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누가복음 18:17-27
제목: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와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 자가 구원을 받는 신앙입니다.
| 눅18: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6.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누가복음 18장에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매우 중요한 대답이 명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아울러 성경은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위험한 유형의 인간들에 대해서도 엄중한 경고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실패하는 유형의 핵심적 특징은 다름 아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위선자들’입니다.
| 눅18: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tax collector)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have mercy on me, a sinner)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이러한 분별 기준은 인간의 신학적 추론이 아니라 예수께서 직접 친히 제시해 주신 성경적인 척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 중 하나인 ‘이신칭의(하나님께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의롭다 칭하시는 은혜)’에 깊이 매료되어, 자신이 ‘오직 믿음만으로 완벽하게 의롭게 되었다고 믿고 확신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섣불리 속단하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거룩한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 확신하는 믿음에 수반하여 칭의의 필연적 열매이자 결과인 ‘성화(거룩하여짐)’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거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듣고 삶으로 순종하여 지키는 모습(눅11:28)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요. 그런 사람이 고백하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생명의 믿음이 아닙니다.
| 눅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ey it)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
그러한 상태는 자기 착각에 빠져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전형적인 바리새인적 종교인의 유형에 정확히 해당할 수 있음을 두려움으로 직시해야 합니다. 반면 눅18:13을 보면, 감히 하늘을 두 눈으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그저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애통하며 부르짖는 세리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보잘것없고 참 불쌍해 보이는 이 겸손한 인간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고’(칭의, 눅18:14) 돌아간 진정한 의미의 의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기에 가장 합당한 자입니다.
| 눅18:14(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
● 성경이 증언하는 참되고 살아있는 구원의 믿음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눅12:45)는 안이하고 나태한 생각에 사로잡혀 영적으로 해이해지거나 방종하지 않습니다. ‘이미’에 방심하지 않고 ‘아직’을 의식하고 늘 준비합니다.
| 눅12:45.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when he does not expect him and at an hour he is not aware of)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
성경의 참 믿음은 섣부른 방심과 나태함이 아니라 오히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할까?’라는 거룩한 영적 경각심과 신실한 두려움(경외함)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말씀 앞에 돌아보며 행동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관리’(눅18:18 이하)는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의 첫 단추를 나름대로 잘 끼웠던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관리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시기 위해 먼저 던지신 기초적인 계명 준수와 이행의 여부에 대해, 그는 어릴 때부터 신실하게 잘 지켜왔다고 솔직하게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고요.
| 눅18:20.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여짜오되 이것은(나는 이런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더 나아가, 마가복음이 묘사한 동일 인물과 사건에서 예수님이 청년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찾아 영접한 사람이고
| 막10: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새: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예수님께서 그 청년(누가복음의 관리)을 사랑하셨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가 믿는 자답게 살아가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폐기하시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도덕률 폐기론자들이나 무법주의자들(lawlessness, 벧후2:7)은, 신약의 은혜 시대에는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기되었으므로 그저 입술로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주장하며 교만하고 안이한 태도로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진정한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되게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자녀로서 마땅히 자녀다운 거룩한 삶의 양식을 실천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온 마음으로 지키며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관리의 믿음의 진위 여부를 점검하실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인 십계명을 일상에서 올바르게 준수하고 있는지의 여부부터 꼼꼼히 확인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기초적인 점검을 거친 후에는 반드시 그 고백의 진실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은 눅11:28의 선언에 매우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만약 눅12:45 이하의 말씀처럼,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화려하게 립 서비스만 일삼으면서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지키지 않고 외식하는 나태한 종교인이 있다면, 그는 결국 불신자와 다름없는 가혹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눅12: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이 경고의 구절에 등장하는 ‘종’은 엄연히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스스로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있다고 자부했던 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고 없이 불시에 삶의 현장을 점검하러 오신 주님의 엄밀하신 눈에는 그가 결코 신실한 자가 아니고, 불신자와 다름없는 위선자로 평가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얄팍한 공로 의식이나 주관적 자만으로는 참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너무나 좁고 어렵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도우시면(눅18:27, possible with God) 능히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늘 은혜를 의지합시다!
첫댓글 초신자는 본문만 읽으셔도 되고요. 여력이 되시는 분들은 아래 추가 설명을 읽으세요. 즐거운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네,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8:16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구원 혹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수는 어린 아이 자체에 대해 진지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라는 주제로 관심을 확대시키고 게신 것이다. '이런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우톤'(* )은 '이런 종류의(이와 같은)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젖먹이가 엄마의 품을 의지하듯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자, 어린아이의 동심과 같이 깨끗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18:17
받들지 않는 - '받들다'로 번역된 동사 '데코마이'(* )는 '받아 들이다', '영접하다', '손에 쥐다', '인정하다', '공인하다'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마샬(Marshall)은 '받들다'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다'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쉴라터(Schlatter)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무런 이의 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인정하고 또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받들다라고 하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라고 하였다.
=====18:18
어떤 관원 -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마 19:20)으로, 그리고 마가는 다만 '한 사람'(막 10:17)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사람을 '관원'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관원'으로 해석된 헬라어 '아르콘'(* )은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정부 관리(authorities)일 수도 있고, 회당을 맡아보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산헤드린(Sanhedrin) 회원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배경을 '관원'이라는 말만으로 정확히 추정해 내기란 어려운 문제이다.
선한 선생님 -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선한'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오직 율법이며,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이 예수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지녔음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가 원하는 것을 예수께서 들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대문이다. 사실 이 관원이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요 3:2)이며 '생명의 떡'(요 6:48)이자 '생명수'(요 7:38)이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이 질문은 어떤 율법사의 질문이기도 했다(10:25). 이 말은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데 혹시나 자신이 모르고 빠뜨리고 있는 어떤 행위가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긴 질문이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그가 영생에 이르는 것이 다만 선행의 결과인 줄 착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아마 그는 정성을 다해 그 율법의 세부 규례들을 열심히 따랐으나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으며 이처럼 도덕적 행위나 율법을 철저히 행함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없었던 그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확실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으로 판단하고서 그 앞에 나아왔던 것이다. 여기서 '영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 )는 하나님의 생명 혹은 생명의 근원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 관원이 요구한 생명은 순간적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곧 죽음에 의해 차단이 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요 3:3-15에서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18:19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 이말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죄있는 자로 여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반문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어찌하여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칭호를 사용하느냐는 약간의 비난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Plummer). 아무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선의 기준을 훨씬 높이심. 이 관원이 예수를 '선하다'고 부르며 접근한 데에는 자신의 선행에 대한 자신감이 은연중에 표출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의 기준은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참된 선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셨다(대상 16:34;대하 5:13;시 106:1;118:1,29). (2)당신의 신성을 증거하고자 하심. 이 관원이 예수를 신적 권능을 소유한 탁월한 랍비로 여긴 것에 대해 예수는 은근히 비난하는 투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는 탁월한 랍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8:20
계명을 아나니 - '알다'의 뜻으로 번역된 동사 '오이다'(* )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지키다', '따르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그것들을 지키라고 하는 권고가
된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조건으로 제일 먼저 율법 준수를 거론하셨는데 이는 율법 준수에 대해 내심으로 자신 만만해하는 이 관원의 허물을 벗기기 위해 정면으로 대응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율법의 완수자가 되지 못하며 다만 '율법으로 죄를 깨달을 수 있을'(롬 3:20:갈 3:24)뿐이다. 이 사실은 마 5:17-48에 언급된, 율법 준수에 관한 새롭고도 차원 높은 예수의 교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관원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문자적이고 피상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공경하라 하였느니라 - 여기서 거론된 계명은 제5계명부터 제9계명까지 언급되었다(롬 13:9;약 2:11). 십계명에 있어서 전반부 곧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 규정이라고 한다면 5계명부터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문제 제기의 형식으로 여기 인용된 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즉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계명인 바,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주력할 뿐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는 무관심한 당시 종교인들의 냉혈성을 지적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것이다(요일 4:20). 사실 당시 대다수 종교 지도자들의 대신(對神) 관계 또한 거짓과 위선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18:21
어려서부터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바미츠바'(bar mitzvah)가 된 때부터 라고 해석하는데 '바미츠바'란 '율법의 아들'이란 뜻으로, 종교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유대 소년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아들들이 5,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것을 준수하게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구체적으로 '소년 시절부터'를 가리킨다.
다 지키었나이다 - 지킬 수만 있다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된다. 그러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데 인간의 어려움이 있다. 예수께서는 가장 쉽게 인간을 측정할 수 있는 계명을 몇가지 인용하셨다. 그 관원은 자신의 행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며 회심전의 바울처럼(빌 3:6) 율법을 다 지켰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다만 문자적으로만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관원은 자신의 율법 준수의 허점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러한 율법 준수로도 영생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허감을 느끼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18:22
한 가지 부족한 것 - '헨 소이 레이페이'(* )의 문자적인 뜻은 '네게 한 가지 남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관원의 생각을 그의 재산 문제로 돌리게 함으로써, 이제 열번째 계명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바울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관원의 경우 마지막 계명 하나를 어김으로써 첫번째 계명과 두번째 계명들을 어긴 결과가 된 것이다. 네게 있는 것을...나눠 주라 - 자신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명령은 그 관원의 자만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에 있어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다. 그는 기껏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마치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인 양 자부했는지 모르나, 예수는 이웃을 위한 전폭적이고도 적극적인 헌신을 명하셨다. 특히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던 관계로 이 말씀은 너무도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인간이 마음속에 있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다 버릴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또한 본문의 이 명령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14:33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관원의 경우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데 이는 모든 성도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적 원리라기보다는 예수께서 그 관원으로 하여금 그의 탐심을 완전히 없애도록 하려는 특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Liefeld). 결국 이 말씀은 단순한 청빈(淸貧)의 명령이 아니라, 적극적인 이웃 사랑에 대한 요구였다(12:33).
나를 좇으라 - 영생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관원이 자기의 모든 재물을 풀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실하게 예수를 좇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부족한 것이 된다. 예수를 좇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어 그 가르침을 준수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18:23
심히 근심하더라 - 이 관원의 심각한 갈등을 통해 우리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안락한 삶을 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을 명하신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진정한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거쳐야 할 단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관원의 교만하고 안일한 내면세계를 꿰뚫어 보신 예수의 영적 통찰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관원이 진정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깨닫고 예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간구했다면, 이렇듯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도전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관원의 마음속에 일어난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은 그의 마음이 영생에 대한 욕망과 세속적인 탐욕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24
어떻게 어려운지(* , 포스 뒤스콜로스) - 이 말은 '얼마나 어려운지'가 보다 정확한 의미이다. 이는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며 나아가 그일이 본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성경은 부자가 영생을 얻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부자가 영생을 얻기 힘든 이유는 (1)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함으로(시 52:1-6;잠 18:11;딤전 6:17), (2)부의축적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을 압제함으로(잠 18:23;렘 22:13-19;딤전 6:17-19;요일 3:17), (3)치부하고자 하는 탐심 때문에(12:15-21;16:13-31)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재물뿐만이 아니라 천하 만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관리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그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18: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 흔히 랍비들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본절에서 '낙타'와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예수께서 의도하신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다만 어떤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옆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기에 알맞은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작은 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은 문은 바늘귀 문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표현은, 약대가 이 작은 문을 억지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에서 생긴 것이라 한다. 또 하나는 '약대'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카멜로스'(* )인데 발음이 이와 비슷하게 들리는 '카밀로스'(* )란 단어는 선박용 밧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밧줄'을 바늘귀에 꿰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쉽다는 비유로 이해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의도하는 바는 부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이 소유하여 즐기는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마 19:23;막 10:23).
=====18:26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여기서 '구원받다'는 말은 '영생을 얻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은 '그렇다면 구원을 얻기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도 '그토록 어렵다면 어느 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If it that hard, how can anyone be saved?)라고 옮겼다. 예수와 부자 관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개념상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욥 1:10),
당시 종교적 관행상으로 볼때 이 관원의 행실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한 듯이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18:27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이는 부자 관원과 나누신 대화의 결론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관원에게 예수께서 십계명 중 일부를 제시하신 것은 사실상 그 계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고백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령 율법의 한 부분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을 범하고 마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은 '다 지켰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따라서 예수는 관원이 부자이고 그의 마음이 물욕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알고 허를 찌르는 요구를 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두번째 요구 말씀도 실천을 요청하신 것이라고 보다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이 관원이 설령 예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였다고 해도 그 행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네, 잘 읽고 참고합니다.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1:28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 예수는 여인의 찬사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곧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되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Lenski, Tyndale). 그러니까 '오히려'(* , 메눈)는 여인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
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모친과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말씀과(8:21) 동일 선상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신실성의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는'(* , 퓔라쏜테스)은 '파수하다', '준수하다'는 의미의 '퓔라쏘'(* )의 현재 분사형으로 복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임무로 아는 사람임을 뜻한다.
네, 칭의 믿음의 결과는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2:45
더디 오리라 - 이 말은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 )에서 파생된 말로 '시간이 오래 걸리다', '지체하다'의 뜻으로, 주의 재림 즉 종말론적 절정에 이르기까지의 공백 기간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마 25:5). 노비를 때리며...
취하게 되면 - 이것은 그 종이 청지기의 직분을 오해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매우 불성실함을 말해준다. 폭력, 무절제, 방탕스러움 등은 그가 청지기로서의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적나라(赤裸裸)한 모습이다.
=====12:46
엄히 때리고 - (* ,디코토메세이)1는 '두 부분으로'를 뜻하는 '디카(* )와 '자르다'는 뜻인 '템노'(* )의 합성어로서 '토막으로 자르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말은 구약에서 재물을 토막내는데 사용하기도 하며(출29:17), 아주 참혹한 처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Apocalypse of Baruch). 그러나 여기서는 뒤에 이어지는 구절로 보아(47, 48절) 죽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매우 준엄한 형벌을 내린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맡겨진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을 때 내려지는 이 형벌은 잘 했을 때
받는 축복과(44절)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심판의 공정성은 불시점검에 있을 것 같습니다 😂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0:17
한 사람 - 그는 마태에 의하면 부자였고 또 청년이었으며 (마19:22) 누가에 의하면 관원 이었다. (눅18:18). 중앙에 있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지 지방의 관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느편이든 나이는 30세가 지났을 것이다. 아마30세가 겨우지난 청년 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집에서 (10절)나와길에 나가실때에 그가 달려와 생의 도를 물었다 . 부자요. 관원이요. 또 청년인 그가 현세를 살기 위하여는 최고의 조건들에 만족하지 않고 영생의 도를 물은 것은 장한 일이었다.
달려와서 꿇어앉아 - 본서에만 보이는 상세한 묘사다. 달려온데 그의 구도의 열심을 볼수 있고 꿇어앉은데 그의 겸손을 엿볼 수 있다. 실로 그는 여러 면으로 좋은 점들을 갖추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부족하여 영생의 길에서 탈락된 것이었다(21절)
선한 선생님이여 - 독특한 칭호로 랍비에게도 부른 적이 없다. 마태에는 선한 이 다음어귀에 붙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로 되어 있다. 두 책을 종합하면 그의 의도를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행하여야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 묻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질문에 율법주의적 근본 과오가 들어났다 . 구원은 무엇을 행하는데 (to do)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같이 되는데(to be)있기 때문이다.
영생 - 본서에는 이절과 30절에 두 번 나타나고 마태에 3회 누가에 3회만 보이나 요한복음에는 17회나 사용된다.
=====10:18
하나님의 한분이외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 여기 명사는 선한 이로다(마가. 누가)(선한 일으로도(마태) 번역할 수 있다. 여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선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유니테리안의주장처럼)그 부자청년의 구도적 자세의 과오를 고치시려는 것이었다 . 첫째는 그를 인간적 선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선으로 전환 시키려는 뜻이다. 그는 예수를 인간적 의미에서 선한 선생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 . 인간의 선은 진보적이고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인 것이다. 둘째는 율법적 선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돌이키시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율법 외에 선한 것이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이런 관념에서 그를 깨우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으로 이끄시는 말씀일 것이다.
=====10:19
살인 하지 말라. . .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제5. 6. 7. 8. 9. 계명. 즉 둘째 돌비의 계명들로 인간에 관한 것이다. 마태에는 결론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으로 맺는다. 본서에는 제10계명 대신 속여 취하지 말라 를 첨가하고 있다. 제10계를 반영 하면서도 위의 계명들의 결론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서는 다같이 제5계를 마지막에 둔다. 이 청년이 특히 이계명에 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Bengbl)그리고 여기 인륜에 관한 계명만을 제시하신 것은 첫째 돌비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계명보다 중하기 때문에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현하기 때문이다(Calvin)
=====10:20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 허위도 아니고 (다음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며 사랑하신 것으로보아), 예수의 진의를 파악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종래 탈락하여 물러간 것으로 보아). 그는 일반 유대인의 과정을 쫑아 6세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 또 준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범위에서 였고 율법의 참뜻을 안 것은 아니며 . 따라서 중심으로 준수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10:21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 주의 깊게 응시하시며 사랑하신
것이다. 역시 마가의 톡특한 묘사다. 예수께서는 진실된 구도자에 깊은 관심을 두시고 또 사랑 하시는 것이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누가에는 한 가지 남은 것 이라 하나 뜻은 같은 것이다. 전절의 나지키었다이다 의 대귀가 된다. 랍비들의 기록에 카니나(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네게 율법책을 가져와 거기 거룩한 것 중에서 내가 미쳐 실행치 못핸 것이 있나 보아달라 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자청년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율법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었겠으나 재물이 그에게는 무상이었고 영생의 길을 가로 막는 치명적 상처였다 . 그의 회의도 불안도 여기서 나왔고 , 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한 것도 재물 때문이었다. 이한가지 부족은 사람을 따라 같이 않을 것이다. 이한가지 죄를 발견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는 충고가 아니라 명령이었으며 , 강압적이었으나 이영혼의 성격을 따른 개인 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수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 명령을 같이 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하면서 온전한 자가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을 가난한자에게 주고도 온전치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명하신 것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것과 , 예수를 따를 것 두 가지였다. 중심문제는 후자였으나 전자는 그 조건 이었다. 전자를 실행하지 못하면 후자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묵상 본문과 비슷한 논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읽고 난 후 10줄 정도로 요약해 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 신앙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은 구원받지 못하는 대표적인 위험한 유형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확신에만 머물고 삶의 성화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결여되어 있다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애통하게 고백한 겸손한 세리야말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에 합당한 자입니다.
참된 구원의 믿음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안이함에 빠지지 않고 매 순간 영적 경각심을 가지며 행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부자 청년 관리는 어릴 적부터 십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며 구원의 첫 단추를 바르게 끼웠습니다.
신약의 은혜 시대라 할지라도 율법의 도덕적 의무가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며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자녀다운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 준수라는 기초적 점검을 시작으로 신앙 고백의 진실성을 판가름하는 심화 점검을 진행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은 채 입술로만 믿는다고 외식하는 종교인은 결국 불신자와 같은 가혹한 보응을 받게 됩니다.
인간의 공로나 자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약이 제게 도움울 주네요.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깊이 되돌아보게 됩니다.
외식함이 아닌, 애통해하는 세리와 같이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마음을 품겠습니다.
안이한 삶을 경계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힘써 지키며 살아가겠습니다.
귀한 묵상과 도전을 나누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감과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안의 자만을 내려놓고 애통하는 세리처럼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겸손히 구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단순히 듣는 데 그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기쁨으로 순종하며 행하게 하소서. Amen.
아멘!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18:9
자기를 의롭다고...멸시하는 - 직접적으로는 예수 당시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즉 당시 대다수 바리새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부장한 채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받았던 약자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과같이 독선적 아집에 사로잡힌 일반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사람들 중에는 양심이니 진리니 하는 것들을 아예 무시하고 육신의 정욕이 명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선악간 행위의 기준을 세워놓고 구도자적 삶을 지향하는 소위 종교성이 많은 이들도 있는 것이다(행 17:22).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폐단이 바로 종교적 독선(獨善)이다. 본절은 이들의 오류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1)자기 의(義)를 내세움. 이들이 내세우는 자기의(自己義)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스스로 의를 자랑할 수 업슨 죄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 덧입음으로써만 진정한 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롬 3:24).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객관적 열의에서라기 보다는 종교적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2)다른 사람을 멸시함. 자기 스스로 의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만하는 자는 그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공공연하게든 무의식적으로든 경멸하기 쉽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은 겸손하며 타인의 저급한 상황을 멸시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긴다.
=====18:10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곧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행 2:15;3:1;10:9). 성전은 동,서,남쪽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의 유대인의 뜰에서 기도를 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서 편리한 시간을 택해 성전에 올라가기도 했다. 바리새인...세리 -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뚜렷이 대조되는 신분은 극적(dramatic) 효과를 더해준다. 즉, 바리새인이 당시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대표하는 반면 세리는 당시 천시되던 소위 '죄인'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적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적 판단과 얼마나 판이한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8:11
서서 따로 기도하여 - 이 간단한 말 속에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이 뚜렷이 암시되고 있다. 첫째 그가 '서서'기도했다는 것은 성전에서 서 있는 자세로 기도하는 하나의 '습관'을 암시한다. 그가 드린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간절한 영혼의 기도가 아니라 세끼 밥을 먹듯이 습관에 매인 형식적 기도였으리라는 추측이 간다. 둘째 '따로'라는 말은 바라새주의의 발단은 이교적인 헬레니즘 문화의 침해에 반대하여 경건성을 유지하여 구별된 삶을 형성해 보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별 그 자체가 잘못된 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본래의 그 선한 정신이 스스로만 의롭게 여기는 배타적 독선주의로 탈바꿈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 23장과 막 7장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 문학에서 두루 발견된다. 누가의 경우도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들의 터무니없는 적대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5:17;6:2,7;7:39;11:37-54;15:2;16:14등). 그는 외형적 율법적 죄를 범하지 않는데 대해 감사하는 자랑의 기도를 드렸으며 더욱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율법 준수의 자랑까지도 덧붙였다(민 18:21;신 14:11,23).
오늘날에도 이 같은 바리새적 교인이나 지도자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 교회의 권위, 재력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의로운 체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들의 양심,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그들의 불의(不義)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렘 11:20;23:24;암 9:3).
토색...감사하나이다 - 그는 토색(討索),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즉 자신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깨끗함 뿐임을 자랑했다. 유대법에 의하면 금식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은총을 원하는 자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됴일에도 금식을 행했으며,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때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간 옷을 입고 큰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였다(마 6:16-18 주석 참조). 이처럼 자신들의 의(義)를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의롭지 못한 자들이며 예수와 무관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5:32).
=====18:12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 본절은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문장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역시 앞절의 '당신에게 감사하나이다'라는 문구에 종속되어 있다. 그의 모든 기도문에 나오는 동사는 '일인칭 단수형'으로, 그의 기도가 자기 의를 내세우는 독선적 아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넌지시 시사한다. 한편 십일조에 관한 성경 최초의 언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전리품 중 1/10을 준 데서 발견된다(창 14:20). 그후 야곱도 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창 28:22). 하나님은 이렇듯 유래가 깊은 십일조 제도를 출애굽 당시에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모세의 율법 가운데 십일조에 관한 세부적인 기록은 레 27:30-33;신 12:5-18등에 나온다. 이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두어들이는 모든 산물 즉 곡물, 과일, 가축 등에서 1/10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유대교의 랍비들은 율법의 문자적 적용에 더욱 철저하기 위해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바치는 규정을 만들었다(마 23:23). 본절의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철저히 지킨 것을 내세우며 하나님께 보답을 요구하는 듯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십일조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자기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고백하는 행위임(마 25:14-30)을 알지 못한 태도이다. 요컨대,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조건부적 뇌물이 아니라 택함받은 자가 마땅히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는 신앙의 표시이다(욥 1:21;롬 11:36).
=====18:13
멀리 서서 - 바리새파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리 아마도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하였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정상적인 여러 자세 중 하나였다(시 123:1;막 6:41;7:34;요 11:41;17:1). 이 세리는 기도의 정상 자세 조차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죄인 중에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슴을 치며 - 이 표현은 정확히 말하자면 죄의 근원지로서의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말이다(23:48;마 11:19). 또한 헬라어 동사 '에튀프테'(* )는 '때리다', '치다'의 뜻인 '튀프토'(* )의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치는, 반복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그가 세리라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범해온 죄 많은 생활들을 청산할 뿐 아니라
그동안 그가 사람들로부터 착복한 금액에다 율법에 명시된 배상액까지 부가하여 갚고자 하는 굳은 결의가 이 표현 속에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출 22:1-15).
불쌍히 여기옵소서(* , 힐라스데티) - 이는 '진정하옵소서', '분노하지 마옵소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동시에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세리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를 가리켜 '많은 죄인들 중의 한 명'이라고 칭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리는 그의 겸손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가 더 의롭다는 절대적인 판결을 내리셨는데(14절) 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의 참된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준다(요일 1:8,9). 한편 세리의 기도는 바로 시 51편의 서두의 인용이기도 하다. 세리의 기도의 호소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둔 것이고 이것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
=====18:14
의롭다 하심을 받고(* , 데디카이오메노스)
- '의롭게 하다'는 뜻의 이 단어는 여기서 완료 수동태 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이 세리를 주권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고 확정하셨음을 암시한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높아지리라 - 인간의 높아지고 낮아짐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 유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롬 9:21).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이웃을 존귀히 여기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높이는 길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에 따라 역사하신다고 생각했다. 한편 본문의 세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믿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라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소망을 가졌다.
상세한 설명 잘 읽어 보겠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행해야 구원 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열심히 그 길에 매진하다 보면 스스로 의롭다 자만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길을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자력으로나 열심히 행하여서 받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늘나라를 받드는 것, 세리처럼 죄인임을 깨닫고 의를 간절히 구하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에서 자신을 지혜롭고 겸손하게 묶지 않으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이 묵상은 신앙생활을 나름 열심히,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고 자평하는 목회자와 교회 리더들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우리 모두 경성합시다. 감사합니다.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말씀 속에서 ‘믿음’의 진정한 의미와 제자도의 무게를 깊이 돌아보게 됩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고 세리처럼 겸손히 은혜만을 구하며, 매 순간 영적 경각심을 놓지 않겠습니다.
입술의 고백을 넘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신실한 자녀로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