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에 김찬삼 세계여행박물관 만드는게 꿈이죠”
발간일 2021.10.26 (화) 16:46
딸 김서라씨가 전하는 1세대 세계 여행가 김찬삼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고 말했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는 인생을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세계를 접한 사람의 사고는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넓고 깊을 것이다.
▲ 고 김찬삼 씨는 1958년 전쟁복구로 어수선했던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 일주를 떠났던 우리나라 1세대 여행가다. 위 사진은 1992~93년 사이 아구답사때 현대갤로퍼옆에서 찍은 김찬삼씨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김찬삼 선생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반려물건들이다.
고 김찬삼 씨는 1958년 전쟁복구로 어수선했던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 일주를 떠났던 우리나라 1세대 여행가다. 3차례의 세계일주, 20여 회 해외테마여행을 떠났던 그를 ‘한국의 마르크폴로’라 부르는 이유는 아무도 꿈꾸지 못한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그가 세계여행과 함께 했던 ‘폭스바겐 비틀’이 인천시립박물관에 11월 11일부터 전시될 예정이다. 복원된 그의 차는 그가 해외서 보고 느낀 많은 다양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것이다.
지리학 답사로 시작한 여행길, 유서를 써놓고 출발하다
김찬삼 씨는 황해도 출신 여행가다. 그는 인천서 성장하고 생을 마쳤다. 1958년부터 세계여행을 시작해 세 차례의 세계 일주를 했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던 시절, 20여 번의 세계테마여행은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14년 간 160여 개국을 돌았다. 지구둘레 32바퀴를 여행한 셈이다.
▲ 김찬삼 선생과 세계를 함께 누빈 '우정2호'인 독일의 폭스바겐.
김찬삼 씨는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숙명여고와 인천고 지리교사로 재직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원 지리학과를 수료한다. 그 후 경희대 지리학과 강사와 세종대 지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산 것을 보지 않고 어찌 아이들을 가르치냐?” 며 사범대 친구 세 명과 세계일주를 약속한다. 방학이 되자 두 친구는 여건이 안 됐고 김 교수만 여행을 떠나게 된다.
58년 9월 아르바이트로 해서 모은 돈 300달러를 들고 떠난 여행은 외로움과 배고픔, 예측할 수 없는 위험길이었다.
1950년 대 세계여행을 시도한 것은 큰 모험이었다. 다행히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아 세계여행을 나서게 된다. 1960년 중남미와 아프리카를 여행하기 전에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만일 자신이 잘못되면 시신처리를 부탁하는 내용과 부인에게 남기는 내용이 담긴 유서였다.
▲ 김찬삼 씨는 자신의 세계여행을 정리해 책으로 만들었다. 그가 수집해온 전 세계의 정보와 사진은 엄청난 양이었다. 수 년 간 걸친 그의 작업 끝에 완간된 그의 여행기는 당시 사회의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김찬삼 씨는 자신의 세계여행을 정리해 책으로 만들었다. 그가 수집해온 전 세계의 정보와 사진은 엄청난 양이었다. 수 년 간 걸친 그의 작업 끝에 완간된 그의 여행기는 당시 사회의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영종도와 김찬삼
김찬삼 씨는 부모님이 편히 여생을 함께할 곳을 찾고 있었다. 때마침 옆 집 이웃주민의 고향이 영종도였다. 이웃은 영종도에서 염전과 금광으로 부를 일군 김달현 씨였다. 제주도와 영종도를 오가며 비교하던 김찬삼 씨는 거리가 먼 제주도를 포기하고 영종도 구읍뱃터 쪽 산 정상에 터를 마련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영종도는 그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2001년 5월 영종도에 세계여행문화원과 여행도서관을 개관했다. 평생 모은 여행 가이드북과 여행관련서, 화보집 등을 비치해 많은 이들에게 세계여행의 꿈을 심어주었다.
문화원은 도서관을 시작으로 여행캠핑장, 여행정보센터, 각국 문화탐방행사, 유스호스텔 건립 등을 추진하려했지만 영종국제도시가 생기면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고 김찬삼 선생이 세계를 돌아다닐때 몰던 딱정벌레차다. 이 차는 영종도에 있는 상가 옥상에 오랫동안 있었다. 이 차는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되어 수리를 거친후 오는 11월 11일부터 전시될 예정이다.
영종도 주민 중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김찬삼 교수님이 딱정벌레 차를 몰고 오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신기해서 우르르 모여들었어요.”
차 주변에 모인 아이들에게 그는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슬라이드 사진을 영사기에 틀어주면서 그가 경험했던 여러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김종우(중구 운북동) 씨는 김찬삼 씨가 학교에서 보여줬던 세계여행 영사기 사진을 보며 외국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말한다.
“가슴을 펴고 세계를 바라보라, 그리고 거침없이 나가라!”
영종도 토박이 고 정진백 씨는 그의 블로그에서 ‘작고 못생긴 아저씨가 세계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힘주어 말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남겼다. 정진백 씨는 간혹 별장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만난 김찬삼씨가 들려주던 세계여행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었다고 불로그에 써놨다.
김찬삼 씨와 그의 딸 김서라
“아버지 책을 보고 여행가를 꿈꿨다고 하는 분이 많습니다”
김 씨의 셋째 딸 김서라 씨는 아버지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다고 말한다. 김서라 씨는 귀가 시 맛있는 음식을 싸가지고 와 자식을 먹이던 소박한 아버지가 많이 그립다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
“우리가 좋아하던 하인천 만두를 사서 배낭에 실어 나르셨어요. 아버지의 등 온기로 만두는 항상 따뜻했지요.”
서라 씨는 아버지가 서울에 강의를 다녀오면 꼭 사오던 종로2가 ‘고려당’의 크로켓과 팥 도넛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보온 팩도 없던 시절, 서울서 인천까지 어떻게 그 따끈함을 유지하고 가져오셨는지 아직도 의문이란다.
“나와라~”라며 호기있게 자식들을 불러 먹이던 키 작은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작은 거인같았단다.
“큰언니가 창녕초 6학년, 둘째언니가 3학년, 내가 1학년 이었죠. 아버지가 학교 근처 배다리까지 데려다주시고 헤어지면 왜 그리 다리에 힘이 빠지던지... 아버지는 우리에게 커다란 산이었고 힘이 되어주시던 거목이셨습니다.”
아버지와 여행을 떠나다
김서라 씨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미국 여행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미국 여행 중 차가 필요했지만 당시 미국은 외국인이 차를 살수 없었다. 택시를 불렀는데 마침 한국 기사가 왔고 그가 김찬삼 교수를 알아봤다. 택시기사는 자동차 매매 보증을 서줬다. 그의 덕분에 1,500불에 자동차를 구매, 그 차로 미 대륙을 누볐다.
“1979년 형 썬더보드였는데 (우리는 이차를 ‘탱크’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문은 두 짝이었는데 신기하고 재밌는 차였어요.”
이 차로 한 달 넘게 멕시코와 뉴욕, 보스턴을 누볐다. 아버지 김 교수는 미국 여행을 마치며, 미국에 사는 동생에게 “이 차는 가난한 유학생에게 줘라.”라고 말했단다.
김서라 씨는 그 후 차가 누구에게 전달됐는지 궁금해서 동생과 통화를 했다.
동생은 그 차 행방을 이렇게 말했다. “언니, 그 가난한 고학생이 나야.”
딸을 챙기기 전에 가난한 고학생을 챙겼던 김찬삼 씨의 일화다.
“아버지는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방학이면 사적지로 저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역사를 설명해 주시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인천 내동에 살 때 자유공원 석정루에서 항상 체조를 같이 하고 차이나타운을 돌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 고 김찬삼 선생이 1963년 아프리카 가봉에서 의료봉사 중인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서라 씨는 아버지와의 식사시간은 아버지의 모험담을 듣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슈바이처 박사를 만난 이야기부터 오지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까지 듣는 식사시간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김서라 씨에게 아버지는 그녀에게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 알려주는 등대 같은 사람이었단다.
세계를 누볐던 여행가, 여행 사고로 하늘의 별이 되다
김찬삼 씨는 1993년 5명의 여행가와 1년 간 긴 해외여행을 떠났다. 김 교수는 그 여행에서 큰 사고를 당한다. 기차서 추락해서 머리를 다치는 사고였다. 여행 중이던 그는 미련하게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후유증으로 언어가 어눌해질 때까지 가족들은 그의 병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김 교수는 여행서 생긴 사고후유증으로 2년 간 누워 있다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
딸 서라 씨, 아버지가 써 놓은 원고와 박물관 완성하는 게 꿈
김서라 씨의 꿈은 아버지가 18차 세계여행 ‘아구(亞歐)답사’ 단장으로 떠났던 원고를 완성하는 것이다. 김 교수가 아시아, 구라파(현 유럽) 여행이야기를 다녀온 이야기를 10권 분량으로 집필했지만 2권만 출판되어 세상 밖 빛을 보았다. 서라 씨는 나머지 8권을 완성시키는 것이 소원이란다.
“아버지가 영종도에 박물관을 세우려했던 꿈도 이뤄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터를 닦아놓고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영종도는 한동안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 고 김찬삼 선생은 영종도에 자신이 세계여행을 하면서 모은 여행관련 도서, 사진을 전시한 세계여행문화원을 2001년부터 2013년까지 운영했다. 사진 출처 고 정진배 블로그
“작년 영종역사관(세계문화원이 있던 자리) 아버지 관련 행사 때 초대된 적이 있습니다. 들러 보다가 다시금 아버지가 꿈꿨던 박물관도 다시 재건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아버지의 부탁으로 유명건축가가 설계한 ‘김찬삼 세계여행박물관’ 설계도도 아직 보관하고 있단다.
“아버지는 영종도 해안가에 밤나무를 심으며 내가 없어도 밤나무 밑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수용되어 밤나무 위치도 확인할 수 없지요. 2023년 아버지 서거 20주기, 2026년 탄생 백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23년 사진전과 특별전을 열 예정입니다. 올 11월 11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딱정벌레 차와 아버지 포토존을 마련해준다고 하니 기쁘네요.”
▲ 고 김찬삼 선생의 딸 김서라씨는 아버지가 세우고 싶었던 세계여행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김찬삼 씨가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김찬삼 씨 지인은 그가 떠난 여행길을 고행길에 비유했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에 오지를 누비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작은 거인 김찬삼 씨는 하늘나라에서도 곳곳을 누비며 이승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그곳 이야기를 저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현주 I-view기자 o7004@naver.com
■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동반車 전시, 11월 11일부터
1세대 여행가 고 김찬삼 선생이 세계를 여행할 때 사용했던 ‘폭스바겐 비틀’ 차량 ‘우정2호’가 인천시립박물관에 기탁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동반車 전시는 오는 11월 11일(목) 오전 11시 시립박물관 로비에서 개막식을 갖고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포토존도 마련된다. 이 차는 1960년대 말 독일 여행 중 알게된 올가 여사로부터 선물받아 1970년 한국으로 들여왔고,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사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