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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삼단논법(三段論法)”
마가복음연재 (6) |
□ 마가복음 2:1-12 □
박창환 (본원장・신약학)
마가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사람이 된 사실 자체가 인간에게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언명(言明)하였다(1:1). 환난을 당하는 A.D. 60년대 말의 교회를 향하여 복음을 주려고 할 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의 생애를 보여 주고,그 분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8:34)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임을 말해 줌으로써, 신자의 수난의 삶이 결코 의외(意外)의 사건이나,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님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주님의 뒤를 따라 같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참 제자의 모습임을 알아서 긍지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끝이 나고 만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결국 승리자가 되셨고 무한한 영광에로 승귀(昇貴)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수난하는 자들의 장래도 그와 같이 영광스럽다는 희망을 주려는 것이었다. 즉 거기에 복음이 있는 것이었다.
마가는 이렇게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묘사해 나가면서 동시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입증하겠는가를 사건 사건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예수가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삼단논법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이다.
I. 원문비평
먼저 우리의 본문이 그 원문에 있어서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까지의 본문 전달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저자의 원본은 어떠했을까를 추적해 보아서 가급적 원본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본문이 사소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UBS Greek New Testament 제 4 판이 취급한 몇 가지 문제만을 우리도 다루어 보기로 하자.
4절: 최신 비평판 희랍어 성경 (UBS GNT 제 4판, Nestle-Aland 제 27판)본문에 προσενέγκαι(데리고 가기)로 나왔지만, 사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 것들이 있다. W사본과 애굽역 중의 하나가 προσε- λΘείν 이라는 읽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읽기를 지지하는 사본과 역본이 너무도 소수이고 또 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가치가 없다. 강하게 라이벌이 될만한 읽기 προσεγγίσαι(…에게로 가까이 가기)로 나타나는 사본들과 역본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하고 있다. προσενέγκαι를 지지하는 사본이나 역본이나 교부가 수적으로 많지 않지만 권위 있다고 보여지는 것들이 비교적 더 많기 때문에 προσεγγίσαι보다 우세하다고 판단된다. 전자를 지지하는 P88 א B L등은 후자를 지지하는 P84 A C D등보다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전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완전히 전자를 지지하기에는 후자를 지지하는 사본들의 가치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 확실성을 {B} 등급에 두었다. 즉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말이다.
5절: “네 죄가 용서된다”는 원어가 사본에 따라 시제(時制)를 다르게 하고 있다. 본문에는 ἀφίενται라는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나타났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B 사본을 비롯하여,�여러 소문자 사본들과 여러 개의 고(古)라틴어 번역, 에디오피아역, 디아테사론 등이다. 이 읽기와 라이벌이 되는 것이 ἀφέωνται라는 현재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나오는 사본들이다. 이 읽기를 지지하는 것들은 P88 א A C L W 등의 대문자 사본들과 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여러 고대 역본들이 있다. 그 밖에 ἀφίωνται로 나오는 것, ἀφέονται로 나오는 것, ἀφίονται로 나오는 것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서자의 오류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문제시할 가치가 없다. 다만 첫째와 둘째 사이에는 자웅(雌雄)을 가리기가 어렵다. 첫째는 2:9와 마 9:5의 평행구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과 B 사본이 그것을 지지한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눅 5:20의 평행구의 뒷받침을 받으며 P88과 א등의 유력한 사본들의 지지를 받는 다는 점에서 역시 유력하다. 그러나 5 절과 9절에 같은 동사로 나오고 마태복음의 평행구에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첫째 읽기에다 더 비중을 두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첫째를 선호한 것 같다. 그러나 둘째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같다. 그래서 첫째를 본문에 두면서도 {B} 등급으로 취급한 것이다. 즉 100%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9절: 여기서도 5 절에서와 마찬가지로 ἀφίενται가 문제된다. 어떤 사본이나 역본에는 ἀφέωνται로 나오기 때문이다. 전자를 지지하는 것들은 2:5와 마 9:5 그리고 대문자 사본 א B와 몇 개의 소문자 사본과 고대 역본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눅5:23과 A C D L W Δ Θ등 대문자 사본과 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고대 역본들이 지지한다. 이 문제는 5절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5 절과 마찬가지로 아주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전자에로 비중이 쏠린다. ἀφέονται로 나오는 사본들이 세 개 있지만 그것은 사서자(寫書者)의 실수로 생겨난 오기(誤記)라고 보여진다.
II. 주 해
< 1절 >
1장 마지막 부분을 회상해야 한다. 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예수의 권능이 증명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통치(왕국)가 예수의 행동과 사역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가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가 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병마가 예수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몰려 나가고, 노골적으로 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쫓겨 나가는 사실에서 예수의 신적 자격과 권세가 입증되는 것이었다. 예수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그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에게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에게 밀려들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숨어 있어야 할 정도로 예수의 인기가 높았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았던 것이다. 그가 꽁꽁 숨어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의 거처를 알아내어 그리로 몰려드는 것이었다(1:45). 이것만으로써도 예수의 신적 통치(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수일 후에(⌈디 헤메론⌋ δι΄ ὴμερών) 다시 가버나움 동네로 들어오셨다. 그가 어떤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퍼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 2절 >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를 대망의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의 진리의 말씀에 매료(魅了)된 사람들, 자기의 병이나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의 병을 고쳐 보겠다는 사람들이 전부 예수가 계시는 집으로 모여들었으니, 그 많은 군중을 용납할만한 공간이 모자랐을 것이 분명하다. ‘문 앞에라도’ (⌈타 프로스 텐 뒤란⌋ τὰ πρὸς τὴν θύραν) 는 방 안에는 물론이고 “문으로 향하는 여러 곳들”마저도 꽉꽉 들어차서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집 앞 뜰, 집 뒤 뜰, 집 앞 한길 등등이 다 가득 찼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예수는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에라레이 아우토이스 톤 로곤⌋ ἐλάλει αὐτοίς τὸν λόγον 의 ⌈에라레이⌋는 미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계속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말씀의 내용을 ⌈로고스⌋ λόγος 라는 말로 나타냈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몰려왔는지 몰라도 그들에게 예수가 줄곧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은�하나님 나라의 진리였다는 것이다. 로고스라는 명사에 정관사를 붙인 것으로 보아 예수가 공생애 초부터 일관성 있게 주장하시는 도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1:15와 같은 것을 골자로 하는 교훈일 것이다.
< 3절 >
이러한 배경을 깔고 하나의 극적이 사건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역사적 현재 시제 동사(⌈에르콘타이⌋ ἔρχονται)를 사용하여 사실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풍병으로 사지가 마비된 사람을 네 사람이 예수에게로 데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의 소문을 이 병자도 이미 들었었다. 동네의 누구누구가 고질(痼疾)을 말끔히 고쳤다는 소문도 들었다. 자기만은 사지가 다 성하지 못하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기가 막힌 처지이다. 이번에 다시 예수가 동네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환자는 예수께로 가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다. 그에게 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으리라는 신념이 넘친다. 아마도 친척이나 친구들도 같은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 4절 >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 계신 곳을 향하여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온 군중이 예수께로 가는 모든 길을 막고 있어서, 네 사람이 아무리 힘을 써도 그 환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가는 일” (⌈프로스에넹카이⌋ προσενέγκαι)이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고안한 기발한 아이디어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비상 수단이었다. 아마도 집 뒤에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뒤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환자를 포단에 누인 채 옥상으로 올라갔다. 유대인들은 물이 귀한 지방에 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평옥(平屋)을 짓는다. 서까래를 얹고 풀을 덮고 흙을 바르고 회를 발라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 통례이다. 그 네 사람은 염치 불구하고 그 지붕을 뜯어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리고 환자를 달아 내릴 정도의 구멍을 뚫고서 그를 밑으로 내렸다. 그 때 그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라. 소동이 버려졌을 것이다. 쿵쿵 소리가 나고, 먼지가 떨어지고, 서까래가 뜯기고, 구멍이 뻥 뚫리고, 마침내 네 귀퉁이가 끈에 달린 포단이 아래로 내려오고, 거기에는 전신불수 환자가 누워 있었다. 지붕을 뜯고 환자를 달아 내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그런 엄청난 일을 하도록 집주인이 어떻게 그것을 방관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아마도 예수는 신통력을 가지고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아셨을 것이고, 격분한 주인과 측근을 진정시키고 추이(推移)를 기다리자고 타일렀을 것이다.
< 5절 >
예수는 당신 앞에 달아 내려진 전신불수 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이돈 텐 피스틴 아우투⌋ ἰδὼν … τὴν πίστιν αὐτών 에서 “저희는” 복수 인칭대명사이고 그들의 행동 속에는 그들의 믿음이 나타났으며, 예수는 그것을 간파하셨다. 예수 앞에 가면 전신불수 병도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러한 무모한 행동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 때 네 사람은 아직 옥상에 남아 있고 환자만이 예수 앞에 있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 환자를 향하여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소자야 τέκνον 는 영어로 child라는 말로서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말에 “얘야”나 “얘”는 “이 애야”가 준말이고, 보통은 어른이 이이들을 부를 때 쓴다. 혹은 친구끼리도 사용한다. 이 경우에 그 환자0가 어린아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중풍 환자라면 아무래도 중년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리된다. 그런 사람에게 “얘”라고 부른 것은 한국 상황에서는 매우 어색하다. 여기서는 예수가 일반적 자연 상황을 초월하여 신령한 영역에서 자신의 신적인 자격과 권능을 나타내려는 순간이기에 고답적(高踏的) 술어로써 그 환자를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장면이다. 그러기에 그 환자를 향하여 “얘”라고 부르실 자격이 있지 않느냐 말이다. 한글 개역판 성경에는 현재완료 수동 직설법 동사(⌈아페온타이⌋ ἀφέωνται)로 나오는 읽기를 번역한 것인데, 원문비평학적으로 보건대, 현재 수동 직설법 동사(⌈아피엔타이⌋ ἀφίενται)가 원본의 읽기였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죄가 사하여지고 있다”든가 아니면 “이제 죄가 사하여 질 것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완료형 동사를 택할 경우에는, 과거 동작의 현재적 결과를 나타내는 희랍어 현재완료형의 일반적�의미 작용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어느 과거에 그 환자의 죄를 용서했었느냐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네 모든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의 죄가 복수형이어서 그 환자의 모든 죄들이 용서를 받는다는 말일 것이다.
< 6절 >
그 때 그 방안에는, 그리고 예수가 앉으신 자리 둘레에는 율법학자들 몇 사람이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예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병자들과 그의 교훈을 애타게 바라는 갈릴리의 민중(⌈암 하아레츠⌋ ץראה םע)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께 접근하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서 밖에 서서 목을 빼고 기회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둘레에는 민중의 지도자이며 스승(랍비)으로 자처하는 서기관(율법학자)들이 예수의 말꼬리를 잡으려는 악의를 가지고서 예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한 장면 속에 두 종류의 불쌍한 인간들이 예수 앞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일반 민중이고 또 하나는 눈 뜬 장님 같은 지도자들이었다.
예수는 이 두 종류의 사람을 다 마음에 두시고 의미심장하고 매우 정략적인 발언을 하신 것이다. 불쌍한 중풍병자만을 생각하셨다면,“얘! 너 참 불쌍하다. 어서 성한 몸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라”하시면서 당장 그를 치유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고 죄 문제를 들고 나오신 것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또 하나의 효과를 내시려는 고등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당신의 정체를 모두에게 밝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셨기 때문일 것이다. 엄격히 따진다면 “네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는 말속에는 누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 주어는 “죄들”이고 동사는 수동형일 뿐이다. “내가 언제 나 자신이 그의 죄를 사해 준다고 말했느냐?”고 반문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문맥을 보아, 죄를 자기가 용서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다.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들은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말씀에서 자기들 나름으로는 하자를 발견한 셈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마음속으로 예수의 말씀에서 문제성을 발견하고, 그들의 율법 규정에 걸어 심판해 보는 것이었다. ⌈에산 … 디아로기조메노이⌋ ἧσαν … διαλογιζόμενοι 는 과거진행적 동작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periphrastic imperfect ,율법학자들이 골똘하게 이 문제를 가지고 궁리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 7절 >
이 절은 율법학자들의 내심(內心)의 고발 내용이다.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신데, 그리고 예수는 아무리 말을 잘하고 기적을 행한다 해도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 사람이 죄를 사해 준다고 하니, 이것은 틀림없이 신성모독 죄를 범한 것이다 라는 이론이다.
< 8절 >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론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여기의 중심에는 ⌈토 프뉴마티⌋ τῷ πνεύματι 의 번역인 바, 예수는 그 속에 성령이 충만하신 분으로서 보통 인간과는 다른 차원을 소유하셨었다. 보통 사람은 남의 마음을 드려다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 율법학자들이 각각 속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각 아셨다. “곧”(⌈카이 유튀스⌋ καὶ εὐθύς),즉 오랜 시간이 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초월적 능력과 지식을 행사하실 수 있는 예수에게 있어서,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궁리하며 모의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셨다는 말이다. 이제 예수의 대화의 대상, 그리고 관심의 대상은 그 환자가 아니라 율법학자들이다.�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고 화살을 율법학자들에게로 돌렸다. 율법학자들은 몰래 마음속으로 예수의 말씀을 고발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자기들끼리 암시적인 눈길을 주고받았을 것인데, 예수가 이렇게 자기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며, 자기들의 속마음을 폭로하셨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 9절 >
예수의 질문은 계속된다. 대답해 보라는 것이었다. “중풍병자더러 ‘네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포단을 들고 걸어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이었다. 예수의 질문은 그 둘 중 쉬운 것이 어느 것인지를 알아맞히라는 것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행동으로 옴기셨다. 예수는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율법학자들의 생각에는 예수가 사람이면서 거짓말로 하나님인 척 하면서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호언(豪言)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죄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죄가 용서되는 것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어서 마음만 삐뚤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전신불수 환자더라 “일어나라, 자리를 걷어들어라, 걸어라”고 명령한다는 것은,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처지여서, 그 명령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망신을 할 수밖에 없는 발언일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학자들의 판단에는 후자가 더 어려운 발언이라고 생각 됐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양자가 다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일이다. 죄를 사하는 일도 하나님만이, 이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고치는 일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 10절 >
여기서 예수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노라고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행동을 명하셨다. 율법학자들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 즉 전신불수를 고치는 일을 해 내신다면,예수는 사람 이상의 존재요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고, 결국 하나님밖에 하지 못한 다고 생각되는 죄 사하는 권세도 자연적으로 인자(사람의 아들)이신 예수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예수가 사람의 눈에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단 7:13-14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묵시론적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신(神)-인(人)의 자격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을 행해 보이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자격과 권능을 가지신 것을 입증하셨고, 따라서 자신이 죄 사하는 권한을 가지신 신(神)이시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신 것이다.
< 11-12 >
예수는 율법학자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기적을 명령했고, 그 명령은 조금도 오차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지가 다 마비되어 수십년 동안 누워 있던 사람이 말씀 한 마디에, 그 말라붙었던 손발이 당장에 성해지고, 정상적인 수족이 되어, 자기가 누었던 자리를 걷어들고 당당히 걸어 갈 수 있었다는 것은, 태초에 말씀으로 “하늘아 생겨나라”,“땅아 생겨나라” 해서 천지가 생겨나던 일과 다름이 없는 사건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다. 예수는 이러한 창조적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신격의 소유자이심을 잘 입증하셨고 아울러 죄 사하는 권세의 소유자이심을 웅변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가 놀랐다. ⌈엨스이스타스타이⌋ ἐξίσθασται 는 문자대로 말해서 엑스타시를 경험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어리둥절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고, 얼빠진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그런 일이 인간 역사 속에 일찍이 있었다면 놀라울 것이 없었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일을 예수가 하셨기에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을 하신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황홀한 느낌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신적인 사건을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아직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고 다만 무언가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느끼면서 하나님께 찬미를 한 것이다.
III. 사 역
1. 며칠 후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 가셨고, 그가 어떤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2.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그 집안은 물론) 문을 향한 모든 통로까지도 빈 자리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강론하고 계셨다.
3. 그 때에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들고 그에게로 오는 것이었다.
4.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예수께 데리고 갈 수 가 없어서, 예수가 계신 방의 지붕을 베끼고 구멍을 뚫은 후 그 중풍병자가 누운 포단을 달아 내리는 것이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한다.”
6. 그런데 거기에는 율법학자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속으로 논란(論難)을 하는 것이었다.
7.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그러자 곧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논란하고 있는 것을 당신의 영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째서 당신들은 속으로 그런 것들을 논란하고 있소?
9.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과,‘일어나라. 네 포단을 들어라. 그리고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10.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게 하겠소.”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2: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 포단을 들고 네 집으로 가거라.”
<2: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 포단을 들고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나갔다. 그래서 모두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고,“우리는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IV. 메 시 지
1.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죄인이다. 죄의 종류가 다르고 그 양이 다르겠지만,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에 모두가 멸망의 자식들이다.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죄 문제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가장 급선무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의 질병이 죄 때문에 생긴다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요한 복음 9장의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의 이야기). 그러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 중풍병자가 자기의 죄 때문에 그런 병을 얻었으니까 죄 용서를 받으면 병도 낫는다는 이론을 말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잘라 말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2. 죄가 인간의 가장 중대한 문제라는 것과 아울러 그 해결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또한 버금가는 문제이다. 죄를 범한 자는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이다. 우리 스스로가 죄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본문에서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죄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소치이다. 구약에서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 등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사죄를 주시기로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새 계약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적 죽음을 죽게 하신 일이다.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무엇인가를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셨고 그 계획을 실천하셨다. 그것은 완전히 우리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오신 분이시며, 그를 통해서만 우리의 죄사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3. 세상에 나셔서 사람으로 사신 예수를 사람들은 단지 인간으로만 보려고 한다. 그가 단지 인간에 불과했다면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예나 오늘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의 오관을 척도로 하여 모든 것을 판단한다. 신성이란 사람의 오관의 척도 속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예수를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이 예수를 단지 사람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신성을 보여주시려고 많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다. 사람은 한 번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예수께서 행하셨다. 그것들을 보아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전신불수 환자를 말씀 한 마디로 완전히 고치신 일은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예수가 하나님이셨기에 그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치르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4. 그 전신불수 환자가 치유를 받은 과정에서 우리가 받을 교훈이 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진 환자 자신과 그를 도와 예수께 데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네 운반자의 신앙이 없었던들 어떻게 그런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겠는가.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와 능력이 존재하지만 우리편의 믿음이 없이는 우리에게 효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5.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전신불수 환자를 말씀 한 마디로 고칠 수 있다.
예수는 전신불수를 말씀으로 깨끗이 고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서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신 셈이다.
예수의 삼단논법(三段論法)”
마가복음연재 (6) |
□ 마가복음 2:1-12 □
박창환 (본원장・신약학)
마가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사람이 된 사실 자체가 인간에게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언명(言明)하였다(1:1). 환난을 당하는 A.D. 60년대 말의 교회를 향하여 복음을 주려고 할 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의 생애를 보여 주고,그 분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8:34)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임을 말해 줌으로써, 신자의 수난의 삶이 결코 의외(意外)의 사건이나,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님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주님의 뒤를 따라 같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참 제자의 모습임을 알아서 긍지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끝이 나고 만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결국 승리자가 되셨고 무한한 영광에로 승귀(昇貴)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수난하는 자들의 장래도 그와 같이 영광스럽다는 희망을 주려는 것이었다. 즉 거기에 복음이 있는 것이었다.
마가는 이렇게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묘사해 나가면서 동시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입증하겠는가를 사건 사건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예수가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삼단논법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이다.
I. 원문비평
먼저 우리의 본문이 그 원문에 있어서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까지의 본문 전달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저자의 원본은 어떠했을까를 추적해 보아서 가급적 원본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본문이 사소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UBS Greek New Testament 제 4 판이 취급한 몇 가지 문제만을 우리도 다루어 보기로 하자.
4절: 최신 비평판 희랍어 성경 (UBS GNT 제 4판, Nestle-Aland 제 27판)본문에 προσενέγκαι(데리고 가기)로 나왔지만, 사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 것들이 있다. W사본과 애굽역 중의 하나가 προσε- λΘείν 이라는 읽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읽기를 지지하는 사본과 역본이 너무도 소수이고 또 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가치가 없다. 강하게 라이벌이 될만한 읽기 προσεγγίσαι(…에게로 가까이 가기)로 나타나는 사본들과 역본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하고 있다. προσενέγκαι를 지지하는 사본이나 역본이나 교부가 수적으로 많지 않지만 권위 있다고 보여지는 것들이 비교적 더 많기 때문에 προσεγγίσαι보다 우세하다고 판단된다. 전자를 지지하는 P88 א B L등은 후자를 지지하는 P84 A C D등보다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전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완전히 전자를 지지하기에는 후자를 지지하는 사본들의 가치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 확실성을 {B} 등급에 두었다. 즉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말이다.
5절: “네 죄가 용서된다”는 원어가 사본에 따라 시제(時制)를 다르게 하고 있다. 본문에는 ἀφίενται라는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나타났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B 사본을 비롯하여,�여러 소문자 사본들과 여러 개의 고(古)라틴어 번역, 에디오피아역, 디아테사론 등이다. 이 읽기와 라이벌이 되는 것이 ἀφέωνται라는 현재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나오는 사본들이다. 이 읽기를 지지하는 것들은 P88 א A C L W 등의 대문자 사본들과 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여러 고대 역본들이 있다. 그 밖에 ἀφίωνται로 나오는 것, ἀφέονται로 나오는 것, ἀφίονται로 나오는 것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서자의 오류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문제시할 가치가 없다. 다만 첫째와 둘째 사이에는 자웅(雌雄)을 가리기가 어렵다. 첫째는 2:9와 마 9:5의 평행구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과 B 사본이 그것을 지지한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눅 5:20의 평행구의 뒷받침을 받으며 P88과 א등의 유력한 사본들의 지지를 받는 다는 점에서 역시 유력하다. 그러나 5 절과 9절에 같은 동사로 나오고 마태복음의 평행구에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첫째 읽기에다 더 비중을 두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첫째를 선호한 것 같다. 그러나 둘째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같다. 그래서 첫째를 본문에 두면서도 {B} 등급으로 취급한 것이다. 즉 100%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9절: 여기서도 5 절에서와 마찬가지로 ἀφίενται가 문제된다. 어떤 사본이나 역본에는 ἀφέωνται로 나오기 때문이다. 전자를 지지하는 것들은 2:5와 마 9:5 그리고 대문자 사본 א B와 몇 개의 소문자 사본과 고대 역본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눅5:23과 A C D L W Δ Θ등 대문자 사본과 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고대 역본들이 지지한다. 이 문제는 5절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5 절과 마찬가지로 아주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전자에로 비중이 쏠린다. ἀφέονται로 나오는 사본들이 세 개 있지만 그것은 사서자(寫書者)의 실수로 생겨난 오기(誤記)라고 보여진다.
II. 주 해
< 1절 >
1장 마지막 부분을 회상해야 한다. 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예수의 권능이 증명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통치(왕국)가 예수의 행동과 사역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가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가 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병마가 예수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몰려 나가고, 노골적으로 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쫓겨 나가는 사실에서 예수의 신적 자격과 권세가 입증되는 것이었다. 예수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그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에게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에게 밀려들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숨어 있어야 할 정도로 예수의 인기가 높았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았던 것이다. 그가 꽁꽁 숨어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의 거처를 알아내어 그리로 몰려드는 것이었다(1:45). 이것만으로써도 예수의 신적 통치(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수일 후에(⌈디 헤메론⌋ δι΄ ὴμερών) 다시 가버나움 동네로 들어오셨다. 그가 어떤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퍼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 2절 >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를 대망의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의 진리의 말씀에 매료(魅了)된 사람들, 자기의 병이나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의 병을 고쳐 보겠다는 사람들이 전부 예수가 계시는 집으로 모여들었으니, 그 많은 군중을 용납할만한 공간이 모자랐을 것이 분명하다. ‘문 앞에라도’ (⌈타 프로스 텐 뒤란⌋ τὰ πρὸς τὴν θύραν) 는 방 안에는 물론이고 “문으로 향하는 여러 곳들”마저도 꽉꽉 들어차서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집 앞 뜰, 집 뒤 뜰, 집 앞 한길 등등이 다 가득 찼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예수는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에라레이 아우토이스 톤 로곤⌋ ἐλάλει αὐτοίς τὸν λόγον 의 ⌈에라레이⌋는 미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계속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말씀의 내용을 ⌈로고스⌋ λόγος 라는 말로 나타냈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몰려왔는지 몰라도 그들에게 예수가 줄곧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은�하나님 나라의 진리였다는 것이다. 로고스라는 명사에 정관사를 붙인 것으로 보아 예수가 공생애 초부터 일관성 있게 주장하시는 도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1:15와 같은 것을 골자로 하는 교훈일 것이다.
< 3절 >
이러한 배경을 깔고 하나의 극적이 사건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역사적 현재 시제 동사(⌈에르콘타이⌋ ἔρχονται)를 사용하여 사실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풍병으로 사지가 마비된 사람을 네 사람이 예수에게로 데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의 소문을 이 병자도 이미 들었었다. 동네의 누구누구가 고질(痼疾)을 말끔히 고쳤다는 소문도 들었다. 자기만은 사지가 다 성하지 못하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기가 막힌 처지이다. 이번에 다시 예수가 동네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환자는 예수께로 가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다. 그에게 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으리라는 신념이 넘친다. 아마도 친척이나 친구들도 같은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 4절 >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 계신 곳을 향하여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온 군중이 예수께로 가는 모든 길을 막고 있어서, 네 사람이 아무리 힘을 써도 그 환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가는 일” (⌈프로스에넹카이⌋ προσενέγκαι)이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고안한 기발한 아이디어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비상 수단이었다. 아마도 집 뒤에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뒤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환자를 포단에 누인 채 옥상으로 올라갔다. 유대인들은 물이 귀한 지방에 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평옥(平屋)을 짓는다. 서까래를 얹고 풀을 덮고 흙을 바르고 회를 발라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 통례이다. 그 네 사람은 염치 불구하고 그 지붕을 뜯어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리고 환자를 달아 내릴 정도의 구멍을 뚫고서 그를 밑으로 내렸다. 그 때 그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라. 소동이 버려졌을 것이다. 쿵쿵 소리가 나고, 먼지가 떨어지고, 서까래가 뜯기고, 구멍이 뻥 뚫리고, 마침내 네 귀퉁이가 끈에 달린 포단이 아래로 내려오고, 거기에는 전신불수 환자가 누워 있었다. 지붕을 뜯고 환자를 달아 내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그런 엄청난 일을 하도록 집주인이 어떻게 그것을 방관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아마도 예수는 신통력을 가지고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아셨을 것이고, 격분한 주인과 측근을 진정시키고 추이(推移)를 기다리자고 타일렀을 것이다.
< 5절 >
예수는 당신 앞에 달아 내려진 전신불수 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이돈 텐 피스틴 아우투⌋ ἰδὼν … τὴν πίστιν αὐτών 에서 “저희는” 복수 인칭대명사이고 그들의 행동 속에는 그들의 믿음이 나타났으며, 예수는 그것을 간파하셨다. 예수 앞에 가면 전신불수 병도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러한 무모한 행동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 때 네 사람은 아직 옥상에 남아 있고 환자만이 예수 앞에 있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 환자를 향하여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소자야 τέκνον 는 영어로 child라는 말로서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말에 “얘야”나 “얘”는 “이 애야”가 준말이고, 보통은 어른이 이이들을 부를 때 쓴다. 혹은 친구끼리도 사용한다. 이 경우에 그 환자0가 어린아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중풍 환자라면 아무래도 중년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리된다. 그런 사람에게 “얘”라고 부른 것은 한국 상황에서는 매우 어색하다. 여기서는 예수가 일반적 자연 상황을 초월하여 신령한 영역에서 자신의 신적인 자격과 권능을 나타내려는 순간이기에 고답적(高踏的) 술어로써 그 환자를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장면이다. 그러기에 그 환자를 향하여 “얘”라고 부르실 자격이 있지 않느냐 말이다. 한글 개역판 성경에는 현재완료 수동 직설법 동사(⌈아페온타이⌋ ἀφέωνται)로 나오는 읽기를 번역한 것인데, 원문비평학적으로 보건대, 현재 수동 직설법 동사(⌈아피엔타이⌋ ἀφίενται)가 원본의 읽기였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죄가 사하여지고 있다”든가 아니면 “이제 죄가 사하여 질 것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완료형 동사를 택할 경우에는, 과거 동작의 현재적 결과를 나타내는 희랍어 현재완료형의 일반적�의미 작용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어느 과거에 그 환자의 죄를 용서했었느냐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네 모든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의 죄가 복수형이어서 그 환자의 모든 죄들이 용서를 받는다는 말일 것이다.
< 6절 >
그 때 그 방안에는, 그리고 예수가 앉으신 자리 둘레에는 율법학자들 몇 사람이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예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병자들과 그의 교훈을 애타게 바라는 갈릴리의 민중(⌈암 하아레츠⌋ ץראה םע)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께 접근하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서 밖에 서서 목을 빼고 기회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둘레에는 민중의 지도자이며 스승(랍비)으로 자처하는 서기관(율법학자)들이 예수의 말꼬리를 잡으려는 악의를 가지고서 예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한 장면 속에 두 종류의 불쌍한 인간들이 예수 앞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일반 민중이고 또 하나는 눈 뜬 장님 같은 지도자들이었다.
예수는 이 두 종류의 사람을 다 마음에 두시고 의미심장하고 매우 정략적인 발언을 하신 것이다. 불쌍한 중풍병자만을 생각하셨다면,“얘! 너 참 불쌍하다. 어서 성한 몸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라”하시면서 당장 그를 치유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고 죄 문제를 들고 나오신 것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또 하나의 효과를 내시려는 고등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당신의 정체를 모두에게 밝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셨기 때문일 것이다. 엄격히 따진다면 “네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는 말속에는 누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 주어는 “죄들”이고 동사는 수동형일 뿐이다. “내가 언제 나 자신이 그의 죄를 사해 준다고 말했느냐?”고 반문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문맥을 보아, 죄를 자기가 용서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다.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들은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말씀에서 자기들 나름으로는 하자를 발견한 셈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마음속으로 예수의 말씀에서 문제성을 발견하고, 그들의 율법 규정에 걸어 심판해 보는 것이었다. ⌈에산 … 디아로기조메노이⌋ ἧσαν … διαλογιζόμενοι 는 과거진행적 동작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periphrastic imperfect ,율법학자들이 골똘하게 이 문제를 가지고 궁리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 7절 >
이 절은 율법학자들의 내심(內心)의 고발 내용이다.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신데, 그리고 예수는 아무리 말을 잘하고 기적을 행한다 해도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 사람이 죄를 사해 준다고 하니, 이것은 틀림없이 신성모독 죄를 범한 것이다 라는 이론이다.
< 8절 >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론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여기의 중심에는 ⌈토 프뉴마티⌋ τῷ πνεύματι 의 번역인 바, 예수는 그 속에 성령이 충만하신 분으로서 보통 인간과는 다른 차원을 소유하셨었다. 보통 사람은 남의 마음을 드려다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 율법학자들이 각각 속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각 아셨다. “곧”(⌈카이 유튀스⌋ καὶ εὐθύς),즉 오랜 시간이 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초월적 능력과 지식을 행사하실 수 있는 예수에게 있어서,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궁리하며 모의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셨다는 말이다. 이제 예수의 대화의 대상, 그리고 관심의 대상은 그 환자가 아니라 율법학자들이다.�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고 화살을 율법학자들에게로 돌렸다. 율법학자들은 몰래 마음속으로 예수의 말씀을 고발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자기들끼리 암시적인 눈길을 주고받았을 것인데, 예수가 이렇게 자기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며, 자기들의 속마음을 폭로하셨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 9절 >
예수의 질문은 계속된다. 대답해 보라는 것이었다. “중풍병자더러 ‘네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포단을 들고 걸어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이었다. 예수의 질문은 그 둘 중 쉬운 것이 어느 것인지를 알아맞히라는 것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행동으로 옴기셨다. 예수는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율법학자들의 생각에는 예수가 사람이면서 거짓말로 하나님인 척 하면서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호언(豪言)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죄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죄가 용서되는 것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어서 마음만 삐뚤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전신불수 환자더라 “일어나라, 자리를 걷어들어라, 걸어라”고 명령한다는 것은,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처지여서, 그 명령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망신을 할 수밖에 없는 발언일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학자들의 판단에는 후자가 더 어려운 발언이라고 생각 됐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양자가 다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일이다. 죄를 사하는 일도 하나님만이, 이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고치는 일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 10절 >
여기서 예수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노라고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행동을 명하셨다. 율법학자들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 즉 전신불수를 고치는 일을 해 내신다면,예수는 사람 이상의 존재요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고, 결국 하나님밖에 하지 못한 다고 생각되는 죄 사하는 권세도 자연적으로 인자(사람의 아들)이신 예수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예수가 사람의 눈에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단 7:13-14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묵시론적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신(神)-인(人)의 자격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을 행해 보이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자격과 권능을 가지신 것을 입증하셨고, 따라서 자신이 죄 사하는 권한을 가지신 신(神)이시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신 것이다.
< 11-12 >
예수는 율법학자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기적을 명령했고, 그 명령은 조금도 오차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지가 다 마비되어 수십년 동안 누워 있던 사람이 말씀 한 마디에, 그 말라붙었던 손발이 당장에 성해지고, 정상적인 수족이 되어, 자기가 누었던 자리를 걷어들고 당당히 걸어 갈 수 있었다는 것은, 태초에 말씀으로 “하늘아 생겨나라”,“땅아 생겨나라” 해서 천지가 생겨나던 일과 다름이 없는 사건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다. 예수는 이러한 창조적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신격의 소유자이심을 잘 입증하셨고 아울러 죄 사하는 권세의 소유자이심을 웅변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가 놀랐다. ⌈엨스이스타스타이⌋ ἐξίσθασται 는 문자대로 말해서 엑스타시를 경험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어리둥절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고, 얼빠진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그런 일이 인간 역사 속에 일찍이 있었다면 놀라울 것이 없었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일을 예수가 하셨기에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을 하신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황홀한 느낌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신적인 사건을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아직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고 다만 무언가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느끼면서 하나님께 찬미를 한 것이다.
III. 사 역
1. 며칠 후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 가셨고, 그가 어떤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2.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그 집안은 물론) 문을 향한 모든 통로까지도 빈 자리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강론하고 계셨다.
3. 그 때에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들고 그에게로 오는 것이었다.
4.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예수께 데리고 갈 수 가 없어서, 예수가 계신 방의 지붕을 베끼고 구멍을 뚫은 후 그 중풍병자가 누운 포단을 달아 내리는 것이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한다.”
6. 그런데 거기에는 율법학자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속으로 논란(論難)을 하는 것이었다.
7.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그러자 곧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논란하고 있는 것을 당신의 영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째서 당신들은 속으로 그런 것들을 논란하고 있소?
9.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과,‘일어나라. 네 포단을 들어라. 그리고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10.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게 하겠소.”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2: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 포단을 들고 네 집으로 가거라.”
<2: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 포단을 들고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나갔다. 그래서 모두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고,“우리는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IV. 메 시 지
1.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죄인이다. 죄의 종류가 다르고 그 양이 다르겠지만,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에 모두가 멸망의 자식들이다.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죄 문제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가장 급선무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의 질병이 죄 때문에 생긴다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요한 복음 9장의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의 이야기). 그러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 중풍병자가 자기의 죄 때문에 그런 병을 얻었으니까 죄 용서를 받으면 병도 낫는다는 이론을 말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잘라 말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2. 죄가 인간의 가장 중대한 문제라는 것과 아울러 그 해결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또한 버금가는 문제이다. 죄를 범한 자는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이다. 우리 스스로가 죄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본문에서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죄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소치이다. 구약에서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 등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사죄를 주시기로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새 계약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적 죽음을 죽게 하신 일이다.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무엇인가를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셨고 그 계획을 실천하셨다. 그것은 완전히 우리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오신 분이시며, 그를 통해서만 우리의 죄사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3. 세상에 나셔서 사람으로 사신 예수를 사람들은 단지 인간으로만 보려고 한다. 그가 단지 인간에 불과했다면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예나 오늘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의 오관을 척도로 하여 모든 것을 판단한다. 신성이란 사람의 오관의 척도 속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예수를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이 예수를 단지 사람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신성을 보여주시려고 많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다. 사람은 한 번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예수께서 행하셨다. 그것들을 보아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전신불수 환자를 말씀 한 마디로 완전히 고치신 일은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예수가 하나님이셨기에 그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치르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4. 그 전신불수 환자가 치유를 받은 과정에서 우리가 받을 교훈이 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진 환자 자신과 그를 도와 예수께 데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네 운반자의 신앙이 없었던들 어떻게 그런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겠는가.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와 능력이 존재하지만 우리편의 믿음이 없이는 우리에게 효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5.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전신불수 환자를 말씀 한 마디로 고칠 수 있다.
예수는 전신불수를 말씀으로 깨끗이 고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서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신 셈이다.
예수의 삼단논법(三段論法)”
마가복음연재 (6) |
□ 마가복음 2:1-12 □
박창환 (본원장・신약학)
마가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사람이 된 사실 자체가 인간에게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언명(言明)하였다(1:1). 환난을 당하는 A.D. 60년대 말의 교회를 향하여 복음을 주려고 할 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의 생애를 보여 주고,그 분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8:34)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임을 말해 줌으로써, 신자의 수난의 삶이 결코 의외(意外)의 사건이나,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님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주님의 뒤를 따라 같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참 제자의 모습임을 알아서 긍지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끝이 나고 만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결국 승리자가 되셨고 무한한 영광에로 승귀(昇貴)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수난하는 자들의 장래도 그와 같이 영광스럽다는 희망을 주려는 것이었다. 즉 거기에 복음이 있는 것이었다.
마가는 이렇게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묘사해 나가면서 동시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입증하겠는가를 사건 사건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예수가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삼단논법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이다.
I. 원문비평
먼저 우리의 본문이 그 원문에 있어서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까지의 본문 전달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저자의 원본은 어떠했을까를 추적해 보아서 가급적 원본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본문이 사소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UBS Greek New Testament 제 4 판이 취급한 몇 가지 문제만을 우리도 다루어 보기로 하자.
4절: 최신 비평판 희랍어 성경 (UBS GNT 제 4판, Nestle-Aland 제 27판)본문에 προσενέγκαι(데리고 가기)로 나왔지만, 사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 것들이 있다. W사본과 애굽역 중의 하나가 προσε- λΘείν 이라는 읽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읽기를 지지하는 사본과 역본이 너무도 소수이고 또 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가치가 없다. 강하게 라이벌이 될만한 읽기 προσεγγίσαι(…에게로 가까이 가기)로 나타나는 사본들과 역본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하고 있다. προσενέγκαι를 지지하는 사본이나 역본이나 교부가 수적으로 많지 않지만 권위 있다고 보여지는 것들이 비교적 더 많기 때문에 προσεγγίσαι보다 우세하다고 판단된다. 전자를 지지하는 P88 א B L등은 후자를 지지하는 P84 A C D등보다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전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완전히 전자를 지지하기에는 후자를 지지하는 사본들의 가치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 확실성을 {B} 등급에 두었다. 즉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말이다.
5절: “네 죄가 용서된다”는 원어가 사본에 따라 시제(時制)를 다르게 하고 있다. 본문에는 ἀφίενται라는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나타났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B 사본을 비롯하여,�여러 소문자 사본들과 여러 개의 고(古)라틴어 번역, 에디오피아역, 디아테사론 등이다. 이 읽기와 라이벌이 되는 것이 ἀφέωνται라는 현재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나오는 사본들이다. 이 읽기를 지지하는 것들은 P88 א A C L W 등의 대문자 사본들과 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여러 고대 역본들이 있다. 그 밖에 ἀφίωνται로 나오는 것, ἀφέονται로 나오는 것, ἀφίονται로 나오는 것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서자의 오류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문제시할 가치가 없다. 다만 첫째와 둘째 사이에는 자웅(雌雄)을 가리기가 어렵다. 첫째는 2:9와 마 9:5의 평행구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과 B 사본이 그것을 지지한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눅 5:20의 평행구의 뒷받침을 받으며 P88과 א등의 유력한 사본들의 지지를 받는 다는 점에서 역시 유력하다. 그러나 5 절과 9절에 같은 동사로 나오고 마태복음의 평행구에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첫째 읽기에다 더 비중을 두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첫째를 선호한 것 같다. 그러나 둘째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같다. 그래서 첫째를 본문에 두면서도 {B} 등급으로 취급한 것이다. 즉 100%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9절: 여기서도 5 절에서와 마찬가지로 ἀφίενται가 문제된다. 어떤 사본이나 역본에는 ἀφέωνται로 나오기 때문이다. 전자를 지지하는 것들은 2:5와 마 9:5 그리고 대문자 사본 א B와 몇 개의 소문자 사본과 고대 역본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눅5:23과 A C D L W Δ Θ등 대문자 사본과 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고대 역본들이 지지한다. 이 문제는 5절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5 절과 마찬가지로 아주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전자에로 비중이 쏠린다. ἀφέονται로 나오는 사본들이 세 개 있지만 그것은 사서자(寫書者)의 실수로 생겨난 오기(誤記)라고 보여진다.
II. 주 해
< 1절 >
1장 마지막 부분을 회상해야 한다. 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예수의 권능이 증명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통치(왕국)가 예수의 행동과 사역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가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가 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병마가 예수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몰려 나가고, 노골적으로 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쫓겨 나가는 사실에서 예수의 신적 자격과 권세가 입증되는 것이었다. 예수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그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에게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에게 밀려들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숨어 있어야 할 정도로 예수의 인기가 높았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았던 것이다. 그가 꽁꽁 숨어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의 거처를 알아내어 그리로 몰려드는 것이었다(1:45). 이것만으로써도 예수의 신적 통치(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수일 후에(⌈디 헤메론⌋ δι΄ ὴμερών) 다시 가버나움 동네로 들어오셨다. 그가 어떤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퍼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 2절 >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를 대망의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의 진리의 말씀에 매료(魅了)된 사람들, 자기의 병이나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의 병을 고쳐 보겠다는 사람들이 전부 예수가 계시는 집으로 모여들었으니, 그 많은 군중을 용납할만한 공간이 모자랐을 것이 분명하다. ‘문 앞에라도’ (⌈타 프로스 텐 뒤란⌋ τὰ πρὸς τὴν θύραν) 는 방 안에는 물론이고 “문으로 향하는 여러 곳들”마저도 꽉꽉 들어차서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집 앞 뜰, 집 뒤 뜰, 집 앞 한길 등등이 다 가득 찼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예수는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에라레이 아우토이스 톤 로곤⌋ ἐλάλει αὐτοίς τὸν λόγον 의 ⌈에라레이⌋는 미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계속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말씀의 내용을 ⌈로고스⌋ λόγος 라는 말로 나타냈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몰려왔는지 몰라도 그들에게 예수가 줄곧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은�하나님 나라의 진리였다는 것이다. 로고스라는 명사에 정관사를 붙인 것으로 보아 예수가 공생애 초부터 일관성 있게 주장하시는 도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1:15와 같은 것을 골자로 하는 교훈일 것이다.
< 3절 >
이러한 배경을 깔고 하나의 극적이 사건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역사적 현재 시제 동사(⌈에르콘타이⌋ ἔρχονται)를 사용하여 사실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풍병으로 사지가 마비된 사람을 네 사람이 예수에게로 데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의 소문을 이 병자도 이미 들었었다. 동네의 누구누구가 고질(痼疾)을 말끔히 고쳤다는 소문도 들었다. 자기만은 사지가 다 성하지 못하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기가 막힌 처지이다. 이번에 다시 예수가 동네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환자는 예수께로 가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다. 그에게 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으리라는 신념이 넘친다. 아마도 친척이나 친구들도 같은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 4절 >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 계신 곳을 향하여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온 군중이 예수께로 가는 모든 길을 막고 있어서, 네 사람이 아무리 힘을 써도 그 환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가는 일” (⌈프로스에넹카이⌋ προσενέγκαι)이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고안한 기발한 아이디어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비상 수단이었다. 아마도 집 뒤에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뒤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환자를 포단에 누인 채 옥상으로 올라갔다. 유대인들은 물이 귀한 지방에 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평옥(平屋)을 짓는다. 서까래를 얹고 풀을 덮고 흙을 바르고 회를 발라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 통례이다. 그 네 사람은 염치 불구하고 그 지붕을 뜯어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리고 환자를 달아 내릴 정도의 구멍을 뚫고서 그를 밑으로 내렸다. 그 때 그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라. 소동이 버려졌을 것이다. 쿵쿵 소리가 나고, 먼지가 떨어지고, 서까래가 뜯기고, 구멍이 뻥 뚫리고, 마침내 네 귀퉁이가 끈에 달린 포단이 아래로 내려오고, 거기에는 전신불수 환자가 누워 있었다. 지붕을 뜯고 환자를 달아 내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그런 엄청난 일을 하도록 집주인이 어떻게 그것을 방관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아마도 예수는 신통력을 가지고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아셨을 것이고, 격분한 주인과 측근을 진정시키고 추이(推移)를 기다리자고 타일렀을 것이다.
< 5절 >
예수는 당신 앞에 달아 내려진 전신불수 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이돈 텐 피스틴 아우투⌋ ἰδὼν … τὴν πίστιν αὐτών 에서 “저희는” 복수 인칭대명사이고 그들의 행동 속에는 그들의 믿음이 나타났으며, 예수는 그것을 간파하셨다. 예수 앞에 가면 전신불수 병도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러한 무모한 행동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 때 네 사람은 아직 옥상에 남아 있고 환자만이 예수 앞에 있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 환자를 향하여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소자야 τέκνον 는 영어로 child라는 말로서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말에 “얘야”나 “얘”는 “이 애야”가 준말이고, 보통은 어른이 이이들을 부를 때 쓴다. 혹은 친구끼리도 사용한다. 이 경우에 그 환자0가 어린아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중풍 환자라면 아무래도 중년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리된다. 그런 사람에게 “얘”라고 부른 것은 한국 상황에서는 매우 어색하다. 여기서는 예수가 일반적 자연 상황을 초월하여 신령한 영역에서 자신의 신적인 자격과 권능을 나타내려는 순간이기에 고답적(高踏的) 술어로써 그 환자를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장면이다. 그러기에 그 환자를 향하여 “얘”라고 부르실 자격이 있지 않느냐 말이다. 한글 개역판 성경에는 현재완료 수동 직설법 동사(⌈아페온타이⌋ ἀφέωνται)로 나오는 읽기를 번역한 것인데, 원문비평학적으로 보건대, 현재 수동 직설법 동사(⌈아피엔타이⌋ ἀφίενται)가 원본의 읽기였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죄가 사하여지고 있다”든가 아니면 “이제 죄가 사하여 질 것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완료형 동사를 택할 경우에는, 과거 동작의 현재적 결과를 나타내는 희랍어 현재완료형의 일반적�의미 작용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어느 과거에 그 환자의 죄를 용서했었느냐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네 모든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의 죄가 복수형이어서 그 환자의 모든 죄들이 용서를 받는다는 말일 것이다.
< 6절 >
그 때 그 방안에는, 그리고 예수가 앉으신 자리 둘레에는 율법학자들 몇 사람이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예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병자들과 그의 교훈을 애타게 바라는 갈릴리의 민중(⌈암 하아레츠⌋ ץראה םע)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께 접근하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서 밖에 서서 목을 빼고 기회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둘레에는 민중의 지도자이며 스승(랍비)으로 자처하는 서기관(율법학자)들이 예수의 말꼬리를 잡으려는 악의를 가지고서 예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한 장면 속에 두 종류의 불쌍한 인간들이 예수 앞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일반 민중이고 또 하나는 눈 뜬 장님 같은 지도자들이었다.
예수는 이 두 종류의 사람을 다 마음에 두시고 의미심장하고 매우 정략적인 발언을 하신 것이다. 불쌍한 중풍병자만을 생각하셨다면,“얘! 너 참 불쌍하다. 어서 성한 몸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라”하시면서 당장 그를 치유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고 죄 문제를 들고 나오신 것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또 하나의 효과를 내시려는 고등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당신의 정체를 모두에게 밝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셨기 때문일 것이다. 엄격히 따진다면 “네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는 말속에는 누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 주어는 “죄들”이고 동사는 수동형일 뿐이다. “내가 언제 나 자신이 그의 죄를 사해 준다고 말했느냐?”고 반문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문맥을 보아, 죄를 자기가 용서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다.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들은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말씀에서 자기들 나름으로는 하자를 발견한 셈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마음속으로 예수의 말씀에서 문제성을 발견하고, 그들의 율법 규정에 걸어 심판해 보는 것이었다. ⌈에산 … 디아로기조메노이⌋ ἧσαν … διαλογιζόμενοι 는 과거진행적 동작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periphrastic imperfect ,율법학자들이 골똘하게 이 문제를 가지고 궁리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 7절 >
이 절은 율법학자들의 내심(內心)의 고발 내용이다.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신데, 그리고 예수는 아무리 말을 잘하고 기적을 행한다 해도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 사람이 죄를 사해 준다고 하니, 이것은 틀림없이 신성모독 죄를 범한 것이다 라는 이론이다.
< 8절 >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론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여기의 중심에는 ⌈토 프뉴마티⌋ τῷ πνεύματι 의 번역인 바, 예수는 그 속에 성령이 충만하신 분으로서 보통 인간과는 다른 차원을 소유하셨었다. 보통 사람은 남의 마음을 드려다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 율법학자들이 각각 속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각 아셨다. “곧”(⌈카이 유튀스⌋ καὶ εὐθύς),즉 오랜 시간이 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초월적 능력과 지식을 행사하실 수 있는 예수에게 있어서,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궁리하며 모의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셨다는 말이다. 이제 예수의 대화의 대상, 그리고 관심의 대상은 그 환자가 아니라 율법학자들이다.�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고 화살을 율법학자들에게로 돌렸다. 율법학자들은 몰래 마음속으로 예수의 말씀을 고발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자기들끼리 암시적인 눈길을 주고받았을 것인데, 예수가 이렇게 자기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며, 자기들의 속마음을 폭로하셨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 9절 >
예수의 질문은 계속된다. 대답해 보라는 것이었다. “중풍병자더러 ‘네 죄가 사하여지느니라’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포단을 들고 걸어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이었다. 예수의 질문은 그 둘 중 쉬운 것이 어느 것인지를 알아맞히라는 것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행동으로 옴기셨다. 예수는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율법학자들의 생각에는 예수가 사람이면서 거짓말로 하나님인 척 하면서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호언(豪言)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죄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죄가 용서되는 것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어서 마음만 삐뚤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전신불수 환자더라 “일어나라, 자리를 걷어들어라, 걸어라”고 명령한다는 것은,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처지여서, 그 명령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망신을 할 수밖에 없는 발언일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학자들의 판단에는 후자가 더 어려운 발언이라고 생각 됐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양자가 다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일이다. 죄를 사하는 일도 하나님만이, 이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고치는 일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 10절 >
여기서 예수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노라고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행동을 명하셨다. 율법학자들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 즉 전신불수를 고치는 일을 해 내신다면,예수는 사람 이상의 존재요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고, 결국 하나님밖에 하지 못한 다고 생각되는 죄 사하는 권세도 자연적으로 인자(사람의 아들)이신 예수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예수가 사람의 눈에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단 7:13-14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묵시론적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신(神)-인(人)의 자격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을 행해 보이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자격과 권능을 가지신 것을 입증하셨고, 따라서 자신이 죄 사하는 권한을 가지신 신(神)이시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신 것이다.
< 11-12 >
예수는 율법학자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기적을 명령했고, 그 명령은 조금도 오차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지가 다 마비되어 수십년 동안 누워 있던 사람이 말씀 한 마디에, 그 말라붙었던 손발이 당장에 성해지고, 정상적인 수족이 되어, 자기가 누었던 자리를 걷어들고 당당히 걸어 갈 수 있었다는 것은, 태초에 말씀으로 “하늘아 생겨나라”,“땅아 생겨나라” 해서 천지가 생겨나던 일과 다름이 없는 사건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다. 예수는 이러한 창조적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신격의 소유자이심을 잘 입증하셨고 아울러 죄 사하는 권세의 소유자이심을 웅변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가 놀랐다. ⌈엨스이스타스타이⌋ ἐξίσθασται 는 문자대로 말해서 엑스타시를 경험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어리둥절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고, 얼빠진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그런 일이 인간 역사 속에 일찍이 있었다면 놀라울 것이 없었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일을 예수가 하셨기에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을 하신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황홀한 느낌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신적인 사건을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아직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고 다만 무언가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느끼면서 하나님께 찬미를 한 것이다.
III. 사 역
1. 며칠 후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 가셨고, 그가 어떤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2.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그 집안은 물론) 문을 향한 모든 통로까지도 빈 자리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강론하고 계셨다.
3. 그 때에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들고 그에게로 오는 것이었다.
4.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예수께 데리고 갈 수 가 없어서, 예수가 계신 방의 지붕을 베끼고 구멍을 뚫은 후 그 중풍병자가 누운 포단을 달아 내리는 것이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한다.”
6. 그런데 거기에는 율법학자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속으로 논란(論難)을 하는 것이었다.
7.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그러자 곧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논란하고 있는 것을 당신의 영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째서 당신들은 속으로 그런 것들을 논란하고 있소?
9.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 죄를 다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과,‘일어나라. 네 포단을 들어라. 그리고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10.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게 하겠소.”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2: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 포단을 들고 네 집으로 가거라.”
<2: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 포단을 들고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나갔다. 그래서 모두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고,“우리는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IV. 메 시 지
1.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죄인이다. 죄의 종류가 다르고 그 양이 다르겠지만,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에 모두가 멸망의 자식들이다.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죄 문제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가장 급선무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의 질병이 죄 때문에 생긴다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요한 복음 9장의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의 이야기). 그러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 중풍병자가 자기의 죄 때문에 그런 병을 얻었으니까 죄 용서를 받으면 병도 낫는다는 이론을 말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잘라 말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2. 죄가 인간의 가장 중대한 문제라는 것과 아울러 그 해결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또한 버금가는 문제이다. 죄를 범한 자는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이다. 우리 스스로가 죄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본문에서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죄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소치이다. 구약에서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 등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사죄를 주시기로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새 계약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적 죽음을 죽게 하신 일이다.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무엇인가를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셨고 그 계획을 실천하셨다. 그것은 완전히 우리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오신 분이시며, 그를 통해서만 우리의 죄사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3. 세상에 나셔서 사람으로 사신 예수를 사람들은 단지 인간으로만 보려고 한다. 그가 단지 인간에 불과했다면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예나 오늘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의 오관을 척도로 하여 모든 것을 판단한다. 신성이란 사람의 오관의 척도 속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예수를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이 예수를 단지 사람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신성을 보여주시려고 많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다. 사람은 한 번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예수께서 행하셨다. 그것들을 보아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전신불수 환자를 말씀 한 마디로 완전히 고치신 일은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예수가 하나님이셨기에 그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치르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4. 그 전신불수 환자가 치유를 받은 과정에서 우리가 받을 교훈이 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진 환자 자신과 그를 도와 예수께 데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네 운반자의 신앙이 없었던들 어떻게 그런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겠는가.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와 능력이 존재하지만 우리편의 믿음이 없이는 우리에게 효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5.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전신불수 환자를 말씀 한 마디로 고칠 수 있다.
예수는 전신불수를 말씀으로 깨끗이 고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서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