됐다. 미국 정부가 그만큼 소행성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영욱 과학기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