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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미국 이민가서 야구를 시작한 커티스 정은 한국 프로야구 2군과 다저스 클럽하우스 직원,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 투수 코치 등 다양한 경험을 거쳐 현재 로이스터 감독의 특별 보좌로 일하고 있습니다. ⓒ민기자닷컴 |
그런데 그가 3년 전 돌연 롯데 자이언츠의 신임 감독 제리 로이스터의 특별보좌관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분신처럼 로이스터 감독의 곁에서 통역은 물론 그의 한국 생활을 도우면서 롯데의 3연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사직 구장 더그아웃에서 커티스 정(한국명 정윤현 38)을 만나 그의 야구 인생을 들어봤습니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할지, 우선 한국에서 태어났나.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월생이라 띠는 돼지띠다.
-어려서부터 야구를 했나.
▶아니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인 81년에 미국에 식구가 다 이민갔는데 야구하기에는 좀 늦은 편이었다. 다른 애들은 모두 6,7세부터 시작하는데 나는 13세부터 시작했다.
-어디로 이민을 갔는지.
▶LA로 갔다. 코리안 타운에서 1년 살다가 인근 글렌데일로 이사했다. 계속 LA에서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칼스테이드 LA 대학까지. 거기서 야구를 했으니까.
-그럼 중학교 1학년부터 야구를 한 셈인데 미국 중학교는 야구팀이 없는데.
▶동네 클럽 팀에서 했다. 실은 가장 친했던 친구가 야구광이었다. 조나단 스트라우스라고 그 친구에 끌려가서 YMCA 리그에서 야구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꿔 놓은 셈이다. 그러다가 글렌데일 고교에서 계속 야구를 했고, LA 주립대에서도 선수를 했다.
-포지션은 무엇을 했나.
▶다 했다. 야구하면서 포수만 빼고 다 해봤다. 외야보다는 내야를 더 좋아했고, 투수를 주로 했다. 프로 선수도 투수로 됐으니까. 유격수와 3루수, 1루도 보고 그랬다.
-야구를 아주 잘 했던 모양이다.
▶아주 잘했다니 보다는 이것저것 조금씩 하는 그런 사람, 솔직히 나는 하나만 아주 잘 했으면 좋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저 조금씩 잘하는 정도였다.
-대학까지 미국에서 야구를 했는데 어떻게 한국 프로에 오게 됐나.
▶대학을 마쳤는데 MLB 지명을 받지 못해 독립리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한국 문화방송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아버지 친구 분이 광주 MBC에서 일하고 계셨고, 그 분이 지금 삼성의 김평호 코치님과 친분이 계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 분이 친했는데 아버지는 다 똑같지 않나. 아들이 미국에서 야구를 잘 한다고 자랑을 하시자 당시 해태 스카우트이던 김코치님이 트라이 아웃을 하게 와보라고 하셨다. 그때가 95년이었다.
-그래서 테스트를 받으러 비행기를 타고 온 건가.
▶그렇다, 나는 너무 좋았다. 그런데 테스트 전날 무등 구장에 갔다. 그날 더블헤더가 있었다. 그런데 첫 경기 선발 투수가 선동렬, 두 번째 선발 투수가 이강철이었다. 경기를 보면서 속으로 ‘오 마이 갓!’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도 이런 투수들이 있다니.
-상당히 자신 있게 왔었을 텐데.
▶한국 야구를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사실 한국 야구에 대해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전성기 ·때 선 감독님은 당연히 메이저리그급 투수였고, 이강철 코치님도 볼배합이나 생소한 구위 등 충분히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정도의 투수였다. 두 투수를 보고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 때문에 테스트가 더 힘들었던 것은 아닌가. (웃음)
▶다음날 테스트를 보는데 옆에서 송유석 선배님이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처음엔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았는데 옆에서 던지는 투수의 공이 빵빵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투지도 생기고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더욱 열심히 던진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불펜 두 번 던지고 같이 연습하면서 배팅볼 던지고 하면서 통과됐다.
-그러면서 2군에서 뛰기 시작했나.
▶2년 넘게 공만 줍다 말았지, 뭐. (웃음) 95년 반 시즌하고 96년, 97년 시즌 마치고 그만두게 됐다.
-1군에는 한 번도 못 갔나.
▶등록은 한 번 했었다. 지금도 야구 인생에 제일 아쉬운 것이 1군에서 한 번도 던지지 못한 것이다. 97년도에 등록했던 것 같다. 나와 정말 친한 이대진 선수가 그 때 방위였다. 그때는 홈에서만 뛸 수 있으니까 원정 때 내가 등록을 했는데 홈으로 가서 대진이가 다시 들어와 나는 빠지고 말았다. 정말 아쉬웠다.
-결국 1군에서 던질 기회는 없었던 거네.
▶내가 스카우트도 해보고 야구에 대해 많이 배우고 하니까 나는 안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수준이라면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은 대부분 있다. 그런데 나는 집중력이 떨어졌다. 2군에서 하루는 완투도 하고, 또 하루는 2,3이닝도 못 버티고 내려오고, 제구가 될 때는 기가 막히게 되고, 안 될 때는 스크라이크도 잘 못 던지고 했으니 말이다.
골프를 해보면 마찬가지인데 잘 되는 날은 정말 잘 되다가 안 될 때는 정말 못 한다. 내가 이것 때문에 야구 선수로 성공을 못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 97년 시즌이 끝나고 야구는 포기한 건가.
▶솔직히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었다. 처음 밝히는데 당시 영주권자였기 때문에 계속 한국에 머무는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선수라면 구단이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는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이 쉽지 않았고 결국 다시 미국으로 갔다.
통역을 하면서 심판에게 항의를 할 때가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모두 흥분해서 소리치는 상황이나 통역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후에도 야구 쪽으로 계속 일을 했는데.
▶미국에 돌아가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내가 생각해도 당시 선택을 잘 했었던 것 같다. 박찬호도 다저스에서 아주 잘하고 있었고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야구 경험도 있고 영어, 한국어도 하고 한국 프로야구 경험도 있고. 스카우트를 하든 선수 개발을 하든 나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야구단에 들어가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대학원에 가서 스포츠 경영학 공부를 했다. 2년 동안 해서 석사를 따고 2000년 5월에 졸업하고 바로 다저스에 취직했다.
-그때 내가 특파원 시절 우리가 처음 만난 거네.
▶그렇다. 그 때 클럽하우스 직원으로 취직을 했으니까.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클럽하우스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진짜 프로 야구 선수하고 대학원 졸업하고 나서 자존심을 완전히 버리고 들어갔다. 빨래 개고 더러운 것들 치우고 하면서 최저 임금을 받았다. 한 시간에 5달러25센트를 받았다.
-어떻게 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나.
▶내가 그 일을 하면 일단 메이저리그 구단에 발을 디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은 대학원을 졸업할 때 캐나다에 있는 구단만 빼고 MLB 28개 구단에 모두 이력서를 보냈다. 근데 유일하게 다저스에서 동양담당부장인 에이시 코로기에게 그게 전달이 됐던 모양이다.
1999년 여름에도 에이시와 한 번 만나 어떻게 그 길을 가게 됐는지 등을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인턴십을 구한다고 다저스에 연락을 했다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에 나를 잘 봤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졸업하고 다시 이력서를 보냈는데 에이시가 그것을 보고 나를 안다고 추천했고, 한국 선수인 박찬호도 있고 해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며 클럽하우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암만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다.
▶솔직히 몸 더러워지고 어려운 일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이민 간 사람들은 누구나 고생을 한다, 우리 부모님도 세탁소를 운영하셨고 나도 어려서부터 도우면서 많은 일을 했다.
그런데 정말 힘들었던 것은 선수들이 출근하고 라커에 들어와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가서 운동하고 하는 것이 너무 부러운 것이었다. 일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나도 뛰고 싶다는 그 마음이 정말 제일 힘들었다. 어려서부터 다저스 팬이었고 다저스에서 뛰는 것이 꿈이었는데, 불과 2년 전까지 나도 선수였는데 선수들을 지켜보면서 일만 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그러다가 아시아 담당 부서로 옮긴 건가.
▶그래도 다 참고 반 시즌 동안에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다가 2001년부터 아시안 담당 부서로 올라가게 됐다. 너무 고마운 것이 당시 클럽하우스 책임자이던 데이빗 라이트씨에게 정말 고맙다. 에이시가 나에게 대해 물어보자 우리 팀이 우승하려면 커티스 같은 사람이 팀에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물론 정말 열심히 했지만 너무도 고마웠다. 에이시와도 이미 인연이 있었고 그래서 2001년에 에이시 부장 보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한국 담당도 하고 나중에 아시아 스카우트 담당도 하고 투수 코치도 해보고.
-투수 코치라니? 어디서 한 건가.
▶2003년도에 했었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는데 갑자기 그렇게 됐다. 갑자기 마이너리그에서 투수 코치가 공석에 생겼다. 그런데 내가 투수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팀에서 에이시에게 부탁해서 나를 잠시 빌려 달라고 한 셈이었다. 그래서 베로 비치 다저타운에서 익스텐디드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어린 선수들과 땀을 흘릴 기회가 있었다.
-그건 정말 특이한 경험인데.
▶그런 점에서 야구 쪽으로 특이한 경험이 많았던 것 같다. 미국 표현으로는 ‘많은 모자를 써본다. (wear a lot of hats)’는 것이 있는데 이 경험도 해 보고, 저 경험도 해볼 기회가 계속 있었다. 아시아 부서에서는 마케팅도 하고 홍보도 하고 선수 개발도 하고 통역도 하고 비자 문제도 처리하고.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클럽하우스 일한 것도 정말 많은 것을 배운 좋은 경험이었고, 코치까지 했으니까. 정말 운이 좋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다저스에서 그렇게 잘 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한국행을 선택한 건가. 다저스 일을 그만둬야했을 텐데.
▶그 때 하는 일도 즐거웠고 2007년까지는 한국, 일본, 대만도 자주 다지고 스카우트하고 열심히 했다. 그런데 2003년에 코치했을 때 로이스터 감독님이 마이너리그 내야수비 총 담당이었다. 그때는 같은 코치니까 동료였다. (웃음)
그때 친하게 됐는데 2007년 겨울에 롯데가 접촉을 했을 때 로이스터 감독이 내게 전화를 했다. 한국 야구에 대해 이이기를 해달라고 했고, 많은 조언을 하면서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리고 통역도 몇 명을 추천해줬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일이 잘 안 됐는데, 롯데 측도 그렇고 로이스터 감독도 좋다 해서 생각지도 않게 내게 통역 제안이 들어왔다.
-그럼 다저스 일은 그만 두어야 하지 않았나.
▶그렇다. 그래서 모험이었고 처음엔 2년 계약을 원했지만 그건 안 됐다. 그래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결정했고, 지금은 아주 잘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로이스터 감독님 곁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운다. 경기 운영을 통역인 나를 통해 해야 하니까 야구의 그런 모든 것을 배우고 있다. 한 시즌에 133경기, 그러면 3년째니까 거의 400 경기에서 수많은 경우를 겪으면서 야구인으로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선수 출신은 역시 유니폼을 입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또 다시 느끼는 건데 유니폼 입고 다른 선수들, 야구인들과 매일 어울린다는 것이 큰 행복이다. 여긴 특히 모두 형제 같고 가족 같으니까, 그런 게 진짜 그리웠었고 다시 느끼니까 너무 좋다,
특히 한국이니까 더 정이 있고, 한국 회사에서는 처음 일하는 건데 한국 문화와 언어, 음식, 정 그런 것을 다 배우니까 이 직업이 또 내 인생을 바꾼 것이다.
-예전보다 한국말도 훨씬 잘 한다.
▶너무 많이 늘었다. (웃음) 5년 전이나 10년 전이라면 사실 한국말이 서툴러서 이 일을 못했을 거다. 그런데 아시아 담당하면서 좀 늘었다가 이번에 통역을 하면서 정말 한국말이 많이 늘어서 나도 신기할 정도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야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커티스 정은 이제 아시아 야구에 관한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최고 전문가로 메이저리그 구단의 눈길을 받는 입장입니다. ⓒ민기자닷컴
-다저스의 직장을 포기하고 온 것을 후회한 적은 없나.
▶전혀, 한 번도 없다. 야구인으로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성장했다고 그래야 할까. 그리고 아시아 야구, 한국 야구로는 전문가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또 나를 필요로 하는 구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사는 것도 너무 좋다. 이제는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직 미혼으로 아는데 시간이 없는 건가. (웃음)
▶아니, 꼭 시간이 없어서는 아닌데. (웃음) 아직 그쪽으로는 인연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노코멘트 하겠다. (웃음)
-혼자 살면 식사 등은 어떻게 하나.
▶전혀 문제없다. 한국 음식 너무 좋아하고 팀이랑 함께 하기도 하고, 또 배달이 너무 잘 돼 있으니까. (웃음)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즐기면서 해먹기도 한다. 원정을 많이 가니까 자주 못하지만.
-통역을 할 때보면 늘 적어서 하는 것이 인상적이라는 팬이 많다.
▶통역을 그렇게 배웠다. 말하는 사람이 언제 끊을지 모르니까 때론 길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중요 포인트나 단어를 써 놓으면 도움이 되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꼭 적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단에서는 커티스를 뭐라고 부르는지 궁금하다는데.
▶형, 선배님, 아니면 선배들은 커티스야 뭐 그렇게 부른다. 정말 가족같고 미국하고는 진짜 다르다. (웃음)
-항의하고 싸울 때는 어떻게 통역하는지, 아주 어려울 것 같다.
▶이런 질문은 가끔 받는데 사실 제일 어렵다. 감독님은 이제 통역할 때 호흡이 잘 맞는데 흥분하면 그런 것 없다. 그냥 인터뷰할 때도 오랫동안 말이 길어지면 흥분 했구나 알 수 있다.
항의할 때는 나한테 틈을 안 준다. 감독님이 막 소리 지르고 그러면 심판은 나한테 뭔지 이야기를 해보라고 그런다. 그러면 말 하려고 하면 어떤 때는 감독님은 말 다 해버리고 들어가자며 돌아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적응도 많이 했고, 감독님의 감정을 담아 나도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실제로 나도 화가 나기도 하고.
-통역하면서 역시 그 때가 가장 어려운가.
▶그럴 때도 어렵고 또 야구가 아닌 자리에서 통역을 할 때도 어렵다. 예를 들어 첫 해에 부산 시장을 만나서 갔을 때라든지, 아니면 법적이나 경제적인 야구 외의 다른 토픽을 이야기할 때 그러면 아무래도 한국말 단어가 짧아 어렵다. 그래서 강의를 하러 간다든지 하면 진짜 긴장한다.
-통역은 전문을 다 하나, 아니면 요약해서 하나.
▶가능하면 모두 다 하려고 노력한다. 나를 통해서 정보와 지식을 주고받고 나만 믿고 하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전달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다 통역하지 않으면 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롯데 팬들이 로이스터 감독 유임을 지지하는 신문 광고를 냈다. 그에 대해 물어보니까 로이스터 감독이 눈물이 핑 돌던데, 소감이 어땠나.
▶정말 대단하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런 것은 본적이 없다. 팬들이 어렵게 번 돈을 그렇게 스스로 모아서 감독님을 위한 광고를 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감독님도 정말 감동하셨고, 미국의 친지들에게 광고를 찍어서 보내기도 하셨다.
-내년에는 재계약이 어떨 것 같은가.
▶내 입장에서는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3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나가고 3년 연속 100만 관중도 돌파하고 우리 야구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다. 그러나 구단에서도 또 더 큰 욕심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어떤 식이든 야구와 함께 할 것이다. 한국 구단에서 일하고 한국에서 사는 것도 재미있다. 코치 욕심도 조금 나기도 한다. 그런 기회가 온다면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으로 돌아가서 미국 구단에서 아시아 쪽 일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야구와 함께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해 큰 걱정은 없겠다. (웃음)
▶그래도 걱정이다. 항상 계약할 때까지는 걱정하는 것 아닌가. (웃음) 그래도 야구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 13살 때 친구를 따라간 것이 이렇게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 친구도 양키스에서 마이너에서 포수로 잠깐 있다가 페퍼다인 대학 팀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지금 당장 꿈이 있다면.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하는 것을 보고 싶다. 2008년에 하는 것을 보고 작년에 하는 것을 보고 또 올해 보면 선수들이 감독님이 시도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따라주고 있다. 솔직히 태도를 바꿔야 하는데 정말 많이 변했다. 앞으로 2,3년 내에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멤버로도 포스트 시즌에 가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본다.
-긴 시간 고맙다. 남은 야구 인생이 잘 펼쳐지길 바란다.
▶천만에, 나도 고맙고 즐거웠다. 자이언츠 응원 많이 해주시고, 나도 앞으로 오래도록 야구와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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