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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3-21
야긴과 보아스 / 오창우 목사
오늘은 우리교회의 창립주일입니다. 이렇게 뜻 깊은 날에 장로님 두 분과 명예권사 네 분을 추대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담임목사 근속 20년을 감사하면서 교회 40년사 발간을 축하하게 됩니다. 이 교회 창립 주일에 우리 교인들에게는 기쁨으로, 임직 받는 분들에게는 일꾼 된 각오로, 그리고 20년을 하루같이 지켜주신 이 종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또한 역사는 미래라고 하는데, ‘한남제일교회 40년사’라는 역사책을 발간하면서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며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솔로몬 임금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난 후에 성전 앞에 두개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지금 프로젝트 화면을 통해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 두개의 기둥은 하나님의 성전건축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 건축계획에도 없는 두개의 기둥을 설치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두개의 기둥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홍살문을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임금이 사는 궁이나 신을 모셔놓는 사원, 정원과 같은 곳에 가면 지붕은 없이 기둥만 두개를 연결해 놓은 문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홍살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집 대문하고는 달리 담장이 없지요! 따라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계의 표시가 아니예요! 들어와라! 그러나 들어오되 여기는 임금이 사는 궁궐이니까, 혹은 여기가 종교 활동을 하는 사원이니까, 또는 이곳은 잘 꾸며진 정원이니까 마음을 경건히 하고 들어오라는 표시입니다. 그러니까 홍살문은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는 출입문이 아니라 출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지게 하는 마음의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임금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난 후에 세운 이 두개의 기둥은 ‘마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솔로몬왕은 하나님의 성전에 마음가짐 없이 아무렇게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성전에 들어오는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옷을 잘 차려입은 만큼 우리의 마음도 잘 가다듬고 오신 줄로 믿습니다.
솔로몬임금이 세운 기둥은 두 개입니다. 이 기둥은 당대의 최고의 놋 명장 '히람'이 만들었습니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기둥 하나 만도 웬만한 집을 능가할 정도로 매우 큰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것도 놋쇠를 녹여서 만들었습니다. 굉장한 수고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기둥의 높이는 18규빗, 기둥의 둘레는 12규빗, 양쪽 기둥 위에는 다시 5규빗 되는 머리 부분을 만들고, 그 기둥머리를 위해 각종 모양과 장식을 했다고 했습니다.(15-20절).
기둥의 크기가 쉽게 다가오지 않지요?
규빗이라는 말은 길이를 재는 용어인데 손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입니다. 이 길이는 약 45센티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8규빗은 약 8미터 20센티입니다. 우리예배당 높이의 약 3배정도 되는 높이의 기둥입니다.
그리고 기둥의 둘레는 12규빗- 약 5미터 20센티입니다.
그리고 양쪽 기둥 위에는 다시 5규빗- 2미터 20센티 되는 머리 부분을 만들고, 그 기둥머리를 위해 각종 모양과 장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놋기둥이 하나님의 성전 앞에 세워진 것입니다.
솔로몬 임금은 기둥에다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는 '야긴'이고 다른 하나는 '보아스'입니다.
성전은 해 뜨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오른 쪽, 그러니까 남쪽편의 기둥을 '야긴'이라고 하고 성전 왼쪽, 북쪽편의 기둥은 '보아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바라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이 두 기둥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제사장이든, 나라의 임금이든 그 사람의 직분이 무엇이든 높던 낮던, 많이 가졌던 적게 가졌던, 많이 배웠던 못 배웠던, 잘 생겼던 못 생겼던 할 것 없이 가져야 될 마음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솔로몬이 세운 이 두 기둥이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두 기둥을 지나야 하나님의 성전을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오늘 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 왔습니까?
오늘 임직식이 있는데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의 일군이 되시겠습니까?
40년이 지나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사시겠습니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그 하나님을 만나려면, 두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 두 기둥을 통해서 가르칩니다. 이 두 기둥의 이름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세, 신앙적인 태도를 찾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기둥 '야긴'은 겸손의 기둥입니다.
'야긴'이라는 말은 '저가 세우리라'의 뜻으로 성전은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분명 솔로몬,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전을 세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솔로몬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솔로몬왕의 고백이 모든 백성들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하여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유럽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청교도들을 통하여 미국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를 통하여 한국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몇 분의 교우들과 가족들을 통하여 한남제일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이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세우신 교회라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교회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교만하면 안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주신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겸손해야지요.
요 15:6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예수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 다 주의 크신 은혜라'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없었더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 어떻게 설 수 있으며, 어떻게 이 믿음을 지켰으며, 하나님의 교회에 일군이 될 수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 갈 수 있는 자세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전적인 유머하나 하겠습니다. 남태평양을 오가는 비행기 한 대가 있습니다. 너무나 작기 때문에 경비행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 안에는 작은 섬으로 향하는 여러 사람들이 탔는데 경비행기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지는 않았고 소수만 탔습니다.
세계의 과학대회에 참석하는 과학자 한사람과 그 다음에 보이스카웃 캠프에 가는 소년과 복음을 전하러 가는 선교사, 이렇게 세 명이 탔습니다.
바다 위를 비행기가 건너가고 있는데 갑자기 조종사가 말하기를 "여러분 큰일 났습니다. 이 비행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곧 추락할 것입니다. 그래서 살 길은 여기에 있는 낙하산뿐입니다. 그런데 이 낙하산이 세 개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비행기의 주인이니까 내가 먼저 이 낙하산을 타고 내리겠습니다"하고 낙하산을 탁 뛰어 내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학자와 보이스카웃 소년과 선교사 목사님입니다.
과학자가 남은 낙하산 2개를 보며 하는 말이 "여러분 나는 세계적인 과학자입니다. 인류 발전에 공헌을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없다는 것은 이 인류와 이 세계와 이 지구에 엄청난 손해입니다. 그러니 나는 내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살아야 겠습니다."하고 뛰어 내렸습니다.
이제 낙하산은 1개가 남았습니다. 사람은 두 사람이 남았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얘야 나는 주를 위해서 살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내가 죽을 때가 된 것 같다. 그러니 너는 나대신 예수를 잘 믿고 네가 잘 살도록 하여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보이스카웃 소년이 하는 말이 "목사님!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둘 다 살았습니다. 좀 전에 인류의 공헌을 위해서 뛰어 내린 과학자가 제 보이스카웃 배낭을 메고 뛰어 내렸습니다. "
교만한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하자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선택해 주심에 대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 제일먼저 한 일이 바로 일천 번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천 번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문제는 일천 번의 제사라는 숫자나 그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솔로몬의 마음입니다. 왕이 되었다고 다 된 것처럼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고” 할 때에 “나는 작은아이”라고 자신을 낮추면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솔로몬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과 함께 부와 영광까지 덤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아이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솔로몬의 태도에 기뻐하셨습니다. 복을 주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받은 것 자체는 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을 하시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하시지만 그 마음까지 주장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생활을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생활을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교만이나 겸손이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솔로몬의 복은 바로 이런 겸손함! '나를 나 되게 선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겸손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되, 이전에나 이후에 그와 같은 지혜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없었고 모든 나라가 솔로몬의 번영을 부러워하였고 모든 군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야긴’입니다. 겸손입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사용될 일꾼은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둥을 포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울을 포기하시고 다윗을 다시 세우신 이유는 다윗의 겸손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가장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은혜가 되어서 은혜를 받으러 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없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오면 은혜는 없습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자기의 높아진 마음을 낮출 생각은 하지 않고 교회가 이러니, 목사님이 이러니, 장로가 이러니 하면서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본인에게도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총동원주일을 지나면서, 새 생명 축제를 지나면서 우리가 하고 나서 잘했다고 하면서도 한편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다음 주, 그 다음 주에 나오지 않으시는 겁니다. 왜 그런가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총동원 주일 날짜에 맞추어 많은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서 "한번만 교회에 나와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사정해서 그날에 데려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마치 교회에 나오면서 은혜를 베푸는 생각으로 나옵니다. 그처럼 마음이 높아진 상태로 교회에 오는데 어떻게 은혜 받고 거듭나겠습니까? 높아진 마음에 어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한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날을 위해서 애걸복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년이고 2년이고 정성스럽게 섬기고 겸손함을 보여주고 그 겸손에 감동받게 하고 그래서 교회에 가자고 하면 이 사람도 역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남편을 구원하고 함께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신앙 좋은 아내가 사랑하고 섬기며 남편을 전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도 사정하는 모습을 해서 마음을 높여 버리면 교회에 나와도 변화 받기 힘들지만, 남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감동을 준 다음에 교회로 이끌면 남편이 교회에 나와서도 은혜를 받기가 쉬워집니다.
다른 사람을 전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니고 섬기는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교회가 작은 교회인데 당신이 도와주세요."라고 싫은 사람을 억지로 이끌어 오게 하면 마음이 높아져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흔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방법으로 한 사람을 이끌어 사정해서 높은 마음으로 오게 하면 당장 눈앞에서는 한 사람을 얻어 교회에 보탬이 되는 것 같지만 2-3년 후에는 더 큰 후유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다. 우리 교회는 좋은 목사님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전도해야죠!<큰 교회 담임은 큰 목사, 작은 교회 담임은 작은 목사>라고 교회에 편견을 가진 분들에게는 큰 교회에 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할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교회에서는 억지로 이끌면 사람의 마음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아지면 은혜도 못 받고 그것은 결국 모두에게 손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도 그렇습니다.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사랑을 겨우 받습니다. 돈 많은 사람, 명예 있는 사람 내가 따라다니다가 다 실패하는 겁니다. 나 좋다고 하는 사람도 배신 할 수 있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꾼을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당당하게 살면서도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허리를 굽히는 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없는 일꾼의 자세는 잘못된 배짱을 낳고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없는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없는 성도의 자세도 당당함은 당돌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셨습니다.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나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기둥은, 교회에 나오는 모든 성도들의 기둥은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는‘야긴’과 같은 기둥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다 겸손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기둥‘보아스’는 믿음의 기둥입니다.
보아스란 ‘여호와의 능력으로 영원히 지켜 주시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번째 자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기를 원하는 마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려면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계시록 3장 12절의 빌라델비아 교회가 기둥이 되는 것은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라고 했고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교회의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교회 기둥이 되고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렘1:18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다" 하셨습니다.
계3:12에서 "하나님은 이기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갈2:8-10 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와 게바 곧 베드로와 요한을 "기둥과 같이 여기는 자"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교회의 기둥으로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의 기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기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기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이사야서 26장 3절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 믿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이 지식, 재물, 권력도 갖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의 소유는 길지 못합니다. 가다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능력이 되실 줄로 믿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내 딸의 병을 고쳐 달라." 했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개에게 양식을 주느냐?"거절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방인이라고 차별을 한 것입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사람보고 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비인격적인가?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 믿음이 그 여인을 구원하는데 그 딸이 즉시 나았더라고 했습니다. '네가 구하니까 일주일만 기다려라' 아닙니다. 한 시간을 기다려라? 십 분을 기다려라? 아닙니다. 즉시 나았다는 것입니다.
설이 되면 세배를 하러 옵니다. 세뱃돈을 준비해 놓습니다. 그런데 세뱃돈의 맛을 아는 아이들은 오자마자 세배부터 합니다. 왜? 세뱃돈 달라고 말입니다. 아주 자동입니다. 세뱃돈! 세뱃돈! 여러분의 손주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뭣 모를 때는 세배를 하라고 하면 도망을 갑니다. 나중에는 웁니다. 그래서 그냥 준비된 돈을 줍니다.
오늘 주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면 주신다는 겁니다. 즉시 말입니다. 주님은 그랬을 것입니다. 이미 마음에 이 여인의 아픔을 아셨어요. 딸의 병을 아셨습니다. 왜 주님의 마음이 긍휼하신 주님이시겠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사랑의 주님이 이 여인의 아픔을 왜 모르겠습니까? 다 아십니다. 세뱃돈 준비하듯이 주님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웃으면서 그러셨을 것입니다. '이방인을 개라고 하는데 이방인인 개에게 어떻게 주냐?' 그러나 이 여인이 그 말에 시험들지 않습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먹는다고 애교를 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즉시 딸아이의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십니까?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시고 구하면 주신다는 것, 바로 이 구한다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축복받는 것도 있어야지요.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드렸던 일천번제는 소 2만 2천과 양 12만 마리의 제물로 돈으로 환산을 하면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요 방법입니다. 제물을 통해 자기 과시나 환심을 살려고 생각했다면 제사의 제물 대신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잔치는 사람에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잔치와 제사중 어느 곳에 더 치중을 하십니까?
만일 잔치를 준비하는데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얼마나 했나? 말입니다. 잔치를 하면서 자장면을 가지고 잔치를 하지 않지 않습니까?
반대로 제사를 지내는데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잔치만큼이나, 잔치의 반만큼이나, 잔치의 1/4만큼이나 하나님 앞에 제사를 예물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저는 헌금을 할 때마다 하나님 앞의 신앙인으로써 내가 사람에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 하는 것이 어떤 것을 내가 더 귀하게 여기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잔치보다 제물이 소홀히 돼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오목사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제가 믿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잔치와 제사를 구분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솔로몬은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말씀처럼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섬기고.... 사역에 욕심을 부리기 전에 하나님이 맡기실 수 있는 겸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식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고 하나님은 “내 이름을 두고 내 눈동자를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주의 백성이 범죄하고 주께로 돌아와서 이 전에서 간구하거든 죄를 사하시고 저희 죄로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을 때에도 이곳을 향하여 빌면 저희 기도를 들어주시라”고 믿음의 기도를 합니다.
“만일 온역이 생기고 깜부기가 나고 황충이 날 때에도 죄를 깨닫고 손을 펴 기도하거든 저희 죄를 사하시고 들어주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라도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들으시고 전쟁을 위해 성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해도 들으시며 포로로 붙들려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해도 들어주시라고 간구하였다” 겸손한 마음,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크게 복 받은 솔로몬의 기도는 철저히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나라의 번영과 세상의 영광과 금을 돌같이 흔하게 쓴 부요함에 후비와 빈장을 천명이나 거느리고 이방 여인들을 통해 세워진 우상전각이나 우상숭배 함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이렇게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으로 성공한 줄 알기 때문에 교만하여 실패합니다. 솔로몬의 실패는 그 자신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타락성은 그의 지혜까지도 빼앗아갔습니다. 또한 세상의 향락은 그의 신앙까지 침몰시켰습니다. 경계심을 풀고 근신하는 마음을 버리면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깨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이 시간 진단을 해 봅시다.
여러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무너짐을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그곳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멸망시키시지 마십시오.”“그래, 그렇게 하지.”“하나님, 죄송합니다. 의인 45명이 있다면 멸망시키시지 마십시오.”“그래, 그렇게 하지.”또 조금 있다가 “하나님, 죄송합니다. 5명이 부족한 40명이 있다면 멸망시키시지 말아주십시오.”“니 장난치나?”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그렇게 하지.”“하나님, 죄송합니다. 의인 30명이 있다면 멸망시키시지 마시지오.”
”단 세 판인데.“ 그러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래.““하나님 죄송합니다. 20명이 있다면....”“니 죽을래!” 그러지 않으셨습니다.“하나님 죄송합니다. 10명이 있다면...”
“그래, 그렇게 하자.”
여러분, 왜 아브라함은 10명까지만 이야기 했을까요?
아브라함 생각에는 자기 조카 롯이 그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간 지 몇 십 년이 지났는데 ‘그래 전도 열명 안했겠느냐? 자기 가족만 해도 열명인데.’열명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아브라함이 이왕 하는 김에 한번만 “하나님, 만약 한명만 있다면 멸망시키지 마시지요.”했더라면 소돔과 고모라 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10명은 있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 볼 때, '나 이정도면 괜찮지요.'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 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 우리 가정, 이 정도 신앙생활하면 괜찮지요. 그것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 가정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 청년들을 데리고 영국을 갔습니다. 가이드 하시는 분이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저기 저 건물 보입니까?” “네, 교회네요.” “네, 1500년 된 교회입니다. 지금 술집입니다.” “네?” 또 차를 몰고 갑니다. “목사님, 저 건물 보여요?” “네, 그것도 교횐데요!” “1100년 된 돌로 된 교회입니다. 지금 술집입니다.” 가는데 마다 교회가 나타나는데 교회들이 다 술집, 아니면 모슬렘사원, 힌두교사원, 다 팔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광을 마치고 우리 청년들이 빙 둘러 앉았습니다. “느낀 소감을 이야기 해봅시다.” 모든 청년들이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술집이 된 게 마음이 아픕니다.” 청년들 모두가 한가지로 교회가 술집이 된 것을 안타까워 합니다. 당연하지요.
그런데 목사님은 이렇게 말을 하십니다.
“여러분, 예배당이 술집이 된 것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여러분의 성전이 술집이 되어 버린 것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의 성전이 시장 통이 되어 버린 것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의 성전이 더러운 장소가 되어버린 것 그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 성전은 이 예배당만이 성전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너희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뇨?”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의 안에는 성령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이미 성령님이 계세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과연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성전입니까? 오늘 솔로몬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우리의 마음에는 첫째는 겸손이요, 둘째는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이 앞서고 겸손이 있어도 안되고 겸손이 앞서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믿음이 좋지, 믿음 있는 겸손은 아닙니다. 겸손한 믿음이 더 인격적이고 아름답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의 창립주일을 맞는 우리들!! 새로운 42년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들이 우리 사랑하는 우리교회에 대한 마음이 겸손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을 잘 섬기고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