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하늘아래땅위에서
 
 
 
카페 게시글
불교기초 스크랩 [불교 가훈] 법구경 25장20
메기 추천 0 조회 14 08.04.06 17: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卍 학도용심집(學道用心集)2 卍

에이헤이 도우겐(永平道元)



6. 참선에 즈음하여 심득(心得)할 사항

참선을 배우는 길은 일생에서 큰 일이다. 무책임하고 경솔하게 임해서는 안 된다. 옛날 불조(佛祖)의 제2조가 되는 혜가대사(慧可大師)가 달마대사(達磨大師)에게 불법을 구할 때 그는 팔을 잘라 결의를 보였다.
앙산혜적(仰山慧寂)은 출가를 허락 받기 위해 부모 앞에 두 손가락을 자르고 그의 뜻이 굳건함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중국 선인의 훌륭한 자취이다. 또한 석가모니불은 집과 왕위를 버리고 도(道)를 구하였다. 이것이 참된 불도 수행자가 남긴 발자취인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어려운 수행은 할 수 없으니, 쉬운 수행을 하겠다'고 한다. 참으로 불도에 맞지 않는 한심한 말이다. 만약 무엇인가 하나의 일을 전문으로 하고 그것을 수행하려고 하면 엎드려 누어 있기조차 귀찮게 된다. 한 가지의 일이 귀찮게 되면 만사가 귀찮게 된다. 쉬운 일만 골라서 하려고 하는 사람은 도를 닦는 그릇이 못된다. 더구나 지금 행하고 있는 법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한한 과거를 통해서 난행고행(難行苦行)하여 체득한 법이다. 근본이 이런데 그 흐름을 추구하는 수행이 어찌 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고인으로서 큰 역량을 지닌 사람마저도 '수행의 길은 험난하다'고 말하였다. 불도의 심오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불도가 본래부터 쉽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옛부터 역량 있는 사람이 '난행(難行)이다' 또는 '난해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세의 사람들을 고인(古人)에게 비교한다면 구우(九牛)의 일모(一毛)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위에 천성이 우둔하고 사물을 가리지 못하는 지금의 몸으로, 가령 아무리 전신의 힘을 짜내서 고행하면서 잘 수행하려고 노력해도 역시 고인의 이행이해(易行易解 - 쉬운 수행, 쉬운 이해)에 따를 수 없는 것이다.
현세 사람들이 기꺼이 채택하는 이행이해(易行易解)의 법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세간에서 실행되는 법도 아니며, 불법은 더더욱 아니다.
천마파순(天魔波旬)도 아니며, 외도이승(外道二乘)의 수행에도 미치지 못하는 범부들의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미혹에서 벗어나는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그와 반대로 그것은 미혹의 세계에서 미혹의 세계로 끊임없이 이어져 갈 뿐이다.

그들의 수행을 보면 뼈가 으스러지도록 매우 고심을 거듭하고 있으나 그건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다. 마음을 항상 닦으면서 고르게 하는 일이 특히 어려운 것이다. 분골쇄신(粉骨碎身)의 고행이 귀중한 것이라고 해서 이것을 참고 극복한 사람은 옛부터 많았으나, 불법(佛法)을 얻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해진 식사를 하고 계율(戒律)을 지키면서 청정한 행위를 하는 것이 귀중한 것이라고 해서 옛부터 그것을 행한 사람은 많았으나, 도(道)를 깨달은 사람을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총명함을 제일로 하지 않고, 학문과 이해를 제일로 하지 않고, 마음과 작용을 제일로 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며, 사물을 바르게 보는 것을 제일로 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몸과 마음을 조절하여 불도로 향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우러러본다. '관세음보살'은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의 작용을 돌려서 자기의 정체를 돌아보며, 아는 것과 알게 되는 것의 대립이 없어졌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뜻이다. 움직임(動)과 진정(靜), 이 두 대립의 양상은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심신(心身)의 조절이라 한다. 만약 총명하고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 불도에 들어갈 수 있다면 신수상좌(神秀上座), 그 사람일 것이다.
만약 평범한 인간으로 신분이 미천하다고 해서 불도에 차별이 있다면 조계고조(曹谿高祖) 육조혜능(六祖慧能)은 문맹의 나무꾼인데 어떻게 오조(五祖)의 가사를 이어받을 수 있었겠는가.

불도를 이어받는 법은 총명하고, 무엇이든지 안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고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 진실을 찾아서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돌아보고 참학하는 것이다. 또 나이를 먹고, 늙었다하여 차별하지 않으며, 어리고 젊다하여 차별하지 않는다. 조주종념화상(趙州從念和尙)은 60세에 출가하여 처음으로 스승인 남전(南泉) 밑에서 수행하였다. 그런데도 달마문하의 영웅이라 불리어졌다. 정가(鄭家)의 13번째의 낭자(娘子)는 열 두 살 때에 이미 오랫동안의 수행을 거쳐서 다른 수행자들을 앞지르고 훌륭한 선자(禪者)가 되었다. 불법의 위신력은 스승이 참학자에게 힘을 다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며 참학자는 스승을 따라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혹은 학문불교에 오랫동안 종사한 사람, 또는 세속의 전적을 오랫동안 학습한 사람도 모두 선문(禪門)을 찾아 불법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그 예는 많이 있다.
남악(南岳)의 혜사선사(慧思禪師)는 많은 학문을 닦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달마대사 밑에서 수행하였다. 영가(永嘉)의 현각선사(玄覺禪師)는 유달리 소질있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육조대감(六祖大鑑 : 慧能) 선사 밑에서 참학하였다. 불법을 밝히고 불도를 몸에 익히는 것은 바른 스승 밑에서 수행하는 노력이다. 단 선문의 지도자에게 법을 문의할 때에 스승의 설명을 듣고 그것을 자기의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스승의 생각을 자기의 생각으로 한다면 스승의 법은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다.

스승으로부터 법을 들을 때에는 아견(我見)을 버리고 심신을 맑게하고 자세를 바르게 하여 눈과 귀를 기울여서 오직 스승의 법을 경청하며 일체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심신이 완전히 일치되어 듣는 법은, 마치 물을 그릇에 따르는 것과 같다. 만약 이와 같이 들을 수 있다면 스승의 법을 자연히 몸에 익히게 될 것이다.
금세의 어리석은 무리들 중에 어떤 자는 미리 서적에서 얻은 지식을 기억해 두고, 어떤 자는 이전에 들었던 지식으로 스승의 설명에 비추어 본다. 그것은 오직 자기의 생각과 기억에 의한 지식일 뿐 스승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자는 자기의 생각을 앞세워 경권(經卷)을 읽고 한 두 마디의 말을 기억하여 그것을 불법이라 한다. 후에 도안(道眼)이 밝은 스승이나 선문(禪門)의 지도자에게 참여하여 불법을 듣고 만약 자기의 생각과 일치하면 좋아하고 일치하지 않으면 비난한다. 그것은 사심(邪心)을 버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며, 정법에 투신하여 도를 이룰 수 없는 사람이다. 설사 삼천 세계가 미진화(微塵化)된 수 만큼의, 혹은 겐지스강의 모레알 만큼의 긴 시간을 소요한다 하더라도 역시 미혹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이다.

불도는 생각과 분별판단, 추측과 심증으로 느끼고, 감각과 지혜로 알고, 이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불도가 인간의 정신작용의 범위 속에 있다면 우리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그 속에서 그것과 같이 생활해온 것인데 어째서 지금까지 불도를 깨닫지 못한 것일까? 불도를 닦는 데에는 생각과 분별 등의 정신작용을 내세워서는 안 되며, 항상 주어진 생각과 분별 등의 정신작용을 몸에 익힘으로서 거울에 비치 듯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도를 닦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불법을 몸에 익힌 선문의 지도자만이 확실히 알고 있다. 문자의 해석에만 급급하는 법사들을 따를 바가 아니다. 1234년 3월 청명일



7. 깨달음을 원하면 참선을 하라

불법은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그 어는 것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다만 여래의 가르침만 있었으므로 대립하는 가르침이 전혀 없었으며, 또 대립하는 지도자도 전혀 없었다. 대사석존(大師釋尊)이 오직 무상보리(無上菩提)라는 진실한 도(道)로 중생을 인도할 뿐이었다. 마하가섭존자가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고 부법제일조(付法第一祖)가 된 이래 인도에서 28대, 보리달마 존자에 이르렀고, 중국에서 6대, 대감혜능(大鑑慧能) 선사에 이르러 오가(五家)인 범안종, 위앙종, 조동종, 임제종의 조사들이, 스승에서 제자로 법의 계통을 바르게 이어받아 단절됨이 없었다.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왔던 양(梁)의 보통년간 이후 처음으로 스님과 신도(僧徒)에서 왕신(王臣)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법에 귀의하였다.

생각건대, 훌륭한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훌륭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엽공(葉公)이 용(龍)을 사랑하듯이 조각한 용을 즐기다가 진짜 용이 출현하였을 때에 실신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여러 나라 - 신라, 고려, 일본 등은 문자로 나타낸 가르침은 바다나 산에도 널리 미치고 있다. 그런데 산에도 고루 미치고 있다고는 하나 구름의 자유자재한 마음이 없고, 바다에도 미치고 있다지만 생기 넘치는 파도의 마음은 시들었다. 어리석은 자는 이러한 문자의 가르침을 즐겨워 한다. 예컨대, 생선의 눈을 보석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미혹된 자는 이것을 손에 놓고 좋아한다. 또 송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이 연산(燕山)에서 나오는 돌을 손에 넣고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다. 많은 마굴(魔窟) 속에 떨어져 자신의 몸을 헤친다. 가련한 일이다.

불국인 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미개지에서는 그릇된 가르침이 성행하기 쉽고, 정법은 널리 보급되기 힘들다. 그러나 중국 본토는 이미 부처님의 정법에 귀의하고 있다. 고려나 일본에서는 아직도 불의 정법이 널리 미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그런가. 고려는 그런대로 아직 정법(正法)의 이름만은 듣고 있으나, 일본은 지금까지 정법을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전대에서 중국에 건너간 많은 사승(師僧)들의 전부가 문자로 된 가르침의 망(網)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불법의 서적은 전해지고 있으나, 참된 불법은 전하지 못하고 있다. 당나라에 가서 무엇을 얻은 것인가. 불서(佛書)를 전한 공도 허무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불도를 배우는 비결을 몰랐기 때문이다. 가엽게도 헛된 수고만 하고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일생을 헛되게 보낸 것이다.
무릇 불도를 닦으려면 처음 입문할 때에 지도자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한다. 이 때 명심할 것은 소위 말하는 '법(法)이 나를 변화시키며, 내가 법을 변화시킨다'는 말이다. 내가 법을 변화시킬 때에는 내가 강하며 법은 약하다. 이와 반대로 법이 나를 변화시킬 때에는 법이 강하고 내가 약하다. 불법에는 원래 두 시절이 있다. 불조(佛祖)의 법의 정통을 이어받지 못하면 이것을 전혀 알 수 없다. 달마 문하의 선승이 아니고는 그 이름조차 들을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비결을 모른다면 불도수행을 힘껏 행할 수 없다. 수행이 바른 것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을 배우는 사람이 입문하면 반드시 이 비결을 전수한다. 그러나 다른 종지(宗旨)에는 이것이 없다. 불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참선하지 않고서는 진실한 도를 얻을 수 없다.



8. 선승(禪僧)의 수행

진실한 법은 불조 이래의 진실 그 자체를 가리키며 그 전부가 전해져 왔다. 인도에서 28대, 달마대사에 이르렀고, 중국에서 6대, 대감혜능 선사에 이르기까지 티끌 하나 덧붙임이 없고, 무엇 하나 버려진 것이 없다. 법의 상징으로서 전해진 달마대사의 가사는 육조인 혜능선사 때에 조계산에 소장되었다. 법은 겐지스강의 모레알 만큼이나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여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대중국에서 성행하였다. 그 법체(法體)는 손으로 더듬어서 탐색할 수도 없다. 또 다른 곳에서 구할 수도 없다. 진실을 보는 그 곳에는 알 수 있는 작용과 알려지는 대상과의 대립이 없어지고 정법이 몸에 정착되었을 때에는 자기의 마음을 초월한 것이다.

혜능(慧能) 선사는 황매산의 오조(五祖)인 대만홍인(大滿弘忍) 선사를 찾아 법을 구할 때에 면목을 잃었고, 이조인 혜가(慧可) 대사는 소림사의 달마대사를 찾아 법을 구함에 있어서 스스로 팔을 끊었다. 이렇게 하여 스승의 인가를 받고 자기의 생활방식을 개선하여 불조로서의 일상생활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스승을 예배하고, 자기의 정체를 반성하는 좌선을 행하면 그대로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에서나 몸에서나 머물 것이 없게 된다.

조주종념선사에게 어느 스님이 묻기를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없다'
'무(無)'에서 생각할 수가 있는지요. 처음부터 없는 것입니까. 전연 알 수가 없습니다.
시험삼아 후생대사(後生大事)를 위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심신(心身)은 무엇이며, 수행은 무엇이며, 생사는 무엇이며, 불법은 무엇인가, 세상의 사물은 무엇이며, 산하대지, 사람, 동물, 가옥은 무엇인가. 결국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렇게 차례차례 반성해 가면 자연히 움직임과 고요함이라는 두 개의 상이 없어진다. 이 차별의 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때 마음의 작용도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경지는 인간으로서는 실증할 수가 없다. 이것을 모르고 미혹하는 자가 수없이 많은 것이다.
참선하는 학도들이여, 조금 미혹되거나 완전히 미혹된다 하더라도 뒷걸음질치거나 주저해서는 안 된다. 오직 수행할 뿐이다.



9. 도를 향하여 수행하라.

불도를 닦는 사람은 우선 도를 수행함에 있어서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한다.
무릇 석가모니 여래는 보리수 밑에 단좌하여 샛별을 보는 찰나에 무상(無上)한 진실의 도를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그 진실은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 등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부처님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부처님에게서 부처님에게만 전해지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즉 부처(佛)인 것이다.

'도로 향한다'함은 불도의 전부를 남김없이 몸에 익히는 것을 말한다. 도와 완전히 일체가 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정체가 분명해지며, 또한 깨달음과 일치됨으로써 그 사람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설사 최고로 납득할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전체의 진실 속에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역시 '한 가지, 반 가지의 깨우침'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도로 향하는 수행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불도를 닦는 사람은 도가 어디서 숙달되며, 어디서 막히는 것인가 조차 판별 못하면서 무리하게 뚜렷한 정표가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법화경의 장자궁자의 우화에 보면 장자가 부모와 집을 버리고 또 자기의 재물도 버리고 타국으로 가서 방황하고 있다. 원래 장자(長子)이며 독자(獨子)인 그 가 타관 사람의 천한 고용인이 되었다. 참으로 궁자(窮子)와 비유되는 이야기다.
무릇 도를 닦는 사람은 도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며, 도(道) 그 자체가 되는 자는 깨달음의 흔적이 없어진다.
불도를 닦는 자는 우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불도를 믿어야 한다. 불도를 믿는 자는 자기가 본래의 깨달음 속에 서 있기 때문에 미혹되지 않으며, 망상하지 않고, 덤벙거리지 않으며, 더하거나, 줄지도 않으며, 실수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도를 밝혀 그 바탕 위에서 수행하는 것 이것이 즉 불도를 닦는 기본이다.

수행하는 규칙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근원을 좌선에 의해서 떨쳐버리고, 결코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즉 초심자를 지도하는 방법이다. 그런 다음에 심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미혹과 깨닫겠다는 마음을 버린다. 이것이 제 이 단계의 방법이다.
대체로 불도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약 자기가 틀림없이 불도를 믿는다면 자연히 불조의 대도와 통달할 수 있는 길과 막히는 길을 분명히 한다면, 미혹과 깨달음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누구나 다 시험삼아 마음을 움직이는 근본을 좌선으로 떨쳐버려 보아라. 아마도 십중 팔 구는 곧 도를 깨닫게 될 것이다.



10. 직하승당(直下承當)

심신을 진실 그 자체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스승 밑에서 법을 들으며 전력을 다하여 좌선하는 길이다. 법을 듣는 것은 마음과 그 작용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며, 좌선은 진실의 수행과 그 실증(實證)를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도를 닦으려면 어느 한쪽만 버려서는 진실의 전부를 이어받을 수가 없다. 무릇 인간에게는 심신(心身)이 있다. 그 작용은 강하고 약함이 있으며, 용맹한 것과 둔하고 용렬한 것이 있다. 때로는 움직이며, 때로는 의용(儀容)을 나타내는 이 심신으로 직접 부처를 실증하는 것이 바로 승당(承當)이다.
지금까지의 심신을 어디에 어떻게 돌리겠다는 생각이 없이 오직 심신이 진실을 실증하는 곳에만 향하는 것을 직하(直下)라 한다.
오직 심신이 진실을 따라갈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옛부터 갖추어진 견해가 아니다. 그저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이 파고들 집과 같은 것이 아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