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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대와 순과 샘
1966.12.21 (수),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처럼 이런 순서를 꾸미려면 사회하는 사람이 미리 와서 '선생님, 오늘 저녁에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여기 척 앉으니까 얘기를 하니 원…. 그렇다고 말씀을 못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것이 전례가 되어 가지고 선생님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계획을 세워 놓고 하는 모양인데, 오늘 저녁에 조금 늦었더라면 큰일날 뻔했구만요.
젊은이들이 믿고 따라나가야 할 가치관이 없는 현세계
알다시피 이번 수련회는 대학생 수련회이니만큼 그 의의가 크고 또 앞으로 우리 교회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관건을 마련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국가의 흥망의 기준과 키 (方向舵) 를 좌우하는 것이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 하면, 젊은이들한테 달려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가만 보면 말이지요, 더구나 20세기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 젊은이들을 보면, 정상적인 기준에서, 그리고 국가가 바라는 소망을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서 지난날의 역사를 잘 수습하고 현세에 있어서 미래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심적 기반을 갖고 사는 젊은이가 많지 않아요. 더우기나 미국 같은 나라의 젊은이들에게는 무슨 트위스트(twist)인가 하는 이상한 바람이 불어 가지고 그들이 가는 곳은 천태만별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술을 먹고 좋아하다가 또 내일은 당구장에 가서 야단이고, 별의별 모양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하는 모양이 천태만상이라는 거예요. 하루의 생활에도 수십 장면이 벌어져요.
그런 것도 좋습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젊은이는 앞으로의 사회에서 소망의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사회의 조류에 대한 냉철한 비판력을 갖고 어떠한 환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아의 중심을 세워 가지고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진 입장에서 환경을 대하는 것은 좋되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사회의 풍조에 휩쓸린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청년들을 가진 국가라면 그 국가의 장래는 끝이 멀지 않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격려사라는 것은 좋은 내용을 들어서 대학생들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이런 면에서 좋게 되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상….
사실 대학시절은 오늘 이 사회와 구별되어 가지고 학창에 몸을 담고 있는 제일 좋은 시기입니다. 대학생 하게 되면 인생에 있어서 꽃과 같은 시기에 있는 거지요. 누구든지 그 시기를 잡고 싶은 좋은 기간이요, 가치 있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런 시기에 있는 학도들의 하루하루 생활을 비판한다면, 물론 대다수는 그렇지 않겠지만 그중에는 '참 저들이 저래서는 안 될 텐데…' 하고 도리어 무식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입장에 있는 학생들이 많은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전에 내가 만난 어떤 아주머니가 한 말인데 요즘의 대학생들과 대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들보고 금붕어 떼래요. 금붕어 떼가 뭐예요? 금붕어가 뭐냐 하면 말이지요. 하루종일 그저 어항에 딱 갇혀서 담아진 물을 삼켰다 뱉았다 삼켰다 뱉았다를 몇천 번 몇만 번 계속하지요. 나중에는 어항에 그 입을 거치지 않은 물이 없을 거예요. 이거 무슨 말이냐 하면 요즘에 다방 같은 데 가 보면 그 안의 공기가 어때요? 탁하지요?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들이박혀 앉아서 그 공기를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럽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마시느냐 하면 물을 들이 마십니다. 뻐끔뻐끔 물을 들이 마시는 패라 해서 금붕어 떼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거 우스운 말 같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를 거치는 것도 좋습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앞으로 자기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자료를 습득하여 미래를 향하여 달릴 수 있는 하나의 원천, 하나의 동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자리에서 논의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상적인 모든 것들을 분석해 보면 이 현세로부터 제재를 받고 추궁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헤아려 보게 될 때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학도들이 많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는 젊은이로 만드는 통일교회
여기에 모인 우리 통일교회 학생들은 예외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그런 유(類)에 속했던 학생도 많을 것입니다. 더우기나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참으로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거듭 거쳐왔고 환경적으로도 대중이 환영하는 입장이 못 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온 사람은 정상적인 사나이나 아가씨가 아닐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못 들어옵니다. 의구심이 많다든가 색다른 면을 모색해 가지고 남이 안하는 일을 하겠다는 사람, 즉 성격적으로 볼 때 특수한 타입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 사람들의 과거를 분석해 보면 심각한 유(類)의 사람이 많습니다. 골목을 헤매던 사람, 혹은 자기 멋대로 살다가 어떤 큰 충격을 받아서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던 사람, 다시 말하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서서 고심하던 차에 들어온 사람이 많아요. 그 배후를 분석해 보면 질적으로 좋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수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련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이 사회를 정화시키고 앞으로의 세계에 새로운 사상적인 파동을 던져 놓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이 현하(現下)의 한국이면 한국의 실정, 즉 대한민국의 현재 환경에 새로운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모인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또 자타가 공인하듯이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울타리 안의 통일교회를 위해서 움직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 밖을 위해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는 투쟁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통일교회의 울타리 안에 와서, 본부면 본부에 들어와서 수련을 받는데 통일교회의 울타리 내에서,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만족하라고 수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서 울타리 밖을 정화시킬 수 있는 책임적인 사나이와 책임적인 아낙네를 만드는 것이 수련을 시키는 목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결의를 하여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를 재창조하고 재편성하여 환경을 수습하고 새로운 목적을 세울 수 있는 뜻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여서 수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뚜렷한 목적과 가치관 속에서 살아야 할 인간
그래서 오늘은 '종대와 순과 샘'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간단히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여기에 와 있지만 어제까지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사람의 생활은 하루하루 변해 갑니다. 물론 자기가 목적하는 표준은 변하지 않겠지만 생활환경은 변합니다. 이처럼 변하고 변하는 환경이 연결되어 자기가 목표하는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 표준하는 범위가 크면 클수록, 즉 목적이 크면 클수록 그 환경적인 범위도 넓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큰 나라가 크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크기에 비례되는 환경적 요소를 가져야 합니다. 또 아무리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하여 적재적소에 동원해 적응시켜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나'라는 존재를 생각해 봅시다. 나면 나, 여러분이면 여러분 자체를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나'라는 존재가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자체는 어디로부터 왔을 것인가? 곡절이 많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라구요. '나'라는 존재가 어디서 왔을까? 20대, 즉 청년기에 있는 나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걸어 나왔는가, 유치원으로부터, 소학교로부터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왔는데, 이제 나는 여기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현시점에서 볼 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다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은 인생에 있어서 어차피 거쳐 나가야 될 과정입니다.
그러면 불행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벌어지느냐? 어디서 왔는가 하는 자신의 역사적인 인연을 정상적인 환경, 정상적인 생활무대에 연결하여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그러한 배경을 가진 국가 역시 행복한 국가입니다. 그 역사적인 인연이 끊기면 끊길수록 불행해질 수 있는 여건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요? 지금까지 연결되어 내려온 역사는 수많은 선조들의 생활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 선조들의 생활과정이, 그 활로가 변함없이 목적을 향해 나왔고 또 계속적으로 발전해 왔다면 선조들은 불행한 입장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지 못하고 그 인연이 끊기고 끊기는 속에서 생활했다면 그들은 발전을 못하고 거기서 돌고 거기서 부딪치고 거기서 깨지고 하여 천태만상의 비애의 곡절을 빚어 냈을 것입니다. 역사의 배후에는 그런 곡절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 많은 여러분이 걸어온 역사적인 배경이 전부 다릅니다. 또 이제부터 가야할 미래의 길도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의 '나'를 두고 볼 때 이 '나'로부터 천추만대 후손이 연결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는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종결될 것인가, 또한 앞으로 나로부터 연결될 후손들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나'의 가는 길이 뚜렷한 목적을 향해 일관된 방향으로 나간다면 후손도 행복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오늘은 이렇게 가다가 내일은 저렇게 가고 하여 자꾸만 뒤집어지고 바뀌고 왔다갔다 왔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계속한다면 결국에 가서 그 후손은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앞으로의 새로운 이념세계에 봉헌, 혹은 공헌할 수 있는 후손을 남기지 못하는 조상이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것은 미루어서 헤아릴 수 있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 그런 민족은 어느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 하나의 목적을 추구해 왔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 창조원리로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얘기해야 하는데 나중에 깊이 알아보기로 합시다. 모든 것은 목적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존재하려면 반드시 상대적인 요건이 필요합니다. 상대적 요건이 필요한 것은 그 자체들의 목적도 있지만 그 둘이 합하여 또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게 됩니다. 누구를 좋아한다 하는 것은 혼자 좋아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와 내가 좋아하고 나와 그가 좋아하는 것이지. 또 우리의 심적 작용은 둘이서만 좋아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좋도록 하기 위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인간은 더 큰 목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적부터 그러한 인연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더 큰 목적과 관계맺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데는 반드시 하나의 목적이 있음과 동시에, 언제나 변천하고 뒤넘이치는 자리에서 존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편안하면서도 발전하는 자리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요구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과정에서 올바른 전통에 입각한 기준을 세워 가지고 목적을 향해 나가면 희망이 생기게 되고 희망을 품게 되면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전을 하면 거기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게 되는 거지요. 이런 관점에서 지난날의 역사와 앞으로 올 미래의 역사를 두고 볼 때 변하지 않는 자아를 중심삼고 자기의 존재 위치를 결정하여 목적을 향해 일방적으로 달려갈 수 있는 민족이나 국가나 세계가 되었던들 이 세계는 오늘날과 달랐을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의 목적을 추구해 나온 종교
역사적인 분야, 혹은 사상적인 분야, 더우기나 종교적인 분야에서 보면 종교의 지도자들, 즉 예수 같은 양반이나 석가나 공자 같은 양반들이 주장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그들은 오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장은 누구로부터 나왔다' 하는 그 모체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언제나 같은 입장에서 존재하는 분을 추구하였습니다. 어떠한 한계권 내에 머무른 자가 아니라 한계권을 넘어서 무한한 공간세계까지 주관할 수 있는 절대자를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대상, 변치 않는 절대적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국 신(神)이라는 문제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신이 지향하는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종교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미래의 세계와 인연된 그 신의 기준도 목적도 변할 수 없는 것이요, 그 신이 추구하는 방향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 밑에서 종교는 신의 이념을 추구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념을 품고 현실을 무대로 하여 나온 종교는 역사시대의 모든 풍파를 넘고 넘어서 오늘날의 세계적인 문화권을 창설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고 수많은 사상이 있고 수많은 민족이 있었지만 다 흘러갔습니다. 그들의 위치는 전부 다르지만 지향하는 목적은 만민이 바라는 통일적인 기준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태양만 나타나면 밤새 어두움에 잠겼던 모든 초목들이 전부 다 그리로 향합니다. 초목의 순들이 모두 태양빛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풀밭에 숨어서 지루한 밤을 새우던 곤충들도 해가 불쑥 떠올라 햇빛을 발하면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고 활개를 펴고 그때부터 기쁜 하루,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인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인류에게도 앞으로 그런 햇빛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쪽을 향하고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수많은 국가와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더라도, 어떤 사람이 보더라도 어떠한 성현 군자가 보더라도 '이것만이 제일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 것이냐? 다시 말하면 역사적인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국가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역사과정을 거쳐오지만, 그 과정에서 이렇게 가고 저렇게 가지만 그것들은 어느 한때에 어차피 이렇게 꼬부라져 가지고라도 하나에 귀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에 부합되는 하나의 순(筍)이 있다면 그것을 향해 자기의 생명력과 자기의 생활력과 자기의 본질을 모두 거기에 투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가 이와 같이 흘러온 사실을 보아 오늘날 이 현실세계가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도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하의 수많은 국가가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가 중심이 될 것이냐? 즉, 누가 순이 될 것이냐? 다시 말하면 누가 종대가 될 것이냐? 여러분, 종대가 뭔지 알지요? 종대 말예요. 나무로 말하면, 나무의 순이 되기 위해서는 맨 처음 태어난 뿌리와 정상적인 인연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지요? 그런 것입니다. 그 나무의 종대가 되고 순이 되기 위해서는 맨 처음 싹이 트는 그 순간부터, 즉 나무가 천지간에 생명력을 나타내는 그 순간부터 올바른 인연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종대가 될 수 없고 순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천지의 대기원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발생하는 그 순간부터 이념적인 터전과 인연되어 그 형태는 작지만 그 본질은 전체를 적응시킬 수 있는 내용을 내포한 기준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대기원의 출발과 인연이 되어 가지고 연면한 역사적 흐름과 시대적 환경의 변천과 더불어 어떠한 환경을 거쳤더라도 그 생명력이 끊어지지 않는 한 역사는 발전해서 하나의 통일형태로 결실되는 것입니다. 결실된 통일의 형태기준이 완결될 때 까지 그 순은 연결 돼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이 못 되는 거예요. 안 그렇겠어요?
이런 관점에서 이 세계의 중요한 사상들을 일괄해 볼 때,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주의는 어떤 주의일 것인가? 요새 말로 유물주의냐 유심주의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유심주의니 무엇이니 해 가지고 하나님이 죽었다고, 신이 죽었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신과는 관계없는 시대에 들어온 거예요.
반드시 신이라는 이념을 내포해 가지고 그것이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 오기 위해서는 인연이 되어야 합니다.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오는데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이 역사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가운데에서 최초로부터 연면히 이어져 끝까지 남을 수 있는 사상체계, 하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관해 나갈 사상체계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완전한,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이나 우주관을 내포한 사상적인 형태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고 나온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본질에 가깝기 때문에 종교는 아무리 뒤넘이쳐도 시대와 세기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한 시대는 연한의 제한이 있습니다. 한 세기는 백년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면 위대한 종교일수록, 원뿌리에 가까운 바탕에 서면 설수록 그것은 천년 만년, 오랜 세월을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천치창조 당시부터 인연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 내려온 종교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성경이 참 우스운 것 같지만 놀라운 인연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살아야 할 인간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여기에서 하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나무로서 자라온 목적, 즉 생의 목적을 완결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존재해 온 스스로의 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동시에 존재시킨 창조주의 목적도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두고 말한다면, 인류가 바라는 목적이 완결되는 동시에 인류를 창조한 창조주의 목적도 완결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기필코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느냐? 이것부터 분석해야 됩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어떠했는가 분석해야 됩니다. 종교니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들은 꿈도 안 꾸었다 이거예요. 그러니 거꾸로 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뻗어 나가는데 나는 어디로 갔어요? 지평선 이하에 사는 사람, 지하에 사는 사람, 굴에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나갈 구멍이 그저 하나밖에 없으니 그 구멍만 나가면 살 줄 압니다. 나가는 구멍 앞에 구덩이가 있어서 어떻게 될 줄은 모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세의 타락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인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하늘의 역사가 그렇게 순을 향하여 흘러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있으나 그 목적하는 바를 나라와 인류와 세계 등, 큰 데에 두어야 됩니다. 알겠어요? '나'를 위주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나를 위주한 가정이라고 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가정을 위한 나, 종족과 민족을 위한 나, 국가와 세계를 위한 나라는 관점에 서야 인생에 있어 보람 있는 현재의 위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위주한 가정이요, 나를 위주한 사회요, 나를 위주한 국가요, 나를 위주한 세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아의 방향조차 파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양심을 가만히 두드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양심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길을 가다가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양심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요? 꿈에도 생각지 않은, 혹은 몇천년 전, 우리의 조상들도 생각지 않은 사람을 떡 만났을 때, 그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가 배고파하는 걸 볼 때 양심은 '지갑에 있는 돈을 주라'고 합니다. 지갑에는 삼백 원밖에 없어도 그것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사람에게 백원을 줘서 지갑에는 이백 원밖에 없는데 가다 보니까 아이고머니나,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또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또 백 원을 주고 가다 보니까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또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머지 돈을 주고 이제는 돈이 한푼도 없이 가고 있는데 또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네 옷이라도 벗어서 그에게 입혀 주어라'고 합니다. 양심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좋은 일을 한 번 했다고 해서 뭐라고 해도 양심은 코웃음을 칩니다. '좋은 일을 해서 성공을 하고 좋은 일을 해서 목적을 달성했으니 만세나 부르고 개가나 부르고 기뻐할 일이지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계속 재촉하는 거예요. '하라, 하라, 하라'고 합니다. 좋은 일에는 해서 끝나는 종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일을 하는데 사랑하는 친구에게만 하라고 그러느냐? 아닙니다. 가정과 환경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라고 마음은 명령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이냐? 주고받으면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늘땅의 공법에 의해 잘 주고 잘 받으면, 그때 준 것은 억만세에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의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가르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가르칩니다. 그게 다 뭡니까? 사람들의 것을 전부 다 빼앗아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전부 다 꺼내서 나눠 주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가르치는 것은 희생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도주는 누구일 것인가? 선생님은 옛날부터 이런 것을 분석해 봤습니다. 석가 같은 양반은 왕자로 태어나 가지고 그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산에서 도를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도를 깨우쳐서 불교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분은 어떠했는가. 몰리고 쫓겨다니고 어디 가든지 배척받고,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몰리다 몰리다 할 수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예수는 원수들에게 복수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세계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성인들과 질이 좀 다르지요. '내가 죽되 세계를 위해 죽어서 세계 인류와 인연을 맺고 세계 역사와 관계를 맺어 영원토록 책임지겠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간 것입니다. '내가 뿌린 피는 이 시대 사람들을 위해서 주겠다' 한 것입니다. 수천만대 역사를 초월하고 거리를 초월해서 준 것입니다. 주는 데도 하나님이 공인하는 자리에서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리에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완전히 주고 완전히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완전히 주고 완전히 받았으니 다음에 또 다시 요구할 때는,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혼자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는 자리에서도 세계를 위해 주고 세계의 역사적인 인연을 거머쥐고 하나님의 마음을 틀어 잡아 가지고 하나님이 눈물 지을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놓고 갔기 때문에 그는 죽어서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고 무덤에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공자나 석가 같은 다른 도주들과 좀 다르지요.
죽음을 넘어서는 그 자리에서, 생사를 결판짓는 그 자리에서, 생명을 놓고 투기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자신의 정조를 잃지 않고 올바른 자리 마음이 요구하는 희망봉에서 세계를 품고 하나님을 붙들고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예수는 죽었으되 그의 사상과 뜻이 만민의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만민의 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의 것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수많은 인간들은 예수를 자기의 최고의 희망으로 삼고 신랑처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동기가 성립됐던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라는 것이 성립되었지요.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종대가 되고 그 순이 되는 종교가 나와야
여기 멋있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왔는데, 여러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어요? 우리 아가씨들에게 좀 물어 보자구요. 어느 구석에서 어떻게 살았어요? 보따리를 풀어 보면 멋대로일 것입니다. 여기 사내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자기들 멋대로일 거예요. 그 마음세계를 사진 찍어서 자기가 스스로 보아도 '아이구'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느낄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대한민국이 나쁘다고 망할 것이라고 하는 녀석들의 마음은 더 나쁠 것입니다. 마음이 더 나쁜 녀석이 외적인 세계를 평하고 있으니 껄렁껄렁한 패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종대가 되고 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것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높은 종대가 되려면, 종대가 종대로 서기 위해서는 넓은 면을 가져야 합니다. 큰 나무를 보면 그 밑둥이 어때요? 포플라 나무 같은 것은 예외입니다. 그렇게 자란 나무는 정상적인 좋은 재목으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단단한 재목, 장구히 갈 수 있는 재목은 키가 작아도 밑둥이 넓습니다. 그런 거예요. 내가 저 제주도의 한라산 꼭대기에 가서 봤는데 말입니다. 향나무 같은 나무인데 한 두 길밖에 안 되더라고요. 한라산 꼭대기에는 찬바람이 몰아치니 오죽 춥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라면 자랄수록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그 나무는 알았던 것입니다.
나무는 사람보다 우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키는 안 자라고 옆으로 뻗으려 합니다. 도를 닦는데 키가 자라지 말라고 도를 닦습니다. 자꾸 옆으로만 뻗으려 합니다. 그런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순은 언제나 다른 것보다 높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도 위대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공부를 많이 하자' 하는 것은 범위를 넓히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왜 대학을 가자고 합니까? 그것도 왜 서울대학을 가자고 합니까? 서울대학을 가면 좋은 게 뭐가 있어요? 이 나라의 모든 우수한 인재들이 그 대학의 교수가 되어 있고 우수한 사람들이 거의 다 거기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은 환경적으로 넓혀져 있기 때문이지요. 안 그래요? 출세할 수 있는 넓은 무대가 닦여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턱 울리면, 정상적인 자리에서 울리면 전체를 울릴 수 있고 전체를 반응시킬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터전을 단시일내에 자신의 활동무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서울대학을 가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환경이 자신에게 자동적으로 출세의 여건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대학을 가려 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봅니다. 공부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서울대학에 가서도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활동무대는 더욱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꼭대기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꼭대기에 가까이 가겠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교파 제일주의 종교는 쩨쩨한 종교입니다. '아이고, 불교만이 제일이지', '뭐 기독교만이 제일이지' 하는 것들, 다 쩨쩨한 거예요. 그 분야에서만 제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 것인가? 둥글둥글 굴러다니면서 세계를 다 유랑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굴러다니면서 세계를 유랑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 태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태양을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셨지요. 태양이 구르면서 세계를 유랑하지요? 해요, 안 해요?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교의 아버지 노릇만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은 필요도 없어요. 종교의 아버지도 되고, 이 세상의 아버지도 되고, 싸움터에서 싸우는 장군도 되고, 도를 닦는 데 가서는 도주도 되고, 뜀박질하는 데서는 마라톤 대왕도 될 수 있는 하나님이 멋진 하나님이지요. 통일교회는 그런 아버지를 필요로 합니다. 어떤 울타리 안에서 '아이고, '나는 어느 교회만 왔다갔다하겠다' 그러게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종대의 자리에 계십니다. 그러면서, 종대를 위주로 하면서 횡적으로 세계를 치리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역사시대를 거쳐 나가시면서 종대를 세워 나오는 동시에 횡적인 이 세계를 움직여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윤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더우기나 젊은 사람으로서 원리를 대할 때 '야! 어쩌면 저렇게…. 햐! 그렇겠다'고 해본 적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중에 세계에서 제일가는 나라가 어느 나라겠습니까? 이거 알고 싶지요? 알아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아가씨들은 그 나라 대통령의 며느리가 되겠다는 욕망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또 사내 녀석들은 '그 나라 대통령의 사위는 나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하나님도 말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이 될 수 있고 종대가 될 수 있는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만나고 싶어해야 합니다. 만나는 데도 '맨 처음부터 서두를 게 뭐 있나, 그저 어떻게든 햇빛만 맞으면 되지' 하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을 거쳐 어둠 전체를 느껴 본 사람이 진짜 햇빛을 감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느끼는 어둠의 맛과 밤에 느끼는 어둠의 맛, 그리고 새벽에 느끼는 어둠의 맛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만큼 그 맛이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렇겠어요?
나는 옛날부터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야, 그럴 것이다. 그런 세계가 올 것이다. 그러면 그 세계의 종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메시아 사상, 인류가 공히 추구해야 할 메시아사상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일시에 불쑥 나타나 가지고 일대에 메시아사상을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를 거쳐 가지고야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순, 즉 메시아의 개인형이 나타나서 역사시대를 거치면서 시달리고 연단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환경의 모든 모순된 것들을 바로잡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서야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종교라든가 사상을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비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름에서 대번에 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여름에서 대번에 겨울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을을 거치고 겨울을 거쳐서 봄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비약이 있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역사와 더불어 또 흘러 나갑니다. 가다가 도중에 분리하고, 버리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끈기 있게 붙들고 뒤넘이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적인 형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인연을 벗어나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중심역할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의 형태가 있어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비판해 볼 때, 기독교에는 그런 중심사상이 있습니다. 유교나 불교를 보면 그건 전부 햇내기예요. 기독교를 보면 창조주부터 나옵니다. 그것이 말뿐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전부 자기네가 종대라고 합니다. 기독교도 '아, 우리가 종대지' 합니다. 더우기나 요즘에는 영통하는 사람들이 많아 가지고 많은 도인들이 이 세계가 하나의 세계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계를 통해 보니 천운이 지상통일의 운세를 움직여 나오는데 반드시 도를 통해서 통일될 것이어늘, 누구의 도를 통해서 통일될 것인가. 도인들은 누구나 자기 도를 중심삼고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부 다 자기가 종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 알아야 됩니다. 종대가 되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종대가 되면 좋겠지요? 좋겠나, 나쁘겠나? 「좋겠습니다」 좋겠지요? 그래, 종대가 되겠나, 안 되겠나? 「되겠습니다」 아니 이녀석은 고등학교 학생 녀석 아닌가. (웃음) 응? 너 고등학생이야? 「아닙니다. 전문학교 학생입니다」전문학교? 종대가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얘기 그만 두자고요? 재미없어요? 좀 들어 보라구요. 종대가 되어야 합니다.
종대의 사명을 하기 위해 출발한 통일교회
그러면 현재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통일하자는 것입니까? 치맛바람 통일하자는 것입니까? 무슨 파마를 통일하자는 것입니까? 무엇을 통일하자는 거예요? 꼭대기에 가서 기독교를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을 통일교회가 할 수 있느냐? 가만히 있더라도 되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거예요. 되게 하는 내용만 갖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들 종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종대는 제일 높은 데에 올라가야 됩니다. 제일 높다고 하니 좋지요? 좋지 않아요? 그 나라의 제일 꼭대기면 대통령이지요? 대통령은 절름발이도 좋아합니다. 그렇게 다 좋아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종대가 서는 장소는 몇입니까? 하나입니다, 하나. 하나예요, 하나. 하나님이 종대라면,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하나님이 계시는 그 자리는 중심과 중앙이 딱 들어맞는 하나여야 됩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나 횡이 서 있는 자리는 많습니다. 횡은 어디서든 자리를 잡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횡이 서 있는 자리는 시시하고 너절하게 많습니다. 그렇듯 시시하고 너절하기 때문에 횡의 자리에는 시시하고 너절한 패들이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縱)이 서 있는 곳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절대 불가침이예요. 여러분 이거 알아야 됩니다. 종이 되는 사상을 가진 민족은 역사시대에 어느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사나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부가 그렇게 되어야 해요.
그런 관점에서 수많은 국가의 역사는 변천해 나온 것이며 또 그렇게 변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강한 나라가 휘몰아치면 약한 나라는 전통이고 문화고 다 깨져 나가는 거예요. 그러나 종대가 서면 다시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가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대가 하나 나오면 대개 그 옆에 가지가 나오는데 몇 개가 나오느냐 하면 세 개 네 개 정도 나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종대가 하나 서기 위해서는 그 받침이 될 수 있는 곁가지가 서너 개는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계에도 현재 4대 종교가 있는데,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와 회회교가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종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세계는 그 종대가 되는 종교로 말미암아 역사와 문화의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이 세계를 통일하는 세계적인 영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정치적인 힘이나 군사력만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는 겁니다. 종교를 통일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외적인 세계에 적응시킬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잘 적응시키느냐 하는 여하에 따라 세계는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오늘날의 흐루시초프나 존슨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모르는 내용이예요. 그러니 우리 통일교회가 그런 내용을 들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다고 우리 통일교회가 종대니까 꼭대기에 가만히 앉아 있자는 것이 아닙니다. 종대가 가는 길은 전체를 대표한 길입니다. 옆에서 나는 가지에도 종대가 있습니다. 있어요, 없어요? 가지 자체에도 순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대는 뻗어나는 가지 전체의 표본, 즉 자라고 있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뻗어 가지고 있는 가지들 전체의 생활표본이 되어야 됩니다. '저렇게만 가면 틀림없구나'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리 망한 나라도 저들과 같이 하면 산다, 아무리 형편없는 환경에라도 그들이 가면 잘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능동력을 지닌 사람을 종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대가 서 있는 곳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야 됩니다. 거기에는 울타리도 없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사방풍을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대는 봄이 오는 것도 먼저 알고 여름이 오는 것도 먼저 알고 가을이 오는 것도 먼저 아는 것입니다. 겨울이 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먼저 알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곡절도 모두혼자서, 그리고 먼저 당해야 됩니다. 사방에 있는 곁가지들은 일방향에서 오는 시련만을 당하면 되지요. 동풍이 불면 동쪽 방향에 있는 가지들은 시달리지만, 서쪽과 남쪽과 북쪽에 있는 가지들은 도리어 멋지고 신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춤을 추게 되는 것이거든요. 곁가지는 일방적인 바람만 맞는 입장에 있으나 종대는 어떻습니까? 종대는 언제나 사방풍에 시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과정에서 이념을 가지고, 혹은 하나님을 믿고 신봉하는 가운데 종대와 같은 시련을 거친 민족이 어느 민족인가? 이스라엘 민족, 유대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 판도의 중심 입장에 있는 유대 민족이 앞으로 철두철미한 사상만 딱 쥐게 되면 세계를 순식간에 손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 깃발을 꽂고, 여기에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세계적인 사상과 이념을 집어넣어 가지고 오늘날의 공산주의를 삼켜 버리기 위한 출발을 알리는 행군나팔을 불어 이 민족을 기반으로 움직이게 될 때는 세계 경제권의 5분의 3이 전부 다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미국 뉴욕의 월가 (Wall Street; 세계 금용시장의 중심가) 같은 곳도 5분의 4 이상이 유대인의 손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유대라는 나라는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학살을 당하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품고 다녔습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을 품고 다녔다는 거예요. 때문에 고목과 같은 나무의 입장이로되 죽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하면 예수를 죽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유대 나라의 잘못이란 말하자면 예수를 죽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기 때문에, 종대를 꺾어 버렸기 때문에 그 종대는 지금 기독교를 통해서 연결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직까지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유대 나라는 회생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다시 와서 종대를 연결시키고 접을 붙여 주어 가지고 다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하는 것이고 또 올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종대의 역할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1 이스라엘, 제2 이스라엘, 제3 이스라엘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을 옛날의 유대 나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대의 자리에 세워 놓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들고 나온 통일교회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풍파에 시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긴긴 역사노정에서 갖은 곡절을 거치면서도 그들의 사상과 전통을 연면히 이어왔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의 환경 가운데에서 한국 강토를 중심삼고 세계적인 시련을 겪자는 것입니다. 세계에 물결치던 모든 풍파가 일시에 한국의 통일교회 무리들이 가는 길 앞에 몰아쳐도 그것을 이겨내어 세계적인 시련의 탕감을 하자는 것이 선생님의 주의입니다.
세계적인 풍파가 몰아친다 해서 거기에 휩쓸려 나가고 꺾여 나가고 잘려 나간다면 종대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그런 세계적인 책임과 사명을 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세계의 풍파를 몰아올 것이고 세계적인 폭풍도 전부 다 불러와서 사방풍이 한꺼번에 불어제끼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때가 있습니다. 6.25동란 이후 7년 동안 한국 정부가 풍파를 겪었지요. 그것이 7년대환란에 맞먹는 노정입니다.
이 가운데 통일교회 교인들은 사방에서 불어오는 사방풍을 맞아야 합니다. 옆에서 불어오는 횡풍뿐만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에서 마구 불어오는 직상풍, 직하풍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땅도 우리를 못살게 하고 하늘도 우리를 못살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가운데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천하의 온갖 것들이 항소를 못하는 것입니다. 완전승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앞으로 새로운 시대에 순의 자리에서 생명의 권한을 갖고 온 생명을 수하에 거느리고 지배할 수 있는 주도적인 국가의 주도적인 이념을 가진 주도적인 무리가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천리의 움직임을 보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은 이제 나이가 40이 넘어 50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도 여러분과 씨름을 해서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젊은이들을 좋아하는데 이 젊은 녀석들은 다 선생님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사실이지요? 왜 무서워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멱살을 잡고 뭐라고 해요? 선생님은 가만히 앉아서 말만 하는데 무서워해요. 선생님이 말을 하면 걸리지 않는 것이 없거든요. 귀를 들고 말하면 귀가 걸리고 코를 들고 말하면 코가 걸리고 눈을 들어 말하면 눈이 걸리고 손을 들고 말하면 손이 걸리니 무서워하지요. 여러분은 선생님이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여러분은 안 무섭지요?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없구만.
종대의 사명을 하려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그러면 예수가 진 십자가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여러분, 이거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가 나의 형님 자리에 있는가, 내가 그의 형님 자리에 설 것인가 생각해 보라구요. 만일 여러분이 예수보다 훌륭하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야, 너는 하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다. 그러지 마라. 예수는 나의 독생자인데 그보다 네가 더 훌륭하게 되면 독생자가 깨져 나가겠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 하시겠어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능가하여 세계를 삼켜 버려도 당신의 뜻에 합당하면 좋아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세상적으로 얘기를 해도 그렇습니다. 맏아들도 잘났는데 그 동생이 형보다 더 잘났다면 그것을 보고 '이 자식아, 너는 형님도 몰라보느냐, 네가 형보다 머리가 좋으니 안 되겠다, 머리를 깎아 버리도록 해라' 할 부모가 있겠느냐 이거예요?
선생님은 때때로 공자나 석가가 고문을 당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그들이 주리를 틀어대는 고문을 당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요. 인두로 지졌으면 어떠했을까요? 아주 궁금합니다. 요전에 선생님이 노르웨이를 갔었는데 거기에는 북극을 탐험한 기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노르웨이가 북극에 가까우니까 그 북극탐험이란 것을 해 가지고 큰소리들을 칩니다. 그거 큰소리칠 만합니다. 북극에 부는 바람이 얼마나 찹니까? 북극의 바람이 얼마나 찬바람이예요?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 아무도 흔적을 남겨 놓지 않은, 그런 곳에 홀로 가서 새로운 기분을 느낀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거기서 느끼는 맛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그럴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통일교회가 세계의 순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그런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거 실례예요? 어때요? 그런다고 하나님이 욕을 하시지는 않겠지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세계 어디라도 가서 통일교회를 찾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가 와도 통일교회로 이끌려 오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용이 필요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뭘하는 곳이냐? 순이 되어야 합니다. 순이 되어야 해요. 무슨 순? 돈버는 데 순? 무슨 대회에서 일등하는 순? 아닙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전진적 극복'을 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처음 들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한번 써 봅시다. '전진적 극복' 이것을 하지 않고는 순이 될 수 없습니다. 순이라고 해서 '아이고 나는 봄동산이 참 좋더라. 내가 제일 먼저 싹이 트니 참 좋더라. 나에게는 봄만 필요하지' 해서는 안 됩니다. 순은 언제나, 언제나, 겨울에나 여름에나 생명력을 가지고 앞서가는 입장에서 환난과 시련을 극복한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전진적 극복'을 해야 돼요.
그런데 지금 통일교회가 전진적 극복을 해 나가고 있어요? 7년노정을 가자고 하면 '가 보자' 하고 나섰다가는…. '요만큼 가기는 좋구나' 하다가는 '아이고 여기서는 불리하구나' 하고 돌아들 갑니다. 앞으로는 우리 교회에 한국의 청년들이 좀 몰려들 것입니다. 대학교 학생들도 몰려올 거예요. 언제 한번 몰려들 거예요. 이런 기준에 서 있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그런 사람 있나요? 사회가 부패했으면 '아이고 망할 세상' 하며 자포자기하고 낙망하는 녀석들은 많지만 거기에서 낙망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젊은이는 많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이 사회를 향하여 진일보할 수 있는 극복의 대왕들이 되어야 됩니다. 배고픔이 찾아와서 배가 고파도 역시 전진하는 것입니다. 찬바람이 불어와도 설한풍을 받아 가면서도 전진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크는 것이 정상입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크지 못하는 것은, 전진하지 못하는 것은 쇠퇴하거나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일이 문제지 어차피 제거 되는 것입니다.
요즘 대개의 청년들을 가만히 보면 다들 '내가 무엇이 될 것이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잘 때도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되고 깰 때도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되고 깨어서 움직일 때도 그런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앞에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환경적인 모든 내용을 흡수하여 가지고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에 밀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환경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순이 되려면 전체적이 시련을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순이 될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전진적인 극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을 가만히 보면 언제나 외롭습니다. 언제나 외로와요. 혼자 있으니 외롭지요. 혼자서 꼭대기만 바라보고 있으니 외로울 수밖에요. 옆에 있는 가지들은 친구가 많습니다. 위에도 친구가 있고 아래에도 친구가 있어요. 그러니 그 자체가 좋아 보이고 멋들어져 보이는 것입니다.그러니 '야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하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인류가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종대를 잃어버리고 가지끼리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종대는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가 없어요. 친구를 만들려면 나로부터 인연된 생명력을 나눠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되는 거예요. 종대는 그러는 겁니다. 우연히 인연이 되어 가지고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인연이 되어 가지고서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강한 생명력을 갖고 시련을 극복해 나가야
그러면 통일교회가 종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시련도상에서부터 가야 합니다. 세계적인 시련도상에서 그 시련을 극복하고 타파해 버려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런 입장에서 투쟁해 나왔습니다. 삼천리 반도가 나를 쳐도 나는 기분이 좋습니다. 한때 이화여대 사건이니 무엇이니 해 가지고 한참 떠들었지요? 그때 내가 얼마나 좋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래야지' 했어요. 내가 키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여섯 자가 못 됩니다. 다섯 자는 조금 넘고 여섯 자는 조금 못 돼요. 이런 나를 놓고, 나 한 사람을 놓고 삼천리 반도의 사람들 전체가 한바탕 반대를 할 때 나는 일면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반대하라, 소학교 학생들까지 전부 다 반대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반대 해도 정의에 입각한 것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의가 완전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반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도 죽었다고 하지요? 끝날입니다. 끝날이예요. 이 이상 반대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죽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때려잡았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할 놀음 다한 거지요. 끝까지 온 셈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살았다' 하면 세계는 통일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살아났다 하면 그 하나님을 다시 잡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숙제를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돈이 몇억 달러만 있으면 뉴욕타임즈 (미국의 신문) 를 대해서 싸움을 걸겠습니다. 그들에게 '이 자식들아, 하나님이 죽었다고? 나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게 되면 세계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전도할 수 있는 좋은 찬스를 내가 놓쳐버린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멋지게 때려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몰랐구만, 통일교회의 하나님을 몰랐구만' 해야 됩니다. 이제 그것들 다 정리하려고 그래요. 선생님은 그런 데에 관심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가 종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시련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방풍에 시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절개가 변해서는 안 됩니다. 겨울에도 생명력을 흡수하여 그 얼어붙은 땅 속에서 스스로 자랄 수 없거든 봄이 오면 자랄 수 있는 백방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겨울이라고 전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진할 수 있으되 잠깐 쉬는 단계이니 봄을 맞이하는 날에는 일시에 번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받았어요? 시련을 참 많이 당했습니다. 동남풍에, 사방풍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전진적 극복 단계로 넘어가서 발전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가 '통일교회는 죽었다. 통일교회는 발전 못한다'는 말을 남길까봐 염려했습니다. 지금도 그 말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누가 반대를 하든 말든, 대한민국 사람들이야 죽겠으면 죽고 말겠으면 말라고 하며 우리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7년노정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렇지요? 그랬나요, 안 그랬나요? 「그랬습니다」
종대가 되기 위해 가는 길이 고귀한 길임을 알아야
종대가 되기 위해서는 생명력을 가져야 합니다.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받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아 인연이 돼 가지고 친구를 만들고 나로 말미암아 사회와 국가적인 터전까지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으면 종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단계를 향해 들이 맞으면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종대가 되기 위한 절대적인 요건입니다.
그래, 종대가 되고 순이 되겠다고 하는 여러분들, 이런 것을 생각해 봤어요?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서울대학교? 대학교에서 영원히 살 거야? 학생의 갈 길, 사람의 갈 길이 어디일 것인가? 높은 데에 있다고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낮은 데에 있더라도 그 본질과 가치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청년들은 대학교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시골에 가서 똥구루마를 끌면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어 있는 듯한 이 동산이 새로이 소생하는 봄날에 하나의 싹으로 터올라 나로 하여금 연결될 이 나라의 미래상을 생각하고, 나를 기반으로 해서 나라가 자랄 것을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혹은 소망의 봉우리가 되어서 모든 산야를 관찰할 수 있는 기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우리 대학가의 젊은 사나이와 아가씨들은 몇 점이나 될까요? 머리들은 모두 백점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내용을 보면 빵점 이하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눈들이 전부 다 도깨비 바람에 들려 있습니다. 전부 눈들을 이렇게 뜨고 '세상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나 보자' 하고 있습니다. 그거 잘못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관점에서 자기를 다시 한 번 비판해 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역사는 반드시 그러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종대는 언제나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조화가 없습니다. 무미건조해요. 그러나 옆가지에서는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어려움도 종순이 혼자서 다 당하고 좋은 일은 곁가지가 다 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그와 같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어떤 사상이나 종교의 지도자 입장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풍상에 부대끼면서 외로이 자기의 길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곁가지와 같은 사람들은 친구도 많고 잘도 삽니다. '나 좀 봐라' 하며 사는 것을 보면 그가 세계의 이목을 전부 끌 수 있고 세계 전체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 기준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보면 앙상해 보입니다. 보면 볼수록 앙상해 보여요. 꼭대기를 올려다볼 때는 앙상하지요. 그렇지만 그 뿌리를 내려다보면 거기에 보이지 않는 멋진 판국이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가 지켜 나온 뿌리, 거기에 멋진 판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꼭대기에서 가지들을 바라볼 때는 외로울는지 모르지만, 밑으로 내려와 뿌리를 바라보면 거기에 있는 것은 전부 자기 것인 것입니다. 곁가지들이 아무리 좋아하고, 또 좋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수많은 가지는 결국 종대 하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때는 외로운 것 같지만 아래 위를 바라보면 그 이상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은 자신이 종대인 것을 자처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그래요?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 나간다고 반대를 받아 어머니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형제들도 다 잃어버리고 선생이나 친구들까지 잃어버리고 고독단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에 지닌 보화와 가치라는 것은 천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자리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고귀한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들이 말하기를 전부 다 종대가 되고 싶다, 순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순은 꼭대기를 말하고 종대는 중심 줄기를 말합니다―이게 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러면 다시 한 번 물어 봅시다. 뭐가 될래요? 곁가지가 될래요, 종대가 될래요? 뭐가 되겠습니까? 대답을 해 봐요. 「종대가 되겠습니다」 생각도 하지 않은 것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것을 행동화할 수 없고, 행동을 하여 인연을 맺지 않은 것이 나와 관계 맺어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야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리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수련하는 여러분에게 올바른 선생이 되려면, 그리고 여러분을 전부 종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종로 거리로 보내야 되겠어요? 어디로 보내야 되겠어요? 이건 뭐 두말할 것도 없지요.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종대가 되고 싶으면 자기 갈 길을 알아서 가야지요.
부패한 세상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수가 되어야
그다음에는 샘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여러분, 샘이 무엇이예요? 어떤 것이 샘이예요? 샘이 좋아요? 샘낼 때의 샘입니까? 아가씨들이 샘을 잘 내지요. '아이 난 몰라' 하면서 새빨간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샘을 내지요.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샘이 아닙니다. 무슨 샘을 말하느냐? 「샘 솟는 샘」 샘 솟는 샘? 샘 솟는 샘! 통일교회는 이 샘 솟는 샘이 되어야 합니다. 생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수가 어떤가요? 깨끗한가요, 더러운가요? 그래 여기 있는 여러분은 깨끗해요? 마음 보자기들 다 깨끗하게 씻고 왔어요? 보자기들을 좀 보라구요. 개똥 보자기는 안 가져왔어요? 보자기들을 들춰 보면 별의별 냄새가 다 날 거라.
샘, 샘이 되어야 합니다. 샘물이 나오는 길은 보통 물들이 나오는 길과 다릅니다. 샘물은 내려 흐르나요, 올려 흐르나요? 올려 솟지요? 폭포수는 내려 떨어지되 샘물은 올려 솟는 것입니다. 폭포수 밑에 생수 통 (샘) 이 있으면 그놈은 올려 솟습니다. 반대지요. 샘물이 되기 위해서 솟아나야 됩니다. 샘물도 물은 물인데 가는 길이 다릅니다. 샘물은 위로 솟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이 샘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산골짜기에 생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으면 그 산중에 있는 모든 짐승들은 해가 올라올 때 그 샘의 생수를 찾는 것입니다. 명산이면 명산일수록 거기에는 좋은 생수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생수가 있어야 명산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산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 샘이 아무리 높은 곳에 있더라도, 꼭대기에 있더라도 그 하나의 샘줄기를 찾아 그 산의 꼭대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 산에 갔으면 그 샘물을 마셔 봐야 관광했다는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되고 누구든지 관심을 갖고 애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샘입니다. 그리고 샘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온 여러분은 부패한 대한민국, 시궁창 같은 이 천지에서 샘이 되어 솟아나야 합니다. 시궁창의 더러움을 도수로 말하면 몇 도나 될까요? 더러움의 도수가 만도도 넘는 시궁창에 들어가서 솟아 뻗어나는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샘물을 받을 적당한 그릇만 있으면 그 생수는 태양빛을 맞으면서 큰 웃음을 지으며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생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은 보통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방향이 달라야 해요. 보통 물은 일단 생수가 사방으로 퍼지게 되면…. 여러분은 생수가 되어서 퍼져야 됩니다. 생수는 일단 솟아올라 퍼지게 되면, 그리하여 흐르게 되면 그 방향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생수는 어디로 흘러가느냐. 생수의 마음은 어디로 흘러가고 싶어하느냐. 백사장이 있으면 그리로 흘러가고 싶어하고, 아주 닳고 닳은 청석과 같은 돌만 있어서 천년을 흘러도 티가 조금도 묻지 않을 그런 자갈판이 있으면 그리로 흘러가고 싶어합니다. 생수의 마음이 그래요. 자기의 정결을 고이 간직하고 싶어하는, 그 정결을 잃어버릴까 염려하는 마음이 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찾아가야 할 길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러지 못하면 생수라 해도 보통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생수는 생수로되, 근원은 좋았으되 가다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물과 같은 입장에서 마음으로는 생수를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싫어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더러운 물과 막 섞여서 삽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았지요? 여기도 트위스트를 추고 댄스를 한 아가씨나 사내 녀석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갈 길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물이란 흘러가는 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생수가 아닙니다. 그런 곳에 있는 물은 수많은 박테리아균이 서식할 수 있는 물입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석을 하고 간별을 하여 사람의 생명과 인연될 수 있는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모두 뭉뚱그려져서 생명이 될 수 있고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에너지로 화할 수 있는 힘의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됩니다.
생수가 생수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기까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지층이 있고 암층이 있고 그 다음에 지하천이 있지요. 생수는 그 반석을 뚫고 나와야 됩니다. 어려운 해산의 과정을 거쳐 나와야만 생수가 생수로서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반석과 반석의 틈을 뚫고, 멀리 멀리 뚫고 나와 솟아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생수 되기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골짜기, 어느 고빗길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생수가 되는 길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길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 길만 열어 놓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여러분으로 하여금 생수가 될 수 있는 바탕 길을 닦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여러분 앞에 생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여러분이 생수가 되어 퍼져서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생수를 마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그런 자유 동산을 이루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생수가 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왜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했느냐 하면 인상에 남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무를 볼 적마다 생각하라고, 물을 마실 적마다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여기 몇 안 되는 대한민국의 여러분이 커서 활개를 치는 데 천하를 넘나들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이 선생님에게도 여러분과 같은 청춘시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같이 젊은이의 기백을 품고 내일의 소망을 꿈꾸면서 준비하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과거는 여러분의 그것과 좀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점점 더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 지닌 바를 분석해 보니 질적으로 내용적으로 다르거든요. 이 가치를, 이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압니다.
앞으로 우리의 움직임과 우리의 이념은 세계 도처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종대가 되고 샘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에서 그런 결과를 나타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한 것입니다. 알겠지요? 「예」 그러면 이젠 뭐 기도해야겠구만요. 기도하자구요.
기 도
여기는 동방에서 지극히 작은, 동반부에 있는 하나의 나라 한반도이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외롭게 자라난 통일교회의 본부라고 하는 곳입니다. 저희들은 비록 초라한 옷을 입고 있고 저희들이 서 있는 이 자리는 말구유와 같이 지극히 초라한 자리일지라도 이 자리에서 하늘땅의 마음을 전하며 예수의 탄생을 자랑하던 베들레헴을 대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사옵니까? 그것이 저희들의 소원이옵나이다.
개인적인 유아로 태어난 예수보다도 장성한 국가적인 예수의 형이 탄생할 수 있는 시대적인 소망을 대하오니, 이 세계 앞에 한국이 그러한 아들을 태어나게 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만 가지고 안 되는 것인 줄 아옵니다. 연결되어 온 인연의 그 모든 사연을 실증적인 사실로 그 마음과 생활에 느낄 수 있는 각자의 모습을 지녔다고 찬양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아버지시여, 그러한 터전을 만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터전을 바라보시고 당신은 지금까지 싸워 오시고 수고해 나오신 것을 아옵니다. 저 또한 그 길을 따라서 그 날을 바라고 그런 환경을 개척하기 위해 지금까지 참아 나왔사옵니다. 오늘 당신의 아들딸들을 만나서 마음들을 다짐시켰사오니, 이 가운데 내일의 새로운 약속을 부가시킬 수 있는 당신의 자녀가 있사올진대, 그들의 마음 깊이 스며들 수 있는 인연을 심으시옵고 생명의 터전을 옮기시옵소서. 당신이 분부하시고 당신이 대하실 수 있는 귀여운 새싹과 새순이 되고 새로운 샘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백만 명이라고 하는 수많은 학도를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소수의 무리만을 모이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일면 섭섭하오나 많은 수를 문제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 가운데 천만번 쪼개고 가를지라도 그 본연의 모습과 본질적인 성품에서는 아버지를 닮고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낼 수 있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라도 나타난다면 이번 기회의 큰 소득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사옵나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이들이 일주일 동안 지내고자 하옵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을 것이오나 그 모든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이 알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마음을 좌정시키고 이제부터 생활하게 될 일주일 동안을 일생에서 둘도 없는 귀한 기간으로 알고 연단하고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제가 이 길을 걸어올 때 친히 분부해 주신 인연을 이들에게 연결시키시어서 같이하여 주시옵고, 내일을 약속할 수 있고 미래에 세계를 대신하여 활동할 수 있는, 늠름한 기백을 갖춘 용자의 자태로 아버지 앞에 뚜렷이 나타나서 책임을 다하는 자녀의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천지에 당신 앞에 나타나 효성을 다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이 있사옵니까? 그런 아들이 없습니다. 참다운 딸이 있사옵니까? 참다운 딸이 없습니다. 때문에 당신의 손길은 허위의 손길을 대신하는 역사적인 슬픔을 품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발걸음은 허위를 위한 결과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신의 모습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그러한 자리에 서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대해 나온 사람들이 그러한 자리에 있었기에 당신의 손길과 발걸음마저 허위의 결과를 가져와 슬픔과 탄식의 여건을 남기게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정도 알고 있사오니, 이들을 찾아오신 아버지시여! 저희를 품고자 하시는 당신의 그 가슴에 진정히 품길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발걸음을 모아 저희를 앞에 세워 놓고 최후의 훈계를 하실 수 있고 최후의 권고와 최후의 유언과 최후의 명령을 할 수 있는, 거룩한 아버지의 모습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생명이 좌우되는 곳이라도 당신께서 가시기 전에 우리를 보내 달라고 호소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을 당신은 얼마나 그리워하시옵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께서 그런 아들딸을 간절히 그리워하시며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 역시 그러한 길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슬픔도 있었사오나, 그러한 슬픔이란 가을날의 낙엽처럼 일시에 지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슬픔이 있으면 당신의 마음과 더 깊이 인연되고, 외로울 때는 고독과 더불어 당신의 친구의 자리에 세워진다는 것, 또한 거룩하신 당신께서 저희와 더불어 이 자리에 좌중하고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내일의 소망과 더불어 당신을 모셔 놓고 당신 앞에서 이 나라와 세계를 책임지겠다고, 내일을 책임지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하고 맹세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는 정의의 행로가 새로이 출발하여, 만민이 그 길을 따라오게 하겠다는 당신의 약속과 더불어 오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당신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고 나설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으로 인하여 맺히고 엉킨 아버지의 심정을 부여잡고, 아버지의 그 가슴을 부여안고 '내 아버지'라고 하며 눈물 흘리며 위로할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 마음 앞에 아버지께서 '내 아들아, 내 딸아, 이제 나의 모든 한은 풀렸고 어려움도 다 없어졌다. 너만이 나의 기쁨이요, 너만이 나의 자랑이다' 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아들딸을 세워 놓고 만세의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날을 당신께서 얼마나 그리워하시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 자리에 서기에는 너무나 불초한 것들이옵고, 그 자리에 나가기에는 너무나 미비한 것들이옵고, 그 자리를 찾아가서 아버지를 모시기에는 너무나 더러운 것들이옵니다. 하지만 당신은 간절한 심정을 갖고 애절한 마음을 갖고 절규하는 울음소리 앞에는, 눈을 감고 저희를 품어 주려 하는 그러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가 뭐라고 거부하더라도 당신만은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인 것을 알고 그 누가 막을지라도 그것을 넘어 품어 주시는 아버지인 것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한반도에서 싹트고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주시옵고, 당신께서 미래의 소망의 터전을 고대하시는 이들을 모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모인 이들의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 것인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나무가 자라서 동산을 덮는 것도 정상적인 생명력을 지녀 가지고 결실될 때까지 참고 남아져야 되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여기 이들이 씨를 뿌려서 하나의 나무가 된 당신의 아들딸이라 할진대, 이들이 이제 결실되어 이 강산 처처에 뿌리 내릴 수 있는 당신의 역군들이 되어야 하겠사오니, 이들 스스로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를 불러 오신 아버지, 이 시대에 우리를 찾아오신 아버지, 미래에 우리와 같이 기쁘게 행보하시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시며 품고 이러한 아들을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당신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는 참다운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들을 이 곳에 보내 놓고 지방에서 기도하고 있는 식구들이 있사옵니까? 그들과 같이하여 주시옵고, 날로 아버지의 뜻 앞에 충성을 다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심정을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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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러분이 여기 통일교회의 울타리 안에 와서, 본부면 본부에 들어와서 수련을 받는데 통일교회의 울타리 내에서,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만족하라고 수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서 울타리 밖을 정화시킬 수 있는 책임적인 사나이와 책임적인 아낙네를 만드는 것이 수련을 시키는 목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결의를 하여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를 재창조하고 재편성하여 환경을 수습하고 새로운 목적을 세울 수 있는 뜻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여서 수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