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갈증은 축복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많은 백성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직 하느님만을 공경하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람들을 당신에게 인도하는 빛을 비추는 ‘등대’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고 자주 우상 숭배에 빠져 서로 다투고 해치기를 거듭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시어 엄중하게 경고하고 심판을 예고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고집스럽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곤경에 처하고는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가장 큰 곤경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제국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이 점령되어 성전은 파괴되었고 지도층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페르시아로 패권이 넘어갔고 기원전 538년 키루스 임금이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향을 허락합니다.
그들은 부푼 꿈을 안고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내분과 이민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을 뉘우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이사 63,17.19)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간절한 외침을 들으시고 때가 찼을 때 당신 아드님을 구세주로 보내십니다.
간절하게 하느님을 찾는 마음, 곧 영적 갈증은 축복입니다.
갈증이 있어야 물의 소중함을 알고 허기가 져야 음식의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갈증이 있어야 하느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그분이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내 영혼이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평안함이 없나이다.”라고 자신의 영적 갈증을 토로했습니다.
이 갈증은 “생수의 원천”(예레 2,13)이신 하느님을 만나면 사라집니다. 내세에서 하느님을 마주 뵙고 충만한 복락을 누리게 되면 더는 영적 갈증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하느님을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천국에서는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만날 것입니다(1코린 13,12). 이 복된 만남을 고대하는 사람이라면 살아있는 동안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대림절은 이미 오신 주님을 기억하는 동시에 세상 종말에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그분을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신앙인은 유한한 세상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시편의 저자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시편 42,2-3) 영적 갈증을 길잡이로 삼아서 하느님을 마주 뵙고 한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그 복된 날을 희망하며 매일의 삶을 사랑으로 채워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