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은 사랑하고, 절반은 배우는 것이 인생이라
- 강옥희 부산수필문협 회장님을 추도하면서 -
권대근
본회 상임고문
우리를 두고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신단 말입니까. 부산수필문학협회 전 회장님의 소천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영전에 삼가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립니다. 아직도 가슴에 꽃씨 하나 심고 봉사와 사랑의 길을 함께 가자던 회장님의 목소리가 귓전에 쟁쟁한데 좋은 기억만 홀련히 남겨두시고 어디를 그렇게 황망히 가시는지요? 안타까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직 젊으시고,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어머니를 잃은 자녀들, 지도자를 잃은 문단의 후배들, 지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멀리하고 가시니 회장님을 추모하여 울먹이는 목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습니다. 부산교육대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 논문도 통과되고, 학위 취득을 앞두고, 부산수필문학 제28호 발간을 목전에 두고, 회장님은 그렇게 아무 말없이 떠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그 어떤 사람보다도 마음씨가 곱고, 열린 사고를 가지셔서, 어르신에게도 선배에게도 후배에게도 모두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지요?
우리를 두고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신단 말입니까. 돌아가기 전, 몸이 불편하신데도 경주 문학기행 행사를 잘 마무리하시고, 큰 내색도 않으셨지요. 양동마을까지 올라가는 시점에서, “밑에서 쉬고 있을 테니, 올라가서 구경하고 오시라”는 말씀, 그것이 ‘내가 몸이 좀 안 좋다’는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으면, 그리 경사진 곳도 아닌데, 혼자 쉬고 싶어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제가 회장이었을 당시, 제1회 국제수필문학토론회 대상작가로 선정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토론회가 있던 날, 고향 친구들이 대거 몰려와서 회장님의 공적과 업적을 환호와 지지, 그리고 박수로 인정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문학행사에 고향 친구들이 많이 온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만큼 회장님이 살아오신 삶이 인간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행사에는 문우들만 나타나는 게 상례지요. 그런데 그날 문학토론회 자리에 억센 사투리의 초등 동기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지명토론자들이 회장님의 수필에 대해 지적이나 할라치면, 회장님을 엄호하고, 변호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너무나 신기해서 지금도 회장님의 생전 모습과 그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리를 두고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신단 말입니까. 회장님의 달려온 역사를 들추어봅니다.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의욕적으로 협회를 이끌어가는 와중에 세상을 버리신 강옥희 회장님은 부산의 명문 동래여고 68회 출신의 수필작가입니다. 부산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후 1992년 월간 한맥문학 <지리산의 파수꾼>으로 등단했습니다. 한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영남여성문화회, 부산수필문학협회 한얼문학회, 동래문학회, 부산수필문인협회, 불교문인협회, 농촌문학회, 한국시맥문학회 회장, 부회장, 사무국장, 감사, 회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서포김만중문학상, 부산수필문학상 본상, 농촌문학상, 국제문화예술상, 새시대문학작가상, 부산광역시 부산시장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수필가로 활동해 왔으며 저서로는 <광주리 속의 포도송이>, <다시 짐을 챙기며>, <동그라미>가 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복지관에서 어르신 한글지도와 노인병원에서 회상치료지도를 하고 있었으며 새시대문학 사무국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모교인 부산교대 대학원 학생이었고, 본회 회장님이셨습니다.
동래여고총동창회 홈페이지 문무순 씨의 강옥희 관련 글에 의하면, “일상이 바쁘다 못해 그녀는 숨 쉴 여유조차 없이 산다. 그래서 동기회에도 얼굴 보일 시간이 잘 나지 않고, 그러나 한 번씩 시간이 나면 반드시 읽을거리를 만들어 온다. 詩를 적어 오거나 본인의 수필을 다듬어 오거나 친구들에게 해줄 말을 나누어 준다. 강 작가의 제4 수필집 <아름다운 꽃들의 잔치>가 작년 7월에 출간되었다. 책머리에 새긴 강 작가의 글이 멋지다. 선생님께/ 나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만날수록 정이 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책 끝머리 가족의 뿌리를 소개한 글도 아름답다. 요동을 정복하는 자, 만주를 지배하는 자는 동북 아시아를 얻는다.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5만의 정예군으로 격퇴하고 요동을 사수했던 일세의 명장 강이식 장군이 진주 강씨의 시조이고 해동의 명장 강감찬, 자주대첩의 은렬공 강민첨 등이 조상이다. 이처럼 진주 강씨는 혼과 혼이 무장의 길을 걸었고 우국충절의 기개가 넘친다, 이는 아마도 주공을 도와 주나라를 건설한 강태공의 후예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가계가 아닌가싶다,“ 문 씨는 여기에다 강 작가의 문필은 우국충절의 가문에 빛나는 다른 하나의 빛을 보태는 것이라고 하면서. 강 작가를 간단히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고, 강 작가의 무한한 발전을 빌면서 모자라는 필을 거둔다고 적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수필은 현실과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체험적 이야기이건 아니건 간에 수필과 현실은 상호 밀착되면서 수필적 화자를 자기 수필 속에 밀어 넣습니다. 언제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합니다.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엽니다. 아마도 <동그라미>가 대표적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동그라미’는 인간의 존재론적 해명이면서 새로운 삶과 역사 진전의 지평을 가시화시켜 인간과 삶과 역사를 상승시킴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전개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옥희 회장님의 수필은 사회나 역사성의 수용에 의한 전파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동그라미’를 화소로 수필을 풀어내고 있는 강옥희 회장님은 일차적으로 문학의 자기 치유적 내지는 사회적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몸이 아픈 데에도 학문에 정진하고, 사회봉사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산수필문학협장을 맡아주시어 무애를 실천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서럽습니다.
우리를 두고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신단 말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천수를 누리시지 않으시고, 왜 그렇게 일찍 가셨습니까? 누구보다도 우리 부산수필문학협회를 사랑하고 그 일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게 빨리 가시다니요. “올해는 어머니의 화단은 멋진 꽃들로 활짝 피었다. 그렇게 염원하던 외손녀의 화분에는 4월의 신부의 꽃망울로 피어나고, 객지에서 고생한다고 걱정하던 아들의 진급도, 손자가 국방의 의무를 마친 것도, 집안 막둥이의 대학 입학도 꽃을 피웠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손길 놓칠세라 님의 화단에 튼튼한 뿌리내림의 손지들의 이름을 염원하며 불러본다. 비중, 오중, 해중, 순중, 현중, 혜민, 동예, 인화, 인수 이렇게 각종 화분들은 어머니의 가슴속의 따스한 온기로 열심히 꽃망울을 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어머니의 화단을 닮은 텃밭을 일구기 위해 가슴 속에 예쁜 씨앗 하나 심어본다.” 강 회장님은 <어머니의 화단>에 예쁜 꽃씨 하나 심고 삶의 의지, 사랑의 의지를 강조하셨지만 정작 회장님은 불현듯 다가온 죽음의 사신에 끌려 가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를 두고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신단 말입니까. 회장님은 우리 부산수필문학협회의 큰 기둥이셨습니다. 회장님께서 남겨주신 후배 사랑과 수필 사랑의 마음은 우리 부산수필문단에 큰 희망이 되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살아가야 할 날들을 이렇게 많이 남겨놓고 ‘삶은 절반이 사랑이고, 절반은 배우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우리들에게 남겨두고 멋지게 사시다가 가셨으니, 오늘 이렇게 원고지를 가득 메운 추모사에도 애석함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가는 안팎으로 중대한 기로에 서있습니다. 원자로의 위기, 핵폭탄의 위협이 우리 삶의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저는 평소의 지론대로 개인주체가 아니라 공동주체로서 문학을 저항담론으로 삼아 우리 삶을 더 낫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다시 한 번 회장님의 영전에 마음 깊이 추모의 향을 올립니다. 부디 회장님께서 지혜의 등불로 밝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