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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시의 형성기(1894-1919)
Ⅰ. 개화기 시대 구분에 대한 고찰
1. 근대의 개념
한국 근대시를 논할 때 반드시 해야 되는 전제되는 논의가 있는데, 바로 근대의 개념과 개화기 시대구분이다. 왜냐하면 근대의 개념과 개화기 시대구분 없이 한국근대시를 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한국근대시는 근대와 한국의 개화라는 특수성에서 발생하였으며 근대와 개화라는
논의와 함께 발전하였고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개화라는 말이 1880년대 사회에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 혹은 운동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개화기 역사 인식에서 유의할 점은 ‘근대’의 개념이다. 즉 시민혁명을 완수하고 자본제적 공업화를 이룩한 근대의 개념이 개화기 역사 인식에 도입된 것인데, 유럽인의 근대적 항해술과 과학무기와
공장의 상품과 그 정복의 힘을 접한 동양인은 그것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면서도 실제로는 경이와 감탄의 눈길을 보내게 되었고, 유럽 문화의 수입과 모방을 지상과제로 삼기에 급급했다. 동양에서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바로 유럽화를 뜻하는 것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개화기 시대의 ‘개화’라는 개념은 결국 서구의 ‘근대’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용어와 개념상의 혼란
우리나라에서는 시대구분을 왕조별로 구분하여 上代, 中代, 下代(삼국사기)로 구분하기도 하고, 上古, 中古, 下古(삼국유사, 동양의 다른 나라는 近古로 사용하기도 한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고대, 중세, 근세, 근대라는 용어는 서양사의 번역용어로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말이다.
일본에서는 서양의 modern을 근세 또는 근대로 1880년부터 번역한 용어로 사용하여 왔으나 시대 명칭으로는 근세라는 용어로 60여 년간 사용하여 오다가 1941년 이후에 근대라는 시대 명칭이 추가되어 근세는 근대 이전의 초기 근대라는 용어의 개념으로 병행하여 사용되어 왔고, 1950년 유물사관에 의하여 근세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서양사에 있어서 근대화의 특징은 봉건제가 일소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여 부가 증대되며 민주주의와 민족국가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하였다. 즉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 근대화를 달성한 선진국가에 있어서는 자력으로 봉건제를 타도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탄생시켰으며 산업화에 의한 부의 증대와 진보 그리고 정치적으로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민족 통일과 국민국가를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 영국과 같은 최선진국의 경우 공업은 물론 농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 분야에 걸쳐 자본주의화 되었고 다른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 있어서도 근대화가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다음은 근대사회 성립의 지표이다.
<근대 사회 성립의 지표>
① 경제적 측면-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여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경제 성장이 실현된다.
② 사회적 측면- 특권층이나 특권단체가 소멸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사회구성원이 된다.
③ 정치적 측면- 개인의 기본 인권이 보장되는 입헌의회 정치가 확립되며 국민적 통일을 바탕으로 한 국민국가가 성립한다.
④ 문화, 사상,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과학적 합리주의가 사상계를 지배하며 과학기술을 생산 과정에 응용함으로써 기아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 성취된다.
3. 개화기 시대구분의 실제
1) 18세기 후반설(영ㆍ정조 시대)
18세기 후반 영정조 시대를 근대의 기점으로 잡은 것은 자본주의 맹아론에 입각하여 사회 경제 질서의 변화를 통하여 근대의 싹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난전의 대두, 신흥 수공업자의 상인으로의 진출, 상업 자본의 생산부분과의 연결, 국제 무역의 새로운 전개, 상공업으로 성장 발전한 도시화를 들고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경제 현상이라고 본다.
18세기 후반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고 농민층도 분화가 되어 농민 중 상인이 되어 私商으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상업도시들이 발달하게 되고 수공업과 광업, 농업에서 초기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급기야 신분제의 변화가 가속화되었다. 양반사회의 낡은 인습적인 폐풍을 풍자, 비판하여 새로운 서민적 사회 기풍의 육성을 부르짖은 북학파의 탄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2) 1860년대 설(자주적 응전기)
이는 유럽 근대문명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자주적 평등적 합리적인 입장에서 근대의 기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1860년대 동학과 대원군의 혁신정책을 내세운다. 동학사상에 담겨 있는 혁명성과 평등성에 초점을 맞추어 빈부귀천, 남존여비와 인습이 타파되고 보국안민의 근대 민족주의의 주류가 동학이라고 본다. 또 대원군의 정치를 인사행정의 쇄신,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호포제 실시, 군제 개혁, 생활 개선과 의복제의 간소화 등을 통하여 근대화의 싹이 텄다는 주장이다.
인내천을 주장하며 최제우가 세운 동학은 근대적인 민족 종교의 새로운 모습이며 이는 이후 갑오농민전쟁과 기미독립운동 같은 대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정치는 근대적인 의식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실추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 정비라는 전제주의적인 입장으로 개혁을 단행했다고 볼 때 문제가 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응하는 민족사상인 동학 창시, 대원군의 혁신정치, 병인양요와 셔어먼호 사건과 같은 서양과의 직접적인 충돌 과정에서 보인 자주의식, 근대적인 평등의식으로 일어난 1860년대의 임술민란이 전국적으로 퍼진 사실 등으로 1860년대를 우리의 근대사 속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변혁기로 보고 이를 개화의 기점으로 삼고자 한다.
3) 1876년설(개항기) -통설
개항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 대부분의 민족사에 있어서의 근대사는 바로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사라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근대사의 개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의 민족사에서는 시민국가의 형성 및 경제적 근대화가 근대사의 특징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고 경제적 자주권을 잃은 민족의 근대사의 기점을 경제적 성장척도로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 민족의 반제투쟁이며 그것이 근대화의 척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해방 없이는 근대화란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개항은 한국전통문화에 대한 충격이 컸고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은 개항과 더불어 전개되는 것이니, 반제 및 반봉건으로 특징짓는 한국근대사는 병자수호조약에서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 유념해야 할 것은 항일반제투쟁이 어떠한 이념과 방법, 또 어떠한 사회계층에 의하여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즉 항일 투쟁이 전통문화와 그를 대표하는 구지배층에 인도되어 단순한 위정척사론으로 전개된다고 하면 그것은 개항 이전의 쇄국정책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항일투쟁이 반제의식에 투철한 혁신적 사회 계층에 의하여 근대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그 시기야말로 명실 공히 근대사의 기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4) 1884년설(갑신정변)
한국 근대사의 기점을 주체적인 면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근대적 변화를 처음으로 추구한 계기는 1884년 갑신정변이라 한다. 개화기 우리 역사의 당면 과제는 정치적으로 전제주의 체제를 청산하고 국민국가를 수립하며 부국강병을 이룸으로써 외세침략을 저지하고 경제적으로 민족자본을 형성하여 자율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갑신정변은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대외적으로 청국과의 종속 관계를 청산하려 했고 대내적으로 조선 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려 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개화파들이 단지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는데, 상공업에서
자본주의적 기업을 육성한다거나 경제체제를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로 바꾸기 위한
정강정책을 내 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근대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5) 1894년설(갑오개혁, 갑오농민전쟁)
개항부터 동학혁명이 일어날 때까지의 시기는 반제, 반봉건운동이 소수의 혁신개화론자에 의하여 제창되었을 뿐 그들의 주장이 정부의 정책에 크게 반영되지 못했고 민중의 동조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동학란과 그 이후의 혁신운동은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있어 확실히 전환기라 할 만하다.
동학란은 근대 시민혁명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 난 이후에 각 계층에서 개화운동이 전개되어 새로운 사회기풍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에는 물론 이념을 달리하는 구지배층도 가담하였으나, 핵심적인 세력은 명확한 반제의식과 민주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이 점에서 19세기 초의 홍경래의 난이나 1860년대의 진주민란 등과는 구별되는 근대적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동학혁명이 근대시민 혁명으로서 문제를 내포하고는 있지만 이를 계기로 이후에 법치주의 도입, 공업화 추진, 조세의 금납화, 독립신문 발간, 근대적 교육기관 설립 등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한국에 있어서 시민혁명의 효시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Ⅱ. 개화기 시가의 형성 배경
1. 시대적 배경
개화기의 역사적 계기가 된 개항(1876)은 한국사 최초의 서구질서에 대한 제도적 결합인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는 발전적 전기였다. 개항은 전통 질서 극복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새로운 침략의 출발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개화사는 기존질서의 발전적 지향과 구조적 모순의 타개라는 내부적 임무와 함께 근대와 서구라는 외재적 임무도 동시에 떠안고 있었다. 조선조 후반에 준비된 실학이라는 자생적 극복력이 완결되지 못하고 서구와 제국주의적 근대라는 강요된 타율적 변화는 바람직하지 못한 귀결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개화기는 개화와 침략을 동시에 해결해야 할 역사 임무를 띤 주체 세력이 하나로 단일화되지 못하고 서로가 일정한 제약을 지닌 채 개별화됨에 따라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개화기라는 역사 단계를 좀 더 우리 민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 역사 추진 세력은 다음 네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집권층이다. 열강의 침략 세력이 일본으로 구체화된 후 그들은 친일 세력의 주체로 부상한다. 둘째, 자주 독립의 기치를 내걸었던 관인 엘리트 계급들이다.
이들은 북학파와 역관계급이 중심을 이루는 계층이다. 셋째, 주지주의 이념에 깊숙이 침윤된 관인들, 유림, 농촌 지식인 계층을 들 수 있다. 결국 이 후자의 두 계층은 진보와 보수라는 개화기의 양대 사상적 조류를 형성했던 집단들이다. 넷째, 비지식인 계층인 일반 농민과 시민 계층이다. 이들은 때로 집단적인 에너지를 방출할 때도 있었으나 집단화, 조직화되지 못한 채 잠재적인 원동력만 소유한 미활동 계층으로 남았다. 이렇게 통일되지 못한 역사 추진 세력의 개별화는 결국 일제침략이라는 타율적 강요를 쉽게 수락하는 근본 요인이 되었다.
개화기 시가는 이런 역사적 격동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세영은 개화기 시가의 출발을 1860년대로 잡고 있는데 개화기 시가에 보이는 과도기 및 전환기적 특성은 이러한 시대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2. 사상적 배경
개화기는 다양한 사조들이 범람하던 시기였다. 전통 가치를 수호하려는 보수 지향적 사상 축과 개화로 상징되는 새로운 가치를 표방하는 진보 지향적 사상 축으로 대별된다.
개항 전의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과 서구 문물에 묻어 온 개화사상에 대처한 이론적 활로로서 내수외양론(內修外壤論)이 먼저 대두되었다. 내수외양론은 兵制, 武備의 내수로써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고, 천주교와 양화를 금하는 외양으로써 외세에 대응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리고 사교이자 사학인 천주교를 물리치고 정학인 주자학을 옹호하는 위정척사론이 있다. 이런 내수외양론은 서구 충격에 대한 한국 근대사의 최초의 사상적 반응이었다.
개항 이후 척사사상의 일각에서는 그와 같은 주화매국 의식과는 달리 개화 정책을 긍정적으로 승인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척사를 기반으로 하되 자강을 위하여 서양의 기술을 채택해야 한다는 東道西器論이 그것이다. 이는 중국의 중체서용, 일본의 화혼양재 등과 같은 일종의 본말사상으로 볼 수 있다. 이 동도서기론은 근대 국가로 지향하려는 긍정적인 의식으로서 개화론의 서론적 전개로 볼 수 있다. 이는 개화가 곧 독립이라는 등가 형식으로 나타났는데, 개화에 대한 노력과 함께 자주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임무가 환기돼야만 했다.
1896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권 운동의 전개에서 나타난 개화 의식은 한편으로는 조선조의 정치적 독립을 표방하려는 근대적 민족국가 의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자주 독립, 근대적 민족주의 등의 개화 의식의 전개는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자주권이 상실되었을 때 그 한계가 드러났다. 그 결과 자주권 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의 주류 속에 편입되고 만다. 이처럼 개항 전후에서 1910년 한일 병합까지 개화기의 사상적 조류는 위정척사론에서 왜양일체론으로 이어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는 자주의 커다란 흐름과 개항에서 개화론으로 이어지는 개화의 흐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침략과 개화가 동일선상에 놓이는 비극적 상황이 심화되어 갈수록 대립 관계에 있던 두 가지 사상 조류는 국권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서 합일되기에 이른다. 개화기 시가는 이런 사상적 조류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의병과 보수 유림의 한시, ≪대한매일신보≫ 등의 보수적 신문의 시조, 가사들은 척사 사상을 형상화하고 있고, ≪독립신문≫의 시가 및 학교 창가 등은 개화사상의 편린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시대 조류와 문학의 밀접한 접합이 개화기 시가의 특징을 이룬다.
3. 문학 저널리즘의 정착 과정
개화기의 신문, 잡지 등의 대중매체가 시대상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고, 따라서 국권회복과 문명개화 등의 계몽적 선도매체로 기능하고 있었던 만큼 순수문학에의 인식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흥학보≫에 발표된 춘원의 「문학의 가치」, ≪대한매일신보≫의 「천희당시화」 등은 문학론적인 체제를 갖춘 것이고, ≪소년≫의 문학인식 역시 주목의 대상이 되어왔다. ≪대한매일신보≫의 사회등 가사, ≪대한민보≫의 사조난은 고정적인 창작란으로 대표적이다.
개화기에 형성된 저널리즘은 이와 같이 외국 문학의 소개와 문예난의 설정을 통하여 문학인식의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해 감과 동시에 현상문예제를 실시하여 그 기반을 단단히 다져 가기에 이른다. 저널리즘의 문학자선 행위는 현상문예를 통하여 더욱 문학의 인식 폭을 확대해 갔고 문학 저널리즘적 성격을 더욱 심화해 갔던 것이다.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국문문자의 보급, 근대적 학교 교육의 증대, 기독교 및 서구 문물의 수용 등으로 시가 창작의 여건은 많은 변모를 가져왔지만 정작 뚜렷한 창작계층과 독자층의 형성은 잠재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잠재계층을 충격하여 시가 창작에 참여토록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나선 것이 저널리즘의 현상문예이다.
4. 창작 계층과 장르 의식
1) 창작 계층
개화기 시가의 창작 계층은 익명의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뚜렷한 유형 설정과 신분 성향 및 그들의 사회적 성격을 규명하기란 힘든 일이다. 개화기 시가창작에 직접 참여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 계층을 유형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형은 신문의 제작과 편집을 맡거나 통신원(기자)으로 활약하던 저널리스트 계층이다. 이들은 대체로 신문의 고정난 가사나 시조를 익명으로 발표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신채호, 박은식, 양기탁 등을 들 수 있고, ≪대한민보≫의 시조는 오세창, 장효근, 심의성 등을 예상할 수 있다.
두 번째 계층은 유학생 계층이다. 개화기의 유학 제도는 일찍이 1890년대부터 개화 진보 의지의 실천적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이 유학계층의 시가창작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속출한 학회결성에서 비롯된다. 특히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수많은 학회,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그 학회들은 대부분 기관지 성격의 학회지를 냈다. ≪태극학보≫, ≪대한학회월보≫, ≪대한흥학보≫ 등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예술성과 문학성의 창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셋째, 일반 개화 서민계층이다. 이 계층에는 학생, 상인, 농민, 공무원, 기독교 신자, 부녀자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들 계층은 개화기라는 사회 변동과 함께 신분상의 상승이 있었고, 서구 문물 수용과 새로운 변화의 전면에 부상된 계층들이다. 이 계층 형성은 개화기의 사회 변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 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 계층은 보수, 척사적인 지향에서가 아니라 서구 문물과 새로운 제도의 수용 등 개화, 변혁적 이념 지향에서 형성된 계층임을 알 수 있다. 이 개화 서민 계층의 참여로 개화기 시가는 민중 의식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중요한 특질을 획득한다. ≪독립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경향신문≫의 잡보난 시가는 대부분 이들 계층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넷째, 전문 시인 계층이다. 이 계층은 유형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적구성이 한산하다. 최남선이 대표적이고 1910년대 이광수, 최승구, 이일, 현상윤, 안서, 김여제 등이 참여한다. 1910년 이전으로 말하면 육당이 유일한데, 육당 스스로 전문시인이기를 거부했다. 신소설이 전문화된 작가층에 의해 형성되었음에 비해 시가는 단 한명의 시인에 의해 실험, 모색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전문 시인 계층의 공백이 당대성을 획득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 개화기 시가의 특수성이 있다.
끝으로 이민 계층이다. 이 계층의 설정은 특수한 관점을 요하는데 그것은 ≪신한민보≫라는 해외 망명 신문의 창작 계층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신한민보≫는 안창호가 설립한 재미 교민 단체의 공립회, 국민회의 기관지였다. 개화기 시가 형성에 있어 양적, 질적인 면에서 어느 매체에 못지않은 역할과 궤적을 남겼던 것이다.
2) 장르 의식
① 저널리스트 계층의 장르 의식
이 계층은 대부분 익명이어서 정확한 인적구성을 파악할 수가 없다. 신문제작 특히 편집과 주필 등의 주요 부서에 있던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대한매일신보≫), 오세창, 장효근, 심의성(≪대한민보≫), 장지연, 남궁억, 유근(≪황성신문≫), 그밖에 이종일, 이종문 등이 있다. 이들은 지사형 지식인으로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계보로 볼 수 있다. 을사조약 이후 정치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지식 계층은 교육을 통한 계몽 운동과 언론을 통해 일제에 대항하는 계층으로 이원화됐는데 장지연, 양기탁, 신채호 등은 후자에 해당되는 계층이다. 이들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서구문물을 수용하여 국어 국자보급, 전통 문화 및 국사 정리에 힘썼다. 이러한 출신 계층적 성향 때문에 그들이 제작한 신문은 물론 고정난의 가사, 시조들도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고정난 가사가 갖는 산문형식과 논설식 구조는 산문정신 곧 비판정신과 관련된다. 또한 일반 개화기 가사와 다른 형식 장치도 이러한 사상과 이념의 분비를 위해서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장르 의식은 민족주의 이념을 효과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장르 선택과 형식 선택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포에지의 표출이나 시 양식의 미학적 조탁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② 유학생 계층의 장르 의식
유학생들은 서구 문물을 일찍 수용하여 이미 아서구화된 일본현지에서 직접 근대화의 과정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개화나 문명지향에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중인 계급 출신들이어서 개화사상에 침윤될 수 있었고, 사회 모순의 해결 명제를 서구 문화의 수입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의 사상내용이 문화적 계몽주의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문화적 계몽주의로 묶어 버릴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 성향이 강한 것이었지만 국권 수호와 민족주의 색체를 강하게 풍기는 작품도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층의 장르 선택은 저널리스트 계층과는 달리 시조, 가사 등의 전통 장르와 창가 및 자유시 등의 신흥 장르의 선택으로 혼효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③ 개화 서민 계층의 장르 의식
서구 문물의 수용과 근대 교육 제도의 확산으로 근대 의식과 자아의식에 눈뜬 이 계층은 독립신문에서부터 시가를 발표하여 시기적으로 가장 빨리 시가 창작에 참여하고 있다. 기독교 수용과 그에 동반된 미션계 학교의 설립이 그 주요한 배경을 이룬다. 대부분 익명 아닌 실명으로 자기 성명과 신분, 직업, 주소 등을 자세히 밝히고 있는 점은 근대 시민 정신의 발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반 서민 계층의 시가 창작은 개화기 시가의 창작과 장르 형성에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에 내재한 발랄성이 그대로 시가에 투사됨으로써 투철한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의 형상화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법의 천착이나 양식적 조착 등 예술적 차원에서의 장르 의식의 깊이는 보여 주지 못했으나 개화기에 형성된 시민 정신과 민중의 발랄성이 투영됨으로써 개화기 시가가 당대성을 획득하는데 커다란 밑받침이 되고 있다.
④ 전문 창작 계층의 장르 의식
육당의 출현은 개화기 시가의 창작 양상에서 전환적 국면을 가져오게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창작 행위의 무의식적 단계에서 의식적 단계로의 전환이다. 육당 출현 이전에는 창작 행위가 민중들의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문학 저널리즘의 비전문성에서 전문성에로의 전환이다. 비전문적인 창작 양상을 보이던 것이 ≪소년≫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소년≫ 역시 교과용 도서에 준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시가에 대한 배려는 다른 저널리즘에 비해 특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 저널리즘의 전문화 역시 육당의 문학에 대한 인식, 특히 시가 장르에 대한 인식의 소산으로 보인다.
셋째, 목적 문학성의 순화 및 희석화에로의 전환이다. 목적성과 경직성은 신문 매체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학회지 등 잡지로 전이되면서 다소의 순화 징후를 보이다가 ≪소년≫지에 와서 상당히 후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목적성의 희석화는 예술성의 조탁에 눈뜨게 하는 계기를 가져오는데 ≪소년≫에 나타나는 개인 목소리의 대두와 양식적 조탁의 징후이다. 또한 시형의 변화 모색과 율격 장치의 다양한 실험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모들은 곧 육당의 장르 의식의 투영으로 볼 수 있다.
⑤ 이민 계층의 장르 의식
그들의 문학 의식은 국권 회복과 일제에 대한 저항, 비판의 차원에 머물고 순수 서정의 발아나 개인 정감의 표출은 미약하다. 목적의식이 강하게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대 들어 형태적 조탁과 새로운 운율을 모색하여 뛰어난 자유시 작품을 상당수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시가 장르에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Ⅲ. 개화기 시가의 장르 유형과 특징
1. 장르 유형
개화기 시가는 전통 장르와 새로운 장르의 갈등과 혼효가 특징적인 현상이었던 만큼 이러한 시대적, 문학사적 특성을 고려하여 전통 장르와 신흥 장르로 이원화함이 개화기 시가 장르 이해에 효과적일 것이다. 따라서 개화기 시가 장르는 전통 장르로서 가사, 시조, 한시, 언문풍월, 민요를, 신흥 장르로서 찬송가, 창가, 신시, 자유시 등 9종의 장르를 설정할 수 있다.
개화기를 근대 문학의 출발기로 본다면 노래체로 불려진 찬송가, 창가, 민요 등은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 문학은 ‘詩’와 ‘歌’가 분리된 말하자면 ‘눈으로 읽는 문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가, 민요, 찬송가는 근대시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하지만 개화기는 근대 문학의 여명기이긴 하나 동시에 고전 문학의 끝자락이 맞물린 전환기였다. 따라서 개화기 시가는 고전 문학과 근대 문학의 특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가창 장르의 설정은 불가피하다. 더욱이 자유, 평등, 민권과 같은 근대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화기 시가에 포함돼야 한다.
1) 전통 장르
① 가사
개화기 가사에 대한 기존의 장르 명칭을 보면 개화기 가사, 개화 가사, 개화 노래 등이 통칭되었고 그 하위 개념으로 동학 가사, 의병 가사, 사회등 가사, 내방 가사 등이 논의되었다. 개화기 가사는 넓게는 1860년대 동학가사에서 좁게는 1896년 독립신문소재 가사로부터 시작되어 1910년대 말까지 개화기 전 기간 동안 창작된 장르이다.
개화기 가사는 4.4조 4음보의 연속체 시가 장르의 전통적 양식 특징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찬송가, 창가 등의 상호 작용에 의해 분절 및 반복구 첨가, 단형 지향 등의 변형적 특징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개화기 가사는 노래로 불려지지 않은 4.4조, 4음보의 연행체 시가로 규정된다. 따라서 합가나 후렴이 붙어 가창되었거나 가창을 전제로 한 4.4조 시가들은 가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가사는 4.4조, 4음보, 연행체를 기본 양식으로 하되 가창되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는 장르이다.
② 시조
개화기 시조는 시조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집중적인 창작양상을 보여 주었고 개화기의 역사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 반영하고 있다. 1906년부터 1918년까지 무려 660여 수의 시조가 발표되었다. 10여 년의 짧은 기간에 660여 수의 분량은 시조 전사를 통해 특징적인 창작 양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제 표출의 효과적 전략을 위하여 형식의 파괴와 변형도 서슴지 않았고, 사장되었던 사설시조까지 동원하여 시대적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개화기 시조의 장르상 특징은 3.4조 3장 6구의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종장의 종결어미 생략, 3.5.4.3의 자수 배열의 혼란, 2행 및 4행시조의 출현 등 장르 변형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민요조의 개입과 가사와의 상호 작용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③ 한시
개화기 문학이 국문학사에 있어서 신문학의 출발기임과 동시에 고전문학의 최종단계였다는 과도기 및 전형기적 특성을 고려할 때 한시는 당연히 개화기 시가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시는 뚜렷한 창작 계층에 의한 의식적 문학행위였고, 그 창작 주체가 또한 위정척사를 내세운 민족 주체 세력이었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개화기라는 역사상황을 뚜렷이 인식함으로써 士의식의 전통이 주체적 극복의지로 변모될 수 있었고, 또한 문인이 시대에 처하는 역사적 의무를 발견함으로써 그 노력이 쉽게 우국적인 저항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개화기의 한시는 문학이 시대정신과 긴밀한 대응관계를 가질 때 그 존재의의가 더욱 뚜렷한 것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장르이다.
④ 민요
민요는 그 민족의 기록이며, 민족과 민중의 영광과 희로애락을 송두리째 그리는 내적 생활의 영상인 것이다. 이런 민요의 특질이 개화기라는 역사 상황에 임하여 적극적인 참여의 노래로 승화되어 발랄성이 그대로 형상화되고 있다. 민중 전체, 민족 전체가 당면한 역사상황을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반영, 비판한 점에 개화기 민요의 특성이 있다.
개화기 들어 민요는 구전 장르의 차원을 벗어나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그것이 창작민요로의 변신이다. 풍속 및 항일민요가 구전되는 한편, 신문잡지 등 개화기 저널리즘을 통하여 개인의 창작민요가 상당수 발표되고 있다. 원래 민요는 창작주체와 향수층이 다중이라는 특징을 갖는 장르였으나 개화기에 들어서 창작주체가 개인으로 대체되고 향수층도 신문잡지의 독자층으로 변모된다. 또한 구전문학에서 기록문학으로의 변신도 개화기 민요의 중요한 특징이다. 즉, 개화기 민요는 노래하는 장르에서 보고 읽는 장르로 성격전환을 하게 된다. 개화기 저널리즘에 발표된 창작민요들은 가창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보고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두 가지 변화, 즉 창작주체 및 향수층의 개인화와 구비전승에서 기록문학에로의 성격 전환은 개화기 민요장르의 중요한 변모임에 틀림없다.
⑤ 언문풍월
언문풍월이라는 시가장르는 1910년대를 전후해 풍미한 일종의 변종장르이다. 그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소급되며 육담풍월, 국한문잡조시 등의 전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장르였다. 이 언문풍월은 한시 형식을 모방한 일종의 장르 패러디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시 양식 중 7언절구 및 7언율시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거기에 한자 대신 국문자를 사용함으로써 순국문체 한시 형식의 독특한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이 언문풍월 장르의 대두는 개화기에 들어 급격히 변모된 문체의식의 한 반영으로 보인다. 개화기는 국문체와 한문체의 갈등이 심하게 나타나던 때였고, 오히려 개화 서민계층의 신분상승, 신채호 등의 민족주체의식이 합세하여 국문국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마련됐던 때이다. 이러한 국문의식이 팽배하던 시대환경이 언문풍월 장르를 정착시키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진다. 즉 한시 형식과 국문매체의 결합 양식은 당대의 한문체와 국문체의 갈등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이 양자 사이의 조화 및 병립을 추구하려는 시대추이가 결국 시가형식으로까지 심화된 것이 언문풍월이라는 장르였던 것이다.
언문풍월에 대한 언급은「천희당시화」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단재는 우리의 국시가 있는 만큼 우리 글로 시가를 지을 것이지 중국시에 의존하여 그 형식을 모방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단재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언문풍월은 한시형식을 모방하긴 했으나 우리말을 시어로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돼야 할 것이다.
2) 신흥 장르
① 찬송가
찬송가는 비록 종교 교리 전파가 주된 목적이긴 하였으나 개화기라는 가치질서의 전환기에 정신 의식면에서 끼친 영향과 개화기 시가 형성과정에서 형태 리듬상의 변화에 하나의 충격소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시되어야 할 장르이다. 정형률 파괴를 통한 자유시 형성에 끼친 영향은 거의 직접적인 양상을 띠었다. 또한 교회를 중심으로 널리 민중에 보급됨으로써 창가 보급의 전초역할을 하였다.
② 창가
개화기 시가 장르 중에서 장르 개념과 범주에 관한 논의가 가장 다양했던 것이 창가이다. 창가의 장르적 개념은 서양 악곡의 가창을 전제로 한 노래체, 즉 음악의 장르이다. 따라서 그 시적 측면이라 할 가사는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도록 분절, 후렴구, 합가 등의 형식을 수반하며, 그 율조 역시 전통적인 4.4조를 비롯하여 이 시기에 등장한 6.5조, 7.5조, 8.5조 등 음수율을 채택하고 있다. 창가는 7.5조를 기본 율격으로 하고, 가창하기 위하여 후렴구가 붙는다. 또한 한 곡에 여러 편의 가사를 노래 부르기 위해 첩연 형태를 갖추고 있다.
③ 신시
신시는 신시 및 신체시라는 이중의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신시의 장르 규정에 있어서도 두 가지 양분된 견해가 보이는데, 창가, 가사 이외에 자유율의 성향을 갖는 모든 시 형태를 범칭하는 광의의 개념과 일정한 형태적 특징을 갖는 것으로만 국한하는 협의의 개념으로 나뉜다. 신시는 리듬의 반복성, 자수의 제약성 등을 드러내어 정형시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정형시와 자유시의 혼합 양식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신시의 양식 개념도 반율문, 반산문의 시, 준정형시, 준자유시 등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④ 자유시
개화기 시가 장르에서 자유시의 설정 문제는 가정적인 단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창가, 가사 등과 다르게 정형률의 파괴가 현저하게 드러난 것과, 협의 개념의 신시적 형태 유형을 벗어난 시가들을 하나의 장르 범주로 묶을 필요성이 생긴다. 자유시의 장르 개념은 시 형태뿐 아니라 시 정서나 기법 등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형태상의 자유로움을 절대적 기준으로 하여 리듬상의 자유로움을 보인 시를 곧 자유시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형태 리듬 면에서 정형률의 리듬이 파괴되고 신시의 형태적 유형성, 즉 행연상의 자수 구속과 노래체의 잔존 형태들이 거세된 시들로 규정할 수 있다.
2. 장르 선택의 배경
1) 시가 장르의 기능과 성격
개화기 시가가 산문 장르에 비해 개화기라는 역사공간의 수용과 인식에 기능적일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해명으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첫째, 시가 장르의 본질적 속성문제이다. 율문 양식이 서사양식에 비해 자기 체험을 줄거리 없이 묘출하는 것이라면 개화기적 상황을 드러내기에는 율문 양식이 적합했을 것이다. 개화기라는 혼란기, 전형기적 상황을 논리적 인식을 토대로 하여 완결된 성격으로, 줄거리를 갖춘 양식으로 표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시가 장르가 갖는 비전문성과 비상업성을 들 수 있다. 이는 창작 계층과 창작 매체적 측면, 즉 문화 사회학적 측면의 문제이다. 신소설은 이미 직업적 문사라는 전문 계층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판매, 보급 과정에서도 시장성을 띤 상업주의적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시가는 창작 계층이 집필진 및 일반 독자와 같은 익명 계층이었고 상업주의적 속성은 전혀 배제된 장르였다. 이러한 양자의 대비적 차이에 의해 시가 장르가 자율성을 획득하고 비판, 저항의 민중적 발랄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사실들이 시가 장르가 산문 장르에 비해 개화기라는 역사 상황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첨예하게 조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2) 가창 장르의 효용성
개화기 시가에 있어서 장르 인식은 ‘시’와 ‘가’가 분리되지 않은 ‘시가’의 미분화 상태에 머물러 있다. 청각적인 것에 호소하는 가의 장르와 시각에 의존하는 시의 장르가 혼효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시보다도 가의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이 개화기였다. 가창 의식이 개화기 시가의 장르 의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바로 가창 의식의 팽배, 노래체 장르의 편향이 개화기 시가의 한 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노래체 장르가 갖는 반복적 기능 때문인데, 리듬은 여러 잡다한 내용에 질서를 주어 일반화시키는 주술적 기능을 가진다. 개화기 시가의 리듬은 주술적 기능의 의식적 외형이었던 것이다. 또한 율문은 리듬의 반복에 의해 통일적 질서가 부여되고 회상과 환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리듬의 공리적 측면이 개화 지식의 보급과 문화사적 계몽에 효과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가창 장르 자체를 사회 기능적인 차원에서 인식하면 그것이 국민 대중을 격동, 고무시킬 수 있는 방편이 된다. 이는 물론 리듬 의식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다. 가창한다는 특성 자체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고무하여 협동심과 행동력을 유발하는 좋은 촉진제가 된다는 것이다.
3) 전통 장르의 선택 요인
왜 개화기에 들어 모든 제도, 양식들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시가문학에서 구태여 전통 장르를 그대로 습용하고,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장르보다 더 효과적인 것으로 기능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첫째, 민족적 편향성 문제이다. 가사와 시조는 바로 우리 민족의 생명 리듬의 출렁거림이라는 인식이다. 우리의 전래 시가를 선택하고 그에 동일화함으로써 자기 회복과 자기 전개를 통하여 민족적 동일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둘째, 전통 장르가 갖는 형식적 친숙함과 그에 의한 기능성의 문제이다. 즉 모든 계층에 익숙한 장르를 선택함으로써 일차적으로 형식적 저항감을 없애고 그로 인한 파급 효과를 인식했던 것이다.
시조의 경우 시조 장르가 갖는 민족 편향성, 보편성, 친숙성 등의 성격뿐 아니라 시대 적응성 역시 시조로 하여금 개화기의 중심장르가 되도록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시조는 그 자체가 고형화된 굳어진 형식이 아니라 변화하는 주변 여건에 적응하여 형식적 변화를 가져오는 장르이다. 가령, 개화기 시조에서 종결 어미의 생략은 유장한 어미를 생략함으로써 힘찬 결의와 강렬한 주제 전달의 효과를 가져오는데, 시조 장르의 가변성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사 장르가 갖고 있는 반율문, 반산문적 속성, 특히 산문적 속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신소설이 담당할 수 없었던 산문적 기능과 때로는 신문의 논설과 사설 등의 대행 역할까지 맡을 수 있었다. 여기에 율문적 속성이 가세하여 가창 장르가 갖는 시대적 기능까지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신흥 장르의 선택 요인
창가가 개화기 역사 공간에서 맡았던 주요 역할은 지식 분배와 문명개화의 전파였다. 개방 이후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 문물의 수용과 전파는 각종 매스미디어를 족출케 하였고 이와 아울러 가창 장르인 창가가 그 한 몫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노래체와 7.5조의 반복적 리듬이 갖는 기능의 수행에 가장 알맞은 장르가 바로 창가였다. 가창으로서의 기능적 역할은 교리 전파를 위해 찬송가가 활용되었던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이러한 찬송가의 기능적 속성이 이후 7.5조 창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창가의 대중성과 다목적성, 그리고 효용성을 한국 개화기 상황에 그대로 옮겨 심은 것이 육당이 창가를 선택한 동기였다.
신시의 선택은 육당이라는 개인의 장르 선택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그의 신시 개척은 효용론적인 관점에서 신시가 계몽적인 진취 정신이나 시대정신을 투영한 것이라도 가사, 시조에 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시대 상황의 적극 수용과는 다소 유리된 상태의 율문 양식이었다는 부정의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그리고 예술 내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형태 운율상의 자유로움, 서정과 자아 의식의 징후를 드러냄으로써 근대 자유시 개척의 기반이 됐다는 긍정적 측면이다. 개화기 시가의 장르 선택이 대중성, 시대성, 효용성 등에 의한 것이었음에 비해 신시의 장르 선택은 육당 개인에 의한 예술적 자각이었음이 대조를 이룬다.
Ⅳ. 1910년대의 시
1. (근대) 자유시의 개념과 주제의식
자유시는 양식화된 정형률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하여 개성적인 운율에 의해 형성된 시이다. 정형시는 형식을 틀 속에 가둠으로서 시인의 상상력을 방해하는데 비해 자유시는 이와 반대로 시인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유시는 정해진 일정한 틀이 존재하지 않아 표현 내용에 따라 그 형식이 결정된다. 즉 개성적 운율에 의하기 때문에 시인의 개성만큼 시형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렇다고 시의 형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재율의 통제를 받는다. 즉 자유시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 시적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예사조면에서 볼 때 자유시는 낭만적 패턴의 장르이다. 정형시는 통제와 질서, 규범과 형식을 존중했던 고전주의 패턴이고 자유시는 인간의 개성과 자유로운 정신, 논리와 형식을 초월하는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다.
서구의 문학사에 있어서 근대시 혹은 자유시라는 용어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비교적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에서 18세기 초까지 시는 ‘시학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 명백하게 시행(Vers)과 각운(Reim)을 갖춘 문학을 지칭’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의 근대시 혹은 자유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일체의 각운은 물론 최소한 시행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은 텍스트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구의 문학사에서는 근대시 혹은 자유시의 개념 정의가 운율적인 요소에 기반을 둔 시의 형태론적인 측면에서도 가능했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의 경우는 근대시 혹은 자유시라는 용어가 서구의 문학사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역사적 특수성을 갖고 있다.
문학사 서술을 보면 근대시와 자유시라는 용어는 거의 변별성 없이 쓰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근대시는 자유시의 내재율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자유시는 근대시의 가장 확실한 시 형태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각각의 문학사 서술이나 근대시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근대시와 자유시라는 용어가 서로 다른 가치판단에서 사용됨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유시라는 용어는 근대시라는 용어를 이루는 부분집합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근대시는 근대적 형식에 근대적 내용을 담은 시라는 인식 하에, 근대적 형식은 바로 자유시의 개념으로 치환된다. 즉 자유시는 정형시의 율격적 정형성을 벗어난 것이라고 단순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시사의 경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사설시조에서 근대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연구 관점은 사설시조의 산문화 경향을 정형률의 지양으로, 정형률의 지양을 바로 자유시의 형태로 연결지어, 사설시조를 근대시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더 나아가 사설시조가 바로 자유시라는 극단적인 단정으로까지 논의가 이어지기도 한다. 반면 근대적 내용을 중심으로 근대시를 규정하는 관점에서는 사설시조의 내용이 보여주는 탈중세의 징후에 주목하여, 사설시조에 나타난 현실지향적 성격에서 근대시의 출발점을 찾는다. 혹은 개화기의 개화사상이나 계몽주의의 내용소를 근대시의 특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또는 감정의 자유로운 발로와 관련될 경우 서정시의 양식에 주목하여 시에 나타난 서정적 자아의 세계인식을 중심으로 근대시의 개념을 정의하는 관점도 있다.
예술의 소통양식이라는 측면에서 근대시의 형성에 주목하는 입장도 있다. 이는 노래 부르는 시에서 눈으로 보는 시로의 전환에서 근대시 정립의 성격을 보는 것이다. 노래 부르는 시에서 눈으로 보는 시로의 전환은 근대적인 인쇄, 출판의 형태와 관련되는 시의 대중적 유통과 수용 방법의 변화에 주목한 것이다. 근대적 인쇄, 출판 형태를 통한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눈으로 읽는 시로의 전환이 근대적 요소의 하나임을 인정할 수 있다.
한국시사에서 자유시는 1910년대라는 역사적 현실을 비껴갈 수 없다.
한시와 시조 등의 봉건적 시가양식을 비롯하여 창가, 잡가, 민요 등의 정형적 율격을 지닌 노래형식들은 식민지적 근대화에 따른 낙관성을 구가하거나 현실의 갈등과 모순을 은폐시키고 천박한 계몽성을 전파하게 된다. 즉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 주체의 생산을 돕고 식민지 권력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통제력을 안정되게 확립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당대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자유시의 양식이 지닌 의의는 매우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유시는 기본적으로 정신과 영혼이 자유롭고자 하는 주체가 성찰적 이성을 관철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성립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민지 권력과 그에 영합하는 세력들은 자유시 형식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지속적으로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 감성에 있어서 어떤 규율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이는 형식적 자유로움에 따른 정신의 자유분방함이 결국 세계에 대한 성찰적 이성의 관철로 이어져 식민제 체계를 부정하게 될 것을 우려한 까닭이다.
2. 자유시의 정착 과정
1) 자유시의 정지 작업
한국 근대시사에서 자유시 형성의 기점은 상당한 진폭을 나타내고 있다. 육당의 신시로부터 주요한의 「불놀이」에 이르기까지 근 10년간의 시간적 진폭을 갖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한반도」(1909년 8월)를 자유시의 효시로 보는 설, 육당의 「태백산 시집」, 김억의 「야반」등을 효시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국 시사를 통시적으로 확장해 볼 때 자유시형의 대두는 하나의 개혁적 의미를 띠고 있다. 고시가에서 향가, 별곡, 악장, 시조, 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고전 시학은 형태미 곧 정형, 균제미가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형의 파괴는 곧 새로운 시학의 개진을 뜻하는 것이었다. 자유시의 출현을 위한 기존 시형의 변형 모색은 서구 문화의 이입에 영향을 받고 있는데, 그러한 것이 찬송가의 보급이었다. 찬송가의 영향은 리듬의 다양성에 의한 정형률 탈피와 율조의 변화에 국한되고 시행의 변화에 의한 자유시의 모색은 오히려 자생적인 양상을 띤다.
한국 자유시는 1890년대 찬송가의 영향에서 신시에 이르는 동안 여러 가지 실험과 모색을 통해 개화를 위한 정지 작업을 꾸준히 개진했고, 이후 보들레르, 투르게네프 등 서구 산문시의 번역과 소개 과정을 거치면서 기본 골격을 튼튼히 다져 간다.
2) 자유시의 선구, 「태백산부」와 「태백산의 사시」
정형률의 파괴 및 자유율의 모색 작업을 거쳐 등장한 최초의 자유시는 ≪소년≫지 1910년 2월호에 발표된 최남선의 「태백산부」와 「태백산의 사시」였다.
혼자 우뚝/모든 산이 말큼 다 훗훗한 바람에 항복하여
녹일 것은 녹이고 풀릴 것은 풀리고/아지랑이 분바른 것을 자랑하도다
그만 여전하도다/흰눈의 면류관이나 굳은 얼음의 띠나
어디까지든지 얼마 만큼이든지 오직 <나>!
나의 눈썹 한 줄, 꼬딱지 한 덩이라도 남의/손은 못대여!
우러러보니 벽력같이 내 귀를 때린다. 이 소리!
꽃없다 진달래 한 포기라도/<나는 사나이노라>
-최남선, 「태백산의 사시」 중 ‘춘(春)’
「태백산의 사시」에서는 4.4조나 7.5조 등의 반복적 리듬을 찾을 수 없고 신시처럼 각 연 대응 행의 자수 일치 현상도 보이지 않는다. 이미지를 통한 시적 형상화도 성공적이고 비유법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아울러 자아 정체성의 구현이라는 근대 의식의 단면도 엿보인다.
3) 자유시 창작의 모태, ≪학지광≫과 ≪청춘≫
≪학지광≫은 1910년대 자유시 창작의 산실이 되는데, 1914년 2월 안서의 「이별」등 두 편의 자유시를 선보인 후 1915년 현상윤, 최승구, 김억, 김여제 등의 자유시 9편이 발표되었다. ≪청춘≫지에도 1914년에 3편, 1915년에 3편의 자유시가 제작되어 자유시 창작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국 자유시의 실질적인 출발 기점은 1915년 전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1914년은 한국 자유시의 개화를 위해서 기념비적인 해였다.
≪학지광≫의 시로 대표되는 1910년대 시는 개체의 자유에의 지향이라는 근대적 의식의 시를 선보이기는 하였으되, 근대시의 출발점으로서의 역사적 과제를 이상적으로 펼치지 못하고 개화기와 식민지라는 시대적 특수상의 격류에서 식민지 지식인들의 우울한 정조와 토로를 담은 시로 굴절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소설에 비해 이 시기의 시들이 교훈성을 거부하면서 중세적 시의 틀을 벗어나 개인 내면으로만 잦아들어가게 된 양상은 시의 발전적 모색의 움직임이라 해석할 수 있다. 개인과 세계와의 긴장 속에서 자아의 의식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근대시의 수준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매몰되었던 자아를 개체의 눈을 통해 발견하고 불허되었던 개성적 상상력 또한 가능하게 되는 계기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구하던 개체의 이상적인 모습은 비록 개인의 사변적 공간과 같은 시에 갇혀버렸지만 그렇게 얻은 모색의 결과는 근대시의 출발점으로서 평가될 만한 의의가 있다.
오너라! 오너라! 내의 적은새!/-멀니 곳업는 구름 위에서 아득이지 말고-
봄과 녀름에 즐기든 내의새!/늦즌 가을의 부르짓는 것츨은 슬픈 바람은
부질업시나무의 닙은 옷을 벗기여/고깃몸을 지으려하나니
너의 갈곳이 그어데냐?/내의적은 새! 내의 적은새! (중략)
오너라! 오너라! 내의 적은새!/우뢰, 번개, 우렁번쩍-
우레, 번개, 우렁번쩍!-/큰비 오랴나니-나를 바리고 가랴느냐?
날아가지말고 돌아오라/ (중략)
내의 집업는 적은새!/나도 너딸아가리-
-김억, 「나의 적은새야」일부
‘새’는 안주하는 현존재의 공간을 벗어나 험한 미지에서 새로운 사상을 꿈꾸고 싶어하는 시인 의지의 표현이다. ‘새’로 표상되는 나의 내면과 ‘나’와의 대화를 통해 현실에 묶여 그냥 주저앉아 안주하고 싶어하는 ‘나’와 폭풍우로 뛰어들더라도 당위적으로 성취해야 할 것을 의식하고 있는 자유로운 자아로서의 ‘새’의 대립을 드러내고 있다. 상징과 의인화의 방법 등 기법상의 세련은 이전의 개화기 시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3. 상징시의 수용과 전개
1) 상징시 정의와 그 수용 의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징주의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자연주의 및 고답파에 대한 반동으로, 보들레르ㆍ베를레느ㆍ랭보ㆍ말라르메ㆍ발레리ㆍ구르몽 등이 그 중심인물이 되어 전 세계로 확산시킨 세계적 문예 운동을 말한다. 인간의 정신과 직관과 힘을 중히 여기는 동적인 철학 사상을 그 이론 및 철학적인 근거로 하여 시작된 상징주의 시는, 그 대상을 표현할 때 지칭하는 대신에 ‘암시’하여 연상을 통하여 정서를 불러 일으키려하는 간접 표현의 시(a poetry of indirection)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상징주의자들의 근본 목표는 무의식의 세계를 통하여 일상적인 의식 세계의 수준에 있어서는 얻을 수 없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 실현 방법의 하나로 시는 하나의 사상이 다양한 상징을 통해 완곡하게 표현되어야 하며, 시를 이해하는 방법도 ‘직관과 감성(intuition and feeling)’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바우라는 상징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상징주의의 특징은 신비주의에 있다. 상징주의가 가지는 신비주의는 과학,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를 반대한다. 둘째, 상징주의는 이상적인 미의 세계에 대한 추구이다.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고집하고, 그 이상미의 세계가 예술에 의하여 실현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셋째, 상징주의는 매우 복잡하고 막연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들은 사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만 상징에 의하여 서서히 막연하게 환기한다. 넷째, 상징주의는 음악성을 존중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시와 음악을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규칙적인 율동이나 전통적인 각운의 형식이 방기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상징주의 시 이론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대개 1916년 전후부터 1920년 전후로 인식된다. 이제까지 한국 상징주의 시의 전개 과정을 논의해 온 논자들은 거의 일관되게, 시기는 상기 시기로, 도입선을 ≪학지광≫을 거쳐 ≪태서문예신보≫로 하여 “이광수ㆍ최남선 류의 계몽주의 문학관을 극복ㆍ청산하고 새 시대의 시문학 전개를 가속화시킨 것”으로 그 의의를 평가하고, “오늘날 우리가 향수하는 문학 작품의 거의 확실한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에 상징주의 이론이 수입되던 시기는, 그 시대의 특수성 때문에 다음 두 가지의 전제 조건을 문학에 부여하고 있다. 첫째는 이 시기가 우리 역사상 대단히 곤궁하고 핍박받던 시기였으며, 때문에 시대가 주는 중압감으로 인해 파행적인 형태와 내용의 문화가 산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당시 한국 문단의 현실을 볼 때 신채호ㆍ박은식ㆍ한용운 등의 효용론적 문학관과 이광수ㆍ최남선 등의 계몽주의 문학관이 지배적인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 《泰西文藝新報》의 기본 지향점
“태서문예신보”는 1918년 9월26일 발행인을 尹致昊로, 海夢 張斗徵을 주간 겸 편집인으로 삼아 창간된 타블로이드 판의 순수 문예주간 잡지이다. 1919년 2월17일 통권 16호를 끝으로 폐간된 것으로 알려진 이 잡지는 출발부터 외국 문학의 국내 소개와 도입에 발행의 목적이 있음을 뚜렷이 했으며, 호를 거듭해 갈수록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키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윤치호는 여기서 이 잡지가 태서의 여러 문학 작품들을 문학 대가의 붓으로 직접 본문에서 번역ㆍ발행한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윤치호의 창간사는 우리에게 몇 가지 점을 확인시켜 준다.
첫째는 《태서문예신보》의 향후 논지가 서구적 가치관 및 서구 문화 우위론에 입각한 개화사상을 담게 되리라는 판단이다. 그의 논리는 개화가 즉 구국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던 개화기 급진 개화파의 주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자칫 당시 일제의 살인적인 무단 통치하에 신음하고 있던 민족의 현실을 망각하고 개화 지상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극히 위험한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둘째는 당시 한국 사회의 자생력과 민중의 역량에 대한 불신과 일방적인 폄하의 시각이다. 우리 조선이 너무도 “남이 먼저 하기를 기다리며, 남이 하여 주기를 바란 결과로 오늘날 이 사회ㆍ세계에서 낙오자의 멍에를 메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문학의 효용성을 말한다. 우리 민족 쇠퇴의 근본 원인이 “도덕적인 것. 곧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타, 무신(無信), 사회성의 결핍 등” 타락한 민족성에 있다고 주장한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과 그의 계몽문학에 대한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당시 우리 민족의 지상 과제는 재론할 필요 없이 ‘반제(=독립)’, ‘반봉건(=근대화)’의 현실 투쟁이었고, 이 두 가지는 결코 독립해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구해야만 하는 과제였음을 상기할 때, 이런 시대적 요구와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이중 ‘반봉건(=근대화)’의 논리에만 충실하여, 이를 편파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태서문예신보》의 논지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그릇된 현실 인식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고 필연화하게 되는 반민족적인 현실 인정의 결과를 낳게 될 여지가 다분한 것으로, 이 잡지가 당시 민중들과는 유리된 채 일부 개화 지식인 및 청년 학생(주로 일본 유학생)들만의 잔치상이 되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사게 한다.
셋째는 창간사에서 보인 발행인의 의도와는 약간 달리 실제로는 이 잡지의 문예면은 시가쪽에 편중되어 있으며, 특히 번역 외에도 많은 시가 쪽의 창작품들이 발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은 대개 同報가 주장하고 있던 ‘개화’를 시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외형적인 표현에만 치중하여 받아들인 것으로, 시대적 대응이 거의 완전히 거세되어 있다. 따라서 당대의 시대적 진실에 기초한 삶의 지평을 제시할 수 있는 산문 문학을 제대로 산출하지 못한 채, 감정을 순간적으로 표출하는 시가 장르를 선택하게 된 것이고, 그 중에서도 상징과 언어 표현에 치중한 일단의 시가 번역되고 창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각 논자들의 서구 상징주의 시 이론 수용 양태
① 雪園 白大鎭(1894~1967)의 상징주의 소개
설원은 “조선의 현실은 물질문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 혜택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작용으로 인생에 대한 암면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은 자신에게 닥친 시대를 항상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당연히 이 현실의 암면을 그려야 한다. 이런 문학이 당대에 필요한 문학, 즉 ‘자연주의 문학’이며 이것이 ‘인생을 위한 문학’이다.”고 말했다. 즉 그 시대의 예술가로서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개인의 안일과 보신만을 원하여 시대의 고통을 진실되게 보지 못한다는 데서 그에 대한 불만과 비난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원의 문학론이 철저하게 공리적 효용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시대를 보는 설원의 인식 태도는 상당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피상적이고 황당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되는 반역사적ㆍ반민족적인 현실 대응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설원이 계속 반복하고 있는 ‘물질문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면, 설원의 반역사성ㆍ반민족성은 쉽게 파악될 수 있다. 설원의 주장에 따르면, ‘물질문명’이란 우선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와 서구의 물질문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설원의 시대에 있어 이 서구의 물질문명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들어온 것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또 다른 ‘상징(symbol)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문명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현실적 고통과 비애가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결과적으로 존중하고 추인하는 결과가 되는 것으로 이는 그가 현실 모순의 본질에 대한 충분하고도 정확한 이해가 없이 잘못된 현상을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그가 말하는 상징주의는 첫째, 개인주의의 예술적 출현이며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이며 둘째, 예술의 흥미란 예술가된 태도와 표현법 곧 내용과 형식으로 볼 수 있으며 형식 방면에 큰 혁신이 발생했다는 것이며 셋째, 서술적 표현을 피하고 암시에 의한 시작법이며 넷째, 상징이란 진리의 정수를 담은 독창ㆍ인상을 운율적 암유로 발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상징주의란 근본적으로 시의 유희적 조탁을 거부하고 각자 나름의 인상대로 표기하는 자유시 운동의 선봉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론 소개 자체만으로 보아도 설원의 상징주의 소개는 시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서술하기를 피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시는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라는 점들을 지적하여 어느 정도 정확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정된 지면으로 인한 서술의 불철저ㆍ개념적이며 개괄적인 언급 등으로 본격적인 상징주의 시 이론의 도입은 아니라고 하겠다.
② 안서의 상징주의 시 본격적 도입
안서는 “예술이 본질적으로 개혁자이며 모방자로 인생을 향상시키며, 개혁시키며, 창조시키며, 발전시키며, 모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예술의 향상은 인생의 향상이며, 인생의 향상은 예술의 향상이니 참다운 현실적 생활 또한 예술적 생활의 시작함에 따라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런 안서의 주장은 “인생을 위한 예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시대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소한 지식 청년의 외침 이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오스카 와일드적인 문학ㆍ유미주의적 문학론의 반복이다. 이처럼 당대의 현실을 회피한 채 예술의 세계로 은닉하려 한데서 안서의 해외 문학 이론 수입은 시작되며, 이는 그가 일제 강점 상태의 조선 현실의 질곡에 대항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도피하려한데서 나온 당연한 경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서구 상징주의 이론 도입 시기에 안서는 예술이 생명의 만족적 향락을 주는 일종의 오락적 내지 위안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당대를 이상적으로 관념적으로만 해석하는데, 삶속에 뿌리박고 진실과 선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주고받는 진지한 자세를 보여주지 못한다.
절망의 상실, 당대적 삶의 지평을 상실한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객관적 진리와 판단에 의해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성에만 의지하여 받아들이게 되며, 이런 그들의 자세에 의해 문학도 뭔가 현상 초월적인 -극복이 아닌-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심리가 바로 안서의 상징주의 도입, 특히 그 중에서도 보들레르의 악마주의와 베를레느의 애상적 분위기의 상징주의의 도입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안서가 시종일관 이율배반적인 논리로서 보들레르나 베를레느의 논리를 긍정하고 있는 것은 그들에 대한 안서의 지나친 편향 의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보들레르의 ‘인공적 천국’이란 반자연적 인위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악마주의’는 퇴폐적이며 감성적인 것으로 지칭되는 것인데, 이는 결코 안서에게서처럼 전적으로 긍정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패배주의적 의식의 표출은 ‘상징주의’ 자체가 이후 한국 문단에 표현에 대한 자각, 언어에 대한 자각 등 새로움의 충격을 주며 시가 문학의 발전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던 만큼, 올바른 민족문학 형성에 가장 심각한 장애로 등장하게 된다.
어쨌든 1921년 안서의 역시집 『오뇌의 무도』는 상징주의 수용과 정착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시집인데, 이 시집을 통해 한국적인 자유시의 패턴이 굳어졌고 권태, 절망, 고뇌, 죽음과 같은 새로운 시적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유달리 리듬의식이 강한 안서에 의해 번역됨으로써 우리말이 지니는 운율미와 우리말의 시어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안서의 상징시에서 발견되는 특징적인 단면은 여성 편향성이다, 베를렌의 비애의 미학을 안서 특유의 섬세한 가락으로 수용함으로써 한국 시의 여성성의 원류를 형성하게 된다. 가늘고 여린 어아체 문장과 정한의 표출은 여성주의 형성의 주요 모티프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여성주의의 확립은 상징주의 수용에서 안서의 주체적 변용으로 볼 수 있다.
③ 상징주의 선구자 황석우와 주요한
1910년대 우리나라에 있어서 서구 상징주의 시 이론 도입에는 《매일신보》와《창조》를 중심으로 한 황석우(1895~1960)와 주요한(1900~1979)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황석우는 보들레르의 교감의 시학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는 이를 발전시켜 靈律論으로 변용하고 있다. 영률론의 요체는 현상 저 너머의 신비의 세계를 개성적인 운율로 담아내는 것이 상징시라는 것이다.
한편 황석우는 상징주의를 지적 상징주의, 지적 정서적 상징주의, 정서적 상징주의로 분류하고 특히 정서적 상징주의를 상징주의의 본령으로 인식한다. 또 그 특질을 풍부한 상상력과 具象性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상징주의의 이해가 하나의 방법론으로 고정되어 그의 상징시 창작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 황석우는 시작의 기본 기법을 은유적 방법론에 두고 있다. 이것이 황석우가 변용시킨 한국적 상징주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징주의를 데카당스와 관념의 세계로 몰고 간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적십자기(赤十字旗)의 뒤번치는 마노(瑪瑙)바닥의 거리,/창제(窓際)를 지내는 몽롱한 날은
내맘에 찬 비소(鼻笑)를 뿜어 던지고 간다./아아, 하늘 가득히 날러오는 진흙덩이여,
아아, 괴이한 함정에 떨어진 내맘아,/운다. 운다. 독사의 설(舌).
구월의 칼날같은 새파란 혀에/위협된 맘은 취우(驟雨)같이 운다.
아아, 심회색의 안개, 추도(墜道)의 밑,/슬픈 알음(軋音)으로 가는 적은 환영(幻影)아.
-황석우, 「고읍(苦泣)」 전문
황석우의 위의 시는 용해되지 않은 관념의 덩어리를 몰로 가고 있다. ‘몽롱한 날’, ‘찬 비소’, ‘괴이한 함정’, ‘사의 혀’, ‘심회색의 안개’, ‘추도의 밑’ 등 퇴폐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고 ‘아아’ 등의 격한 감정의 과잉 토로가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퇴폐적 관념성은 ≪폐허≫로 비화되고, ≪폐허≫의 퇴폐적 염세주의는 다시 ≪백조≫의 낭만적 신화성에 그 뿌리를 내리게 된다.
주요한은 일찍이 도일하여 청년기를 보내면서 일본에 소개된 서구 상징시를 접하게 된다. 「불놀이」에 나타나는 산문 리듬은 주요한이 일본에서 체득한 프랑스 역시 과정을 통한 영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주요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상징시인은 폴 포르와 레니에로 볼 수 있는데, 전자에서는 산문적 리듬과 감각적인 표현, 후자로부터는 이상주의적 지향을 수용하고 있다. 「불놀이」에서 보이는 산문 리듬과 감각적 표현은 구체적으로 폴 포르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아아 좀더 강렬한 열정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주요한, 「불놀이」 부분
위의 시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시적 건강성과 이상주의적 지향은 1920년대 시인들과 구별되는 주요한 시의 특징이다. 주요한은 데카당스와 악마주의에 침잠되지 않고 자연과 인생을 긍정적인 면에서 수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징주의적 지향이 민중시, 민요시로 수렴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황석우와 주요한은 안서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이한 시각을 보이고 있다. 안서의 상징주의 수입은 주로 프랑스의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비애와 애상이라는 측면에서 데카당스에 대한 경도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단순한 소개나 도입에서 이탈, 나름대로 우리 것으로 변용하여 수용하려는 능동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안서는 당대의 현실적 중압감에서 어쩌지 못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며 애상적ㆍ정서적인 면에서 상징주의를 수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삶의 지평과 미래의 비전을 상실한 당시 지식 청년들의 보편적인 망국에 대한 애상적 심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황석우나 주요한의 상징주의 도입은 일본의 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안서에게서 볼 수 있었던 망국에 대한 애상적 심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은 황석우나 주요한이 안서보다 훨씬 지적이며 분석적으로
상징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황석우나 주요한의 상징주의 도입은 우리의 전통을 부정 내지 멸시하고 일본시를 우리시 창작의 모델로 삼아 우리의 시단을 새로이 변모시킬 것을 요구하는 등 극히 몰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민족 감정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보면, 오로지 이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들이 개인적인 상징주의 시 창작에 있어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끼친 영향이 안서의 그것에 비교할 때 미미했던 것은 바로 이에 기인함이 아닌가 한다.
4) 1910년대 한국 상징주의 시 이론 도입의 의미
김억에 의해 소개된 상징주의는 본질적으로 그 기법적 혁명에 대한 소개보다는 데카당스적 분위기에 대한 경도를 그 특징으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안서가 데카당스의 속성인 파괴적이고 폭발적이며 시니컬한 정열이나 절망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에 의해서 표현된 것은 일종의 감각적인 환상에 싸인 가벼운 비애와 우수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상징주의를 그 기법적 혁명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애상적인 나약한 비애의 산물로서만 받아들이게 된 것은 당시가 한일 합방 후 거기서 입은 타격을 아직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수습하지 못한 상태였고, 여기에 대전을 통하여 일어난 서구적인 몰락 의식이 유입된 때문에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하고 현실의 중압감에 짓눌린 지식 청년인 안서 개인의 감정적 접근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지적은 안서뿐만이 아니라 당시 상징주의 도입의 선구자들로 자처했던 황석우, 주요한 등에게도 동시에 가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건전한 역사 의식아래 산출한 민족문학을 기대하지 못하던 당대의 문학이 이들 일본 유학생들 몇몇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이들의 문학적 위상이 그들의 후배들에게도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전이되고 있으며, 이들 일본 유학생들이 거의 안서와 마찬가지 심정에서 문학을 받아들이고 이후 몇 년간의 문단을 주도해 나갔으며, 이들의 행동을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간접적으로 옹호하였던 데서, 안서식의 나약하고 애상적인 정서는 이후 상당기간 한국 시의 정신적 풍토를 지배하는 주조가 된다.
이 점에서 당시에 도입된 서구 상징주의는 공과를 같이 한다. 서구 상징주의의 도입은 표현과 형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한국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이후 한국사회의 질적ㆍ양적 성숙의 밑거름을 만든 공적은 인정해야 할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소극적ㆍ애상적 분위기를 도입, 이후 우리 시의 뿌리 깊은 병폐를 남긴 과오도 크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현실 회피 및 몽환적ㆍ상징적 세계로의 몰입으로 자신과 민족 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했던 것은 오늘날까지 일면 계속되는 절름발이 문학관을 산출하는
남상이 된다는 점에서 과오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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