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목사, '부부는 이중창을 하도록 부르심받은 것... 화음은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낸다'
한국 교회가 부흥을 하고 계속적으로 부흥을 하면 좋겠는데, 안 그런 거예요. 이제 후유증을 맞아야 되는 거예요. '애만 많이 낳는 게 다가 아니다, 잘 가르쳐야 된다'에 직면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도 "과거로 돌아가자"라고 얘기하는 건 역사를 모르는 것이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래요. 자꾸만. 초대교회에서 지금까지 2천년 역사예요.
2천년 역사의 교회사 속에서 일어났던 많은 시행착오들도 좋은 유산들이 우리에게 오늘 더 나은 사랑, 더 나은 업적을 남길 수 있게 작용하도록 굴어야 돼요. 그래서 이런 문제에 교회들마다 다 좋은 신앙 고백을 갖고 모였는데, 교회는 실제로는 평탄하지도 않고 시원스러운 발전이 없어요. 가족하고 똑같아요. 매일 지지고 볶아요.
그러나 가족이 그렇듯이 교회도 그 끈끈한 연결성이 이 세상에 어떤 도전이나 심한 절망도 이기게 우리를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이 왜 시간과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를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분별을 만들어내는 일, 우리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지혜를 만들어내서, 우리를 수준 높은 데로 인도하시며, 자유를 제대로 발휘하게 만드실까?' 이제 그걸 해야죠.
에베소서 5장 18절은 유명한 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그 성령 충만은 우리 부흥 시대에, 20세기 우리 한국교회에 성령 운동으로 충분히 경험을 한 이야기지요.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받아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갈라디아서 5장도 이어 나오게 됐고, 우리 인생에 신자답지 못할 때마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아서 그래. 성령께 기도해' 하는 지금의 우리 교훈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성령 운동과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감동하심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령 충만은 뭐와 대비하고 있냐 하면 "술 취하지 말라"와 대비하고 있습니다.
술 취한 것하고 성령 충만하고는 너무나 양극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 있는 건데, 성령 보통에서 성령 충만으로 이렇게 비교하지 않고, 최악의 것으로 대비를 시켰을까 하는 겁니다. 그건 방탕한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방탕하다 그러면 우리는 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부도덕한 것이 방탕이라고 생각할 텐데, 에베소서에서 얘기하는 방탕은 낭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탕자의 비유도, 그가 나가서 허랑방탕한 것은 부도덕하게 술을 많이 먹고 어디 가서 농땡이 치고 한 얘기가 아니라 아버지 밑에서 배워야 할 시간을 놓쳐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자라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에베소서는 전부 시간에 관해서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이 그렇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앞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뭐뭐가 나왔죠? "시간을 아끼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지혜로운 자가 되라"에 성령 충만이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의 시간들이 일을 한다는 거죠. 어떻게 일한다고요? 공부하듯이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중학교를 들어가고 하나씩 하나씩 가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초시간적이죠. 성령께서 임하시면 방언도 하고 은사도 베풀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고 하는 초시간적, 초월적인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려고 들지요. 말하자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된다고 하면 쉽죠.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히 하자는 것이죠. 여기가 우리가 놀라는 부분이죠.
구원 역사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들어오셔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지 않고 시간 속에 들어오시고, 공간 속에 들어오셔서 육체를 이루십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가 본받을 수 있게, 우리가 다시 재현할 수 있게 하십니다.
놀라운 일이죠.
그래서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제 그 후에 이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으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똑같이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하니까 둘이 똑같아요. 하나는 사랑이라 그랬고 하나는 복종이라 그래서 혼동을 해요. 그러나 똑같은 말이에요.
사랑은 복종이에요. 부부의 관계에서 성령 충만이라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게 제일 이해가 좋습니다.
사랑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것이 최고의 행복을 만들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미쳤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아닌 것 같은 표정을 한 번 지어보시죠. 사랑이 이런 것일 줄은 몰랐고, 왜 행복하지 않은지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럼 '사랑에 문제가 있었나?' 이렇게 갈 수밖에 없죠.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뭐냐 하면, 진심과 열정입니다.
그럼 진심이 바뀌었나? 내가 변심이 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열정이 식었나? 그럴 수는 있습니다. 좀 옛날만큼 열성적이지는 않지만 그건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삶에 묶여서 할 수 없는 일이지 열정이 식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된 건가?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는가? 성경은 이렇게 얘기하죠.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장인데, 사랑은 뭔가? '이건 아니다'가 먼저 세 개 나와요. '천사의 말을 하는 거 아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이 아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 아니다.' 이건 사랑 아니다. 혼동하지 마라.
그럼 사랑은 뭐냐? 사랑은 오래 참는 거다, 이러는 겁니다.
우리 말은 굉장히 완곡하게 번역이 됐는데 영어 번역이 직역이에요. "LOVE IS LONG SUFFERING"입니다. 사랑은 오랜 고통이다.
그럼 다 적용이 되죠. 모든 결혼한 사람은 다 고통스럽습니다.
'이게 뭔가..' 이게 보란 듯한 일을 할 틈이 없습니다. 가족에 묶여서, 부모는 자식에게 묶이고 자식은 부모에게 묶여서.
자식들은 밤낮 "다른 엄마들은 다 천사 같은데 우리 엄마는 왜 악마 같을까?" 그럽니다.
부모는 "남의 집 애들은 다 예의 바르고 말 잘 듣던데 왜 내 애들은 말을 안 들을까?" 서로 그러죠.
그리고 이어서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 무례히 행치 않는다. 이기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딘다" 이렇게까지 갑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부부가 되어서 처음으로 자신이 자기 혼자가 아니고 둘인 묶음을 당합니다. 연합을 당합니다.
연합을 했을 때 사랑으로 묶였으니까 둘이 일심동체가 되며 뜻도 같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둘이 하나이지 않고 둘이 각각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모든 문제에 둘이 엮여 있는데 생각이 서로 다릅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견딥니까? 헤어질 수 없어서 견디고, 헤어지겠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더 어려워서 할 수 없이 삽니다.
할 수 없이 산다는 건 지금 나이들고 난 후의 결과는 아닙니다. 그때 그 시대의 느낌이었죠.
그러면서 뭘 배우느냐 하면 지는 법을 배웁니다. 지는 것이 사랑이고, 지는 것이 지혜이고, 지는 것이 인내이고, 지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처음으로 자기 홀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웅주의적 기대를 꺾게 되고 현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한 아내를 만족시키고, 만족시킬 수 없을 때는 최소한 순종해야겠다라는, 자기 자유를 권리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이 독불장군을 사람으로 만듭니다. 결혼이 그렇게 만듭니다.
여자도 그렇습니다. 여자가 자식을 길러야 하고 남편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아내도 배우고, 남편은 나가서 자기 일을 하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못한다 이렇게 되는 거는 잘못입니다. 남편을 챙겨야 된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여기서 서로,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게 사랑이 둘이 하나라는 걸 알게 해줍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사건건 의견이 같지 않고 불편하냐?
듀스를 하기 때문에 이중창입니다. 이중창은 혼자 하는 게 아니죠. 같은 노래를 부르는데 음이 다른 소리를 내야 됩니다.
그래서 뭐가 나오죠? 화음이 생깁니다. 화음은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혼자 잘해도 음악의 진정한 예술성으로서의 화음은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할 때 한 거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자족하신 분이지만 그걸 더 키우고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상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상대를 만들지만 그 상대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자율권을 주지 않으면 화음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아시고 만듭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리고 그가 기꺼이 이 음악에, 이 이중창에 참여할 때까지 기다리고 가르치고 자기 멋대로 하는 시간을 주십니다.
그것은 가장 크게 아담이 명령을 어겨서 죄를 범하였을 때부터 시작합니다.
그를 죽여 없애고 새 사람을 만들면 될 거 아닙니까? 순종하는 사람을.
그러면 그건 조작이고 그것은 조종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이중창을 못합니다.
우리가 딴 소리를 내는 것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놀라운 일이죠.
그래서 부부는 결국 나중에 가서야 우리가 천생연분이었구나, 하나님이 당신을 나에게 주셨구나 인정하게 됩니다.
이 시작이 굉장히 돌연하거든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거는 갑자기 다짜고짜 말도 안 되게 나오는 선언이거든요. 앞뒤 문맥이 없어 보이듯이 하나님은 무슨 권리로, 무슨 배짱으로 나보고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러고 "아내를 위하여 자기 몸을 바쳐라"고 그러십니까?
"내가 너를 복되게 하려고 이 여자를 준비해서 네게 주었다. 나는 너를 영광스럽게 하려고 이 남자를 준비하고 여기까지 길러서 네게 주었다. 이제부터는 둘이 해야 되는 부분이다. 화음을 넣어 중창을 해야 된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 부부가 현실을 갖고 있지 않으면 무슨 갈등이니 무슨 타협이니 하는 것이 성립하겠습니까?
그렇게 크게는 역사가 있고, 그리고 각각의 인생이 있고, 가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이요, 하나님이 허락한 현실이요, 우리보고 잘 크라는 현실이요 조건이라는 걸 안다면, 보다 적극적이고 담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지나 그 시행착오들이 우리를 만듭니다. '싸워봤자 손해다.'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송강호 씨가 조폭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아내와 딸이 아버지가 조폭인 게 꼴 보기 싫어서 캐나다로 이민 가 버리고 이제 송강호 씨는 혼자 살면서 생활비 보내줘야 되는 거죠. 조폭이라 밤낮 성질 날 때 주먹 휘두르는 권력을 갖고 행사하자는 게 아니라 먹고 살자는 겁니다.
훨씬 속 썩을 일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도 속 썩고 집에 와서 이제 소포로 온, 옛날 카세트 영상을 TV에 꽂아서 보면서 자기가 끓인 라면 하나 먹고 있는데 아내하고 딸이 물총 싸움하면서 깔깔거리고 정원을 뛰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너무 안타깝죠. 너무 보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고, 그래서 밥상을 걷어차 버립니다. 울면서.
그러면 이 화면 끝나고 밥상 찬 송강호가 그다음에 뭘 했을 것 같아요? 밥상을 치워야죠. 그럼 그다음에 안 찹니다. 그다음에는 치우기 쉬운 거 던지죠. 베개를 던지죠. 그다음에는요? 안 던집니다.
험한 욕도요, 처음에는 아주 거친 말 하지요. 안 사니, 뭐니... 그다음에 안 하죠. 그렇게 성숙해갑니다.
모든 것이 편안해야 되는 외적 조건이 완성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모든 것 속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 지혜로운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그게 이 구약 역사 전체입니다. 사사기의 실패, 열왕기의 실패... 그러고도 회복시키죠.
멸망시키려고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더 잘하자'라고 새 판을 깔아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이, 예수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조건 속에 있는가를 안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신앙과 그런 증거를 우리가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영선 목사, CBS 잘잘법 특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