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만 시간을 품은 사물의 시
- 김영석의 시세계
오홍진(문학평론가)
김영석 시인은 모든 사물에 드리워진 자연 이치에 시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이를테면 첫 시인 「하늘이 뚝」에서 시인은 시간이 되면 “떨어질 준비를” 하는 은행잎에 주목한다. 샛노란 가을바람이 불면 은행잎은 “밟히고 나뒹굴고 썩어가고 매장”된다. “낙엽 타는 냄새”가 퍼지면 드높았던 가을 하늘도 “뚝 떨어진다”. 자연 이치란 이런 것이다. 피어날 때는 피어나고, 떨어질 때는 떨어진다. 피어남과 떨어짐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피어나면 떨어지기 마련이고, 떨어지면 다시 피어나기 마련이다. 시인은 파란 하늘도 뚝 떨어지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를 향해 “넌 떨어져 봤니?”라고 묻는다. 노란 은행잎은 떨어진다는 마음 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자연 이치를 자연 이치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피어나는 일이나, 떨어지는 일에 매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피어나는 이치와 떨어지는 이치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김영석의 시는 무엇보다 자연에 드리워진 이러한 역설을 눈여겨보는 데서 비롯된다. 자연 현상만 이런 게 아니다. 우리네 삶 자체가 그렇다. 태어나는 일은 늘 죽음과 이어져 있고, 죽는 일은 늘 태어남과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지 않으면 생명 순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넌 떨어져 봤니?”라는 시인의 질문에는 모든 자연 사물을 관통하는 생명 이치가 스며들어 있다. 모든 사물이 피어나는 자리에서 모든 사물은 떨어지고, 모든 사물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모든 사물은 피어난다.
「직하폭포」에서 시인은 “끝을 향해 밑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모두 놓아두고” 전속력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노래한다. 모든 것을 놓아야 폭포는 비로소 자유에 이를 수 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면 ‘떨어지는’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시인은 “확 놔버려라”라고 외친다. 머릿속 생각으로 두려움을 떨쳐낼 수는 없다.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한다. 내려놓아야 뛰어 들어갈 틈이 생기고, 내려놓아야 움켜잡을 무언가가 생긴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이 힘을 시인은 절박함에서 길어 올린다. 절박함은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폭포는 죽음을 각오하고 까마득한 밑바닥을 향해 뛰어내린다. 밑바닥이란 심연(深淵)과 같다. 살아남으려는 욕망에 매인 사람이 어떻게 심연을 가로지를 수 있을까? 자기를 내려놓은 존재만이 심연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
시인은 심연을 가로지르는 폭포의 이 힘에 “서늘한 정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용대리 겨울 직포」에 나타나는 폭포의 서늘한 정신은 “고요 속에 격렬한 울림”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겨울 폭포는 찰나의 순간에 얼어버려 “황태들이 떼지어 오르”는 형상을 내보이고 있다. 시인은 폭포의 얼음 기둥이 우르릉 무너지며 황태들이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순간을 상상한다. 황태들이 살아 있는 한 겨울 폭포는 늘 봄을 꿈꾼다. 봄이 오면 폭포는 다시 절벽에서 밑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모험에 거침없이 뛰어들 것이다. 시인은 가만히 옷깃을 여미며 봄의 정신을 잊지 않은 겨울 폭포의 모습에 허리 숙여 삼배를 올린다. 1950~60년대 한국시를 이끈 김수영은 「폭포」에서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를 “고매한 정신”으로 표현한 바 있다. 두려움에 매인 존재가 어떻게 서늘하고 고매한 정신과 마주할 수 있을까? 김영석 시의 밑자리를 형성하는 시 정신이 이러한 폭포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반란을 꿈꾸며 먹태, 백태, 무두태
미이라처럼 구부러지지도 않는 지느러미로
덕대에서 내려선다
황태 너는 남아 늙은 시인의 시가 되어라
얼어버린 강 따라가다 보면
바다 만나리
몸서리치게 그리운 비린내 맡으리
- 「황태의 반란」 부분
오래도록 우려낸 침묵
맑고 깊게 퍼져서 간다
그의 두툼한 손길 닿는 곳마다
새순 불쑥 키가 커지고
왁자지껄 떠들던 버들치 한 박자 숨소리 낮추는 것을
꽃들은 자기만의 색깔 더하고
다 늦은 저녁
천년 잠에서 깨어난 결 고운 돌무늬 고요히 눈을 뜬다
- 「석종(石鐘)」 부분
여기에서 걸어 나갈 수 있다면
강물 속에서 뚜벅뚜벅
허기진 나무 밑으로 걸어갈 수 있다면
내 피가 머루주처럼 차가운 돌덩이 혈관
구석구석 돌아 철근 같은 무릎
후두둑 떨쳐낼 수 있다면
끓어오르는 피 생명을 꿈꾼다
- 「석상」 부분
「황태의 반란」에는 영하 15도 혹한에서도 반란을 꿈꾸는 황태가 나온다. 황태의 반란은 말 그대로 죽음을 삶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통해 펼쳐진다. 죽음을 삶으로 되돌리는 일은 심연을 가로지르는 일과 연동되어 있다. 반란을 꿈꾸는 황태는 얼어버린 강을 따라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뭇 생명이 태어나는 모체(母體)와 같다. 그곳에서 황태는 “몸서리치게 그리운 비린내”를 드디어 만난다. ‘비린내’로 표현되는 살아 있음의 감각은 김영석이 추구하는 “늙은 시인의 시”를 낳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영하 15도의 혹한을 극복하는 이 힘이 “서늘한 정신”을 낳고, 그 정신으로 시인은 “그리운 비린내”가 넘쳐나는 시를 쓴다.
생명의 비린내를 품은 서늘한 정신의 미학은 「석종(石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맑고 깊게 퍼지는 종소리를 시인은 “오래도록 우려낸 침묵”으로 표현한다. 종소리가 닿으면 새순은 불쑥 키가 커지고, 왁자지껄 떠들던 버들치는 한 박자 숨소리를 낮춘다. 꽃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더하는가 하면, 돌무늬가 천년 잠에서 깨어나 고요히 눈을 뜨기도 한다. 오래된 침묵에 길든 사물은 석종이 내는 침묵의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침묵 속에서 온전히 눈을 뜨는 사물만이 새로운 생명으로 뻗어나간다. “동그란 원안으로 들어와/ 골똘히 제 속 들여다본다”라는 시구를 가만히 음미해 보라. 오래도록 우려낸 침묵의 소리는 어찌 보면 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피어나는 맑고 깊은 소리인지도 모른다. 생명과 생명을 하나로 아우르는 ‘숨소리’라고 말해도 좋겠다.
석종(石鐘)에서 울리는 침묵의 소리는 「석상」에 이르면 “철근 같은 무릎”을 떨쳐내고 “끓어오르는 피 생명”을 꿈꾸는 석상의 이미지로 거듭 표현된다. 석상은 돌 팔 한 개쯤 끊어내서라도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고단한 하루”나마 얻고 싶다. 무엇이 석상을 이토록 간절하게 만든 것일까? 석상은 생명이 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싶다. 석상이 흘린 눈물은 강물이 되어 흐르다가 어느 날 “모래가 된다”. 석상이 모래로 변하는 그 엄청난 시간을 묵묵히 버틴 존재만이 비로소 “끓어오르는 피 생명”이 될 수 있다. 얼어버린 황태가 비린내를 품고, 석종이 생명을 품으며, 석상이 생명으로 거듭나는 이 간절함을 품고 시인은 시를 쓰는 셈이다.
하늘이 아니면 날지 않는다
날지 않으면 하늘이 아니다
뒤뚱뒤뚱 해변을 걷는 바보 새
하늘을 날 때 가장 아름다운 새
모든 생명체가 숨죽이는 폭풍우 치는 벼랑에서
하늘이 아니면 뛰어내리지 않는다
무섭기도 하지만 내 깃 아니면
수천 킬로 날 수 없다
내 어미 새의 어미 새 되려면
무너져 내리는 바람 뚫고
날개 꺾이도록 휘저어야 머나먼 하늘길로 오른다
견디어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면 자유로울 수 없다
단단한 부리 침묵으로 날카로워지고
양 날개로 허공에 길게 선 하나 그으며
굽이치는 산등성에 쭈욱 그으며
날아야 쉴 수 있고 쉬어야 날 수 있으니
활공 기류 타고 단단하게 오른다
오로라 가득한 북극 빙산 어디쯤
서러운 자유 꿈꿀 수 있다
그곳에서 차디찬 눈물 흘린다
- 「신천옹(神天翁)」 전문
새는 하늘을 난다. 하늘이 있기에 새는 비로소 날고, 동시에 새가 날기에 하늘은 비로소 하늘이 된다. “뒤뚱뒤뚱 해변을 걷는 바보 새”는 하늘을 날 때 가장 아름다운 새로 돌변한다. 폭풍우 치는 벼랑에서 두려움 없이 뛰어내리는 저 새의 비상을 시인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본다. 수천 킬로를 날아 또 다른 세계로 가는 새는 “견디어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면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진리를 분명히 알고 있다. 거센 바람에 쉬이 꺾이는 날개로 어떻게 이런 비행을 지속할 수 있을까? 머나먼 하늘길을 나는 자유는 어떤 위기 상황도 견디는 마음결에서 뻗어 나온다. 끊임없이 날개를 휘저어야 가장 아름다운 새가 되는 이치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인의 말마따나 새는 날아야 쉴 수 있고, 쉬어야 날 수 있다. 하늘을 나는 일이 새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새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운명이 자유를 낳는 원천이 된다는 말이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북극 빙산 어디쯤에서 새가 누리는 “서러운 자유”는 이렇게 펼쳐진다. 날개를 젓지 않는 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인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서러운 자유” 끝에 흘리는 “차가운 눈물”은 이러한 새의 운명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김영석은 날개를 저어 하늘을 날아야 하는 새의 운명으로 시를 쓰는 자의 운명을 엿본다. 허연 속살을 드러낸 채 꿋꿋이 서 있는 나무(「속 빈 나무」)를 보면서 시인이 ‘편안함’을 느끼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이 세상을 살 수는 없다. 상처는 이번 생을 지탱하는 뜨거운 힘과 같다. 상처가 난 자리에만 옹이가 맺히지 않는가.
「나뭇가지 위의 새」에 나타나듯, 시인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를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감각에 매이면 그 너머에서 피어나는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이란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가슴으로 들꽃을 보고, 가슴으로 장미 향을 맡으려 한다. “네 향기는 영혼 깊숙이 들어와 나가지 않는다”라는 시구에 표현된 대로, 가슴으로 맡는 사물의 향기는 시인의 마음자리에 깊이깊이 새겨진다. 김영석의 시를 관류하는 시적 감각은 이리 보면 사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시안(詩眼)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 혼자 걸어야 하는 오솔길을 품고 있다. 이 길을 걸으려면 감나무 가지에 홀로 앉은 멧새의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한다. 가슴으로 온전히 그 외로움을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혼자 오솔길을 걷는다”라는 이 시의 결구는 정확히 이 문맥에 걸려 있다.
놀라워라 어느 틈에 저기까지 달려갔을까
땅의 숨결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울퉁불퉁 근육질의 다핵세포는 뻗어간다
땅의 살을 식인종처럼 거칠게 부드럽게
물의 호흡을 수혈받는다
햇살 한 줌만 있어도
풀은 풀과 엉키고 넘어지고 올라타고
물결이 되고 파도가 되어 달려간다
풀의 생장점은 멈추지 않아서
똑바로 못 가면 휘돌아 가며
흔들리고 구부러지고 꺾이면서도
나무 사이로 돌 틈 사이로 실뱀처럼 지나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밀어주며 버텨주며 기대면서
뿌리는 몽글거리며 달려간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달려왔을까
풀들의 언어는 초록 음파
8Hz의 소리로 서로에게 외친다
휩쓸고 지나가도 상처는 주지 말자고
유순한 무성생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간다
매 순간 새로워지는 가난한 자리
흔들리고 가도 절망은 하지 말자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부드러운 등허리
작은 소리가 들린다
살아있는 한,
- 「풀의 영토」 전문
풀은 땅의 숨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뻗어간다. 아무리 척박한 땅일지라도 햇살 한 줌만 있어도, 물 한 방울만 있어도 풀은 깊이깊이 뿌리를 내려 기어코 생명을 연장한다. 풀과 풀이 엉키고 넘어지고 올라타며 이루는 풀의 물결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풀의 생장점은 멈추는 법이 없다. 똑바로 못 가면 휘돌아 가고, 나무와 돌이 막으면 그 “틈 사이로 실뱀처럼 지나간다”. 홀로 설 힘이 없으면 서로 뒤엉켜 밀어주고 버텨준다. 한 포기 한 포기의 풀은 서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 바람보다 먼저 누운 풀이 왜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기적의 힘(김수영, 「풀」)을 연출하겠는가? 구부러지고 꺾이면서도 풀은 특유의 유연성으로 끝내는 살아남는다. 온몸으로 땅의 숨결을 빨아들여 들판을 온통 유유히 흔들리는 풀들의 세계로 뒤덮는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풀은 저기까지 달려갔다가 여기까지 달려온다. 시인은 “초록 음파/ 8Hz의 소리로 서로에게” 외치는 “풀들의 언어”에 주목한다. 풀들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에 가깝다.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저 작은 소리로 풀들은 서로를 밀어주고 서로에게 기대는 작지만 드넓은 세계를 드러낸다. 풀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피어야 할 때는 피고, 져야 할 때는 지는 게 풀의 생리다. 시인은 “매 순간 새로워지는 가난한 자리”로 ‘풀의 영토’를 표현한다. 풀들이 꾸리는 영토에는 경계가 없다. 경계가 없는 자리에서 풀들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경계가 없는 또 다른 세계를 이룬다. “부드러운 등허리”로 서로의 몸을 비비며 “초록 음파”로 뒤덮인 세계를 만끽한다.
「구인사 내려가는 길」을 보면, 초록 음파로 뒤덮인 세계는 수많은 생명이 피우는 향기로 넘쳐난다. 아무나 이 향기를 맡을 수는 없다. “가당치 않게 허튼 짓거리 놓아두고 가란다”라는 시구에 나타나는바, 자기를 내려놓은 사람만이 이 향기를 온전히 맡을 수 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허황한 생각에 빠져 허튼 짓거리를 하는 법이다. 시인은 “썩은 내 풍기는” 이 냄새를 해우소에 남기고 휘적휘적 산문을 나선다. 썩은 내가 가신 자리에 곧바로 사물의 온전한 향기가 스며들지 않는다는 점을 시인이 모를 리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시인은 향기를 풍기는 온갖 사물들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산을 내려간다. 허리를 숙여 자기를 낮추는 데서 하심(下心)이 시작된다. 하심은 사물의 입장으로 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마음을 가리킨다. 자기를 중심에 세운 존재는 그래서 하심에 이를 수 없다. 김영석 시에 면면히 흐르는 불교적 맥락은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고 하겠다.
네게로 간다
달빛 향 미친 홍도화 가지 끝에서
몽골 초원 바람 끝까지
작고 하찮은 것에서
별빛이 닿는
눈가에 깊이 파인 넉넉한 주름까지
천년쯤 걸리는 길이다
- 「어상천 가는 길」 부분
사는 게 견디어내는 일인 줄
이제야 깨닫다니
아프기도 많이 아파했는데
해 질 무렵 그림자 길게 늘어지고
이 겨울 마음 추워진다
좁고도 길기만 하구나 네게 가는 길은
나뭇잎은 떨어지고 흙이 되고
또 떨어지고
- 「우리 둘은」 부분
소금기 질척한 어시장 지나
생선들 한 무더기 누워있는
어둑한 부두 끝을 지나면
마음 꺼내놓고 덜어내고
이르는 길 그 끝에
무상의 아름다움
소란하지 않아 꾸미지 않아
어여쁜 동해 귀퉁이
너 닮은 이쁜 작은 어항
- 「방파제 끝」 부분
나에게 철없다 한다 아이같단다
흉보는 것이겠지만 듣는 나는 기분 좋다
아이가 된다는 것은
강으로 가는 것
춤과 가락으로 이루어진
강의 한줄기 된다는 것
- 「축제」 부분
불교의 무아(無我)는 자기를 기준으로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자아를 부정한다. 붓다는 분별심을 버리라고 말했다. 사물에 덧붙은 의미란 이러한 분별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려는 시 정신이 불교적 세계관과 이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인은 사물에 억지로 의미를 붙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사물 자체에 내포된 힘을 파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이를테면 「어상천 가는 길」에서 김영석은 “작고 하찮은 것에서/ 별빛이 닿는/ 눈가에 깊이 파인 넉넉한 주름까지” 들여다보는 힘에서 시 정신의 근원을 찾는다. “천년쯤 걸리는 길”이라는 시인의 말마따나 쉬이 이를 수 없는 길이다. 쉬이 이를 수 없는 길인 걸 알면서도 수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걷고 있다.
「우리 둘은」에서는 이 길이 “나뭇잎이 떨어지고 흙이 되고/ 또 떨어지”는 무한한 시간의 길로 표현된다. 나뭇잎이 흙이 되고, 그 흙에서 다시 나뭇잎이 피어나는 시간은 얼마나 길고도 먼 시간인가. 자연 사물이라면 어김없이 거쳐야 하는 이 현상을 보며 시인은 “사는 게 견디어내는 일인 줄/ 이제야 깨닫다니”라고 쓰고 있다. 삶을 견디는 일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저 고통을 견디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떨어진 나뭇잎은 흙이 되어 다시 나뭇잎으로 피어난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있기에 좁고도 길기만 한 이 길을 우리는 꿋꿋이 견디며 걷는다. 뭇 생명에 드리워진 무한의 시간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생성된다고 봐도 좋겠다.
무한의 시간과 접한 자리에서 시인은 “무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방파제 끝」에 펼쳐지는 “너 닮은 이쁜 작은 어항”은 소란하지 않고 꾸미지 않은 사물을 그대로 닮았다. 누군가의 눈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장소이지만, 시인의 눈에는 이만큼 아름다운 장소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작은 어항은 소금기 질척한 어시장을 지나야 나온다. 어시장을 가득 채운 인간의 욕망을 “꺼내놓고 덜어내고/ 이르는 길 그 끝에” 꾸미지 않아 참으로 아름다운 어항이 펼쳐진다. 여기에 이르려면 무엇보다 지독한 욕망으로 들끓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꾸미지 않은 마음으로 무상의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축제」를 따르면, 꾸미지 않는 마음은 철없는 아이로 사는 마음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시인은 ‘아이-되기’를 “강으로 가는 것/ 춤과 가락으로 이루어진/ 강의 한줄기 된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는 쓸모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사물을 사물 그대로 판단하는 아이를 사람들은 철없다고 말하지만, 그 철없음으로 아이는 강 하나를 온전히 품는 힘을 얻는다. 아이-되기는 아이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아이가 ‘되어’ 사는 것이다. 아이는 반복되는 일상에 매이지 않는다. 어제와는 다른 삶을 오늘 살고, 오늘과는 다른 삶을 내일 산다. 시인이라고 다를까? 철없는 시인은 오늘도 춤과 가락으로 이루어진 강의 한줄기가 되어 유유히 흐르는 꿈을 꾼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시작과 끝은 늘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끝물이라고 꼭 끝이 아닌 것이
지난 늦가을 끝에서 헤매이던 씨앗 몇 개
그러모아 밭고랑에 숨겨두었더니
이 환한 아침
젖니 물고 나온 민들레
시간을 끌어모아 새순에 힘을 더한다
이제는 끝이라고 손 흔들지도 않고 떠나가는 너나
끝에서 남아 있는 나나
지금의 우리는 모든 것 포기하고 싶은 때
고샅에서 비스듬히 자라는 제비꽃
엉키며 자라는 환삼덩굴도 서로 어우러져
풍경이 되고 또 다른 시간을 만든다
이제 잊혀질 끝물에 서서 삐뚤게 자라든 곧게 자라든
제각각의 시간 영글고
끝을 다듬는 씨앗 받으며
네가 머물 방 하나 청소해 놓는다
- 「끝물」 전문
자연의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지난 늦가을 끝에 밭고랑에 숨겨둔 씨앗 몇 개는 때가 되면 이내 싹을 틔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가 하는 점이다. 새순이 피어나야 할 ‘때’가 오면 새순은 어김없이 피어난다. 오늘 아침 “젖니 물고 나온 민들레”는 한겨울의 냉혹한 시간을 땅속에서 끌어모아 새순으로 피워냈다. 김영석의 시에는 때가 되면 서로 어우러져 “풍경이 되고 또 다른 시간을” 만드는 사물들로 넘쳐난다. 민들레 새순이 그렇고, 고샅에 핀 제비꽃이 그렇다. 민들레가 민들레의 시간을 산다면, 제비꽃은 제비꽃의 시간을 산다. ‘또 다른 시간’이란 바로 이런 시간을 의미한다. 사물들 저마다 시간을 살고, 그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끝물’이라는 시어에서 시인은 여전히 흐르는 시간을 엿본다. 끝물이 있어야 맏물이 있는 법이다. 맏물이 있어야 끝물이 있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맏물과 끝물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이어져 자연 순환의 길을 열어젖힌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자연 순환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올해 핀 꽃과 내년에 피는 꽃을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속에서 모든 사물은 다시 피어나고 거듭 피어난다. 끝물은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시간은 그렇게 또 다른 사물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분꽃」에 표현되는 “까만 시간을 품은 씨앗”을 가만히 음미해 보라. 까만 시간 속에서 무르익은 씨앗은 나무가 되고 꽃이 되고 보라매가 되고 향유고래가 될 수 있다. 씨앗만큼 열린 시간을 그 안에 품고 있는 게 어디 있을까? 시인의 말마따나, “땅으로 몸 숨기는 씨앗은/ 꽃보다 진한 목숨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씨앗은 꽃을 품고 있다. 씨앗 없이 피어나는 꽃은 없다는 말이다. 동시에 꽃 또한 그 안에 씨앗을 품고 있다. 시인은 꽃과 씨앗을 ‘목숨’이라는 시어로 잇고 있다. 씨앗은 꽃이라는 ‘목숨’으로 피어나고, 꽃은 씨앗이라는 ‘목숨’으로 갈무리된다. 목숨과 목숨으로 이어진 이 촘촘한 그물망을 시인은 ‘까만 시간’이라는 시구에 담아 표현한다.
장선리 고갯마루에
속 텅 빈 느티나무 저처럼 낡고
허물어진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다
속 깨끗이 비워내서 쓰러질 듯 초췌한 몸
이 환한 봄에 이제는 편하게 누이나 싶었는데
검버섯 주름 사이 빈 몸 구석에
작은 명주이끼, 참이끼 포자 터트려
제집인 듯 올망졸망 파랗고
쥐꼬리망초, 진득찰, 쇠무릎
저마다 자기 명패 달고 한 살림 들인다
새순 날 자리 조금 남겨놓고
연두초록파랑 새 단장하는 것이다
새초롬 느티나무 늙은 몸을
손잡아 이끈다
생을 더 한다
- 「장선리 느티나무」부분
허물어진 담벼락에 간신히 기대어 선 느티나무가 있다. 속이 텅 빈 느티나무는 지금 “속 깨끗이 비워내서 쓰러질 듯 초췌한 몸”을 하고 있다. 끝물에 이른 느티나무는 이토록 환한 봄에도 이제는 편히 눕고 싶기만 하다. 스스로 생명의 꽃을 피우기엔 느티나무가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 길다. 놀라운 일은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난다. 검버섯 주름이 핀 빈 몸 구석에서 “작은 명주이끼, 참이끼 포자 터트려/ 제집인 듯 올망졸망”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한 생명이 지면 다른 생명이 피어난다고 했다. 목숨과 목숨은 서로 이어져 또 다른 시간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장선리 느티나무에게 작은 명주이끼, 참이끼 포자는 “까만 시간을 품은 씨앗”(「분꽃」)과 같다. 느티나무가 이른 끝물 자리에서 다른 목숨들의 까만 시간이 분출된다.
속 텅 빈 느티나무 몸 안에 쥐꼬리망초, 진득찰, 쇠무릎 등이 저마다 자기 명패를 달고 한 살림을 들였다. 느티나무의 초췌한 몸은 이제 수많은 생명이 거처하는 장소로 거듭났다. 느티나무는 여전히 느티나무의 시간을 산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몸 구석구석에 검버섯 주름이 번졌지만, 느티나무는 텅 빈 몸으로 들어온 또 다른 생명의 까만 시간을 마다하지 않는다. “새초롬 느티나무 늙은 몸을/ 손잡아” 이끄는 생명(의 씨앗)이 있기에 느티나무는 아직도 이 환한 봄을 만끽할 수 있다. 시인으로서 김영석의 눈은 늙은 느티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작은 존재들의 세계에 꽂혀 있다. 느티나무가 텅 빈 몸이 되지 않았다면 작은 존재들의 까만 시간이 들어설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생명과 생명 사이를 가로지르는 틈이 까만 시간을 퍼뜨리는 힘이 된다고 말하면 어떨까?
우리는 과연 늙은 느티나무처럼 텅 빈 몸에 또 다른 생명을 들여 새로운 생을 꽃 피울 수 있을까? 김영석의 시는 무엇보다 이 물음을 시화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산사 내려서면」에는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산사를 내려가는 화자가 나온다. 텅 빈 마음자리를 들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여전히 이 사람의 마음은 지독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욕망이 아니고 내려놓는다고 내려놓아질 욕망이 아니다. 버리고 내려놓으려는 ‘욕망’을 낼수록 마음은 더욱더 지옥을 헤맬지도 모른다. 산사와 지옥을 오가는 이 마음결로 시인은 오늘도 자연 이치를 사유하는 시를 쓴다. 그의 말대로라면 “버린다는 것도 놔둔다는 것도/ 흐르는 시냇물 속 같다”. 늙은 느티나무는 텅 빈 몸에 연연하지 않고 뭇 생명을 맞아들였다. 텅 빈 몸에 매였다면 느티나무의 새로운 생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관음촌 판각 8년차」에 나오는 불경 구절을 판각하는 사람처럼 시인은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시를 쓰려고 한다. 지독한 욕망은 지독한 욕망을 낳을 뿐이다. 이 욕망을 품은 채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을까? 옥타비오 파스는 절벽에서 치명적 도약을 하는 존재를 시인의 운명과 연결했다.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 자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눈을 얻을 수 있다. 김영석 시를 따르자면, 누군가는 산사에서 대장경 팔만 자를 판각하며 시인의 길을 걷고, 또 누군가는 지독한 욕망을 내려놓음으로써 시인의 길에 이르려고 한다. 김영석이 눈여겨보는 “까만 시간을 품은 씨앗” 또한 이런 맥락과 이어져 있다. 까만 시간은 사물로 열려 있는 시간을 가리킨다. 까만 시간을 품은 씨앗을 퍼뜨리려면 그러므로 사물을 향해 열린 마음이 필수적이다. 김영석은 지금 시인으로서 그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