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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자(刻字)가 남겨지는 법
우리나라 산수 좋은 암벽에는 사람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문구들을 새겨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천세만세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바위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구이며, 유교적 정치적 구호 혹은 표어 같은 문구들을 새겨놓음으로써 학맥을 과시하고 성리학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글귀들이 석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때는 주자성리학 절대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17세기 연간으로 보인다.
석각을 새길 목적으로 글씨를 써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조선시대 당파색채가 뚜렷한 명망가들이 생전에 써놓은 글씨를 후대에 모사하거나 혹은 집자(集字:문헌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아 글귀를 구성)하여 새겼다.
현재까지 대중에게 공개된 현판이나 석각으로 가장 많은 글씨를 남긴 사람은 17세기 당쟁이 극에 치달을 때 남인과 치열하게 파쟁을 벌였던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이다. 특히, 석각의 경우 작가가 특정지어 전해지는 것으로는 우암의 글씨가 압도적이다. 남인의 영수 미수와 우암은 17세기 비슷한 시기에 당시로는 드물게 장수를 하면서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예적으로도 양 계파의 영수로서 치열하게 맞붙었던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편액과 석각으로 우암의 글씨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게 되었을까.
2. 우암의 학맥
우암은 외가인 옥천에서 태어났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시절 대전 회덕의 친족인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1606~1672)의 집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자랐다. 이후 두 사람은 논산에 있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파란만장한 일생이 시작된 것이다.
사계는 서인의 학문적 기반인 기호학파의 종장 율곡의 학맥을 잇는 한편으로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해 조선 예학의 태두로서 당대 비중 높은 명사들을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예학은 전란으로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관념적인 성리학의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강조되었으나, 존화양이론(尊華攘夷-명나라를 존중하고 오랑캐인 청나라를 물리친다.)에 입각한 사대주의를 합리화하고 사대부계층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우암은 사계의 수제자로서 율곡-사계로 내려오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아 예학을 강화 발전시키는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서인이 노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주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주자절대주의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였으며, 이 때 다져놓은 노론세력이 기반이 되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노론 단독의 장기집권이 이어질 수 있었다.
3. 주자절대주의자
서인들은 광해군 대에 정인홍이 이끄는 북인정권의 핍박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자 거의 유일한 돌파구인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반정(1623년)을 통하여 정권을 잡았다.
이때 일반 백성들 눈으로는 뚜렷한 실정이 없었던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들이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지 않고 명나라와 신흥 청나라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실리외교를 비롯하여 광해군의 모든 정책을 비판하며 뒤집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인정권은 사대주의적인 존화양이론을 정권의 명분으로 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실리외교로 청나라와의 전쟁을 피해갔던 광해군의 정책을 폐기되고 시대착오적인 척화론(斥和論:오랑캐인 청나라와 화친을 배척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병자호란의 굴욕을 자초하고 말았다.
서인정권의 보다 심각한 딜레마는 병자호란(1636년)때 오랑캐로 비웃던 청나라에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이후, 1644년 중화(中華-세계 문명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뜻)로 떠받들던 명나라조차 청나라에 패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버리자 존숭의 대상을 잃어버린 정치적 명분의 참담한 상실감이었다.
하여, 명나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서인들의 정치이념인 존화양이론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대한 북벌론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소중화(小中華)사상을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즉, 비록 명나라는 없어졌지만 조선이 명나라의 중화사상을 유일하게 계승한 작은 중화, 즉 소중화이므로 존화양이론은 여전히 유효함을 강변하였으며,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하는 등 조선 말 주변국에서 열강들의 각축이 치열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이념에 갇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채 병들어가면서 속수무책으로 일본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이란, 원래 인간의 본성(性)과 하늘의 이치(理)가 근본적으로 같으므로 무릇 선비란 하늘의 뜻을 깨달아 인간의 본성이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도록 제도나 윤리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철학이자 정치이념이다.
공자 시대에 만들어진 유교 경전을 주자가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하여 해석하고 주석을 달아 쉽게 풀이하였다고 주자 성리학(=주자학)이라고도 하는데, 명청교체기에 애매해진 존화양이론을 지켜내기 위하여 주자학의 강경파는 ‘학문적으로 경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자가 이미 완성하였으므로, 주자의 주석에서 한 획도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자 원리주의 입장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주자절대주의자 중심에 우암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자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들의 학문도 동등하게 평가하여 수용하거나 혹은 미수와 같이 스스로 자유롭고 독자적인 경전을 해석한 주자상대주의와의 학문적 대립은 1683년 서인이 노론(주자절대주의)과 소론(주자상대주의)으로 쪼개진 근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우암이 속한 서인-노론의 정치적인 입장이나 이념을 정리해보면, 광해군과 북인정권 반대, 인조반정의 주역, 숭명배청의 존화양이론, 북벌론, 소중화론, 그리고 주자절대주의이다.
우암의 글씨를 감상하기에 앞서 우암의 정치적인 입장과 이념이 무엇인지 살펴본 이유는 그래야만 우암이 글씨를 남긴 사연과 글귀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우암 시대의 정치적 상황
1632년 27세에 장원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 우암은 훗날 효종이 되는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어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출사 초기부터 금줄을 단단히 잡은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들이닥친 병자호란(1636년)으로 국치를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로 인질로 잡혀가는 치욕을 지켜보면서 깊은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만 몰두하였다.
청나라에서 치욕을 몸소 겪고 돌아온 효종은 1649년 즉위하자 말자 척화파들을 대거 등용하여 절치부심 북벌 의지를 불태웠으며, 우암은 이러한 효종의 의도에 부합하여 불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재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후대의 평가에 의하면, 우암은 구호로만 북벌을 외치면서 불벌론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서인 정권이 유지되는데 주력하였을 뿐, 북벌을 실행하기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는등 실질적인 조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미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국제정세 속에서 청나라에 대항한 북벌론이 얼마나 무모하며 비현실적인지 우암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1659년 효종에 죽자 바로 벌어진 1차 예송논쟁에서 미수 허목을 필두로 한 남인과의 정치투쟁을 승리로 이끈 우암의 서인정권은 1674년 숙종이 즉위할 때까지 무풍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우암이 봉림대군을 만나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누렸다면, 우암의 나이 63세에 문제적 군주였던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을 만나면서 굴곡을 겪게 된다.
1674년 벌어진 2차 예송논쟁에서 왕권(王權)을 주장한 남인과 신권(臣權)을 주장한 서인이 맞붙은 정치투쟁에서 왕권강화 의지가 남달랐던 숙종이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심판을 보게 되자 당연히 왕권을 주장한 남인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1592년) 이래 실로 오랜만에 남인 정권이 들어서고 서인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우암은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를 당하여, 1680년 숙종대 첫 번째 환국인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숙청되고 다시 서인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함경도에서 포항 장기, 거제 등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6년 만에 해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숙종은 당파 간에 서로 견제하게 만들면서 급작스럽게 정권을 교체하는 환국(換局)을 이용하여 신권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 유지하였던 것이다.
숙종과 우암의 마지막 대결은 1589년 우암의 나이 83세 때 장희빈과 연관된 숙종대 두 번째 환국인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서, 이 글의 마지막에 살펴볼 것이다.
5. 서예에 대한 우암의 사상
우암이 그토록 주자절대주의에 집착한 이유는 앞서 살펴본 정치적인 입장에서 비롯된 바도 있지만, 유학자로서 자신의 성향에 딱 부합하는 주자의 직사상(直思想)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직사상이란 유학사상의 본질이기도 한데, 사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과 행위를 추구하는 사상으로서 주자가 이르기를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원리나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은 오직 직(直)일 따름이며, 인도(人道)도 천도(天道)도 오직 직일 따름이니 직이야 말로 천인합일(天人合一:성리학의 지향점)의 관건이 아닐 수 없다. 인간 본성의 바름을 가리고 있는 인간적인 욕망과 삿된 마음을 제거해 본연의 청정한 상태를 유지함과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그 본래의 바른 본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였으며, 우암은 ‘주자의 직사상이야 말로 공자 맹자 주자 세 성인이 서로 전한 심법이다.’이라고 유학 학통의 핵심임을 설파하였다.
우암은 직사상을 바탕으로 서예(藝)도 인간의 도(道)와의 어울림이 있어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도예일치(道藝一致) 인식을 가졌으며, 인간 내면의 덕성이 외면의 예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생동하는 필치를 보여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와 같이 우암의 글씨는 직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세계와 꾸밈없는 자신의 성정이 반영되어 일체의 구애받음 없는 강건하고 웅장한 필치를 드러냈으며, 기교 없는 운필은 때로는 강하고 억세기도 하고, 때로는 농묵으로 쓰고 때로는 담묵으로 쓰며, 때로는 노도처럼 때로는 잔잔하여 동정(動靜)의 필치로 자연스런 그의 성정을 드러낸다. 도예일치(道藝一致)를 추구한 우암의 독특한 글맛이다.
미수는 도문일치(道文一致) 사상으로 서예로써 태평성대를 이룬 요순의 치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다면, 우암은 도예일치 사상으로 서예를 성리학적 수양의 한 범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지금부터, 일체의 망설임과 기교 없이 웅장한 필치로 시원시원하게 써내려간 우암의 글맛을 즐겨보자. 일단은, 우암에 대한 일체의 역사적인 평가는 접어두고 거리낌 없이.
6. 우암학파의 박물관 같은 도봉산
서울이 조선의 수도였기에 구석구석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많다. 그 중에서도 도봉산 자락은 수려한 만큼 각자가 많은데, 조선의 정치 이념인 성리학의 학통을 전한 성현으로 꼽히는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배향한 도봉서원이 있어 선비들의 집합소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광조 존숭에 뜻이 깊었던 우암 사후인 1696년에는 우암을 추가로 배향하여 우암의 유적지가 되었다.
그래서 도봉서원 주변 계곡가 바위글씨들을 자세히 보면 우암의 글씨 이외에도 우암사단이라 불릴 수 있는 그의 직계 문인들의 글씨로 가득하여 우암의 학맥과 당파를 따랐던 문인들의 면면을 알려주는 역사교과서 같은 곳이다. 이들을 먼저 이해하고 가게 되면 전국의 많은 곳에 산재해 있는 우암 글씨의 사연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6-1. 道峰洞門(도봉동문)
*道峰洞門(도봉동문)
우암이 생전에 도봉서원을 방문했을 때 문인들의 요청으로 글씨를 남겼다고 전한다.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다.
‘도봉동문’을 제외한 다른 글씨들은 대부분 도봉서원 옛터 앞 계곡 주변에 산재해있는데, 등산로를 벗어난 계곡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등산로에서는 볼 수 없으며, 그렇다고 글씨가 계곡에 바짝 붙어 있는 바위에 새겨져 있으므로 글씨 앞으로 인공의 탐방로를 낼 수도 없어 역사 교육장이 사장되고 있다.
6-2.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華陽老夫書(제월광풍갱별전 료장현송답잔원 화양노부서)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華陽老夫書(제월광풍갱별전 료장현송답잔원 화양노부서)
‘비 개이니 달빛과 바람이 다르게 바뀌어 퍼지고 무릇 편안히 줄 퉁기며 읊조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네. 화양의 늙은이 씀’
이 14자의 시구는 본래 주자가 백록동서원강회(白鹿洞書院講會:주자가 원장이 되어 유교의 이상 실현을 추구한 교육기관)에서 학생들에게 오르지 유학에 전념하여 도덕적 품성을 기르고, 절대로 출세를 위한 과거공부나 현실을 도피하는 망상을 하지 말도록 권고한 두 편의 시 가운데 한 구절씩을 발췌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 마지막 낙관 같은 ‘華陽老夫(화양노부)’는 우암이 화양동에 은거했으므로 빗대어 사용한 우암의 또 다른 호이다.
6-3. 濂洛正派 洙泗眞源 同春書 (염락정파 수사진원 동춘서)
*濂洛正派 洙泗眞源 同春書 (염락정파 수사진원 동춘서)
‘염락은 바른 흐름이고 수사는 참된 근원이다.’라는 뜻으로, 염락은 북송 때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말하는데, 주자에 앞서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유학자들이다. '수사'는 중국 산동성에 있는 물줄기로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므로, ‘모두 유학을 근본으로 삼아 그 올바른 길을 따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글씨를 쓴 동춘(同春書)은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1606~1672)로서, 우암과 같이 자라면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까지 동문수학한 사이로서, 정계에 진출하여 우암과 운명을 함께 한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정신적으로 둘도 없는 절친이었다.
우암의 성품이 강직한 반면 동춘당은 비교적 부드러웠다고 전하는데 두 사람의 글씨에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우암이 지은 600편이 넘는 묘지문 중에서 많은 수가 반듯하고 정갈한 동춘당의 해서체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동춘당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1583년)되어 한때의 동지들과 골육상쟁을 벌이기 전 세상을 뜨는 바람에 더 이상 역사의 험한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동춘당이 별세한 이후 우암의 묘지문 글씨는 아래 [고산앙지]를 쓴 김수증이 대신하게 되었다.
6-4. 高山仰止 庚辰七月 金壽增(고산앙지 경진칠월 김수증)
*高山仰止 庚辰七月 金壽增(고산앙지 경진칠월 김수증)
고산앙지(高山仰止)란 말은 시경(詩經:춘추시대의 민요를 공자가 간추려 정리한 시집)에 나오는 문구로 '높은 산은 누구나 우러러보게 마련이고, 큰길은 누구나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는 뜻으로 도봉서원에 배향된 정암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이다. 글씨를 쓴 경진년(庚辰)은 1700년에 해당된다.
글씨를 쓴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1624~1701)은 인조반정이후 집권한 서인의 중심인물이자 병자호란 때 강경 척화론자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로 유명한 시조를 남기고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의 손자이자 우암을 따르던 후배이다. 그의 동생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1629~1689)은 죽을 때까지 우암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한 정치적 수제자였다.
6-5. 舞雩臺 寒水翁(무우대 한수옹)
*舞雩臺 寒水翁(무우대 한수옹)
눞혀서 새겨놓은 우암의 글씨가 있는 바위에 새겨놓았다.
‘舞雩臺(무우대)’는 공자의 고향 곡부성에 있는 강변의 큰 바위로서 논어에도 등장하는 등 공자의 일화가 남아 있어 유가(儒家)에서는 두루 인용하는 명칭이라고 한다.
글씨를 쓴 ‘寒水翁(한수옹)‘은 한수재 권상하(寒水齋 權尙夏:1641~1721)로서, 기호학파의 정통을 계승한 우암의 학문적인 수제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암의 돌림자를 따라 수암(遂庵)이라는 호도 사용했다.
6-6. 光風齊月 泉翁書(광풍제월 천옹서)
*光風齊月 泉翁書(광풍제월 천옹서)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한 말로서 북송(北宋)의 시인인 황정견(黃庭堅)이 성리학의 초석을 다진 주돈이(周敦頤)를 존경하며 쓴 글인데, 이후 유가에서는 존경하는 인물의 인품을 뜻하는 글로 광풍제월(光風齊月) 혹은 제월광풍(齊月光風)으로 늘리 인용하여 선비들의 유적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글씨를 쓴 천옹(泉翁書)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한천 이재(寒泉 李縡:1680∼1746)로서, 우암의 제자 김수항의 아들인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1651~1708)의 문하에서 조광조, 이이를 사숙한 당대 성리학계의 대가이며 영조 시대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호 한천(寒泉)은 주자가 자기 어머니 산소 앞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살았다는데서 따온 말이다.
이재는 한천 이외에 도암(陶菴)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는데, 지리산과 연관된 문헌에 등장한다.
지리산이 좋아 구곡산 자락을 무이구곡으로 삼고 무이정사를 지어 살면서 지리산 여러 곳에 각자와 두편의 지리산 유람록을 남긴 명암 정식(明庵 鄭栻:1683~1746)이 도암에게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편지(이도암에게 주는 서신)를 보내어 무이정사에 편액으로 삼을 글씨 몇 편을 부탁하였다.
‘저는 옛날에 우리 스승인 집안 형 노정헌공(露頂軒: 鄭構)을 통해서, 조정에 있을 때나 강호에 물러나 있을 때의 선생의 진퇴지절(進退之節:조정에 출사하고 물러남이 명쾌한 절개)에 대하여 상세히 들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높은 벼슬을 헌 신짝처럼 버리시고, 노을이 낀 산수 속으로 멀리 가셨으니, 원대한 생각을 이루신 것 같습니다. 그 맑은 기풍을 흠모할 만 합니다. (중략)’
그러나 끝내 한천으로부터 글씨는 오지 않았다. 한천이 중풍기가 생겼다는 풍문도 들렸지만, 명암이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서 소론의 편에 서서 노론의 수장 권상하를 파직에 이르게 하는 등 노론과 대척하였는데, 노론의 적통을 이은 이재가 은거지 용인에서 천리 떨어진 지리산 골짝에 있던 명암에게 글을 써 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7. 우암의 한양 옛집터 주변에 있는 글씨들
7-1. 曾朱壁立(증주벽립)
*曾朱壁立(증주벽립)
우암이 출사를 위하여 한양에 살았던 명륜동 옛집터 주변에 우암의 흔적이 글씨로 남아 있다.
혜화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을 우측에 두고 골목을 돌다 보면 집을 짊어지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曾朱壁立(증주벽립)'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교의 성현인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받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 글씨는 우암의 유배지였던 제주도 오현단에도 있다. 1856년 우암의 후학들이 명륜동에 있는 글씨를 탁본하여 새긴 것이다.
7-2. 今古一般(금고일반)
*今古一般(금고일반)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우암의 집 자락이었을 서울과학고등학교 교내 뒤쪽에 있는 바위 천재암(千載岩) 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 위에는 이 글씨 이외에도 ‘詠磐(영반 -올라앉아 시를 읊는 바위)’도 있으나 마모가 되어 우암의 글맛을 보기는 어렵다.
8. 우암이 성장기를 보낸 대전 주변에 남아 있는 글씨
옥천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난 우암은 7살 때 친족들이 세거하던 대전 회덕으로 올라와 동춘당 송준길의 집에서 같이 공부하며 출사할 때까지 살았는데, 출사 이후 고향과 같은 대전에 머물 때 후학들을 강학하기 위하여 지은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중심으로 우암사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글씨로 남아 있는 우암의 흔적은 없으나, 도봉산에서 글씨를 보았던 우암의 후배 김수증이 쓴 남간정사 편액에서 우암의 학맥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다.
8-1. 同春堂(동춘당)
*同春堂(동춘당) 편액
남간정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우암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춘당 종택은 동춘당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춘당 역시 도봉산에서 그의 글씨를 보고 왔다. 동춘당은 송준길이 자신의 호를 택호 삼아 지은 별당이다. 아주 정갈하고 단정한 동춘당 별당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별당 건물로 동춘당 송준길의 성품과 기질이 잘 반영된 건물이다.
동춘당에 걸린 우암의 글씨 ‘同春堂(동춘당)’ 편액을 보면, 서예에 대한 우암의 예술적인 감각을 느끼게 한다. 우암의 글씨는 호방하면서도 강직한 성격답게 거침없이 써내려간 행서체가 대부분인데, 이 글씨 만큼은 단정한 건물에 어울리게 정갈한 해서체로 써놓았다.
동춘당 별당은 우암의 글씨가 있어 더욱 기품이 있고, 우암의 글씨 맛은 동춘당이 있어 더욱 그윽하다.
*동춘당 별당
8-2. 금산 대둔산 태고사의 石門(석문)
*금산 대둔산 태고사의 石門(석문)
주자성리학의 이념이 절정을 이루던 이 무렵, 유학자들의 글씨를 사찰에서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이때가 지난 후 등장하는 원교 이광사, 청암 이삼만을 비롯하여 그 뒤를 잇는 추사 김정희는 앞선 [지리산의 글씨]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유가뿐만 아니라 사찰에도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이들은 서예미에 집중한 예술가로서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던 결과이다.
아무튼, 미수와 우암은 많은 글씨를 남겼지만 꼿꼿한 유학자답게 사찰에는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금산 대둔산 중턱에 있는 태고사에 우암의 글씨가 남아 있는데, 불교의 종교적인 용어로 되어 있는 사찰 전각의 편액이 아닌 사찰에서 한참 못 미친 입구의 석문에 전형적인 우암의 필체로 새겨놓은 ‘石門‘ 각자가 있다. 우암이 젊은 시절 한때 태고사에서 공부할 때 남긴 글씨라고 전한다.
9. 우암의 스승 김장생의 유적지에 있는 글씨
9-1. 논산의 돈암서원
*논산의 遯巖書院(돈암서원)
돈암서원은 기호학파의 종장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아 우암에게 전해준 사계 김장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서원에는 우암이 글을 짓고 동춘당이 글씨를 쓴 대표적인 합작품 돈암서원묘정비가 있으며, 우리나라 서원 건축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응도당(凝道堂)에 우암이 쓴 돈암서원 편액이 달려 있다.
9-2. 강경 팔괘정의 석벽에 있는 글씨
우암은 스승 사계가 별세를 하자, 스승의 곁에서 학문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김장생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강경의 임리정(臨履亭)이 지척에 보이는 곳에 팔괘정(八掛亭)을 세우고 강학을 하였다. 팔괘정 석벽에 우암의 글씨 두점이 새겨져있다.
*夢挂壁(몽괘벽)
*靑草岸(청초안)
몽괘(夢挂)란 ‘어린아이를 교육시켜 계몽하는 방도에 관하여 설명하는 괘’이며, 청초(靑草)란 싱싱하고 푸른 풀이므로, 두 글귀는 학도들을 잘 교육시켜 푸른 풀처럼 맑고 반듯하게 마음을 닦는 석벽이란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10. 그밖의 기호지역에 있는 우암의 글씨
경기도와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영수였던 우암이었기에 젊은 시절 거주했던 대전과 스승의 본거지 논산을 비롯하여 기호지방 출신 선대와 후대의 선비들과 직간접적인 인연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0-1. 용인의 포은 정몽주 묘역
개성 선죽교에서 살해당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는 사망 직후 개성에 묘를 썼다가 1406년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장의행렬이 용인에 이르렀을 때, 관을 덮었던 명정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 묘소의 위치에 떨어지자 이곳이 길지라 생각하고 안장하였다고 한다.
포은은 성리학의 기초를 세워 학맥을 전수한 인물로 숭상되었으므로 특히 경기도를 기반으로 한 기호학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서인들이 앞장서 존숭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 포은선생신도비의 묘지문은 우암이 짓고 두전(頭篆-비석의 머리 부분에 전서체로 쓴 묘비명)은 김수항이, 비문은 예의 김수증의 글씨로 새겨져 있어 우암의 문인들이 총출동한 느낌이다.
포은 묘역 인근 포은종택에 포은의 영정을 모신 圃隱先生影堂(포은선생영당) 편액이 우암의 글씨이다.
*용인 포은선생종택의 포은 사당의 圃隱先生影堂(포은선생영당)
10-2. 충북 보은 고봉정사(孤峯精舍)
*孤峯精舍(고봉정사)
조광조와 함께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었던 선비화가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峸:1487~1521) 등이 세워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최수성은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친구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고 훈구파 남곤의 산수화를 조롱한 유명한 일화가 화근이 되어 1521년 신사무옥 때 사형 당하였다.
우암의 입장에서는 최수성이 조선 성리학의 성현으로 숭상되던 조광조와 동문수학한 학연과 기호지방의 지연으로 연결된 선현으로 존숭하여 고봉정사 편액을 쓴 것 같다.
10-3. 충북 옥천의 이지당
*二止堂 重峯先生遊賞之所(이지당 중봉선생유상지소)
옥천의 이지당(二止堂)은 율곡과 더불어 기호학파의 종장인 우계 성혼의 문인이자 임진왜란 때 중부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서인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체면을 세우며 전과를 올렸으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중봉 조헌(重峯 趙憲:1544~1592)이 마을 이름을 딴 각신서당(覺新書堂) 편액을 걸고 후학들을 강학하던 곳이었다. 우암이 이곳을 방문하여 이지당(二止堂)으로 이름을 지어주고 남긴 글씨가 입구 암벽에 새겨져 있다.
낙관에 우암이 쓴 글씨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尤齊先生書(우재선생서)’라 새겨져 있는데, ‘우재’는 우암의 또 다른 호인데 이곳에서만 보는 것 같다.
‘二止(이지)’란 도봉산 글씨에서 보았던 ‘高山仰止(고산앙지)’의 전체 문장인 ‘高山仰止 景行行止(고산앙지 경행행지-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를 인용하여 이 문장에 ‘止’자가 두 번 등장하므로 중봉의 높은 인품을 기리는 뜻으로 二止堂이라 하였다.
10-4. 금산의 수심대(水心臺)
*水心臺(수심대)
임진왜란 때 금산지역에서 칠백의병을 이끌고 왜적에 맞서 싸웠던 중봉 조헌이 한때 금산에 살면서 바위에서 자라는 낙락장송을 보고 감탄하여 수심대라 이름 지었으며, 훗날 우암이 글씨를 써주어 바위에 새겨놓았다. 수심대 아래에 중봉의 사당이 있다.
10-5. 안성의 오정방고택
*오정방 고택에 있는 退全堂(퇴전당)
퇴전당 오정방(退全堂 吳定邦:1552~1625)은 율곡의 문인으로서 광해군조에 북인정권에 맞서 인목대비 폐위를 극력 반대하다가 사직당하는 등 당시 서인의 중요 인물이었다.
오정방의 증손이 바로 양곡 오두인(陽谷 吳斗寅:1624~1689)인데, 1651년에 지리산행에 나서 지리산유람록 ‘두류산기(頭流山記)‘를 남겼다. 퇴전당 고택에 우암의 글씨가 있는 연유가 바로 이 가옥에서 성장하여 나라에 크게 공훈을 떨친 오두인을 치하하기 위하여 우암이 글씨를 보냈던 것이다.
10-6. 부여의 낙화암
*落花巖(낙화암)
부여의 유명한 낙화암 적벽에 우암의 글씨 落花巖을 새겨놓았다. 관광 목적으로 붉은 페인트로 덧칠을 해놓아 자칫 흉물스럽기는 한데 백마강 유람선을 타고 멀리서 우암의 글씨를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어 긍정적으로 보아 주어야 할 것 같다.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따라 하류로 조금 내려가면 강가 수북정 아래 바위에 새겨놓은 自溫臺(자온대)도 우암의 글씨라고 전한다.
10-7. 부여 백마강변 대재각
*부여 대재각에 있는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
병자호란 이후 북벌강경파였던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1585~1657)가 1657년 북벌에 관한 상소를 올리자 효종의 비답에 “誠以至痛在心(성이지통재심), 有日暮途遠意(유일모도원의)”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북벌의 뜻은 품었으나 여의치 않는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낸 글로서 ‘정성을 다하여 바른 뜻을 이루고자 하나 어려운 현실로 인하여 지극한 아픔이 가슴에 있는데, 날은 이미 저물고 성취를 향한 길은 멀기만 하구나.’라는 뜻이다.
우암이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에 패한 이후 함경도 덕원을 거쳐 포항의 장기에서 유배 도중 부인이씨의 부음을 접하고 침통해 있을 때 위문차 방문한 제자이자 이경여의 아들인 이민서에게 효종의 비답 문장에서 자신의 심정과도 같은 ‘至痛在心日暮途遠(지통재심일모도원)’을 뽑아 친필로 써 주었다. 훗날 1700년 백강의 손자 이이명(李頤命-숙종 사후 경종 초에 훗날 영조가 되는 영인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역모죄로 처형된 노론4대신 중에 한명)이 새겼다고 전한다.
이 글씨는 나중에 두 차례나 더 등장하므로 새겨볼 것이다.
10-8. 청주 지선정
*忠孝一生(충효일생)
*臥此江墳(와차강분)
청주에 있는 지선정은 지선정 오명립(止善亭 吳名立:1563~1633)이 퇴전당 오정방처럼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의 폐위론이 일자 북인 정권에 맞선 서인의 주요인물로서, 사직 낙향하여 자호를 택호 삼아 지선정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두 아들이 우암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된 인연 등으로 지선정에 우암 글씨 忠孝一生 臥此江墳(충효일생와차강분)와 우암의 수제자 권상하의 止善亭(지선정) 편액이 있다.
10-9 천안 노은정 주변의 각자
*白石灘(백석탄-인터넷 자료사진)
*落水巖(낙수암-인터넷 자료사진)
노은동은 조선시대 안동김씨 세거지 중에 한 곳으로 숙종대 학자 노은 김상기(老隱 金相器:1639~1708)가 정자를 짓고 동네 이름을 따서 노은정(老隱亭)이라 하였다.
우암의 핵심 측근 김수증과 김수항이 안동김씨로서 이들 집안의 일파가 기호지방에 세거지를 이룬 곳이므로 우암의 학맥과 당파를 따르는 문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우암이 만동묘(萬東廟-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으로 최종적으로 화양구곡에 지었다.)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제자들 요청으로 이곳에 들러 글씨를 남겼다고 전한다.
‘倒影岩(도영암)’과 ‘桃源洞里裏 大明天下(도원동리리 대명천하)’가 있었다는데 노은정 앞 물에 잠겼는지 사라졌고, 조금 떨어진 하천변 바위에 ‘白石灘(백석탄)과 落水巖(낙수암)이 새겨져 있으나 이것들도 퇴적토에 묻혀 보였다 묻혔다를 반복한다고 한다.
10-10. 남양주 석실마을 취석비
*醉石(취석)
이곳에 있는 우암 글씨의 배경과 조선 정치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 안동김씨 세거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글자 그대로 안동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던 안동김씨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병자호란 때 강경 척화파로서 서인을 이끌었던 청음 김상헌과 순결한 그의 형 김상용(楓溪 金尙容:1561~1637)의 조부조에서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자 관직생활을 위하여 서울 북악산 서쪽 장의동(壯義洞) 일대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던 서인(후에 노론)의 중추적 집안으로 가세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안동에 남아 뿌리를 내리고 살던 안동김씨들은 지역적 연고인 퇴계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으로는 영남학파,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하게 되었으니, 기호학파에다가 정치적으로 반대 당파인 서인에 속했던 장의동 거주 김씨들을 이들과 구분하여 장동김씨(壯洞金氏)라 불렀다.
남양주 석실마을에는 한양에서 뿌리를 내린 청음의 조부를 비롯하여 청음 형제, 손자인 김수증 김수항 형제의 묘를 포함하여 문중의 묘역이 있는데, 17-18세기 정국을 주도한 장동김씨(壯洞金氏)들에게 장의동이 생전의 세거지(世居地)였다면, 남양주 석실마을은 사후의 세거지 즉 세장지지(世葬之地)인 셈이다.
우암의 강력한 정치적 동지였던 김수증과 김수항 형제가 1668년 조부 김상헌의 묘가 있는 이곳에 아버지를 위하여 도산정사(陶山精舍)를 세우자 우암이 ‘醉石(취석)’ 글씨를 써주었으며 1672년 이 글씨를 새겨 비석을 세워놓았는데 취석비(醉石碑)라 한다.
비석 뒷면에는 우암이 이 글씨를 써준 내력을 기록한 김수증의 '附書陶山精舍記後(부서도산정사기후)‘가 새겨져 있는데 내용을 풀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서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청음 김상헌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잡혀갔을 때 중국인 맹영광이라는 사람이 청음의 의로운 행동을 흠모하여 도연명(陶淵明)의 '채국도(採菊圖)'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도산정사에 도연명의 채국도(採菊圖)와 영정을 함께 모신데서 비롯되었으며, ‘醉石’은 주자와 연관된 도연명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도연명이 향리인 여산에 살 때 근처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평소 도연명은 술에 취하면 그 바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고 하여 그 돌을 취석 혹은 도공취석((陶公醉石)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자가 이 지역 지방관으로 있을 때, 도공취석 곁에 집을 지어 귀거래관(歸去來館)이라 이름붙이고 살면서 ‘도공취석귀거래관(陶公醉石歸去來館)’이란 시를 남겼는데 주자를 신봉하는 유가에서는 중요한 일화로 삼아 인용한다.
우암은 향리에서 무위자연하며 살았던 도연명을 빗대어 청음을 그리워한 것이다.
취석비 옆에 있는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도 우암이 글을 짓고 김수증이 글씨를 썼다.
같은 글씨의 ‘醉石’ 각자가 충남 예산 가야산 자락에도 있는데, 우암의 수제자인 권상하의 제자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1683~1767)가 이곳에 가야구곡을 경영하면서 석실마을 것을 탁본하여 새겼다고 보아야겠다.
10-11. 충북 제천의 청풍 한벽루
*寒碧樓(한벽루)
한벽루의 터주대감은 청풍 현감을 지내기도 한 이고장 출신 권상하인데, 권상하는 스승 우암이 2차 예송논쟁 때 남인에 패하여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청풍으로 낙향, 일체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다.
언제 써주었는지, 우암의 寒碧樓(한벽루)와 항상 우암의 흔적을 따라다니는 김수증의 편액이 나란히 붙어 있다.
10-12 충북 제천 황강영당
*寒水齋(한수재-인터넷 자료사진)
*黃江影堂(황강영당-인터넷 자료사진)
우암의 수제자 한수재 권상하(1641~1721)가 낙향하여 후학들을 강학하던 곳에 1726년에 황강영당을 지어 권상하를 배향하였다.
이곳에 우암의 글씨라고 전하는 ‘한수재(寒水齋)’와 ‘황강영당(黃江影堂)’ 두편의 편액과 권상하 글씨의 ‘한수재’ 편액이 있는데, 이때는 이미 우암은 물론이고 권상하까지 별세하고 난 뒤이기 때문에 ‘한수재(寒水齋)’는 생전에 써주었을 수도 있지만, 황강영당은 후대에 우암의 글씨를 모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0-12. 가평의 조종암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
우암의 제자 이제두(李齊杜)가 1684년 가평군수를 지내면서 기평을 흐르는 조종천변의 암벽에 숭명배청의 이념을 상징하는 글귀로 꾸민 조종암(朝宗巖)을 조성하기 위하여 우암에게 자문을 구하자 화양구곡을 경영하였던 우암이 친필과 함께 어떻게 꾸밀 것인지 기본적인 구상까지 알려주었다고 한다.
우암의 글씨 ‘日暮途遠 至通在心’는 앞서 살펴보고 나왔던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대재각에 있는 우암의 글씨와 같은 글귀로서 필체는 약간 다른데, 우암의 서체이기는 하나 건조한 글씨에 우암의 글맛이 상당히 빠져있다. 꾸밈없는 우암의 필체를 꾸미려는 석공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조종암을 이곳에 세우게 된 이유는 가평의 옛이름인 조종(朝宗)에서 비롯된 조종천(朝宗川)이 있기 때문이다. 조종(朝宗)이란 ‘여러 강물이 바다에 흘러 들어가 모인다’는 뜻인데,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기에 우암을 따르던 노론세력들에 의해 중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종암과 우암과 관련된 내력은 1804년 후학들이 비에 새겨 조종암 가운데 세워놓아 전하게 되었다.
조종암에 있는 우암의 글씨 주위에 명나라 의종의 어필인 思無邪(사무사-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朗善君 李俁)의 글씨 朝宗巖(조종암) 등이 새겨져 노론의 정치이념인 소중화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11. 강원도에 있는 우암의 글씨
우암은 기호학파의 영수답게 충청도를 중심으로 경기도와 호남 지역에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뜻밖에도 강원도에도 우암의 글씨가 적지 않다. 1674년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 윤선도 등과 치열하게 맞붙은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우암은 이듬해 함경도 덕원(지금의 함경남도 문천)으로 유배 갔다가 4개월만에 다시 동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장기(지금의 포항)를 거쳐 거제로 이배되어 1680년 남인 정권이 숙청당하고 서인이 재집권하자 6년만에 비로소 풀려났다.
이때 한양에서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간 유배 행로를 따라 우암 글씨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다.
11-1. 강릉 해운정
*海雲亭(해운정)
*程夫子影堂(정부자영당)
해운정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어촌 심언광(漁村 沈彦光:1487~1540)이 지은 별당이다. 심언광은 우암 보다 앞 세대의 인물로 우암과의 뚜렷한 연관은 보이지 않는데 유배 가는 길에 유서 깊은 집이라 묵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 심언광이 정부자(程夫子:주자에 앞서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정이 정온 형제로서 앞서 도봉산 글씨 중 ‘염락정파’에서 등장하였다.)의 영정을 구하여 모신 사당의 편액 ‘程夫子影堂(정부자영당)’도 우암의 글씨이다.
11-2. 삼척 해암정
*海岩亭(해암정)
우암의 글씨 오른쪽에 서인의 대 선배격인 송강 정철의 글씨 石鐘檻(석종함)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11-3. 영월 금강정
*錦江亭(금강정-인터넷 자료사진)
주위에 비운의 왕 단종과 관련된 유적이 있어 조선시대 대유학자들의 방문과 기록이 많이 있는데, 우암이 유배가 끝난 뒤인 1684년 금강정을 방문하여 주위에 펼쳐져 있는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錦江亭記)’를 썼다. 이때 편액을 남겼을 것이다.
11-4. 속초 영랑호
*永朗湖(영랑호-인터넷 자료사진)
‘영(永)’자와 ‘랑(郞)자 왼쪽으로 ’우암(尤庵)‘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2016년 속초시에 있는 영랑호 주변 바위에서 우암의 글씨 ‘영랑호(永朗湖)’가 일반인에 의하여 발견되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랑호 각자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암의 제자인 김유(金楺:1653~1719)의 ‘검재집(儉齋集)’에 ‘巖上刻永朗湖三字, 云是尤菴先生筆而易郞以朗(암석핵영랑호삼자, 운시우암선생필이역영이영)’라고 나오며, 이해조(李海朝:1660∼1711)의 ‘명암집(鳴巖集)’에 “湖邊石上, 刻永郞湖三字, 尤翁筆也(호변석상, 각영랑호삼자, 우옹필야)”라고 나온다.
내용은 ‘영랑호변의 바위 위에 ‘영랑호’ 3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암 글씨라고 기록해 놓은 것으로 통상적으로 영랑호의 ‘랑’은 ‘郞’을 쓰는데, 김유는 이를 지적하면서 ‘郞’을 ‘朗’으로 바꿔썼다‘는 내용으로 이번 발견된 각자는 ‘永朗湖’로 김유의 기록으로 보면 송시열 글씨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강원도에 우암의 유배길을 따라 고성 가학정, 청간정, 해산정 등에도 우암의 글씨 편액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정자와 함께 편액도 사라지고 없다. 간성 선유담(仙遊潭), 강릉 경포호의 조암(鳥巖)에는 각자가 있다고 한다.
12. 광주 주변 지역에 있는 우암의 글씨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방은 조선의 정계에 본격적으로 당파가 생기기 전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등 당대 쟁쟁한 거유들을 배출한 바 있는데, 이들은 영남학파의 퇴계와 각별히 교류하면서 기호지방과 달리 지역적으로 강한 당파색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고봉은 퇴계의 제자로서 장장 8년에 걸쳐 퇴계와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을 통하여 서로 상대의 의견을 반영하여 자신의 견해를 수정 발전해나갔던 좋은 선례를 남긴 바 있다.
이 무렵, 광주 지역의 유림에 중추적 위치에 있던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1493~1582)이 면앙정을 짓고 후학들과 가사문학의 문단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김인후와 기대승을 비롯하여 임제(미수의 외할아버지), 고경명, 임억령, 양산보를 비롯하여 광주 지역 유림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출입하며 교유하게 되었는데, 그 말단에 송강 정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은 원래 왕가의 외척으로 한양 출신이지만 아버지가 을사사화(1545년 대윤과 소윤파 간의 권력투쟁)에 연루되어 집안이 풍비박산나자, 집안이 떠돌다가 16세 때 조부의 묘가 있는 담양 청평에 정착하였으며, 앞서 거명한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들에게 학문과 시를 배우면서 지역의 유림들과 교유하는 한편으로 서인의 영수였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정계에 알리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였다.
송강이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를 한 후, 당시 동서파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어 서인의 영수 지위에까지 올라 정여립 사건 때 무자비하게 동인을 숙청하는 등 정국을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부침을 하였는데 당쟁에서 밀릴 때마다 담양으로 낙향하여 숨을 고르며 지역 유림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서인 세력이 이 지역에 점차 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권력에서 밀려나 낙향한 심정을 담은 정철의 유명한 ‘사미인곡’을 비롯하여 주옥같은 가사문학의 작품들이 이때 광주에서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이 시기보다 반세기 지난 후인 우암이 정국을 주도할 무렵, 광주지역은 우암과 같은 당파(서인-노론)로 인연이 된 인사들 덕분에 우암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12-1. 담양 소쇄원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나라 정원의 진수로 일컬어지는 소쇄원은 조선 정원의 백미를 즐길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덤으로 우암의 글씨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 중에 하나이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스승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조성한 정원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중국의 남북조시대 시인인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고, 정원의 이름을 자호에서 따와서 소쇄원이라 한 것이다.
*瀟灑處士 梁公之廬(소쇄처사양공지려-소쇄처사의 조촐한 집)
*五曲門(오곡문)
오곡문의 ‘오곡’이란 주변의 암반 위에 계류가 之자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위의 두 글씨는 소쇄원 뒷 담장에 새겨져 있다.
*霽月堂(제월당)
*光風閣(광풍각)
소쇄원 위 아래로 있는 정자의 편액으로서, 앞서 도봉산 글씨의 ‘제월광풍’에서 글귀의 유래를 살펴본 바 있다.
12-2. 담양 명옥헌
*鳴玉軒 癸丑(명옥헌 계축)
여름철 명옥헌은 배롱나무로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명옥헌 정자 좌측 작은 계곡가에 새겨져 있다.
우암이 제자인 명옥헌의 주인 오기석(吳祺錫 1651~1702)을 아끼는 마음에 정자의 당호를 명옥헌이라 짓고 써준 글씨 ‘鳴玉軒 癸丑(명옥헌 계축)’이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이 글씨를 모사하여 명옥헌 정자의 편액으로 달아놓았으나 모사가 조잡하여 우암의 글맛을 살리지 못하였다. 계축(癸丑)이라니 1673년에 썼다.
12-3. 광주 환벽당
*環碧堂(환벽당)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강학하던 곳인데, 송강 정철이 처음 낙향 하였을 때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으며, 이때의 인연으로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시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環璧)이란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뜻하는 것으로 전주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환벽정 이름을 단 정자가 많이 있다.
12-4. 광주 양과동정
*良瓜洞亭(양과동정)
제봉의 별서로 불릴 만큼 임진왜란 때 서인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1533~1592)이 자주 오르며 누정기를 남기는 등 자취가 남아 있는 정자라 제봉을 그리는 마음으로 우암이 편액을 써 주었다.
12-5. 장성 필암서원
*廓然樓(확연루)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하서 김인후를 배향한 서원으로서, 우암이 문루의 이름을 확연루라 짓고 편액을 썼다.
'확연루(廓然樓)'의 의미는 ‘정자(程子-앞선 ’도봉산 글씨‘ 중 ’염락정파‘ 참고)의 말씀에 군자의 학(學)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하여 확연히 크게 공정’하므로 이에 우암이 특별히 '확연'이란 이름 짓고 편액 글씨를 썼다고 한다.
12-6. 무안 화설당
*花雪堂(화설당)
무안 화설당은 유운(柳運, 1580~1643)가 조광조를 구원하려다가 파직당한 후, 향리에 묻혀 술로 울분을 달래다 죽은 곳인데, 생전에 위로 차 찾아온 교유들이 ‘겨울인데도 동백꽃이 있어서 화설(花雪)’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12-7. 영암 죽림정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한 이듬해 우암은 함경도로 유배를 떠나고, 우암과 일생 정치적인 운명을 함께 한 김수항은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죽림정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며 이순신 장군과 각별한 사이였던 희암 현덕승(希菴 玄德升,1564~1627)이 세운 취음정을 후손이 옮겨 지으면서 마침 이곳에 유배 온 김수항에게 작명을 청하자 죽림정이라 지어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멋들어진 우암 글씨 竹林亭(죽림정)과 竹林幽居(죽림유거) 두편의 편액이 달려 있다.
*竹林亭(죽림정-인터넷 자료사진)
*竹林幽居(죽림유거-인터넷 자료사진)
죽림정에는 이순신 장군의 서찰을 모각한 현판이 달려 있는데, 유명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호남을 잃으면 국가가 무너지므로 방비를 단단히 하여야 한다)’의 내용이 들어 있는 편지다.
임진왜란 도중 절친한 현덕승이 위문품과 함께 위문을 다녀가자 이순신 장군이 감사의 편지를 보내면서 이 내용을 담았던 것이다. 편지는 죽림정의 현씨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원본은 현충사로 보내고 복사본을 달아 놓은 것이다.
이밖에도 광주지역에 永思齊(영사제), 효령동 우산정사의 편액인 '淸白傳家(청백전가), 함평 四梅堂(사매당), 화순 三溪精舍(삼계정사) 등에도 우암의 글씨가 있다는데, 한결같이 우암과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연관된 인물들의 연고지이다.
13.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에 있는 우암의 글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우암이 60세가 되는 1666년에 들어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은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화양(華陽)이란 ‘중국 문화의 햇빛’이라는 뜻으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화의 주역으로 등장한 명청교체기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인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주장한 우암이 이곳에 작은 중화(小中華)를 구현하고자 한 곳이다.
우암 사후에 권상하가 우암의 유지를 받들어 구곡을 정립하였으며, 이후 민진원(閔鎭遠:1664~1736)이 전서체로 구곡의 이름을 바위에 새김으로써 화양구곡이 완성되었다.
대표적인 우암의 유적지이며 우암을 배향한 화양서원이 있어 우암을 따르던 노론세력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경승지답게 바위에 새겨진 선비들의 글씨도 많은데, 특히, 우암의 글씨를 비롯하여 중국 명나라 황제의 글씨들은 우암의 숭명의식을 선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13-1. 제1곡 경천벽
*華陽洞門(화양동문)
화양구곡은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제1곡 ‘경천벽’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차를 타고 곧장 들어가다가는 자칫 1곡을 놓치기 쉽다. 계곡 건너편에서 멀리 바라보는 경천벽에 희미하게 ‘華陽洞天’이 새겨져 있다.
13-2. 암서재가 있는 제4곡 금사담
화양구곡의 아름다움은 우암이 공부했다는 암서재(巖棲齋)가 있는 제4곡 금사담(金沙潭) 주변에서 절정을 이룬다.
*화양구곡의 암서재가 있는 금사담 주변
암서재 올라서기 전 우측 석벽에 두 줄로 새겨진 전형적인 우암의 행서체 글씨를 볼 수 있다.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
‘蒼梧雲斷 武夷山空‘을 직역하면 ‘창오산엔 구름이 끊겼고, 무이산은 텅 비어있네.’가 되지만, ‘창오’는 중국의 순(舜)임금을 일컫는 말로서 중국의 임금을 의미하는 대명사격이며, ‘무이’는 주자를 상징한다. 즉, ‘중국의 임금도 없고 주자도 없는데, 어찌 이곳에 우암인들 있을쏘냐.’라며 지독한 숭명주의와 주자절대주의자인 우암의 철학을 담고 있다하겠다.
암서재에는 권상하 글씨의 ‘암서재기(岩棲齋記)’ 현판이 있으며, ‘蒼梧雲斷’이 새겨진 석벽 옆에는 명태조의 서체인 ‘忠孝絶義(충효절의)’도 있다.
13-3. 제5곡 첨성대
제5곡 첨성대(瞻星臺)에도 조선과 명나라 임금의 글씨를 비롯하여 많은 글씨들이 소중화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우암의 글씨도 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글씨 ‘非禮不動(비례부동-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과 조선 선조 어필인 ‘萬折必東(만절필동-강물이 일만 번을 꺾여 굽이쳐 흐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일종의 충성 서약 같은 것이다)이 있으며, ’非禮不動’ 우측에 네모난 공간에 원래는 임진왜란 때 원병을 파견한 명나라 신종의 글씨인 ‘玉藻氷壺(옥조빙호)’ 각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연유인지 파내어지고 없다.
이 비어 있는 곳 바로 아래 우암의 필체로 숭명사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장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을 찾을 수 있다.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이 문장은 직역하면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의 것이고, 조선의 해와 달도 명나라 의종(명나라 마지막 숭정황제)의 것’이라는 뜻으로 수치스럽도록 사대주의에 빠진 문장으로 보이지만, 당시 주자절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의식을 조금 이해해 준다면 뜻이 다소 순화되어 ‘조선은 오랑캐인 청나라가 아닌 명나라의 질서에 아직도 있다.’ 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13-4. 화양구곡 인근의 사담동천
*沙潭洞天(사담동천)
화양구곡의 인근에 있는 사담계곡 입구 암벽에 새겨져 있는 사담동천도 우암의 글씨이다.
14. 영남에 있는 우암의 글씨
우암이 청년시절 동춘당과 함께 영남지방을 유람한 적은 있지만, 출사하고 난 이후에는 급변하는 정세의 한가운데 있다 보니 유배를 떠나지 않는 한 한가롭게 유람을 다닐 여유는 없어 방문 기념 삼아 글씨를 남기 사례는 없는 것 같다. 후대에 들어와 영남에도 우암의 학문을 추종하는 노론세력이 적지 않았지만 우암의 글씨로 현판을 달거나 각자를 새겨 널리 보이기엔 쉽지 않았던지 전국적으로 그 많던 우암의 글씨가 영남지역에서는 아주 귀하다.
14-1. 합천 함벽루
*涵碧樓(함벽루)
우암의 큼지막한 글씨 ‘涵碧樓(함벽루)’가 합천 황강변 함벽루 뒤 석벽에 새겨져 있고, 좌측 관지에 ‘尤庵書(우암서)’라 써 놓았다. 우측에 새겨진 명문도 우암의 글씨인데, 崇禎後辛酉인 1681년에 함벽루를 중건한 기념으로 당시 군수 조지항(趙持恒)에게 써준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우암이 함경도로 유배되었다가 거제로 이배된 후에 1680년 단성을 거쳐 합천으로 가는 도중에 해배가 되었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1681년에 합천에 머물면서 글씨를 써준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14-2. 합천 홍류동천 최치원의 제시석
합천 해인사로 들어가는 홍류동 초입 계곡 건너편에 최치원의 유적지로 전하는 농산정(籠山亭)으로 들어가는 다리 우측 도로변 석벽에 수많은 각자가 있는 가운데 최치원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던 심정을 담아 지은 시를 멋들어지는 행초체로 새겨놓았다고 이 석벽을 ‘최치원의 제시석(題詩石)’이라 전한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미친 듯 겹친 돌 때리어 첩첩한 산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지척간의 말소리조차 분간하기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늘 시비할 때 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온 산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노라.
농산정은 이 시의 끝 두 글자를 따와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가 1579년에 이곳을 유람하고 남긴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 의하면, ‘최고운의 시 한편을 폭포 옆 바위 위에 새겨두었는데 매년 장마 때마다 거센 물결에 깎여 이젠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마멸되었다. 손으로 더듬어야 어렴풋이 한두 글자를 겨우 판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라고 전했으며, 정시한(丁時翰:1625~1707)은 1686년 해인사를 방문한 기록을 ‘산중일기’에 남겨 놓기를, ‘최고운의 시가 새겨져 있으나 많이 마멸되어 지금은 狂, 奔, 故, 敎 정도만 뚜렷이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이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시한이 방문한 이때까지의 상황은 농산정 앞 계곡의 암반에 각자가 새겨져 있었고, 각자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볼 수 없는 지경임이 명확해 보인다.
그런데, 이때로부터 40년이 지난 1725년 명암 정식(明庵 鄭栻:1683~1746)이 가야산 일대를 유람하고 남긴 ‘가야산록(伽倻山錄)‘에서 안내해 준 해인사 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것이다. 승려가 “시내 가운데 돌에 최치원의 친필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옮겨와 다시 새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해인사 입구 홍류동에 있는 최치원의 제시석
주변에 낙서장 같이 정체불명의 글씨들이 많은데, 가운데 세줄 행초체의 글씨이다. 이 글씨 좌측 바짝 붙여서 작은 글씨로 조잡하게 ‘尤庵書’라고 추가로 써 놓은 것이 보인다.
해인사 영내에 속하는 이곳에 관한 한 비교적 신빙성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해인사 스님의 증언이므로 그 사이(정시한이 방문한 이후 정식이 방문할 때까지의 기간) 계곡에서 떨어진 석벽에다 최치원의 시를 다시 새겨 놓았음은 분명하다.
이 글씨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이 글씨가 우암의 글씨라는 스님의 증언을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의 ‘답사여행의 길잡이’에 다음과 같이 의문점이 요약되어 있다.
‘시 구절을 새긴 왼쪽 아래 ‘尤庵書’(우암 쓰다)란 음각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이 글씨가 송시열의 작품이란 말인가?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우선 글씨체가 우암의 진중하고 무게 실린 그것과 많이 다르다. ‘尤庵書’라는 글씨도 시 구절의 글씨와는 비교할 수 없게 조악하고 새긴 수법도 서로 다르며 본문과의 간격이 너무 좁다. 때문에 오히려 시 구절의 좋은 글씨를 방해하고 있어 후세의 누군가가 덧붙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러니 이 시구가 꼭 우암의 필적이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좀 더 확실한 자료가 나올 때까지 글씨의 주인공을 가리려는 노력은 일단 덮어둘 수밖에 없겠다. 다만 어떤 사람의 솜씨이든 글씨가 참 멋들어진 것은 분명하고, 또 이 바위벽의 시를 통해 우리가 고운을 만날 수 있음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지금까지 보아온 우암 특유의 행서체 글씨와는 확연히 다르기는 하지만, 서예에 일가견이 있던 우암이 행초체인들 멋들어지게 쓰지 못했을까. 원교 이광사는 천은사 일주문 편액을 쓰면서 화마를 다스리기 위하여 물 흐르듯 썼다고 했는데, 우암도 원래 이 글이 있었던 계곡암반을 생각하면서 물 흐르듯 행초체로 휘날리며 썼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명암이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는 우암이 활동하던 시기와 고작 40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아주 먼 옛날 이야기도 아니고 스님도 무슨 근거가 있었기에 우암의 글씨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조잡하게 쓴 ‘尤庵書’는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노론계열에서 우암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음을 표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씨는 과천 청계산 입구인 자하동천에서도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 이 지역 유림(아마도 입구에 있는 과천향교도 노론세력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에서 홍류동에 있는 글씨를 탁본하여 이곳에도 그대로 새긴 것이다. 나름 우암의 글씨라는 믿음이 있기에 옮겨 새겼을 것이다.
*청계산 자하동천에 있는 최치원의 제시석
좌측 석면에 새겨놓았지만 얕아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계곡 건너편 암벽의 우측 상부에는 추사의 제자인 신위(申緯) 글씨의 ‘白雲山人(백운산인)’, ‘紫霞洞天(자하동천)’이 있고, 그 좌측 중간 바위 상부에 제시석 각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각자의 상태가 좋지 못해 가까이 가본들 우암의 글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고 접근도 용이하지 않아 일부러 찾아 갈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14. 지리산 자락에 있는 우암의 글씨
지리산 자락에 있는 우암의 글씨를 제대로 맛보기 위하여 지금까지 전국을 일주하듯 한참을 돌아왔다. 우암 스스로 도예일치(道藝一致)를 주장하였듯, 서예(藝)는 단순히 심미적인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쓴 사람의 성품 학풍 인격 등 도(道)가 담겨 있으므로 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예 글씨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기에 우암의 글씨에 담겨 있는 그의 도를 살펴보고 나오느라 돌아오는 길이 더 멀어졌던 것이다.
14-1. 지리산의 관문 산청 원지 적벽산
[문화유적명소]방에 올려져 있는 <엉겅퀴>님의 ‘적벽소묘’에 옛날 지리산의 관문이었던 신안포구를 내려다보는 원지의 적벽산에 우암의 글씨 ‘赤壁(적벽)’이 있었던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영조대의 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에 「적벽은 관아의 동쪽 5리에 있다. 둔철산에서 뻗어 나와 원지촌의 주맥이 되었다.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또한, 송병선의 1872년 『단진제명승기(丹晉諸名勝記)』에 기록하기를 ‘「길은 적벽 아래로 나 있고, 푸른 단애와 깎아지른 절벽이 층층이 쌓여 있다. 뻗어 나간 길이가 몇 리나 이어졌고, 긴 강이 완만하게 돌아 나간다. 밖은 바로 흰 모래가 넓게 퍼져 있어 물길 가운데로 배를 띄울 만하다. 단애에 새겨진 ‘赤壁’이란 두 글자는 문정공(송시열)의 글씨다. 거기 사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에는 열두 호접루(蝴蝶樓)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홍수가 나서 없어지고 다시 옛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하니, 매우 한스럽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거하여 오래전부터 주변 주민들을 탐문하며 적벽산 자락에 있다던 우암의 글씨를 찾아보았으나 일본강점기 때 도로 개설로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파손되면서 없어졌다는 인근 주민들의 자신 없는 전언만 들었을 뿐 찾을 수 없었다.
<엉겅퀴>님도 ‘적벽소묘’ 글을 쓰기 위하여 샅샅이 뒤졌으나 역시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산청문화원에서 산청지방에 산재해 있던 각자를 정리한 ‘산청 석각명문총람‘을 발간하면서 ’적벽‘을 찾아낸 것이다.
우암이 적벽 글씨를 남긴 내력은 ‘석각명문총람’ 발간을 주도하며 7년의 추적 끝에 ‘赤壁’ 글씨를 찾아낸 산청문화원 권유현 연구위원을 취재한 경남일보 기사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전한다. (*일부 주석을 덧붙여 편집 보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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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의 글씨로 추정하는 근거는 연재(淵齋) 송병선의 문하에서 수학한 단성출신 이도복(李道復)의 기록이다. 이도복은 ‘우암이 (2차 예송논쟁으로 덕원-장기-거제로 귀향갔다가) 해배되어 귀향할 때 이곳에 들러 남명의 시구 중 孤鶴橫舟赤壁蘇(고학횡주적벽소-외로운 학이 배를 스쳐 감은 소동파의 적벽부의 구절 같네)의 뜻을 살려 손수 기록했다.’고 했다. 연재는 강누마을 안동권씨 가문의 권병구와 친분이 두터워 적벽 옆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赤壁’ 옆에는 ‘壬戌之秋 七月旣望(임술지추칠월기망각-1682년 가을 7월16일)’이라고 새겨 각자한 시기를 기록해 놓았다. 붉은 칠은 단성면 강누마을에 살고 있던 조선 말기 단성의 노론 가문으로 권극유(안동권씨)의 후손 권도희(90)옹이 젊은 시절 이 산에 올라 정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암이 언제 왜 무슨 이유로 이곳에 ‘적벽’이라는 글씨를 남겼을까.
권 위원은 우암 거제 해배 기점인 1680년 귀향길에서 친분이 있는 단성 강누마을 안동권씨(인조반정 이후 북인에서 노론으로 전향) 가문에서 며칠 묵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또 우암이 실제 단성을 지나간 해인 1680년과 각자를 새긴 시기인 ‘임술 1682년’과 2년의 시차가 나는 것은 권씨가문의 위트로 추측했다. 즉 2년을 기다렸다 새겼다는 것인데 이는 소동파의 ‘적벽부‘와 시기를 맞추기 위함이었다는 것.
‘임술지추 칠월기망(壬戌之秋 七月旣望)’으로 시작하는 소동파의 적벽부가 나온 시기는 1082년, 권씨가문이 적벽산에 ‘적벽’을 새긴 날도 ‘임술지추칠월기망각’(임술년 가을 칠월 16일), 이는 1682년과 정확하게 600년의 시차가 난다.
그동안 이 글씨가 잊혀 진 이유는 하상정비로 인해 강누마을이 뒤쪽으로 후퇴하면서 보이지 않게 됐고 최근에는 완전히 잊혀 진 것으로 권 위원은 해석했다.
-2017.03.01.자 경남일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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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壁 ([석각명문총람]에서 복사)
적벽산 중앙부 40미터 높이에 새겨져 있다.
강누마을의 강변길을 따라 북쪽으로 강물을 거슬러 적벽의 중앙부 건너편 위치로 올라가면 새로 건립한 읍청정을 지나고, 이곳에서 수십미터 더 올라가면 강변 퇴적토에 어렴풋이 건물터가 남아 있는데 읍청정의 구터이다. 귀향길의 우암을 영접하고 적벽 글씨를 받아 새긴 강누마을 안동권씨 집안에서 적벽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에 세운 읍청정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적벽 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赤壁’ 글씨의 위치 *붉은색 원형으로 표시한 곳.
*클로즈업하면 어렴풋이 보이는 ‘赤壁’글씨
날씨도 좋지 않고 10배줌 카메라 성능으로는 한계였다.
경호강 건너편 강누마을에서 적벽을 바라보면, 육안으로 '赤壁' 글씨 찾기가 쉽지 않은데, 옛날에는 사람의 시력도 좋고 맑은 공기에 가시거리도 길어 경호강에 배 띄우고 순 한잔 하며 뚜렷이 보였을 ‘赤壁’을 바라보노라면 강물 바람결에 소동파 적벽부 구절이 한층 흥을 북돋았을 것이다.
‘적벽대전에서 인생을 걸고 한판 대결을 벌였던 영웅호걸들은 다 어디로 갔나. 적막한 강물에 달빛만 교교히 비치고 있는데,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인생을 돌이켜보니 천지에 하루살이가 붙어있는 것과 같고 망망대해에 한 알의 좁쌀처럼 보잘 것 없다. 인생은 참으로 덧없이 흘러가지만 장강(長江)의 강물은 끝이 없이 흐르는구나!’
오랜 세월 권력의 핵심에서 정국을 주도하다가 68세 노구에 6년 긴 세월동안 전국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비로소 해배되어 귀향하는 우암의 인생무상 심정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14-2. 단성 신안정사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
석벽 우측에 붉은 색이 입혀 있는 작은 글씨에 부여의 대재각에 새겨진 글씨를 모각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지리산 자락 단성지역은 인조반정 이전에는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이 이끄는 집권 북인세력의 강력한 영향권에 들어있는 지역이었으나, 반정으로 정인홍 계열이 괴멸되어버린 후 집권한 서인의 핍박이 시작되자 이지역의 북인세력들은 남명학맥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남인으로 서인으로 전향하여 각자 도생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남인으로 전향한 세력들조차 정인홍 때문에 지역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정인홍의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잔존 북인세력을 배척하고 나서자, 이들은 확실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당시 집권 서인의 영수인 우암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천 권극유(愚川 權克有:1608~1674-후에 18년간 덕천서원 원장을 지냈으며, 어천마을 입구에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로서, 단성 강누마을의 안동권씨 집안이 서인계열로 전향한 계기가 되었으며, 우암에게 ‘赤壁’ 글씨를 받아 새기고 관리해왔던 것이다.
딘상에서 안동권씨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노론이 된 성주이씨 가문이 합심하여 주변 지역 노론세력의 집결지 삼아 강누마을 뒤에 신안정사(新安精舍)를 세워 주자와 우암의 영정을 모시고 배향하였다.
19세기에는 전남 장성에서 우암의 학맥을 이어받아 노사학파를 이루고 있던 노사 기정진 (蘆沙 奇正鎭:1798~1879)이 배출한 영남 문인들이 신안정사를 거점 삼으면서 지리산 자락 영남 노론의 주요 근거지 중에 하나가 되었다.
신안정사에는 소중화를 정치이념으로 삼는 노론의 본거지답게 화양구곡에서 보았던 명나라 황제 의종의 필체인 ‘非禮不動(비례부동)’ 현판과 각자가 있으며, 뒤편 암벽에 노론계의 정치적 표어와도 같은 우암의 글씨 ‘日暮途遠 至痛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를 새겨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글귀의 우암 글씨는 앞서 이미 두 차례나 보고 내려왔다. 충남 부여 대재각에 새겨진 것과 경기도 가평 조종암에 새겨진 그것들이다.
대재각에 새겨진 글씨와 글의 순서가 다르지만, 이 글씨가 새겨진 암벽 우측 떨어진 곳에 작은 글씨로 ‘識(지:글을 쓰고 나서 글을 적은 연유 등을 기록)’을 적어 놓았는데 바로 부여 대재각에 있던 우암의 글씨 머리에 새겨진 내용과 동일하여, 대재각에 새겨진 우암의 글씨를 순서를 바꾸어 모각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4-3. 생비량 어은정사
*漁隱(어은)
어은 오국헌(漁隱 吳國獻:1599~1672)은 김장생의 문인으로서 우암과는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이후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단성의 도전에 옮겨 살면서 마을 이름을 어은동(漁隱洞)이라 고치니, 우암이 출사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을 배우는 그의 은자적 삶을 칭송하여 ‘漁隱’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앞서 살펴본 우천 권극유로 대표되는 단성 신안정사의 노론세력은 남명학파의 북인계열에서 인조반정 이후 전향한 세력이라면, 생비량의 어은 오국헌은 정통 기호학파의 문하에서 성장한 노론 직계라 할 수 있겠다.
단성과 생비량은 당시 모두 단성현에 속해 있었으므로 권극유와 오국헌은 아주 친밀하게 교유하며 이 지역 노론세력의 뿌리가 되어, 조선조 말까지 영남의 대부분 지역이 남인이 득세를 하는 가운데 단성지역만은 마치 남인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노론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14-4. 남원 구룡계곡 입구 용호서원
용호서원은 1927년 원동향약계(源洞鄕約;1572년 남원도호부 관내에서 만들어져 현재까지 유지 계승되고 있는 향약계로서, 조선시대 양반계층이 성리학적 교화를 목적으로 조직한 사교계)에 소속된 유림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서원이다.
설립 당시에는 성리학의 종주인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배향하였으나 한말에는 우암의 학맥을 이어받아 연재학파를 이루었던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1836~1905)을 비롯하여 남원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덕행을 펼쳤던 영송 김재홍(金在洪), 입헌 김종가(金種嘉) 등 연재의 문인들로 배향 인물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용호서원에는 주자절대주의를 따르던 노론계열답게 주자의 목판 글씨체를 집자하여 龍虎書院(용호서원), 龍虎亭舍(용호정사), 木澗堂(목간당), 須成齋(수성재) 편액을 달아 놓았으며,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목간당의 좌측 벽에 예의 꾸밈없이 써내려간 우암의 글씨 현판이 달려있다.
*용호서원의 吾道付滄洲(오도부창주)
이 글귀에 대하여 <엉겅퀴>님께 문의하여 풀이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吾道付滄洲(오도부창주)는 원래는 아래와 같은 두보의 시 『강창(江漲)/강물이 불어남』에 나오는 구절이다.
輕帆好去便 가벼운 돛은 가기에 편하고
吾道付滄洲 나의 길은 창주로 향하네.
*여기서 창주는 신선이 사는 곳 또는 은자가 사는 곳을 지칭함.
그후 주자가 무이산(武夷山)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지은 악부시(樂府詩) 『수조가두(水調歌頭)』에는
永棄人間事 영원히 인간 세상 일을 버리고
吾道付滄洲 나의 도를 창주에 부치려 하네.
주자는 두보의 시구를 사용하되 두보와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水調歌頭는 시의 제목이 아니고, 당시 유행하던 詞의 노래곡조 중 하나를 말하는데, 같은 노래 곡에다 문인들이 거기에 맞춰 가사를 다르게 쓴 것이다.‘
여기서 집어보고 가야할 인물이 용호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연재 송병선이다.
송병선은 연재학파를 이루며 구한말 항일운동의 뿌리인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을 이끌던 유학자이자 항일 국가유공자이다.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인데, 우암 당대 노론의 정치이념인 숭명배청의 존화양이(尊華攘夷-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론이 발전하여 청나라를 뜻하는 오랑캐의 개념이 구한말 조선을 넘보던 일본을 비롯한 서양오랑캐로 확대하여 배척하자는 운동이었다.
우암이 떠나고 난 후, 일부 모리배 같은 노론세력들이 왕의 외척이 되어 세도정치로 국정을 농단하며 사익추구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권력에서 떨어져 있던 남인의 개혁파는 성리학의 관념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을 뜻하는 실학(實學)을 발전시켰으며, 노론의 개혁적 소장파들은 시대착오적인 소중화에 갇혀있는 조선 문화의 후진성을 자각하고 청나라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 운동을 벌이는 등 조선의 근대화를 위하여 고민하는 유학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강호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던 노론의 보수파조차도 열강들에 둘러싸인 조선의 어려움을 해쳐나가기 위하여 노심초사하였으니, 최익현을 배출한 화서학파(화서 이항노), 정재규 등 단성을 거점으로 한 영남 노론을 배출한 노사학파(노사 기정진), 연재학파(연재 송병선)등이 위정척사론으로 항일운동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특히,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고, 그의 동생 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1839~1912)도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12년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송병선은 1869년, 1879년 두 차례 지리산을 유람한 후 ‘지리산북록기(地異山北麓記)‘와 ’두류산기(頭流山記)‘ 등 두편의 지리산유람록을 남겼으며, 송병순은 1902년 39박40일간 산행과 유람을 통하여 지리산 곳곳을 둘러보고 ‘유방장록(遊方丈錄)’을 남겼다.
두 형제는 모두 목숨으로 저항한 항일 순국 애국지사이자 지리산을 온 몸으로 사랑한 지조 높은 유학자였다.
용호서원에 배향된 김재홍, 김종가 등도 연재의 문하에서 공부한 유림들로, 용호서원은 결국 항일운동의 뿌리가 된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연재학파의 근거지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침략에 죽음으로 항거할 만큼 애국심이 투철했던 송병선, 송병순 형제가 바로 우암의 직계 9세손으로서, 우암의 선비정신이 녹아 있는 가풍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지리산 자락 용호서원에서 우암의 기교 없이 우직한 글씨를 바라보면서, 파쟁의 와중에 자파의 패권주의를 주도한 우암의 독선이 조선에 끼친 악영향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곳에 배향된 선비가 우암의 직계 후손인 연재 송병선임을 생각한다면, 우암에게 책임을 조금 들어주고 싶다.
일부 모리배를 제외한 명망 있던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았다. 때로는 시대착오적인 신념에 매몰되어 답답하도록 고집스러웠지만 죽음 앞에도 자신이 세웠던 명분을 버리지 않았다. 명분만을 따지다가 실리를 잃을 수 있지만 눈앞의 실리만을 쫓다가 대의를 거스르지는 않았던 선비정신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그나마 신뢰의 사회적 인프라를 이만큼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댓쪽 같이 신념을 버리지 않고 명분을 생명같이 여겼던 우암의 선비정신이 가풍으로 연재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15. 우암의 마지막 글씨
1680년 우암이 유배에서 복귀한 이후 서인이 노론과 서인으로 분당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비교적 소강상태였던 정국에 먹구름이 드리워졌으니,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외척의 발호를 막고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국혼물실(國婚勿失-왕비는 반듯이 서인집안에서 낸다.)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해왔다. 이 원칙대로 서인은 줄곧 숙종의 비를 배출하였으나 정비인 인경왕후는 후사 없이 일찍 죽고, 계비로 들어온 인현왕후는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러니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숙종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으니, 태어난 지 3개월도 안된 왕자를 원자로 삼아 장차 세자가 될 지위를 확고히 하고 싶었다.
여기까지는 조선시대 왕가에서 흔히 있었던 일로서, 목숨을 건 정쟁을 벌일 일은 전혀 아니었다. 문제는 장희빈의 어머니의 집안이 남인이라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종으로 살았던 집안이 남인이라는 하찮은 인연으로 정권에 밀려나 있던 남인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원자를 지지하였고, 같은 이유로 서인은 극력 반대하면서 남인과 노론 간에 치열할 정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화양동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우암이 ‘아직 정비인 인현왕후의 나이가 젊은데 후궁의 아들을 섣불리 원자로 삼는 일은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숙종은 귀한 아들을 얻어 흐뭇해하고 있는데 노론들이 끊임없이 찬물을 끼얹고 있으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숙종은 화를 억누르고 우암을 설득해보지만 신념을 목숨같이 여기는 우암도 칼 같은 성품답게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숙종은 장희빈을 위하여 인현왕후를 폐서인 시켜버리고, 83세의 우암은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며 노론세력을 숙청해버린 뒤 다시 정국이 바뀌어 남인 정권이 들어섰으니, 1689년 숙종대 일어났던 두 번째 환국인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우암은 간신히 노구를 이끌고 제주도로 귀향을 가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몇일 머물러 있는 동안 자신의 심정을 읊은 시를 남겼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北極空膽日 南暝但信風(북극공담일 남명단신풍)
貂裘舊恩在 感激泣孤在(초구구은재 감격읍고재)
팔십삼세 늙은 몸이 거친 만리길을 가노라.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만 궁하구나.
북녘하늘 해를 바라보며 끝없이 넓은 남쪽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초구(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 은혜 서려 있어 감격하여 외로이 눈물 흘리네.
풍량이 잦아들어 우암이 시를 남기고 떠난 후, 언제인가 이 시를 보길도 바닷가 석벽에 새겨놓았다.
*보길도 글씐바위(인터넷 자료사진)
하도 탁본을 많이 떠서 글씨를 분별하기 쉽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착참한 마음이 담긴 우암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다.
우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으나, 아무래도 남인은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우암을 그냥 귀양 보낼 것이 아니라 아예 국문을 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하여 상소를 해대니 숙종은 다시 한양으로 압송하여 국문을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우암이 한양으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노론들이 궐기라도 할 듯 떠들썩하자 남인들의 입장이 다시 긴박하게 바꿨다. 우암을 국문장에 불러 문초하다가는 자칫 우암과 노론들에게 역공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염려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노회한 우암과 노론세력에게 질리도록 염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에게 남인들은 우암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처형을 하라고 강력히 상소를 하였다.
재기를 모색하며 제주도에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오던 우암이 정읍에 도착했을 때 사사하라는 어명과 함께 사약을 든 사홍관(痧澒官)도 도착하여 수제자 권상하가 손을 잡아주는 가운데 우암은 사약을 마시고 객지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리하여, 보길도에 남긴 글씨가 우암의 생애 마지막 글씨가 되었다.
16. 우암이 세상을 떠나간 이후
문제는 숙종의 변덕이었다. 우암이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난 5년 뒤 1694년 숙종이 좋아 죽겠다고 인현왕후를 폐서인 시켜 내쫓고 장희빈을 왕비 자리에 앉히느라 5년전 기사환국을 일으켜 얼마나 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갔나. 그러다가 고작 5년이 지나자 이제는 장희빈에게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장희빈에게 눈이 멀어 쫓아낸 인현왕후에게 미안하고 그리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극렬 반대하는 남인들을 실각시켜버리고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켰다. 소론을 중심으로 서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자 재집권한 노론은 우암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남인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에 나서서 몰살에 가깝게 제거해버렸으니 1694년 숙종대 세 번째 환국인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이 참화이후 남인세력은 궤멸되다시피 피해를 입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더 이상 변변한 집권 한번 해보지 못하고 노론의 장기집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암 사후에도 우암을 추종하는 노론세력이 집권을 이어갔기 때문에 우암에 대한 예우와 평가는 지극히 노론의 기준일 수밖에 없었다. 우암은 중국의 성현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인물이라고 송자(宋子)로 불렸으며, 1756년에는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조선실록에 가히 기록적인 3,000번 이상 등장할 만큼 생전은 말할 것도 없고 사후에도 끊임 없이 조정의 관심인물이 되었던 바, 정치적으로 바쁜 와중에도 우암의 문장력과 정치력에 기대기 위하여 묘지문 부탁을 받으면 인심 좋게 써주어 600편 이상 전해지고 있다.
미수의 글씨는 같은 당파인 남인의 지인 집을 방문한 기념으로 간단한 당호나 혹은 공자 시대의 기본적인 유교의 격언 정도를 남겼을 뿐이며, 미수 사후에 남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크게 부흥을 하지 못한 탓에 후세대에서 미수의 글씨를 모각하거나 각자로 새긴 경우는 많지 않다.
반면에, 우암의 글씨는 노론세력의 확대를 위하여 하사하듯 많이 써 주었으며, 유교적 이념이 담긴 문구가 많아 후대에서 막강한 노론세력들이 자파의 정치표어로 오랫동안 널리 새겨놓아 우암을 글씨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 글은 아래의 참고문헌을 발췌 편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단, 역사가 이덕일의 책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참고했을 뿐 주장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1. 이성배, [우암 송시열의 서예와 비평의식]
2. 손환일, [우암 송시열의 서쳬]
3.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4.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5. 산청문화원, [산청 석각명문총람]
6. 기타, 인터넷
=출처=http://blog.daum.net/ajr3308/3864396 안종률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