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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천지와 천지함평
불교는 난해하다. 입문은 문이 8만4천 개라 아주 쉽지만, 사자좌에 오르기는 지극히 어렵다. 평등도 8만4천 문호 중에 하나이다. 평등은 궁극의 경계 곧 구경이지만, 귀익지도 않고 낯설기만 하다. 평등의 대어는 차별이다.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둘이 없는 경계 곧 불이가 평등이니, 불이법문이 바로 평등법문이다.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함평천지의 평등
2. 불이법문의 평등
3. 불이법문에 대한 제가의 해석
4. 중도와 평등
5. 사십이장경의 무심도인과 평등
6. 찰나제삼매와 평등
7. 결어
1. 함평천지의 평등
함평천지는 귀익지만 천지함평天地咸平은 낯설다. 그 뜻은 크게 보면 동일하지만, 엄격하게 분별하면 다른 면이 없지 않다. 하늘과 땅이 다 평등하다. 천자문에 천지현황이 있고, 신심명에 호리유차이면 천지현격이란 말도 있으며, 천고지저 천존지비 또는 천양지차 천연지차 운니지차 소양지차 소양지간 등등의 말도 있다. 이 모든 말들은 천지의 차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천지에 대한 절대불변의 공의이다. 그런데 호남가는 어째서 초두에 함평천지라 말했을까? 천지함평은 역천이 아닌가?
함평천지咸平天地 늘근몸이 광주고향光州故鄕을 보려하고
제주어선濟州漁船을 빌어타고 해남海南으로 도라들제際
흥양興陽에 도든해넌 보성寶城에 비쳐잇고
고산高山의 아츰안개 영암靈岩에 둘러잇다
해설한다. 함평천지를 직해하면 “다 모두 또는 일체가 하늘과 땅을 평등하게 한다.”라고 할 것이고, 천지함평은 “하늘과 땅이 모두 평등하다.”라고 할 것이다. 전자를 취하면 늙은 몸은 일체 중에 하나이다. 제불보살도 일체에 포함된다. 도학자는 첫째가 발원이다. 그 원이 크면 클수록 좋다. 하늘은 완벽한 이상향이고, 땅은 불평등이 만연한 이 언덕이다. 누가 차안을 피안처럼 완전무결하게 만들 수 있을까? 늙은 몸의 대원이 그러하다.
천리 길을 가고자 함에 첫걸음을 올바르게 옮겨야 한다. 요즈음 광주를 빛고을이라 말한다. 빛 또는 광명은 불교의 구경이다. 법신불과 법성토는 모두 광명뿐이다. 원각경의 초두 서문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한때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삼매정정에 드시니, 일체 여래께서 광명으로 장엄하여 주지하시고, 모든 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신심과 적멸이 평등한 본제이다. 시방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불이를 수순하시며,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시니라.”(如是我聞 一時婆伽婆 入於神通 大光明藏 三昧正受 一切如來 光嚴住持 是諸衆生 清淨覺地 身心寂滅 平等本際 圓滿十方 不二隨順 於不二境 現諸淨土)
바가바는 법신불이다. 법신불의 일체삼매 중에 근본삼매가 바로 신통대광명장삼매정정이니 곧 광명삼매이다. 함허스님과 감산스님은 들어가는 대상을 신통대광명장으로 한정하고 삼매정수를 따로 해석했다. 그런데 나는 붙여서 해석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첫째 신통대광명장은 삼매의 이름이고 정수가 바로 삼매이기 때문이며, 둘째 들어가는 당체도 삼매이기 때문이다. 곧 신통대광명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신통대광명장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수는 어떻게 해석하야 옳은가? 이도 또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법신불은 체용이 모두 광명이다. 그러므로 광명삼매는 체용을 겸유한 삼매 중에 삼매이기 때문에 삼매정수라 한 것이다. 둘은 사언으로 맞추기 위하여 중복한 것이다.
원각경은 능엄경처럼 철저하지는 않다. 가령 능엄경은 선남자를 시선남자是善男子 피선남자彼善男子 제선남자諸善男子 등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원각경은 여선남자汝善男子가 한번 나올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선남자 세 글자를 고수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언으로 맞추기 위하여 생략한 곳이 적지 않다. 가령 “無邊虛空 覺所顯發 覺圓明故 顯心清淨 (顯)心清淨故 見塵清淨 見(塵)清淨故 眼根清淨 (眼)根清淨故 眼識清淨 (眼)識清淨故 聞塵清淨 聞(塵)清淨故 耳根清淨 (耳)根清淨故 耳識清淨 (耳)識清淨故 覺塵清淨”라는 문장 중에 괄호 안의 글자는 모두 생략된 것이다. 근청정고는 글자는 같지만 안근과 이근으로 나뉘고, 식청정고도 또한 안식 이식으로 달리 보아야 한다. 이것이 정수를 중복으로 보는 이유이다.
일체여래의 법신불도 또한 오로지 광명 한가지로 장엄할 뿐이다. 이 경사에 어찌 중생이 빠질 수 있는가? 이곳이 또한 일체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기도 하다. 이 근본각지根本覺地는 보광명지이고 보광명근본지이다. 바가바와 일체여래 그리고 일체중생 셋 중에 하나도 광명을 여읜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중생의 신심과 일체여래의 적멸이 평등본제이고, 또는 평등한 본제이다. 이 평등을 형용사로 쓸 수도 있고, 명사로 쓸 수도 있다. 평등이 바로 본제이기 때문이다. 이 평등과 본제 또는 평등본제가 바로 시방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불이를 수순하시는 주체이며, 일체 정토를 나투시는 불이의 경계도 또한 평등본제이다. 불이가 곧 평등이다.
광주고향을 다시 천명한다. 자정기심성본향(自淨其心性本鄕)이란 말이 있다.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 본성품의 고향이네” “티 없이 깨끗한 그 자리가 심성의 본향이라” “스스로가 뜻을 맑게 하면은 곧 마음의 본고향이라” “스스로 조촐한 그 마음이 자성의 본향이다.” 등등이다. 이를 직역하면,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자성의 본향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저절로 청정한 그 마음이 일체 불성의 근본 고향이다.”라고 해석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심은 중생심으로 보고, 성은 불성 또는 여래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불성이 중생심의 근본고향이 아니고, 중생심이 불성의 근본고향이다. 또 어째서 그러한가?
통현장자의 논문을 인용한다. “십개지불은 부동지불을 근본으로 삼고, 부동지불은 보광명지를 근본으로 삼으며, 보광명지는 무의주지를 근본으로 삼고, 무의주지는 일체중생을 근본으로 삼는다.”(十箇智佛以不動智佛爲本 不動智佛以普光明智爲本 普光明智以無依住智爲本 又無依住智以一切衆生爲本)“무릇 범부지로 좇아서 십신심을 수학하고 제불 정각의 불과가 자심과 다름이 없음을 믿으니, 본성의 청정함이 제불의 각성과 같다.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함을 무의주지라 일컬으니, 제불의 근본지와 같다.”(從凡夫地修學十信心 信諸佛正覺之果 無異自心 本性清淨 如諸佛性 所有分別本性清淨 名無依住智 如諸佛根本智)
모든 분별은 중생심이고, 또한 일체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이 때문에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할 수 있으며, 이를 무의주지라 한다.
함평천지의 대원을 품은 늙은 몸이 빛고을을 보기 위하여 대장정에 나서니, 그 경계가 또한 남행하는 선재동자와 같다. “제주어선을 빌려 타고 해남으로 돌아서 들어갈 즈음, 흥양에 돋은 해는 보성에 비춰주고 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는 영암에 둘러 있다.”
제주어선의 어옹은 “대교의 그물을 펼쳐서 인천의 고기를 걸러내는”(張大敎網 漉人天魚) 재주가 있다. 어옹의 분상에는 사람이나 천인이 모두 고기와 같다. 해남海南의 남녘 남南 자는 파자하면 십문팔천十門八千 또는 십문팔간十門八干이 된다. 십간 중에 중앙 무기토를 제외하면 사면팔방이다. 십문의 안과 팔방의 밖을 모두 수용하기 때문에 이 남 자는 일체를 구족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해남이 곧 흥양興陽이고, 보성에 앉아 흥양에 돋은 해를 보고서 홀연히 대오한다. 일념에 정각을 성취한다. 돌아들 제의 즈음 제가 그러하다. 찰나제이고 평등본제이다. 찰나제삼매에 들어가 무상정각을 성취할 때, 삼세제불이 일시에 성불한다. 정각을 성취하는 일념에는 시제가 없다. 구세를 일념으로 관통하는 평등세가 곧 평등본제이다. 일제一際나 본제 진제 무제 실제 등이 모두 정각을 성취하는 찰나를 말한다.
그 경계 또는 산천경계가 바로 “고산의 아침 안개는 영암에 둘러 있다.” 해남이 피안이고, 흥양과 보성 그리고 고산 영암이 모두 빛고을이 아님이 없다. 호남 54개 고을마다 연화장세계가 분명하도다. 그래서 호남이 전라全羅이다. 차안에 피안이 완전무결하게 펼처져 있다. 차안이 바로 그대로 피안이다.
봄을 찾기 위해서 동쪽을 향하여 나서지 말라.
서쪽 동산의 한매가 눈 위에 꽃망울을 터트렸느니라.
尋春莫須向東去 西園寒梅已破雪
2. 불이법문의 평등
유마경은 3본이 현존하고 있다. 지겸支謙의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과 구마라집의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그리고 현장의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이다. 우리는 통상 유마거사라 말하지만, 유마힐경은 거사 또는 장자라 병칭하고 있고, 설무구칭경은 모두 무구칭이라 호칭하고 있다. 다만 대보살 리차비종 무구칭과 보살무구칭 그리고 무구칭보살 등이 경에 나오지만 상호간에 호칭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있다. 어떻든 유마거사보다는 무구칭보살 또는 유마장자라 일컫는 것이 옳은 듯하다.
불이법문의 불이不二는 무이無二와 같다. 아니불자를 없을무자로 바꾸어 해석하면 그 뜻이 명확한 경우가 매우 많다. 사전에 의하면, 상대와 차별의 일체경계를 초월하는 절대 평등의 진리를 현시하는 교법을 불이법문이라 한다. 유마경에 33종의 불이법문이 있다. 앞과 뒤만 인용한다. 아래와 같다.
이때 무구칭이 회중會衆의 모든 보살에게 두루 질문했다. “어떻게 보살이 불이법문에 옳게 깨달아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인자는 모두 응당 자기의 변재에 맡기고 각기 즐겨 익힌 바를 따라서 설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회중에 있는 모든 보살이 각기 즐겨 익힌 바를 따라 차례로 말씀하셨다.(時無垢稱 普問衆中諸菩薩曰 云何菩薩善能悟入不二法門 仁者皆應任己辯才各隨樂說 時衆會中有諸菩薩 各隨所樂次第而說)
각수요설各隨樂說은 갈고 닦은 장기를 말한다. 능엄경의 25종 원통법문과 그 양상이 유사하다. “어떤 것이든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공자님의 명언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표현이 즐기는 것이다.
이때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법자재이다. 이와 같이 말했다. “생멸이 둘입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제법이 본래 무생이고 또한 무멸인 줄을 분명히 알고 이와 같은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時有菩薩名法自在 作如是言 生滅爲二 若諸菩薩了知諸法本來無生亦無有滅 證得如是無生法忍 是爲悟入不二法門)
다시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주계왕이다. 이와 같이 말했다. “정도와 사도를 분별하면 둘이 됩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정도에 잘 안주할 수 있다면 사도는 필경 행하지 못합니다.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정도와 사도의 이상이 없고, 이상을 제멸하기 때문에 이각이 없습니다. 만일 이각이 없다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復有菩薩名珠髻王 作如是言 正道邪道分別爲二 若諸菩薩善能安住正道邪道究竟不行 以不行故則無正道邪道二相 除二相 故則無二覺 若無二覺 是爲悟入不二法門)
다시 보살이 있으니 이름을 제실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말했다. “허망과 진실은 분별하면 둘이 됩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진실의 자성을 자세히 관찰하면 오히려 진실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허망을 보겠습니까? 어째서 그러한가? 이 자성은 육안으로 보는 바가 아니고, 혜안이라야 바로 봅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일체법에서 보는 것도 없고 보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復有菩薩名曰諦實 作如是言 虛之與實分別爲二 若諸菩薩觀諦實性尚不見實 何況見虛 所以者何 此性非是肉眼所見 慧眼乃見 如是見時於一切法無見無不見 是爲悟入不二法門)
첫째 법자재보살과 30번째 주계왕보살 그리고 31번째 제실보살의 불이법문을 인용했다. 사람을 위시하여 유정을 기준하면 생사라 말하고, 유정과 무정 일체를 광범위하게 말하면 생멸이라 한다. 생멸은 생기와 멸진이고, 또 생주와 이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고, 일체법도 생기하면 멸진이 있기 마련이다. 인연법이 그러하다. 만일 태어나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다. 설령 태어날지라도 그 가운데서 무생의 도리를 알면 또한 죽을 일도 없다. 이 무생의 도리를 원각경은 환화로 설명하고, 유식은 삼성과 삼무성으로 파설하며, 십이인연은 생관과 멸관으로 자세히 구명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무성이기 때문에 무생이고 무멸이다. 정도와 사도 그리고 허망과 진실도 또한 그러하다. 위에서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함을 무의주지라 일컫는다.”라는 구절을, “모든 분별은 중생심이고, 또한 일체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이 때문에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할 수 있으며, 이를 무의주지라 한다.”라고 해설한 바 있다.
이와 같이 회중에 있는 모든 보살이 깨달아 아는 바를 따라 각기 따로 설한 다음 동시에 묘길상보살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합니까?”(如是會中有諸菩薩 隨所了知各別說已 同時發問妙吉祥言 云何菩薩名爲悟入不二法門)
이때 묘길상이 모든 보살에게 일러주셨다. “여러분들이 말한 바가 비록 모두 옳기는 합니다.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여러분들의 이러한 설법이 오히려 두 가지 분별이 된다고 일컫습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표창할 수도 없고 지시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희론을 여의고 일체 분별을 끊으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時妙吉祥告諸菩薩 汝等所言雖皆是善 如我意者 汝等此說猶名爲二 若諸菩薩於一切法 無言無說無表無示 離諸戲論絕於分別 是爲悟入不二法門)
이때 묘길상이 다시 보살 무구칭에게 질문했다. “우리들이 뜻을 따라 각기 따로 설했습니다. 인자도 마땅히 설하소서. 어떻게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합니까?”(時妙吉祥 復問菩薩無垢稱言 我等隨意各別說已 仁者當說 云何菩薩名爲悟入不二法門)
이때 무구칭이 잠자코 말이 없었다. 묘길상이 말했다. “옳고 옳도다. 이와 같구나. 보살이 진실로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일체 문자나 언설 분별이 전혀 없도다.” 여기 모든 보살이 이 법을 설할 때에 회중 가운데 5천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었고, 동시에 무생법인을 증득했다.(時無垢稱默然無說 妙吉祥言 善哉善哉 如是 菩薩是眞悟入不二法門 於中都無一切文字言說分別 此諸菩薩說是法時 於衆會中五千菩薩 皆得悟入不二法門 俱時證會無生法忍)
이상은 설무구칭경을 의거했다. 3본 중에 가장 완벽하다. 지겸스님의 불설유마힐경은 문수보살이 유마장자에게 불이법문을 묻는 문답이 없고, 구미라집 삼장의 유마힐소설경은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如我意者) 다음에 “여러분들의 이러한 설법이 오히려 두 가지 분별이 된다고 일컫습니다.”(汝等此說猶名爲二)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설무구칭경 주석서는 자은스님의 설무구칭경소 외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유마경 주석서는 대부분 유마힐소설경을 의거하고 있다. 그런데 지겸스님의 원명이 오월씨우바새지겸(吳月氏優婆塞支謙)이다. 삼국시대 손권이 박사로 예우한 “오나라 대월씨국 우바새 지겸”이다. 손권이 태자 손량의 스승으로 모신 것을 보면, 유마경을 번역할 당시 수수입전하신 것 같다. 집삼장의 유미힐소설경 중에 불이법문은 아래와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이 각각 설하고 나서 문수사리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如是諸菩薩各各說已 問文殊師利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문수사리가 말씀하셨다.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지시할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답을 여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文殊師利曰 如我意者 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이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질문했다. “우리들은 제각기 설했습니다. 인자도 마땅히 설하소서.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於是文殊師利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이때 유마힐이 잠자코 말이 없었다. 문수사리가 찬탄하여 말했다. “옳고 옳도다. 바로 문자나 언어가 없는 곳에 이르니, 이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 입불이법문품을 설할 때에 이 회중 가운데 5천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들어갔고, 무생법인을 증득했다.(時維摩詰默然無言 文殊師利歎曰 善哉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說是入不二法門品時 於此衆中 五千菩薩皆入不二法門 得無生法忍)
해설: 이 불이법문을 나는 해설할 만큼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 나의 분수 밖이다. 그렇지만 나의 분수 안에서 해설해보고자 한다. 여아의자如我意者는 하나의 문장이다. 그런데 이를 직역하면 “나의 뜻과 같은 것”과 같이 반토막 문장이 되고 만다. 부득이 의역할 수밖에 없는데, “나의 뜻과 같은 것은 어떠한가?” 또는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처럼 하나의 조건절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뜻이 함축되어 있을까?
유마힐소설경은 여아의자 다음에 바로 문수보살의 불이법문이 나온다. 그렇지만 설무구칭경은 이 여아의자 앞뒤에 질문한 31명 보살의 불이법문에 대한 문수보살의 총평이 완전무결하게 전개된다. “여러분들이 말한 바가 비록 모두 옳기는 합니다.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여러분들의 이러한 설법이 오히려 두 가지 분별이 된다고 일컫습니다.”(汝等所言雖皆是善 如我意者 汝等此說猶名爲二) 후세 모든 주석가는 이 총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불이법문은 양본이 조금 다르다.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알려줄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답을 여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또는 “만일 모든 보살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표창할 수도 없고 지시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희론을 여의고 일체 분별을 끊으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若諸菩薩於一切法 無言無說 無表無示 離諸戲論絕於分別 是爲悟入不二法門)
전자는 무시무식無示無識이고 후자는 무표무시無表無示이다. 이를 의거하면 무식은 알 수 없다는 뜻보다는 표지의 개념으로 무지無識라 독음하고 ‘나타낼 수 없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이유는 무언과 무설 무시가 모두 안에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무식 또는 무지만 홀로 안의 의식작용으로 보는 것보다는, 셋과 함께 동일한 작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리고 표창과 지시는 자은스님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3. 불이법문에 대한 제가의 해석
무엇이든 원전의 번역이 첫째이고, 해설은 그 다음의 일이다. 범어 원전을 한역한 삼장이 부지기수이지만 첫째가 구마라집 삼장이다. 후대 주석가는 집삼장의 금강경과 유마경 등에 무한신뢰를 표출하고 있다. 승조스님 등과 청량국사의 해설을 소개한다.
1) 승조스님의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과 삼주
승조스님이 주석한 주유마힐경은 집삼장과 도생스님의 견해도 함께 있다. 모든 보살의 질문에 대한 문수보살의 답변 중에 “말할 수 없다.”(無言)를 집삼장은 “곡변하여 설한 것이다.”(什曰 說曲辯也)라고 하고, “설명할 수 없다.”(無說)를 “한차례 지나간 말을 설한 것이다.”(什曰 說一往說也)라고 하며, “알려줄 수 없다.”(無示)를 “그 법상을 드러내고자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고 말한 것이니, 이를 일컬어서 알려준다고 한다.”(什曰 顯現其相 言是善是惡 名爲示也)라고 주석했다. 이 시示자에는 보이다 가르치다 알리다 등의 뜻이 있다.
경문: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알려줄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답을 여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如我意者 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라고 한 문수보살의 답변에 대하여 승조스님과 도생스님은 아래와 같이 해설했다.
승조스님 해설: 위에서 모든 보살이 천명한 법문은 비록 동일하지만, 인유한 까닭은 각기 다르다. 게다가 법상만 바로 변명하고 무언은 천명하지 못했다. 이제 문수가 모든 보살의 설법을 총괄하고 불이의 문을 열어젖히며, 법상을 설할 수 없다고 직언하고, 법상에 대하여 언설을 안배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그 말씀이 지극하도다. 그러나 정묵과 견주면 오히려 또한 차후로다.(肇曰 上諸人所明雖同 而所因各異 且直辯法相 不明無言 今文殊總衆家之說 以開不二之門 直言法相不可言 不措言於法相 斯之爲言 言之至也 而方於靜默猶亦後焉)
도생스님 해설: 이전의 모든 보살은 각기 불이의 뜻을 설하니,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일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곧 다시 둘을 대대해야 불이가 된다. 그래서 문수는 설할 수 없음을 천명하니, 바로 불이가 되는 것이다.(生曰 前諸菩薩 各說不二之義 似有不二可說也 若有不二可說者 即復是對二 爲不二也 是以文殊明無可說 乃爲不二矣)
해설: 고인이 설명하면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데, 손에 쥐어주어도 알기 어려운 것이 바로 상승법문이다. 내가 이 글을 해석하느라 노심초사했다. “게다가 법상만 바로 변명하고 무언은 천명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승조스님은 모든 보살과 문수보살의 법문의 차이를 변별했다. 법성은 진여나 실상 법성 등과 동의어이다. 곧 31명의 보살이 설한 무이법문이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법문을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지만, 구경에는 유마장자의 정묵 곧 묵연무언의 뒷자리에 안배했다. 방方자에는 비교하다 견주다 등의 뜻이 있다.
도생스님의 해설은 아래 청량국사의 해설과 비교하면 유사한 점이 있다. “첫째 모든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遮遣하면, 오히려 말로써 법을 드러내어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설령 둘을 대대하여 불이를 천명할지라도 대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一諸菩薩以無二遣二 則是以言顯法 似有不二可說 便是對二明不二 非絕待也)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다.”(似有不二可說) 그리고 또 “곧 다시 둘을 대대해야 불이가 된다.”(復是對二 爲不二也) “설령 둘을 대대하여 불이를 천명할지라도”(便是對二明不二) 등이 유사하다. 마지막 “대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에 유념하고자 한다.
경문: 이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질문했다. “우리들은 제각기 설했습니다. 인자도 마땅히 설하소서.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於是文殊師利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집삼장 해설: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 6백년에 한 사람이 있었다. 나이 60세에 출가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삼장을 외워서 모두 마치고, 다음 삼장 논의를 저술하였으며, 논의를 저술하고 나서 사유하고 말했다. “불법 중에 다시 무슨 일이 있으랴. 오로지 선법이 있을 뿐이니, 내가 응당 수행하리라.” 이리하여 선법을 수령하고, 스스로 맹세했다. “만일 도를 얻지 못하고 일체 선정 공덕을 갖추지 못하면, 마침내 누워서 쉬지 않고 허리도 땅에 대지 않겠노라.” 이로 인하여 협비구라 일컫게 되었다. 소시에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삼명육통을 구비했으며, 대변재가 있어서 논의에 뛰어났다. 외도 논사가 있었으니 이름을 마명이라 한다.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로워 일체 경서를 모두 다 통달했고, 또한 대변재가 있어서 일체 논의를 최파할 수 있었다. 협비구의 명성을 듣고, 모든 제자를 거느리고 그 처소에 이르러 큰소리로 외쳤다.
“일체 논의를 모두 다 최파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의 언론을 최파할 수 없다면 응당 머리를 베어버리고 굴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협비구는 이 쟁론을 듣고 잠자코 말이 없었다. 마명은 곧 교만이 생겼다.
“이 사람은 부질없이 허명만 있고, 실제는 아는 것이 없구나.”
자기 제자와 함께 그를 버리고 떠나갔다가, 중로에 사유하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매우 깊은 지혜가 있구나. 내가 부처負處에 떨어지고 말았다.”
제자가 괴이하게 여기고 질문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응답하여 말했다. “내가 일체 언어를 최파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 곧 스스로 최파한 것이다. 그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으니, 곧 최파할 것이 없다.”
곧 바로 그 처소로 돌아와서 협비구에게 말했다.
“제가 부처에 떨어졌으니, 오직 어리석을 뿐입니다. 어리석은 머리는 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베어버리십시오. 만일 저를 베어버리지 않으면 제가 응당 스스로 베어버리겠습니다.”
협비구가 말했다. “그대의 머리를 베어버리지 않고 응당 그대의 결발만 베어버리겠노라. 세간에 비유하면 죽음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삭발하고 협비구의 제자가 되었다. 지혜와 변재가 세간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널리 경론을 조성하고, 크게 불법을 펼쳤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둘째 부처님이라 일컬었다. 무릇 침묵과 말은 비록 다르지만, 종취를 천명하는 것은 동일하다. 회득한 바가 비록 동일하지만, 행적은 정추精麁가 있다.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는 것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잠자코 논명論明하니, 그 논명이 현묘하도다.(什曰 如佛泥洹後六百年有一人 年六十出家 未幾時頌三藏都盡 次作三藏論議 作論已思惟言 佛法中復有何事 唯有禪法我當行之 於是受禪法 自作要誓 若不得道 不具一切禪定功德 終不寢息 脇不著地 因名脇比丘 少時得成阿羅漢 具三明六通 有大辯才 善能論議 有外道師 名曰馬鳴 利根智慧一切經書皆悉明練 亦有大辯才 能破一切論議 聞脇比丘名 將諸弟子往到其所 唱言一切論議悉皆可破 若我不能破汝言論 當斬首謝屈 脇比丘聞是論 默然不言 馬鳴即生憍慢 此人徒有空名 實無所知 與其弟子捨之而去 中路思惟已 語弟子言 此人有甚深智慧 我墮負處 弟子怪而問曰 云何爾 答曰 我言一切語言可破 即是自破 彼不言則無所破 即還到其所 語脇比丘言 我墮負處 則是愚癡 愚癡之頭 非我所須 汝便斬之 若不斬我我當自斬 脇比丘言 不斬汝頭 當斬汝結髮 比於世間 與死無異 即下髮爲脇比丘作弟子 智慧辯才世無及者 廣造經論 大弘佛法 時人謂之 爲第二佛 夫默語雖殊 明宗一也 所會雖一 而迹有精麁 有言於無言 未若無言於無言故 默然之論 論之妙也)
승조스님 해설: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는 것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는 것만 못하니, 이 때문에 묵연한 것이다. 위에서 모든 보살은 법상에 대하여 말이 베풀어지고, 문수는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으며, 정명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다. 이 셋은 종취를 천명함은 비록 동일하지만, 행적에는 심천이 있다. 그래서 말은 무언보다 뒤에 있고, 앎은 무지보다 뒤에 있는 것이니, 믿을 만하도다.(肇曰 有言於無言 未若無言於無言 所以默然也 上諸菩薩措言於法相 文殊有言於無言 淨名無言於無言 此三明宗雖同 而迹有深淺 所以言後於無言 知後於無知 信矣哉)
도생스님 해설: 문수는 비록 설할 수 없음을 천명했지만, 여전히 유설이 무설임을 천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마는 잠자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 실답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말이 만일 실답다면, 어찌 잠자코 있었으랴.(生曰 文殊雖明無可說 而未明說爲無說也 是以維摩默然無言 以表言之不實 言若果實 豈可默哉)
해설: 협비구를 협존자라 한다.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에 의하면, “그 협비구는 숙업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태 중에 60여년을 있었고, 이미 탄생한 이후 수염과 머리털이 호백했다.”(彼脇比丘由昔業故 在母胎中六十餘年 既生之後鬚髮皓白)라고 하니, 60세 출가설은 와전인 듯하다. 마명 전후에 대변재란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면, 소시에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가 또한 협비구임이 분명하다. 부법장인연전에 의하면 마명보살은 협존자의 손상좌가 되고, 이 집삼장의 해설에 의하면 제자가 된다. 두 존자의 문답에 어려운 점은 없다. 다만 중로에 자기 허물을 돌이킬 줄 아는 것을 보면 마명보살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롭다고 하겠다.
집삼장의 결론은 압권이다. “무릇 침묵과 말은 비록 다르지만, 종취를 천명하는 것은 동일하다. 회득한 바가 비록 동일하지만, 행적은 정추精麁가 있다.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는 것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잠자코 논명論明함이여, 그 논명이 현묘하도다.”
정추에 대한 해설, 곧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는 것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는 것만 못하다.”(有言於無言 未若無言於無言)라는 이 문장도 고심했다. “(문수보살이) 말이 무언에 대하여 있는 것은 (유마장자가) 말이 무언에 대하여 없는 것만 못하다.” 이와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무언은 불이법문이다. 주어는 생략되었다. 전자를 취했다. 고故자는 앞에 붙였다. 그래야 앞뒤 문장이 살아난다. 무언은 삼단의 불이법문 중에 최고층이다.
“그래서 말은 무언보다 뒤에 있고, 앎은 무지보다 뒤에 있는 것이니, 믿을 만하도다.(所以 言後於無言 知後於無知 信矣哉) 후後자는 능력 따위가 뒤떨어지다, 뒤로 돌리다, 뒤서다 등 동사의 뜻이 있다. “말이 만일 실답다면,”(言若果實)의 약과若果는 하나의 단어이다.
경문: 문수사리가 찬탄하여 말했다. “옳고 옳도다. 바로 문자나 언어가 없는 곳에 이르니, 이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다.”(文殊師利歎曰 善哉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승조스님 해설: 묵연무언 법문을 수령한 이는 문수 그 일인뿐이로구나. 그 유마를 말로 지지하고자 하니, 그래서 옳다고 칭찬한 것이다.(肇曰 默領者 文殊其人也 爲彼持言 所以稱善也)
도생스님 해설: 말의 자취가 무언에서 다했다. 이 때문에 탄사歎辭로 옳다고 한 것이다.(生曰 言迹盡於無言 故歎以爲善矣)
해설: 무정설법은 아는 이가 드물다. 육조스님의 문하에서도 하택스님과 마조스님의 제자 대주스님은 부정했지만, 혜충국사는 문수나 보현의 경계에 이르러야 알 수 있다고 극찬했다. 유마장자의 묵연무언도 일종의 무정설법이다. 오로지 문수보살만이 감파했다. 그래서 승조스님이 찬탄한 것이다.
선재선재는 부처님이 제자를 칭찬할 때 쓰기도 하고, 제자가 부처님을 찬탄할 때 쓰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33인 보살인데, 문수보살은 지휘자이기도 하고, 31인의 보살과 유마보살의 중재자이기도 하다.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일사천하미진수의 제불보살 등으로 하여금 선재라는 찬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선재를 잘했다 또는 착하다고 변역하는 사례가 있다. 그러나 옳다는 번역이 또한 옳다. 선재는 절대긍정의 표현인데, 착하다는 동떨어져 있고, 잘했다는 긍정할 만하지만, 옳다보다는 더 구구절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청량국사의 삼중사중 그리고 평등
그렇지만 이 경의 뜻은 전후 보살이 서로 이루어주며 함께 심오한 지취를 드러낸다. 만일 우열을 변별한다면 혹 삼중 사중이 있다. 삼중이라 말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 모든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遮遣하면, 오히려 말로써 법을 드러내어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설령 둘을 대대하여 불이를 천명할지라도 대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둘째 문수는 말로써 말을 차견하고 불이를 설할 수 없음을 천명하여 말을 잊고 지취를 깨닫게 하였다. 셋째 유마힐은 무언으로써 현리를 드러내니, 이른바 본인 스스로 무언하여 다시금 차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셋이 된다. 그리고 사중이라 말한 것은 무엇인가? 문수사리는 말로써 그 불이에 계합하고, 또 말이 곧 무언임을 천명하니, 꼭 여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합일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연후 삼단으로 반복하여 서로 이루어주는 것이니, 오로지 제일의가 될 뿐이다. 처음 문수는 말로써 무언을 드러내고, 다음 정명은 무언으로써 말에 계합하며, 마지막 문수는 말로써 무언에 계합하여, 삼단으로 두 보살이 함께 말이 끊어진 현리를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앞 32명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하고, 뒤에 두 대사는 무언으로써 말을 차견한 것이니, 그러면 단지 두 단계만 있을 뿐이다. 만일 다시 합일하고자 한다면 어떠한가? 만일 모든 보살이 말로써 둘을 차견함이 없었다면, 부질없이 절언絕言만 있을 따름이라 무슨 인유로 현리를 드러낼까? 이는 곧 앞의 모든 보살이 말을 가차하여 현리를 드러내고, 뒤에 두 대사는 무언으로써 현리를 드러낸 것이니, 유언有言과 무언無言을 함께 잊는다면 모두 진실한 불이이다. 이 때문에 비록 세 단계가 일치해도 상위相違가 없다. 이제 최후를 취하기 때문에 정명이 묵연히 있는 것과 같다고 이른 것이다.(然此經意 前後相成 共顯深旨 若辯優劣 或三重四重 言三重者 一諸菩薩以無二遣二 則是以言顯法 似有不二可說 便是對二明不二 非絕待也 二文殊以言遣言 明無不二可說 令亡言會旨 三維摩詰以無言顯理 謂本自無言 不須更遣 故爲三也 而言四者 文殊師利以言印彼 又明言即無言 非要離耳 若欲合者 然後三段反覆相成 但爲一義 初文殊以言顯無言 次淨名以無言印言 後文殊以言印無言 三段二人共顯絕言之理 故前三十二菩薩以無二遣二 後二大士以無言遣言 則但有二節 若更合者 若無諸菩薩以言遣二 空有絕言何由顯理 是則前諸菩薩假言顯理 後二大士以無言顯理 言與不言雙亡 皆眞不二矣 故雖三節一致無違 今取最後 故云如淨名默住也)
해설: 이 문단의 소제목이 “청량국사의 삼중사중 그리고 평등”이다. 곧 국사는 이 불이법문품 전체를 세 단계로 나누기도 하고, 네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국사는 앞에 보살을 32명이라 했는데 전사하는 과정에 차오가 아닐까 한다. 문수보살과 유마장자를 포함하여 전인원이 33인이다. 31명 보살의 불이법문이 한 묶음으로 첫째 단계이고, 문수보살과 유마장자의 법문이 각기 한 단계라 도합 세 단계이다. 이를 삼중이라 한다. 사중은 후자를 세 단계로 분류한 것이다. 곧 하나는 문수보살의 불이법문이고, 둘은 유마장자의 묵연무언이며, 셋은 문수보살의 찬탄이다. 합해서 사중이 된다.
차견遮遣은 차지遮止와 견거遣去의 합성어이다. 막아서 못 하게 하고, 내보내 제거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31번째 제실보살의 법문을 사례로 들어보겠다.
“허망과 진실은 분별하면 둘이 됩니다.” 허망과 진실이 둘이다. 곧 두 가지 분별이다. “만일 모든 보살이 진실의 자성을 자세히 관찰하면 오히려 진실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허망을 보겠습니까?” 이것이 차견이다. 허망과 진실을 차견한다. “이 자성은 육안으로 보는 바가 아니고, 혜안이라야 바로 봅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일체법에서 보는 것도 없고 보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이이다. 무이는 곧 불이와 같다. 바로 불이법문이다. 불이의 아니불자는 없을무자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불이법문이 바로 무이법문이다. 앞에 31명 보살의 불이법문은 그 양상이 모두 이와 유사하다. 그래서 한 묶음으로 보고 첫째 단계를 삼는 것이다.
“첫째 모든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遮遣하면, 오히려 말로써 법을 드러내어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설령 둘을 대대하여 불이를 천명할지라도 대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영구예미靈龜曳尾이다. 꼬리로 발자국을 쓸어도 쓴 흔적은 어찌할 수 없다.
삼중과 사중은 위에서 설명했다. 아래는 이중을 말한다. “처음 문수는 말로써 무언을 드러내고, 다음 정명은 무언으로써 말에 계합하며, 마지막 문수는 말로써 무언에 계합한다.” 말을 인하여 말을 드러내기도 하고,(因言而顯言) 말로써 무언을 드러내기도 한다.(以言顯無言) 만일 문수보살의 찬탄하는 말이 없었다면, 어찌 무언이 현묘한 줄을 알랴. 이 때문에 적멸의 상은 언전을 가차하는 것이다.(若無文殊讚默之言 安知無言之爲妙 故寂滅之相 假以言詮) 사바세계는 불사를 말로 하니 이근원통이 제일이고, 묘언妙言은 지혜의 산물이다. 세간은 말이 시비의 대상이 되지만, 출세간은 말의 묘용을 끝없이 찬탄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삼단으로 두 보살이 함께 말이 끊어진 현리를 드러내니, 이 때문에 앞 32명 보살이 무이로써 둘을 차견하고, 뒤에 두 대사는 무언으로써 말을 차견하는 것이니, 그러면 단지 두 단계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국사는 본회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31명 보살의 한 단계와 문수유마를 한 단계로 묶는다. 그래서 두 단계만 있을 뿐이라 말한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만일 모든 보살이 말로써 둘을 차견함이 없었다면, 부질없이 절언絕言만 있을 따름이라 무슨 인유로 현리를 드러낼까?” 절언은 문수보살과 유마장자의 불이법문을 말한다.
“이는 곧 앞의 모든 보살이 말을 가차하여 현리를 드러내고, 뒤에 두 대사는 무언으로써 현리를 드러낸 것이니, 유언有言과 무언無言을 함께 잊는다면 모두 진실한 불이이다. 이 때문에 비록 세 단계가 일치해도 상위相違가 없다.” 마침내 두 단계가 한 단계 진실한 불이로 귀결한다. 이것이 곧 국사의 본회이다. 일치무위가 추기이다. 바로 평등법문이다.
서로 꼭 들어맞는다는 일치一致와 틀림이 없다 또는 다름이 없다는 무위無違는 같은 말이다. 범성일치凡聖一致 시종일치始終一致 심경일치心境一致 또는 시말무위始末無違 성상무위性相無違 진속무위眞俗無違 등의 사례와 같다. 둘이 모두 일치하거나 무위한 이유는 무엇인가? 상호간에 평등하기 때문이다. 만일 위 사례에서 평등관을 갖지 못하면, 원각경의 청정혜보살장 중에 “일체 장애가 바로 구경각이니, 득념과 실념이 해탈이 아님이 없고, ... 일체 번뇌가 필경 해탈이다.”(善男子 一切障礙 即究竟覺 得念失念 無非解脫 ... 一切煩惱 畢竟解脫)라는 평등법문을 결코 알 수 없다.
백유경에 삼층 누각의 비유가 있다. 주인은 목수에게 1층과 2층이 없는 3층만의 누각을 원하지만, 그러한 3층 누각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유마장자의 묵연무언을 문수보살이 선재선재라 찬탄하고, 역대 모든 주석가도 또한 극찬한다. 그렇지만 이 문장의 초두에 “이 경의 뜻은 전후 보살이 서로 이루어주며 함께 심오한 지취를 드러낸다. 만일 우열을 변별한다면 혹 삼중 사중이 있다.”라는 서설과, 이를 의거하여 이끌어낸 진실한 불이법문이 곧 평등법문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찌 그 우열을 논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열을 논하고 하나로 평정한다면 삼층 누각을 짓고자 하는 졸부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4. 중도와 평등
일념一念과 평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중도도 또한 단정하여 말하기 어렵다. 모든 경과 논에서 그 뜻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연을 생기하는 법을 내가 말하노니 바로 무성이로다.
바로 이를 위하여 이름을 가차하니 이도 또한 중도의 뜻이니라.
衆因緣生法 我說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일찍이 한 법도 인연을 좇아서 생기하지 않음이 없도다.
이 때문에 일체 법이 이 공이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모든 인연을 생기하는 법을 내가 말하노니 바로 공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중연이 구족하고 화합하여 만물이 생기한다. 이 만물은 중다한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고, 공도 또한 다시 공하다. 다만 중생을 인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름을 가차하여 설하고, 유무 이변을 여의기 때문에 이름을 중도라 한다. 이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이 법은 공함도 없기 때문에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일 이 법이 성상이 있다면 곧 중연을 기다리지 않고 있어야 하고, 만일 중연을 기다리지 않으면 바로 법이 없다. 이 때문에 공하지 않는 법은 없는 것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即是空 何以故 衆緣具足和合而物生 是物屬衆因緣故無自性 無自性故空 空亦復空 但爲引導衆生故 以假名說 離有無二邊故名爲中道 是法無性故不得言有 亦無空故不得言無 若法有性相 則不待衆緣而有 若不待衆緣則無法 是故無有不空法)
해설: 용수보살의 중론中論 4권 중에 중도란 용어는 위와 같이 단지 2차례만 나온다. “유무 이변을 여의기 때문에 이름을 중도라 한다.” 이것이 중도의 정의이다. 십주비바사론에 이르기를, “모든 법이 중연을 좇아서 생기하여 결정한 자성이 없는 줄을 알아야 중도를 행한다.”(知諸法從衆緣生無有定性 行於中道)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위 전체 문단의 대의이기도 하다.
중도와 관련하여 지도론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부처님은 항상 중도에 거처하시기 때문에 도솔천은 욕계6천과 범천 7천 중에 중심이라 위에 3천이 있고 아래 3천이 있다. 그 4천하에서도 반드시 중국에 탄생하시고, 중야에 모태강신하시며, 중야에 가비라바국성을 탈출하시고, 중도를 행하시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시며, 중도로 인천을 위하여 설법하시고, 중야에 무여열반에 드시었다. 중도법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중천 위에 탄생하신 것이다.(佛常居中道故 兜率天於六天及梵之中 上三下三 於彼天下 必生中國 中夜降神 中夜出迦毘羅婆國 行中道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中道爲人說法 中夜入無餘涅槃 好中法故 中天上生)
“유무 이변을 여의기 때문에 이름을 중도라 한다.” 이를 의거하면 중도는 이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변의 대표가 유무이다. 6백부 반야경에 의하면, 5백비구가 각각 이변과 중도의 뜻을 펼쳐서 반야바라밀을 설했는데, 부처님은 “모두 도리가 있다.”(佛言皆有道理)라고 긍정하셨다 한다. 5백 가지 이변과 중도를 모두 인용할 수는 없다. 이에 설무구칭경과 육조단경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 불이법문품에 의거하면 31명 보살이 설한 31개 이변이 있다. 아래와 같다.
생성과 소멸, 유취와 무취, 오염과 청정, 산동과 사유, 일상과 무상, 보살과 성문, 선과 불선, 유죄와 무죄, 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세간과 출세간, 생사와 열반, 유진과 무진, 유아와 무아, 명과 무명, 색수상행식과 공, 사계와 공,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 보시회향과 일체지성, 공과 무상무원, 불법과 승보, 이 살가야와 살가야멸, 이 신어의와 3종 율의, 죄행 복행과 부동행, 일체와 이법이 모두 나로부터 생기함, 일체와 이법이 생기하는 바가 있음, 명과 암, 열반 생사의 기뻐함과 싫어함, 정도와 사도, 허와 실 등이다.(生滅 有取無取 雜染清淨 散動思惟 一相無相 菩薩聲聞 善及不善 有罪無罪 有漏無漏 有爲無爲 世出世間 生死涅槃 有盡無盡 有我無我 明與無明 色受想行及識與空 四界與空 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布施迴向一切智性 空無相無願 佛法僧寶 是薩迦耶及薩迦耶滅 是身語意三種律儀 罪行福行及不動行 一切二法皆從我起 一切二法有所得起 明之與暗 欣厭涅槃生死 正道邪道 虛之與實)
그리고 육조단경의 삼십육대는 다음과 같다. 천지, 일월, 명암, 음양, 수화, 어법語法, 유위와 무위, 유색과 무색, 유루와 무루, 색공, 동정, 청탁, 범성, 승속, 노소, 대소, 장단, 사정邪正, 치혜癡慧, 우지愚智, 난정亂定, 계비戒非, 곡직, 허실, 험평嶮平, 번뇌와 보리, 자헤慈害, 희신喜嗔, 사간捨慳, 진퇴, 생멸, 법신과 색신, 화신과 보신 등이다.
중도를 대주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을 인용하여 마무리하겠다. 다음과 같다.
문: “어떤 것이 중도인가?”(云何是中道)
답: “중간이 없고, 또 이변도 없으니, 곧 중도이다.”(無中間 亦無二邊 即中道也)
문: “무엇이 이변인가?”(云何是二邊)
답: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곧 이변이다.”(爲有彼心 有此心 即是二邊)
문: “어째서 저 마음 이 마음이라 일컫는가?”(云何名彼心此心)
답: “밖에서 색상과 소리에 얽매이니 이름을 저 마음이라 하고, 안에서 망념을 일으키니 이름을 이 마음이라 한다. 만일 밖에서 색상에 물들지 않으면 곧 저 마음이 없다고 일컫고, 안에서 망념을 생기하지 않으면 바로 이 마음이 없다고 일컫는다. 이것은 이변이 없다. 마음에 이미 이변이 없다면, 중도인들 또한 어찌 있으랴. 다만 이와 같은 것을 증득할 뿐이니, 곧 중도, 진실한 여래도如來道라 일컫는다. 여래도란 바로 일체 각인覺人의 해탈이다. 경에 이르기를, ‘허공은 중심이나 변제가 없으며, 모든 불신佛身도 또한 그러하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체 색이 공적하다고 한 것은 곧 일체처에 마음이 없는 것이고, 일체처에 마음이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일체 색성이 공적한 것이다. 두 경계에 차별이 없으니, 곧 색이 공적하다고 일컬은 것이고, 바로 색에 법이 없다고 일컫는다. 만일 네가 일체처에 마음이 없는 경계를 떠나서 보리나 해탈 열반 적멸 선정과 견성을 얻는 것이라면 틀린 것이다. 만일 일체처에 마음이 없는 경계라면 곧 보리나 해탈 열반 적멸 선정 내지 6바라밀을 닦아도 모두 견성하는 자리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금강경에 이르기를, ‘적은 법도 얻을 수 없으니,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일컫느니라.’라고 하였다.”(外縛色聲 名爲彼心 內起妄念 名爲此心 若於外不染色 即名無彼心 內不生妄念 即名無此心 此非二邊也 心既無二邊 中亦何有哉 但得如是者 即名中道 眞如來道 如來道者 即一切覺人解脫也 經云 虛空無中邊 諸佛身亦然 然一切色空者 即一切處無心也 一切處無心者 即一切色性空 二義無別 亦名色空 亦名色無法也 汝若離一切處無心 得菩提解脫涅槃寂滅禪定見性者 非也 一切處無心者 即修菩提解脫涅槃寂滅禪定 乃至六度 皆見性處 何以故 金剛經云 無有少法可得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也)”
해설: 색상과 소리에 얽매이거나 또는 망념을 일으키면 저 마음도 되고 이 마음도 된다. 그래서 저 마음 이 마음이 모두 이변이 있다. 만일 색상에 물들지 않거나 또는 망념을 생기하지 않으면 저 마음도 없고 이 마음도 없다, 이 때문에 저 마음이나 이 마음이 모두 이변이 없다고 한 것이다.
“마음에 이미 이변이 없다면, 중도인들 또한 어찌 있으랴. 다만 이와 같은 것을 증득할 뿐이니, 곧 중도, 진실한 여래도라 일컫는다.” 이변이 없고 중도만 있다면, 이는 사견이다. 중도를 달리 말하면 진실한 여래도라 일컫기도 한다. 이변도 없고 중도도 없지만, 중생을 위하여 이름을 가차한 것이다. 명상에 집착하지 말라. 중론에 “다만 중생을 인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름을 가차하여 설하고, 유무 이변을 여의기 때문에 이름을 중도라 한다.”라고 한 것이 이러하다. 이변이 없고 중도도 없는 이 경계를 바로 불이법문이라 일컫고, 또한 부득이 중도라 가차하여 일컬으며, 이변과 중도에 차별이 없는 경계를 곧바로 평등법문이라 일컫기도 한다.
5. 사십이장경의 무심도인과 평등
천 길이나 되는 낚싯줄을 곧장 드리우는데
한 물결이 움직이자 일만 물결이 따라 일어난다.
밤이 고요하고 물은 차서 고기가 물지 않아
가득한 배에는 괜히 밝은 달빛만 싣고 돌아오도다.
千尺絲綸直下垂 一波纔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이 게송이 금강경 오가해五家解의 야보송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보선사가 지은 줄 알지만, 실은 화정선자華亭船子 덕성德誠선사의 게송이다. 아마도 이 덕성선사의 화정선자란 칭호는 화정이란 정자 옆에서 뱃사공 노릇을 하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불러주는 덕칭德稱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덕성선사의 문하에 협산선회夾山善會 선사가 있고, 협산의 제자에 낙포원안洛浦元安 선사가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악인 1백명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선인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선인 1천명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오계를 지니는 수행자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며, 오계를 지니는 수행자 1만명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수다원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1백만 수다원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사다함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며, 1천만 사다함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아니함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1억 아니함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아라한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며, 10억 아라한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벽지불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1백억 벽지불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삼세제불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며, 1천억 삼세제불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무념 무주 무수 무증하는 이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佛言 飯惡人百 不如飯一善人 飯善人千 不如飯一持五戒者 飯五戒者萬 不如飯一須陀洹 飯百萬須陀洹 不如飯一斯陀含 飯千萬斯陀含 不如飯一阿那含 飯一億阿那含 不如飯一阿羅漢 飯十億阿羅漢 不如飯一辟支佛 飯百億辟支佛 不如飯一三世諸佛 飯千億三世諸佛 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낙포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경에 이르기를, ‘1천억 삼세제불께 공양하는 일이 상념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며 닦음이 없고 증득할 바도 없는 1인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1천억 삼세제불은 무슨 허물이 있으며, 수행도 없고 증득도 없는 이는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
부처님의 법문은 미묘하고 난사하여 평이하고 진실한 말씀 가운데서도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십이장경의 제11장 경문을 뜻에 의거하여 나누면 두 문단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범부로부터 여덟째 1천억 삼세제불까지는 공양할 대상으로서 바로 복전을 드러냈으며, 맨 마지막은 공양을 올리는 이의 마음에 의거한 것이다. 처음부터 여덟째까지는 후위가 전위보다 열 배씩 공덕이 수승함을 드러냈지만, 또한 공덕상功德相에 머무는 바가 있어서 함이 있는 마음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곧 법체를 어기기 때문에 유위법에 상당한다. 그러나 아홉째 닦음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는 이는 모든 일에 무심하여 형상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복보福報를 얻은 바가 또한 허공과 같아서 그 공덕을 사량할 수가 없다.
경에 다음과 같이 말씀한 바가 있다.
“보시를 많이 했는데 과보가 적기도 하고, 보시를 적게 했는데 과보가 많기도 하다. 백천 명의 범부에게 공양하는 일이 계율이 청정한 한 명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만 못하고, 나아가 백천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 무심도인 한 분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만 못하다.”
위에서 인용한 경은 어떤 경인지 그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다. 위의 경문이 부처님께서 수달다 장자에게 보시의 과보를 일러주신 말씀이라 하지만, 그 뜻은 42장경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아마 이 내용도 어떤 고인이 42장경의 말씀을 이해하기 쉽도록 간결하게 축약하여 말씀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경문이 세간에 알려진 뒤에는 ‘상념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며 닦음이 없고 증득할 바도 없는 이’를 그냥 간결하게 무심도인이라 이르게 되었다. 이 무심도인을 명明나라의 지욱선사는 원교의 초발심주 이상이거나, 또는 별교의 초지이며, 통교의 불지에 상당한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개 일체 모든 법이 본래 무념을 생각하고, 본래 무주에 머무르며, 본래 무수를 닦고, 본래 무증을 증득하는 줄을 체달하지 못하며, 이 때문에 평등한 법 가운데서 수승하고 하열함을 분별한다. 만일 일체 모든 법에서 무념과 무주와 무수와 무증의 미묘한 도리를 통달한다면, 곧 저 아래 범부로부터 위에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상념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며 닦음이 없고 증득할 바가 없는 이가 아님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굶주린 개에게 주셨다고 하는 바, 그 공덕이 다름이 없다. 유마거사께서 보주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난승여래께 올리고 나머지는 성 가운데 가장 초라한 거지에게 보시한 바, 그 공덕도 또한 평등하다. 만일 복전의 수승하고 하열한 차별을 알지 못하면 곧 공덕을 닦는 행리가 소중함을 드러낼 수 없고, 만일 중생과 부처님이 본래 스스로 평등함을 체달하지 못하면 곧 성덕性德의 근원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삼보를 공경하는 일은 경전敬田이고, 굶주린 개나 초라한 거지에게 보시하는 일은 비전悲田이다. 비전은 비록 복전이 하열하나 보시하는 이의 마음은 수승하며, 경전은 비록 복전이 수승하나 보시하는 이의 마음은 하열하다. 만일 보시하는 이의 마음이 수승함을 취한다면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 불쌍한 이에게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에게 공양하는 일이 축생에게 한 입에 들어갈 만한 음식을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법을 공경하고 사람을 중히 여기는 데에 의거하면 경전이 곧 수승하기 때문에 42장경의 말씀과 같이 차례로 그 공덕이 더욱 수승함을 드러낸 것이다. 이 비전이나 경전의 공덕을 물을 것 없이 비전과 경전에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공덕이 가장 크고 수승하다. 그러하다면 어떠한 이가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이를 무심도인이라 한다면, 그 무심도인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는가?
제11장의 경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단계 가운데 하나가 빠진 것이 있다. 벽지불과 부처님의 사이에 보살을 말씀하지 않은 것은 대체 무슨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여기에 바로 중대한 까닭이 있다. 법진法眞선사는 아라한과 팔지보살이 무심도인이며, 부처님도 또한 무심도인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 밖에 따로 무심도인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을 보고서 부처님이란 견해를 일으킴으로 인하여 망념이 없는 도리에 바로 계합하지 못한다. 처음으로 수행문에 들어선 이는 부처님의 갖가지 공덕상으로 말미암아 신심을 증장하고 또한 보리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덕에 집착하는 마음을 여의기가 어렵다. 제11장에서 보살의 지위를 차례로 나열하지 않고 맨 뒤에 무심도인에 배대하여 1천억의 삼세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수승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일이 최고로 수승한 공덕이 됨을 밝히고자 하시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지인 부동지不動智와 보광명지普光明智가 일체 범부에게도 갖추어져 있음을 믿고서 이를 체달한 이라면 유마거사와 같이 부처님과 거지에게 평등한 마음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천억의 삼세제불께 공양하는 일이 상념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며 닦음이 없고 증득할 바도 없는 이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만 못하다.”라고 한 뜻은 부동지체不動智體를 증득한 무심도인만이 상념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며 닦음이 없고 증득할 바도 없는 무심도인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무행경에 이르기를, “성상性相이 평등함을 얻으면 나도 없고 남도 없다.”라고 하시고, “여래를 뵙고도 마땅히 예경하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유마경의 아촉불품에 유마거사가 말씀하기를, “제가 몸을 관찰하기를 실상과 같이하며, 부처님을 관찰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셨다. 이 모든 말씀과 같이 중생과 부처님의 성상이 평등함을 관찰하여 실상을 증득하면 피차가 없는 것이며, 문수보살과 유마거사가 높이 거양한 불이법문을 이 한 마디로 남음이 없이 드러낸 것이다. 이 42장경의 경문을 총괄하여 결론을 지으면 다음과 같다. 처음 범부로부터 삼세의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공양을 받는 분들의 공덕에 차등이 있음을 밝혔으며, 맨 마지막의 무심도인은 공양을 올리는 이의 차별이 없는 근본 실상을 밝혔다. 이 뜻을 간단히 말하겠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본각인 근본지를 깨닫고 자기의 본각 근본지에 공양을 올리는 일이 가장 수승하다. 이 무심도인만이 모든 중생과 부처님께 평등하게 공양을 올릴 수 있음을 드러내려고 이와 같이 말씀한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무슨 허물이 있으며, 무심도인은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낙포선사는 다음과 같이 반 구절의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한 조각 흰 구름이 계곡의 입구를 막아버려
얼마나 돌아오는 새들이 저녁에 둥지를 헤매었던가.
一片白雲橫谷口 幾多歸鳥夜迷巢
위 지욱스님의 말씀 중에, “만일 일체 모든 법에서 무념과 무주와 무수와 무증의 미묘한 도리를 통달한다면, 곧 저 아래 범부로부터 위에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상념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며 닦음이 없고 증득할 바가 없는 이가 아님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시니, 이는 무슨 뜻인가? 내가 일단 무심도인이 되면 일체 중생이 다 무심도인으로 보인다. 한 중생이 정각을 성취할 때 삼세제불이 동시에 성불한다. 이는 곧 절대평등이 아닌가?
위 글을 읽고 나면 불교에서 평등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평등과 관련하여 글을 쓰는 중에 예전에 썼던 책 중에 일부를 인용하게 되었다. 인용문으로는 너무 길지만, 그런대로 읽어주시기 바란다. 다시 인용한다.
6. 찰나제삼매와 평등
신화엄경론 제8권에 경의 서분을 나누면서 네 번을 거듭 말씀한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부 경을 총괄한 서분은 세주묘엄품이고, 경의 모든 품 가운데 여러 회상에서 모두 이때에 이러하고 이러하다며 그 품의 뜻을 서술하였다. 또한 이 일부의 경이 상하에 다섯 번이나 세존께서 거주하는 보리도량의 처소를 서술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제1권의 처음에, ‘제가 이와 같이 들었나이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의 아란야법 보리도량에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셨느니라.’라고 한 것은 처음 성불한 처소가 아란야 가운데임을 밝힌 것이고, 다음 제2회 가운데, ‘그때에 세존께서 마갈제국의 아란야법 보리도량 가운데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고 보광명전에서 연화장사자좌에 앉으셨다.’라고 한 것은 본처를 옮기지 않고 보광명전에 이르러 거주하심을 밝힌 것이다. 이 이후로부터 위로 천궁에 오르면서 모두 이르기를, ‘본처를 떠나지 않고 몸이 일체 도량에 두루하셨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천상에 올라가는 것은 지위를 펼쳐서 닦아 나가게 하려는 것이며, 본처를 떠나지 않는 것은 법계의 도리를 밝힌 것으로 법성의 묘리妙理가 가고 오거나 안이나 밖이 없기 때문이며, 대지혜의 체성이 스스로 두루하기 때문이다. 다음 제40권의 십정품에 또한 이르기를, ‘그 때에 세존께서 마갈제국의 아란야법 보리도량 가운데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고 보광명전에서 모든 부처님의 찰나제삼매에 드시었다.’라고 한 것은 법계의 법신으로 정체定體를 삼으면 삼세의 체성이 없기 때문에 도솔천으로부터 신령을 내리고 열반에 드시는 일과 49년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일체 법륜을 굴리신 일이 모두 찰나 사이를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이 찰나제삼매로 시종을 원융하게 회통하므로 삼세와 고금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서술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모두 다 일시에 성불하시며, 중생의 생사까지도 또한 찰나를 옮기지 않지만 단지 중생이 망령되이 계량하여 세월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이며,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곧 태어나고 곧 죽음에 이르러도 모두 시간을 옮긴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경에 이르기를, ‘일념에 두루 한량없는 겁을 관찰하시니 가고 옴이 없으며 또한 머무름도 없도다. 이와 같이 삼세의 일을 분명히 아시므로 모든 방편을 뛰어넘어 십력을 성취했도다.’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일품의 경이 전후와 시종의 사이를 총괄하여 가고 옴이 없어서 고금의 체성이 다한 것이며, 이는 범부지로부터 일념에 발심하여 홀연히 도를 보고 십주와 십행 십회향 십지와 십일지 등 오위의 법을 닦아 나가며 성불하고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들어가는 일이 모두 찰나를 옮기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법계의 문으로 열어서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이며, 실교實敎의 일승 법계의 문에 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찰나제란 삼매의 이름으로 이를 밝힌 것이다.”
‘일념에 두루 한량없는 겁을 관찰하시니’ 이하의 게송은 광명각품에 있다. 세간의 중생은 정식情識으로 삼세를 보기 때문에 고금으로 나누어 보고 영겁을 길다고 여기고 찰나를 짧다고 여기는 연촉延促의 견해를 여의지 못하지만, 지혜가 나타나면 삼세에 들어가는데 평등하므로 이러한 견해가 없다.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동시에 게송을 설하신 것은 신심자가 자기의 묘혜로 법을 간택함이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이 게송은 이통현 장자께서 대론과 약석과 십명론 등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게송인데, 한 편의 게송으로 삼세와 고금이 없는 대각大覺의 교체를 극명克明하게 드러내었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색세계와 열 분의 지여래智如來와 열 분의 수보살이 모두 자기의 과행果行이고 법성의 대지혜이며 만행이 두루한 바임을 스스로 믿으며, 이로써 십신을 이루기 때문에 이로부터 수행하여 오위를 경과해도 이를 여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열반경 게송에 이르기를, “발심과 필경이 서로 다르지 않는데 이와 같은 발심에 먼저 마음이 어렵도다. 스스로 피안에 이르지 않고 먼저 남을 건네주니, 이 때문에 내가 초발심자에 예배하노라. 처음 발심함에 천인사天人師가 되어 성문과 연각의 경계를 뛰어넘도다.”(發心畢竟二不別 如是發心先心難 自未得度先度他 是故我禮初發心 初發以爲天人師 超勝聲聞及緣覺)라고 한 것이다. 범부가 십신심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은 범부들이 모두 스스로가 범부인 줄만 알고 자기 마음이 부동지불인 줄을 기꺼이 인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십신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십신 가운데로부터 자기 마음의 분별하는 지혜가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본 부동지불과 함께 본래 동일함을 스스로 믿음으로써 신심을 성취하며, 마음 밖에서 법을 본다면 실로 신심을 이루지 못한다. 십신심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십주의 초발심주에 들어가고 나아가 구경의 불과에 이르는 것이다. 저 삼승 가운데서는 십신심을 닦는 데에 십천겁을 경과한다고 하지만, 이 교법 가운데서는 근본지의 법계로 교체敎體를 삼기 때문에 다만 재능으로 감당하여 실제實際를 보면 곧 옳을 뿐이요 겁량劫量을 논하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보광명전에서 거듭 말씀한 뜻이 보광명지로 교체를 삼으려 하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
발심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해信解를 닦는 발심으로 다만 열 가지 신해를 닦기 때문이며, 둘은 십신이 원만한 발심으로 십주위의 처음을 초발심주라 일컫는 것이 이 때문이다. 대론에서 각수보살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신해발심을 밝혔다. “각수라 이름한 것은 문수의 묘혜로 정사正邪를 잘 간택하여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 깨달은 법으로 남을 깨닫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위의 보살은 무슨 법을 깨닫는가? 이 지위 가운데서 깨닫는 법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몸과 마음이 본래 법계임을 깨닫는 것으로 백정무염白淨無染하여 앞에 금색세계와 같음이 이것이며, 둘은 자기의 몸과 마음에 분별하는 체성이 본래 능소가 없어서 본래부터 부동지불임을 깨닫는 것이며, 셋은 자기의 마음에 정사를 잘 간택하는 묘혜가 바로 문수사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십신심의 최초에 이 삼법을 깨닫는 것을 각수라 이름하며, 곧 이 신심 가운데 잘 깨닫는 행을 각수보살이라 이름한다. 이 모두는 모름지기 자기가 행할 법문을 스스로 인식하여야 바야흐로 믿음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남에게는 그러할 분이 있지만 자기에게는 그러할 분이 없다고 믿는다면 신심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조국사께서도 또한 이 각수의 세 가지 뜻으로 십신의 입문처入門處를 삼았는데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국사께서 경북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은거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이 선문에 계합하는 뜻을 찾았으며, 3년이 지나서야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 이르러 비로소 계합하고 감격하여 경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범부가 최초 십신에 들어가는 입문처를 얻지 못했는데, 이통현 장자가 지은 신화엄경론을 열람하다가 십신초위의 각수보살에 대한 해석을 보고서 곧 그 뜻을 계득契得하였다. 각수의 해석 가운데 “십신심의 최초에 이 삼법을 깨닫는 것을 각수라 한다.”라고 하며, 보조국사도 또한 “범부가 최초 십신에 들어가는 문을 얻지 못했다.”라고 한 말씀에 의거하면 각수의 세 가지 뜻이 십신의 초위에 상당하며, 이 각수의 삼법을 해행 발심으로 해석하여 십신의 초위에 들어가는 입문처로 삼고자 한다.
삼승의 교설에서는 십신위도 보살의 수행위로 삼아 열 가지 십신의 이름이 있고 상응하는 법문도 있다. 화엄경에서는 십신위를 범부의 지위로 보기 때문에 비록 십신의 이름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또한 상응하는 법문을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제2회 초의 불명호품에 열 가지 색세계와 열 분의 지여래와 열 분의 수보살을 모두 십신의 차제에 배대할 수 있으며, 광명각품에서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의 광명을 따라 부처님의 열 가지 과덕을 찬탄한 것도 십신위를 성취한 것이며, 또한 보살문명품에서 문수사리보살이 열 분의 수보살과 문답한 법문이 모두 십신을 차례로 밝혀 놓은 것이다.
이통현 장자는 회석會釋 4권 가운데서 십신위의 법문을 총괄하여 열 가지 신문信門으로 나누었다. 전부를 다 인용하기에는 논문이 조금 길지만 수행자가 최초에 십신심을 일으키고 신만발심信滿發心을 성취하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전문을 옮기려고 한다. 이 논문이 모든 수행자에게 거울이 되어 자신이 발심한 양을 돌이켜 비추어 보고 더욱 정진하여 이 열 가지 신심과 함께 상응하게 되기를 바란다.
“첫째 현수품 가운데 범부의 지위로부터 믿음을 으뜸으로 삼는 것이니 결정코 부처의 보리 과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둘째 범부지로부터 시방에 모든 부처의 마음인 부동지가 나의 마음과 함께 다름이 없으나 단지 무명에 미혹되었음을 믿는 것이니 무명이 시방에 모든 부처의 마음과 함께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범부지로부터 시방에 모든 부처의 몸인 근본지가 나의 몸과 함께 다름이 없음을 믿는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모두가 한 법성신法性身이고 한 근본지이며, 또한 나무의 한 뿌리에 많은 가지와 이파리 등이 생기는데 인연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한 나무의 가지 위에서도 피고 지는 일이 동일하지 않음과 같기 때문이다. 넷째 범부지로부터 여래의 십주와 십행 십회향과 십지를 나도 다 남음이 없이 행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물결치듯 고해에 흘러가며 이롭지 못한 일도 오히려 행했거늘 하물며 지금에 유익한 일이 있어서 보살의 만행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섯째 범부지로부터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모두 삼매로부터 생겼던 바 나도 또한 마땅히 얻을 것을 믿는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부처의 삼매는 다 여래 자성의 방편으로 생겼던 바 나도 또한 여래의 자체에 청정한 체성을 갖추고 있어서 부처와 함께 평등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범부지로부터 시방에 부처의 모든 신통을 나도 또한 마땅히 얻을 것을 믿는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부처의 신통이 진정한 지혜를 의지하여 얻으시는데, 나도 오로지 진성의 지혜 가운데를 의지하여 번뇌가 없고 무명이 지혜를 이루므로 일체 업이 없으며, 오직 지혜와 자비만 있어서 신통변화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범부지로부터 부처의 지혜를 나도 마땅히 얻을 줄을 믿는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일체 모든 부처님이 다 범부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여덟째 범부지로부터 부처님이 대비로 두루 일체를 보호함을 나도 또한 마땅히 얻을 줄을 믿는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부처의 대비는 대원으로부터 일어나는 바 나도 또한 모든 부처와 같이 대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홉째 범부지로부터 부처의 자재를 나도 또한 마땅히 얻을 줄을 믿는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부처의 자재는 성기법문性起法門에 지신智身과 법신으로 중생계에 들어가 색진色塵에 물듦이 없이 모든 근성이 자재하신 바 나도 또한 성기여래性起如來의 지혜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열째 범부지로부터 스스로 발심하여 한없는 겁을 지나도록 공을 닦아 행이 원만하여 지위가 모든 부처와 가지런해도 일념을 옮기지 않음을 믿는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삼세에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범부의 신해로부터 시종始終에 부처의 과위에 사무치는 것이며, 위에서와 같이 열 가지 신심을 낸 자는 반드시 결정코 십신의 문을 성취하여 견고한 종성種性에 머무르므로 영원히 퇴전이 없을 것이다.”
이상의 열 가지 신심을 내고서 십신의 문을 성취한 것이 바로 신만발심信滿發心이어서 곧 초발심주에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풍산점괘風山漸卦는 나무를 의미하는 손괘巽卦와 산을 의미하는 간괘艮卦로 구성되어 있어서 산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을 상징하는 괘이다. 나무가 높은 산에서 점점 생장하는데, 군자가 이 도리를 체달하여 스스로 어진 덕을 갖추므로 풍속風俗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점괘의 초효初爻에 이르기를, “기러기가 물가로 점점 날아간다. 어린 기러기를 위태롭게 여겨 말들을 하지만 허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러기는 믿음이 있는 새로서 암수가 한번 결혼하면 사이가 좋아 홀로 되어도 정절을 변하지 않는다고 하며, 사람이 결혼할 때에 이 기러기를 예물로 쓰는 것은 이 믿음을 취하여 백년가약에 길상을 삼으려 하는 데 뜻이 있다. 이 어린 기러기도 멀리 날아보려는 꿈이 있어서 힘껏 물가로 날아가 보지만 반석에 이르기 전에 물가에 떨어지는 모습이 위태로워 편안하지 못하며, 이것은 아직 지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린 기러기가 곤경에 처하여 시비하는 말을 듣지만 속으로 간직한 군자의 뜻을 손상하지 않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대체로 사람이 근심할 바는 근시안적인 법규에 얽매어 원대한 식견을 갖추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 기러기가 초효에 원대한 꿈을 도모하지 못했다면 어찌 6효에서 하늘 멀리 운로雲路에 날아갈 수 있겠는가. 만일 추호라도 의심이 있었다면 날아보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운로는 구름이 다니는 길 곧 청천의 허공을 말한다. 이상은 점괘의 뜻이다.
본문에 이르기를, “열 가지 신심은 처음 범부가 생멸하는 색심色心으로 믿음을 내고 바로 열 가지 수승한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색세계라 이른 것이다.”라고 하고, 또한 주역의 점괘에 “기러기가 물가로 점점 날아간다.”라고 한 말씀을 인용한 것은 이 점괘의 초효에 기러기가 믿음을 가지고 물가로 날아가려고 애쓰는 믿음을 취하여 처음 도문에 들어온 자의 신심이 향상되어 감을 표법한 것이며. 또한 기러기가 순수하게 흰 백색의 색깔을 띠기 때문에 이로써 처음 범부가 생멸하는 색심으로 믿음을 내는 초신初信으로 표법한 것이다.
원각경 제7장과 제11장에 사마타와 삼마발제 선나 삼관이 있다. 명칭은 동일하지만 제7장의 삼관은 보살의 전용이고, 제11장의 삼관은 범부의 전용이다. 보살은 제7장의 삼관을 의거하여 여래의 대적멸해大寂滅海에 유희할 수 있지만, 이 삼관은 범부에게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만일 모든 보살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자 하면,”(若諸菩薩 悟淨圓覺 以淨覺心 取靜爲行, 以淨覺心 知覺心性, 以淨覺心 不取幻化) 청정한 각심이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범부는 이 청정한 각심을 얻고자 하면 제11장의 삼관에 의거하여 수행해야 한다.
화엄경의 수행차제도 또한 이와 같다. 십신만심에 이르러 곧바로 초발심주에 정각을 성취한다. 땅과 허공은 해발이 필요조건은 아니다. 바닷가 바로 위도 허공이고, 백두산 꼭대기 바로 위도 허공이다. 그렇지만 불교는 수미산 꼭대기 위를 허공으로 보고, 그 위에 있는 세계를 야마천이라 한다. 심신만심은 십신의 꼭대기이고, 그 자리가 바로 십주초심이기도 하다. 십신만심의 발심에 의거하여 일승보살은 무상정각을 성취하는 줄은 모두 안다. 그렇지만 십신보살이 처음 십신에 들어가는 문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위 글을 다시 인용한다.
대론에서 각수보살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신해발심을 밝혔다. “각수라 이름한 것은 문수의 묘혜로 정사正邪를 잘 간택하여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 깨달은 법으로 남을 깨닫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위의 보살은 무슨 법을 깨닫는가? 이 지위 가운데서 깨닫는 법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몸과 마음이 본래 법계임을 깨닫는 것으로 백정무염하여 앞에 금색세계와 같음이 이것이며, 둘은 자기의 몸과 마음에 분별하는 체성이 본래 능소가 없어서 본래부터 부동지불임을 깨닫는 것이며, 셋은 자기의 마음에 정사를 잘 간택하는 묘혜가 바로 문수사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십신심의 최초에 이 삼법을 깨닫는 것을 각수라 이름하며, 곧 이 신심 가운데 잘 깨닫는 행을 각수보살이라 이름한다. 이 모두는 모름지기 자기가 행할 법문을 스스로 인식하여야 바야흐로 믿음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남에게는 그러할 분이 있지만 자기에게는 그러할 분이 없다고 믿는다면 신심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조국사께서도 또한 이 각수의 세 가지 뜻으로 십신의 입문처를 삼았다. 나의 몸과 마음이 바로 법계 금색세계이고, 부동지불이며, 문수사리이다. 이 각수의 삼법이 십신의 초위에 들어가는 문이다. 나의 몸과 마음은 금색세계 부동지불 문수사리와 절대 평등하여 추호도 다름이 없다. 일류가 되고자 하면 반드시 자긍심이 있어야 한다. 내가 금색세계이고, 부동지불이며, 문수사리라는 믿음보다 더 크나큰 자긍심은 없다. 만일 누구라도 이와 같이 당장에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대심범부이다.
7. 결어
화엄경은 입법계품을 구경으로 보지만, 여래출현품도 또한 뒤에 있을 수 없다. 보살은 어떻게 여래의 정각 성취를 보아야 하는가? 아래와 같다.
“불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이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는, 일체 경계에 관찰하는 바가 없고, 일체 법에 평등하여 의혹하는 바가 없으며, 이변이 없고 명상이 없으며, 행동도 없고 거지도 없으며, 한량이 없고 변제도 없으며, 멀리 이변을 여의고 중도에 머무르며, 일체 문자나 언설을 벗어나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는 일체 중생의 심념으로 행하는 바 근성과 욕략 번뇌 염습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요점을 열거하여 말한다면, 여래는 일념 중에 삼세의 일체 제법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모두 알아야 하느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대해가 사천하 중에 일체중생의 색신 형상을 두루 투영시켜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같으며, 이 때문에 모두 일념을 대해로 삼는다고 말하느니라. 제불의 보리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일체중생의 심념이나 근성 욕락을 나투시는 바가 없이 두루 나투시니라. 이 때문에 이름을 제불보리라 설하시니라. 불자여, 제불의 보리는 일체 문자로 선설할 수 없고, 일체 음성으로 미칠 수 없으며, 일체 언어로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니라. 다만 응현하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열어서 보일 따름이니라.”(佛子 諸菩薩摩訶薩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成正覺 佛子 菩薩摩訶薩應知 如來成正覺 於一切義無所觀察 於法平等無所疑惑 無二無相 無行無止 無量無際 遠離二邊 住於中道 出過一切文字言說 知一切衆生心念所行根性欲樂煩惱染習 舉要言之 於一念中悉知三世一切諸法 佛子 譬如大海普能印現四天下中一切衆生色身形像 是故共說以爲大海 諸佛菩提亦復如是 普現一切衆生心念根性樂欲而無所現 是故說名諸佛菩提 佛子 諸佛菩提 一切文字所不能宣 一切音聲所不能及 一切言語所不能說 但隨所應方便開示)
해설: 둘째 보살마하살은 주어이고, 번뇌 염습까지 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에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끊었다. 여래는, 일체 경계에 관찰하는 바가 없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고, 또 일체 법에 평등하여 의혹하는 바가 없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한다. 낱낱이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는 곳이다.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한다.”라는 구절은 상하 전체를 관통한다.
요점을 열거하여 말한다면, 전후에 여래성정각(如來成正覺)이 생략되었다. “일념 중에 삼세의 일체 제법을 모두 알아야 하느니라.”(於一念中悉知三世一切諸法) 이는 전체 문장과 문맥이 상통하지 않는다. “여래는 일념 중에 삼세의 일체 제법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모두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해야 상통한다.
“제불의 보리는 일체 문자로 선설할 수 없고, 일체 음성으로 미칠 수 없으며, 일체 언어로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니라. 다만 응현하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열어서 보일 따름이니라.” 문수보살과 유마장자의 불이법문이 또한 이와 같다.
이 세간의 일체는 하나도 대대가 이님이 없다. 반드시 짝이 있다. 천자문의 천지와 현황, 우주와 홍황이 그러하지 않는가. 상하 고저 좌우 귀천 존비 노소 대소 부모 남녀 유무 생사 등등 그 대대는 끝이 없다. 이 대대는 세간의 영원한 주제이다. 그러나 또한 출세간의 입문이기도 하다. 불이법문이 그러하고, 중도가 그러하다. 그러나 중도는 평등과 같지는 않는다.
함평천지 또는 천지함평은 모두 이 차안이 피안이라 알려준다. 호남에 한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전체가 그러하다. 이전에 쓴 글에서도 평등을 무수히 언급했다. 평등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포괄한다. 정각을 성취할 때 시간과 공간이 끊어졌다.
나의 몸과 마음은 평등세계이고 부동지불이며 문수사리보살이다. 내가 이 삼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법량이 달라진다. 나의 주변도 또한 그러하다. 개개인이 모두 삼보의 주재자이다. 사람이 모이면 직위가 생긴다. 공사를 막론하고, 모든 직위자는 당인의 법량을 더욱더 크고 넓게 확장할 여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직위는 보위寶位이다. 행운아들이다. 직위에 있을 때 마음껏 뜻을 펴시라. 그러나 삼보를 여의지 마시라.
2022년 4월 15일 74세 길상묘덕 씀
첫댓글 간산으로 읽었으매 조용한 시간에 정독할 요량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