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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딸린 체제와 러시아의 과거청산
김 남 섭
과거청산의 정치학
1985년 이후 1990년대 초까지 러시아는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20세기 초 전 유럽을 전쟁의 화염으로 달구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태어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는 정확히 74년을 견딘 뒤 1991년 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소연방의 몰락은 그 해 여름에 있었던 이른바 강경 보수파의 무모한 쿠데타의 실패가 직접적 원인이지만, 실상 근본적인 원인은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노인정치”라는 용어로 대변되는 브레쥬네프(Л. И. Брежнев) 서기장을 비롯한 최고 지도부의 정치적 화석화, 정부 및 당 관료층의 특권과 부패, 국가로부터 할당된 생산 목표의 이행을 내용으로 하는 “행정-명령적 경제체제”, 독립과 자치를 원하는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의 연방 체제에 대한 불만, 변화하는 사회의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한 소련 당국의 획일적인 보수적 문화 정책 등을 연방 해체의 주요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1985년 3월 체르넨꼬(К. У. Черненко)가 병사한 후 예상치 않게 젊은 나이에 서기장이 되어 그의 뒤를 이었던 고르바쵸프(М. С. Горбачев)는 브레쥬네프 체제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을 대대적으로 수술하지 않으면 체제 자체가 와해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잘 깨닫고 있었다. 그는 곧 바로 당 지도부에 개혁적 인사들을 포진시킨 뒤 경제를 탈집중화시키기 위해서 뻬레스뜨로이까(перестройка, 재편)라는 구호 하에 시급히 경제개혁에 나섰다. 그리고 “신사고”를 국제 정치에 도입하여 군비감축을 통해 국방비의 감축을 꾀하고 그 결과 절약된 재원을 경제에 쏟아 붓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고르바쵸프가 원하는 성과를 즉각 낳지는 못하였다. 개혁이 도입된 직후 잠깐 소생 기미를 보이던 경제는 곧 다시 침체 상태에 빠졌고, 일부 인사들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개혁에 대한 당과 국가 관료층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특히 스딸린 시대 이래 비대해지기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 2,500만에서 3,000만 명에 달하게 된 엄청난 수의 관리들은 오직 소수만이 체제의 혁명적 변화에 동의할 뿐, 대부분은 체제 개혁에 반대하면서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고르바쵸프가 글라스노스찌(гласность, 개방)라는 구호 하에 1987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과거 소련 시대, 특히 스딸린 시대에 저질러진 테러 및 각종 악행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과거사에 대한 “재분석”을 촉구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즉 소련 역사에 대한 개방적 논의를 심화시킴으로써 당과 정부 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구 관료층의 도덕적 정당성과 권위를 파괴하고 이를 통해 개혁의 추동력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고르바쵸프의 이러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당의 권위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의 정당성을 잠식하고 그 결과 소련 체제의 붕괴와 그 자신의 몰락에 일조함으로써 고르바쵸프가 원했던 체제 내의 개혁 이상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자체는 결과와는 별도로 정치가 과거사 평가에 어떻게 직접 개입하는지, 또 거꾸로 과거가 정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치와 과거청산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사례를 제공한다.
이 점에서 이 글은 러시아에서의 과거 청산을 둘러싼 논의가 “언론의 자유”니 “보편적 인권” 같은 도덕적․추상적 원리의 실현뿐만 아니라 반개혁 세력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개혁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필요 등, 정치적 동기를 비롯한 일정한 경제적․사회적 동기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줄 것이다. 나아가 개혁을 가속화하기 위한 지렛대로서의 고르바쵸프의 과거청산 시도가 사실은 30여년 전 흐루시쵸프(Н. С. Хрущев)가 수행했던 스딸린 격하 운동에서 이미 좀더 적은 규모로 나타나고 있었음도 지적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 글은 정치적 지도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과거청산이 어떤 내용을 가지며 그 결과 어떤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과거 청산의 대상이 된 스딸린 시대의 테러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을 띠었는지를 검토해보자.
스딸린 체제: 테러와 강제노동
저명한 미국인 역사학자 콘퀘스트를 비롯한 많은 역사가들이 일찍이 잘 보여주었듯이, 테러와 강제 노동은 혁명과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소련 국가가 권력을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였다.*1) 그것은, 레닌이 정부 수반의 자격으로서 1918년 여름에 한 지방 정부에 수용소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말한 대로, 혁명에 반대하거나 의심을 품는 “꿀라끄(кулак, 부농), 성직자, 백군 및 기타 수상쩍은 사람들에 대해 가차 없는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소비에뜨 국가의 적극적 후원을 받은 강제 수용소는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증가하여 1919년 말 총 21개에서 2년 뒤인 1921년 말에는 122개까지 늘어났다.*2)
하지만, 이와 같은 초기 소련 국가 체제의 억압적 성격은 1929년 강제적인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의 와중에서 태어난 스딸린(И. В. Сталин) 체제 하의 억압에 비하면 그리 심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스딸린 체제는 형성기부터 자신의 태반에 다량의 피를 묻히고 있었다. 1920년 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권력 투쟁 과정에서 뜨로쯔끼(Л. Д. Троцкий)를 지도자로 하는 이른바 좌익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스딸린은 연이어 부하린(Н. И. Бухарин)을 주요 이론가로 하는 우익 반대파를 제거하면서 1929년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를 실시하였다. 이 농업 집단화는 형식적으로는 생산력이 낮다고 간주되는 소규모 농장을 소수의 대농장으로 통합하여 생산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이른바 농촌의 부농들을 대규모로 제거하는 “탈꿀라끄화” 캠페인을 통해 집단화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도 포함하였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영농민들을 집단화에 대한 반대 정도 및 재산 보유 정도에 따라 몇 개의 부류로 나누고 그에 맞추어 재산 몰수 및 시민권 박탈과 더불어 체포하여 총살하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낸다든지 또는 거주지 근처나 거주지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오지로 추방해 버리는 것이었다.*3) 물론 이 과정에서 직접적인 총살이 아니더라도 이송 과정에서의 가혹한 조건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최근에 발굴된 많은 사료들과 그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 잘 전해주는 바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탈꿀라끄 캠페인의 희생물이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최종적인 집계를 하지 못하였다. 비밀리에 내려진 “전면적 집단화”에 관한 당시의 정부 법령은 탈꿀라끄화의 대상자가 전면적 집단화 대상 지역별로 전 농가의 3-5%를 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였지만, 시행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최고 37%까지 늘어남으로써 상당수의 중농과 심지어 빈농까지도 대상자에 포함된 것은 확실하다.*4) 그 결과 한 러시아인 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소련의 총 2,500만 농가 중 100만 호 이상의 농가가 자신의 거주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5) 이 수치는 체포되어 바로 처형되거나 굴라그1)로 이송된 농민들 및 자기 거주지 근처의 지역으로 이주된 사람들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스딸린 체제 하에서 테러와 강제 노동의 희생자가 된 사람은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노동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테러의 과녁이 되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중․상급 공산당원, 전문가, 엔지니어, 의사 등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소련 사회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체포될 가능성이 비교적 높았다. 우선 그것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후반기까지 소련 사회를 뒤흔들었던 몇 차례에 걸친 전시재판(展示裁判, показательный суд)과 고위 당 인사 및 국가 관리들에 대한 체포 사건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최초의 전시재판은 신경제정책(НЕП) 말기 고조되어 가던 급속한 산업화에 대한 요구의 와중에 개최되었던 돈바스(Донвасс) 지역의 샤흐띄(Шахты) 광산 사건을 다룬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는 53명의 “부르주아” 엔지니어 등이 사보타지와 반역죄의 혐의로 체포되어 그 중 5명이 처형되었다.*6)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고위 당원들에 대한 숙청과 처형이 더욱 두드러졌다. 1932년 여름에는 스딸린의 강압적 정책에 항의하여 스딸린의 사임을 요구한 미하일 류찐(Михаил Лютин) 등을 비롯한 수 명의 옛 우익 반대파들이 체포되어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2년 뒤 겨울에는 스딸린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세르게이 끼로프(Сергей М. Киров)가 레닌그라드의 당 본부에서 살해당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의 암살이 스딸린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2) 이 사건을 빌미로 주요 정적들을 대상으로 한 숙청이 다시 재개되었다. 저명한 볼셰비끄였던 지노비예프(А. А. Зиновьев)와 까메네프(Л. Б. Каменев)가 끼로프 암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1935년과 1936년 두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았으며, 결국 1936년의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야고다(Г. Г. Ягода)를 대신하여 새로운 비밀경찰의 총수가 된 예조프(Н. И. Ежов) 의 주도로 일단의 우익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그 중 상당수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나아가 6월에는 적군(赤軍) 총사령관이었던 뚜하체프스끼(М. Н. Тухачевский) 및 여타 고급 장교들이 비밀리에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 후 연이은 군을 겨냥한 숙청에서 총 101명의 사령관 가운데 91명이 체포되어 그들 중 대부분이 총살되었다. 숙청된 장교들 중에는 원수 5명 중 3명, 육군 사령관 4명 중 3명, 일급 해군 사령관 2명 모두, 군단장 57명 중 51명, 그리고 모든 대령의 80%가 포함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전시재판의 하이라이트로서 1938년 3월에는 우익 반대파의 거두 부하린과 전직 수상이었던 릐꼬프А. И. Рыков), 3명의 저명한 소련 외교관, 최근까지 소련 정부 인민위원이었던 5명의 거물 인사, 소수 민족 공화국들의 중요한 국가 및 당수 3명, 그리고 1936년과 1937년의 숙청을 총지휘하였으나 최근 면직된 비밀경찰 총수 야고다를 포함하는 총 22명의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이 피고석에 앉았다. 빠르게 진행된 재판에서 이들 피고인 중 13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곧 바로 총살되었다. 1938년 동안 고위 당 관료와 국가 관리에 대한 숙청의 물결은 서서히 완화되었다. 1939년 부하린파에 대한 대숙청의 물결을 주도한 예조프가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테러의 대단원으로 스딸린의 자객이 1929년 이후 당에서 축출되어 멕시코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뜨로쯔끼를 암살하였다.*7)
체포와 숙청은 고위 당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중급 공산당원을 비롯한 소련 사회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겨냥하였다. 다음의 수치는 중급 공산당원의 제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공 때문에 당시 “승리자들의 대회”라고 불렸던 1934년의 제17차 당 대회에는 총 2,000여명에 가까운 대의원들이 소련 전국에서 파견되었는데, 그들 중 50%가 넘는 1,100여 명이 1938년까지 숙청되었다. 그 결과 5년 뒤인 1939년에 열린 제18차 당 대회에 참석한 2,059명의 대의원들 가운데 불과 54명만이 1934년의 제17차 대회에도 참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8)
당원들 외에 일반인들에 대한 체포도 아주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소련의 비밀경찰은 전문직 종사자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공장의 경영자들이나 집단 농장의 간부들도 체포하여 처형하거나 굴라그에 수감하였다. 일반 노동자들에 대한 테러도 숙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한편 1937년 8월부터 1938년 11월까지는 비밀경찰의 지시로 소련 국민들 중 꿀라끄층과 범죄자, 전직 멘셰비끼 및 SR당 당원, 전직 백군, 짜르 시대의 관리 등 주로 주변화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널리 진행되기도 하였다.*9)
이와 같은 사회의 여러 그룹들에 대한 테러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 전후로 독일이나 일본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거나 협력한 혐의를 받고, 소련 국경선 근처에 거주하는 다양한 비러시아계 인종 그룹들이 일괄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있던 고려인들과 중국인들이 1937-1939년의 일본의 만주 침략 동안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극동 지역에서 쫓겨나 우즈베끼스딴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쪽으로 대거 강제 이주되었다. 1940년 가을에는 벨로루시와 서부 우끄라이나로부터 12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쫓겨났고,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직전 친소련 리투아니아 정부는 미리 작성된 명단에 근거해 70만 명에 이르는 반체제 인사들의 체포에 나서서 그 중 13만 여명을 일거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독일 침공의 개시는 더 큰 체포의 물결을 가져왔다. 레닌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들에 거주하던 독일인들과 볼가강 유역에서 자치 공화국을 이루고 살던 40만 독일인들이 전쟁 개시 직후 동쪽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소수 민족에 대한 스딸린의 가장 폭력적인 공격은 전세가 역전되어 소련군이 유럽 러시아 쪽으로 진격하면서 더욱 강렬해졌다. 발까르인, 체첸인, 인구슈인, 까프까스 산악 지대의 이슬람계인 까라차이인, 그리스인, 남 그루지야의 메스헤찌야인, 크림 지역의 따따르인, 깔믜끄인 등 거의 모든 주요 소수 인종들을 포괄하는 약 150만 명이 1943년 10월부터 1944년 6월 사이에 체포되어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사람들 중 약 50만 명이 굴라그로 가는 도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수 인종에 대한 추방은 전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수많은 에스또니아인, 라뜨비아인, 리투아니아인, 우끄라이나인, 까자끄인들이 독일군을 도와주었다는 혐의를 받았고, 1949년에는 발뜨해 지역에서 전후에 이루어진 집단화 때문에 10만 명의 발뜨 “꿀라끄들”이 시베리아와 까자흐스딴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총괄하면 1941년과 1948년 사이에 거의 330만 명의 소수 인종들이 자신이 살던 고향에서 쫓겨났으며, 그 후에도 약 20만 명 이상이 비슷한 방식으로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10)
전후에는 전쟁이나 집단화와 관련된 소수 인종들에 대한 박해 외에도 전통적인 반유태주의에 기반을 둔 유태인들에 대한 탄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에 대한 테러는 1948년 이스라엘이 창건되면서 소련 내 유대인들 사이에 시온주의가 확산되자 곧 바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스딸린의 충복이었던 몰로또프(В. М. Молотов)의 부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굴라그로 향했고, 1952년에는 20여 명에 이르는 저명한 유대계 지도자들이 크림 지역에 별도의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고 음모를 꾸몄다 하여 비밀리에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그리고 스딸린이 사망하기 직전인 1953년 1월에는 유대인 의사 7명을 포함하는 9명의 크렘린 의사들이 스딸린의 이데올로기 담당 충복으로서 레닌그라드 당 서기직을 맡고 있던 쥬다노프(А. А. Жданов)를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당하였다. 소수 인종에 대한 탄압은 그루지야인들에게까지 미쳐, 37명의 그루지야 당 관료와 정부 관리들이 1952년에 반소혐의로 기소되는 민그렐리야(Мингрелия)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편 1948년 쥬다노프가 사망했을 때에는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이 터지면서 그와 긴밀하게 연관된 레닌그라드의 정부와 당 관리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11)
그렇다면, 스딸린 시대를 통틀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테러의 희생물이 되었는가? 스딸린 테러의 규모는 고르바쵸프 이후 러시아 정부가 문서고를 본격적으로 개방하기 전에 이미 소련 연구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부 서방 역사가들은 1,0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전쟁 발발 즈음에 굴라그에 수감되어 있다고 믿는다. 일부 러시아인 망명객들은 1,200-2,000만 명에 이르는 죄수들이 전쟁 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에 동조하는 한 러시아인 역사가는 1929년부터 1953년까지 무려 2,150만 명의 사람들이 탄압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일부 서방 역사가들은 이들의 수치가 너무 높은 것으로 생각하여 한 영국인 역사가는 전쟁 발발 직전에 400-500만 명이 굴라그에 수감되어 있었을 뿐이라고 추산한다. 그리고 최근에 발굴된 비밀 보고서는 1930년대 동안 380여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어 그 중 70여만 명에 이르는 총살형을 비롯하여 270여만 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100만 명이 이상이 처형된 것으로 믿는 일부 연구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는 것이다. 또 이 시기 체포된 380만 명 중 70% 정도만이 반혁명 혐의로 받았다는 사실도 모든 굴라그 수감자들이 정치범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끝으로 1930년대 동안 기근이나 소수민족 추방, 테러 등에 의해 발생한 “과잉 사망자”의 수도 2,000여만 명을 주장하는 “보수적” 수치에 대해 일부 연구자는 1,0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12)
흐루시쵸프 시대의 과거청산 노력: “글라스노스찌 없는 복권”
1953년 3월 5일 스딸린의 예기치 않은 사망은 무엇보다도 자국민을 대상으로 수행된 이와 같은 기괴한 형태의 대규모 국가 테러가 더 이상 노골적으로 수행되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을 소련 국민들 사이에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향후 몇 년 동안은 테러 국가의 본질을 일거에 바꿀 급격한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우선 스딸린 테러 과정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곧 바로 수용소에서 나오지 못했다. 스딸린이 사망한 지 3주일이 지난 3월 27일 소련 정부가 120만 명에 이르는 죄수들을 사면했을 때, 그 대상은 반혁명적․반소련적 행위의 처벌을 규정한 소련 형법 제58조를 위반한 정치범들이 아니라 주로 형법 제35조를 위반한 5년 이하의 형을 받은 일반 범죄자들과 집단농장원들, 그리고 아이가 딸린 여성들, 18세 이상의 미성년자들, 상대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불치병 환자 등이었다. 더군다나 스딸린이 사망한 그 해 한 해 동안만 약 60만 명에 이르는 새로운 사람들이 수용소에 입소한 것도 변화의 가능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었다.*13)
그러나 스딸린이 사망한 때부터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쵸프가 유명한 비밀 연설을 통해 스딸린 격하 운동을 개시할 때까지의 3년 동안 이른바 “조용한 탈스딸린화” 움직임이 일어났다. “조용한”이라고 수식어가 붙은 것은 스딸린의 억압 정책을 바로잡는 소련 당국의 공식 정책이 아무런 공개적 설명도 없이 거의 비밀스럽게 수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1953년 4월에 의사들의 음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복권되었고, 그루지야의 민족주의 조직이었던 민그렐리야 사건에 대한 심리도 취소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어떤 사법적인 심리 절차도 없이 총살형을 비롯한 처벌을 내림으로써 초법적 기구로서 악명 높던 숙청 기관인 내무부의 뜨로이까3)(тройка)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듬해 4월 말 소련 대법원은 레닌그라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복권시켰다. 이와 동시에 당은 그때부터 1956년 1월까지 이 사건으로 당에서 제명되었던 17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복당시켰다. 그리고 1954년 5월에 정부의 한 법령은 마침내 “반혁명 범죄”로 기소된 사람들의 석방을 허용함으로써 정치범들이 대규모로 사면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정부는 이 법령에 근거하여 1956년 제20차 당 대회 전까지 유력한 당 및 국가 인사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정치범들을 수용소로부터 석방시킬 수 있었다.*14) 그리고 당은 이들 중 “근거 없는 정치적 죄상을 이유로” 당에서 축출된 5,000여 명의 당원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국가 테러의 총책임자였던 스딸린이 죽고 나서 그의 후계자들은 왜 곧 바로 그가 저지른 죄악의 전면적인 청산에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았는가? 무엇보다도 이에 대한 해답은 흐루시쵸프가 자신의 전기에서 명확히 밝혔듯이, 자신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스딸린 시대의 테러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스딸린은 죽었고 땅에 묻혔지만... 어느 누구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혀 무덤으로 간 사람들을 복권시키거나 죄수들을 수용소로부터 석방시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3년 동안 우리는 과거와 단절할 수 없었다... 마치 우리가 스딸린 지도하에 저질렀던 자신의 행위에 의해 꽁꽁 묶여 있는 것 같았고 심지어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통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적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는, 스딸린이 주입한 망상을 계속 믿었고... 숙청 동안 있었던 이 모든 처형들이... 범죄라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15)
그리고 흐루시쵸프의 고백대로 스딸린의 뒤를 이은 소련 지도자들은 비밀경찰 총수로서 스딸린 사망 후 몇 달 뒤 체포되어 처형된 베리야(Л. П. Берия)는 말할 것도 없고, 거의 전부가 실제로 테러와 연관되어 있었다. 우선 흐루시쵸프는 그러한 사실을 은폐했지만, 그 자신 손에 피를 묻히고 있음은 확실하였다.4) 또 예를 들어 보로쉴로프(К. Е. Ворошилов)는 군 숙청에 협조를 하였고, 미꼬얀(А. И. Микоян)은 자기 부하의 체포에 관여하였으며, 1937년에는 말렌꼬프(Г. М. Маленков)와 더불어 아르메니야에서 당-국가 기구를 숙청하는 데 일조하였다. 까가노비취(Л. М,. Каганович)는 강제 집단화정책을 맹렬하게 수행하였고 몇몇 지역의 숙청을 직접 지도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딸린의 후계자들은 자의적인 테러로서는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우선 그들은 자신들이 스딸린의 최측근으로서 테러에 협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인간들”로서 스딸린의 변덕에 따라 언제라도 제거될 수 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5) 그러므로 이들을 비롯하여 당과 국가, 그리고 군부 등의 관료계층은 테러를 제거함으로써 신분 안전과 업무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싶어 하였다. 또한 말렌꼬프를 비롯한 일부 지도자들은 스딸린의 억압적인 시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드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는 군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소비재 생산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군비 삭감을 시도하는 등 스딸린 체제의 잘못된 측면을 바로잡으려고까지 하였다.*16)
또 한 가지 스딸린의 후계자들이 죽은 보스를 더 이상 변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정치범들로부터의 지속된 석방 및 처우 개선 요구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일종의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고위 관리들의 사무실은 숙청 희생자들의 복권을 요청하는, 고위직에 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굴라그 수감자들 자신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로부터의 편지로 넘쳐났으며, 당 지도자들은 이것들을 처리할 수 있는 어떤 일관된 지침이나 메커니즘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밑으로부터의 압력은 이런 평화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수용소에서의 소요라는 좀더 위협적인 형태로도 다가왔다. 사실 소요의 조짐은 1940년대 말에 시작되었지만, 스딸린의 사망은 본격적인 소요를 본격적인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1954년 여름 40여 일 동안 수용소를 마비시키면서 70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까자흐스딴의 켄기르(Кенгир) 지역 폭동처럼, 일부 수감자들은 소요와 파업을 반란 차원으로까지 발전시켰으며, 당국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급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7) 또한 스딸린 사망 후 풀려났던 수용소 수감자들은 자신들의 끔찍한 체험담을 이야기하고, 또 주택과 일자리, 그리고 의료 서비스 등을 요구함으로써 사회의 시선을 점점 끌고 있었다.
끝으로, 스딸린주의적 테러에 대한 좀더 과감한 부정이 필요했던 까닭에는 실용적인 측면도 있었다. 즉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련 사회는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거대한 “수용소 군도”를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여러 연구에 의해 잘 알려져 있듯이, 1930년대에는 수용소의 강제 노동이 소련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극동과 극북 지역에는 수많은 건설 현장들이 있었고, 기계와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죄수들의 노예 노동은 프로젝트의 완수에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 말부터 전쟁의 위협이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떠오르자 굴착기와 불도저 등 건설 장비를 생산하던 많은 공장들이 탱크 생산으로 돌아섬으로써, 노동력의 필요성은 더욱 증가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탱크는 남아돌기 시작했고 탱크 생산은 즉시 굴착기와 불도저 생산으로 다시 전환되었다. 꼴릐마(Колыма) 금광 지역을 비롯한 주요 수용소 지역들도 전쟁 직후 재건 사업이 진행되면서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까지 기계화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 1930년대처럼 노예 노동은 더 이상 소련의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지 않았다. 소련 당국은 수용소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이익보다 지출하는 비용이 더 컸으며, 그러므로 수감자들을 전면적으로 석방시켜 그 비용을 줄이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18)
흐루시쵸프가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 스딸린 체제에 대한 공격에 나서고 처음으로 희생자들의 복권에 대한 제한적인 언급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당 대회에서 스딸린의 죄악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식의 철저한 과거청산을 요구할 수가 없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흐루시쵸프는 당 대회의 폐막 회의에서 “개인숭배와 그 결과”라는 비밀 연설을 통해 많은 것을 폭로하였지만, 또한 많은 것을 숨겼다. 그에 따르면 스딸린은 측근 지지자들을 불법적으로 숙청하고 전쟁 동안 비러시아계 소수 민족들을 부당하게 추방하였다. 그러나 흐루시쵸프는 1932년과 1933년의 인재였던 대기근으로 인한 희생과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저질러진 지식인들과 유태인들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1929-1931년의 강제적 농업집단화로 인한 참사도 언급하지 않았다. 또 그는 이미 1954년에 검찰총장으로부터 수용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19) 그것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는 악행의 모든 책임을 “개인숭배”라는 어구 하에 스딸린 개인의 오류와 인격적 결함의 탓으로 돌려버렸다.
왜 흐루시쵸프는 스딸린 시대에 저질러진 각종 악행에 대한 청산의 객관적인 필요성이 존재하였음에도, 이렇듯 그것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이해득실에 대한 계산이 작용하고 있었다. 먼저 개인적으로 볼 때 흐루시쵸프로서는 스딸린의 악행을 폭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이 분명하였다. 1953년 3월의 스딸린의 죽음과 몇 달 뒤 비밀경찰 총수 베리야의 죽음은 과거의 억압을 모조리 이 두 사람에게 지울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흐루시쵸프는 이 두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스딸린 시절에 국가에 의해 테러를 비롯한 엄청난 죄악이 저질러진 사실을 들추어내는 것만으로도 일반인들로부터 도덕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흐루시쵸프는 체제로부터 테러를 제거함으로써 확보되는 일반인들의 개인적인 정치적 안전이 창의성과 효율성의 제고로 연결되어 궁극적으로 경제 생산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도 기대하였다.
하지만 스딸린의 유산을 전면적으로 공격할 때 발생하는 위험도 확실하였다. 우선 소련과 외국의 공산당들은 평생 스딸린주의자로 행세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어서 자신들을 후원해 왔던 스딸린에 대한 정면 공격에 저항할 가능성이 다분하였다. 또 스딸린 테러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는 테러와 관련된 인사들로 가득 찬 공산당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킴은 물론이고, 흐루시쵸프를 포함한 현 지도부 인사 대부분의 몰락을 초래함으로써 소련방 체제 자체의 급속한 붕괴를 가져다 올 수도 있었다. 따라서 다음 절에서 살펴볼 고르바쵸프의 과거 청산 노력과는 달리, 흐루시쵸프가 선택한 것은 “조용한 탈스딸린화”와는 단절하되, 복권이나 보안 기관의 변화, 혹은 기타 법적인 문제들을 둘러싸고 일반인들의 전면적인 논의는 야기하지 않을 “글라스노스찌 없는”*20) 과거청산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치적 계산에 의한 제한적 과거 청산 방식에도 불구하고 제20차 당 대회에서의 흐루시쵸프의 비밀연설은 과거 청산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연설 직후인 1956년-1957년 사이에 정부는 정치범들을 비롯하여 굴라그에 남아 있던 수백 만 명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그리고 같은 기간 동안 사후 복권을 포함하여 61만 명이 법적으로 복권되었다.6) 이와 같은 사법적 복권 외에도 소련 정부는 숙청 생존자들이나 그 가족들에게 제한된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공식 법령에 의해 모든 생존자들은 옛 직장에서 받던 임금을 기준으로 두 달 분의 임금을 받았고, 연금을 수령하는 데 수용소 복역 기간을 합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택을 구하는 데도 정부는 일정한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법령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법령에 관한 당대의 연구는 증빙 서류를 갖추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정당한 보상 신청이 기각된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복권과 보상 과정은 당국이 이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적극 통제함에 따라, 한 당대의 관찰자가 “몰래 수행되는 복권”이라고 불렀듯이, 거의 사회적인 논의 없이 진행되는 것이었다.*21)
하지만 제한적이나마 흐루시쵸프 하에서 이루어지던 스딸린 테러에 대한 청산은 1964년 10월 브레쥬네프를 비롯한 정적들에 의해 흐루시쵸프가 돌연 해임되면서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하였다. 브레쥬네프 하에서 법적인 복권은 극소수로 떨어졌으며, 테러 생존자들에 대한 특별 지원도 중단되었다. 1964년부터 1987년까지 겨우 240명만이 복권되었음이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또한 스딸린에 대한 비판이 중지되는 등 소련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됨에 따라 일반인들의 복권 신청도 거의 사라졌다.*22)
고르바쵸프 시대의 과거청산 노력: “글라스노스찌 있는 복권”
1985년 고르바쵸프(М. С. Горбачев)의 집권은 러시아의 과거청산 노력이라는 면에서 흐루시쵸프의 실각 이후 20년 이상 동안 거의 꺼져버렸던 불씨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아니 되살리는 정도였을 뿐만 아니라 불씨는 종국에는 고르바쵸프 자신을 불태우는 엄청난 불길이 되었다. 하지만 고르바쵸프는 집권초기에 뻬레스뜨로이까와 함께 글라스노스찌를 슬로건으로 들고 나옴으로써 과거청산의 가능성은 제기했지만 처음부터 철저한 과거청산에 적극 찬성한 것은 아니었으며, 또 정부의 수반으로서 직접 그것을 추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경직된 소련 체제의 개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과거역사에 대한 솔직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소련 사회에 이 문제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터주었을 뿐이었다.
고르바쵸프에게 그러한 솔직한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시킨 계기는 1986년 4월 예기치 않게 발생한 우끄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 사건이었다. 최종적으로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소련 체제 자체의 정당성을 의심케 할 만한 대참사였지만, 고르바쵸프에게는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공개적인 논의에 부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즉 이 사건을 계기로 소련 사회 현실에 대한 광범한 토론이 장려되었고 그 동안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글라스노스찌가 확대되어 언론, 예술 및 역사를 포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86년 동안 금지되었던 영화들이 개봉되기 시작했고, 《신세계》(Новое Время)를 비롯한 일부 잡지들은 브레쥬네프 시대에 금지된 문학 작품들을 싣기 시작했다.
고르바쵸프가 글라스노스찌를 소련 사회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기 시작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가 원했던 경제 개혁을 비롯한 소련 체제 개혁 시도가 당, 국가 기구, 경제계, 학계, 문화계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에 부딪쳐 좌초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집권 후 2년 동안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경제 개혁은 노력에 비해 성과가 보잘 것 없었으며, 이는 브레쥬네프 체제 하에서 오랫동안 경제적 침체에 시달려온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고르바쵸프를 비롯한 현 소련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에 고르바쵸프는 1987년부터 한편으로는 완전한 대의제는 아니지만 복수 후보 선거를 장려하는 등 선거민주화에 나서면서 정치 개혁을 시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사에 대한 논의를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당과 국가 기구내의 보수주의자들이 지니고 있던 도덕적 정당성을 훼손시키고자 하였다. 1987년 1월 고르바쵸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사람들은 완전한 진실을 필요로 합니다... 개방, 비판, 그리고 대중에 의한 통제는 소련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는 보장책입니다.” 나아가 1987년 2월에는 소련 역사에서 “빈 곳”을 채울 것을 약속하는 등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재천명하였다.*23)
그리고는 1987년 11월 초, 10월 혁명 70주년을 맞이하여 고르바쵸프는 스딸린 하에서 억압을 받은 “수천 명”의 당원들을 비롯한 소련 국민들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정치국 하에 이미 구성되어 활동 중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것은 진실에 전혀 접근하지 않는 엄청난 과소평가였지만 흐루시쵸프 이래 소련 지도자가 처음으로 국가 테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언으로서 국가 폭력의 공개적 인정만으로도 보수파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고르바쵸프는 분명히 실제 희생자가 최소한 수백만 명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전면적인 사실의 폭로가 가져올 혼란과 그 결과 발생할지도 모를, 여하튼 자신의 개혁 도구였던 당을 향한 역풍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과거 청산의 속도 조절을 원하였다. 그의 연설문은 숙청 외에도 집단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 등을 시인하였지만, 급속도의 산업화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부하린을 비난하고, 또 뜨로쯔끼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고르바쵸프는 과거 청산 문제를 자신이 아니라 사회가 일정하게 떠맡음으로써 개인적 부담을 덜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24)
하지만 이미 글라스노스찌로 일정 정도 언론의 자유를 맛본 소련 사회는 고르바쵸프가 스딸린 테러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자, 흐루시쵸프 하에서 과거 청산과 관련하여 아주 제한된 정도로만 행동한 것과는 달리, 고르바쵸프의 우려를 살 정도로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억압된 체제 하에서나마 1970년대와 1980년 대 초에 소련 사회에서 어느 정도 흐름을 형성하고 있던 반체제 운동을 비롯한 비공식적 운동이 고르바쵸프의 집권을 계기로 훨씬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었다. 이제 과거 청산의 동력은 고르바쵸프를 비롯한 정치권 내의 개혁 세력이라기보다 소련 사회로부터 훨씬 더 강하게 나왔다.
과거청산에 대한 소련 사회의 가장 조직적인 요구는 고르바쵸프의 10월 혁명 70주년 기념 연설이 있기 전인 1987년 8월에 11명으로 이루어진 메모리알(Мемориал)이라는 단체가 스딸린 테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모스끄바 거리에서 서명 운동을 벌이면서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1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3만 명의 서명을 받는 데 성공하였고, 조직의 목표를 기념비와 함께 테러 희생자들에 관한 자료를 비치한 문서고와 박물관 그리고 회의실 및 도서관을 포함하는 연구 센터를 건립하는 것으로 확장하였다. 하지만 고르바쵸프 하의 정부는 이 단체의 지나친 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들의 활동을 방해하였는데,7) 그것은 이들이 무엇보다도 스딸린 테러라는 공산당의 과거 죄악을 철저히 청산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당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였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당국의 방해에도, 메모리알은 구 KGB 앞의 제르쥔스끼 광장에 악명 높은 수용소가 있던 한 섬에서 바위를 가져와 “전체주의 체제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기념비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조직은 또한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인권 센터가 들어선 연구 및 정보 센터를 모스끄바에 건립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메모리알은 1988년 11월에 스딸린 테러의 규모와 잔혹성을 일깨우기 위해 “양심 주간”을 조직하고, 희생자들의 가족이 희생자들의 사진을 내걸 수 있는 “양심의 벽”을 설치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단체는 희생자들의 무덤을 보존한다든지, 테러와 관련된 각종 문서를 수집한다든지 하면서*25) 지금까지도 테러의 진상규명에 헌신하고 있다.
한편 테러와 관련된 잇단 새로운 폭로들과 함께 1987년부터 부하린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복권되고 또 수 만 명의 테러 희생자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발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반인들의 복권 요구도 거세어졌다. 처음에 당국은 복권 요구가 문서로 구체적으로 제기되면 하나하나 조사에 들어가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이 때문에 복권 과정이 지체될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이 복권 신청자들의 원성을 사게 되자, 정치국은 1988년과 1989년에 복권 업무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법령들을 잇달아 공포함으로써 대규모 복권의 길을 열게 되었다. 1988년의 법령은 지역 KGB와 검찰관은 복권 신청이 공식적으로 접수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발생한 모든 사건을 재심하라는 것이었다. 정치국은 또한 지역 당 조직들에게 복권 청원에 대한 심의를 빨리 진행하라는 요구도 하였다. 1989년의 두 번째 법령은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뜨로이까를 비롯한 초법적 기관들에 의해 내려진 모든 판결은 무효이며, 그것들에 의해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무조건 복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법령들 덕분에 KGB와 검찰청은 단기간 내에 많은 사건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복권 절차의 간소화에도 불구하고 테러 희생자 측으로부터의 불만은 계속되었다. 탈꿀라끄화로 희생된 농민들과 종교적 이유로 박해 받은 사람, 그리고 반체제 활동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도 억압의 희생자로서 복권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990년 8월에 고르바쵸프는 강제적 집단화의 결과 체포되거나 추방된 농민들의 권리도 완벽하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브레쥬네프 하에서 반체제 활동으로 외국으로 추방된 인사들에게도 시민권을 회복시켜 주었다. 한편 1989년과 1990년에는 또 다른 법령들로 2차 대전 동안에 “협력” 혐의로 추방된 개인들과 인종들도 복권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이들과는 별도로 소연방 산하 러시아 공화국의 옐찐 정부는 1991년 10월 공화국 차원에서 “정치적 억압의 희생자들의 복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26) 해체되어 가고 있던 소연방 차원의 각종 법률들을 실질적으로 대신하였다. 다른 산하 공화국들도 1988년 발뜨 3국부터 시작하여 러시아 공화국의 법률과 유사한 법률들을 차례대로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고르바쵸프가 1991년 12월 그 해 여름에 발생한 보수파의 쿠데타의 여파로 마침내 완전히 실각하기 전에 과거청산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인 사법적 복권을 위한 법적인 준비는 거의 끝났고 이에 따라 많은 희생자들이 대규모로 복권되기 시작하였다.8) 그렇다면 처음에는 자신의 주도로, 다음에는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과거 청산에 나섰던 고르바쵸프는 왜 소련 국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는가? 물론 고르바쵸프의 실각은 정치적․경제적 개혁의 부진과 소수 민족들의 독립 등 다양한 원인들이 있다. 하지만 과거를 처리하는 문제 또한 그의 몰락에 일조한 것도 지적되어야 한다.
사실 고르바쵸프에게 과거청산은 흐루시쵸프와 마찬가지로 양날의 칼날이었다. 그들은 권좌에 올랐을 때 스딸린과 브레쥬네프 하에서 오랫동안 피폐해지고 경직된 체제를 각각 개혁하지 않고서는 체제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개혁의 원동력을 확보하는 방법의 하나로 스딸린 테러에 대한 비난 등 과거 청산에 나섰으나 그것이 지나치게 철저하게 진행될 경우, 오히려 당과 국가 기구 등 전 사회에 포진한 보수파를 향했던 과거 청산의 칼날이 국가 테러를 낳은 체제의 구조로부터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두 사람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수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하여 흐루시쵸프는 스딸린과 베리야 외에는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한편으로 논의 자체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공개적 토론이 없는 과거청산에 나섰으나, 권력에 그대로 머물 수 있었던 보수파에 의해 결국 제거되고 말았다. 반면 고르바쵸프는 좀더 철저한 과거청산을 통해 개혁을 더욱 진전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는 과거청산에 대한 논의가 당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되기를 원하였으나 그 논의가 당과 국가 자체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그것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희생자들의 수를 축소하고 메모리알의 활동을 방해하는 등, 완벽한 과거청산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바쵸프의 바람과는 달리 일단 수용소와 테러 문제가 공개적 논의에 붙여지자 이 주제는 더 이상 그의 통제 하에 있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실들의 발굴과 끝없는 폭로가 이어졌으며, 테러는 스딸린 개인의 변덕이 아니라 당과 국가에 의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되었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당연히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쇄신을 통해 변화를 원했던 고르바쵸프 정부의 정당성 자체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사회주의 체제 자체의 종식을 원했던 옐찐(Б. Н. Ельцин)에 의해 타도되었다.
고르바쵸프의 과거청산은 사법적 복권 외의 다른 측면에서 볼 때에도 그렇게 철저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는 흐루시쵸프 하에서 제정되었던 희생자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 규정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간의 연금과 체포 당시 받던 임금 기준으로 두 달분의 임금만을 손에 쥐었으며, 그것도 때마침 실시된 화폐 개혁과 그에 수반된 인플레이션으로 거의 가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당연히 많은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여 수령을 거부하였으며, 메모리알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희생자들의 지극히 낮은 생활수준을 타개하기 위해 보상을 현실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보상에 관한 규정을 바꾼 것은 옐찐 하의 러시아 정부가 들어선 뒤였다. 즉 1992년 3월에 러시아 정부는 복권자들에게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는 것 외에도 당시 법적 월 최저 임금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금액인 월 180루블을 수감 기간만큼 지불하되 최고 25,000루블을 넘지 않게 하는 법령을 공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복권자들은 무료 의료와 버스표도 받았다.*27)
끝으로 흐루시쵸프 때도 그랬지만, 고르바쵸프의 소련 정부는 테러를 행한 가해자에 대해서는 어떤 적극적인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는 흐루시쵸프와 마찬가지로 스딸린의 오류만 지적했을 뿐 그것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전혀 묻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지시를 쫓아 테러를 행한 하수인들에 대한 조사와 그에 따른 책임의 부과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소련 사회의 일각에서 스딸린이나 소련 공산당 자체를 법정에 세우자는 요구가 있었지만, 고르바쵸프 정부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88년 레닌그라드에서 열렸던 수천 명 규모의 한 시민 집회가 스딸린을 재판에 부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나, 정부로부터 어떤 긍정적인 반응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르바쵸프 이후
지금까지 필자는 스딸린 시대에 국가에 의해 어떤 범죄가 저질러졌는지, 그리고 이를 청산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어떤 노력이 기울여져왔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테러는 1920년대 말부터 스딸린이 사망한 1950년대 초까지 내내 대체로 초기 혁명 시대의 구 볼셰비끼로부터 중․상급 당원, 국가 관료, 지식인, 기업의 경영진, 일부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특정 인종 등을 대상으로 광범하게 행해졌다. 그들은 “인민의 적”이나 “계급 적”이라는 명칭 하에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수용소 군도”에서 장기간 강제 노동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딸린의 죽음은 한 미국인 역사가가 말했듯이, “딸스딸린화를 향한 최초의 행위”*28)였다. “집단 지도 체제”를 거쳐 마침내 스딸린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르게 된 흐루시쵸프는 스딸린 시대의 국가 폭력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가히 역사적이라 할 만한 행동에 나섰다. 그는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처음으로 과감히 불법적 테러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그 총책임자로 스딸린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하지만 그의 스딸린 비난은 “보편적 인권” 등의 추상적 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 국민들로부터의 도덕적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고르바쵸프의 과거청산 노력도 기본적으로 이런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흐루시쵸프와 마찬가지로 과거 청산에 대한 논의를 체제 개혁을 위한 중요한 지렛대로 삼으려 하였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역사는 이런 목적의 과거 청산에서 그 균형을 잡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었다. “글라스노스찌 없는” 과거청산을 원했던 흐루시쵸프는 어떤 도덕적 타격도 공개적으로 입지 않은 다른 공산당 보수파 지도자들에 의해 결국 제거되었다. “글라스노스찌 있는” 과거청산을 원했던 고르바쵸프는 결국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과거청산 논의의 물결에 휩쓸려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소연방 체제 자체의 종언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르바쵸프의 퇴장과 함께 과거청산 논의의 열기도 재빨리 식어버렸다. 마치 그 동안 소련 사회에서 벌어졌던 스딸린 체제에 대한 광범한 논의가 고르바쵸프의 퇴임과 소연방의 붕괴에 목표를 두고 있었기라도 하였듯이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논의는 별도로 하고서라도 과거 청산 자체도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제일 큰 문제는 가해자의 책임 문제가 정부 차원이든 민간 차원이든 본격적으로 제기된 적이 없다는 것이고, 고르바쵸프 퇴임 이후 혼란스러웠던 옐찐 시대를 거치고 뿌찐(В. В. Путин) 집권 2기 2년차를 맞는 지금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정부든 사회든 모두가 희생자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 그리고 얼마간의 재정적 지원에 만족함에 따라 문제의 심각성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오히려 고르바쵸프 이후의 사회적 분위기는 테러의 총책임자로서 대참극의 한복판에 있던 스딸린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라도 다시 러시아 국민의 영웅으로서 급속히 대두할 수 있는 여지마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점에서 스딸린 사망 45주년을 맞이하여 1998년에 러시아의 한 유력 잡지가 수행한 여론조사는 대단히 시사적이다. 러시아 연방 전역에 거주하는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여론 조사에 따르면, 스딸린의 활동을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응답자의 34%에 달한 반면,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똑같이 34%에 달하였다. 10년 전인 1988년의 여론조사 때, “긍정적”이라고 답변한 사람은 12%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이 여론 조사는 훨씬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당시의 대통령이던 옐찐보다 스딸린을 더 신뢰함도 지적하였다.*29) 그리고 모스끄바의 몇몇 명문 학교를 대상으로 1990년대 중반에 수행된 한 교사의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학생의 겨우 34%만이 굴라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뜻을 알고 있었다. 1992년에 그 비율은 82%에 이르렀었다.*30)
이처럼 스딸린 테러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그에 따른 과거청산에 대한 열기가 왜 식어버렸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러시아 의회에서 구 공산당 세력이 여전히 굳건히 존재할 만큼 스딸린과 그의 체제에 대한 향수가 러시아 사회 내에 강력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마 한 원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유령은 언제라도 러시아인들의 앞에 출몰하여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가족과 친지, 그리고 이웃의 목숨을 무수히 앗아간 테러마저도 사회주의 국가의 생존에 꼭 필요했던 일로서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당분간은 과거청산 문제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보였던 것과 같은 열기와 관심을 끌면서 러시아 사회에 다시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일은 없을 듯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러시아의 저명한 한 인권 활동가가 이야기했듯이 스딸린 체제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구세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31)
후주
*1) Robert Conquest, The Great Terror: A Reassess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p.310.
*2) Galina Mikhailovna Ivanova, Labor Camp Socialism: The Gulag in the Soviet Totalitarian System, M. E. Sharp, 2000, p.13.
*3) V. P. 드미트렌코 외 지음, 《다시 쓰는 소련 현대사》, 열린 책들, 1993, 236-237쪽.
*4) Alexander N. Yakovlev, A Century of Violence in Soviet Russia, Yale University Press, 2002, p. 94.
*5) V. P. 드미트렌코 외 지음, 《다시 쓰는 소련 현대사》, 240쪽.
*6) 샤흐띄 사건에 대해서는 Kendall E. Bailes, Technology and Society under Lenin and Society. Origins of the Soviet Technical Intelligentsia, 1917-1941б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8, 제3장 참조.
*7) 1930년대 숙청 및 전시재판에 관해서는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사회평론, 2004, 397-413쪽 참조.
*8)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403쪽과 412쪽.
*9) 졸고, 〈“우리 안의 스딸린”: 스딸린 테러와 러시아인들의 기억〉, 《러시아 연구》제14권 제2호, 2004, 322-326쪽.
*10) Сhris Ward, Stalin’s Russia, Edward Arnold, 1993, pp.159-160. R. Conquest, The Nation Killers: The Soviet Deportation of Nationalities, Macmillan, 1970; Н. Ф. Бугай, “К вопросу о депортации народов СССР в 30-40-х годах,” История СССР, № 6, 1989도 참조.
*11) Сhris Ward, Stalin’s Russia, p.166;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468-469쪽; Elena Zubkova, Russia after the War: Hopes, Illusions, and Disappointments, 1945-1957, M. E. Sharpe, 1998, pp.134-135.
*12) 졸고, 〈“우리 안의 스딸린”〉, 325-328쪽; Edward Bacon, The Gulag at War: Stalin’s Forced Labour System in the Light of the Archives,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4, p.10; Nanci Adler, “In Search of Identity: The Collapsed Soviet Union and the Recreation of Russia,” in A. B. de Brito et al, eds., The Politics of Memory: Transitional Justice in Democratizing Societies,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p.280.
*13) Nanci Adler, “In Search of Identity,” p.281; Elena Zubkova, Russia after the War, pp.165-166; 박상철,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 동기와 배경을 중심으로〉, 《러시아연구》 제14권 제1호, 2004, 222쪽.
*14) Nanci Adler, “In Search of Identity,” p.281; Elena Zubkova, Russia after the War, p.167.
*15) Nikita S. Khrushchev, Khrushchev Remembers, Little, Brown and Co., 1970, pp.342-343.
*16) 박상철,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 220-221쪽.
*17) Namci Adler, The Gulag Survivor: Beyond the Soviet System , Transaction Publishers, 2002, p.87.
*18) Stephen G. Wheatcroft, “Glasnost’ and Rehabilitations,” in Takayuki Ito, ed., Facing Up to the Past: Soviet Historiography under Perestroika, Slavic Research Center, Hokkaido University, 1989, pp.200-201.
*19) Ю. В. Аксютин и О. В. Волобуев, XX Създ КПСС: Новации и догмы, Москва, 1991, с.186.
*20) Stephen G. Wheatcroft, “Glasnost’ and Rehabilitations,” p.201.
*21) Kathleen E. Smith, Remembering Stalin’s Victims, pp.136-138.
*22) Stephen G. Wheatcroft, “Glasnost’ and Rehabilitations,” p.218. 흐루시쵸프 실각 후 초기 몇 년 동안의 복권 현황에 대해서는 Jane P. Shapiro, “Rehabilitation Policy under the Post-Khrushchev Leadership,” Soviet Studies 20-4, 1969, pp.495-498 참조. 또 1980년대 초까지의 복권 현황을 위해서는 А. Артизов и др., сост., Реабилитация: Как это было. Фебраль 1956 - начало 80-х годов. Москва, 2003, 제4부 참조.
*23)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619-630쪽.
*24) R. W. Davies, Soviet History in the Gorbachev Revolu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9, pp.135-136.
*25) Richard Sakwa, Gorbachev and His Reforms, 1985-1990, Philip Allan, 1990, p.98.
*26) А. Артизов и др., сост., Реабилитация: Как это было. Середина 80-х годов - 1991, Москва, 2004, сс.600-605.
*27) Н. Ф. Бугайи др, сост., Реабилитация народов России. Сборник документов, Москва, 2000, сс.108-111. 고르바쵸프 하에서의 보상보다 훨씬 많아진 이 보상은 1998년 2월 러시아 의회의 의해 반으로 줄어들었다. Nanci Adler, “In Search of Identity,” p.292.
*28) Stephen F. Cohen, Rethinking the Soviet Experience: Politics and History since 1917,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p.103.
*29) 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 Март, 1988, № 10, с.3.
*30) R. W. Davies, Soviet History in the Yeltsin Era, Macmillan, 1997, p.116.
*31) 졸고, 〈“우리 안의 스딸린”〉, 330쪽.
2) 그러나 미국인 역사가 게티는 스딸린이 끼로프를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연루 가능성을 일축한다. J. Arch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 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p.207-210을 보라. 3) 뜨로이까는 말 그대로 “3인 회의”로서 원래 지구 당 위원회 서기, 지구 집행 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지구 비밀경찰 총수로 이루어졌으나, 나중에는 비밀경찰 요원들로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4) 흐루시쵸프가 우끄라이나의 당수가 되는 과정에서 테러에 연루된 사실에 대해서는 В. П. Наумав, “Н. С. Хрущев и реабилитация жертв массовых ролитических репрессий,”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 3, 1997, c. 23을 보라. 5) 예를 들어 몰로또프의 부인과 까가노비취의 형제마저 숙청되어 굴라그에 수감된 것은 이러한 위협이 매우 현실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6) Stephen G. Wheatcroft, “Glasnost’ and Rehabilitations,” p.203. 흐루시쵸프의 비밀 연설에 따르면 20차 대회 전까지 복권된 사람은 7,679명이었다. 하지만 신청을 한 모든 사람들이 복권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인 부하린, 지노비예프, 까메네프는 물론이고, 많은 일반인들이 KGB나 당 및 국가 관료들의 방해로 복권이 좌절되었다. Kathleen E. Smith, Remembering Stalin’s Victims: Popular Memory and the End of the USSR, Cornell University Press, 1996, p.133과 136. 1956년부터 흐루시쵸프가 몰락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복권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소련의 저명한 반체제 인사들이었던 메드베제프 형제는 사후 복권을 포함하여 500만-600만 명으로 추산한다. Roy A. Medvedev and Zhores A. Medvedev, Khrushchev: The Years in Power, W. W. Norton & Co., 1978, p.20. 7) Nanci Adler, Victims of Soviet Terror: The Story of the Memorial Movement (Praeger, 1993), p.46과 56-57. 메모리알은 그 후 전국적인 연계망을 가진 인권 단체로 성장하여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단체의 웹사이트
www.memo.ru를 볼 것.
8) 2001년 말까지 약 450만 명의 희생자들을 복권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The Times, 2002년 3월 2일.
<출처 : 역사와기억 홈페이지 http://past.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