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동강사진박물관에서 한정식 작가의 사진 '이와같이 들었사오니'가 5/23~7/22 전시 중이다. 평소 한정식 선생님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진 본인으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지난해 10월, 서울 한미화랑에서 홍순태,육명심 선생님과 함께 3인의 교수 초대전을 한 바 있다. 그 때 선생님의 작품을 대하면서 깊은 감동을 느꼈었는데, 다시 동강 사진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기쁨이 크다.
한정식 작가의 '이와같이 들었사오니'는 불교사상에 기조를 두고 있는 작품들이다. 제목인 '이와같이 들었사오니'도 불교 경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즉, 작가의 오랜 명상을 통해 깨달은 부처님의 말씀을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전시된 사진들 밑에 어디 어디 절에서 찍었다는 친절한 해설이 붙어 있다. 실상 그것은 한정식 작가의 사진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진에 나타난 사물들은 절에서 얻은 소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기둥, 기왓장, 나무, 그림자, 법고, 주춧돌, 연등의 그림자, 곱게 쓸어 놓은 마당까지. 그 사물들은 절에서 살고 있기에 ‘고요’가 묻어 있다. 작가는 그 ‘고요’속에서 또 다른 내밀한 ‘고요’ 즉 ‘사라짐’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흑과 백 (빛과 어두움/ 음양)으로 표현된 우주, 그 안에 놓여진 존재들 -- 작은 돌, 비스듬한 주춧돌, 나이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육중한 나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사각의 큰 돌들, 타종목,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당-- 어떠한 존재도, 그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우주가 낳은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작은 존재도 그 존재의 의미는 우주로까지 확장되며 , 우주와 하나가 된다. 실로 어떠한 것도 이 '존재'보다 귀한 것은 없다. '존재'는 그 하나하나가 곧 우주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것들은 곧 사라지기 시작한다. 어둠이 천천히 돌을 덮을 것이고, 실체인 것 같았던 사물은 그림자였고, 육중한 나무와 단단한 돌도 시간의 흐름안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부처님께 올렸던 연등 (그것은 지순한 소망의 결집체 였다.)도 실상 그림자였을 뿐. 아름다웠던 꽃들도 시들어 마당에 뒹군다.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절의 기둥도 사라져가고, 삼라만상에게, 진리안에 깨어 있을 것을 소리치던 법고, 그 선명한 태극(우주)무늬도 서서히 사라져 간다. 눈앞에 있는 모든 존재가 사라져 간다.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금강경)' '색즉시공'이다.
그러나 한정식 작가의 카메라 앞에 선, 사라져 가는 사물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낡을수록 더 신선하고, 더 순수한 빛을 낸다. 날카로운 각이 없어지고 부드럽고 넉넉하다. 그 나무에, 그 돌에, 기대고 싶어진다. 기둥속에 숨겨져 있던 내밀한 나무의 무늬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사라지는 사물들에게서 맑은 기운이 돈다.
한정식 작가는 절의 사물들을 통해서 '존재의 소중함'과 ,동시에 '존재의 사라짐'을 보여준다. 그 사라짐은 슬픔이 아니다. 사라짐은 형상을 가진 모든 존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이다. 본성으로 돌아가는 사물은 투명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그것은 또다른 차원의 '우주와의 합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부처님의 말씀을 영상으로 옮겨,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의 근본 문제로 단번에 접근하게 하는 한정식 작가의 사진은 '삶의 여유' 혹은 유유자적한 '관조'가 아니다 . '존재'와 '사라짐'의 현실을 눈앞에 놓아두고 '아직도 헤매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