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유적지 답사
2015.6.16일(화요일) 오전 성균관 석전교육원 김경선 교수님의 공자탐구 강의를 마치고
오후에 김교수님의 안내로 방학동 연산군 묘소 답사 자세한 설명듣고 돌아 왔습니다.
아래 사진과 글을 참고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연산군 묘 燕山君墓(사적 제362호)
(養老王)
조선10대 왕 연산군과 왕비의 묘역
연산군(燕山君.1476-1506)은 성종(成宗.1457-1494)과 윤기무의 딸 폐비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7살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어 19세에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 쓰고 실록에 실려 있는 시가 130여 편이나 될 정도로 시를 잘 짓는 임금이었다.
즉의 초에는 성종시대에 형성된 평화로운 풍요가 그대로 이어져 왔었고 성종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지풍조를 잠재우기위하여 구체적인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민간의 동정이나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변방지역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을 회유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으며. 문신의사가독서(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 종묘제도를 정비하고 상평창을 설치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호적식년(戶籍式年)을 개정하여 백성의 불편을 해소하기도 하였고 비융사를 설치하여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는 등 국방에도 힘을 모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즉위 초기에는 오히려 성종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없에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생모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게 되고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하여 크나큰 옥사와 많은 선비를 죽였으며 계속되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했으며. 생모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여 회묘(懷墓)를 회릉(懷陵)이라 고친 뒤 성종 능에 함께 제를 지냈다.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원각사를 기생들의 집합소로.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꿔버리는 등 무수한 실정을 거듭했다.
1506년 중종반점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병사했다. 군부인 거창신씨(연산군 부인)사이에서 2남1녀. 후궁 소생으로 많은 자녀들을 두었으나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모두 귀양지에서 죽었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도 안장되었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1513년 오늘날의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되었다. 연산군 묘는 그간 비공개로 운영되어 오다가2006년 7월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묘의 조성과정
능. 원. 묘의 차이는
왕족의 무덤을 능.원. 묘로 구분을 하는데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묻힌 곳을 말하며. 묘는 그 외의 왕족의 무덤을 묘라고 한다. 연산군 및 광해군묘소의 경우 한때는 왕이었으나 폐위되어 군으로 격하되었기에 능이 아닌 묘로 불러지게 된 것이다.
연산군 묘 조성 과정
-1494~1506년 연산군 즉위기간
-1506년9월 중종반정으로 폐위
-1506년11월 강화교동 부근당에서 서거. 초기장자는 강화도 교동 부근당 주위
-1513년 군부인 신씨의 상언으로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으 로 이장
-1524년 연산군 딸. 사위(구문경) 묘소 조성
-1537년 군부인 신씨의 묘소 조성
※ 의정궁주 조씨 묘소는 1454년 조성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