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47번째 강연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서울정토회관에서 새벽 발우공양을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하시며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세계 100회 강연 중이셔서 공동체 대중들은 스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발우공양에 참석하신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공동체 대중들에게 타성에 젖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정진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나라가 다르다고, 나이가 든다고, 결혼을 한다고, 유학을 간다고, 괴로움이 없어지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디에 가서 살아도, 어떤 일을 해도, 자기 수행을 안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젊을 때는 아직 자리를 못 잡아서 그렇다, 결혼을 안 했을 때는 결혼을 못해서 그렇다, 결혼을 하면 결혼 생활 때문에 그렇다, 나이가 들면 늙어서 그렇다, 고향을 떠나면 고향을 떠나서 그렇다, 이렇게 늘 죽을 때까지 핑계거리가 있습니다만, 나이가 든다고 장소를 옮긴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한국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예요. 가난한 나라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사회제도가 미비한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회제도가 잘 갖춰진 나라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수행정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핑계 그만 대고 수행정진 하셔서 여기 있든 저기 있든, 이 일 하든 저 일 하든,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절에 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진을 하면 밖에 살아도 해결이 되고, 정진하지 않으면 절에 살아도 해결이 안 됩니다. 꼭 절을 하거나 참선을 해야 정진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작용에 자기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그러지 못하죠. 늘 성질대로 산다는 것은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 산다는 얘기입니다. 습관대로 업식에 끌려서 산다는 얘기입니다.
가능하면 빨리 자기 삶을 해탈해서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면, 살아있는 동안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뿐만 아니라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 노릇을 못하면, 오랫동안 괴롭게 살아야 되고, 늘 남탓 하고 미워해야 하고, 또 남한테 안 도와준다고 불평을 하고 살아야 되니까, 자기도 피곤하고 주위사람도 힘들게 만듭니다.
다 같이 밥 먹고 번듯이 살기는 살지만, 그 삶의 내용에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 그런 삶을 하루라도 빨리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안되더라도 안 되는 줄을 알아야 개선이 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늘 핑계를 대면 끝이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생을 바꿔도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 계율에 중심을 두고 어기면 참회를 딱 하는 기본자세가 잡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자기에게 속지를 않는데, 늘 자기가 자기에게 속습니다. 남에게 속는 것은 덜 억울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것보다 더 억울하고 분한 일은 없습니다. 피해도 가장 크고요.
그러니까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미쳐 날뛰는 그런 삶을 살지 말고 자기에게 깨어 있는 삶을 사세요.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면 자기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상태 하에서 우리가 세상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야지, 불평불만을 갖고 하게 되면 자기 상을 쫓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는 노력한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고 때로는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만 허송세월하지 말고 조금 더 마음을 다잡아서 정진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안 되면 절에 살 필요 없이 나가야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살면 그래도 남을 헤치지는 않아요. 억지로라도 좋은 일을 하게 되니까요. 밖에 나가면 남을 헤치니까 수행이 안 된 사람일수록 절에라도 붙어 있어야 세상에 피해를 덜 끼칩니다. 억지로라도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왕지 사는 김에 좀 바르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다시 다잡고 정진을 하시기 바랍니다. 타성에 젖지 않도록 늘 살피시기 바랍니다.”
수행이 안 된다고 좌절하지 말고 그래도 절에 붙어 있는 것이 낫다는 말씀에 대중들도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바쁜 한국 방문 일정 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셔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는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다시 합장 인사를 올렸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가신 스님은 오전 10시30분 비행기로 미국 워싱턴DC로 출국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공항에 배웅을 나온 실무자들에게 11월 18일에 예정된 평화재단 10주년 기념행사를 잘 치룰 수 있도록 당부의 말씀을 하시고 게이트로 들어가셨습니다.
다시 이곳은 미국입니다. 오늘은 미국의 공휴일인 ‘콜럼버스 데이’입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가운데에 스님께서는 한국에서 14시간 비행을 하고 11시 30분경에 워싱턴덜레스 공항에 도착하셔서 입국수속을 마치시고 오후 1시경에 미주정토회관에 도착하셨습니다. 회관에 남아있던 일행은 스님께 한국에 잘 다녀오셨는지 인사를 드렸습니다. 최말순보살님께서 준비해 놓은 점심식사를 하신 후 2시 40분에 오늘 강연이 열리는 필라델피아로 출발하였으나, 차가 막혀 6시 45분경에 겨우 강연장에 도착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저녁식사도 하지 못한 채 강연장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강연은 필라델피아 도심지에 위치한 한인 성당인 Holy Angeles Church에서 열립니다.
▲ 강연장에 도착하자 이효언 펠릭스 신부님께서 사목회장님과 함게 반갑게 환영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47번째 강연이 열리는 필라델피아는 미국 북동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구는 약 155만명 정도이며 그 중 한인은 5,400명 정도로서 미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그러나 광역 필라델피아 권역의 인구는 약 401만명 가량이며, 한인은 약 24,700명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이곳에는 3.1운동 당시 재미교포와 유학생을 모아 항일 행진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던 서재필 박사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기념관이 있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비가 오는 관계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쉽게 기념관에 들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는 미국 건국의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미국 제2의 항구도시로서, 증권거래소, 세계적인 제약회사, 대규모 전자회사 등이 즐비한 펜실베니아주의 경제 중심지이며, 다국적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였습니다.
▲ 오늘 필라델피아 강연장인 Holy Angeles Church
오늘 필라델피아 강연에는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약 420여명이 참여하여 오랜만에 필라델피아에서 스님의 강연이 열리는 것에 대한 높은 호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강연장 안으로 들어서니 뉴욕, 맨하튼, 뉴저지 법당의 뉴욕정토회 신도님들이 자원봉사를 하며 스님과 일행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6시 55분에 이효언 펠릭스 신부님과 함께 강연장 안으로 입장하셨으며, 신부님은 “스님께서 성당을 찾아주셔서 영광”이라고 하시면서 “스님께서 건강하셔서 세계 100회 강연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란다”고 인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효언 신부님께 사인한 새로운 백년 책을 선물로 드리고 스님의 소개영상에 이어 7시에 연단에 오르셨습니다. 연단에 오르기 전에 십자가 위의 예수님 상 앞에서 두 손을 합장한 채 잠시 기도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저녁식사는 다들 하고 오셨는지 물으면서, 우리는 왜 괴로움에 빠지는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하시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녁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 저도 저녁을 못 먹고 왔어요. 오늘 한국에서 들어왔습니다. 여기 도착해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비도 오고 퇴근 시간이여서 길도 막히고 해서 바로 강연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다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불행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 한탄할 때가 있죠. 이럴 때 ‘아이고,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라고 말하죠. 또는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라고 말하기도 하죠. 또는 ‘아이고, 내 팔자야’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들은 다 우리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떻게 노력한다고 해서 정해진 운명을 피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한탄하게 됩니다.
이 운명론은 어떤 사고가 생긴 후에 생각을 하니까 ‘원래 정해져 있는 건가’ 싶어서 그럴 듯한데, 여기에는 인간의 책임의식이 없어집니다. 행동이 정해진 대로 일어났으니까 책임질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이라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게 된다는 측면에서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 같은 것들을 안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윤리적 책임 문제가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은 어떤 죄를 짓고 징벌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무지 즉 어리석음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쥐가 쥐약을 먹고 죽게 되었어요. 왜 쥐가 죽게 되었을까요? 1번 하나님을 안 믿어서 벌 받았다, 2번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과보를 받았다, 3번 사주 팔자에 이미 죽도록 되어 있다, 4번 쥐약인줄 모르고 먹었다, 4개 중에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4번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그것처럼 남편하고 싸웠어요. 왜 싸웠을까요? 1번 교회에 안 다녀서 벌 받았다, 2번 전생에 철천지 원수가 만나서 그렇다, 3번 궁합이 안 맞아서 그렇다, 4번 어리석어서 그렇다, 이번에는 4개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이렇게 사람한테 적용하면 벌써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마치 쥐가 쥐약인 줄 모르고 먹듯이 무지로부터 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쥐를 잡을 때는 그릇에 쥐가 좋아하는 음식을 놓지요. 좋아하는 음식이니까 쥐가 쥐약을 먹기 전에는 ‘왠 떡인가’ 했어요.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가 되었죠.
우리 인생도 이럴 때가 많습니다. 인물도 괜찮고 말도 잘하고 친절하고 좋은 차 타고 다니는 어떤 남자를 만나서 ‘나 같은 사람한테 어떻게 이런 남자가’ 하고 좋아했더니 알고 보니 사기꾼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주로 ‘좋다’ 하는 순간에 찾아옵니다. 우리는 늘 좋은 것을 쫓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업자득’ 이라고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내 탓이로다’ 라고 말하죠. 이 말을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받아들이시면 안돼요. 여기서 ‘내 탓’은 ‘나의 어리석음 탓’ 이라는 뜻입니다. 죄가 쥐약을 먹은 것은 나쁜 짓이 아니라 쥐약인 줄 모르고 먹었습니다. 이 ‘무지’로부터 괴로움이 생깁니다. 이것은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고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고 몰라서 생긴 일입니다.
어린 아이가 뜨거운 불덩어리를 쥐고 손을 다쳤을 때 이 아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뜨거운 줄 모르고 쥐어서 다친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뜨거운 불덩어리에 손을 대듯이 마치 우리 인생도 잘한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나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나의 어리석음 탓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음 깨우치는 시간을 오늘 가져보자고 하시면서 청중들로부터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총 8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사이비 종교인에게 피해를 받아 친척 간에 원수가 되거나 가정파탄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데 피해자들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십년을 함께 산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고 가슴이 아프다는 분, 통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통일을 해야만 한다는 전제가 없는 것이 오히려 남과 북에 더 이롭지 않는지 묻는 분, 결혼, 아이, 직장 등 바쁘게 살면서도 삶이 지루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떡해야 할지 고민인 분, 영어를 잘 못하는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은데 학습방법에 대해서 알려주길 원하는 분, 규칙대로 살면 마음은 편하지만 답답하고 지름길로 가고자 하면 답답하지는 않지만 불안한데 해결 방법을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에게 대해서 스님께서는 정성껏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욕심이 많아서 만족할 줄 몰라서 고민인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저는 욕심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만족을 못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느껴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베풀 줄도 모르고 제가 먼저 주는 게 너무 힘들고,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고, 항상 받는 사랑만 해서 사랑을 주는 것도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베풀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몰라서 괴롭다고 얘기 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산에 사는 토끼가 베풀 줄 알아요? 몰라요. 산에 사는 토끼가 사랑할 줄 알아요? 몰라요. 그러나 토끼가 괴롭다는 얘기를 합니까? 안 합니다.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베풀 줄 몰라도 괜찮고 사랑할 줄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괴롭다 하는 것은 연결이 안 됩니다. 토끼나 베푸는 것을 본적이 없고, 다람쥐가 사랑하는 것을 본적이 없는데, 적어도 괴로워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왜 다람쥐로 태어났나’ 하고 자학하는 것도 아직 못 봤어요.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기 밖에 모르고 삽니다. 그래도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습니다. 다람쥐도 남을 배려할 줄 몰라요. 그런데도 잘 살잖아요. 자기만 지금 심각하게 얘기하는데 그 정도는 문제가 별로 안 돼요. 뭐가 문제인가요?”
“별로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청중들 웃음)
“별 문제가 없으니까 괴로워 할 일도 없어요. 내가 대통령이 되겠다, 내가 부자가 되겠다, 이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욕심이라고 하느냐? 욕심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이 아니고 상호 모순된 관계를 말합니다. 돈은 빌려놓고 갚기는 싫다, 저축은 안 해놓고 목돈을 찾겠다, 이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데 헛된 생각을 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음에 속합니다. 제가 방금 전에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무지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욕심도 무지 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화가 나는 것도 크게는 어리석음 안에 들어갑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통의 원인은 ‘무지’이지만, 다시 이것을 나누면 상호모순적인 욕망을 탐심이라고 부르고, 나만 옳다며 성내는 것을 진심이라 부르고, 어리석음을 치심이라고 불러서, 탐진치 삼독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마음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무엇을 하겠다 하는 것은 의욕이지 욕심이 아닙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놓고 안 갚겠다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죠. 이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욕심은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욕심의 결과는 괴로움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욕심을 부추키는 것이 현실의 종교입니다. 이치로 따지면 복을 지어야 복을 받잖아요. 저축을 해야 목돈을 받잖아요. 그런데 종교는 ‘너희 아들 공부 못해도 부처님 앞에서 절만 많이 하면 좋은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하잖아요. 이것을 들어주려면 부처님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까? 부정 입학을 시켜줘야 합니다. 이 사람이 믿는 부처님은 입시 브로커가 되어야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게 아니라 부처님에게 입시 브로커 역할을 해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주류가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이치에 맞도록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아직도 우리는 부처님과 하나님을 내세워서 이런 것을 빕니다. 이런 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질문자의 얘기는 욕심을 부린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랑 받을 줄만 알지 베풀 줄을 모릅니다, 이런 것은 욕심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지금 질문자의 욕심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다람쥐를 한 번 보세요. 다람쥐도 멀리 뛸 수는 없으니까 못 올라갈 나무도 있을 것이고 계곡이 너무 깊으면 못 건너는 계곡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한탄하는 다람쥐 보셨어요? 계곡이 작으면 건너뛰고 크면 돌아가고 하지 괴로워하지는 않습니다. 다람쥐도 괴로워하지 않고 잘 사는데 질문자는 다람쥐 보다는 낫잖아요? 그렇다면 최소한 괴롭지는 않아야 합니다. 괴롭다는 것은 다람쥐보다 못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바로 욕심에 눈이 어둡거나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거나 할 때 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문자가 그것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질문자는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청중들도 큰 박수로 격려를 보내주었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들으며 무엇을 욕심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복을 비는 것이 과연 종교 본연의 역할인지 살펴보는 명쾌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긴 시간의 열강에도 불구하고 더 큰 애정을 담으셔서 스님께서는 이렇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민족이 어떻든 종교가 어떻든 모든 생명은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버렸든, 이혼을 했든, 남자가 바람을 피웠든 관계없이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신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꾸 내세워서 자신의 불행을 합리화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말했어요. 여기서 ‘모든 사람’ 이라는 말 속에 저도 들어갈까요? 안 들어갈까요? 들어가겠죠.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데 저를 왜 지옥에 빠트리시겠어요? 헤어스타일을 이렇게 좀 바꾸었다고 저를 지옥에 보내겠습니까? (청중들 웃음)
그러니까 예수님과 부처님이 얼마나 우리를 아끼고 사랑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움에 빠져 사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눈뜨면 너희들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꾸 내세운다는 말씀에 가슴이 뜨끔해졌습니다. 스님의 행복 축원에 청중들도 큰 박수갈채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습니다. 스님의 마무리 말씀까지 하니 강연이 10시에 끝났습니다. 한국에서 바로 도착하신 날이여서 시차적응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무려 3시간이나 강연을 하셨습니다. 덕분에 청중들은 스님께 무척 고마워했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서 스님께서는 1층에 마련된 북 사인회장으로 내려가셔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참가자들에게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인이 끝나고 나서 성당의 사목회 회장님 부부에게도 감사 인사로 사인을 한 ‘인생수업’ 책을 드리고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다시 한 번 이렇게 훌륭한 성당을 제공하여 주신데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2003년에 깨달음의 장을 하고 이전 2005년도에 스님의 해외순회강연 때 필라델피아의 강연준비를 맡아주었던 원성희님이 오셔서 오랜만에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반가워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행사에 도움주신 많은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행사장으로 올라와서 뉴욕에서 오신 신도님들과 필라델피아 현지 자원봉사자 3명(샘임, 장은숙, 최병학)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이번 강연은 뉴저지법당의 이영숙 총무님께서 총괄하여 진행하였고, 스님께서는 이영숙님과 뉴욕정토회 자원봉사자들에게 ‘지난주 강연에 이어서 수고가 많았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당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오늘 강연에 도움을 주신 임아네스님께는 ‘인생수업’을 사인하여 선물로 드렸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단주를 자원봉사자들의 손목에 직접 끼워주니 다들 감사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샘임님은 스님께서 이렇게 필라델피아에까지 오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가시는 길에 드시라고 과일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은 나누기 없이 뉴욕정토회 회원들의 배웅을 받고 워싱턴으로 10시 30분에 출발하였습니다. 스님과 스텝진은 저녁식사를 하지 못해 차 안에서 도시락과 김밥으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워싱턴 회관에 도착하니 밤 12시 50분이 되었습니다.
내일은 버지니아 뉴포트 뉴스에서 48번째 강연이 열립니다. 내일은 뉴포트 뉴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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