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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경배의 향유
Today I'm going to talk about intimacy with Jesus and how to release the fragrant oil of worship, or the perfume of worship. I want to also speak about 'the kiss' and about washing Jesus' feet. I believe that this message will stir us up so that we become love sick, falling in love with Jesus all over again.
오늘 저는 예수님과의 친밀함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경배의 향유 혹은 향수를 풀어 놓는지 나누고 싶습니다.
또한 ' 입맞춤'과 '주님의 발을 씻는 법'에 대해서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가 여러분을 흥분시킬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주님과 사랑에 빠지며 사랑의 상사병을 갖게 될 것입니다.
Also before we begin, I want to say that I hope we'll cherish the message that's captured in The Fragrant Oil of Worship . With this in mind I want to invite each one reading this teaching today to pause right now and invite the Holy Spirit to come and hover over you. Let's pray together… "Heavenly Father, I ask today that we would completely surrender ourselves to you as we discover together how to abide in your presence in the place of devotion and intimacy. We want to find that glorious place at your feet." " … To beautify the place of My sanctuary; and I will make the place of My feet glorious" (Is. 60:13b).
또한 시작에 앞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모두가 이 '예배의 향유' 에 담겨진 메시지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시며 오늘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지금 잠시 멈춰 성령님을 초청하고 성령님께서 여러분 위에 머무시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 모두가 주님께 헌신하며 친밀감을 드릴 때에 어떻게 당신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것인지를 함께 배우기를 원하오며 우리가 완전히 주님께 복종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발 밑의 영광스러운 장소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레바논의 자랑인 잣나무와 소나무와 회양목이 함께 너에게로 올 것이다.
그 나무가 나의 성전 터를 아름답게 꾸밀 것이니,
이렇게 하여서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하겠다-이사야 60장 13절."
Passion, Worship, Intimacy
열정, 예배, 친밀감
The Anointing of Bethany
베다니의 기름부음
Passion, worship and intimacy the three words filled with purpose and meaning that must influence core of our being if we are going to touch the very heart of Jesus Christ. Listen! When we have a church of passionate people filled with fresh first love who pursue the presence of the Lord, then we'll experience God's presence among us. And when the presence of the Lord falls upon us, everything else happen sdeliverance, healing, restoration, forgiveness and cleansing. But believers so often wrestle with God, feeling stuck, trying to get Him to take care of their needs rather than just getting a hold of Him and experiencing His presence. Holding onto the hem of Jesus' garment and esteeming Him above all else releases God's purposes to fall into place in our lives.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만지고 싶다면 우리는 열정, 예배, 친밀감 이 세 단어,,,우리의 전 존재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는,,,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만약 주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신선한 첫사랑을 소유한 사람들로 가득찬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임할 때 축사, 치유, 회복, 용서, 죄사함 등 그 모든 것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주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보다는 역경과 자신들의 필요를 돌보아 달라고 하나님과 씨름을 하곤 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오직 무엇보다도 주님만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풀리게 합니다.
Today I'm going to challenge the way that we love and relate to our Master, Jesus Christ, and challenge the lover-friendship relationship that we have with Him. I'm going to ask how much of a lover of Jesus are we? But just before we delve into answering these questions I want us to read two passages of scripture about the 'anointing of Bethany ' that will lay a foundation beforehand.
오늘 저는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사랑하고 교제하는 지에 대하여 도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연인이 되는 것 즉 우정과 관계에 대하여서도 도전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이나 주님의 연인이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연구하기 앞서 이 대답의 초석이 되는 '베다니의 기름부음'에 대한 성경의 두 본문을 읽어 봤으면 합니다.
"And when Jesus was in Bethany at the house of Simon the leper, a woman came to Him having an alabaster flask of very costly fragrant oil, and she poured it on His head as He sat at the table. But when His disciples saw it, they were indignant, saying, "Why this waste? For this fragrant oil might have been sold for much and given to the poor." But when Jesus was aware of it, He said to them, "Why do you trouble the woman? For she has done a good work for Me. For you have the poor with you always, but Me you do not have always. For in pouring this fragrant oil on My body, she did it for My burial. Assuredly, I say to you, wherever this gospel is preached in the whole world, what this woman has done will also be told as a memorial to her" (Mathew 26: 6-1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6-13)
Now I want you to flip over to another perspective concerning the same event in Luke 7:36-48.
자, 이제 같은 사건을 다룬 다른 관점의 눅7:36-48로 옮겨 가봅시다.
Although the account in Luke does not mention that Jesus was anointed with fragrant oil to prepare Him for His burial, some Bible scholars believe that the account in Matthew and Luke are one and the same scene. As well, at first glance it appears that Simon the leper and Simon the Pharisee isn't the same person, some Bible scholars feel he was a Pharisee who was healed of leprosy by Jesus. I also believe this and we will examine this week's teaching based on these opinions.
우리는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장사를 위해 향유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경학자들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하나의 동일한 장면이고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얼핏 보기에 문둥이 시몬과 바리새인 시몬이 동일인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학자들은 시몬이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쳐주신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저 또한 이렇게 믿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이 주일의 가르침을 나눌 것입니다
"Then one of the Pharisees asked Him to eat with him. And He went to the Pharisee's house, and sat down to eat. And behold, a woman in the city who was a sinner, when she knew that Jesus sat at the table in the Pharisee's house, brought an alabaster flask of fragrant oil, and stood at His feet behind Him weeping; and she began to wash His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the hair of her head; and she kissed His feet and anointed them with the fragrant oil. Now when the Pharisee who had invited Him saw this, he spoke to himself, saying, 'This Man, if He were a prophet, would know who and what manner of woman this is who is touching Him, for she is a sinner.' And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Simon, I have something to say to you.' So he said, 'Teacher, say it.' 'There was a certain creditor who had two debtors. One owed five hundred denarii, and the other fifty. And when they had nothing with which to repay, he freely forgave them both. Tell Me, therefore,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re?' Simon answered and said, 'I suppose the one whom he forgave more.' And He said to him, 'You have rightly judged.' Then He turned to the woman and said to Simon, 'Do you see this woman? I entered your house; you gave Me no water for My feet, but she has washed My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the hair of her head. You gave Me no kiss, but this woman has not ceased to kiss My feet since the time I came in. 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oil, but this woman has anointed My feet with fragrant oil. Therefore I say to you,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to whom little is forgiven, the same loves little.' Then He said to her, 'Your sins are forgiven'"(Lk. 7:36 -48).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7:36-48)
I remember as I read about 'the anointing of Bethany' also in the books of Mark and John that each time I always thought, "There has to be a whole lot more to this story!" So I've been chewing and meditating on this whole biblical account for months. The passages in Matthew and Luke describe an unnamed woman who humbly came to Jesus with her alabaster box of perfume and how she anointed His head and His feet. Now, what struck me the most when I read these two passages was when the Holy Spirit revealed that the 'anointing of Bethany' is not just about the anointing of Jesus for His burial and resurrection. Rather, if our hearts are open, this true story can teach us how to be abandoned lovers of Jesus.
또한 저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도 '베다니의 기름부음'을 읽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이 있음에 틀림없어!"
그래서 저는 수개월간 모든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이 이야기를 곱씹어 보고, 묵상해 왔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들고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주님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었는지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 두 본문을 읽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성령님이 이것은 단지 주님의 장사와 부활을 위한 기름부음만이 아니다 라는 것을 계시해 주셨을 때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마음을 연다면 이것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지독한 사랑에 빠진 연인이 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The first thing I want us to notice is where it says, "And behold, a woman"(Lk. 7:37 ). Although the woman is unnamed, some Bible scholars believe she is Mary, the sister of Martha and Lazareth. I also believe this. She was filled with so much passion for Jesus that she could confront and challenge all the familiar cultural protocol. She pushed beyond her dignity and any fears concerning what everybody else might think of her. Mary's passion so burned inside of her for Jesus that nothing was going to keep her from the feet of her Master.
여러분이 첫째로 알기를 원하는 것은 "보라 한 여자가"(눅7:37)라고 한 부분입니다.
그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어떤 성경학자들은 그녀는 마르다와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렇게 믿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랬기에 마리아는 당대의 문화관례에 맞서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자신의 체면이나 두려움도 다 뒤로 했습니다.
마리아 안에서 불타오르는 주님을 향한 열정은 그 무엇도 주님의 발 아래 있는 그녀를 떼어 놓을 수 없게 했습니다.
Mary's heart was undivided. The bible tells us that when her sister Martha welcomed Jesus into their home that Mary gave Him all of her attention and devotion. On the other hand, her sister Martha was completely distracted about many little things; she pressured Mary to get up and help her with household chores (Luke 10:38 -42). But Mary didn't care about all the things that perhaps needed to be done and she resisted the temptation to get busy because she was satisfied with one thing to do for God and that was being close to Him, looking into His face and hearing His voice.
마리아의 마음은 분요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마르다가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할 때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관심과 헌신을 주님께만 드렸습니다.
반면에 마르다는 사소한 일로 분주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일어나 자신을 도와 집안 일을 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눅10:38-42). 그러나 마리아는 아마도 해야만 해야 할 모든 일에 상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빠지는 모든 유혹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해드리는 한 가지 일에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가까이 있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True Passion Releases True Worship
진정한 열정은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로 이끌어 줍니다
Do you know why Mary was such a woman of passion? It was because Mary knew she was rescued out of a pit of ungodly spiritual darkness. She knew the mercy and love of God that forgave her great sin; she was forever indebted to the Lord Jesus Christ. She remembered what it was like to live without God in her life. I believe she came to the Pharisee's house to see Jesus because of her great love and devotion to Him. It was like she said to herself, "I have such a passion for Him because I know the love and forgiveness that I've found in Him that I want to go and just give Him thanks."I don't believe she realized the prophetic significance concerning anointing Jesus for His burial. Rather her whole motive flowed from a burning heart for her King; gratitude and adoration for Jesus drew her to His side. God wants us to have this same intense passion in our hearts for Him.
여러분, 왜 마리아는 그토록 열정적인 여자이었는 줄 아십니까?
왜냐하면 마리아는 자신이 사악한 영적 어두움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큰 죄를 사해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한 빚을 졌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없는 삶이 어땠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주님을 향한 큰 사랑과 헌신 때문에 주님을 보기 위해 바리새인의 집으로 왔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 있는 사랑과 용서를 알기 때문에 이토록 주님께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서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기름을 붓는다는 예언적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녀의 모든 동기는 왕을 향한 불타는 마음으로부터 흘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이 마리아를 주님께 이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에 이와 같은 동일한 주님을 향한 강렬한 열정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Now how can we stir up our passion? One of the ways is by NEVER forgetting the pit of darkness that Jesus pulled us out of because of His great mercy and the love for us. You know something about Simon? He wasn't a passionate man. In fact, when Jesus gave the parable about the two debtors (Lk. 7:40 -42), the reason He spoke this parable to Simon is because He was comparing Simon's passion to Mary's passion. Here's what He meant: "Simon, because you don't know anything about passion, you weren't the one that anointed my head with oil. You weren't theone that anointed my feet. You weren't the one that wiped my feet with your hair. You weren't the one that wept at my feet or the one that kissed me. Yet this woman has not ceased kissing me because she remembers the pit she was rescued from. But because you are a Pharisee and you believe you're so religious and that all the outward things in your life are tidied up, you think that you don't really need my mercy. This just proves that you don't have a revelation of your need for my mercy and love. That's why you don't have the passion. You don't have the revelation that you need to be forgiven."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그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그 크신 자비와 사랑이
우리를 어두움의 나락에서 건져 준 것을 결코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시몬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시몬은 열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두 빚진 자에 대한 비유를 하신 이유는
시몬의 열정과 마리아의 열정을 비교하기 위해서 입니다.
(눅7:40-42/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하시니,
시몬이 말하기를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여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네가 열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너는 나의 머리에 향유를 붓지 않았고
나의 발에 향유를 붓지도, 너의 머리털로 내 발을 씻지도 아니했구나.
너는 내 발에 눈물을 흘리고 입맞추지도 않았구나.
그러나 이 여자는 결코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구나.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어떤 구덩이에서 구원받았는지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바리새인이요, 네 스스로 신앙이 깊다고 믿고,
네 삶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일들이 깨끗하다고 믿으므로
나의 자비가 진실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너에게 필요한 자비와 사랑에 관한 계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너에게 열정이 없는 이유다.
너는 너 자신도 용서 받아야 필요가 있다는 계시가 없도다."
Simon didn't think that he needed to be forgiven for anything because Hewas a Pharisee; he was religious. Mary knew her need; he didn't. She knew her debt; he didn't. It's unfortunate that so many in the body of Christ today have forgotten their indebtedness to Jesus. They've forgotten the pit that God brought them out of. That's why they don't have the passion or the fire of Jesus burning in their hearts like they had when they first got saved and He was their first love. And that's what's happening in this passage. Here is an example of a man that doesn't have an understanding of passion, adoration, devotion and gratitude because he's trusting in his religion. He thought he'd been saved for such a long time and he had it all together; the outside of the cup looked really good! With his spiritual pride intact, he asked Jesus, "Do you not know what kind of woman this is?" It's like Simon was saying, "Come on, you're with me now. Don't you know what manner of woman this is?" And Jesus turned around and basically said to him, "Simon, don't you know what manner of a man you are? Don't you know the debt of love, the love-slave debt that you owe unto your Master forever because of the forgiveness found in Me?"Simon didn't have this revelation.
시몬은 그가 바리새인이고,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용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필요를 알았습니다. 시몬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빚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탕감해 준 빚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꺼내주신 그 나락을 잊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열정이 없는 이유이며, 그들에게서 그들이 처음 구원받아 주님께서 그들의 첫 사랑이었을 때 주님을 향하여 타올랐던 불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여기 열정, 찬송, 헌신, 감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종교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구원받은지 이미 오래고,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컵 바깥은 퍽 괜찮아 보입니다.
영적인 교만함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이것은 시몬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맙소사, 지금 당신은 좀 괜찮은 부류인 저와 함께 있어요.
당신은 이 여자가 어떤 부류의 여자인지 모르십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돌아보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너는 사랑의 빚을 알지 못하느냐?
나의 용서로 영원히 나에게 빚진 사랑의 종이 된 것을 모르느냐?"
시몬은 이 계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Now let's look at verse 37. It says that she brought an alabaster flask of fragrant oil. Now the first thing about the fragrant oil (called spikenard), is that it's very expensive and only used for special occasions. In fact it was so costly that it was worth 300 denarii, which today would be at least one year's full wages. But to Mary, no expense would be spared; her great love for Jesus could only be expressed by pouring out upon Him that which was her most precious and costly possession. Also Mary's act of devotion required breaking her alabaster box open so that the fragrant oil could pour out; an act that symbolized her brokenness before the Lord. As Mary wiped Jesus' feet with her hair, we can sense her emotions; passionate sobs, her tears streaming and mingling with the precious spikenard. How intimate… the smell of fragrant oil lingering in the air, its aroma offending the minds of the men who were present. (I'll speak more about this later.)
자 이제 37절을 봅시다.
마리아는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자 (감송유라고 불리는) 향유에 대해 처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매우 비싸다는 것이고, 특별한 경우에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오늘날에는 일년치의 연봉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어떤 비용도 아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그녀의 큰 사랑은 그녀의 가장 고귀하고 비싼 소유를
주님께 부어드림으로써만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헌신은 향유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옥합을 깨뜨리는 행동을 요구했습니다.
이 깨뜨리는 행동은 주님 앞에 자신을 깨뜨리는 상징입니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그녀의 감정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감정, 열정적인 흐느낌 그리고 눈물과 함께 그 비싼 향유가 어울려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친밀합니까? 공기 가운데 머물어 있는 향유의 향기,,,
그러나 이 향내는 함께 한 사람들을 분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fter she poured out her offering onto the Lord Jesus, the first thing that Simon, Judas and the rest of the people did was to criticize her sharply. Their low regard for Jesus was exposed when they said, "What is the point of this waste? You could've taken what you have given to Him and we could have sold it and given it to the poor" (Matt. 26:8). But Mary had an opposite spirit and her high regard for the Lord would have been expressed by a retort something like this: "No! Because if I am going to worship Jesus, worship that does not cost me everything, or worship that does not involve brokenness and sacrifice is not worship at all! Jesus is worth all that I have and all that I am and that's why I gave Him everything."
마리아가 주 예수께 향유를 드리자 시몬과 유다와 사람들의 첫 반응은 그녀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주님을 향한 그들의 낮은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슨 뜻으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네가 주님께 드린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26:8)
그러나 마리아는 그들과 반대의 영을 가졌습니다.
주님을 향한 높은 존경심은 이렇게 반박함으로써 표현되었습니다.
"아니에요! 만약 내가 주님을 예배하러 올 때 나의 모든 비용을 들이는 것이 아니거나 내가 깨지는 것과 희생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내가 예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린 이유입니다."
If we are going to truly touch the heart of God with our worship, we need to worship like Mary did; we need to treasure this kind of worship. What I want us to notice is that Mary's worship so etched an everlasting mark on God's heart that He said, "Wherever this gospel is preached in the whole world, what this woman has done will be told as a memorial to her"(Mathew 26:13). To paraphrase Jesus' words : "This woman's worship, expressed by her brokenness and sacrifice, devotion and passion, has forever touched my heart. Not only am I going to remember her devotion forever, but wherever this gospel is preached what this woman has done to me in her passion, will be told as a memorial to her."
우리가 우리의 예배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장을 만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마리아가 드렸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를 보배롭게 여겨야 합니다.
나는 우리들이 마리아의 예배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진,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각인된 것임을 알기 원합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13)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말씀드리면 :
"이 여자의 깨어짐과 희생과 헌신과 열정으로 드린 예배는 내 마음을 영원히 만졌노라.
나 홀로만 그녀의 헌신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 그녀의 열정으로
이 여자가 내게 행한 것이 저를 기념하여 말해질 것이라."
Now, what I want to ask us is this? Does our worship and devotion for Jesus so touch God's heart that even our worship of two years ago continues to bless the angels and God? Are they are still talking about that moment when we touched Him? Does God even remember the way that we worship? I believe that there is a place of such intimacy and abandonment in worship to God that we can touch Him to the point that it's like we can scar Him. It's like when our true worship touches Him, a seal comes upon His heart which causes Him to forever remember our worship. [ "Set me as a seal upon your heart, as a seal upon your arm; for loveis as strong as death, jealousy as cruel as the grave; its flames are flames of fire, a most vehement flame"(Song of Sons 8:6).] You know, this gospel has been preached for 2000 years and every person who's heard the gospel of Jesus remembers the intimacyof Mary. But our worship won't be remembered by God at all if it doesn't involve sacrifice and brokenness. And if our worship doesn't release all that we are and if it doesn't cost us everything , then it's not true worship at all.
자, 이제 저는 우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주님을 향한 헌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그토록 만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심지어 2년 전에 드렸던 예배가 천사들과 하나님을 여전히 축복(존귀케)해 드리고 있습니까?
천사와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가 주님을 만졌던 그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심지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방법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에 흔적이 새겨질 정도로 우리가 주님을 만질 수 있는 그런 친밀감 그리고 자아가 완전히 죽는 경지가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영원히 기억하게 할 인(도장)이 그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2,000년 동안 전파되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모두는 마리아의 친밀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예배가 깨어짐과 희생이 없다면 하나님께 결코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예배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풀어 내지 못하고, 우리의 가장 값진 것을 드리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진정한 예배가 아닐 것입니다.
True Worship Must Kill Us
진정한 예배는 반드시 우리를 죽여야 합니다
If we're truly going to give God the worship that He deserves, it's going to involve brokenness. True worship must kill us and it must bring a sense of brokenness and humility into our body, soul and spirit. Remember, Mary had to break her alabaster boxs ymbolizing her brokenness and her 'death to self.' The 'breakings of God' release fragrant worship. If we're going to release the fragrant oil of worship, every time we come into the presence of God we must die. That's what happens when we come into the presence of Jesus we die. We become humbled under His mighty hand, broken inside, our pride overthrown.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흠향하실 만한 예배를 드리길 원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깨어짐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반드시 우리를 죽여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몸,혼,영의 깨어짐과 낮아짐을 가져와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마리아는 그녀의 깨어짐과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의 깨뜨리심은 향기로운 예배를 풀어 줍니다.
우리가 예배의 향유를 풀어 놓기를 원한다면
매번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임재에 나아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 낮아지게 되며, 상한 마음으로 통회하게 되며, 교만은 무너집니다.
It was only after her alabaster box was broken that the oil could be poured out, releasing its fragrance. Listen! Even after she walked out of the house there was still the lingering aroma; something had happened, someone touched God! Is there a lingering aroma over our lives and our churches? Is there a lingering aroma about our ministries that still fills the throne room of heaven? Is our worship like fragrant oil; even when we aren't worshiping any longer, the aroma of that sacrifice lingers?
향유가 흘러나와 그 향기를 발할 때는 바로 옥합이 깨어진 이후입니다.
주목하십시오! 마리아가 그 집에서 나왔을 때조차 거기에는 향기가 있었습니다.
뭔가 일어났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만졌습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교회 가운데 여전히 향기가 있습니까?
우리의 사역가운데 여전히 하늘의 보좌를 매우고 있는 향기가 머무르고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향유와 같습니까?
심지어 우리가 더 이상 예배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 그 희생의 향기가 머무르고 있습니까?
Our hearts are just like the alabaster box containing precious treasure soaked in an exquisite fragrance. But we must allow the Holy Spirit to break our hearts His way, by His Spirit. He never damages our hearts; He breaks our hearts with a purpose, so that we can release our true fragrant worship to God. Brokenness helps us die to ourselves and our inhibitions; we can forget about ourselves and worship God with great freedom and abandonment. We can even become like Moses! He didn't even realize His face shone with the brightness of the glory of God when he descended the mountain after 40 days of being in the glory of the Lord. In some Bibles it says that He lost sight of Himself (Ex. 34:29).
우리의 마음은 극상의 향기에 절어진 보배를 담은 옥합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님께서 그의 영으로, 그의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결코 상처를 입히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한 향기로운 예배를 드리도록 도와주십니다.
깨어짐은 우리가 우리 자아와 억제에 대해 죽는 것을 도와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잊고 큰 자유와 자기 포기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심지어 모세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주의 영광과 함께 40일을 보낸 후 하산할 때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감지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성경은 그는 자신의 시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출34:29)
But much of the church hasn't been broken and crushed by the Spiritof God. You know, if we surrender to the Lord, there is a breaking and humbling that comes upon us when we're in His presence. There is a death that only His presence can bring that will cause us forget about ourselves; our flesh doesn't rise up and rule us. Remember when the priests went into the Holy of Holies they burned the incense. The place was filled with the cloud of incense whenever they went in before the ark of the Lord. And one reason for the cloud of incense was because no flesh can glory in God's sight. The priests had to create a covering so that God could not see them going about their priestly duties in the Holy Place . I believe that brokenness and death to self not only releases true worship, it also releases the glory of God to cover us.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에 깨어지고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복종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있을 때 깨어지고 낮아짐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잊어버리게 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은 더 이상 일어나거나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그들은 향을 피웠습니다.
지성소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이 법궤에 나아갈 때마다 향의 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향구름을 피운 이유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어떤 육체도 영광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덮개를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지성소에서 제사장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하는 것을 보실 수가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저는 깨어짐과 자아에 대한 죽음은 진정한 예배를 가져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덮게 해준다고 믿습니다.
임다윗/김마리 공역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