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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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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몽골에서 온 술병을 보고
오대댁(병연) 추천 0 조회 104 09.09.08 15:0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최근 어느 모임에서 누가 몽골 다녀 왔다면서

가지고 온  술을 내 놓았기에 몇 자 해설을 붙여 본다.

 

 

아르히

 

 

 

사진 : 페트 병

라벨은 아이시스 생수지만 내용물은 아르히-몽골 술이다.

맛은 정종-청주 비슷한데 젖-우유 맛이 섞여있다.

 

공업제품이 아니라 민가에 부탁하여 만들었기에

제대로 된 술병이 아니라 생수 페트 병에 담겨 있다.

 

 

아이락아르히

 

몽골 사람들이 마유주(馬乳酒)를 즐겨 마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 마유주(馬乳酒)가 바로 아이락이다.

 

 

 

사진: 마유주(馬乳酒)-아이락

언뜻 막걸리 비슷하게 생겼는데 약간 신맛이 난다.

 

 

 

 

 

사진: 마유주 제조과정. 말 젖을 발효시켜 2~3 천 번 저어 만든다.

 

아이락은 몽골 사람들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료수다.

병든 환자에게는 대용식이 되고 어린이들에게도 수시로 먹인다고 한다.

 

 

아르히

 

위 아이락을 (*)우리나라 소주 내리듯이 항아리에 넣고 열을 가하여

증류시켜 응집되어 떨어지는 맑은 술을 모은 것을 아르히 라고 한다.

 

 

(*)우리나라 소주 내리는 법이 원나라 침략기-몽골에서 건너왔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다. 우리 방언에 소주를 ‘아래기’ 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소주 계통 증류주를 아락’ 이라고 하는 나라는 꽤 많다.

아락’ 이라는 말의 근원지는 아마도 중동-아랍 지방인 것 같다.

 

 

타락

 

몽골 사람들은 유제품을 좋아한다.

하긴 유목민들 먹을 것이 고기와 유제품 밖에 더 있겠는가?

 

우유를 저어 걸쭉하게 만든 요구르트-타락을 즐겨 마신다고 한다.

이걸 듣다 보니 우리나라 역사에도 타락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요구르트가 아니라 죽(粥)이었다.

 

 

 

사진: 우리나라 타락죽 (駝酪粥)

 

몽골처럼 요구르트가 아니라 쌀을 갈아 우유를 넣고 끓여낸 죽이다.

옛날 대단한 보양식으로 쳤으며 아무나 먹는 것이 아니었다.

왕실에서나 -왕실 안에서도 타락죽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명종 20년(1565) 8월

윤원형의 죄를 논하는 상서 중 타락죽을 함부로 마셨다는 조목이 나온다.

 

사복시의 타락죽은 상공(上供)하는 것인데 임금께 올릴 때와

똑같이 낙부(酪夫)가 기구(器具)를 가지고 제 집에 와서 조리하게 하여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즉 함부로 타락죽 마시는 것은 참람한 짓이었던 것이다.

 

영조  29년(1753) 7월 9일

….이제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하여 열 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 원손 궁에는 책봉 뒤에

거행하고 그 소는 내의원으로 하여금 수를 줄이게 하여

 

전통시대 소는 농사의 근원이었기에, 영조는 세손(원손)에게 올릴 타락죽도

중단시켰다. 오늘 날 요구르트 마시는 사람은 옛날 임금보다 더 호사 하는 셈이다.

 

 

 

보드카 징기스

 

이날 그 사람은 아르히 뿐만 아니라 보드카도 풀었다.

 

 

 

 

사진: 보드카 징기스

 

술병 가운데 칭기즈칸 얼굴이 있다.

 

 

사진: 칭기즈칸 얼굴

몽골 사람들은 칭기즈칸을 영웅 정도가 아니라 거의 천신(天神)으로 숭상한다.

 

그런데 칭기즈칸 모자 오른쪽 위에 웬 기호가 있다.

혹시 말로만 듣던 파스파(八思巴) 문자가 아닐까?

 

 

파스파(八思巴) 문자

 

술병에 있는 문자를 확대해 본다.

 

 

 

12세기 까지도 몽고족에게는 문자가 없었다.

칭기즈칸의 정복으로 지배영역이 엄청나게 커지자 기록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에 표음문자인 위구르 문자를 빌려다 썼다.

 

 

 

 

사진: 위구르 문자.

원조비사(元朝秘史)는 이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이 남의 문자-위구르 문자를 빌려 쓴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탕구트 족은 서하문자(西夏文字)를 만들었다.

거란족(契丹族)은 요(遼) 왕조를 세우자 거란문자를 만들었다.

여진족(女眞族)도 금(金)왕조를 세우자 역시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비록 한자를 본보기로 삼았지만 틀림없는 자신들의 문자였디.

 

 

이에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파스파에게 새로운 몽고 문자를 만들게 한다.

 

파스파(八思巴)는 성자(聖者)라는 뜻으로 티베트의 명문 출신이었다.

수십만 언(言)의 경문을 읽을 수 있었고 그 의미도 거의 다 알았다고 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이 신동을 성인으로 받들어 파스파라 불렀다.

쿠빌라이는 일찍이 이 어린 천재를 만나 바로 존경하게 되고

즉위 후 국사(國師)로 삼아 새로운 글자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파스파가 아무리 위대한 천재라지만 생판 처음 글자를 만들 수는 없었으니

티베트 문자를 기초로 삼았다. 티베트 문자는 횡서(橫書)-위에서 아래로

쓰는 데, 종서(縱書)-가로 글씨로 바꾸었고, 글자 모양을 네모지게 하였다.

 

 

 

사진: 파스파 문자

 

원 세조 지원(至元) 6년 (1269)에 이 파스파 문자가 공포되었고,

이후 국가의 공식문서는 반드시 이 문자를 정문(正文)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그런데 파스파 문자는 불편했다.

복잡하고 각이 져서 빨리 쓸 수가 없어 실용화 되질 못했다.

 

칙어(勅語)나 공식문서의 정문(正文)은 파스파 문자였지만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부문(副文)인 한문 쪽만을 읽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문자를 온갖 문서에 표기해야만 했으니

행정력의 크나큰 낭비였다.

 

 

단지 서체가 방형-각이 져서 인장이나 비석에 새기면 모양이 좋았다.

곡부(曲阜)의 공자묘(孔子廟) 석비에도 파스파 문자가 새겨진 것이 있다.

파스파 문자는 몽고족의 자존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였던 것 뿐이었다.

 

1994년 몽골인민공화국은 이 문자의 사용을 시도해 보지만

그 옛날 쿠빌라이의 권력으로도 해 내지 못한 일을 성공할 수는 없었다.

지금 몽골에서는 러시아식-키릴 문자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주문자

 

비록 파스파 문자는 실패했지만, 그걸 또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 자기 문자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모양이다.

만주족도 청나라를 세우자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데 그 토대가 파스파 문자였다.

만주어 발음을 표기할 수 있도록 글자 옆에 동그라미와 점을 더했다.

 

 

 

사진: 만주문자

 

이 만주문자의 운명도 파스파 문자와 거의 같다.

만주문자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글을 쓴 사람 밖에 없다는 형편이라

공문서에 정문으로 써 놔도 모두 부문(副文)인 한자만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나라 시대 비밀 문서는 한족들 읽지 못하게 만주문자로만

되어 있는 경우가 있고 그 숫자가 꽤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청나라 때 이면사(裏面史)-내밀한 사정을 알려면

만주어 해독이 필수인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의 만주족은 숫자가 천만 명이 넘지만 문자뿐 아니라

자기네 말도 다 잊어 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만주에서 수천 키로 떨어진 신강성 시보족이 만주어와 문자를

아직도 간직하여 그들이 해석한다고 한다. 시보족은 만주족의 지파로

18세기 중반 건륭제의 명령으로 국경을 지키러 신강성 이리 지방으로

이동하였는데 아직도 고유 문화-언어와 풍속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사진: 삼전도비.

 

청태종 송덕비-삼전도비는 우리역사에 다시 없는 치욕적 순간을 기록했지만

한편 한문, 몽고문자, 만주문자가 병기되어 있어 나름대로 귀중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한글과 파스파 문자

 

근년 미국인과 중국인이 각각 우리 한글 창제에 파스파 문자가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들이 처음 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도 한 바 있다.

 

이런 경우 우린 좀 발끈하고 나서기부터 하는 경향이 있지만

뭐 학술 발표에는 어디까지나 학문적으로 대응하면 될 일이다.

 

우리 한글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또 우수한 문자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 어디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선행(先行)하는 지식의 배경과 습득 없이 한글을 만들 수는 없었다.

 

곧 오디오 신호를 비주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

(이를 알아 낸 사람은 그 아득한 옛날 어느 원시인일 것이다)

또 표의(表意), 상형(常形) 뿐 아니라 단순히 발음만을 딴 글자가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알았기에 한글 창제가 가능했다는 것은 너무나 뻔 한 일이다.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카피 떴다는 것은 말이 전혀 안되지만

창제 과정에서 참고했을 가능성,개연성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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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9.15 07:10

    첫댓글 몽골 징기스칸의 후예 모든 음식은 발효 음식 을 주로하는 지금도 옛날 그대로 이시대에도 전통과 시대적 문화 현대와 과거 천양지 차이점을 느끼게 되는군요 양젖으로빛은 아이락 ...파스파문자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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