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대교구
변화의 원리 (고준석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사순 제2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의 빛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가 변화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 즉 복음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 자신이 변화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어떠한 기쁨도 부활의 영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는지.”
참 마음에 와 닿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을,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어쩌면 세상은 변화하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을 먼저 변화하지 않고 먼저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위의 묘비명의 내용처럼 세상은 오히려 변화되지 않고 아픔만이 가득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세상 변화의 진정한 원리는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먼저 나를 바꾸는 것. 사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많습니다. 나의 작은 습관과 태도에서부터 언어에 이르기까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나를 바꾸자 놀랍게도 가족들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위 묘비명의 희망처럼 어쩌면 세상 역시 변화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에 항상 하는 말, 회개, 이 말은 항상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랑만이 인간과 세상을 변화시킬 있습니다.”
2. 대전교구
거룩한 변모 (김명현 미카엘 신부 / 문화동 주임)SPAN>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사도는 타볼산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그때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성부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모세는 구약시대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엘리야는 모든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리하여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구약의 율법과 그동안의 모든 예언의 말씀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거룩하신 예수님의 본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럼 왜 이렇게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일까? 예수님은 자신이 장차 수난과 죽음을 당하실 것을 미리 아시고 연약하고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어떤 확신을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예수님의 의도와는 달리 특유의 급하고 경솔한 행동을 보인다. 베드로는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예수님께 말한다.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예수님을,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하고 말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이 너무나 황홀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야기한 것이다.
베드로의 이 말에는 이 황홀하고 행복한 순간에 안주하고 싶은 욕구가 숨겨져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앞두고 계신다.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고난의 길을 걸어가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의 이 영광에 그냥 머물고 싶었으며 예수님이 가실 수난의 길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이런 심정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과 인내의 시간보다는 영광의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학생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길 원하지만 그러기위해서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꺼려하면서도 영광의 시간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부활은 반드시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영광은 반드시 고통의 쓴 잔을 마신 사람에게 돌아온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죽음의 길로 들어 가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달콤하고도 황홀한 위로이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에게도 그런 위로를 달라고 청해 보면 어떨까?
3. 춘천교구
약속을 지키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장성준 안셀모 신부 / 거진성당 주임)
사순 제2주일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며 하느님과 약속했던 우리들의 다짐이 작심삼일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요?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지키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약속입니다.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 할지라도 성실히 지켜나가는 모습에서 상호간의 믿음과 신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자녀로서 무엇인가 세상을 구원할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충실한 신앙인,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이런 작은 믿음들이 모여서 큰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하느님 나라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게 됩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하늘에서 울려퍼지는 소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구원 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길, 지름길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과 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지 못할 일들을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하느님과 했던 다짐, 약속 이런 것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과 기도를 약속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대화합니다. 또 그 대화를 통해 자신이 가야할 길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길대로 나아가는 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이요, 길을 알고는 있으나 그 길대로 나아가지 않고 방황하는 이가 사랑받지 못하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가 자신의 길을 올바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낀 그 시간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의 고통없이 그 행복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에서 제자리에 선다라는 것은 단순한 ‘정지’ 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나라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구원 없는 신앙’ 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안주할 자리를 찾는 신앙인이 아니라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게 해 주십사 기도하는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4. 인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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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원교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철구 요셉 신부 / 능곡동성가정성당 주임)
수원.pdf
6. 원주교구
거룩함과 영광에 대한 오해 (고정배 요셉 신부)
원주.pdf
7. 의정부교구
예수님 닮기 (허영민 세례자요한 신부 / 5지구장 겸 화정동 주임)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고 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건강을 위해서, 어떤 이들은 명상을 위해서. 성서에서 산은 하느님의 영
이 머무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고 기도하는 땅이다.
예수님도 당신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는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오르신다. 오늘 예수님의 산행은 뭔가 색다르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평가받는 모세와 예언자 중에 예언자 엘리야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 무척이나 놀랐다. 베드로가 나서서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에게 드리고 싶다는 말을 쏟아내었다. 천상의 세계를 이미 보고 있다고 생각한 베드로는 바로 그 타볼산에서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타볼산이 아니라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산 밑에 있는 세상 안에서 이루어가야 함을 아신다. 지금 하느님께서 예수님이 머물기를 바라는 곳은 하얀 옷을 입고 유유자적 모세와 엘리야와 담화를 나누는 산 위가 아니다.
로마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이 발을 붙이고 살면서 웃고 울고 있는 이 땅이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했던 그곳을 떠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예수님께서 선택한 세상을 향한 떠남과 여정은 사람과 세상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었다. 예수님이 거룩한 변모에 도취되어 산 위에 초막을 짓고 머물렀다면 사랑과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도 부활의 시간도 허락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정상에 오르기보다 낮추어 내려오기가 더 어렵다. 예수님의 거룩함과 성실함은 하얗게 빛나는 옷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향해 바친 피땀어린 당신의 몸과 사랑 안에서 빛을 발했다.
삶이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일어나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골고타의 십자가를 향해 가야한다. 지고 가기 힘들다면 꼭 끌어안고 가야한다. 바로 그곳에서 내가 예수님의 충실함과 성실함으로 변모할 수 있는 그래서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믿음의 여행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그러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 분명 주님은 지금 삶의 나태함 속에 머물지 않고 떠남 속에 있는 나의 십자가 안에서 큰 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할 것이다.
숨가쁘게 찾아 헤매는 헐떡임조차 소중한 삶의 한 빛깔임을 깨닫는다면 나는 계속 일어나 하늘을 향해 걸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가능하다면 서로가 다른 이의 십자가를 나누어가지고 갈 수 있다면 더 멋진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닮기를 간절히 원하고 예수님의 길을 한걸음씩 걸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거룩한 변모를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8. 부산교구
우릐 본 모습을 찾도록 노력합시다 (오종섭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지난 사순 제1주일에 들었던‘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지녀야 할 마음 자세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사
순 제2주일에 듣는‘새하얗게 빛나는’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아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그리며 살아야 하는
지 그 목표를 드러냅니다. 즉, 사순시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자신의 잘못이나 지은 죄를 돌아보며 자중하는 시기가 아니라, 그 어느 때
보다 예수님의 새하얗게 빛나는 본 모습을 바라보며 그분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본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만 ‘새하얗게 빛나는’본모습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겨 ‘당신의 모습대로’ 만들어 내셨다면, 우리들의 본모습도 역시나 오늘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새하얗게 빛이 날’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본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본모습을 깨닫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들은 원래‘새하얗게 빛나는’존재들
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꼴을 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을 믿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하느님을 닮아 새하얗게 빛나는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음을 예수님은 보여 주십니다.
둘째,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새하얗게 빛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닮아 새하얗게 빛난다는 것을, 마치 우리가 영어를 배우거나 새 가전제품을 사듯이 우리에게 없는 것을 내 바깥에서 배우고, 구매해서 내 것으로 삼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방치된 창고를 정리하듯이, 내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게 뭐가 있는지, 쓸데없이 모아두고 있는 것들은 없는지 내면을 잘 살펴, 버리고 정리하고 깨끗이 닦아냄으로써 가능합니다. 원래 모습이란 말 그대로 본모습이라 바깥에서 찾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군가가 가져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새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들이 원래 간직하고 있던 본모습을 찾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9. 마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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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안동교구
소중한 기억 (사공균 알로이시오 신부 / 남성동성당 보좌)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잊히는 것에 대해 저항하며 살아갑니다. 잊히는 소중한 것을 간직하는 방법 중 하나는 ‘기억’입니다(P. M. Zulehner).
엄마, 아빠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놓치고 싶지 않은 현재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한 시간이 잊히는 것을 붙잡기 위해 기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기억했을 때 아이는 행복한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기억은 좀 더 근원적인 것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사건’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기억하며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바로 오늘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소개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며 황홀경에 빠집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지금 그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체 예수님께 그곳에 머물기를 청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예수님께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시자 지금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은 훗날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하는 동안 마주하게 될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제자들은 아쉽지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예수님을 따라 산을 내려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이 부활을 향해 힘차게 발돋움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는 산에서 내려와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힘 있게 증언합니다.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이처럼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사람들 앞에서 힘 있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기억인 것입니다. 아울러 언젠가 닥치게 될 수난과 죽음 앞에서도 그들을 붙잡아 줄 하느님의 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유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되풀이 되고 있는 너무나 소중한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거룩한 변모사건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갈 때, 우리들 또한 수난과 죽음 앞에서 당당히 신앙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서는 부활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 모두를 부활로 나아가게 하는 희망의 표지이며 소중한 기억임을 잊지 맙시다.
11. 광주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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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주교구
산에 오르면서 (김광태 야고보 신부 / 동산동 성당 주임)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머리가 지근거릴 때,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지 앞이 막막할 때, 가까운 산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땀
이 나기 시작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다 정상에 오르면 서늘한 봄바람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다. 몸이 나른한 것도 기분이 좋고, 몇 번의 큰 호흡만으로도 몸속의 나쁜 기운을 모두 몰아낸 것 같아 새로운 활력을 느낀다. 탁 트인 도시의 전경은 또 어떤가. 지나쳐온 지저분한 골목길마저 아름답게 느껴지고, 사람과 자동차, 커다란 건물마저 조그맣게 보인다. 머리 아프게 만들던 일들까지 덩달아 별거 아닌 듯 여겨진다.
산이 하늘에 좀 더 가까워서일까? 예수님께서도 산에 자주 오르셨다.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고 (마태 14,23; 루카 6,12), 열 두 제자도 산 위에서 뽑으셨고(루카 6,13), 진복팔단도 산 위에서 선포하셨고(마태 5,1),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 산 위에서 기도하시는 중에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하셨다(마르 9,2).
하지만 끝이 없이 펼쳐지는 하늘은 실제로는 땅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개를 들지 못하다 보니,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하늘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뿐이다. 산 위에 올라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과 다른 하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집착하는 문제를 떠나 눈을 들기 시작하면서 무의미하던 하늘을 달리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으면 구태여 제자들처럼 산 위에 머물기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내가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지고, 내가 안고 씨름하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어떻게 하면 다가오는 위기를 피해볼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아브라함처럼 모든 걸 하늘에 맡기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해 보자. 결국 모든 것은“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창세 22,14). 예수님처럼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주님이 함께 계시니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이다(시편 23,4).
13. 제주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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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군종교구
부활의 영광은 고통과 죽음 뒤에 따라옵니다 (이효석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혹시 우리 신자분들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대해서 후회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토요일 밤 새워 힘들게 근무를 섰는데 주일
미사가 의무라서 어쩔 수 없이 성당에 미사 참례를 한다거나,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대충 거짓말해서 쉽게 넘어갈 수도 있는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거짓말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할 때 저는 첫 번째 시간에 꼭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오늘 이곳에 오신 분들께서는 왜 하느님을 믿으려고 하십니까?” 이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하시는데요, 대부분의 대답은 크게 두 가지로 모입니다. 첫 번째는 ‘지금 조금 더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 이고 두 번째는 ‘죽어서 천당 가려고’ 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런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데 그래도 열심히 하느님 믿으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부분의 예비신자들이 웃음으로 답을 하는데 몇 번 예비자 교리를 하고나니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사순 두 번째 주일인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아름다고 멋있게
변하셨는지 복음서는 제자들의 목격 장면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영광
스러운 모습, 아름다운 모습만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전부일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원죄로 인해 인간은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죽음이라는 고통이 우리 가운데 들어왔
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상태에 놓인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구원자로 보내주셨고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죄에서 해방되며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방법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당신자신이 십자가에서 처절히 고통 받으며 죽으심으로서 부활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 역시 죽고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부활 모습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지만 사실 그 뒤편에는 그분의 고통과 죽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 그리고 장병 여러분!
부활이라는 영광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모습의 신앙인으로 살아가느냐?’ 가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의 희생과 고통은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토요일 꼬박 근무를 서서 몸과 마음이 지쳐 힘이 들지만 일주일 동안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일미사에 참여할 때 지금의 고통과 수고는 반드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몇 곱절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15. 대구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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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렉시오 디비나
(반명순 수녀 /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제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사순절 둘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높은 산 위에 올라간 세 제자 앞에서 변모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첫 번째로 예고하신 일(마르 8,3133) 뒤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제자들을 깊은 위기에 빠지게 하는데 특히 가장 큰 혼란에 빠진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제자들 앞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변모(9,24), 변모 앞에서 베드로가 보이는 반응(9,56), 변모의 의미를 설명하는 하늘의 말씀(9,78), 본 것에 대해 비밀을 지키는 것(9,910)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변모의 이야기는 ‘엿새 뒤에’라는 시간 묘사로 시작됩니다.
5절에서 베드로가 초막을 지어드리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엿새’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주신 율법의 선물과 40년 동안 사막에서 지냈던 과거를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장막에서 지내던 장막절 축제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2절) 이들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처음 시작하실 때 거의 같은 시기에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 그룹으로 모두 가난한 어부들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으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할 때도 이 세 제자는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14,33)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는데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전합니다.(9,23) 아마도 기도 중에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다가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루카 9,29) 예수님의 빛나는 옷은 모세가 시나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만나 율법을 받을 때 얼굴의 살갗이 빛나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탈출 34,2935) 변모하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엘리야와 모세는 모두 하느님의 산인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누는 축복받은 사람들인데(탈출 19,34; 1열왕 19,913) 그들은 예수님이 완성할 율법(모세)과 예언서(엘리야)를 의인화한 인물들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나아가 그들은 새로운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인물들이기도 합니다.(말라 3,2224)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 베드로의 감격에 찬 반응에 대해 하늘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방식으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권고합니다.(마르 9,7) 그 소리 후 예수님 혼자만 남는데 그분은 완벽하고 결정적인 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들한테 당신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마르코복음 전체에서 줄곧 강조되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함구령과 관계됩니다. 예수님은 마귀들(1,25.34; 3,12), 그분이 치유한 사람들(1,44; 5,43; 7,36; 8,26), 심지어는 사도들(8,30)한테도 침묵을 명하십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그분 자신의 이상과 크게 대조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이스라엘 땅 안에서 그분은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분의 사명에 대해 잘못되고 위험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결정적으로 영광 안에 들어가기 전 고통 당하고 죽어야 하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가 복음서를 쓰던 70년대에 십자가는 유다인한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데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가 걸림돌도 어리석음도 아니고 하느님의 힘과 지혜가 드러나는 장소라는 것을 사람들한테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1코린 1,2231) 70년대에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만 문제시되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 상황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고통을 거쳐 영광에 이르는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이야기이자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십자가를 거쳐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우리 자신을 돕는 이야기입니다.
묵상(Meditatio)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제가 어떻게 이 지상에 살면서 당신처럼 빛나게 변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충실하게 당신이 날마다 제게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제가 날마다 겪는 온갖 종류의 체험들, 특히 고통과 쓰라림의 체험을 거쳐 영광에 이르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당신 말씀이 저를 살리신다는 것 이것이 고통 가운데 제 위로입니다.”(시편 119,50)
기도(Oratio)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산 이들의 땅에서.(시편 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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