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수원] 내 인생은 나의 것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예레 11, 18 - 20
† 복음 : 요한 7, 40 - 53
★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다섯 편의 ‘예레미야의 고백록’
가운데 첫 번째 편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대해 자신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다며 주님께 정의로운 처사를 내려 주십사고
희망한다(제1독서).
★ 군중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메시아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혼란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군중을 속이는 자로 여기며 그분에 대한 적개심을
품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선입관과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말씀과 행적을 보아서는 메시아 같기는 한데,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래아 출신이기 때문에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출신이지만, 군중은
이를 몰랐던 것입니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얕은 지식이 걸림돌이 되기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에 탄복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율법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아니라 사기꾼으로서 율법을 모르는 백성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더 큰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일부 군중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의
틀 안에서만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근본에로 돌아가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3월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 7,40-53
근본에로 돌아가야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1세는 교황 선출 이후 첫 미사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강하게 경계하며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야
하며 예수와 십자가라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많은 것을 세울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기보다는 자비로운
비정부기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어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이라며 “세속적인 가치를 앞세워도
교황이 되고, 주교, 사제가 될 수는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게 된다.” “세속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어떤 일을
이룩하려 한다면 어린이가 쌓은 모래성처럼 모두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교황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근본에로 돌아가 거듭 태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오래 전 도울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 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헛된 바람을 지니지 말고 기도와 성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인생은 나의 것
2013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는가? >
복음 : 요한 7,40-53
< 내 인생은 나의 것 >
우리나라에서 명강사로 잘 알려진 김미경씨, 며칠 전에는
‘무릎팍 도사’에도 출연을 했습니다. 김미경씨는 처음에
CF 회사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가 집에서 아이들 피아노
레슨을 했는데, 회사 다닐 때보다 몇 배의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피아노 학원을
대출을 받아 열게 되었습니다. 돈 걱정 때문에 새벽
4시 30분에 출근하여 노력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지만 400만원을 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른
정도가 되었을 때 우연찮게 사업 성공사례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강사라는 일이 마음에 들어서 이번에는 잘
나가던 피아노 학원을 집어치우고 시간당 3만원 받는
강사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새벽 4시
30에 일어나서 독하게 노력한 결과 지금은 강사비로
일 년에 10억을 넘게 번다고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는데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김미경 강사는 자신이 이렇게 성공하게 된 첫
번째 이유가 부모 말을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학교 선생님을 하던 아버지는 증평 시골에서 가전제품
장사를 하려다가 실패하고 자개농 공장을 하다가 빚만
크게 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양장점을 시작하신 어머니가
수제비만 먹으며 몇 년 동안 빚을 다 갚았지만 기성복이
나오며 양장점도 기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고 싶었던 김미경씨는 사범대 나와서 학교
선생님을 하라는 어머니의 뜻을 거슬러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었습니다. 이에 반대를 하는 어머니와 맞서서
문을 걸어 잠그고 3일을 굶었다고 합니다. 결국 어머니가
졌고, 김미경씨는 연세대 음대에 수석으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어머니에게 져서 어머니 뜻대로 살아줬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자신이 그런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하겠지만
자신에 대해 어머니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야지
부모의 기대 때문에 부모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또 대담하게 성전에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십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그분을 잡기에는
부담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경비병들을 보냅니다. 그분을
잡으러 왔던 경비병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설득이 되어
돌아갑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오지 못한 이
경비병들을 야단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나중에 이 경비병들은 유다인들의 명을 따라 몽둥이를
들고 겟세마니로 예수님을 잡으러 가게 됩니다. 자신들이
결정하지 못하고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는 니코데모가 나옵니다. 니코데모는 그들에게
이렇게 따집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무기로 하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당해 낼
재간이 없습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맞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니코데모는 그들의 말에 굽히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행동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때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함께 니코데모는 몰약을
가져와 장례를 돕습니다. 이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완전히
찍히는 행위였습니다.
성경은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같은 성경을 두고도
서로 다른 수많은 종교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해석에 관해서도 자신이 가장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해서 따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당대에 떠도는 수많은 예수님의 관한 글들을 모아서 성경을
정한 것은 가톨릭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400년이
지났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류가 있는 것들을 추려내고 27권의 정경을 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해석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고 자신이 깊이 생각해 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어차피 남에게 딸려가든 자신이 선택하든 그 책임은
자신이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 대학 다닐 때 여호와의 증인이 집에 찾아와서 성경을
펴 놓고 자신들이 성경을 가장 완전하게 해석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요즘은 신천지라는 곳에서 성경의 비밀이
밝혀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곳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해석이 옳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이 없더라도 그 말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었던 니코데모를 보십시오.
나중에 그들이 믿으라고 해서 믿었다고 둘러대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한 때는 그분이
참 메시아로 생각을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판단할
줄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사는 것입니다. 남에게 책임을 미뤄도
먹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남편이 하도 결혼하자고 쫓아다녀서 어쩔 수 없이 했어요.”
“친구들을 잘못 사귀어서 공부를 못 했어요.”
“저는 수녀님이 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해서 못 됐어요.”
“그 인간들 말 듣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말아먹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물어보실 것입니다.
“넌 네 인생을 살지 않고 누구의 인생을 살아준 것이냐?”
내 인생의 책임은 내가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들에게 휩쓸리지 말고 내가 선택해서 내가 살고 책임도
내가 져야 합니다. 내 인생에 대해 평가 받을 때가 오는데
그 때는 핑계를 댈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중간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자퇴하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랫말처럼 내 인생은 부모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의 뜻대로 선택해서 살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버지도 제가 사제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하느님은 내 인생을 나에게 준 것이지 다른
누구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남들의 말에 휩쓸리지 말고
내가 선택하여 나의 인생을 살아나갑시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처음으로 성당에 다녀온 어떤 형제님께서 성당을 열심히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정말로 궁금한 것이 있다면서
묻습니다.
“나 오늘 처음으로 성당에 다녀왔는데, 신부님 말씀이
너무 이상해. 원래 성당의 신부님 말씀이 이상한건가?”
친구는 “아니, 뭐가 이상한데?”라고 반문했지요.
“신부님께서 자꾸 ‘가톨릭은 질립니다.’라고 말씀하시잖아.
아니 자기 스스로 가톨릭이 질리다고 하다니, 내가 과연
이런 성당에 나가야할까?”
잠깐 생각했던 친구는 그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합니다.
“신부님께서 ‘가톨릭은 질립니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가톨릭은 진리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겠지. 바보야!
네가 잘못 들은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문득 듣게 되면 정말로 그렇게 들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듣는다면 어떨까요?
절대로 그렇게 들을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이 얼마나 주의
깊게 생각하며 듣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의도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행하시는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하지만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듣는다면 내 삶 안에서 어떤 일이
발생해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들었을까요? 과거 이스라엘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으려는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특히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을 부정했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의 출신 성분까지도 드러내면서 절대로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앎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제대로 알지 못했지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오랫동안 사시기는 했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분명히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그 모든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듣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함부로
주님을 판단하지 않으며,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순시기도 막바지에 들어섭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이 사순시기. 그러한 주님의 사랑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격차를 줄여 주기 위해 있는 누군가 덕분에
힘든 시간을 이겨 내곤 한다(오프라 윈프리).
미국에서 제일 높다는 윌리스 타워에서 폼좀
잡아봤습니다.
기막힌 처방(‘좋은생각’ 중에서)
어느 잡지에서 본 글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희망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희망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희망 역시 자신의 적극적인 어떤 행동과 의지
없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이 글을 보며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한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는 여인이 심리학자
밀턴 에릭슨의 진료실을 찾아왔다. 그는 자리에 풀썩
앉더니 인생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도 없고, 직장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해서 사는 낙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옷도 대충
입으면서 엉망으로 살았다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거라고 덧붙였다.
묵묵히 듣던 에릭슨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니 그동안 저금해 둔 돈이나 다 쓰는
게 어떨까요? 예쁜 옷 사 입고, 파마도 하고요. 그 다음에는
점심시간마다 쉬러 간다는 분수대에서 자주 옆에 말없이
앉아 있던 남자가 보이면 물을 뿌리고 도망가세요.”
“네? 제가 어떻게 낯선 남자에게 그런 장난을?”
여인은 고민 끝에 에릭슨의 말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은행에서 돈을 모두 찾아 옷과 구두를 사고, 파마하고,
아름답게 화장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 분수대로 갔다. 어김없이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물총을 쏘면서 장난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남자가 말을 걸었고, 둘은 이튿날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그는 에릭슨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참 신앙인의 길
2013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요한 7,40-53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참 신앙인의 길>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당시 유다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하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해본 결과, 이분이야말로 메시아라고 확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맑은 시냇물처럼 신선한 말씀, 속이 후련할 정도로 통쾌한 말씀,
정곡을 콕콕 찌르는 촌철살인 같은 진리의 말씀 앞에 사람들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명강론이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그러나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 당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명설교가 예수님의 등장
앞에 자존심도 팍 상했을 뿐 아니라, 그분의 메시아성을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혹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 그를 믿는 사람도
있더냐?”고 은근히 캐물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자신들이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마저도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지도,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지도 않고 떠나갔습니다.
공생활 기간이 마무리되고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수난의 때가
가까워지면서 이런 상황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 많던 추종자들이 거의 다 떠나갔습니다. 죽기 살기로
따라다니던 스토커 같던 사람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갔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고 새 삶을 얻게 된
그 많던 사람들도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마치도 실패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이렇게 급격히
쇠락한 예수님의 모습, 철저하게도 무력해지고 초라해진
예수님의 모습 앞에 사람들이 믿음은 더 약화되어만 갔습니다.
참된 친구인지 그저 그런 친구인지를 식별해볼 수 있는 기준이
한 가지 있지요. 내가 갑작스런 역경에 처했을 때, 내 생사가
오락가락할 때, 모르는 체 하지 않는 사람, 걱정해주고, 전화해
주고, 찾아와주고,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사람, 그는 두말할 것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을
때, 이 사람에게서는 더 이상 그 무엇도 기대할 것이 없구나,
하고 연락을 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친구도
아닙니다. 그냥 잠시 알고 지내던 사람이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참 신앙인지 아닌지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도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곤경에 처한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여부가 가장 중요한 식별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참 신앙인의 길,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
집을 향한 신앙여정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이란 계속되는 도전의 길입니다. 매 순간 다가오는 의혹과
지루함과 이제 그만 접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뿌리치고,
이왕 내딛은 걸음, 힘들어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갖은 의혹과 수모와 고통 속에서도 꾸준히 ‘예’라고 응답했던
마리아의 순수한 믿음을 청해야겠습니다. ‘떠나라’는 한 마디
말에 모든 것 그분께 맡기고 묵묵히 떠났던 아브라함의 단순한
믿음을 청해야겠습니다.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표현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께 확신과
희망으로 응답하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표시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주셨고, 그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강한 희망과 믿음, 그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지니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향한 강한 확신, 확신에 찬 희망만이 우리를 변화된
삶, 깨달음의 삶, 사랑의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끝났다
에스텔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초등학교 2학년 조카가 있습니다.
이 아이한테 중학교 3학년 오빠가 하나 있습니다. 그 오빠가
몇 주 전에 학교에서 축구를 하다 산 지 얼마 안 된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두고서 아빠가 에스텔한테
물었답니다. “에스텔, 오빠가 스마튼폰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빠가 오빠한테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도 부주의해서 잃어버렸는데, 에스텔
생각에는 아빠가 오빠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그러자
초등학교 아이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아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그러니 오빠를 용서해
주세요.”
꼬마 아이가 떠올린 예수님 말씀 때문에 모든 논란은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살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두고서 우리는
갈등합니다. 내 안에서 혼자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서로 다른 의견으로 논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이 떠올라 그 모습대로, 그 말씀대로
하겠다고 결정함으로써 그 모든 논란을 끝맺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실천할 수 없을 것 같은 예수님 말씀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결정하며 논란을
끝내는 것,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겠지요.
- 김귀웅 신부(서울대교구 중견사제연수) -
◈ [기타] 사순 제4주간 토요일
2013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이곳은 산 속에 있기 때문에 작은 날벌레들이 함께 있습니다.
문단속을 하지 않으면 제 방에 날벌레가 있는 것인지, 날벌레
틈에 제가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어제는 잘 닫히지
않는 문을 고정하고 쫄대를 대었습니다. 날벌레들이 작은
틈새를 기막히게 찾아서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악의 세력들도 어쩌면 저 날벌레처럼 우리들의 믿음이 약해지는
그곳을 찾아서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요? 나보다 못한 사람이
더 잘 되는 것을 보며 느끼는 시기와 질투는 악의 세력들이
쉽게 들어오는 틈새가 될 것입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보다
더 큰 자리와 권력을 얻으려는 욕심과 욕망은 악의 세력들이
너무나 자주 들어오는 넓은 구멍입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저 역시도 시기와 질투 그리고 욕심과 욕망의 덫에 걸린 적이
많습니다. 나는 바뀌지 않으면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몰염치도 악의 세력에게는 좋은 틈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유대인들의 지도자는 그런 시기와 질투
그리고 선입관과 편견 때문에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우신 표징과
기적을 인정하지 못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악한 세력의
힘을 빌려서 그런 일을 한다고 모함입니다. 예전에 우리
사회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 가난한 이들과 아픈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이념과 사상의 굴레를 씌어서 잡아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새롭게 선출된 교황님에 대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분이신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분이신지
판단하려합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교황님을 평가하고
이해하려합니다. 물론 교황님께서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영적으로 이끄시고,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수호하시며,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교회의 입장을 밝히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 정말 그렇게 큰 영향을 주는가!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주님 제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주시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새로이 선출되신 교황님께서는 ‘프란치스코’로 교황 명을
정하셨다고 합니다. 겸손한 삶을 살았던 분, 가난한 삶을 살았던
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셨던 분이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새로이 선출되신 교황님께서 겸손과 가난 그리고
사랑이라는 옷을 입으신다면 개혁과 보수가 가지고 있는 장점
모두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이 선출되신 교황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청합니다.
- 조재형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斷想하면,단상할수있다?-이해욱신부
<斷想> 20. 斷想하면, 단상할 수 있다?
단상(斷想)하면, 단상(單想)이 단상(檀想)되어,
단상(緞想)으로 하느님을 단상(亶想)할 수 있다.
생각을 끊으면(斷想), 하느님을 향한 한 가지 생각(單想)이
박달나무처럼 더욱 단단해져(檀想), 비단결 같은 마음으로
(緞想) 하느님을 굳게 믿을 수(亶想) 있게 되는 것이다.
하. 더. 사(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하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만이 아니라,
생각을 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거룩한내맡김영성> 단상 18.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다?
참조)
하루의 생활 중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는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생각들이 대부분 쓸데없는 생각(잡념)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영적으로 높은 차원을 추구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도 그야말로 잡념은 정말로
쓸데없는 것일 뿐 아니라 삶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에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올바른 생각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사람의 머리에 인간적 지식이
가득 차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적 지식이 천상적 지혜로
나아가는 데 큰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그래서 불가의 큰 스님들이
"생각을 때려잡아라, 잡아라!"하시는 것이다.
내가 경험했던 것 중에서, 생각을 끊는(때려잡는) 가장 좋은
방법이 첫째는 성가(聖歌)이고, 둘째는 화살기도이고,
셋째는 성경읽기(외우기)였다.
그런데 이 셋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도해 본 것이
"화살기도"였다. 내가 경험한 화살기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께 그토록 화살기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내맡김의영성> 후속 9.열려라 깨!-화살기도-만트라 참조)
그러나 화살기도의 단점은 너무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이점을 보완해 주는 것이 바로 성가(聖歌)이다.
아마도 불가나 타종교에서 기도에 운율을 붙여 외우는 것이
그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작곡을 못해서 그렇지 내가 만든 화살기도를 성가로 만들어
노래하면, 정말 끝내줄 것이 분명하다.
머리 속에서 성가가 돌아가면, 가사 내용과 감정이 하나 되어
마음으로 영혼으로 하느님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성가는 영혼을 울리고 하느님을 울리는 데에 최고, 최선의
기도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승용차 안을, 집 안을 성가로
넘치게 하라고 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성경읽기는 우리의 영혼을 침잠시키는 데에
있어서 최고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편안히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덧 하느님과 대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은 아무에게나 영감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 성경을
통하여 또 당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통하여 열어 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상(斷想)하십시오!
제가 왜 이 "단상(斷想)"을 적어 나가고 있는 이유를 아셨겠지요?
하느님 외에 다른 생각을 멈추시면,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하느님 소유의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단상(斷想)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하. 더. 사들에 있어서 "필수요소"입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살아계신 주님이 저희의 주인이 되게 하여주소서.
2013년 다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메시아가 갈릴레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요한 7, 40-53)
살아계신 주님이 저희의 주인이 되게 하여주소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악인들이 그를 없애
버리려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십니다. 예언자는
악인들에 대하여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께 자신의 송사를 맡겨드립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무너지고 파괴되며 전복되고
없어지는’ 것을 예고해야 하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면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습니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의
삶 살고 있었고, 그의 인격적 신앙의 삶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킵니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 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는 밝혔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합니다.
역사의 변곡점이나 신앙의 변곡점에는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고, 또 이에 앞서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미리 알려주어 준비를 시키십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이 변혁의 시대에 들어와서 인간으로서
세상에 사셨고, 구세주를 길러주시고 젖 먹여 주셨으며
하늘로 몸소 들어 높임을 받으시어 천국에서 생활하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내주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세상의 삶과 천국의
삶을 잘 아시기에 인간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그토록 기도가 기쁨이 될 때 까지 기도하라고,
그래서 이미 지상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
희생과 단식과 묵주기도를 통해서 악의 실재를 인식하고
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성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회개를 통해서 성사 안에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되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영혼깊이 변화가 되기
시작합니다.
복음에서 니코데모는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이 비워져있어야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고,
겸손함이 있어야 들은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도 기도를 통해서 기쁨을 체험하고,
영혼의 바닥까지 회개하여 살아계신 주님이 저희의 주인이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지금 바로 여기가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 입니다
蒼蹄(푸를 창, 말발굽 제)는 꿈에서 얻은 이름이고, 어렸을 때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불려졌던 이름입니다. 결국 이름처럼
푸른 하늘 밑을 달리는 선교사의 삶이 되어버렸네요. 어머니가
어른이 된 다음에 호나 필명으로 사용하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해야 할 듯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3월16일 토요일 복음묵상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한7,46)
역사 드라마를 보거나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는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었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즉
지나간 일에 대한 그림을 놓고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비교적
쉽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거의 이야기는 이미 멈춘
이야기고 현재의 이야기는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힘들이 늘 존재해
왔다. 그것은 무엇일까? 여러분은 신문이나 TV의 모든 이야기를
믿는가? 우리 모두는 언론매체가 진실을 보도하고 진실을
나누는 데 그 기능을 다하고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정반대의 역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언론의 특징은 ‘그럴 듯 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 믿고 동조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경제적
기반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과거의 많은 독재자들이
제일 우선적으로 장악하려 했던 것이 언론이었다. 손에 쥔
언론을 가지고 그럴 듯한 이야기를 꾸며내어 사람들에게
쏟아내었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론매체는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킬 수 있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사람들을 움직일 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역기능을
할 수 없도록 우리의 역사는 물리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를
고안해 왔고 효과를 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악의 세력도 한층 단계가 높아진 수준으로
면밀하고 교묘하게 움직인다. 즉,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그 ‘그럴 듯 한 이야기’에 대한 진실여부를
식별하려는 작업이 필요하다. 만일 어떤 속임수와 거짓이
옳지 못한 세력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교회는 절대로 침묵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그르친 가르침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시며,
사람들이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당연히 교회가 권력이나 검은 돈이 오가는 더러운
정치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된 사실이다.
하지만 교회는 정치가 아니라 사회 즉 세상과 함께 해야만
한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해야 할 의무가 있고, 세상
사람들이 올바른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투신해야 한다. 잘못된 구조에 의해 그늘진 곳을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있다면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세상을
움직여야 한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거나 못 본 척 하는 것이
표면적인 폭력보다 더 비겁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보통 우리는 옳고 그름에 기본적으로 공감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설정된 그럴 듯 한 이야기를
통해서 언제든지 옳고 그름이 뒤바뀌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언론매체이던 어떤 종류의 대중매체이던
간에 빛과 그늘 두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라고
예수님을 본 이들은 증언한다. 우리도 어떤 역경과 난관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과거의 허물을 되풀이 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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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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