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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땅 밀양, 터실의 사계절
나의 고향 밀양의 북동부에 천 미터가 넘는 산이 이어져 있는 산악지대이고 서남부에는 평야가 아득히 펼쳐져 있는 수전(水田)지대이다.
남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우뚝 솟아있는 밀양의 산악지대는, 우리 삼천리강산의 등뼈인 백두대간이 태백산(太白山)에서 지리산(智異山)으로 굽이치면서 남쪽으로 내리꽂는 여력이 그대로 뻗어 부산 앞바다를 향해 뛰어들려고 호흡을 가다듬어 모둠발로 도움닫기를 하느라 솟구쳐 불거진 모양과 같다. 북쪽에는 현풍 고을의 비슬산(琵瑟山)과 줄기가 이어져 있는 화악산(華岳山)이 있고 동부에는 그보다 더 높은 천황산, 재약산(載藥山)이 우뚝 솟아 있다.
이 산줄기에 올라서면 천 미터 가까운 고원인 사자평(獅子坪)이 질펀히 펼쳐져 있다. 능선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석남재(石南峴)를 건너 가지산(伽智山)이 있고 다시 경주 고을의 고헌산(高獻山)과 연이어 있다. 천황산에서 북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능동산(陵洞山)이라는 뾰족한 봉우리가 있고 그곳에서 동쪽으로 가지가 벌어진 능선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면 1400미터가 넘는, 이 산악지대에서는 가장 높은 신불산(神佛山)을 만난다. 여기에서 산줄기는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의 주산인 영취산(靈鷲山)을 디딤돌로 해서 한발 걸음을 내려 디뎌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의 주산 금정산(金井山)을 밟고 부산 앞바다로 풍덩 뛰어든다. 또 한편 가지산에서는 산줄기의 한 가지가 서쪽으로 휙 굽어내려 뻗다가 운문재(雲門峴)의 잘룩이에서 치솟아 1200미터가 넘는 운문산(雲門山)으로 된다. 이 운문산에서 서쪽으로 더 뻗어 억산(億山), 구만산(九萬山)으로 내려와 밀양 남천강(南川江)의 상류 유천(楡川)을 건너 산줄기를 타고 화악산으로 이어나간다.
서남부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들 산악지대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이 밀양 남천강으로 모아드는데 하천이 넓어짐에 따라 그 양가의 논밭도 더욱 풍성해진다. 화악산의 남녘 기슭으로 흐르는 물은 위량(位良), 퇴로(退老)의 두 못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흘러 청운내(靑雲川)가 되고 밀양읍의 서쪽 교외를 적시어 감내(甘川)가 되어 삽개(鈒浦) 앞에서 밀양 남천강(南川江)에 들어간다. 이들 내의 양쪽에는 10리 벌판이 펼쳐져 있고 이 벌판은 예림(禮林)에서 남천강에 의해 일단 끊어지지만 예림부터 광활한 상남(上南)들이 되고 그것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김해(金海) 평야와 합쳐진다. 한편 화악산의 산줄기는 서남으로 뻗어 창녕(昌寧) 화왕산(火旺山)에 이르지만 정남으로 내려가면 삽개 뒤 종남산(終南山)으로 우뚝 솟는다. 이 종남산 서남 자락부터 골짜기가 넓어져 남쪽으로 내려 초동(初同) 들이 펼쳐지고, 왼쪽으로 신호(新湖)늪과 국농포(國農圃) 들판으로 돌아 남쪽으로 확 트인 하남(下南)들로 퍼져나가서 상남들과 더불어 낙동강 건너 김해평야와 마주 본다.
이와 같이 밀양 고을은 북동과 남서가 매우 다른 지형 차이가 있다. 게다가 나라의 남녘에 있어서 동남 김해평야에서 거슬러오면 처음으로 조선의 특유한 산악지대와 만나게 된다. 왜적이 동남에서 쳐들어올 때 골짝 깊은 조선 특유의 산악 지대와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는 곳이 밀양 땅이고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서 쳐들어온 왜놈들을 도육내어 나라를 지켰다.
밀양 고을의 서남 지역은 김해평야와 더불어 광활한 수전으로 벼농사를 위주로 하고 무명, 누에고치와 여러 가지 밭농사로 농산물이 풍성한 고을이다. 남천강 맑은 물은 여러 가지 천어(川魚)가 있어 풍성하고 그 중에서 은어(銀魚)는 별미여서 봉건왕조시대에는 나라의 진상품으로 바쳤다. 그외 골짝 골짝에 감, 대추, 밤, 배 등 과일이 풍성하고 송이, 싸리버섯 등 식용버섯도 많고 다양하다.
그러나 이처럼 물풍한 고을은 그만큼 민중에 대한 수탈도 가혹했다. 나라의 삼정이 문란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버리고 달아난다. 또한 고달픈 신역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노비가 생긴다. 이들은 밀양 고을의 동북지역 산악지대로 들어간다. 사자평고원을 중심으로 해서 밀양 동북부 산악지대와 접경해 있는 청도 고을 운문산 일대, 경주 고을 내남면 일대, 언양 고을 신불산 일대 양산 고을 영취산 일대를 두루 합친 이 광활한 지역은 나라의 정치가 문란하고 지배자의 수탈이 가혹해지면 유랑민이 찾아드는 곳이었다. 유랑민은 이곳에 모여 화전을 일구며 그들의 삶을 이어나갔고 수탈하고 억압하는 지배자에게 항거하는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사자평고원지대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산악지대는 국가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한편, 봉건지배층은 외적의 침략과 지배층에 저항하는 민중세력에 대비하여 밀양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인근 고을인 창녕, 현풍, 청도, 김해, 창원 등 주변 고을의 군비를 총괄했다. 밖으로는 왜구를 방위하고 안으로는 유랑민화 된 민중의 저항을 탄압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밀양 고을에는 풍성한 생산을 둘러싼 민중의 밝은 삶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는 민중의 투쟁, 봉건지배자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과 그 고난의 삶에서 비롯된 슬기가 전설과 유적으로 밀양 사람들의 삶 곳곳에 남아 후대에게 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또 그것은 밀양지방문화의 피가 되어 민족문화의 혈맥에 도도히 흘러들고 있다.
터실의 봄
밀양시의 서쪽 교외에 나가면 화악산 남쪽 자락에서 내려오는 들판이 확 트여 펼쳐져 있다. 화악산의 물은 위량, 퇴로의 두 곳 못에 담겨 들판의 한 가운데로 남으로 내려오다가 밀양시의 서쪽 교외에서 감내(甘川)라는 이름으로 남천강에 흘러드는데, 이 내의 양편에는 10리 들판이 질펀하게 퍼져 있어서 보기만 해도 배가 든든하도록 풍요롭다. 이 들판은 청운 앞에서는 청운들이고 밀양시 못 미쳐서는 굴밭(雲田)들이며 밀양시에 들어와서는 터실이고, 터실에서 감내 건너편은 감내들이라고 부른다. 밀양시에 들어온 터실을 제외하면 모두 밀양시 부북면의 들판으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바라보면 그 끝이 아스라하다.
밀양시에서는 서쪽 교외의 들판의 논 일대를 ‘터실’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지금은 읍에서 시가 되어 집이 꽉 들어차 있지만 터실은 겨울날 우리 어린이들의 놀이터이고 여름에는 식물원과 작은 동물원이었다.
터실에서 자라는 것은 벼, 보리, 수수, 콩, 조 등 온갖 곡식과 여러 가지 채소뿐만 아니다. 밀양읍의 서쪽에 사는, 그러니까 내이동에 사는 아이들도 이자연의 교실에서 함께 자랐다.
봄이 되면 온 들판의 보리가 아득하게 파랗다. 하늘에는 노고지리가 “지지배배, 지지배배” 노래하면서 높이높이 아득히 올라간다. 밀양의 머슴애들은 이 노고지리 소리를 흉내 내며 욕한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삐지고 째지고 아무개 보지 쪽 째지고”
논두렁에는 이곳저곳 나물뜯는 아가씨들이 봄볕에 노곤하고 바구니에는 쑥, 냉이, 씀바귀에다 더러는 도라지 뿌리도 있어 봄나물이 파릇하다. 누가 만든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노래가 절로 나게 한다.
“저 벙어리 평원 해지는 구석에
나물 캐는 소녀 칼 밑은 수라장
별과 같은 이슬이 반짝이는데
미풍조차 부니 배추꽃 피네.”
분주살스러운 아이들은 겨울잠에서 겨우 깨어나 미쳐 기운도 못 차리는 개구리를 못 견디게 하고, 따뜻한 봄볕을 받아 꺼덕꺼덕한 논 구석에서 못치기를 하면서 신명을 낸다.
“홍다꿍 홍다꿍 이완용이 배때기!”
나무 꼬쟁이를 뾰족하게 깎아서 꺼덕꺼덕한 진흙 바닥에 내리꽂는데, 마치 그 진흙 바닥을 고려 때 나라를 몽고 놈에게 팔아먹은 만고역적 홍다구(洪多丘)와 조선왕조 말에 나라를 왜놈에게 팔아먹은 만고역적 이완용이의 배때기로 여기고 힘껏 꽂아댄다. 이완용이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누구나 다 알지만 칠백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홍다꿍’이라는 추임새로 바뀌어 여전히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홍다구는 동족을 원나라에 팔아먹은 삼대에 걸친 역적이다. 할애비는 홍대순(洪大純)이고 애비는 홍봉원(洪鳳源)이다. 비록 아이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하지만 만고역적을 증오하는 겨레의 마음은 ‘홍다꿍’으로 남아 칠백 년 동안을 아이들의 못치기에 그 배때기가 남아있지 못하게 한 것이다.
봄비가 부슬거리는 늦은 낮뒤에 터실에 나가보면 화악산은 비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고 희부열 뿐이고 종남산에서 화악산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은 뚜렷한 것이 차차 옅어지면서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안개 속으로 안겨들고 만다. 감내 냇가에 서있는 길다란 양버들은 뭉그러진 왕가시리(대빗자루)를 물안개 속에 꽂아놓은 듯하다.
감내는 모래 위에 맑은 물이 소리 없이 흐르는 내이다. 처음 온 사람은 냇가에 이르지 않고는 아무도 거기에 내가 있는지 모른다. 자갈이 없고 모래만 깔린 내이다. 이 모래도 감내에 덮인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한 자 밑에는 검은 쪼대흙[粘土]이 나온다. 그래서 이름도 검은 내가 감내로 된 것이지 싶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이 감내의 쪼대흙을 캐서 사람도 빚고 기차도 빚고 비행기도 빚었다. 내가 쪼대흙 캐러 감내에 갔다 오면 온 얼굴에 옷에 까만 쪼대흙이 묻은 나를 보고 할머니는
“아이고 누가 쪼대흙으로 우리 손자를 만들었노?”
하고 놀렸다.
밀양읍에서 사명당(泗溟堂) 비석이 있는 무안면으로 가려면 감내에 놓인 공굴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 곁에 주막이 하나 있을 뿐 다른 집은 한 채도 없다. 그런데 ‘밀주지(密州誌)’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감내마을(甘川里)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꽤 큰 마을이었을 텐데 흔적도 없다. 연산군이 역적으로 몰았을 때 그가 태어난 동네까지 없애버렸을까.
김종직 선생은,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인하여 폭군 연산군에게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은 연좌에 걸려 남자는 죽임을, 여자는 관비로 영락되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점필재의 문인(門人)은 사약을 받거나 유배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환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점필재 선생의 며느리는 생후 몇 개월 되는 아기를 안고 충성스런 종의 보호를 받아 산으로 산으로 도망하여 서울의 남녘으로 내려왔다. 마침내 가야산 근처 성주 고을의 어느 산골(고령군 쌍림면 합가동)에 터를 잡았는데 그곳이 점필재의 후손이 사는 ‘계실’이라는 마을이다. 당시의 성주목사도 점필재의 문인이어서, 비밀을 지켜주고 몰래 양식을 보내어 숨어살 수 있도록 돌보아주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그 후 얼마 안 되어 중종반정으로 신원(伸寃)이 되어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 후손이 그곳에서 400년의 가통을 이어오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점필재 선생은 밀양에서 나서 자란 밀양 사람이어서 밀양 곳곳에 점필재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지만, 그 후손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밀양과는 먼 다른 고을 사람이 되었다. 점필재 선생을 배향한 서원은 여러 곳에 있으나 본향이 밀양이라 예림재에 배향하고 있다.
나의 이모는 바로 이 계실로 시집을 갔다. 이모부는 앞서 말했다시피 상업은행 밀양지점에서 은행원으로 일했는데 해방 후까지 오래도록 근무하다가 정년 후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사셨다. 이모는 지금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으로 계실에서 살아계신다. 이모부 장례 때와 그 후로도 이모를 찾아 그 동네를 몇 번 갔었는데, 고령에서 진주로 가는 길목이다. 동네 앞에는 시내가 있지만 산으로 굽이쳐 동네의 좌우가 모두 산이라 산자락에 폭 감추어져 있어서 과연 도망자가 숨을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름날의 추억
여름이 되면 터실은 시끌벅적하다. 터실의 넓은 들판의 무논에는 농군들의 논매기가 한창이고, 일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푸른 벼를 따라 노동의 즐거움과 고달픔을 아울러 토하고 있다. 아이들은 수로에서 왁자지껄하다. 감내 상류에 보를 막아 수로를 통해 논에 물을 대는데 간선 수로는 폭이 넓고 깊이도 있었다. 이 수로는 논에 물을 대기도 하지만 폭우나 장마로 감내가 넘칠 때는 그 논물을 남천강에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천강이 범람하면 배수기능을 잃어버려 강어귀에 넘친 물로 그 곁에 있는 미나리 논이 몽땅 잠기고 그 근방의 진장 동네에 물이 든다.
수로는 높이가 3미터 가까운 둑으로 되어 있고 아래 폭은 4미터 정도인데 여름철에는 언제나 한 길 쯤 되는 깊이로 물이 흐른다. 이 수로의 둑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과 물속에서 자라는 수초가 우리들 어린이의 식물원이고, 그 수로에서 자라는 벌레와 곤충들이 우리들의 자연교실이다. 둑은 주로 잔디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속에 여러 가지 풀이 섞여 자라고 있다. 이것들은 봄, 여름, 가을에는 꽃을 피우는데 봄에는 민들레, 씀바귀, 솜양지의 노란 꽃이 곱고 할미꽃, 붓꽃, 제비꽃, 은방울꽃도 제 모양을 자랑한다. 삘기도 봄에는 그 단맛이 아주 깔끔하다. 여름에는 군데군데 붉은 엉겅퀴꽃, 밥풀꽃, 나리꽃이 있고 물 안에는 부들꽃, 수련, 쟁피, 체꽃, 노인장대가 무성하고 물가에는 익모초, 질경이가 핀다. 가을에는 쑥부쟁이, 들국화도 피고 군데군데 갈대도 있다. 남천강 어귀 가까이에는 마름밥(菱實)도 있어서 아이들의 군것질거리를 보태고 있다.
여름에는 둑에 메뚜기, 방아깨비, 사마귀, 여치, 때때, 풀무치, 베짱이, 찌르레기가 있어서 아이들의 노리개가 되고 둑 밑 논에는 맹꽁이, 개구리, 올챙이, 미꾸라지가 폴짝거린다. 수로에는 물땡땡이, 물매미, 물방개, 소금쟁이, 물장군이 물 위와 물속에서 우리들의 눈을 유혹한다. 수면 위에는 실잠자리, 보리잠자리, 호랑잠자리, 참잠자리(밀양 사투리로 잠자리를 ‘철구’라고 하고 참잠자리를 ‘왕철구’라고 한다)가 날아다니고 범나비, 새까만 도둑놈나비, 부전나비가 펄럭거리며 집게벌레가 엉금엉금 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벌레를 잡아 처마에 붙어있는 집에서 기다리는 새끼를 먹이기 위해 제비는 부지런히 수로 위를 왔다갔다하면서 공중제비 재주를 부리고 있다. 저 멀리 감내의 냇가에 서있는 양버들에서 우는 참매미가 길게 “지이-”하고 소리를 내고 매롱매미가 “매롱 씨롱, 매롱 씨롱”하고 들까부는 소리를 내는 것이 그곳 둑까지 들려온다.
아이들은 잠자리채를 들고 수로의 다리 위에서, 또는 물가에서 잠자리를 그악스레 잡는다. 잠자리채는 철사를 둥글게 굽혀서 테를 만들어 대나무 장대 꼭대기에 박고, 테에 실을 이리저리 얽어 망을 만든 다음 거미줄을 묻혀 끈적끈적하게 만든다. 그것으로 날아가는 잠자리를 붙여서 잡는다. 또는 왕가시리(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나와 잠자리를 덮쳐잡기도 한다. 왕철구(참잠자리)는 암놈만 잡으면 숫놈은 암놈을 미끼로 해서 잡는다. 말하자면 미인계를 쓰는 셈이다. 왕철구의 암놈은 날개가 연한 노랑 빛을 띠고 볼록한 배등대기가 푸르고 꼬리가 진한 갈색이다. 암놈을 잡으면 암놈의 발을 실로 묶어서 가는 막대기 끝에 한 발 길이 쯤 되게 매단다. 그리고는 수놈이 날아다니는 물가에서 암놈이 매달린 막대기를 빙글빙글 돌린다. 그러면 암놈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날아다니게 된다. 이때 수놈을 꾀는 노래가 있다.
“구리이 구리이 암놈이야, 뒤돌아 봐라 구리이 구리이!”
이렇게 외치면서 암놈을 미끼로 해서 내두르면 수놈은 암놈을 보고 붙으려고 달려든다. 살살 돌리던 암놈을 땅으로 살짝 내리면 수놈은 영문도 모르고 암놈따라 내려온다. 그때 손으로 재빨리 답싹 덮쳐잡는다. 암놈을 못가지고 수놈만 가진 아이는 수놈을 화장시켜 암놈으로 보이도록 해서 미끼로 쓴다. 호박꽃을 따다가 꽃술의 노란 가루를 수놈의 나래와 꼬리에 칠해서 암놈으로 위장시킨다. 그렇게 해도 어리석은 수놈 중에는 암놈으로 알고 붙는 놈도 있다.
이렇게 잡은 잠자리는 나래를 겹쳐 모아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만 잡으면 한 손에 다 찬다. 잠자리는 다만 잡는 재미일 뿐이지 먹지도 못하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모두 시달려 종래 죽고 만다. 더러 꼬리에 풀줄기를 꽂은 채 날아가기도 하지만 곧 죽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죽을 둥 살 둥 잠자리 잡는데 온 정신이 다 팔려 수로 둑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뛰어다니기에 바쁘다.
대야, 깨어진 바가지, 병을 가지고 물방개를 잡고 올챙이, 눈챙이, 피라미, 붕어새끼들을 건져 올려 병에 담아 가지고 논다. 물에는 수초가 무성하다. 그 안에는 무자수(물뱀)가 있다. 무자수가 개구리를 먹어 모가지가 불룩한 것을 막대기로 훑어 개구리를 토해 놓도록 만드는 지독히 심한 장난을 하는 아이도 있다.
여 나문 살 넘은 좀 철든 아이들은 민물새우를 잡는다. 수로의 물꼬에 수초가 없고 언제나 맑은 물이 위에서 넘쳐 밑으로 떨어진다. 물이 떨어지는 밑에 한 치 길이 쯤 되는 민물새우가 우글거린다. 껍질도 몸체도 투명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손을 넣어 건지려고 하면 재빠르게 확 흩어져 달아난다. 아이들은 두 자 폭 쯤 되는 모기장 쪼가리의 양 가장자리에 막대기에 감아 붙인 그물을 가지고 이 민물새우를 뜬다. 이것은 그날 저녁에 토장국감으로는 아주 좋다. 이 민물새우를 넣고 끓인 토장국은 얼큰하고 시원해서 여름철의 입맛을 돋군다.
풍성한 가을
가을이 되면 새파랗게 푸른 하늘 아래 화악산의 모습이 선명하고 그 까마득한 곳으로부터 청운들, 굴밭들, 감내들, 삽개들까지 온 들판이 누렇다. 그야말로 황금물결이다. 군데군데 올벼를 베어 찐쌀을 해먹은 곳이 있으나 온 들판은 풍성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논두렁에 나가 벼이삭을 하나 뽑아 메뚜기를 잡아 등껍데기 밑으로 벼줄기를 밀어 넣어 메뚜기를 꿴다. 그렇게 하면 한 이삭에 여 나문 마리는 꿸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몇 이삭 만들어 집에 가지고 가서 부뚜막에 약한 불을 헤집어 내고선 잡은 메뚜기를 벼이삭 채 구워서 먹는다. 바삭바삭하면서 고소하고 맛있다. 어떤 아이는 병을 가지고 와서 거기에다 많이 잡아넣는데 한 병 채우려면 오래 걸리고, 많이 구우려면 부뚜막 불로는 되지 않기에 엄마가 냄비에 소금을 쳐서 덖어서 볶기도 하고 간장에 조려서 반찬거리가 되게도 한다. 내가 어릴 때는 메뚜기볶음이 정식으로 찬거리가 되어 시장의 반찬가게에 나온 일이 없었는데, 6.25전쟁 이후부터는 밥집의 찬거리로 나오고 막걸리 안주로도 나오고 또 큰 요릿집의 안주접시로 차림이 되어 나오게 되었다.
가을은 풍성하기는 하지만 터실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에는 모두가 너무 바쁘다. 곳곳에 탈곡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풀무소리가 요란하다, 논두렁에 볏섬이 잇달아 놓여 있어 터실 전체가 복작거렸다. 우리 집은 농사가 없으니 이때는 가을걷이 하는 동무하고 그 집일을 거드는 것이 나의 놀이가 된다.
가을걷이하기 전에 논에 물을 뺀다. 그러기 위해서 논두렁 가에 골을 파 놓으면 논에 있던 미꾸라지가 이곳으로 몰려 나와 논의 물꼬와 수로의 물꼬로 모여든다. 물이 없으니 미꾸라지는 물이 있는 쪽으로 모여들고, 물은 물꼬의 옴팍 파진데만 있어서 모든 미꾸라지는 거기에 모여 진탕 속에 숨게 된다. 물꼬의 물을 퍼내고 미꾸라지를 건져내면 한 물꼬에 몇 사발씩이나 잡을 수 있다. 이때의 미꾸라지는 살이 포동포동하고 겨울잠을 자기 위해 기름기가 많다. 그래서 아주 맛이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여 나문 살 먹은 형들이 미꾸라지를 건져낸다고 온몸에 뻘을 묻혀 스스로 미꾸라지가 되어 야단일 때면, 어린 아이들은 그 옆에서 바구니나 대야를 들고 거들며 구경한다.
터실에서 아이들의 참 재미는 늦은 가을부터 이듬해 정월 대보름 사이에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보리갈이가 바쁘다. 감내 냇가에 가까운 논은 낮아서 물기가 많은 논 이외의 모든 논에 보리 씨앗을 넣고 산비탈의 비탈 밭에도 보리 씨앗을 넣는다. 물기 많은 논에는 벼포기 그루터기를 호미나 괭이로 뒤집으면 올방개라는 새끼손가락만한 뿌리가 나오는데, 따개어보면 하얀 살이 있다. 밤보다야 못하지만 달큰해서 먹을 만 했다. 아이들은 호미를 들고 벼 그루터기를 파헤쳐서 올방개를 캔다. 어떤 아이는 나무 막대기로 캐기도 한다. 어릴 때는 이런 것들이 중요한 군것질거리의 하나였다.
겨울 아이들
우리 집에서 서문다리 쪽으로 나가면 읍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간선도로가 나온다. 남으로는 삼문동을 경유해서 밀양역으로, 북으로는 향교 마을인 교동(校洞)을 지나 청도로, 또는 동부 산악지대로 간다. 이 도로로 해서 교동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교외에 나가는 개천 공굴다리가 하나 나오는데 이 일대를 ‘송징이’[松亭]라고 불렀고 근처에 무당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던가 보다. 이 동네 무당들은 늦가을 보리갈이가 끝나면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당들의 푸닥거리는 역사가 오래된 것 같다. 조선시대의 서거정(徐居正)이 ‘밀양십경’을 노래한 것 중의 한 대목으로 나와 있을 만큼 전통이 있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일제가 우리 민속을 하시(下視)해서 옛날처럼 큰 규모로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푸닥거리는 볼만 했다. 특히 설날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이 푸닥거리와 지신밟기, 사물놀이는 온 읍내 사람들이 신명풀이였다. 우리 어린이들은 하루 종일 그 뒤를 따라다녔고 떡이랑 지짐부침(부침개)이랑을 얻어먹었다. 집에서는 할머니는 내가 간 곳을 몰라 걱정을 하면서 나를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할아버지께 아무 말 없이 돌아다녔다고 꾸중을 들었고 종아리 걷고 퇴침에 올라서서 매를 맞기도 했다.
동지가 가까워지면 성급한 어린이들은 가오리연에 꼬리를 길게 붙이고 여 나문 발의 실을 실패에 감고 거리에 나와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고 한다. 연 띄우기는 음력설이 가까워져야 본격적이다. 여 나문 살 넘는 소년들이나 스무 나문 살 가까운 총각들이 연을 띄울 때가 되어야 제철이 된다. 연 띄우기의 최전성기는 음력설부터 대보름까지이다. 대보름날이 되면 연을 달집에 넣어 태우거나 멀리 날려버림으로써 그 해의 액을 태우고 날려 보낸다. 이와 동시에 겨울철 놀이는 종을 친다.
연 띄우기는 아무래도 방패연이라야 제격이다. 그것도 아득히 멀리 높이 날려서 연끼리 서로 얽어 상대방의 연실을 베어 먹는 연싸움이라야 참 재미라고 하겠다. 연은 고려왕조, 조선왕조 시대부터 왜놈과 싸울 때 쓰였다. 큰 연에 불을 달아 왜놈 진에 화통을 터뜨리거나 우리 군사끼리는 통신으로도 이용했다고 한다.
방패연은 창호지 한 장짜리의 큰 연도 있지만 보통은 창호지 반 장 크기로 한다. 먼저 창호지 한 장을 반으로 접어 자른다. 긴 쪽 머리를 한 치 정도 폭으로 접고, 이것을 다시 세로와 가로로 한 번 씩 접어 4분의 2로 접은 다음, 다시 접은 모서리에서 45도 각도로 접는다. 그리고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잡아 반지름 한 치 반 쯤 되는 부채꼴로 베어내고 펼치면 종이 한 가운데 지름 세 치 쯤 되는 동그란 구멍이 생긴다.
연살은 두 푼 폭, 한 푼 두께의 대나무 살인데 속대 부분을 도도록하게 깎는다. 먼저 긴 쪽 머리를 접은 곳에 한 치 정도의 폭으로 접은 곳의 안쪽에 대고 된풀을 바른 대살을 붙인다. 다음은 방패연의 동그라미 한 가운데에서 대각선의 방향으로 두 살이 교차되도록 된풀을 바른 대살을 붙인다. 이때 대각선살의 사방을 고정시켜 볼록하게 휜 다음 구멍 뚫린 원 안에 드러난 대살을 약간 구워서 휜 모양을 고정시킨다. 그러면 방패연 전체가 앞으로 보기 좋게 도도록하게 휘어져서 날씬한 연 모습이 나타난다. 그 다음 대살을 세로로 한 복판에 붙이는데 한가운데 구멍에서 이 대살이 앞쪽으로 겹쳐지게 한다. 마지막으로 가로 대살을 한가운데 구멍에서 앞쪽으로 걸쳐 나오도록 끼워서 붙이는데 이것은 다른 대살보다 반 정도 가늘게 함으로써 더 탄력성 있게 한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 볼록한 방패연이 만들어진다. 이때 가운데를 동그랗게 도려낸 종이는 물감을 칠해서 연의 이마에 붙이는데 반달을 붙이고 남은 반달을 다시 반으로 잘라서 양쪽 모서리에 붙이기도 하고 또는 동그라미 전체를 연 이마에 붙이기도 한다. 연을 멀리 띄워도 제 것과 남의 것을 쉽게 구별되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연실을 매는 일이다. 먼저 실을 양쪽에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머릿살과 대각선 살이 걸친 곳, 이 양쪽을 묶어서 머릿살이 활대가 되게 적당히 휘도록 맨다. 다음에 양쪽 모서리에 매인 실을 아래로 내려, 한가운데 동그랗게 뚫린 원의 아래쪽 가장자리와 연 전체의 아래 변 가장자리의 중간 쯤 되는 곳에서 만나도록 한다. 한가운데 세로로 붙인 살에서 두 실이 만나도록 하고 그 자리에서 구 가닥 실을 단단히 묶는다. 이 두 가닥 실의 맺음이 오는 자리에서 세로살의 양쪽에 실이 들어갈 만큼 바늘로 구멍을 뚫는다. 두 가닥 중 한 가닥을 이 구멍에 꿰어 대살에 묶는데 그 실의 길이는 구멍에서 머릿살의 한 모서리까지이다. 남은 한 가닥은 얼레에 있는 실에 맺으면 된다.
이와 같이 방패연에 연실을 매어서 연을 띄워 보면 한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심하면 한 쪽으로 도는 수가 있다. 그럴 때는 연 머리의 양쪽 모서리에서 나온 실로 기울어지거나 도는 쪽의 반대쪽을 한 두어 번 감아서 짧게 해주면 적당한 길이에서 연이 바로 선다.
연실은 대체로 삼합사 실을 쓰지만 더러는 비싼 명주구리실을 쓰기도 한다. 명주구리실은 질기기도 하지만 가벼워서 연을 멀리 띄워도 실이 처지지 않는다. 잘라먹기 연싸움을 하려면 실에 사금파리를 입힌다. 사금파리를 차돌멩이로 빻아 명주 헝겊을 대고 쳐서 나온 고운 가루를 걸쭉한 풀에 개어 얼레에 감긴 실이 사금파리 가루를 갠 풀 속으로 지나가도록 한다. 이때 두 가닥 난 꼬챙이로 실을 눌러 다른 얼레에 감는다. 이 감는 작업은 아주 빨리 해야 한다. 너무 오래 끌면 실이 얼레에 말라붙기 때문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말리는 일인데 꼬마들을 서너 사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세워놓고 실을 걸쳐 휘감아서 햇볕에 말린다.
꼬마들은 산 건조대 장대 역할을 하는데 다 마른 다음에는 그 실을 두어 발 얻을 수 있다. 이 꼬마들은 얻은 실 끝에 돌멩이를 매달아 서로 실을 얽어 잡아당겨서 끊어먹기를 한다. 이 놀이를 ‘목치미’라고 한다. 이때 아이들은 돌멩이를 매단 실을 흔들면서 노래한다. 가락은 각설이조이다.
“목치미 닥치미 군다라 데에라 섭박섭박 넘어간다.”
이와 같이 장만한 실에 연을 매어 하늘에 날린다. 먼저 꼬마가 연을 들고 한 삼사십 미터 쯤 나간다. 연을 띄우는 아이는 물론 바람을 등지고, 연을 들고 가는 아이는 그 반대편에 서서 연을 위로 올린다. 그때 얼레를 급히 감으면 연이 약간 위로 올라가고 줄을 잡아채면 연이 쑥쑥 올라가는데 올라가면 실을 풀어준다. 풀어주면 연이 내려오고 또 잡아채고 해서 실은 자꾸자꾸 풀어지면서 어느 정도 연이 높이 오르면 바람을 탄다. 연이 바람을 타면 높이 올라가고 실에 힘이 실려 얼레가 돌아가며 실이 죽죽 풀린다. 실을 풀어주면 연은 좌우로 흔들거리면서 멀리 날아가는데 고도는 낮아진다. 고도가 낮아지면 실을 풀지 않고 멈추거나 슬슬 감아주면 바람을 탄 연은 높이높이 올라가고, 풀어주면 멀리멀리 날아간다.
연이 어느 정도 높이 오르고 멀리 나가면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도록 얼레를 조종한다. 연실을 풀어줄 때 연이 좌우로 흔들거리는데 오른쪽으로 기울 때 실을 얼레에 빨리 감으면 연이 오른쪽으로 기운 채 오른쪽으로 재빠르게 나아가고, 왼쪽으로 기울 때 빨리 감으면 왼쪽으로 나아간다. 좌우로 연이 나가다가 곤두박질치도록 하려면 얼레를 밑으로 탁 채면서 앞으로 재쳐 실이 확 풀어지도록 하면 실의 장력이 갑자기 없어져 마치 실이 끊어진 것처럼 연이 납신거리며 밑으로 곤두박질해 떨어진다. 이런 재주를 ‘튓김’, ‘튓김준다’고 한다. ‘튓김주어’ 적당한 고도로 내려왔을 때 얼레를 멈추면 연은 바로 서고 얼레를 감으면 연은 다시 치올라간다. 좌로, 우로 나가게 하는 것, 치올라가게 하는 것, ‘튓김주어서’ 내려오게 하는 것 등 재주를 적절히 쓰면 공중에 있는 연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이런 연의 조종술로써 연싸움을 한다. 연실을 서로 얽어서 맹렬한 속도로 풀어주면 실의 날카로움으로 상대방의 실을 끊어버려 연을 날려 보내는 것이다. 연싸움은 실을 얽을 때 상대방보다 높이 올라 위에서 얽어 밑으로 내려야 실의 중력까지 실려서 끊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얽을 때 연을 잘 조종해야 한다. 일단 얽으면 실의 날카로움과 얼레에서 실이 풀어지는 속도를 빨리 해서 마찰이 세어지도록 해야 한다. 실이 풀려지는 속도가 느리거나 얼레에 감긴 실이 무슨 일로 풀리지 않고 정지되면 큰 낭패로 상대방에게 베어 끊기고 만다.
실이 끊어진 연은 납신납신하면서 고도가 떨어지고 바람 따라 멀리 날아간다. 꼬마들은 끊어진 연을 줍기 위해 날아가는 연을 쳐다보면서 뛰어간다. 도랑에 빠지기도 하고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허겁지겁 연을 따라 쫒아간다. 연의 고도가 떨어지면 끊어진 실 끝이 땅에 끌리면서 바람타고 나간다. 땅에 끌리는 실 가닥을 잡으면 그 연은 잡은 사람의 것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실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연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수가 있다. 이때는 나무에 올라가서 잡거나 장대로 그 실을 휘감아서 잡기도 한다. 아무도 못 잡고 겨우내 연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거나 전주에 걸려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날아가는 연의 실 가닥을 잡고 실을 팔에 다 감으면서 연을 끌어내리는 기분은 연을 주워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다.
연을 띄우고, 자치기를 하고, 새끼를 둥글게 감은 새끼 공으로 공차기를 하고 또 한쪽에서 제기차기를 하고 노는 터실은 가을걷이가 끝난 때부터 이듬해 봄에 보리밭매기 할 때까지 언제나 아이들이 왁작거린다. 교동 뒷산에서 오른 쪽으로 뻗으면서 산줄기가 터실 쪽으로 내려오다가 들판에 앉으면서 언덕진 밭이 되고 더 뻗어 내리면서 높은 다락논이 되어 터실까지 온다. 그것이 어른 키 한길 높이쯤 되는 논두렁과, 아래 평탄하고 넓직한 대여섯 마지기 논의 작은 논두렁으로 구획지어 있다. 이 한길쯤 되는 논두렁 밑은 겨울에 햇살도 도탑고 차가운 북풍도 막을 수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 아래 대여섯 마지기 논은 많은 아이들이 하도 밟아삐대서 논바닥이 반질반질했다. 보리씨앗을 넣어봐야 아이들 발에 시달려 소용없기도 했지만 이 논의 주인은 아예 보리씨앗을 넣지 않고 겨울은 묵혀둔다. 모심기철이 되어서야 비로소 물을 잡아 논 구실을 하도록 해서 벼농사만 짓는다. 그런데 벼농사는 아이들 발자국이 거름이 되는지 아주 잘되었다.
언덕바지 아래 햇살이 도타운 곳에서 연을 띄우지만 거기 널찍한 논에서는 짚 꾸러미를 새끼로 챙챙 동인 공을 만들어서 축구시합을 하고 난리이다. 우리가 어릴 때에는 축구공이 귀해서 짚으로 만든 공으로 대신하거나 어쩌다가 돼지 오줌주머니(방광)를 구하면 거기에 바람을 불어넣어 실로 묶어서 대신했다. 짚으로 된 공을 헤딩하다 그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보얗게 되고 그 먼지에 기침을 콜록콜록하며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뛰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또 한쪽에서는 진볼이 한창이다.
언덕바지 아래 한편에서는 제기차기를 한다. 제기는 엽전을 미농지에 놓고 말아 접어서 엽전구멍에 접힌 미농지 양쪽 끝을 밀어넣어 주욱 빼고, 이것을 찢어서 수술을 만든다. 미농지가 아닌 다른 종이를 쓰면 길이로 찢어지지 않아서 수술을 곱게 만들 수 없다. 화폐가 근대화 된지 오래지 않은 때라서 못 쓰게 된 엽전은 어느 집에서나 농 설합에 많이 남아 있었다.
제기차기는 그냥차기, 두발차기, 차는 발을 땅에 대지 않고 그냥 들고 차는 깨금차기 등이 있다. 대개 세 번을 차서 찬 횟수를 합쳐 진 사람이 종놈이 된다. 종놈이 되면 이긴 사람이게 제기를 멀리 찰 수 있도록 던져 주고 떨어진 제기를 주어 와서 또 던져 주어야 한다. 던져주었을 때 헛차거나, 던져주는 종놈이 던져주는 듯 하면서 헛던졌을 때 속아서 헛발질하면 종놈에서 풀리고 다시 제기차기를 한다.
이도저도 싫은 아이들은 언덕바지 아래에서 둘이 마주앉아 고누를 두고 있다. 우물고누와 참고누를 두었다. 우물고누는 원을 십자로 갈라서 원이 사분되는 것 중 하나를 지워 우물이라고 하곤 말을 2개씩 가지고 두는 것이고, 참고누는 네모 3개를 속에 겹쳐들도록 그려서 모서리를 연결하여 선을 긋고, 또 네모의 변을 연결하여 선을 그어서 자기 말을 하나 뛰어 넘어 말이 진행하는 고누이다.
다른 논배미에서는 자치기를 한다. 한 치 낙낙한 굵기의 길이로 한 자 좀 넘는 둥근 막대를 자로 하여, 양가를 비스듬하게 엇벤 것을 반 치 굵기에 반 자 길이가 되는 막대기를 치는 것이다. 이것을 ‘토끼’라고 하는데 놀이마당 한쪽 구석에 넉 자 지름 쯤 되는 원을 그려 그 안에서 한손에 쥔 ‘토끼’를 살짝 던져 다른 손에 쥔 자막대기로 힘껏 친다. 자치기를 함께 하는 동무들이 날아오는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데 공중에서 잡으면 자치기 하는 사람(토끼를 쳐 날린 사람)은 ‘토끼’를 잡은 사람에게 그냥 자를 넘겨주어야 한다. 만일 날아가는 ‘토끼’가 그냥 땅에 떨어지면 동무들 중에서 자신 있게 던지는 사람이 “토끼”를 던진다. 원에 들어가면 던진 사람에게 자를 넘겨주고 인계하고 자치기를 하도록 한다.
이때 자를 쥔 사람은 “토끼”가 땅에 떨어지기 전이나 “토끼”가 땅에 떨어져 구르고 있어 아직 정지하기 전에는 몸이나 발, 자막대기로 쳐낼 수 있으나 맨손으로는 할 수 없다. 만일 쳐내는 데 성공했을 때는 날아간 “토끼”가 떨어진 곳에서, 못 쳐냈을 때는 그냥 “토끼”가 멈춘 그 자리에서 “토끼”의 가장자리를 쳐서 톡 튀어 오르는 토끼를 자막대가로 쳐내어 원에서 더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한다.
세 번 “토끼”를 쳐내어 마지막에 떨어진 곳에서 원까지, 정확히는 원주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가지고 있는 자막대기 길이를 기준으로 몇 자라고 부른다. 놀이에 참가한 동무들이 모두 이 주장을 인정하면 먼저 딴 것에 합쳐 자수를 갱신한다. 이때 자를 쥔 자치기가 욕심이 많아 지나치게 자수를 많이 요구하면 동무들 중에서 한 사람이 “재어라!”고 요구한다. 이러면 실측이 벌어진다. 자를 쥔 자치기는 “토끼”가 떨어진 곳으로부터 원을 향해 똑바로 재어나간다. 이때 모두 다 같이 하나, 둘, 셋, ……, 마흔 여덟, 마흔 아홉, 쉰, …… 합창해서 헤아려 나간다. 부른 수보다 자수가 넘으면 그 수가 먼저 것에 합해지고 놀이는 계속하지만, 모자라면 그 수는 무효로 되고 자치기는 “재어라”고 요구한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해서 미리 약속된 목표의 자수를 먼저 초과한 차례로 일등, 이등, 삼등, 등수가 정해진다. 500자 내기를 하지만 1000자 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너무 지겹다.
겨울에는 물이 고인 논바닥도 얼고 냇바닥도 언다. 내가 어릴 때는 겨울 기온이 요즘보다 상당히 낮았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천강이 결빙하는 것은 예사였고 30년대나 40년대 내가 어릴 때는 소한, 대한 절기에 남천강이 얼어붙어 스케이팅도 하고, 마음 놓고 얼음 위를 건너다니기도 했다. 이 시절에 한강은 소달구지가 마음대로 건너다닐 만큼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고 한다.
터실에 나와 노는 아이들은 놀기에 정신이 빠져 추위를 모른다. 모두가 만성감기가 걸려 여 나문 살 되기까지는 시퍼런 콧물 두 줄기가 인중에서 올랐다 내렸다 했다. 앉은뱅이 썰매를 아재나 형에게 졸라 만들어서 감내에 가 얼음을 지친다. 감내는 얕아서 빠져야 겨우 종아리 물이다. 겨우내 감내는 아이들이 박작거린다. 썰매가 지쳐나가는 쿨룩거리는 소리, 썰매끼리 부딪치는 소리, 한쪽에서 팽이치는 소리, 때로는 서로 붙들고 볼퉁가지를 꼬집어 비틀고 싸우는 소리 등, 왁자지껄하고 활기가 넘쳤다.
팽이는 가게에서 파는 것도 있지만 대개 아재나 형이 다듬어서 밑에다 차령(구슬베아링)을 박는다. 반치 굵기의 길이 자반쯤 되는 막대기 끝에 한자 길이 헝겊쪼가리를 매단 채찍으로 팽이를 때리면 팽이는 더 힘차게 도는데 이때 팽이를 마음먹은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고 힘차게 다른 팽이와 부딪치게 할 수 있다. 팽이는 그냥 돌리기보다 부딪쳐서 상대방 팽이를 넘어뜨리는 팽이싸움이 재미있다. 팽이싸움은 물론 클수록 유리하지만 같은 크기라도 무거울수록 좋다. 팽이싸움은 같은 크기끼리 하므로 팽이는 가벼운 나무보다 무게가 나가는 참나무나 박달나무로 깎아 만드는 것이 좋다.
나는 팽이싸움에 지고 속이 상해서 집에 있는 박달나무 다듬이 방망이를 잘라 팽이를 만들다가 할머니한테 들켜 야단을 맞은 적이 있는데, 결국 할아버지가 그것으로 팽이를 만들어주셔서 가지고 나간 일이 있다. 감내의 얼음판에는 팽이채를 치는 ‘딱딱’하는 소리, 얼음위의 팽이가 튕겨 구르는 소리, 그리고 팽이끼리 힘차게 부딪치는 소리가 그 시끄러운 아이들 소리에 섞여 있다.
쥐불놀이와 달맞이
설이 지나고 정월대보름이 가까워지면 논두렁의 풀을 태우는 쥐불놀이가 있다. 논두렁의 풀 속에는 지난 가을에 온갖 벌레들이 까놓은 알들이 있고 땅 밑에는 유충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다. 새봄이 되면 이 알에서 깨어 나오고 땅 밑에서도 벌레들이 기어 나와 농작물을 해친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벌레의 알과 땅 밑 유충의 퇴치를 어린이들에게 맡김으로써 농작물을 보호하는 한편 겨울에 방안에만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도록 슬기를 베풀었다. 이것이 쥐불놀이이다. 논두렁의 풀을 태우고 나면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다. 이것은 들쥐구멍이다. 들쥐구멍을 아이들이 부작대기로 쑤시지만 쥐는 이미 달아나고 없다. 쥐를 소탕했다고 생각해서 쥐불놀이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쥐불로는 쥐를 잡지 못한다.
쥐불놀이를 하는 어린이는 그해 여름 몸에 빈대, 모기가 물지 않으며 더워도 물을 켜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쥐불놀이로 불장난을 하는 것은 좋다고 한다. 그러나 다 같은 불장난이라도 쥐불놀이 이외는 ‘밤에 오줌 싼다.’는 금기로써 금지시키고 있다.
쥐불놀이를 할 떼에는 부지깽이에 불을 붙여 논두렁의 풀에 불을 놓았는데 불이 꺼져 연기만 날 때는 이 부지깽이를 휘휘 휘두르면 금방 불꽃이 일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어린이의 놀이도 발달하는지 우리 세대 이후에는 깡통을 사용했다. 6.25전쟁 때 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그 추운 겨울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이런 깡통불을 일구며 지냈는데 그때부터 이런 쥐불놀이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논두렁이나 수로 둑에 불을 지른다. 신나게 놀다가 바지 밑을 태워서 집에 가면 엄마한테 부지깽이 매를 맞는 아이도 있었다.
쥐불놀이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나보다 한 두어 살 많은 재종숙 아재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여덟 살 쯤 되었을까. 터실에서 나와 함께 쥐불놀이를 하다가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왔다.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어디 갔다 왔노?”
“터실에서 쥐불놀이 했심더.”
“그래 재미있었나?”
“예”
그런데 이 아재는 그만 말이 넘치고 말았다. 아재는 나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아재에게는 종백부에게 말했다.
“큰집 아재요, 두암서는 쥐불놀이를 할 때 쪽재비를 억시기(아주) 많이 잡심 더.”
두암(斗岩)은 나의 고향 마을 성만 동네에서 등성이 하나를 넘어 수산(守山)쪽으로 나오다보면 국농포 어귀에 있는 동네인데 나의 종증조부님이 계셨다. 이 아재는 이 할아버지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그래, 우째(어떻게) 잡노?”
“이맘때쯤 되면 쪽재비 새끼가 다 컸는데요, 쪽재비 구멍에 불을 질러 연기를 부쳐 넣으면 구멍 안에 있는 쪽재비가 몬견디서 에미가 먼저 나오고 다음에 새끼가 그 구멍에서 꾸역꾸역 안 나오는교.”
라고 하면서 능청스레 대포를 놓는다(허풍을 친다). 할아버지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물으셨다.
“그래 네가 봤나?”
“예, 봤심더.”
“에레이 이놈.”
하고 귀여운 듯이 머리에 알밤을 하나 주고 쓰다듬어 주셨다. 곁에 있던 다른 아재들은 모두 “하하하” 웃었다.
어릴 때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그것은 아이의 상상력의 표현이다. 할아버지는 웃는 아재들에게
“야는(이 아이는) 그렇게 해서 쪽재비를 많이 잡아 봤으면 하는 말이제.”
라고 편들어 주셨다.
아이들은 쥐불놀이에 정신이 빠져 해 저무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다가 석양노을을 보고 집으로 간다. 들판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던 갈가마귀 떼들도 어디로 갔는지 조용하다. 이러한 쥐불놀이도 정월대보름날 달이 뜰 때 달불놀이로써 대단원을 내린다.
정월 보름이 되면 그날 아침에 오곡밥을 짓고 나물 반찬을 먹고 어른들은 귀밝이술이라면서 술 한 잔을 마신다. 이것은 1년 동안 귓병을 앓지 않고 귀 어두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날 사람들은 김치를 먹지 않고 개는 온종일 밥을 굶는다. 어린이들은 아침부터 달불놀이와 달맞이에 이미 혼이 떠 있다.
우리 동네 터실은 들판이어서 달불 놓을 높은 데가 없다. 그래도 동네의 소년들은 그냥 지낼 수 없어 애바른 아이들 몇은 감내를 건너 마아리 고개 밑 산에 가서 그 능선에 달집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달맞이 하고 내려오면 너무 늦어 밀양교 다리밟기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솔가지를 쳐서 터실에 가지고 와 높은 논두렁 위에다 달집의 뼈대를 만들고 그 안에 짚을 넣어 달집을 짓는다.
송징이 무당들은 이른 아침부터 징소리를 울리며 굿을 하고 송징이 개천에다 울긋불긋한 헝겊 쪼가리와 짚새기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짚새기 그릇에 밥을 담고 나물을 담아 흩어 놓고 온갖 잡귀를 달랜다. 달이 뜰 때가 가까워지면 송징이 무당들의 굿도 점점 절정으로 오르고, 울긋불긋 무당 옷을 입은 무당들이 개천 둑에 나와 징소리, 북소리, 꽹과리소리, 장구소리, 벅구소리를 울리면서 사모를 돌리는 지신밟기 패거리와 한데 어울려 터실 쪽으로 달맞이 하러 나온다.
터실에는 우리 동네 아가씨, 아지매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아지매는 처네를 쓰고 눈만 빠꼼이 내고 있다. 스무 나문 살 가까이 된 총각들은 떠오르는 달보다 처녀들 쪽에 더 관심이 있다. 한 동네에 살아도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가 없고 이때야 비로소, 그것도 먼빛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가씨들은 설에 입던 고운 옷을 입고 화장도 좀 하고 나온다. 어떤 처녀는 총각들이 그처럼 보고 싶어 하는데도 무슨 심술인지 처네를 뒤집어 쓰고 눈만 빠꼼이 내놓는다. 그러나 어쩌랴, 당시 그 시절의 풍습이 그런걸. 그래도 총각들은 용하게 알아본다. 하지만 나의 고모와 아지매들은 어른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해서라도 나갈 수 없고 나갈 생각도 못한다. 아지매들은 다만 대청마루 끝이나 축담에서 달뜨는 것을 볼 뿐이다.
수환이 아지매와 나는 함께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눈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어른들 모르게 대문을 소리 안 나게 살짝이 열고 나간다. 그전에는 아재들과 같이 나갔지만 아재들이 시골로 가고 난 다음에는 죽으나 사나 나 따라 나갈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내게 살짝 붙어서 얄밉도록 싹싹했다. 나의 작은아버지가 있지만 밖에 나가는 것을 아예 좋아하지 않아 둘이만 갔다. 먼저 터실에 가서 달불놀이 구경을 한 다음에는 남천강에 놓인 밀양교에 다리밟기하러 갔다.
밀양 읍사무소(지금의 시청)의 뒤에는 약 200미터 쯤 되는 산이 있는데 밀양 사람들은 뒷동산이라 한다. 터실에서 보면 뒷동산이 바로 동쪽으로, 보름달은 바로 이곳에서 뜬다. 남천강 밀양교와 제방에서는 반티산에서 뜬다. 아무튼 정월대보름날 날씨가 좋으면 쟁반같이 둥근 달을 구경할 수 있는데 대개 서산에 해가 졌어도 아직 환할 때 달이 뜨기 때문에 뒷동산 능선에 누르스름한 빛이 먼저 나온다. 이때가 되면 풍물소리는 점점 자지러진다. 그러다 달의 윤곽이 능선에 삐주룩이 나오면 모두 “달뜬다!”라고 함성을 지른다. 그러면 그 시끄럽던 풍물소리가 뚝 그친다.
모두가 올 한 해의 소망을 담아 솟아오르는 달을 맞는다. 그러는 동안 달은 자꾸자꾸 돋아서 반쯤 능선에 걸렸는가 하면 어느새 두둥실 능선 위에 뜬다. 달빛이 붉으면 그해는 가물 것이고 흰 빛이 돌면 물이 든다고 점친다. 많은 사람들이 두 손 모아 달을 향해 절한다. 총각은 장가가도록, 그리고 달덩이 같은 예쁘고 튼실한 아가씨를 만날 수 있도록 비는지도 모른다. 처녀는 늠름한 낭군을 달라고 절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람마다 제가끔 어떤 새해의 소망이 있을 것이고, 달님이 그 소망을 이루어 주리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달이 한 뼘 쯤 중천에 뜨면 모두 남천강 밀양교로 향한다. 내이동, 내일동의 성내 사람들(조선왕조 시대의 성은 왜놈들이 허물어 없앴지만 그 후에도 밀양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밀양교 건너 삼문동(三門洞) 사람들이 제가끔 달맞이를 하고 밀양교로 모여든다. 내이동, 내일동의 풍물패들은 성내 편의 강둑에서, 삼문동의 풍물패는 건너편에서부터 오고, 풍물소리가 자지러지는 속에 많은 사람들이 밀양교가 비좁도록 모여든다. 다리는 곧 다리밟는 사람들로 꽉 찬다. 저절로 좌측통행이 이루어지지만 서로 어깨를 비벼대며 달빛을 온몸에 받으면서 다리 위를 왔다갔다 한다.
다리밟기를 하면 그해는 다리 병이 없이 지낸다고 했다. 다리밟기는 다리를 자기 나이만큼 건너 갔다와야 한다. 아마 이것은 스물 안 쪽 젊은 청년을 기준으로해서 한 말일 것이다. 환갑 넘은 사람이 자기 나이대로 다리밟기하다가는 없는 다리병도 새로 날 것이기에.
수환이 아지매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아서 내가 다리밟기를 다 했는데도 한 번 더 건너 갔다와야 한다. 내가 일부러 그만 한다고 뻗대면 집에 가서 무얼 주겠다고 달랜다. 속는 줄 알면서도 새끼손가락을 걸어 다짐한다. 깍쟁이 같은 아지매는 집에 가서 약속 이행을 요구하면 입을 쏙 내밀고 혀를 낼름 내민다. 어쩐지 수환이 아지매한테는 속는 줄 알면서도 일부러 속아주고 양보해준다. 아마 어머니 없이 큰어머니(우리 할머니)에게 자라는 것이 불쌍해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항상 커다란 눈에 물기가 어려 있어 보기만 해도 내가 슬퍼졌다. 지금은 어느 하늘 밑에 있을까! 아, 기구한 팔자여!
정월대보름의 ‘다리밟기’는 총각에게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처녀들을 달빛 아래에서만이라도 보는 두근거림과 애틋한 재미를 주고, 평소 집에 갇혀 살던 처녀에게는 환한 달밤에 강바람을 쐬며 갑갑했던 마음을 한때나마 풀 수 있는 기쁨을 준다. 처녀들은 처녀끼리 서로 붙들고 딱 의지해서 걷거나 또 집안 머슴애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다리밟기’를 한다.
‘다리밟기’를 할 때 총각이 손에 껌정을 묻혀 처녀 얼굴에 칠하면 그 처녀에게 장가들게 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딱히 이 말을 그대로 믿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난기가 넘친 어떤 총각은 손에 껌정을 칠해서 마주 오는 처녀 얼굴에 문지르는 장난을 한다.
“꽤액, 아이고 자식아야, 문딩이 자식아야!”
“낄낄-,”
후다닥-
장가들기는 고사하고 우선 욕만 된통 얻어먹는다. 한쪽에는 처녀의 쇠된 비명소리, 한쪽에서는 낄낄거리며 내빼는 소리, 사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아이고, 우짤끼나(어떡하나). 얼굴에 이기 뭐꼬, 껌정 아이가, 깔깔깔.”
“어떤 빌어묵을 문딩이 자석이고, 아이고 참, 내.”
얼굴에 껌정 칠 당한 처녀는 분해하고 곁에 함께 있던 처녀는 처녀다운 그 헤픈 웃음을 참지 못해 입을 틀어막고 웃는다.
이러는 가운데 달은 점점 중천에 높이 뜨고 강물은 달빛을 받아 빛나고 영남루는 달빛에 환하게 드러난다. 저 멀리 반티산과 용두산을 잇는 능선은 더욱 뚜렷해진다. 고개를 돌려 반대쪽을 보면 종남산은 달빛을 온통 그대로 받아 그 자태가 점잖다. 저 멀리에서 들리는 풍물소리는 점점 잦아지고 다리 위의 사람들도 점점 성겨지고 밤은 점점 깊어간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그래도 다 못한 기분은 제방 위에서 들리는 유행가 소리로 풀어주고 있다. 물가에는 한 쌍이, 그래도 한두 걸음은 떨어져 앉아 있다.
이 대보름이 지나면 겨울의 농한기가 끝나고 농군들은 새봄, 새해의 농사 마련에 들어가고 읍내 사람들은 지난해에 끝난 여수(與受)가 새롭게 시작된다. 아이들도 부모 따라서 새해의 새 일을 거들고 심부름에 열심이다. 연은 이미 달집에 태웠거나 멀리 날려 버렸고 자치기 막대기는 부엌 아궁이에 들어갔고 제기 속의 엽전은 농 서랍에 다시 들어갔고 썰매도 헛간 다락에 들어갔다. 한 살 더 먹어 철도 좀 더 든 것 같고 터실은 새 아이들로 다시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