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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엇으로 창조되었는지 알지 못했던 날들과,
그래서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날들의 불안은
자신이 한 마리의 금붕어라는 진실을 발견하던 날의 평화로 인해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한 마리 금붕어의 평화는
한갓 미물(微物)이 누리는 소박(素朴)과 자족(自足) 때문이 아니라
작고 막다른 어항 안에도
당신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그 막다름에 가 부딪히지만
당신께서는 그때마다 새 세상을 창조하여 주시니,
자애로우신 주님,
언제나 제가
제게 걸 맞는 한 마리 금붕어의 이름과
이 작은 어항과
그 속에서의 삶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돌보아주소서.
.
금붕어야, 천지창조를 보았니?
나는 금붕어다.
나는 3초의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등지느러미 아래에서 꼬리지느러미까지 주황색 점이 번져있고,
배지느러미 위쪽에 눈동자 크기만 한 검은 점이 있다.
나의 꼬리지느러미는 먼로의 흰 플레어스커트보다 아득하게 펄럭인다.
음.......,
그 다음엔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이 사라진다........
.
나는 금붕어다.
화장실의 한 귀퉁이에 놓인 어항에서 산다.
다른 금붕어의 존재와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본 바도 들은 바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북향의 화장실에서 평화로웠다.
음.......,
그 다음엔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이 사라진다........
.
나는 금붕어다.
3주에 한 번 정도,
여자가 물을 갈아주고, 자갈돌을 씻어준 후에 미나리를 뿌리째 넣어준다.
나는 그 미나리를 먹고 산다.
그러나 나는 3주라는 시간의 단위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나에게는 3초 이상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
그 다음엔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이 사라진다........
.
나는 금붕어다.
나는 내가 서른여섯 살의 노처녀인 줄로 알고 살았다.
어항 너머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그녀가 나인 줄로 알고 살았다.
그러나 나는 나를 알 수 없었고, 그녀를 알 수 없었다.
3초의 응시로는 아무 것도 꿰뚫을 수 없었다.
음.......,
그 다음엔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이 사라진다.........
.
나는 금붕어다.
나는 3초의 기억력, 그 박약함 속에서 행복했다.
나는 3초 만에 내 우주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주의 끝에서 우아한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선회하면
등 뒤의 우주는 사라지고 새 우주가 창조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천지창조의 순간에 그녀가 나를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뭍으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만이 진화하는 거야.......
무슨 뜻일까?
알 수 없다.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이 사라진다.
고통도, 기억도, 나 자신도 사라진다.........
.
.
25톤 트럭의 몰골은 사랑을 매혹의 영역에서 떠나보낸 자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25톤의 무게로 환산된 사랑---트럭은 피로해 보였고 남루했으나 거대했다. 그 거대함이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서는 을씨년스러움과 아늑함의 묘한 불협화음이 피어올랐다. 트럭은 비포장도로 위로 연신 물을 떨구고 있었다. 누군가 트럭 위에 앉아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빗겨갈 만한 길이었다. 트럭의 바퀴가 토해내는 흙먼지를 묵묵히 뒤집어쓴 채로 그것의 뒤를 따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어디까지 저 거대함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일까? 어디까지 저 거대함을 따라갈 수 있을까? 나는 거대함으로 가로막힌 전방을 조망할 수 없었다.
매혹의 영역에서 떠난 사랑은 흔히 종적을 감추어버리거나, 드물게는 인내의 영역으로 옮아가 그 열매를 꿈꿨다. 그리고 보다 드물게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무엇인가로 화(化)했다. 마지막 경우가 최선이면서 최악이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것을 창조하려는 자를 사람들은 몽상가라고 불렀다. 몽상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매우 고단한 실험이면서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다. 길은 더욱 좁아졌고 굴곡이 심해졌다. 이 협소하고 유일한 길로 들어선 트럭과 나에게 두 개의 목적지란 조리(條理)에 합하지 않았다. 하나의 길은 하나의 목적지에 가 닿을 것이다. 트럭은 수도원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럭은 예상대로 종국에까지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협소함의 오른편으로 수도원의 녹슨 철문이 나타나자 트럭은 길을 버리고 그의 목적에 가 닿았다. 나는 트럭이 버린 길을 줍고 싶었다. 그 협소함, 그 유일함의 끝을 따라가, 거기에서 기다리는 막다름을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 달 전, 수도원이라는 유형(有形)의 막다름을 예약해두었으므로 나는 노지(露地)의 막다름을 단념해야만 했다.
다소 아쉬웠으되, 크게 아쉽지 않았다. 수도원은 한 층마다 세 개의 규격화된 막다름을 구비하고, 그것을 세 명의 여자에게 공평무사하게 제공했다. 세 개의 규격화된 막다름 중 하나에 자족하리만치 나는 굶주렸고 가난했다.
그 막다름은 과거와 미래를 통해 수많은 인간들이 사용했고, 사용할 일회성의 막다름이었다. 인스턴트식품처럼,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형태로, 무한히 제공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계량화되지 않고 표준화되지 않는 노지의 막다름과 질적으로 비교되지 않았다. 노지의 끝에는 날 선 수풀과 거친 돌맹이들이 흉흉한 막다름이, 신이 창조한 생명체 중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자랑하는 절지동물들이 활개를 치는 야만(野蠻)의 막다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야만의 막다름을 택하는 대신 개인 샤워실과 협탁을 제공해주는 안락한 막다름을 택한 것은 아주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을 웃지 않았다. 누군가는 웃었을 것이다. 야만의 막다름과 제조된 막다름을 함께 내려다보는 존재, 그가 웃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울었을지도 모른다.
수도원의 입구로 들어서서 비탈길을 200 미터쯤 오르자 한 달 전과는 다른 변화가 목격되었다. 소나무 숲의 끝자락이 뭉그러지고 대지의 드러난 붉은 속살이 보였다. 25톤의 거대함은 그곳에서 멈춰 섰다. 소나무 숲을 도려낸 자리에 건물의 기초가 닦이고 있었다. 네모지고 거대한 공허가 네모지고 거대한 유(有)를 도모하고 있었다. 이 산골짜기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유(有)의 용도가 궁금했다.
트럭의 기사가 문을 열고 내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나의 호기심을 그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사무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호기심은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사무실 앞에서 나는 호기심을 내려놓았다. 열쇠의 용도를 물을 수 있었고, 성사시간을 물을 수 있었지만 호기심을 물을 수는 없었다. 호기심 자체와 호기심을 묻는 목소리---그 침묵의 파괴는 금기로 간주되었다.
-또 오셨네요.
단단하면서 맑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포켓볼의 공처럼 사무실의 벽면들을 튕기고 정확히 내 귀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담당수사는 자리에 없었다.
또 오셨네요. 그 말 속에서 단골을 반기는 식당 주인의 환대(歡待)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지인(知人)이 지인에게 바치는 환대는 더더욱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검은 수도복을 입은 일면식(一面識)의 타인에게서 지인을 기대할 만큼 맹랑하거나 혹은 순진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기대한 것은 한 꾸러미의 열쇠였을 뿐이다. 환대도, 적대도 기대하지 않았던 타인인 내게 그가 내민 적대는 불쾌하기보다는 괴이하게 생각되었다.
-일 년에 두 번으로 이용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거, 모르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이번이 몇 번째죠?
-세 번쨉니다.
-그럼, 원장 수사님과 면담을 하시는 게 원칙입니다.
가능한 한 여러분들께 기회를 드리기 위해 일 년에 두 번으로 이용 횟수가 제한되어 있습니다만......., 한 달 전, 나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담당수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특별한 사정이 있으시면 제가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조직을 사랑하는 것은 비교적 가벼운 무거움이었다. 조직과 결별하는 것은 다소 무거운 무거움이었다.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온 육체와 영혼으로 감당해내야 하는 그런 무거움이었다. 그러나 한 인간과 결별하는 것, 그 무게를 측량할 수 있는 저울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네 개의 무거움 중에 두 개의 무거움만을 수사에게 고백했다. 그러나 수사는 내 입의 고백 이전에 내 얼굴이 말하는 고백을 먼저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내 얼굴 위에 기미처럼 번진 깊은 피로와 어리석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나의 사정을 특별한 것으로 간주했고, 나의 이름을 명부에 올렸다.
-면담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담당 수사님께 양해를 구했고, 양해가 되었습니다. 담당수사님과 말씀을 나누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사무실의 창으로 한 가닥 미미한 오렌지 빛 석양이 스며들었다. 그 빛이 수사의 안경에 가 닿았다. 수사는 안경이 반사하는 빛의 뒤편으로 눈길을 거두어들였다.
-보일러 사용법은 알고 계시죠?
-예.
수사가 숙소의 열쇠꾸러미를 건네주었다. 기대했던 유일한 것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열쇠 손잡이에 굵은 검은색 숫자 <2>가 찍혀 있었다. 가운데 방이 따뜻합니다, 한 달 전, 숫자 <1>이 적힌 열쇠 꾸러미를 반납할 때, 각이 진 얼굴의 담당수사는 숫자 <2>를 기약해 주었다. 그 숫자 <2>의 약속이 손 안에 들어오자 나는 노리던 먹이를 낚아챈 짐승처럼 성급한 포만감을 느꼈다.
곧 저녁 기도가 바쳐질 것이다. 나는 사무실을 나와 성당 쪽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성당으로 이어지는 거친 자연석의 계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를 성당으로 이끈 것은 오로지 석양과 돌계단이 만들어내는 따스함의 외연(外延)이었다. 그러나 그 따스함의 외연 안에는 따스함이 내포(內包)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진실이 담기지 않은 고백처럼 나를 아프게 했다. 잠시 후 검은 수도복 차림의 수사들이 열을 지어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저희 수도원에 사람의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을 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맑고 단단한 목소리 하나가 마룻바닥 위에서 포켓볼의 공처럼 회전운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마룻바닥 위에 놓인 모든 물체와 군상들을 차례로 튕긴 후에도 에너지를 잃지 않고 공간 속으로 날아올랐다. 오랫동안 머금어 온 모종의 의미 내지 경고가 담겨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사람의 일과 신(神)의 일이 궁금했고, 사람의 일과 신의 일을 동시에 벌일 수 있는 이 작은 집단의 능력이 놀랍게 생각되었다. 작지만 강력한 조직이 바치는 그레고리안의 성가가 성당과 그 안에 앉아 있는 이들 안으로 흘러들어와 고였다.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늘어지기 시작했다. 무리가 마룻바닥으로 조아렸던 얼굴을 들어올리기 전에 나는 성당을 빠져나왔다.
숙소의 울타리 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환대일까, 적대일까? 한 달 전에 저 동물에게 각인시켰던 나의 체취를 저 동물이 기억하고 있다면, 저 맹렬한 짖음은 맹렬한 환대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적대이기를 바랐다. 그 동물이 나를 잊었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 또한 내게 각인되었던 것들을 잊고, 낯설음이 되어버린 각인들을 향해 맹렬하게, 적대적으로 짖고 싶었다.
권태를 말하는 이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날은 날마다 미미한 변화들로 채워졌다. 그 미미한 것들을 감각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밤은 권태로웠다. 밤은 언제나 한 가지 모습---견딜 수 없는 피로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나는 잠이 들었다. 저녁식사를 잊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깊은 잠이었다. 잠이 이틀의 시간을 강탈해갔지만 나는 노엽지 않았다.
아침기도와 미사에 참례하기로 한 주인의 의지를 거슬러 내 걸음은 골짜기의 끝으로 향했다. 한 달 전에는 봉쇄되어 있던 길이 열려 있었다. 산허리를 파고 들어가 길을 넓혀놓은 흔적들이 보였다. 뿌리를 드러낸 수치를 견디지 못한 나무들의 죽음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산비탈에서 흘러내려온 묵은 낙엽들이 나무들의 수치와 급조된 길의 생경함을 덮고 있었다. 산은 자기 안에서 벌어진 만행의 상처를 빠르게 치유할 줄 알았다. 우아하면서도 단호한 몸짓이었다.
산길은 쉬운 여자만큼이나 수월했다. 나는 오른편의 산비탈을 꼼꼼히 훑어, 거기에서 처녀의 질(嫉)처럼 좁은 길을 발견했다. 처녀림을 헤쳐 하나의 길을 만든 이들이 남겨둔 표지---노란 리본들이 올이 풀린 채로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탄탄대로를 버리고 사라질 듯 이어지는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수없이 많은 사랑을 끌어안으면서도 처녀성을 잃지 않는 산의 신비는 어디로부터 근원하는 것일까? 등에서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왼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자작나무의 흰 골짜기가 펼쳐졌다. 골짜기가 여며지는 곳에 무덤 하나가 보였다. 석등이 봉분을 호위하고 있었다. 석등을 지고 올라간 이의 노고가 혹독했을 높이였다. 그 높이가 나를 유혹했다. 능선은 산의 정상을 향하다가 다시 아래편으로 뻗어 내렸다. 무덤에 이르는 길은 눈으로는 헤아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무덤까지의 거리도,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어림할 수 없었다. 높이를 향한 욕망이 헤아려질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도, 체력도 그리 여분이 많지는 않았다. 여명이 자작나무 골짜기에 소리 없이 차오르고 있었다. 골짜기를 호위하듯 둘러싼 나무들의 하얀 몸체가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자작나무의 정령들이 나무보다 먼저 일어나 각자의 나무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분의 시간을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 기꺼이 소비했다. 그리고 올라왔던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낯선 무덤이 앞을 가로막았다. 능선을 놓쳤다는 생각과 함께 지리산에서 조난당했던 오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오른편 안구가 까마귀에게 파 먹힌 채로 발견되었다. 가장 작은 산도 위대한 인간보다 컸다.
초행의 능선을 놓쳤다는 사실 때문에 자존심은 다소 손상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을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문제적 자아를 통제할 수는 있었다. 나는 눈앞의 노란 친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노란 친절은 애초의 능선보다 빨리 평지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산이 모든 굽이를 풀어헤치고 더 이상 숨기고 있는 거리가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나는 통제력을 잃었다.
나는 산을 향해 돌아섰다. 통제되지 않는 그 집착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불안보다 커다란 열망 하나가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서있는 곳에 대해 알고 싶었다. 산이란 단순하면서도 깊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개별적 산과는 무관한 앎이었다. 나는 내가 서있는 이 산의 단순함과 깊이를 내 눈과 발의 앎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겸손은 사라졌다.
노란 리본은 무덤에서 능선의 끝까지 나를 친절하게 안내했다. 능선의 끝에서 소풍날의 보물찾기 같은 수색이 시작되었다. 능선의 끝, 그 협소함으로부터 세 갈래의 좁은 길이 발견되었다. 숨이 찼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지자락에 바싹 건조된 홀씨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나는 그 홀씨들을 떼어내면서 자작나무 숲을 더듬었다. 자작나무의 정령들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협소함으로부터 뻗어나간 세 갈래의 능선은 각각 <우연>과 <미련>과 <오류>로 명명되었다. 처음 올랐던 그 능선은 우연이었다. 석등을 세운 무덤을 향해 뻗은 또 다른 능선--자작나무 골짜기를 버리고, 어디까지, 어떤 골짜기들을 거느리고 뻗어있는지 헤아릴 수 없는 그 능선은 미련이었다. 남은 하나의 능선, 나를 낯선 마을로 이끌었던 그 능선은 오류였다. 그러나 하나의 능선을 우연으로 명명한 자가 다른 하나의 능선을 오류로 명명한 것은 과연 타당한가. 첫 능선을 필연으로 규정한 후에야 다른 하나가 비로소 오류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하나의 능선을 오류로 규정하고 다시 그것을 되짚어 올라왔을까. 오류란 개척되지 않은 우연이었고 우연을 필연으로 신봉하는 자들이 덮어씌운 오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어리석게도 우연을 필연으로 신봉하고 있었다. 우연이 필연으로 둔갑했고 그것은 다시 미련으로 둔갑을 거듭했다. 산의 깊이가 나를 홀린 것 같았다. 우연의 능선을 타고 수도원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신께 감사드렸다.
여명에 몰린 어둠이 여전히 깊은 처마를 이고 있는 현관문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둠을 회유하기 위해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작은 손전등의 역할을 그것에게 기대했으나 단말기의 전원은 꺼져 있었다. 언제나 나의 손바닥 안에서 노닐던 그것의 전원 버튼을 어림하는 것에조차 나는 실패했다. 언제나 나의 품에서 노닐던 그도 전원이 꺼진 휴대폰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의 전원 버튼을 애써 어림하고 싶지 않았다.
현관에 숨어있던 어둠이 복도까지 따라 들어왔다. 복도의 어둠 속에서 열쇠꾸러미를 더듬거리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내가 도주자의 불안과 조급을 2호실의 열쇠 구멍 안으로 밀어 넣기 전에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복도로 올라서더니 벽면의 스위치들을 모조리 올렸다. 하얀 모피를 걸친 여자는 조명이 밝혀진 무대 위로 등장하는 별주부전의 총명한 토끼 같았다. 혹은 토끼와 거북의 경주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토끼 같기도 했다. 나는 인간을 알아보는 데 미숙했다. 토끼가 침묵의 규정을 깨고 내게 말을 걸었다.
-새벽기도 전에 어디 나갔다 왔어요?
토끼는 나무 아래서 잠을 자는 대신 거북의 기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에게는 대문의 열쇠가 허락되었고, 그것은 곧 외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나의 외출을 입에 올리자, 나는 월장(越牆)이 들통 난 규방의 규수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예. 짧은 산행을 했어요.
침묵을 깨는 소란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은 곧바로 공범자에서 취조형사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현장부재증명에 실패한 용의자처럼 여자의 취조에 무력하게 응하고 있었다.
-가까이 등산로가 있나요?
산이 수없이 많은 골짜기와 능선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토끼, 별주부전의 토끼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그 토끼는 매우 어리석든가 아니면 산토끼가 아닌 집토끼일 것이다.
-예.
-내일도 갈 거예요?
토끼는 정상까지의 경주를 제의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거절이다. 원칙은 그랬다. 문제는 늘 방법론이었다. 나는 거절의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나의 무능이 수치스러웠다. 그가 한낮에 찾아와 산행을 제안하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치기(稚氣)를 웃었다. 나는 치기의 방법론이 탐탁지 않았으되 그의 제안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권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거절의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의 나는 나의 무능이 사랑스러웠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요?
‘실례지만’, 그렇게 말하는 인간들이 나는 두렵다. 그들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사랑을 말하고 실례인 줄 알면서 이별을 말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러나 토끼가 범한 실례는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토기가 정상까지의 경주를 제안하는 대신 나이를 물어주어서 나는 도리어 감사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실례에 관대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산꼭대기까지의 달리기보다 길고 지루하고 힘겨운 달리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서른여섯이예요.
-젊은 아가씨가 혈색이 안 좋네. 어디 아파요?
하얀 형광등 아래 노랗게 드러난 나의 얼굴과 손을 여자가 유심히 살폈다.
-빈혈이 심해요.
-그렇구나. 나는 신부전증인데. 의료사고 당한 뒤에 몸이 아주 망가졌어요.
토끼가 당했던 의료사고---개울가 볕 좋은 바위 위에 간(肝)을 꺼내 말렸던 그 전력(前歷) 이후에 또다른 의료사고가 있었던가? 그러나 나는 그 사고에 대해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토끼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 원하지 않는 경주를 멈추고 싶었다. 자신의 무능을 척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하는 거북이의 등딱지 아래로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땀을 흘리는 최초의 파충류가 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곧바로 나에게서 거북의 역할을 빼앗고 내과의사의 역할을 요구해왔다. 여자는 만성 신부전증과 고혈압의 고통을 호소했다.
-내 얼굴이 예전엔 이렇질 않았어요. 의료사고 후에 10kg이 불었는데, 그게 다 부기예요. 내가 외국에서 살다 왔거든요. 한국에 들어오니까, 우리 엄마가 내 얼굴을 보고서는 막 울었어요.
-약은 드시고 계세요?
-아뇨. 간이 안 좋아서, 약도 못 먹어요.
한 번 적출했던 토끼의 간(肝)이 급기야는 문제를 일으킨 것인가?
-잘 쉬시고 얼른 몸 추스르세요.
얼른 몸 추스르세요, 그 미흡한 축복으로 여자의 집요함을 걷어낼 수 있을지 난 자신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의 집요함이 나의 어설픔을 치고 들어왔다. 그녀가 이번에는 외과의사의 역할을 요구해왔다.
-내 손가락 좀 봐요. 내가 사는 아파트에 부탄 마시는 중독자가 있는데, 내가 냄새 난다고 하니까 우리 집에 달려와서는 현관문을 짚은 손을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손가락 네 개가 다 잘리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한 개만. 한국 경찰들은 진짜 웃겨요. 신고를 했는데, 그 인간을 잡아가지는 않고, 글쎄, 날 더러 이사를 가라지 뭐예요.
한국 경찰에 대한 시민의 소견을 말해야 하나, 외과의사의 소견을 말해야 하나? 그러나 여자는 내가 외과 의사의 소견을 말하기도 전에 다시 정신과의사의 역할을 요구해왔다.
-여기 원장 수사님, 내가 면담 신청했거든요. 그런데 날 더러 정신적으로 불안해 보인다고 하면서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인자하신 분 같던데요.
-좋은 분이겠죠. 그런데 나하고는 맞지 않는 것 같애요.
모든 인간에게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면, 사제란 얼마나 몹쓸 직업인가. 수도원의 원장은 사제인 자신보다는 정신과의사가 여자에게 필요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여자의 면담을 거절한 원장 수사의 결정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다. 여자가 면담해야 할 상대는 정신과의사였다. 목사의 헌신, 신부의 자애, 의사의 식견, 그 모든 것을 합친 존재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금상첨화의 존재가 되어줄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가 되어주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절박이 나를 사로잡았다.
-자매님, 죄송하지만 화장실에 가야겠어요.
나는 거짓 아닌 참된 요의(尿意)를 느꼈다. 대화를 마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것을 대화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두 번째 어리석음이었다. 여자의 말은 대화가 아니라 질병(疾病)이었다. 여자의 언어들은 사단이 난 그녀의 간(肝)이 피워 올린 부스럼과도 같았다.
여자는 대답 대신 하나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윤허(允許)의 몸짓이었다. 그녀는 복도 한 편으로 비켜서서 복도 끝의 공용 화장실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나는 내 방안에 나만을 위한 화장실을 두고도 그녀가 조종하는 인형처럼 그녀가 열어주는 복도 끝의 화장실을 향해 움직였다. 나는 변기 위에 앉아 있는 동안 부실한 두 여자의 배터리 중 하나가 방전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배터리는 나의 소망과는 달리 복도 끝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그녀 앞에 도달한 순간까지도 방전되지 않았다. 그녀 앞을 지나치면서 박약한 내 육신 중에 특히나 박약한 입이 먼저 사고를 쳤다.
-아침 맛있게 드세요.
아침 맛있게 드세요, 나는 그 여덟 음절의 말이 아니라 8kg의 일산화탄소를 분사했어야 했다. 나는 소방관이 되어 이 번지는 불길을 진압했어야 했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에 공급된 8kg의 산소나 다름없었다. 불은 순식간에 맹렬히 타올랐다.
-식사 같이 안 할래요?
아, 나는 이제 직무태만의 소방관에서 무엇으로 변신해야만 하나?
-시간이 일러서 생각이 없어요. 먼저 드세요.
-식사도 안 하고 일하려고 그래요? 아픈 사람이 그렇게 일하면 안 돼요. 컴퓨터 오래 하 는 건 건강에 정말 안 좋아요.
여자는 나의 방을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고백했다. 그 순간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그러나 배터리가 방전되는 순간 내 안의 비상용 배터리가 가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방전된 배터리보다 강력했다. 나는 모진 결단을 내렸다. 의사나 신(神)이 되어줄 필요도, 되어 줄 수도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타인(他人)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는 등을 돌리고 열쇠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여자는 나의 손을, 그 손 안에서 시도되는 하나의 도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나는 볼 수 없었으나, 그것은 분명 다 잡아놓은 먹이를 놓친 짐승의 그것처럼 공허했을 것이다. 현관의 열쇠를 방에 적용시킨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두 번째 시도에 문이 열렸다. 나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자에게 더 이상의 말도, 일산화탄소 분말도 남기지 않았다.
머리는 개었지만 몸은 쉽사리 개이지 않았다. 양쪽 팔꿈치 아래가 저려왔다. 혈액이 구석구석 가 닿지 못하는 것을 핑계로 몸은 한껏 게으름을 부렸다. 게으름은 꼬박 네 시간을 몸속에서 뒤챘다.
낮 기도를 끝낸 여자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 초대를 거절하고 점심도 망각한 위장을 돌봐주어야만 했다. 방문을 열자 복도에 서있는 침묵이 보였다. 침묵은 나를 맞이해 복도의 끝까지 다정스레 동행해주었다. 그러나 복도의 끝에서 주방으로 돌아서는 순간 돌연 그가 사라졌다. 식탁의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의 넓적한 등과 푸석한 머리칼이 내 턱밑으로 밀고 들어왔다. 덫에 걸려든 짐승처럼, 나는 여자의 용의주도한 기다림 속으로 발을 헛디뎠던 것이다. 다정했던 침묵조차도 그녀의 공범이었다니....... 나는 죽을 데웠다. 여자를 향한 것인지 침묵을 향한 것이지 알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냄비 안의 죽처럼 범벅이 되었다.
-난 짐 줄이려고 음식 안 싸가지고 왔어요.
나는 닷새째 식빵으로 연명하는 여자에게 나의 분노와 증오를 권했다.
-부족하지 않아요?
아니, 천만에. 분노와 증오는 차고 넘쳐. 당신에게 덜어주어도 그것은 줄어들지 않을 거야........ 이곳이 수도원의 피정지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와 여자는 어둠과 수압의 짙푸른 무게가 내리누르는 바다 밑에 있었다. 그곳에서 토끼와 거북이 집요한 겨루기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분노와 증오를 반(半)으로 나누어 토끼에게 건넸다. 나의 일용할 분노와 증오가 그녀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덜어준 후에도 줄어들지 않은 분노와 증오를 내 위장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커피 한 잔 할래요?
분노와 증오를 포식한 토끼가 속이 안 좋은지 커피를 제안했다.
-아뇨. 커피 마시면 안돼요.
-아, 위장도 안 좋구나.
-예. 그릇 주세요. 설거지 하게.
-아녜요. 식사 얻어먹었는데, 설거지는 내가 해야지.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그러나 토끼가 빨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거북을 제지했다.
-저, 미안한데, 식탁 좀 훔쳐 줄래요? 행주는 건조대에 있어요.
이야기는 이제 두 개의 고전(古典) 중에서 별주부전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거절의 방법론을 찾지 못한 거북은 행주를 집어 들었다. 토끼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거북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었다. 거북이 식탁을 훔쳐낸 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토끼에게 물었다.
-더 도울 일 없나요?
그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낸 것은 그러나 어리석음도 동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성대(聲帶)와 구강(口腔)이 저희들 멋대로 만들어낸 수작이었다. 성대와 구강이 자율신경의 관할 하에 속하게 된 것, 그것은 유사 이래 보고된 바 없는 질병이었다. 질병이 불러온 결과는 심각했다.
-나가기 전까지 말동무나 해주면 돼요.
-저, 면담시간 다 됐는데, 30분 후에요.
-아직 여유 있네.
-짐 정리를 못 해서요.
여자는 자신의 집요함이 좌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주방을 나서자 여자가 따라 나왔다.
-들어가 봐요.
여자는 ‘잘가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마지막까지 보류해둘 모양이었다. 여자는 내가 청소와 짐정리를 마칠 때까지 복도에 서있기로 작심한 것 같았다. 촘촘한 그물을 드리운 절박한 어부처럼 여자는 서있었다. 나는 짐을 내고 방문을 닫았지만 그것을 잠그지는 않았다. 그것이 여자에게 유혹이 될 수 있을까? 한 장의 손수건에서 그것의 거처였던 남자의 바지 주머니와 그것의 온기를 감지해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여자는 빈 방안에서도 그 안에 존재했던 타인의 삶을 복원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기 라 로쉬>의 손수건에서, 그리고 삼청동의 칼국수 집에서 복원해내는 것은 타인(他人)이 아닌 지인(知人)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박물관의 유물 같은 현재였다. 내 눈 앞의 현재이면서도 천 년을 헤아리는 과거였다.
천 년의 나이를 먹은 현재를 더듬는 것, 그것은 누군가 그것에 대해 관람료를 요구할는지는 몰라도 진료비를 요구해오지는 않을, 그런 것이었다. 지인의 흔적과 타인의 흔적을 더듬는 것의 차이란 그런 것이었다. 박물관의 관람료를 지불하는 것과 병원의 진료비를 지불하는 것의 차이, 관람객과 환자의 차이, 여자와 나의 다름은 그런 것이었다. 그 다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인과 타인의 경계와 구분은 늘 모호했고 또한 고정불변하지도 않았다. 나는 타인으로서의 나를 더듬는 여자를 정신질환자로 규정한 자신이, 여자 앞에서 마치 숫처녀인 양 몸서리를 치는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주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을 웃지 않았다. 누군가가 웃었을 것이다. 지인과 타인의 모호한 경계를 내려다보는 존재, 그가 웃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울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관에서 작별했다.
사제는 책상 앞에 놓인 나무의자를 내게 권했다. 의자 위에는 황금색 방석이 놓여 있었다. 죄를 고백하려는 인간을 위해 황금방석을 준비한 사제의 유머감각에 나는 감탄했다. 그러나 그 빛나는 방석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 빛나는 방석에 합당한 인간이 되고 싶어졌다. 이것이 성사(聖事)가 아닌 상담임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었다.
-성사를 보려는 게 아니고 상담을 드리려고 합니다.
-네. 상담을 하시면서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나의 성급한 결의에 대한 그의 조언은 부드러웠다. 사제는 물이나 차 대신 침묵으로 내방자를 접대했다. 그러나 노련한 그는 곧 침묵의 접대 대신 질문의 접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몸과 마음이 좀 평화로워지셨나요?
-평화라는 단어를 한 번도 이해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 앞에서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던 분노와 증오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게워낼 수는 없었다. 사제는 토사물을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평온을 잃지 않았다.
-좀 더 오래 쉬고 싶으신가요?
-신부님은 경제활동을 안 하셔도 생활이 보장되지만 전 그렇질 못합니다.
울렁임이 목젖 바로 아래까지 치밀어 올랐다.
-예. 저희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저희를 먹여 살려주시는 하느님과 후원인들께 늘 감사하 며 살지요.
사제는 보은의 대상 안에 하느님과 후원인 외에 나를 포함시킨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때 성대와 구강이 세 번째 발작을 일으켰다.
-감사라는 단어를 잊은 지 오랩니다. 제 마음 속의 분노와 증오가 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직도 사랑과 증오 따위의 단어가 입안에 맴돌고 있다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사제도 지금쯤 나의 질병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 정신과의사를 권했듯이 나에게 신경 전문의를 권하지는 않았다.
-감정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잘 돌보시길 바랍니다.
그가 어불성설인 사랑, 혹은 증오를 단죄하지 않았기에 성사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상담실을 나와 솔밭 언저리의 화장실로 달려갔다. 방광 속에 터질듯이 들어찼던 것이 배설되었다. 그것이 증오인지 슬픔인지는 분간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남은 휴가기간을 어떻게 소일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다. 우선 세 번의 발작을 일으킨 성대와 구강의 상태를 점검해야 할 것 같았다. 뇌로부터 전달되는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모반을 일으킨 그것들을 통제하기 위해 내가 찾아야 할 곳은 신경정신과는 아니라는 결론이 섰다. 나는 내 안의 증오와 손잡고 스텝을 밟을 수 있는 사교댄스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새로 개장한 스포츠센터에서 연신 보내오는 문자에 의하면 헬스를 덤으로 할 수도 있었다.
맵고 아린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재채기가 났다. 움켜쥐었던 코에서 손을 떼었을 때, 얼어붙은 대기를 관통하는 소란이 다급하게 돌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소란은 무대 위로 뛰어오른 관객 같았고, 관객이 내뱉은 대본에 없는 대사 같았다. 이 적막한 겨울 수도원에 어울리지 않는 소란은 너무나 엄연했다.
소란의 진원지는 지도 위에 붉게 표시된 하나의 지점처럼 명료히 드러났다. 수도자들의 숙소와 피정자들의 숙소로부터 검은 군상들이 불규칙한 점선을 이루며 신축건물의 현장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검은 점이 상담실 앞에서 멈췄다. 상담실에서 사제가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콘크리트 속에 사람이 빠졌어요.
다급하지만 맑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사제는 성호를 그었다. 그는 상담실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이 막다름까지 119가 먼저 도착할 것인지, 신(神)이 먼저 도착할 것인지,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사제가 다시 상담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신축건물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불구경을 하듯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불구경을 구경거리의 으뜸으로 치는 이유,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불길 앞에서 철저히 제3자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며, 관망하는 자의 그 무기력한 자유를 아무런 가책 없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무기력은 불길의 영롱한 혓바닥이 모든 것을 살라버리며 들려주는 음악을 오로지 미적(美的)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그 붉고 뜨거운 현실을 자신과 무관한 비현실로 느끼며 빠져드는 몽롱함, 세계와 시간으로부터 분리되는 그 고독감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나는 보다 근접한 구경꾼이 되어 보다 많이, 보다 자세히 구경하고 싶었다. 나는 하나의 점이 되어 점선 속으로 합류했다. 점들이 깊게 파인 건물의 기초 주위로 모여들어 한 변이 허술한 사각형을 이루었다. 선을 이루고 있던 몇몇의 점이 무릎을 꺾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점들을 훑었다. 필리핀 수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여자의 푸석한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사고 혹은 범죄도, 증인 혹은 범인도 나는 볼 수 없었다. 잿빛의 용암 같은 콘크리트만이 발아래서 무겁게 출렁이고 있었다.
나는 콘크리트 늪 속의 인간이 움켜 쥔 막다름을 가늠해보려던 시도를 단념했다. 나는 잿빛의 농밀한 콘크리트가 온몸을 조이고, 콧구멍과 목구멍으로까지 밀려드는 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인간이 움켜쥐려던 막다름이 도리어 인간을 움켜쥐고 점령하는 순간을 나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막다름과 그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훔쳐보는 것은 관음증의 부도덕을 넘어서는 불경이었다. 여자의 구원은 그녀의 막다름 속에, 혹은 저 콘크리트 늪 속에 그녀만의 것으로 존귀할 것이다. 무릎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들의 대열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자신의 막다름에 다다라 거기에서 천지창조를 목도한 이들의 영광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나는 주차장을 향해 헤엄쳤다. 그리고 전방주시의 의무에 충실하여 골짜기를 내리달렸다. 골짜기 모양의 어항 속에서 이루어지는 천지의 창조가 백미러 안에 담겨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기억도, 고통도, 그 어떤 것도 저장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망각되었으므로 고통은 언제나 처음처럼, 트리플 A급으로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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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돌아왔다. 나는 단 한 순간도 그를 잊어본 일이 없었다. 다만 단 한 순간도 그를 잊어본 일이 없는 나를 망각했을 뿐이다. 여자가 미나리 한 뿌리를 심어주기 위해 어항 위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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