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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한상원목사
PW : 믿음 BIW : 주어진 일에 충성하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충성하며 사는 것이다.
흰옷은 더욱 흰색으로, 색깔 옷은 더욱 진하게...
어느 학교에 얼굴이 아주 검은 맹순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맹순이는 매일 친구들에게 놀림만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반에서 가장 예쁘고 얼굴이 흰 영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맹순아. 네가 너무 얼굴이 검어서 말해 주는 거야! 얼굴을 씻을 때 표백제로 씻으면 얼굴이 뾰야게 돼!!!”
맹순이는 가장 예쁜 영자의 말을 듣고는 “이제 나도 얼굴이 뾰야케 예뻐지겠지! 하하하” 하면서 기대가 커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맹순이의 얼굴은 아예 검은 숯탱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표백제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흰옷은 더욱 흰색으로, 색깔 옷은 더욱 진하게...”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 바꾸려고 한다고 해서 바꿔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사람에 따라서 교만하고 거만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열등감과 패배감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예쁘고 멋져 보여도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것이 가장 예쁘고 멋쟁이입니다.
가장 예쁘고 멋진 사람은 자신을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각각 다르게 만들어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하두 많이 성형 수술을 해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누가 누군지 알아보시지 못할까 봐 지문인식기를 설치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만들어주신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누구보다도 가장 완벽하고 훌륭하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장 많이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P4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지고 급기야에는 은 20을 받고는 미디안 장사꾼들에게 팔려나갈 때,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창세기 42;20-22의 말씀을 보면 중동지역에 펼쳐진 7년 대 흉년 중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왔을 때,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형들에게,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추궁한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끼리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라고 하면서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 급기야는 팔아넘기던 때를 상기하고 있다.
르우벤은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라고 자책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종으로 팔려나가면서 “예, 종으로, 노예로 팔아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수긍하면서 팔려나간 것이 아니다.
형들에게 “형님, 형님, 내가 잘못했어요. 형님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나를 팔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소연하고 애원하고서 울고불고하면서 종으로 팔려나간 것이다.
이처럼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종으로 팔려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
이복형님들이 잘못해서 그 잘못한 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친 것이 잘못인가?
그 형님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것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내가 꿈을 꾸었다고 나를 미워한다면, 내가 그 꿈을 꾸고 싶어서 그런 꿈을 꾼 것인가?
내가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아도 밤에 잠을 자면서 무의식중에 꾸어지는 꿈을 내가 어쩌란 말인가?
그 꿈은 내가 꾸고 싶어서 꾼 꿈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지 않은가?
내가 형님들이 일하는 곳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버지가 형님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오라고 심부름시켜서 온 것이지 않은가?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것도 잘못된 일인가?
그런데 나를 다짜고짜 붙잡아서 죽이려고 하질 않나?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놓지를 않나? 심지어는 은 20을 받고 헐값에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형들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무리 세상살이가 각박하고 힘들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세상천지를 둘러봐도 자기 동생을 종으로 팔아넘기는 형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종으로 팔 것 같으면 차라리 깨끗하게 죽여버리지 왜 나를 이렇게 팔아넘기는 거야.
요셉은 이렇게 종으로 팔려서 미디안 상인들,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질질 끌려서 애굽으로 넘어가면서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지 모르겠다.
종으로, 노예로 팔렸기 때문에 손과 발목에 쇠사술로 칭칭 묶여서 질질 끌려가는 것이다.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꿈을 주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셔야 하지 않나?
형님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고, 종으로 팔려나가게 가만히 계시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요셉이 가졌던 이런 마음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첫째 아들 므낫세를 낳을 때까지 쉽게 풀려 지지 않는다.
요셉은 첫째 아들을 낳으면서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어준다.
므낫세라는 이름에 대하여 창세기 41:51에서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셉은 첫째 아들을 낳으면서 이젠 과거에 요셉이 살아온 온갖 고통과 아버지의 집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도록 은혜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만큼 고통스런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요셉은 그동안 가졌던 모든 원한과 고통과 분노를 한꺼번에 풀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두 번에 걸쳐서 꿈을 주신 요셉에게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D4.
① 이방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깨우쳐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요셉을 은 20에 산 미디안 사람들은 다시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웃돈을 받고 팔아넘긴다. 요셉을 산 이스마엘 사람들은 요셉을 애굽에까지 질질 끌고 더 많은 웃돈을 받아서 애굽사람에게 팔아넘긴다.
이스마엘 장사꾼들에게 요셉을 높은 가격을 주고 종으로 산 보디발이라는 사람은 애굽의 왕 바로의 친위대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바로 왕의 친위대장이라고 한다면 우리 식으로 말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나 다름없는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보디발이 가진 권세, 권한은 하늘을 나는 독소리도 떨어뜨릴 만큼 위세가 당당하여 하늘을 찌를듯한 세력을 가진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애굽인들은 라(RA)라는 태양신을 섬기는 민족이다.
애굽인들은 태양신을 섬기는 민족이기 때문에 머리를 빡빡 민머리로 밀어서 자신들의 머리가 태양신이라고 믿었던 민족이다.
그러기에 보디발이란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보디발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시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보디발은 세상에 라(RA)라는 태양신이 최고의 신인 줄로 알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3절에서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디발이라는 사람은 요셉이라는 종에게는 아주 특별한 어떤 신이 함께하는 머슴이구나 하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보디발은 요셉을 보면서 자신들이 섬기는 태양신 라(RA)가 아니라 어떤 다른 신이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보디발은 어렴픗하게나마 요셉과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 하는 궁금증은 가지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신앙인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신앙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세상 천지만물을 직접 창조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우주 만물을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굳이 말로 전도하지 않아도, 우리 신앙인의 삶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전하고 가르치고 일깨워주는 전도자의 삶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디발에게 특별한 어떤 신이 요셉과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보디발은 어떤 특별하신 신이 요셉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요셉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믿어주어도 되는구나. 하면서 안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요셉을 믿고 신뢰해도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보디발의 마음에 꽉 차 있을 때, 보디발은 요셉에게 가정의 모든 일들을 맡기는 가정 총무로 세우게 된다.
사람은 그 사람을 인정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자신의 일을 맡길 수 있다.
② 맡은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요셉의 삶은 자유인의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이요 종의 삶이다.
누가 종으로 사는 삶, 노예로 사는 삶이 좋다고 하겠는가?
노예로 살아가는 삶, 종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피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피하고 싶은 삶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에게 지금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서의 삶, 종으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기를 원하신다.
종으로서의 삶, 노예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할 때, 주인에게서 인정받는 삶을 살게 된다.
보디발은 요셉의 삶을 인정해 준다.
종으로서 살아가야 할 때, 주인에게 인정받는 삶이 매우 중요하다.
주인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면 주인은 그 종을 더 호되게 다그치면서 더욱 더, 더 매몰차게 밀어부치게 된다.
그러면 종들은 더욱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육체적인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영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되는 것이다.
보디발의 집에는 요셉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종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보디발의 집은 바로의 친위대장의 집이었고, 그 집에는 정치범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까지 있었던 집이기 때문에 요셉 외에 수 많은 종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디발이 요셉을 인정해 주었다고 해서 모든 종들을 요셉처럼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들에게는 매몰차게, 호되게 야단을 치면서 일을 시키기도 하고, 모질게 학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더 좋지 않은 곳으로 팔아버리는 종들도 있다.
주인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면 주인은 그 종을 더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헐값에 팔아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여버릴 수도 있다.
종이란 존재는 인권이나 인격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주인이 자신을 폭행하거나 학대하거나 심지어 죽인다고 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자격이 없다.
그저 주인의 처분에 맡길 뿐이다.
주인의 처분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종으로서 주인의 마음에 들어야만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은 주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4절에서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6절에서도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디발 주인이 요셉에게 이렇게까지 하게 된 동기가 5절에서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디발 주인은 요셉이 자기 집에 들어온 이후로 모든 것들이 다 잘 되어지고 평안해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요셉을 가정 총무로 세웠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보디발이 볼 때, 요셉이란 종은 복이 따라다니는 종으로 보이는 것이다.
종으로 팔려 와서 그 가정의 모든 대소사를 책임지는 총무 집사가 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요셉은 가정의 총무 집사가 되었기 때문에 가정의 모든 대소사를 직접 책임지고 이끌게 되는 것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모든 종들도 통솔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는 것이다.
요셉은 본인도 종이면서도 다른 종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다른 종들을 거느리고 통솔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일을 맡았든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도록 충성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고린도전서 4:2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의 말씀에서나 므나 비유의 말씀에서 최선을 다하여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신앙인들은 직장에서나 어떤 모임에서라도 신앙인들에게 맡겨진 직분, 사명, 업무가 있다면 그 일을 맡긴 주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있도록 충성해야 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만에 하나라도 “괜히 저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겨서 이렇게 망쳐놓았어.”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000에게 일을 맡겼더니 아주 깔끔하게 정말 잘해 놓았어.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어. 또 일을 맡겨도 좋겠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③ 또 다른 계획을 추진해 나가시는 하나님.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10년 동안 종으로 사는 동안에 보디발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게 된다.
보디발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까지도 요셉을 신임한다.
보디발의 자녀들도 요셉을 신임하게 된다.
보디발의 집에 있는 다른 종들도 요셉을 신임하게 된다.
보디발은 바로 왕의 친위대장으로 늘 바로 왕을 최측근에서 모셔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왕궁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자연스럽게 외로움을 느낀 보디발의 부인이 요셉을 가까이하려고 한다.
보디발의 부인은 한번 요셉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나서는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날마다 요셉을 자기 곁에 두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요셉은 부인의 곁에는 얼씬도 안 하려고 피해 다니게 된다.
요셉은 부인에게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하면서 피해 다니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일을 보려고 보디발 부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요셉과 부인만 있는 상황이 된다.
부인은 요셉에게 “집에 우리 두 사람만 있지 않느냐? 그러니 이리 와서 나와 동침하여 뜨겁게 보내보자꾸나.” 하면서 요셉을 붙잡는 상황이 벌어진다.
요셉은 혼비백산하여 집을 빠져나간다.
혼비백산하면서 집을 빠져나가는 요셉의 옷을 움켜잡은 부인은 소리소리 지르면서,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라고 하면서 요셉을 성폭행범으로 누명을 씌우고 만다.
이 일로 인하여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정치범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죄짓지 않으면서 올바르게 최선을 다하여 살려고 노력한 결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요셉은 종살이에서 감옥살이까지 해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 요셉에게는 인간적인 견해로 보면 안 좋은 일이 계속 연거푸 일어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계속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요셉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럼없이 올곧게 살아왔는데도 요셉의 삶은 점점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죄짓지 않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더 좋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그런데도 요셉에게는 계속 좋지 않은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것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더 좋지 않은 일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또 다른 계획을 추진해 나가고 계시는 것이다.
보디발이 바로의 친위대장이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는 늘 정관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경제계, 문화 예술계의 거장들이 왕래가 많았을 것이다.
요셉은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보디발 집의 가정 총무로 살았기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찾아오는 대소 신료들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나중에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꾼 꿈을 아무도 해석해 주는 사람이 없게 되었을 때, 요셉이 그 꿈을 아주 명쾌하게 해석하면서 어떻게 해야 옳은지에 대하여 처방전까지 내어놓았을 때, 바로는 요셉을 자신의 다음 권력자인 애굽의 총리로 세우게 된다.
그랬을 때,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만났던 수많은 대소 신료들과 정치계, 경제계,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요셉의 든든한 조력자들이 되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날마다 다가오는 보디발 부인의 집요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요셉은 계속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일하게 되면 언젠가는 부인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한창 혈기 왕성한 청년의 때이기 때문에 부인의 유혹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부인의 유혹에서 피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시고, 또 다른 계획을 추진해 나가면서 요셉에게는 더 좋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지만, 정치범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에 갇히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부인의 말처럼 요셉이 부인을 겁탈하려고, 성폭행하려고 했었다면 정치범들이 갇히는 감옥에 갇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요셉은 가정 총무이기 전에 종이요 노예의 신분이다.
그러니 종이 주인의 여자를 겁탈하려고 했었다면 당연히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에 죽였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도 보디발은 아내의 말에 처음에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었지만, 평소 요셉이 올곧게 살아가는 종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아내의 성격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누명을 쓴 것으로 생각하여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요셉이 감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간수장이가 요셉을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돌보는 일을 맡기는 것을 보면 요셉이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힌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요셉을 정치범들에게 수종 드는 일을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3년 동안 요셉을 감옥살이시키면서 정말로 중요한 한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감옥에서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하신다.
하나님은 술 맡은 관원장이 꾼 꿈을 해석해 주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을 열어가시기 위해서 요셉을 계속 감옥살이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에는 좋지 않은 일들이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에 의해서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진행되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기를 저울질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지금 주어진 종으로서의 삶, 노예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감옥살이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늘 요셉과 함께해 주시면서 형통한 삶이 되도록 이끌고 가신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늘 함께하신다고 해서 종의 삶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늘 함께하신다고 해서 감옥에서 석방시켜서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면서 형통한 삶이 되도록 이끌어가시지만, 여전히 종으로서, 노예로서, 감옥에서 살도록 하시는 것이다.
여전히 종으로, 노예로, 감옥살이하는 중에 충성하도록 하시고, 그래서 인정받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 가시는 것이다.
L4 & B4.
우리 신앙인들이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아서 모함과 협박을 당하고, 급기야는 경찰에 고소를 당해서 경찰에 잡혀간다면 어떤 심정일까?
우리들이 죄를 범해서 잡혀간다면 그래도 덜 억울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경찰에 붙잡혀가야 할 죄를 지은 적도 없는데도, 누군가의 모함으로 고소를 당하고 협박을 당해서 경찰에 끌려가야 한다면, 그래서 구류장에 갇히고, 더 나아가서는 교도소에서 형을 살아야 한다면 우리들은 어떤 마음일까?
그런데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경찰들에게 끌려다니고, 재판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하겠는가?
여기저기 탄원서를 제출하고 우리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석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는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신 어떤 뜻과 의지가 있을 것이야. 하면서 묵묵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데로 따라갈 수 있겠는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쉽게 이렇다 저렇다 라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일에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의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실까?
① 고난의 삶, 고통의 삶, 역경의 삶이라 할지라도 원망과 불평보다는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현재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평안하고 화목하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는 마음먹은 것처럼 잘 되어지지는 않는다.
많은 부분에서 부딪쳐야 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기도 해야 한다.
상사나 동료들에게, 어떤 때는 까마득한 후배들에게서도 원망이나 불평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도 많다.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 불쾌감을 가질 때도 많다.
지금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12번씩 들 때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갈피를 못 잡고 헤맬 때도 있다.
어디론가 홀연히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을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어떤 뜻과 섭리와 의지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 믿음으로 잘 견디면서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들에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서 감사하고, 다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건강과 풍요로운 마음이 있다는 것이기에 감사하고, 누군가에게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다는 것은 내 감정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증거이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다른 누군가에게 흠집 잡히지 않도록 최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
요셉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삶은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있는 완벽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흠집 잡히는 삶을 살았다면 그 흠집이 요셉으로 하여금 가정 총무가 되고, 간수장이가 인정해 주는 삶이 될 수 있었을까?
이들이 나중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요셉이 저지른 온갖 비리들을 투서하면서 요셉이 총리직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막아서지는 않았을까?
요즘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연예인들, 소위 유명 인사들의 삶을 보면 아무리 자신의 결점, 저지른 비리들을 숨기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어도 결국에는 낱낱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자기들만 최고로 깨끗한 척, 정의로운 척, 올바른 척하면서 큰소리쳤지만, 온갖 비리의 온상인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마는 누군가에게 흠집 잡힐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늘 조심하면서 누구에게도 흠집 잡히지 않도록 최고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③ 하나님께서 또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살아야 한다.
사람의 일이란 아무도 모른다.
지금 이대로 살아가란 법은 없다.
어느 누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 꿈에서라도 상상했던 일일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면서 17살에 두 번에 걸쳐서 주었던 꿈을 실현해 나가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어떤 계획과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우리들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잘 몰라도 나중이 되어서야 “아... 그 때,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그러니 지금 잘 몰라도 괜찮다.
모르는 것을 굳이 알려고 발버등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가지신 의지와 뜻과 섭리와 주권을 따라서 우리들을 이끌어가실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주 멋지게 인도해 가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살아도 좋다.
기대하는 부푼 꿈이 있을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담대함, 당당함, 인내력을 주실 수 있다.
오늘 요셉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충성하며 사는 것이다.
그 일이 고난의 삶이요 좌절케 하는 삶이요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드는 삶이라 할지라도 묵묵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해 가심을 믿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는 앞으로 살아야 할 미래가 있고, 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들을 통하여 이루어가실 분명한 의지와 주권과 꿈과 비전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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