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공, 중도, 무분별, 모를 뿐
어떤 한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우리는 그 사람을 인식할 때 분별심, 판단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 능력이 있거나 없는 사람, 얼굴이 잘났거나 못난 사람 등 다양한 관점에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인식한다. 여기에 키도 크고, 능력도 있고, 인물도 잘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과연 그 사람은 진짜 키도 크고, 능력 있고, 잘난 사람일까? 그 사람을 그렇게 인식하는 데에는 반드시 비교할 대상이 따른다. 누군가와 혹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키가 크거나 작을 수도 있고, 능력이 있거나 없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람보다 더 키도 크고, 더 능력 있고, 더 잘생긴 사람 옆에 가면 이 사람은 키도 작고 능력 없고 못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이 사람은 독자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어떤 인연이 옆에 있느냐에 따라 잘나고 못난 것이 결정되는 것일 뿐이다. 즉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것은 진짜 그런 것이라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연이 오느냐에 따라 키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것이며, 인연 따라 능력이 있거나 없는 것일 뿐이다.
즉 우리가 능력이 있고 없다거나 하는 분별은 진짜가 아니라, 인연따라 거짓으로 만들어진 허망한 분별심일 뿐이다. 그래서 이를 인연가합이라고 한다. 인연따라 가짜로 화합해서 그렇게 인식될 뿐 진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것을 불교교리로 정리해 보면,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연기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 그 자체를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자성이며, 공인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크다거나 작다거나 할 수 없어서 중도인 것이다.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것 자체가 둘로 나누어 그 중 하나를 택하는 분별이다. 그래서 연기적으로 본다는 것은 곧 무분별로 보는 것이다. 분별하지 말라, 알음알이 내지 말라고 하는 말이 바로 이를 의미한다.
또한 이처럼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모든 규정들, 나는 어떠 어떠하다라고 나를 인식하는 그 모든 인식의 틀들이 모두 이처럼 인연따라 연기적으로 만들어진 가짜이지 진짜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가짜로 인연따라 규정된 것일 뿐 진짜가 아니다. 즉 무아인 것이다. 나뿐 아니라 ‘너’, ‘세상’, ‘대상’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내가 눈 앞의 대상을 규정할 때 사실은 그것은 내 안에서 분별된 헛된 가짜의 생각일 뿐 진짜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젓가락은 길거나 짧지 않다. 전봇대 옆에 오면 짧고 이쑤시게 옆에 오면 길다. 즉 인연 따라 거짓으로 길거나 짧다고 분별될 뿐 진짜 긴지 짧은지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다른것들과의 비교 속에서, 관계 속에서 그것이 분별되고 인식되는 것일 뿐, 그것 자체의 고정된 실체적 성품이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완전히 텅 빈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에 대해서, ‘남들’에 대해서, 이 세상과 사물과 마음 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판단, 어떤 인식을 내릴 수 있을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모두가 인연따라 만들어진 거짓일 뿐 진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단 하나의 판단이나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온통 콱 막혀서 말문이 막힐 뿐이다. 진실은 이와 같이 도저히 인식될 수 없고, 판단될 수 없고, 분별될 수 없다. 그저 모를 뿐이다. 아무 것도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렇게 우리의 인식과 분별이 콱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직 모를 뿐일 때, 단 하나의 생각조차 일으킬 수 없을 때, 그 꽉 막힌 순간이 한계치에 달하는 순간 전부가 알려지는 대 전환을 맞게 된다. 이것은 생각이나 분별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생각과 분별이 콱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게 없음을 알고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채 오직 모를 뿐으로 남을 때 인식을 넘어 그저 이 하나의 진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비로소 분별의 오랜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채 오직 모를 뿐으로 남을 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분별의 오랜 감옥에서 벗어나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