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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깨어 있는 자가 복이 있다
新松 추천 0 조회 30 08.01.11 19: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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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 있는 자가 복이 있다 < 유백선목사 /마태복음 24:36-44 > 몽골국제대학교 ‘칭키스칸 연구소’의 교수로 있는 이용규 선교사가 미국 유학생활과 몽골에서 선교사로서 사역하는 동안 체험한 일들을 모아서 『내려놓음』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중동지역학 및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그는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미래가 보장되는 엘리트입니다. 가족들도 그에게 인간적인 기대를 갖고 있었죠. 그런데 그는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하기 위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몽골에 갔답니다. 지금은 몽골국제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울란바토르 이레교회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섬기고 있으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삶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내 욕심, 내 생각, 내 소유를 주장합니다. 하나라도 더 내 것을 챙기려고 골몰하죠. 영적으로 어린 사람은 내려놓으면 빼앗긴다고 생각해요. 세상 진리를 배우고, 땅의 것들로 인생을 채우려는 사람들, 믿음의 내공이 약한 사람들은 내려놓는 것을 손해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내려놓음’은 나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삶의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려놓으라’ 하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는 내가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하게 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다윗이 이런 말을 했어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리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면 그 길이 형통하게 될 것이다.”(시 37:5-7) 몽골 이레교회에서 베르흐 지역에 예배처소를 개척하고 그곳에 제가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있는 데, 벌러르 자매가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인 채로 예배당에 들어왔어요. 벌러르는 농아(聾啞)였는데, 몇 달 전에 기도로 치유를 받아 에다바(귀가 열린)를 실제로 체험한 자매입니다. “왜 땀을 그렇게 많이 흘리면서 들어오는가?” 하고 물었죠. “주일날 예배를 드리기 몇 시간 전에 소가 안보이거예요. 그래서 소를 찾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다 되자 그냥 소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말씀을 들으려고 달려왔어요.” 그 말을 듣고서 이 선교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대요. “하나님, 벌러르 자매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소를 포기하고 왔답니다. 이 자매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마옵소서.” 그리고 말씀을 전하고 예배를 다 마쳤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찾던 소가 보이지 않았는데, 잃어버렸던 그 소가 예배 처소로 찾아온 겁니다. 할렐루야!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인간이 움켜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사라지고, 소멸합니다. 가지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실망합니다. 더 많은 것으로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심령이 공허해집니다. 그러나 내 것, 내 소유의 개념을 포기하면 하나님의 것들을 얻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것들을 더 풍성하게 얻게 됩니다. 내 욕심을 포기할 때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강물이 낮은 곳을 향해 굽이굽이 흘러가는 데, 강 기슭에는 항상 푸르름이 있습니다. 강이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더 많은 지역이 푸른 초원으로 바뀌고 축복의 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려놓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변을 더 풍성하게 만드십니다. 오늘은 대강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위격을 내려놓고 이 세상에 오셨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몸으로 실천하신 것이죠. 그러나 죄의 사슬에 매여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이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세상의 오염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합니다. 세상 것들로 풍성해야 성공한 것이라고 믿는 살죠.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행복한 삶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최대의 관심이 무엇일까요? 인간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인간은 주어진 자연과 환경 속에서 뭔가를 찾고, 뭔가를 바랍니다. 뭔가 즐길 수 있는 것을 부단히 찾고 있어요. 뭔가 자신의 보람을 부단히 찾고 있습니다. 인간의 관심은 뭐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기 원합니다. 뭐든지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죠. 그 결과 인간은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현대인의 행복은 마치 ‘100미터 미인’과 같아요. ‘100미터 미인’이란 100미터 밖에서 봐도 예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100미터쯤 떨어져서 볼 때만 예쁘게 보인다’는 뜻이죠. 100미터쯤 떨어져 있을 때는 굉장히 예쁘게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오면 전혀 예쁘지 않다는 말입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실망한다는 뜻인데요. 하나님의 관심 밖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이 바로 100미터 미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이 100미터 미인과 같죠. 100미터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행복을 생각하고, 행복을 꿈꾸며 사는 데, 현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때가 가까울 때 세상의 분위기가 마치 노아 시대와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본문 37절을 보세요.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숫자적으로 아주 번성했어요. 그러나 그 사람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이 떠난 상태였어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삶을 삽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감각을 의존하며 살고, 충동적인 느낌을 좋아합니다. 느낌이 좋고, 마음에 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자신의 눈에 좋게 보이고, 좋다고 느껴지면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얻으려고 하죠. 홍수 심판이 있기 전에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본문 38절~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여러분! 깨어있지 않는 사람은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홍수 심판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도 없어요. ‘내 삶에 대해 어떤 심판이 있게 될 것인가?’ 전혀 생각하지 않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간은 영적인 깨달음을 잃어버린 겁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 저희에게 성령의 일은 미련하게 보이고, 깨닫지도 못한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만 분변한다.”(고전 2:14) 반면에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던 노아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항상 깨어 있었어요. 하나님은 깨어있는 노아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어요.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사람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발견했어요. 하나님은 노아에게 “심판의 때가 있다. 구원의 방주를 만들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주시고, 구원의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타락한 시대에 노아가 어떻게 거대한 구원의 방주를 건조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당시에 방주를 건조하는 기술은 가인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었어요. 가인의 후손들은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악기를 제조하는 기술자였어요. 노아는 세 아들들을 가인의 성에 보내서 방주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했을 것입니다. 그때 셈은 건축기술을 익혔던 것 같아요. 함은 기계기술을 익히고, 야벳은 항해기술을 습득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이 흩어져 살았는데, 셈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에 큰 성을 건축하고 문명(메소포타미아)을 일으켰구요. 함의 손자 니므롯은 무기를 제작하였고, 야벳의 자손은 바닷가에서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다는 기록이 이것을 증명합니다.(창 10:5-12) 노아가 높은 산에서 방주를 건조할 때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노아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다.’ 하고 비웃고 조롱했어요. 하지만 노아는 비웃는 사람들에게 비싼 임금을 주고 그들을 고용해서 방주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방주를 건조했던 당시에 사람들은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자식들 결혼시키고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도 노동력을 팔아 돈 벌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자식들 결혼시키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잖습니까?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현대인들은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경험을 섭렵하면 성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인생을 설계할 때 4계절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밟아야 할 단계도 생각하지 않죠. 현대인의 관심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능숙하고, 재빨리 처리하기를 원합니다. 그 때문에 지금보다 한 세대를 먼저 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불안하게 삽니다. 절대적인 상실감보다 상대적인 상실감이 더 커요. 그래서 한 세대 전보다 한꺼번에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요. 현대인에게 새로운 요구가 끊임없고, 새로운 욕망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죠. 또한 기대감이 너무 빨리 나타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은 많은 데 성공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 거죠. 그럼에도 현대인은 항상 최상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식의 자원(지각하는 자원, 기억하는 능력, 지능의 자원)이 갈수록 고갈되어 갑니다. 이런 현대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성인이 되는 것보다 우선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데, 첫째는 지식입니다. 지식은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때 믿음이 성장합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명철한 사람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의 귀는 지식을 구한다.”(잠 18:15) 그랬어요. 둘째는 동의입니다. 동의는 믿음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러나 동의하는 것만으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셋째는 신뢰입니다. 신뢰하는 데서 참믿음이 생깁니다. 신뢰는 내 생활의 모든 것, 내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으라.” 그랬어요. 본문 42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른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깨어 있으라” 하는 말은 헬라어로 “그레고레이테(gregoreite)”입니다. 우리말로는 “깨어 있으라, 정신을 차리라, 경계하라, 주의하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깨어 있으라, 정신을 차리라, 경계하라, 주의하라” 하고 말씀하셨을까요?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종말을 생각하고, 종말의 때를 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탄이 유혹하는 왜곡된 정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단이 주는 왜곡된 성경 지식을 경계해야 합니다. 25년 전에 경쟁정보 분야를 개척한 레너드 펄드는 경쟁정보 분야의 최고 권위자입니다. 그가 <경쟁게임에서 승리하는 기슬> 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이런 말이 있어요. “세상에는 왜곡된 정보가 무수히 많다. 온갖 소문도 많고, 남을 속이기 위한 연막도 많다. 사람들은 저마다 중요한 정보를 분석하지만 그렇다고 다가오는 위기는 알기 어렵다. 그러니 경쟁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정보에 깨어 있어야 한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영적인 정보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최종적인 삶에서 승리하려면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며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국에 알렌 이라는 무신론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강하고 달변가였어요. 언제, 어디서든지 무신론에 대해서 논쟁하기를 좋아했죠. 어느 날 사랑하는 외동 딸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알다가 죽어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가 무신론자이다 보니 죽어가는 딸을 보면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어요.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고, 논쟁도, 달변의 재능도 딸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어요. 아비로서 걱정스럽게 딸을 지켜보는 데 딸이 아주 진지하게 아버지에게 물어보더래요. “아빠, 마지막으로 아빠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엄마는 예수님이 계시고 천국도 있고, 하나님의 나라도 있다고 그러는데요. 아빠는 그런 것들이 다 거짓말이고, 기독교인들이 지어낸 거라고 그랬어요. 저는 지금 혼란스러워요. 정말 천국이 없고, 예수님도 없고 하나님이 없는 건지, 지금 저에게 정직하고,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아빠의 말을 믿고, 그대로 죽음을 맞을래요.” 그 말에 충격을 받고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합니다. “딸아, 미안하다. 아빠가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다. 천국은 있다. 네 엄마 말이 맞다. 하나님의 우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네가 예수를 믿으면 너를 맞이해 주실 게다. 다음에 천국에서 아빠랑 만나자.” 여러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육신의 생각을 내려 놓으십이오. 영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왜 영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까? 영의 생각은 나를 생명과 평안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복종합니다. 신곡을 썼던 단테가 그 이유를 말했어요. “주님의 뜻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가장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길 때 가장 승리하는 삶을 삽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종말을 사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재림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이제 영적인 각성, 영적인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사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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