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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경제
제8장 북송의 쇠망사, 화려함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
은진씨(김은진)
▣ 북송, 인류 역사상 두 번째 화폐 문명을 꽃피운 왕조
-> 서기 960년, 북송 건국
- 로마제국; 무력과 정복의 문화 / 북송; 생산성 향상과 평화적 발전
-> 화폐경제를 이루게 된 원인: 획기적인 생산성 혁명
- 에너지로 석탄 사용 시작/제철의 대규모 채굴>제철업, 제강업 발달>제련기술발달(재질별 상품별 분업화)
- 농기구 생산기술 혁명: 농업 생산성 증가로 인구 유입>도시화; 많을 땐 1억명(481p~482p, 487p)
-> 상품시장의 번영>사유화>화폐경제의 부상
- 4대 시장(북방시장, 동남 시장, 관롱 시장, 전촉시장) 발달
> 세수와 상품은 도심으로, 화폐는 도심에서 각 지역으로 역류
- 운송 수단인 조선업 발달, 풍요 속에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세 가지 발명.
▶ 북송의 경제 머신은 물처럼 끊임없이 유통되는 ‘화폐’였다.
▣유동성 과잉과 인플레이션
-> 북송의 전성기; 경제 규모는 당나라의 4배, 통화 공급량은 19배
- 인플레이션 초래; 자산 가격 팽창(소수에게만 집중)
- 금융 자산(유가증권;염인, 염초, 다인 등) 가격도 폭등(490p: <동경몽화록>)
* 북송의 은행가들은 부자가 아니라 ‘슈퍼 리치’이다.
▣ 은행가의 발흥
-> 처음 ‘태환포’에서 은행가로 변신
- 화폐 태환; 지역마다 금, 은, 동, 철, 종이 재질의 다른 화폐 유통 이를 교환하는 일
- 금, 은 화폐를 선호, ‘단기 차익 매매 ’사업; 지금의 ‘마켓메이커’ 역할
-> 유동성 공급 역할 담당
- 정부는 상인들로 전장에 군량과 마초를 조달 함 >현지 관청에서 ‘교인’ 발행
>수도의 관청에 ‘교인’ 제출 >‘염차 어음’ 교부; 전매 수익률 100~300%.(493p)
- 은행가의 로비로 도시 은행가를 담보인으로 세워야만 ‘비인’을 받을 수 있게 됐다.
- 염차는 지정된 곳에서만 거래 >상인은 은행가의 유도로 은행가에게 ‘할인 양도’
>‘태환포’를 ‘금은교인태환포’라 바꾸고 어음 거래를 주로 함 >할인은 은행가가 결정
(20~30%) >은행가들은 고리대금업과 전당포 겸업 >시장통제력 행사
- 은행가들은 어음을 매입 전에 융자 비용을 높이는 방법으로 금융긴축 조성 >시장에
어음을 대량 매각 >가격 하락 유도 >조정에 위화감 조성하고 어음을 헐값에 매수 했다.
▶ 화폐경제 시대에는 화폐를 지배하는 사람이 시장을 지배한다.(로마 ‘징세 대행업자’)
▣금권과 정권의 투쟁
-> 은행가들은 ‘대염상’과 ‘대차상’으로 성장, 세력가가 됨, 거금으로 조정 관리들을 매수
-> 1023년, 북송 정부는 관련 업무를 재정리하기로 결심했다.
- ‘교인 제도’ 폐지, ‘견전법’ 도입; 중앙 재정에서 보조금 지급 형태로 바뀐 것.
>재정 절약이 1년 화폐 발행량(560만 관)을 초과 >기득권 반발로 3년 만에 폐지
-> 1036년, 인종은 다시 ‘다법’ 개혁(북송 말년까지 입법과 폐지를 거듭)
- ‘범상’이란 인물이 염법 개혁 주도 >‘염인(현금지급)’으로 대체/‘독염원’(감독기구)설립
>소금가격 안정 >폭리 원천봉쇄 >금융 거물들의 돈벌이 막힘 >‘금권’과 ‘정권’의 싸움.
-> 후기, 정부는 재정위기로 대량의 염초 발행(가격 폭락)
- ‘채경’의 등장; 금융 거물들과 손잡고 상인들을 착취 >잦은 신권(교체수수료 40%) >
‘신권과 구권 같이 사용해야만’ 소금과 차를 확보할 수 있었다.
- 중간 수수료는 소금 생산자와 차 재배농 및 소비자의 최종적으로 전가
▶ 금융 거물, 관료계급, 차 판매상과 소금 판매상들은 하나가 돼 ‘이익공동체’를 형성.
이로써 대부호 계층 탄생, 사회에 제도적 탐욕도 만들어 진다.
▣ 6~7%의 부자들이 60~70%의 토지를 점유하다
-> 심각한 빈부 격차>조세 불균형 현상>제국의 몰락
-> 1차 토지 겸병; 진종(998년)과 인종 통치 연간에 일어남
- 985년 ‘염차 어음’제도 시행; ‘교인’제도 >은행가들이 싹쓸이) >토지 겸병을 위한 종
잣돈이 됨 >정부는 토지 겸병에 ‘자유방임’ 정책; 503p,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
- ‘고관 귀족’이 비옥한 땅을 점유 시작; 공유지, 국가 소유의 목장, 학전, 공공 삼림,
사찰의 복전 >농민이 흉년에 고리로 담보했던 땅을 빼앗고 헐값에 매수(-홍수유발)
▶ 거액의 부를 축적한 은행가와 대상인, 대지주도 토지 겸병에 가담. 대부호 집단은 ‘대전
주’로 탈바꿈했다. 총인구의 6~7%가 국가 토지의 60~70%를 점유했다.
▣ 북송 드림의 파멸
-> 1067년, 황제로 등극한 신종; 빈부 격차, 재정 고갈, 경제 위축, 조세 불균형의 심각.
-> 506p; 북송 시대의 5인 기준 1년 생활비는 약 2,100~2,700문(506p)
- 관청은 '절변법‘으로 기본 세금을 올렸다; 곡물 대신 돈>밀과 보리의 가격을 100문으
로 정하고 비용을 덧붙여 140문을 거둠>소금도 할당함(시가 30문>100문에)
※ 507p 10줄-“밀을 현금으로 환산해 시가 30문에 불과한 소금은 350문으로 부풀려졌다.”
- 중앙 정부는 지방 관청에 군량미 할당>군량미 1석당 300문에 수매>300문 중 3분에
1만 현금 지급>4분의 3은 차 어음인 ‘다인’ 지급(환산가 1석당 112문)>농민들은 상
인들에게 다인을 헐값에 매도>결국 농민은 식량 1석을 100문에 판 셈이>부역과 각
잡세 성행>이유는 토지 겸병; 대부호들은 15~20무에서 1무에 해당하는 세금만 냄.
- <치평회계록>에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열의 일곱에 토지세가 부과되지 않았다“
-> 몸집이 커진 정부는 막대한 재정수입이 필요했다.
- 관료 3,000~5,000명에서 2만 명으로 늘고 군인은 22만 명에서 125만 명(백전불승)
- 군비는 4,800만 관으로 조정 재정수입의 70~80%(적자 연 300만 관)
- 경제 규모는 성당의 4배였으나 상업세 규모는 당나라의 10배를 초과.
- 상업세, 재정수입(1억 관)의 56% >높은 상업세 때문에 상품 유통이 정체된다.
-> 중산층 농민들이 토호의 소작농으로 전락 한다; 고리대금(100~300%) 대신 빼앗김
▶ 토지 겸병, 세수 불균형, 화폐 가치 하락의 삼중 압력을 견디지 못한 북송 농민들에게
노동에 대한 적극성 잃게 만들었다.: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심장’ 기능 상실
▣엎친 데 덮친 격인 ‘돈가뭄’ 사태
화폐 가치 하락으로 대부호들은 자산 가치 보존 및 증식을 위해 실물 자산으로 전환했다. 그러자 유동량 감소
로 ‘돈가뭄’ 사태가 터졌다.
-> 조정은 전비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통화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서하와 세 차례의 전쟁
- ‘당십전’ 발행; 표준 동전은 ‘소평전’이었다. >사이즈 컸으나 동 함량은 10분에 1 >상대적으로 소평전
사재기 시작 >유동성 감소 >불법 주전 출현 >‘당오전’ 발행을 ‘당삼전’ 발행 >여전히 불법 주전 성행
- 전쟁이 일단락 >‘소평전’이 정상 유통 >돈가뭄 현상은 다소 완화됐다.
-> 재정상태 악화로 조정은 ‘당십전’ 재발행 >불법 주전 성행 >인플레이션 악화 >당삼전을 당이전으로 평가
절하 발행 >화폐 시스템은 혼란 ▶ ‘돈가뭄’ 현상 심화
->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전제조건은 법적으로 악화와 양화의 가치가 동등할 때이다.
- 악화는 국가 권력을 등에 업어야만 양화를 국축할 수 있다.
- 양화는 악화에 의해 유통시장에서 밀려난 뒤 양화를 필요로 하는 곳에 집중된다.
- 대부호들은 양화를 녹여 청동기를 만들었다. 청동은 자산 가치 팽창 기대로 가격이 상승하기도 했다.
-> 양화는 외국으로 대거 유출됐다; 서하, 요는 자국화폐 없어도 될 정도, 일본과 베트남에서도 환영.
- ‘전금법’ 시행; 사형 등으로 동전의 유출과 폐기를 막으려 했으나 효과 못 봤음.
-> 농민에게 닥친 이중고의 악순환; ‘토지 겸병’과 ‘돈가뭄’
- 소전 가치가 주조 원가 이하로 떨어지면서 공급량은 빠르게 감소, 시장에서 소평전이 빠르게 사라짐
- 세금을 현금 납부 할 돈 가뭄과 농산물가 하락의 이중고
-> 자산 각격이 폭등하자 토지 겸병은 더욱 뜨거워지고 동시에 ‘돈가뭄 사태’가 지속,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
▣ 왕안석 개혁의 실패 원인
1069년, 왕안석은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정치개혁을 출범시켰다.
왕안석 경제사상의 핵심은 ‘토지 경병’ 억제이다. 세수를 확보하고 지출을 줄이는 것
-> ‘농민 부담 경감’
- 청묘법; 관청에서 ‘저금리(20~30%)’로 대부(대금업자는 100~300%)
- 면역법; 각 가구의 재산 상황, 토지 면적, 노동력 인구에 따라 노역의 양을 정하고 복역을 원치 않을
경우 노역 대신 ‘면역전’을 납부하도록 허용한 법
; 부역, 관료와 부자들이 납세와 복역 의무를 져버려 고스란히 일반 농민에게 지워졌다는 사실
; ‘면역법’은 노역 분배의 틀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토지를 많이 보유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돈을 내야 했다.(절강의 한 부자는 600관의 면역전을 냈다는 소식이...)
- 방전균세법; 전국의 토지를 다시 측량하여 각 가구가 점유한 토지 면적과 비옥도에 따라 등급별로 토지
세를 책정하는 것(북방 5성은 전국 영토의 20%에 불과했으나 실측 결과 전국의 54%였다)
- 이밖에 ‘균수법’, ‘시역법’; 상업분야의 ‘겸병’ 현상을 억제, 금융거물과 갑부들의 독점을 막고자 한 법
금군, 상군 45만 명으로 상비군 79만으로 감웜, 군비 3분의 1로 축소
- 전국의 주와 현을 새로 합병, 개편; 주, 군, 감의 기구 38개 통폐합하고 127개 현을 없앴다.
-> 신법이 시행된 5년은 재정이 흑자를 기록하고 토지 겸병 줄었으며 농가의 세수 부담이 대폭 완화되었다.
-> 신법이 이익공동체(관료층, 부유층)의 실제 이익을 침해하자 제도적 탐욕 집단도 강한 반격을 개시했다.
-> 신종; 욕심만 많고 재능과 결단력이 부족한 황제
- 태왕태후와 태후까지 나서서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자, 황위가 흔들릴 것이 두려워 신법 폐지 결심.
- 대부호들의 권력을 제약할 수 있는 마지막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개혁이 성공한 사례가 드문 이유
는 개혁파의 힘이 이미 제도적으로 굳어진 탐욕을 깨뜨리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근원은 소수의 부유층이 아닌 조야 내외의 다양한 이익집단이 함께 얽혀 있는 ‘제도적 탐욕‘이었기 때문이다.
▣ 탐욕의 마지막 광풍
후세 사람들은 채경을 ‘북송 6적’ 중 단연 으뜸으로 꼽는다.
- 사마광이 재상이 된 후 그는 ‘차역법’을 5일 이내로 부활시키도록 명령했다.
- 지방관들이 기일 내에 임무를 완수 못 했으나 신법당의 대표주자인 채경은 완수한다.
- 구법당의 신하가 됐다, 사마광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채경의 등용을 보류한다
- 채경은 ‘개혁’의 명분을 내세우고 수단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웠다.
; 역사적으로 소인배 중에 뛰어난 재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이들이 재능은
국가와 백성을 해치는 데 악용됐다.
-> 채경은 남보다 기회를 민첩하게 포착하고 예술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
새로 즉위한 휘종이 ‘서화의 대가’로 불릴 만큼 예술적 소양이 뛰어나다는 소식을 접한
채경은 항주에서 각종 진기한 서화 작품과 기석, 보물들을 수집해뒀다가 휘종의 측근 동
관이 남하했을 때 아낌없이 바쳤다. 밤낮으로 그를 보필하고 온갖 감언이설로 비위를 맞
췄다. 동관은 채경이 대단히 맘에 들었다. 서화 작품을 지접 황제에게 진상하도록 승낙
했다. 채경이 진상한 서화 작품이 흡족했던 휘종은 얼마 후 채경을 수도로 불러들여 관
직을 하사하고 서화 예술을 토론하는 지우가 됐다.
-> 드디어 조정 대권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 조정에는 ‘채경 집단’이 형성됐다. 휘종은 이들 무리의 든든한 배경이 돼주었다.
- 휘종의 환심을 사기위해 국가 재정으로 대대적으로 궁정과 원림, 도교 사원을 건설.
- 백성을 강제로 동원해 빼어난 화석을 수도 개봉으로 옮겨왔다.
- 연복궁을 짓고 간악(위종 비원에 만든 정원)을 만드는 데만 수만 냥을 허비했다.
- 정치적 업적을 위해 서북 지역에 전쟁을 일으켰고 북방에서는 금과 손잡고 요나라를
공격을 명분으로 적을 집안에 끌어들이는 화마저 자초했다.
-> 자금이 필요한 채졍 집단은 왕산악의 ‘계승자’를 자처하면서 신법을 극단적으로 시행.
- 염법과 다법을 개혁해 지방 관청의 염차 전매 수익을 정부 중앙 재정에 집중시켰다.
- 지방 관청은 채경의 ‘재정 관리’ 지표를 달성하기 위해 혹독하게 백성을 착취했다.
- 수탈이 심해지자 반란이 일어났다
- ‘서성소’(조정이 국유지를 관리하기 위한 기구)를 중심으로 ‘2차 토지 겸병’ 붐을
일으켰다; 중국 봉건 역사상, 일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지 겸병이기도 했다.
- 땅문서를 거둬들여(100년 전 것도) 땅의 주인이었다는 원시 계약서를 추적했다.
- 계약서가 없는 땅은 모두 몰수해 국유화
-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강제로 서성소와 소작 계약서 체결하고 소작농으로 전락
- 비옥한 전답은 현지 관청에 땅문서가 위조된 것으로 허위 신고케 해서 갈취
- 백성의 원성이 일자 주모자들을 잡아들여 죄를 물었다.
- 하남 확신 일대에서만 양민 수천 명을 잡아들여 곤장으로 살해(3.4만 헥타르 겸병)
- “천하이 재산은 모두 채경과 왕보의 손에 들어갔다“는 말이 떠돌았다.
-> 북송은 서북쪽에서 서하와 싸우고 북쪽에서 요나라와 대치했다.
- 남쪽에서 방랍이 난을 일으키고 동쪽에서 송강이 반기를 들었다.
- 국고는 텅텅 비었다.
- 채경 집단은 화폐 가치를 대폭 절하해 천하의 재물을 마구잡이로 수탈했다.
- 결과 염차 어음 과잉 발행으로 가격 폭락 시켰고
- 소평전, 당이전, 당삼전, 당오전 등 가지각색의 화폐 대량 발행했으나 쓸 돈이 부족하
해지자 당십전 재발행,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악화 중에 악화인 협석전을 발행
했다.
* 화폐의 운명은 국가의 운명이다.
몰락으로 접어드는 때, 화폐는 국가의 운명을 관측하는 가장 민감한 지표가 된다.
화폐 가치의 등락은 빈부 격차, 부의 겸병, 세수 불균형 및 사회 모순의 수위를 간접적으
로 보여준다.
=>금속화폐 대신 지폐를 유통시켜 화폐 시스템을 구제할 수 있을까?
▣ 세계 최초의 지폐, 교자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했던 성도는 30여 년의 평화로운 발전을 거쳐 다시 중국 서부의 상업 중심지로 부상했다.
-> 경제의 고속 성장에도 불구하고 무역의 발전을 가로막는 화폐 문제
- 동전이 부족한 사천 지역은 철전이 주요 지불 수단
- 비단 한 필 은 철전 2,000개 무게는 130근이다.
- 당시 관청은 동전 1개로 철전 10개, 동전 1관의 무게는 5근 철전으로 바꾸면 65근
(600그람*65=39,000)
-> 최계 최초의 지폐 ‘교자’
- 성도 지역의 상인 16명이 모여 ‘교자’ 발행, 철전을 창고에 보관하고 어음으로 거래
- 종이 어음 제작, 앞뒷면에 화폐 표시를 하고, 건물, 나무, 인물 등 동안을 그려 넣고
도장을 찍었다. ‘마크’ 즉 “붉은색과 검은색의 먹을 사이에 섞어 비밀스런 표시를 해
두었다.”
- 금액란을 비워두고 필요할 때에 기입
-> 상인 16인은 ‘교자호’라 불렸다. 즉 사천 지역의 ‘교자 은행가’인 셈이다.
- 교자호 분점 관할 내에서는 막힘없이 유통
- 현찰이 필요한 사람은 언제라도 철전으로 교환가능
- 100만 관짜리 고액 교자도 즉시 현찰 교환 됨
- 1관 당 30문의 ‘인쇄비’ 지불(약 3%의 수수료)
-> 성도 지역은 무역이 고도로 발달, 16개 교자호들은 서로 외상 거래도 잦았다.
- 매일 서로간의 채권과 채무를 상계한 후 그 차액만큼만 철전을 운송 결재했다.
거래비용 대폭 절감했다.
- 16대 교자호는 각자 철전을 보관, 화폐 준비금 역할,
오늘날의 JP모건 체이스, HSBC같은 역할, 철전 창고는 COMEX 금고 역할.
- 창고 관리자들은 매일 철전 재고와 교자 발행량을 보고 했고 교자호 우두머리들은
이를 관청에 등록했다.
- 교자는 서방에 비해 600~700년이나 앞서서 출현한 세계 최초의 지폐였다.
- 신용도는 16대 교자호가 연대보증 섰기 때문에 시용 위험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 교자는 탄생 20년이 조금 지난 후부터 ‘변질’되기 사작
- 발행권을 쥐고 있다면 몰래 교자를 몇 장 더 만들거나 금액란에 액수를 늘려 기입해
도 모를 것이 아닌가?
- 교자를 보유한 사람 중 태환하는 사람은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 교자를 증발하는 방법으로 거액의 이익을 챙겼다.
- 개별적 탐욕이 집단적 탐욕으로 변질되면 그 기세를 막기 어렵다.
- 교자호들은 하나의 이익집단을 형성해 서로를 ‘엄호’해주었다.
-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정부가 교자 발행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 정부는 말썽을 부리지 않는 한 눈감아 주었다. 목이 잘려도 멈추지 않았다.
- 교자 공급 과잉 문제가 갈수록 심각, 정보의 비대칭으로 제때 필요한 행동을 못 취함
- 시장에 의혹과 공포 심리가 확산되면서 교자 거래 비용도 수직 상승하자
교자홀로 대거 몰려가 현찰 인출을 요구했다.
- 은행가들은 문을 닫고 대응하지 않았다.
- 교자호들의 도망 및 빛 갚을 능력이 없다며 여기저기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 금융 질서가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한 성도 관청은 교자호들에게 폐업과 동시에 자산
을 매각해 빚을 갚도록 명령했다.
-> 1023년 11월, 북송건국 64주년에 황제로 등극한 인종은 익주에 ‘교자무’를 설치하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가신용 화폐를 발행했다.
▣ 멈출 줄 모르는 탐욕
잉글랜드은행은 금본위제(1694년), 북송 교자는 철 본위제
-> 사천 지역 관청이 정한 다섯 가지 규정(531p)
- 1차 발행량은 125만 6,340관, 준비금은 철전 36만 관, 준비금 비율은 28.7%였다.
- 유통은 사천으로 제한, 다른 지역에서는 동전이 주요 화폐로 유통됐다.
- 관영 교자는 관리 수준과 공신력 면에서 민간 교자를 훨씬 능가했다.
- 1069년 500문과 10관짜리 교자를 500문과 1관으로 하향 조정했다.
- 비율은 40%와 60%로 정했다.
-> 소액권은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사용됨
- 교자로 각종 세금을 납부 허용, 청묘전과 면역전을 교자로 남부 가능
- 소금, 차 및 주류 전매 비용, 상인의 출관비, 통행료, 상업세 등 유통 분야의 세금을
징수하는 데도 사용됐다.
- 사천 지역에서는 각계각층이 교자를 즐겨 사용했다.
-> 교자가 환영받았던 이유는 관청에 충분한 준비금이 비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 교자 각격이 하락하면 철전을 풀어 시중의 과잉 유동성을 흡수, 지나치게 상승하면
즉시 교자 발행량을 늘려 가격 상승세를 억제했다.
- 금본위 시대의 잉글랜드은행이 금 매매를 통해 파운드화 가치를 조절한 원리와 같다.
- 익주 교자무는 사실상 철전유통 지역에서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 1023년부터 1077년까지 54년 동안 관영 교자의 가치는 일관되게 안정적 수준 유지
- 때문에 교자만 요구하고 철전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 심지어 1관짜리 지폐를 사기 위해 철전 1관 100개를 지불하는 사람도 있었다.
; 지폐의 실제 가치가 액면가를 초과한 것이다. 대영제국 때의 파운드화, 2차 세계대
전 종식 후의 미국에서 달러화 등이 발행 담보물인 황금보다 더 인기 있었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 신용은 금보다 더 중요하다.
- 관영 교자는 1044년 처음으로 비밀리에 증발된 됐다. 1047년 과 1051년에 재차
약속을 어겼다. 이유는 서하와이 전쟁 때문이다.
- 세 차례의 전쟁에서 4만 명을 잃고 북송은 서북 변방에 급히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
하고, 대량의 군수물자를 수송했다.
- 이 때 상인에게 지급할 현금과 염초가 부족했던 조정은 성도에 있는 익주 교자무를
통해 60만 관의 지폐를 추가 발행한 다음, 섬서로 운송해 상인들에게 지급했다.
- 훗날 새 지폐를 발행할 때 이 때 발행한 지폐를 회수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 초기 증발 규모는 시장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고 물가 변동도 초래하지 않았다.
- 한 번 약속을 어기게 되면 교자 발행자에게 도덕적 해이가 나타나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탐욕만 남는다.
- 1069년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자 정부는 재정수입 증대를 위해 ‘신구 지폐 동시 유
통“ 방안을 채택했다. 퇴출해야 할 구 교자가 신 교자와 동시에 유통되면서 유동성은
2배로 증가했다.
- 1077년부터 교자 가치는 뚜렷하게 하락, 교자는 사천 지역에서만 유통됐지만 가치
하락세는 전국에서 통용된 다른 화폐의 하락세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 왕안석 개혁 실패
- 대내외 형세를 잘못 판단한 신종은 1081년과 1082년 전국의 재력을 동원해 서하를
공격했다. 여주와 영락에서 60만 군사를 잃고 막대한 군비를 지출했다.
- 3년 뒤 신종은 유명을 달리한다.
- 1086년 교자 가치는 10% 넘게 하락
- 1100년, 휘종 즉위하고 채경이 정권을 잡았다.
- 1105년 채경은 업적을 쌓기 위해 서북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 발동했다.
- 재정 고갈 위기에 채경 집단은 교자 이름을 ‘전인’으로 바꾸고 유통 범위를 전국 확
대를 꾀한다. 교자는 사천과 서북 지역에서만 유통됐다. 전인의 발행량은 2,656만 관
에 달했다. 같은 해 540만 관을 추가 발행,
- 1107년 554만 관을 증발했다. ‘신구 지폐’가 동시에 유통되면서 지폐 유통량은 교자
가 출범한 1023년 대비 40배나 급증했다. 신, 구 화폐 교환 비율은 1:4에 불과했다.
- 지폐가치가 무려 75%난 하락한 것이다.
- 이와 동시에 관청의 지폐 발행 담보물 제도도 폐지됐다.
- 지폐의 신용은 추락하고 1110년 1관짜리 지폐로 철전 100개도 바꾸기 어려웠다.
-> 1127년, 북송은 드디어 멸망했다.
▣ 맺는말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나 뒤집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 역시 다를 바 없다.
적당한 탐욕은 경제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나 지나친 탐욕은 경제를 망친다.
- 부의 분배에 불균형이 생기면 다수의 사람들은 경제 자원을 얻기 점점 어려워지면서
필연적으로 개인의 발전이 제약받고, 나아가 사회적 부의 창조 능력이 약화된다.
- 역사가 놀랄 정도로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는 것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본성이
놀랄 만큼 똑같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첫댓글 출력은 제가 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