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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3.火. 맑음
07월01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3.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무전여행 열풍熱風은 ’70년대에 들어서도 다소간 변형이 된 상태로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무전여행無錢旅行의 처음 의도야 젊은 청춘들이 젊음과 열정 하나만 믿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내 나라의 현실과 아름다움, 그리고 다양하고도 치열한 삶의 현장을 직접 체험해보자는 의도였을 터이고, 또 그 시기의 우리 시골과 농촌을 비롯한 여타지역들의 인심이 후덕하고 맑아서 설사設使 모르는 이방인이 불쑥 찾아오더라도 환영하면서 음식을 나누어먹고 잠자리를 내주었으니 돈 한 푼 들지 않는 무전여행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골과 농촌 어르신들께서야 나라의 미래가 될 자식 같은 청춘들이 사서 고생을 하는 태도마저 사랑스럽고 대견해보이니 등을 다독여주면서 밥상을 함께하고 잠자리를 보살펴 주는 일이 마음 든든하고 흐뭇했을 것입니다. 본래 여행이란 유전여행有錢旅行이 당연한 것이었으나 이러저런 사회적 여건과 분위기에 편승해서 아무래도 경제적 약자인 학생들이나 젊은이들 사이에서 무전여행을 의도意圖하거나 즐기는 경우가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학만 시작되면 너도나도 무전여행을 떠난다면서 집중적으로 한적한 시골이나 농촌으로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현지인 입장에서는 시시때때로 불편과 불안을 감수해야했고, 상황에 따라서는 심각한 경제적, 정신적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 분위기가 슬슬 이제 무전여행을 자제해달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낯선 타인이나 이방인의 출현에 활짝 웃으면서 반가워하며 환영의 손을 내밀던 농촌사람들도 이제 점차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면서 예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전여행의 최대 매력인 ‘돈’을 전혀 들이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들까지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전여행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가 ‘70년경이었습니다. 나도 무전여행에 대한 어슴프레한 동경憧憬이 있어서 무전여행을 다녀온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밤새워 계획도 짜보고 했으나 마음 맞는 친구들과 팀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아 아쉽게도 중학생 시절은 그렇게 보내야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고등학생이 되자 갑자기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고 또 주변에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하나둘 나타나서 그렇다면 올 여름방학에는 무전여행을 한번 시도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방학이 다가오자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팀까지 결성이 되었는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욕심을 부려 무전여행 목적지가 삼다도三多島인 제주도라서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아야했습니다. 물론 무전여행이라는 말을 쏙 뺏어도 한두 명 친구는 제주도 여행 허락을 받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해외海外인 제주도까지 처음부터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당장 제주도를 들고나는 최소한 배 삯 정도는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시골도 아니고 물설고, 낯설고, 말도 설고, 말까지 선 제주도에서 무전여행을 하게 되면 무엇이 제일 필요할까 하고 다섯 개의 둥근 까까머리를 맞대고 연구해본 끝에 나온 결론이라면 역시 ’돈‘ 이었습니다. 그래서 배 삯을 포함해서 최소한의 교통비와 쌀과 단무지와 고추장과 꽁치통조림을 가져가되 텐트와 침낭을 가져가서 잠자리는 야외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식사는 밥을 해서 먹도록 하고 웬만하면 제주도를 걸어서 돌아다니되 특별한 경우에만 버스를 타기로 계획을 짰습니다. 뭐 그렇게 바다건너 여다女多의 제주도와 타협妥協(타당하면 협조한다는 의미)을 하다보니까 글쎄요 무전여행이랄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풍족하고 럭셔리한 펑펑~ 유전여행도 결코 아닌, 꼭 명칭을 붙여보자면 무전無錢을 빙자憑藉한 유전여행有錢旅行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는 했지만 열여섯 청춘의 까까머리들은 매우 행복했고, 학기말성적과 부모님의 관대함은 언제나 비례한다는 ’원판불변의 법칙‘ 만큼 중요한 ’성적불변의 법칙‘을 잊지 않고 열심히 공부까지 해서 제주도 무전여행을 위한 물샐 틈 없는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차근차근 제주도 무전여행에 필요한 장비와 물건들을 준비하고 사야했습니다. 장비에는 공동장비가 있고 개인장비가 있습니다. 다섯 명이 함께 몰려다니면서 배낭과 코펠도 구입하고 목적지가 제주도인 만큼 물안경이나 수영복도 골랐습니다. 제주도는 태풍도 자주 지나가는 지역이라 그렇다면 걸어 다니기 위해서는 운동화도 새로 사야했고, 혹시 호우豪雨를 대비해서 판초 우의雨衣도 장만해야 했습니다. 양동시장으로 가서 군용 A텐트를 구입하고 폴대와 팩도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텐트 바닥에 깔 비닐과 후레쉬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몰려다니면서 돈을 쓰다보니까 무전여행이 준비 기간부터 뭔지 변형이 되어간다는 난삽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으나 속담에 ‘거지도 입은 거지가 잘 얻어먹는다.’는 말을 굳게 믿고 무전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사고, 또 사고 결국 무진장無盡藏 사야했습니다. 그렇게 열성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제주도 무전여행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집집마다 학기말 성적표가 날아왔습니다. ‘준비된 의도意圖는 항상 목적한 결과結果를 예감豫感할 수 있다’고 옛날 책에 씌어있는 것처럼 모처럼 좋은 결과에 무전여행의 출발은 썩 희망적으로 비춰졌습니다. ‘70년이라면 우선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제주도를 가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일단 목포로 가서 항구 어디쯤 길게 줄을 서서 배표를 끊은 뒤에 제주도를 가는 통통배인 안성호나 가야호를 타고 14시간인가를 배 갑판에서 부대끼다가 제주항에 도착을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당시 3등실이란 갑판 아래 있어서 덥고 답답해서 갑판이 훨씬 나았습니다. 거의 새벽에 집에서 나와 기차를 타고 목포에 도착을 했는데 일단 저렴한 국밥을 한 그릇씩 먹고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예상하지 않았던 목포까지 기차 삯에다가 국밥 값이 지출된 것에 대해 약간 당혹감이 들었으나 처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항구를 찾아가 길고긴 줄을 선 끝에 배표를 끊고 안성호라는 통통배에 올랐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7월말경이라 목과 등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우리들의 3등실인 배 밑창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았더니 무더운 데다가 퀴퀴한 냄새까지 감도는 게 무전여행을 거의 절반을 해낸 것만큼이나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은 푸르고 버섯처럼 피어오른 하얀 뭉게구름에다 불붙은 가마솥 같은 붉은 태양이 있어서 그래도 신이 나고 좋았습니다. 다도해인 근해를 빠져나가 난바다에 들어서자 유리창처럼 펼쳐있는 파랑이 수평인 바다를 나는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1970년, 7월의 햇살에 눈부신 바다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푸르름과 파랑이 만나는 수평선의 아름다운 경계에 감탄을 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공짜로 실컷 즐겼습니다. 맞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순간만큼은 순전히 무전여행이었습니다. 안성호 배삯에 푸르름과 파랑의 경계에 대한 비용은 들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얀 날치들이 파랑위로 솟구치듯 날아올라와 저만큼 다시 파랑 속으로 꽂히듯 뛰어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수면이 잔잔한 날이라도 추자도 부근에 가면 파도가 커진다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배가 추자도를 지나면서는 여기저기에서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로 인해 그나마 갑판 밑창인 3등실에는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제주도 무전여행이 즐겁고 좋았습니다.
그렇게 제주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주항에 도착을 해서 배표를 제출하고 항구를 빠져나가려고 길게 줄을 서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헌병들이 몰려와 하선 승객들의 소지품 중에서 군용물건들을 압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물건이 군용 A텐트와 판초 우의와 군화와 군용 후레쉬였습니다. 하하~ 그래서 정보라는 것이 엄청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무전여행 장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군용장비 압수에 대한 정보를 가까운 선배에게 듣고는 군용 A텐트에는 하얀 페인트를 칠해놓았습니다만 우리들도 매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낭 속에는 판초 우의와 군용 후레쉬도 있었고, 트집을 잡자면 페인트 칠해놓은 군용 A텐트도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소 심각한 문제가 우리 앞에서 발생을 했습니다. 우리 앞에 서있던, 행색行色이 꼭 무전여행을 전문적으로 하러온 냄새를 진하게 풍기던 시커먼스 삼인조三人組는 군용 A텐트와 판초 우의와 군용 후레쉬와 당장 신고 있던 군화에다 낡아빠진 항고와 심지어 배낭을 뒤져 군용 숟가락까지 다 압수를 당했습니다. 무전여행 삼인조三人組의 모나게 건들거리는 태도에 화가 난 헌병들이 몽땅 짐을 뒤져서 국방색이라고 생긴 것들은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털어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헌병들의 태도를 보니 원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던 듯했습니다. 그저 시범 케이스로 몇 팀을 골라내어 제주도 여행길의 안전과 긴장감을 돋우는 정도의 경각심警覺心을 줄만큼만 군용장비를 압수하려 했던 것이 헌병들을 만만하게 대하는 듯한 삼인조三人組의 태도에 불끈하고 안면을 싹 바꾸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등산이나 캠핑을 가려면 거의 모든 장비가 군용물건들을 사용했습니다. 어디서든 저렴한 가격에 구하기도 쉬웠고 튼튼한데다가 웬만한 가정이라면 기본적으로 군용물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헌병들은 삼인조三人組의 깨를 홀랑 벗겨버린 뒤에 앞줄부터 다시 확인을 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우리들 차례가 되었습니다. 헌병들의 굳은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여드름이 얼굴에 송송 돋은 우리들에게는 배낭에 얹어놓은 군용 A텐트를 보고도 말없이 지나갔고 배낭을 열어보이자 뒤적거리는 척만 할뿐이지 판초 우의나 군용 후레쉬를 보고도 모른 체하고 지나가주었습니다. 무표정했던 헌병 아저씨들의 따스한 마음이 왠지 과감한 무전여행을 시도하려는 우리들의 등을 자꾸만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아서 두고두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 무전여행 길에서 우리들은 그 시커먼스 삼인조三人組를 두 차례나 더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배낭만 빼고 군화와 숟가락까지 거의 모든 것을 압수당해버린 삼인조三人組의 제주도 무전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궁금하기도 했었거든요. 아무튼 우리들이 보기에 그들은 본래 의도했던 대로 진심 속살비치는 무전여행無錢旅行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라면 제주 시내도 구경하고, 이호해수욕장과 협제해수욕장과 협제굴도 보고, 천지연폭포나 천제연 폭포도 구경했고 서귀포도 구경하고 중문해수욕장에서는 꽤 여러 날 있었고, 5.16도로도 지나가보고 삼방산과 삼방굴사도 구경하고 또 알지 못하거나 기억나지 않은 여기저기를 수없이 돌아다니고 실제로 남쪽나라 바다멀리 7,8월 뙤약볕 아래를 매일 매일 걸어 다녀서 도중에 몹시 지쳐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사이에 의견이 다르거나 사소한 충돌이 생기고 더 이상 걸어 다닐 수 없다는 불평도 터져 나와서 결국 두 명은 여행일정 중간에 돌아가 버리고 세 명만이 남아 제주도 무전여행을 줄기차게 했습니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힘들고 몸과 마음이 힘들면 머릿속의 상식과 비상식이 순식간에 섞여버린다는 것도, 그 혼돈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觀點이나 처지處地의 차이라서 쉽게 이해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종류의 갈등葛藤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잠이야 어디든 텐트를 쳐놓으면 그 안에서 자면 되었고, 하루 세 번씩이나 돌아오는 매每 끼니는 좀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지만 아무튼 뭐라도 먹었는데, 대략 보름쯤 지나니까 글쎄 무전여행이든 유전여행이든 이제는 제주도 일주가 별로 신나거나 행복하지가 않더라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협제굴을 가면서 발바닥이 부르튼 한 친구 덕분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정해진 곳에서 내리려는데, 우리 뒤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버스 차장 사이에서 큰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버스 기사님까지 가세해서 그 승객들과 멱살잡이가 시작되었는데, 가만 보았더니 승객들 모습이 뭔가 눈에 익어보였습니다. 아하, 바로 시커먼스 삼인조三人組였습니다. 버스를 타고는 버스비를 내지 않고 슬쩍 내리려는 외지에서 온 무전여행객들에게 질려버린 버스 차장과 기사님이 이번에는 본때를 보이려고 용을 써가며 혼을 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드잡이질을 하고난 뒤 버스는 휭~ 떠나가 버렸지만 시커먼스 삼인조三人組의 몰골은 우리보다 훨씬 심각해보였습니다. 두 발로만 걷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제주도에서 버스를 탈 때마다 이런 드잡이질을 겪어야 한다면 아마 누구라도 저런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삼인조三人組 사람들의 제주도 무전여행은 돈은 들지 않았겠지만 가슴 속의 영혼은 많이 다쳐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로부터 48년의 세월이 흐르고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여행천국인 제주도에 이번에는 무전여행자들 말고 예맨 난민들이 비행기를 타고 들어와 있습니다. 예맨 난민에 대한 입장을 두고 우리 사회에서 의견이 분분한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는 왜 48년 전 친구들인 까까머리들의 무전여행을 기억해내고 있는 것인지 나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 내 심층 속의 기억들은 두 사건이 서로 모종某種의 관련關聯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속의 한국인과 세계 속의 한국인이 ‘우리’ 라고 하는 관점과 처지에 따라 갈등葛藤하고 고뇌苦惱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국이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성숙해가는 성장통成長痛임에는 분명해보이지만 국위國威와 국익國益이 엇갈리는, 혹은 누군가의 영혼이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르는 갈림길이라는 것도 분명해보입니다. 자유自由와 평등平等이 같은 수위水位의 용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주장하면 평등이 흔들리고, 평등을 강화하면 자유가 위축이 되는 상대적인 용어라는, 이율배반적인二律背反的인 가치를 우리들은 항상 가슴에 희망사항으로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줄을 서서 안성호 배표를 끊고 더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다 배를 타고 또 14시간인가를 바다위에서 흔들리다가 목포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예정에 없는 국밥을 한 그릇씩 먹고 난 뒤 목포역으로 가서 주머니를 탈탈 털어 기차표를 구입해서 완행열차를 타고 K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K시 역에서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자 그 친구들과는 여전히 잘 어울렸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제주도 무전여행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아니, 누구라도 그 이야기들을 꺼내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48년 전 헌병 아저씨의 굳은 얼굴 뒤로 숨겨두었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