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물이나 그에 대한 아류로 열을 끓었던 당시 한국 영화계에 구원 타자 격으로 나선 영화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빈틈없는 사건처리와 시대상의 조율을 통해 보여줬던 봉준호의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당시 상업적은 면에서도 적지 않은 만족을 가져다 줬지만 그보다도 장르라는 그물아래 걸려 허우적대던 한국영화에 새로운 길을 모색할 여유를 주었기에 충분히 입지적인 영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플란더스의 개에 이어 살인의 추억 이후 괴물 이라는 후속타로 자신이 갖고 있는 상업영화로서의 장점을 다시 한 번 증명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봉준호 적인 색깔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괴물이라는 영화는 그 관객 동원수 만큼 최고의 영화로 손들어주기에 주저하는 바가 많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감각적인 면이나 내용적인 면에서 출중한 영화였고 그에 봉준호 특유의 마이너 계열의 영화였던 괴물은 그런 군중의 기대심리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시작한 영화였습니다만 전작만큼 질적인 측면에서 관객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소재가 갖고 있는 난점 때문에 감독으로 그 영화 전반에 다가서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미 물릴 대로 물린 쌍 팔년도 식 괴수 영화를 갖고 그 소재가 갖고 있는 센티멘털이나 신선함을 유지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미 이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감독이 각오하고 시작한 딜레마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얼마큼 소재를 독창적인 관점에서 전개해 갈수 있냐와 별게로 뒤따라오는 사건에 연결성이나 그 조임이 약했다는 것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걸 봉준호 감독의 캐릭터가 갖고 있는 개성과 특출함으로 넘겨짚기엔 괴수 영화라는 것을 통해서 선사 되어야할 내러티브가 분명 약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봉준호 감독님은 충분히 젊습니다. 지금에 업적도 결코 작다 할 수 없지만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감독에 한사람인은 분명한 듯 합니다.
그러나 고작 한편을 건너뛰는 동안 그가 갖고 있는 영화에 대한 마인드나 집중력이 퇴색 됐다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는 봉준호 감독의 개인적인 마인드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나의 장르적인 규범에서 시작된 영화가 그 컨벤션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모범적인 답안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단순히 봉준호 감독의 색깔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영화라는 구조물에 올바른 전형으로서
이 영화를 다시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시점에 대한 문제>
영화는 기본적으로 플롯을 주축으로 합니다. 그것은 영화 전반에 골격을 이루는 축이자
앞으로 어떻게 영화를 진행시킬 건지에 대한 그 시작이 됩니다.
플롯 이라는 것은 이야기의 인과성 사건과 사건의 연쇄성을 뜻합니다.
즉 어떤 컷도 홀로 존재하는 것 이아니라 영화 전반에 인과성 짜임 세를 갖는다는 목적 하에서 존재 이유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의 장면은 그 이전에 오는 장면에 대한 결과가 되던가 이후에 장면에 동기 인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런 짜임세 에서 수작 이였던 이 영화는 시대에 대한 풍자가 주는 도특한 색깔과 장르의 맛 그리고 끊임없이 그런 장르적인 컨벤션에서 벗어날려는 감독의 의도된 약동으로 조화되어 관객 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그러나 맹점도 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즉 모든 장면과 컷들의 영화 전반적인 결집력과 완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연계된 요소들이라 했을 때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영화 속에 자리 잡고 있어 도무지 이장면의 영화의 어떤 맥락과 관계있나 의문을 주다가 이야기의 진행 속에 슬그머니 묻힌 장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이야말로 다른 장르적인 영화들과 구별되는 봉준호 감독의 색깔이자 언어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 장면은 들판에서 방아깨비를 쳐다보고 있는 소년의 시선에서 시작합니다.
영화의 처음 컷 도입부는 영화가 갖고 있는 시대나 장소의 배경 그리고 그 속에 아울러져있는 영화의 모티브에 첫인상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그만큼 영화 전반에 대한 느낌이 함축적으로 설명해 가야 할 필요가 있는데 살인의 추억에서의 첫 장면은 그런 점에서 조금 예외적인 도입부를 갖고 있었습니다.
방아깨비를 보고 있는 소년의 시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컷은 영화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보는 것 무언가를 응시함으로 얻어지는 진실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아이러니를 갖고 있고 회손 되어져 문제를 겪는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정적인 아이의 시선은 경운기를 쫓는 아이들과 대비되며 아이는 여자가 살해된 현장에 남아
송강호(박두만 역)가 말을 거울처럼 되풀이 합니다.
영화의 도입은 소년이라는 장애에 막혀 공백을 갖고 초반부터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즉 영화의 인과성이라는 플롯의 시스템 속에서 진행이라는 목적에 역행하고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게 소년이라는 존재가 됩니다. 이 장면은 다음 장면과의 연계성을 확보하지 못한 체 곧 관객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지만 영화상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장면으로 이 영화의 짜임새에 공백으로 위치를 확보하게 됩니다.
전 이것이 봉준호 감독의 언어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장르적인 속성상 무엇을 보느냐가 가장 중요한 영화가 됩니다 하수구 터널 어두운 곳에서 시작된 살해사건은 인간의 존엄성 도덕성에 그늘을 쥐게 해주고클라이막스에선 그 문제에 대해 진실을 못 쥔 채 해답을 어두운 기찻길 터널로 빨려 보넵니다.
마지막 엔딩에 와서 영화 전반에 걸쳐 추구되어온 궤도에서 탈피된 채 모든 걸 잊은 듯 일상사를 보네지만 오랜 만에 들린 사건 현장에서 그간 잊으려 했던걸 다시 되묻게 되는 시험에 놓입니다.
이 마지막장면의 물음은 항시 형사의 입장에서 격동적으로 진행되어오다 고스란히 관객의 목으로 돌아옵니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 자체로는 아무것도 해결해 줄게 없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됩니다. 결국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지만 그 발자취를 따라간 곳에 범인은 없었고 사건의 정황에서 진지한 심중을 갖고 지목할 수 있던 범인이(박해일- 박현규 역) 있었지만 증거 부족이라는 법의 허울 때문에 놓쳐버리게 됩니다.
단순히 영화적 허구가 아닌 실사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기 때문에 정말 살인자는 누구 일까 에서부터 그에 꼬리를 이어 쏟아져 내려오는 현실에 많은 모순들 영화 속에서 마지막 까지 범인의 윤곽이 평범하고 흐렸던 것처럼 과연 우리는 일상사과 사회 속에서 평범이란 자기 균형과 법의 합리화라는 모순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과 모순이 은폐된 체 살아왔는지 되묻게 됩니다.
물론 이영화가 미해결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범인의 윤곽이 묻혀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스토리 라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포커스를 맞춘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묻혀 저버린 사회의 정의라는 것과 진실에 대한 그의 시선이라는 것은 그리 먼 이해가 아닙니다.
즉 실사에선 범인이 의중이 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영화가 허구적인 매체라는 특성상 스토리 라인을 보안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 그게 영화가 갖는 메리트를 해친다는 점에서 피해간 길이라 하더라도 그간 영화 속에서 자행되어 오던 암시와 복선에 대해 어떤 가시적인 결과물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어둠속으로 묻어 버렸다는 것에서 우리는 감독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까지 범인의 얼굴을 묻는 송강호의 얼굴에 그냥 평범하다며 그 윤곽을 흐리고 있습니다.
이런 결말은 분명 플롯을 중축으로 하는 다른 영화들과 상이한 결론이 됩니다. 보통에 영화에선 악당은 죽고 선의와 정의는 결국 자신의 의지를 실천시킴으로서 관객에게 대리만족과 가치 회복을 통한 자아의 안정감이라는 가공의 선물을 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완결 지어지거나 해결 되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그 결말을 관객들의 목으로 되묻고 있습니다.마지막 엔딩은 분명 영화 전반의 플롯 즉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에 합당한 결말이 있어야한다는 플롯에 의지에 위배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게 있습니다. 이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분명 플롯이라는 철도에서 이탈하여 대형 사고를 낸 기차가 되었지만 결코 이것이 선로를 이탈한 즉 인과 원인을 잃어버린 무중력으로서의 결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결말에 원심력을 주고 있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공황은 영화 초반에서 겪었던 아이가 송강호의 말을 계속 되풀이하던 장면의 공황에 이어져 감독이 전하고자했던 메시지 물음을 완성된 문장으로 연결시켜줍니다
맨 처음에 소년의 되물음으로 형성된 공백은 영화가 플롯에 의해 진행되는 도중에 그만 잊혀져 버렸지만 영화의 인트로 첫인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후 전개되는 플롯의 진행과 엇박자를 뛴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심중 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또다시 마지막 결말에서 행하여진 플롯에 대한 이탈은 영화가 해답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스스로 결말을 구축해야한다는 정신적인 여백 속에서 필연적인 연상으로 들어나게 됩니다.
즉 둘 다 플롯에 위배되어 영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공통점이 뇌리 속에서 지워졌던 맨 처음 장면을 각성시켜주고 이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되며 영화 내네 제기되어온 갈등과 문제 제기에 대해서 해답을 얻지 못했다는 것과 필연적으로 어떤 해답을 얻고 극장 안을 빠져나오고 싶은 관객의 준비된 욕구가 끊임없이 송강호의 말을 따라 되묻는 소년의 모습과 연계되어 이 작품에서 무언가의 결과를 원하는 관객들에게 은유로서 타점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서도 마무리 짓지 못한 공백은 다시 이영화의 도입부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 살피게 하는 에너지가 되고 있습니다
소년의 되물음과 그의 시선이 무엇을 쫓았는지는 대한 것이 심리적인 이미지가 되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정적인 소년의 행동과 되물음은 송강호의 타점 즉 어린이라는 소실점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에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우리가 과연 소년시절 무엇을 잃고 왔는지 되묻게 됩니다.
이것은 어른이 소년으로 현실이 과고로의 회유 일 뿐만 아니라 맨 처음의 농촌의 정적인 풍경 자연의 모성애적 이미지는 이후에 전개되는 인간의 추악한 비극과 삶의 각박한 속에서 다시 자연, 모성애로의 회복이라는 플롯도 갖고 있습니다.
조영구 (김뢰하)형사가 자리를 짤른후 나무에 걸어 링게를 맞고 있는 송광호의 모습은 삶의 가박함속에서 자연에 기대는 감독의 시선이 되고 방아깨비를 잡는 소년의 정체된 현상의 모트부가 영화상의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자연에 가까운 이미지였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즉 범인이 누구인지는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어둠속에 감쳐버렸지만 대신에 영화는 이것으로 통해 우리에게 마지막 선물을 줍니다.
관객은 범인을 잡음으로서 그간 자행되던 비인간적인 행위와 비극에 대해 보상을 얻지 못했지만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영화 속에서 꾸준히 드러나 오던 현실의 무게감은 다시 자연으로 회유되어 우리가 삶의 각박한 속에서 잃고 살아온 게 무엇인지 그 온기를 다시 느끼게 해줍니다.
물론 이런 시각이 충분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어느 한 컷을 놓고 너무 비약된 해석이라고 말하시는 분들도 계실 꺼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결론에 도달하든 영화 전반에 가쳐져 있는 것을 경제적으로 소비시켜야하는 엔터테이먼트의 속성상 플롯에 위배되어 나오는 장면은 분명 영화의 진행에 위배된다는 점에서 그 유죄가 인정되어야만하고 그럼 그것이 제거 되어야 한다는 판결이 나던지 .아님 다른 목적이나 필요성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
<무엇을 보느냐의 영화>
영화 초반에 감독은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피해자 오빠와 강간범을 두고 어느 사람이 강간범이고 피해자 오빠인지 알아 맞혀 보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형사의 1인칭 관점에서 시작하지만 그들의 보는 시점은 고스란히 관객의 타점으로 돌아옵니다.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라는 장르의 성격상 그리고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의 성격상 진범이 누구인지 윤곽을 가려내는 데에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게 됩니다.
즉 이 영화에서 관건은 손에서 놓쳐진 정의의 실현이나 악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그간 암시나 복선을 따라간 긴 실마리와 의도된 탈선과 속임수 속에서 그 어둡고 지루한 장막을 걷어 내고 누가 범인인가 하는 문제! 즉 관객의 눈앞에 들이대고 누가 범인인지 확정을 내리는가 바로 보는 것이 관건이 되는 영화가 됩니다.
이런 영화는 진범이 누구인지 확정되는 순간 그동안 유지되고 달구어져 온 긴장감은 끊기고 이후 일사 처리하게 클라이맥스로 치닫게 되는데 보통 미스터리 물에서 진범이 범인을 색출하는 형사와 악당이라는 대립구조상 영화가 진행되기 위해선 범인이 끊임없이 사건에 개입해야하고 그로 인해 영화상에 발자취 지문을 남기기 때문에 보통 범인이 잡희 전에 이미 관객들에게 그 윤곽을 들어내게 됩니다.
또는 무서운 영화처럼 범인의 몽타주 겉에 가면 따위로 치졸한 위장 따위를 하는 영화도 있지만 누가 범인일까 하는 궁금증이나 문제제기는 영화 종반에 체 이르기 전에 질려버리고
칼 든 범인과 여린 미소녀의 대치 지극히 자극적인 것 에 뇌리를 빼앗겨 흐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누가 진범인지 또는 설정된 미스터리에 진의가 드러나는 데에서 영화가 갖고 있는 생명력도 소실하게 되는 게 이런 영화들이 갖고 있는 구조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런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영화 속 드러나는 결론보다는 과정에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구성을 했고 또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각적인 메커니즘을. 고안하게 됩니다.
그 메커니즘에 전체적인 도면이 되고 시작이 되는 게 강간범과 그 피해자 오빠를 아무런 암시 없이 가려내라는 감독의 종용입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이 앞으로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 시각적인 메커니즘 영화를 보는 코드를 선물 받게 됩니다.
눈을 통해 뚫어져라 쳐다보면 누가 범인지 알아낼 수 있다는 송강호의 떡밥과 그 미끼를 통해 진범을 낚아보라는 문제제기는 그 순간을 지나서도 형사가 용의자와 대치되는 각각의 순간마다 똑같이 적용되며 코드가 되어 관객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고 영화와 함께 레일을 달리게 됩니다.
즉 이것이 봉준호 식 팔팔 열차가 선택한 영화작법 , 어떤 길을 어떻게 달릴지에 대한 선로의 선택이 됩니다.
영화 속에서 마지막에 우리는 어두운 미궁을 헤매다가 한줄기 빛에 쬐이는 것처럼 용의자들을 목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목격되어진 용의자가 진범이 아니라는 전례가 있기 때문에 감독의 들이대주는 떡밥에 믿음을 갖지 못하고 우리의 두 눈에 그 진의 여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감독 또한 제시한 앵글의 시점도 어떤 결론에 주목하는 것보단 철저히 중립을 유지하며 그 목을 관객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즉 봉준호 감독이 제시한 메커니즘은 단순히 누가 범인인지 끝나는 결정론이 아니라 그 진행 과정에 더 많은 메리트를 남기고자하는 의도에서 시작된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이로 인해 영화가 제시해주는 자리에선 안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보는 것 느끼는 것에 더 무게를 두면서 영화 속에 몰입하게 됩니다.
진범이 누구인지 가리는 문제는 영화 속에 남긴 지문이나 그 흔적이 아니라 순전히 시각적으로 목도하고 그것을 어떻게 판단 내릴지 문제가 됩니다.
즉 영화의 결정론에 무게의 추를 실어주는 것 보다 그 과정에서 주어진 것을 받아먹는 식에 수동적인 영화 관람 자세보단 번번이 그런 떡밥에 걸려본 관객들의 위기위식이 능동적으로 영화를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메리트입니다.
<과연 시각적인 것만 있는가?>
자 이제 우리는 이영화가 얼마나 보는 것 시각적인 목도에 치중한 영화인지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알았습니다.
이 사실에 주의한 상태에서 다시 영화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맨 처음 송강호 떡밥 사건이 지나고 그로부터 부흥을 얻어 이어지는 떡밥살포와 낚시 세례를 아가리로 받아가며 결국 결말에 당도하게 됩니다.
영화의 엔딩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어떤 결론을 쥐어주지 않고 끝나지만 우리가 영화를 다시보고 자했던 초점은 그보다 시각적인 메커니즘이 이 영화에 얼마나 관여했나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따르면서 한 가지 문제에 당도합니다. 생각했던 것만큼 시각적인 코드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고 그나마 있던 것도 어떤 장막에 둘러 싸인 체 갈증을 유발하는 빈곤에 안착하게 됩니다.
이것 하나의 인식만으로 우리가 도착 할 수 있는 것은 이 칙칙한 영화에서의 광명이 아니라
새로운 떡밥 이라는 거죠
분명 제 결론으로 이영화의 의도된 시각적인 메커니즘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가려지는 것 사이에 이런 조율이 이 줄타기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지 영화가 막 내리는 그 순간까지 끊을 놓치지 않고 이어져 올수 있을지 봉준호 감독은 고심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하나의 방식은 그 방식이 적용된 이후로 중독성을 낳습니다. 결국 하나의 방식을 붕어빵 찍든 그대로 들이부었을 때 써먹을 수 있는 것엔 한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독이 고안한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카메라의 앵글을 표적보다 아래로 하향하여 찍던가 실루엣이나 어둠에 묻혀서 보여지는것에대한 이 영화의 방식의 중독을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영화를 되짚어보시면 그런 의도로 잡혀져 있는 컷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식으로 요리조리 줄타기를 하다 의외의 선물로 신을 쓰기도 하지만요 바로 용의자가 입고 있던 빨간 팬티요
둘 제 앞서 말씀 들였듯이 시각적인 메커니즘을 사용한 것은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베일로 얼마큼 더 깊이 꽁꽁 감추느냐가 긴 장선을 유지시키고 경제적인 실리를 창출하는 영화에 서 장르적인 컨벤션과 영화적인 암시와 지문이 범인의 윤곽을 직행하는 것을 피해가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말씀 들였습니다.
즉 영화 전체적인 구조와 지문에 대한 은유 시각적인 메커니즘이 영화의 생명력을 연장시켜주고 있는 거죠
그런데 단순히 하나의 방식으로 일관해서는 영화 마지막까지 탄력성 있게 달려 나가 힘들다는 것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시각에 대한 은유 즉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데 시각적인 것보다 그 기능이 떨어지고 은유적인 것 바로 청각이나 촉각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구조적인 것에서 발생되는 고착에 대해 그 영화의 일부 요소인 시각적인 것을 활용해 간극을 발생시켰다면 그런 연장선상에서 결국 영화의 특성상 보이는 것을 지향하게 되지만 청각적인 코드로 또는 촉각 그 길을 돌아가면서 간극을 발생시키는 것 역시 좋은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영화상에 예를들어보죠
비오는 밤 남편을 마중하러 나간 유부녀가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 뒤를 발바오던 살인자가 휘파람 소리로 응수를 하죠 영화의 앵글은 휘파람 소리만 들려줄 분 범인의 실루엣을 잡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덮칠 때도 앵글은 하양자세에서 범인의 중요한 인상을 놓치고 말죠.
또 범인에게 유린당하고 살아남은 여자의 고백에서 그려지는 범인의 윤각이란 지극히 촉각적입니다 우린 즉 그 여자가 서술한 촉각에 대한 은유에서 범인의 형상 즉 시각적인 것을 그려내도록 종용됩니다.
네 바로 촉각적인 구동에 시각에 닫기까지의 간극입니다 .
바로 이런 것이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고 간극이 됩니다.물론 이런 것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의 컨벤션에서 그리 먼 거리에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봉준호 감독의 역량이 귀제였고 사용방법을 조금 달리 할 줄 아는 시각이 장르의 전형이라는 무덤에서 이 영화에 숨통을 튀어줬죠
<봉준호 감독의 장르의 컨벤션 벗어나기>
장르가 갖고 있는 컨벤션에 대해 정확한 규정은 없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영화상에서 꾸준히 행해여 지는 게 있어 그런 것들을 예로 삼아 컨벤션을 이해할 순 있지만 객관적인 정의에 다가서는 것은 힘이 들죠.
장르가 갖고 있는 컨벤션의 장단점은 일단 그 장르가 갖고 있는 색을 표하기에 가장 체계화된 지름길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중복 현상이 영화가 막 내리기 전에 영화가 갖고 있는 사건의 진행보다 관객의 이해가 먼저 나아 있다는데 에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타이밍 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이쯤에서 주인공은 각성하여 촌철살인을 감행하고 저쯤되서 악당은 나자빠지겠구나.
주인공이나 악당의 개성 넘치는 몽타주를 보면서 얼마나 그 기발함으로 우릴 몸서리치게 해줄게 기대해보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반경 이라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앉아 식당에서 칼질을 하고 있는 손님입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 우리가 시식하는 건 그 식당에 주력메뉴인 붕어빵 정도입니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 그들의 행동반경이란 예상외로 짧습니다. 그건 우리가 그들이 터트리는 사건 하나하나를 현상으로 이해하기에 앞서 그 영화의 모티브를 먼저 맛본다는데 에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소통이라는 것 마음과 마음의 대면이라는 것을 목적 삼는데서 오는 한계입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보면 모두들 알고 있듯이 이 영화는 다원화된 장르적인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 코미디 어느 한 장르에 편중된 게 아니라는 것이 영화의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분 배되 있다는 게 하나의 장르에 집중되어 생기는 장르적인 컨벤션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해줍니다.
미스터리한 구도에서 그 시작이 있다면 분위기가 점점 더워지고 답답해 질 때쯤 코미디가 나와서 그 열기를 씌워지고 다시 미지근하다 싶으면 드라마가 튀어나와 관객들의 공감대를 얻어가며 다시 미스터리한 추적에 불을 지펴 놓습니다. 스릴러는 영화의 주요 고비마다 그 박진감을 더 해주고요
다양한 장르를 이처럼 한데 혼합시키고 각각의 장점을 두각 시킨다는 게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쩜 한국영화에선 봉준호라는 코드이기에 가능했던 문제 일지 모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를 볼 때 다양한 장르를 만끽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감상에 주축이 되는 것은 미스터리라는 장르입니다 즉 우린 여러 맛의 음식을 한꺼번에 시식할 수 있었지만 식사 후 그 음식에 대한 뒷맛은 미스터리로 기억하죠. 그만큼 이 영화 속 다른 장르들이 영화를 풍부하게 해주는 부가적인 요소인 반면 미스터리는 영화의 전개와 사건의 연개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스터리가 이영화의 색깔이 되는데 미스터리 장르의 속성상 베일에 감쳐진 어두운 장막이 있고 그 장막을 한걸음 한걸음 정복해 나아가야한다는 이 구조는 단순히 형식이라 생각하기엔 너무나 필연적이고 핵심적입니다
즉 미스터리를 다룬다면 필연적으로 취할 수 박에 없는 이런 구조는 그 전형에 잘못 발 딛으면 너무 뻔 한 영화로 자리 매김 할 수도 있는 나락이 되기도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미 영화의 역사를 통해서 해법이 제시되어있는 튼튼한 대로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일을 걸어갔다는 것 때문에 이 길은 사실 대로이기보다는
영화에 열정을 쏟는 사람들을 나락으로 걸러내는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위험성에서 벗어나야 할 길을 찾아야합니다
대략 제가보기에 봉준호 감독이 조성한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미스터리 물을 범인과의 대치나 응징이라는 구조보다 그 자체에 베일을 벗기는데 주력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구조가 갖는 실리는 위에서 많이 언급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 들이지 않겠습니다.
둘 제 이원성에 구조를 뛰면서 자못 장르가 갖고 있는 전형으로 굳어질 수 있는 영화에 생기와 약동을 뛰게 했죠.
그런 점에서 캐릭터가 갖고 있는 힘이 컸습니다. 영화상에서 그 캐릭터가 갖고 있는 성격이나 특성은 그 캐릭터가 영화상에서 행동할 수 있는 반경에 범위가 됩니다.
어리바리한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항상 주변의 세계를 잠재된 위험과 난동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그가 갑자기 제임스 본드가 되어 카리스마나 영화상 진지한 무게를 들어내긴 힘든 법입니다 물론 코미디는 제외 하고요.
로맨스 물은 로맨스 물 코미디는 코미디 액션이라면 액션 이처럼 그 장르마다 등장인물은 자신의 행동반경에 맞춘 성격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영화의 주인공이 이처럼 다채로운데 무슨 말이냐 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겉으로 들어나는 가시적인 성격에 문제가 아니라 그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유전적인 속성과 그 속성이 갖는 행동반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등장인물들의 갖고 있는 성격의 개성은 그 인물들이 자리매김하는 포지션과 동일성을 뛰게 됩니다.
즉 그가 그 사건 속에서 활약할 수 있는 내용이나 범위는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분명히 한정돼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선 캐릭터의 이원성을 뛰었습니다.
사건에 접근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갖은 캐릭터가 있는가? 반면 오히려 사건을 문제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두 형사를 우린 이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송강호는 사건에 직선적으로 대치하는 게 아니라 특유의 개성으로 인해 엇박자를 뛰거나
가끔 얼토당토않은 요령으로 문제를 회피 해 갈려합니다 즉 사건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캐릭터죠 그에 비해 남자형사는 사건에 마주하여 적극적이고 진지하죠.
이런 이원구조가 가져다주는 실리는 말씀 안하셔도 충분히 아실 꺼라 생각합니다.
두 캐릭터가 갖고 있는 성격의 상이함을 통해서 바로 간극을 형성하는 것이죠.
근데 여기서 주위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두 캐릭터가 갖고 있는 비중에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살인의 추억처럼 악당이 계속 누군가를 죽여 나가고 관객은 제발 그 악당을 잡아 족쳐주길 소망하고 있는데 한 캐릭터는 계속 나자빠지고 한 캐릭터는 척척 그 사건들을 해결하고 접근해 나갑니다.
바로 살인의 추억의 캐릭터 설정이죠. 근데 만약 이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같고 .정말 저런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똑같은 개런티를 받고 같은 비중의 역을 소화해 내는 두 주인공이지만 관객의 소망을 대변해주는 캐릭터를 찾아 한 쪽은 관객들의 선택에 의해 조연으로 탈락해버리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캐릭터만 남아 영화를 진행해 가 버리게 됩니다.
영화의 시점이 되는 두주인공이 있어 그 시점의 상이함 때문에 간극이 발생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주인공이 독점하는 시점의 영화가 되어버리죠
즉 여기서 필요한 이해란 캐릭터의 성향이 틀리더라도 사건에 대치한 타점으로서 똑같은 비중을 갖추어 놓아 관객을 그 타점의 상이함속에서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극은 이런 조건이 형성된 이후에야 발생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 속에 놓여 있는 캐릭터의 특성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자 김상경(서태윤 역)은 사건이 갖고 있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진중하게 반영하는 캐릭터로서 사건에 직선적으로 대치해 나갑니다. 그러나 막상 그의 행동은 보조적이죠. 은둔하길 좋아하는 성격으로 표방된 박형사의 캐릭터는 중요한 순간 외엔 오히려 송강호보다 한발 뒤쳐져서 보조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반면 송강호는 드라마의 깊이를 갖기보단 코믹적인 요소를 반영하는 캐릭터입니다 사건과의 대치에서도 상당히 은유적이고 엉뚱한 면이 있죠. 그러나 서태윤형사가 행동보단 머리로 수사하는 범생적인 캐릭터라 했을 때 범인과 대치해서 오히려 활동성을 뛰는 것은 송강호죠
더욱이 그가 갖고 있는 코믹적인 요소로 문제의 초점에서 벗어날듯 싶을 때면 주문을 외어 되며 관객의 시점을 자신의 타점 속으로 끓여 들이죠. 내 눈을 봐 내 눈을 보실까(이건 단순히 대사가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시각적인 메커니즘을 뜻합니다)
물론 영화상에 포커스 자체를 봤을 때 송광호가 갖고 있는 유쾌한 면모들은 주목하고 싶은 매력을 발산하고 관객들을 끌어 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포커스 문제가아니라 영화상 어떤 타점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며 미스터리 그리고 드라마의 반영이라는 문제입니다.
<시대가 주는 메리트>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느끼셨겠지만 이 영화는 사건의 설정에 있어 시대상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어떤 상황에 대한 연유에서. 그 동기나 원인을 시대가 갖고 있는 특질에서 착안한다는 거죠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면 이 영화의 실제 모델이 됐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은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했을 시기인 5공과 6공의 격변기 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일 당시 쿠데타의 성립은 무능력하고 부정한 정권과 사회에 대한 척결이라는 홀리건 과 일단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 식에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가 공권력과 맞물려 시대의 흐름을 쥐어 잡던 시기였습니다.
시대상이 갖고 있는 모순에 대해서 똑같은 모순으로 메스를 들이대는 것은 더 많은 그늘과 어둠을 창출할 수 있는 위험한 사회 변역 이였지만 우리가 지금에 와서 그 시대를 되돌아 볼 때 당시 서민들과 민주에 대한 정신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맛보았던 쓴맛에 대해 성토를 하면서도 미온하지만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갖고 온정으로 대하는 것은 많은 부정과 그늘로 도륙 됐던 시대 이었지만 당시 어쩔 수 없는 실정이라는 필요악과 박정희 대통령이 갖고 있던 정신 이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5공에 들어서서 공권력은 그 권세를 버리지 않고 똑같이 한 시대를 쥐어짰지만 그에 앞서 동기가 되고 의도가 되는 시대정신이란 단순히 권력이 양산하는 힘의 논리와 이해관계에 점철된 어두운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어서 육공은 군사정권이라는 그늘에서 국민들을 해방시켰지만 사회의 변역에 필요한 조건 반성과 극복에 대해선 논의 되지 않았고 오히려 과거 군사정권의 유물이 살아남기 위한 방도로서 사회의 변혁과 야합이라는 또 다른 어둠으로 연장시켰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시대상이란 이렇듯 격동적이고 많은 모순들이 잠재되어있는 불온한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쇄 살인이란 단순히 한 미치광이 범인의 독단적인 연쇄 살해 극이라기보다 시대가 갖고 있던 많은 부정과 어두운 논리가 공권력이 갖고 있는 억지력을 뚫고 광기 어리게 표출된다는 역설적인 모티브를 갖고 있습니다.
즉 이 영화에서 형사는 지극히 서민적으로 그려지면서도 공권력에 대한 집행자로서 사람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역설적인 형태로서 묘사 됩니다
사회의 정의도 추구해야할 진실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공권력이라는 군사정권의 유물인 장검을 떠맏긴체 그 아이가 휘두르는 무소불위한 모습에서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자아내는 이 영화는 당시 공권력에 대한 비판도 반성도 아닌 정신이라는 뿌리를 잃은 체 눈앞의 정세와 이해에 휘둘리는 시대의 슬픔을 담아내는데 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송광호와 서태윤(김상경) 형사는 살해사건에 대한 분노와 유가족들만이 느낄 수 있는 슬픔이라는 것을 적절히 이어 받는 형태로 취해지지만 공권력을 행사할 때 그들의 눈은 지극히 어둡습니다.
즉 공권력이라는 것은 사회 정의 실현과 치안이라는 목적을 갖지만 정신이라는 뿌리를 잃었다는데 에서 그들의 행위는 다시 어둠에 발 딛고 돌아가는 역설을 취하게 되고 그런 모순 속에서 양산된 이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음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에 딜레마에 빠져 제거되지 않고 우리의 자화상으로 돌아옵니다.
영화 속에서 송강호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고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들이 됐던 서태윤(김상경)형사가 결국 서류에 의해 자신의 발등을 찍게 되는 것은 점핑 킥 짓밟기 등을 난무하며 이영화의 전무 유일한 파이터였던 그 형사가 자신의 다리는 잘리는 것 이 모두 당시 시대 정의로 대변되는 도구로서의 공권력에 모순과 양면성에대한 감독의 통찰 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런 시대상에 대한 시선과 더불어 이시대가 갖고 있는 속성을 아이콘화 시켜 영화적인 작법으로 대물이 하게 됩니다
시대가 갖고 있던 모순과 양면성과 그러기에 상황을 통제 수습하지 못했던 무능력! 그리고 제어능력의 상실에 나오는 여러 돌발 상황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감독이 다져놓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성질들에 대한 인식 이였습니다. 사건현장은 통제되지 못해서 중요한 증거물을 잃기 수차례이고 현장을 수습하여할 감식반 은 항상한발 뒤쳐집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돌발 상황들은 당시의 시대상이 전 근대적 이였다는 것과 5공과 6공의 격변기였다는 점에서 그 근거가 취해지고 아이콘화 되어 법칙으로서 영화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이해가 한번 관객들에 눈에 인정받고 납득 받게 되면 이것은 영화의 작법에서 굉장한 실리와 감독의 지휘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플롯 속에 사건이라는 것은 항상 인과성 즉 원인과 결말이라는 형식 속에서 한계를 뛰게 됩니다. 즉 어떤 사건이라는 것도 그 사건이 존재하기까지에 과정을 수렴해야하는 한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시대가 주는 불안정성과 돌발이 사건에 개입하게 되면 어떤 사건의 작법도 그것이 갖추어야할 동기나 과정에 구애받지 않게 되고 자유롭게 영화 속에 편입되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전경부대 나이스 운동화 민방위 훈련 전두환 대통령 가장 행렬 증거조작을 일삼는 형사는 전근대화 사회의 격동기와 모순을 상징하는 소재들이 많습니다. 이런 소재들은 조직화 되어 관객들의 시야에 장막을 이룹니다.
우리는 영화 막바지에 가장 중요한 목격자를 통제 되지못한 상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이없게 잃어버리게 되지만 영화가 주는 전체적인 조형에 휘말려 그것을 부정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즉 이런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영화가 장르가 갖는 컨벤션에서 한발 건너뛸 수 있게 하는 봉준호 감독의 소스입니다
<원초적인 것에 대한 반영 >
미장센이나 카메라 앵글이 잡고 있는 톤은 한 영화를 이해하는데 시적인 언어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스스로 전두환 대통령 행렬 장면에서 비를 통해 행렬들이 대피하면서 전두환에 대한 포커스와 아기자기한 복고풍을 뒤엉켜 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비나 여러 미장센적인 요소들은 영화상에서 이처럼 상황을 반전시켜주는 성격 외에도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당시 비 내리는 밤이나 빨간 옷가지 등은 개별적인 사건의 특징일 뿐 이 연쇄살인을 이어주는 주소는 못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쇄 살인이라는 특징상 그 개연성을 강화시켜주기 위해서 영화 속에 차용되었는데
이런 여러 소재들은 영화의 언어로서 이미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화성 연쇄살인은 그 당시 시대상이 갖고 있는 모순과 부정을 그려내 기위한 시각으로서 영화에 접근한다고 말씀 들였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다보면 여러 장면들 속에서 이영화가 쫓고 있는바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됩니다 미스터리라는 장르상 무언가 쫓게 되고 응시하게 되는 시선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런 시선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머릿속에도 침투하여 여러 생각들을 스치듯 보여줍니다.
영화상에서 지목 되는 용의자의 캐릭터들은 재미난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험상궂은 용의자들도 주룩 올라가지만 의외로 지목되는 사람들은 우리들의 이웃처럼 우리가 친근한 시선으로 보던 사람들이 됩니다. 적어도 전형적인 악당의 이미지는 아니죠.
법 공권력의 타점이 쫓는 것이 결국 그들의 잉태한 괴물이라는 모습으로 덮쳐오는가 저럼 영화의 시선은 먼 곳으로부터 예상외로 우리와 친근한 모습으로 또는 거울처럼 그걸 바라보던 자신의 모습으로 회유하는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이건 역시 공권력의 부득이함을 보여주려는 의도라 할 수도 있지만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죠.
그런 점에서 초반에 방아깨비를 쫓던 소년의 시선과 그 소년의 말 반사 하기는 우리의 시선이 거울처럼 강력한 타점으로 역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 들였습니다.
그림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 속의 간단한 상징들을 다시 이해해보는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빨간 옷은 무엇인가>
빨간색은 심미적으로 건강 외향을 상징합니다. 동기부여 자극 활동성 의지력 등을 특징으로 갖고 있죠. 즉 그만큼 외향적이고 충동적인 색깔이라는 것이 연쇄살인범 그들의 이해 할 수 없는 정신세계에 자극이 되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런 콘셉트이죠.
빨간색이 연쇄살인범의 심리를 이해할 수 하나의 아이콘으로 영화상에 정착한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장르가 갖고 있는 전형을 따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선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색의 이미지를 바라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옷은 몸을 추위나 외부의 장애로부터 가린다는 기능을 가지지만 그 사람의 개성이나 자신의 표출이라는 심리적인 의미도 갖고 있고 빨간색이란 이영화의 특성상 단순히 외부에 대한 심미적인 경향이라고 보기보다는 내부에가 즉 우리들의 피와 이미지가 가깝습니다.
영화상에서 보면 빨간색을 입은 여자가 비오는 날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마중 나갈려던 어떤 여자는 빨간 옷을 입을까 하다가 맘에 걸려 다른 옷을 입었지만 운이 나빴던지 살인범을 피하지 못했죠.
빨간색은 연쇄살인범이 표적을 쫓는 특성 지극히 외향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이영화의 특징 공권력의 모순을 통해서 내부로 침투시키고 어린이의 시선을 관객의 타점과 대비시키는 등 이 영화의 구도가 지극히 회유적 이라는 데에서 빨간색의 심리적 이미지도 그 용도를 달리할 수 있습니다 .
영화 속에 이렇게 심리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은 빨간 옷 하나 뿐만 아닙니다. 맨 처음 여자가 살해된 사건현장에서 하수구 터널을 여러분들은 뭐라고 생각 하십니까? 이영화가 결국 외부에 대상을 지목하는 영화가 아니라 지난 격변기와 아직 그 시대에 연유해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비추는 영화라 했을 때 빨간 옷이나 하수구 검은 굴다리는 인간의 내면을 몽타주로 그려낸 감독의 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맨 처음 하수구 어두운 터널을 따라 올라간 곳엔 발겨 벗겨진 여인의 시체가 있습니다. 송강호(박두만 역)는 그 어둠을 거울로 빛을 반사시켜 쫓고 있고 그 위에서 어린아이는 송강호의 말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광호의 타점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고 있습니다.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 로 인간의 본질을 정의 했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악함에 대해서 그것을 결코 인간과 구별 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예수님은 인간의 원죄에 대해 강조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우리는 살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잔혹성과 엽기적인 행각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질타하지만 사실 그런 배경 속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동조 그 어둠을 몰아내려는 심리적인 작용도 함께합니다. 즉 이 영화는 성선이든 성악이든 심리의 어두움에 방치된 사람들이 그곳에서 구원을 쫓는 줄타기라 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법 규율 교육 사회가 갖는 관념 등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게 사람을 정의하고 통제합니다.
5공과 6공 그 당시 시대는 암울하였고 모순되고 부정된 잣대가 행해지던 시대였지만 그 시대에 종속된 사람들에게 특히 그 시대의 도구로서 자신의 천업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시대가 주는 잣대와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구별 하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분명 그 시대는 엿 같았고 구속에서 체 소화되지 않은사람들의 삶은 비극적이였습니다 영화는 연쇄살인범이라는 극악에 분노하고 법을 실현시킬려는 세 형사의 시점에서 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자신의 내면의 어두운 모순을 회피하기 위해 외부에 그 표적을 정하고 내달리는 우리의 자화상과 그리 먼 거리가 못됩니다.
우리는 내면에 모순과 추악함을 쫓기 위해 외부에 그 대응물을 찾았지만 영화 속에서 보이듯이 그 대상은 지극히 평범했고 그나마도 어둠속으로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왜 사건 현장엔 항상 비가 왔을까요?>
위에 말씀 들였듯이 비는 현장의 분위기를 반전시켜주기 위한 매게체로서 쓰이기도 했습니다.
사건 당일에 비는 살인마에게 범죄를 행하게 하는 심리적인 조건이 되지만 영화상에선 특히 범인에 대해 쉽게 단서를 주지 않음으로서 미스터리 장르로서 그 효과를 더 배가 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지척지척 내리는 비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도 하고 공권력과 통제력의 상실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상의 미장센이나 그 효과들은 하나의 맥락에서 이해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미장센의 시어적인 기능 때문에 구도 조율 등을 통해 다변적인 이미지보단 하나의 상징을 그려내는 경우가 많고 그럼에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굴다리 앞에서의 비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내면의 추악함 어둠이란 결코 악당하나에 전유물이 아닌 우리의 공통적인 특성 이였고 그런 내러티브에서 형사는 범인에게 응징을 가하고 있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타점과 대상 사이에 거리를 흐리게 하고 중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또 비는 그런 어둠속에서 벗어날려는 우리들의 약동을 질척질척한 웅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 효과도 갖고 있습니다.
빨간 옷이나 굴다리안의 어둠 비 이 모든 요소들이 내면의 어둠과 세계의 어둠사이에서 그 이중성과 위선을 부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대에서 통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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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는 상업을 의해 정형화된 구도를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실험 영화는 아니라는 거죠
영화상에서 보인 미온적인 태도를 갖고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근거를 갖추고 증거 잡기 노력했지만 부족한 글이네요
영화를 감상하는 것 판단하는 것 결정 내리는 것 모두 여러분들의 목입니다.
읽어 주시는 것만으로 잠시 시간을 가져 주시는 것만으로 전 즐겁네요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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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평범한 시선에서 영화에 접근한다고 평을 들었습니다...
물론 이영화가 제게 그렇게 큰 메리트가 있는 영화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적당히 기고할수있는 난이도에 영화라는 점에서 선택해 평을 썼던 영화인데..
글세요 ..확실히 우물안에 개구리 일까요..
전 제 평론에대해 이 평이 진부하다는 생각은 못드렀씁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뭐라 얘기 할순 없지만 이 글 읽으면서 조금 지루했습니다. 좀 간추려서 반복 되는 얘기가 없었으면 훨씬 깔끔한 평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