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찡그렸다. 낡은 알전구 스탠드를 정면을 향해 비췄기 때문이다. 표정을 정리한 후 눈을 뜨니 더욱 놀랄 일이 벌어졌다. 얼굴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찬찬히 뜯어보고 있는 것이다.
“자 이쪽으로 돌려보고.”
“또 이쪽.”
“위로, 아래로.”
납품된 상품을 검열 하듯 안면을 자세히 살피더니 손으로 머리카락을 젖혀 이마를 들추어 본다.
“이마도 반듯하고 코도 중심에 잘 자리 잡았고 귀도 좋다. 품위 유지하고 살 정도는 되겠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눈에 가득 웃음을 달았다.
“성격은 외유내강이네, 눈 꼬리가 아래로 쳐저 온화해 보여도 턱선이 강한 게 보통 성격은 아니다. 고집도 세고 아니다 싶으면 단칼에 자른다.”
“어머 어쩜, 언니야 딱 맞다. 맞아”
함께 온 직장 후배가 맞장구를 쳐주자 더욱 신이 난 관상쟁이 아주머니는 선심을 쓰듯 한마디 툭 던졌다.
“부모에게 물려받을 게 있는 상이다.”
맞을 수도 있겠다 싶던 모든 게 깨지는 순간이다. 부모님에게선 자갈밭 한 뙈기도 물려받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고개를 내저으며 실망의 눈길을 보내는 내게 그녀는 우물우물 기다려 보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문을 나서며 관상을 잘 본다더니 속았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뭐가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에 돌아올 만한 것을 셈해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해도 별달리 생각나는 게 없다. 토지나 집문서는 고사하고 진품명품에 나오는 낡은 병풍이나 오래된 서책, 하다못해 막사발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 복에 유산은 무슨 유산. 양가에 보태 드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부모에게 무얼 바라고 산 것도 아닌데 괜히 그 말을 듣는 순간 욕심이 발동하는 것이 난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보다.
집에 오니 퇴근을 한 남편이 베란다에 둔 재봉틀을 들고나온다. 딸이 청바지 단을 질질 끌며 다니는 걸 두고 보지 못해서 직접 줄이겠다는 심사다.
반질반질 윤나는 가무잡잡한 몸체 아래에 북을 끼운다. 실 걸이에 노란색 굵은 실패 하나를 얹고 가는 실을 쭉쭉 뽑아 순서에 맞게 이리저리 건다. 언제나 내가 헷갈려하는 어려운 부분이 실을 순서에 맞게 거는 것인데 잊지 않고 잘도 한다. 다음은 온 신경을 집중하여야 한다. 바로 바늘구멍에 실을 꿰어야 하기 때문이다. 침을 묻혀 살짝 엄지와 검지로 비빈 후 과녁을 향해 밀어 넣는다. 손잡이를 돌려 밑 실을 뽑아 올린 후 접은 단을 밀어 넣더니 발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르륵 다르륵 달리는 소리가 반듯한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인 양 매끄럽다.
순간, 그래 나도 하나는 있구나 하고 픽 하니 웃음이 났다. 영문도 모르는 남편은 나를 힐끔 쳐다본다. 생전에 시어머님은 아버님이 경찰공무원이던 괜찮은 시절 쌀 일곱 가마니를 주고 재봉틀을 샀다고 한다. 어머님은 그 얘기를 자랑삼아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당직 날 관서에 불이 나 파면당하시기 전까지가 시어머니의 짧은 봄날이셨다. 그 후 농가 일이 서툰 아버님을 대신해 어머니는 재봉틀을 쉼 없이 돌려야 했던것이다. 남자 형제가 없기 때문인지 남녀 일을 구별하지 않고 다 잘해 내었다. 그 덕을 지금 내가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모 복지재단에서 책 두 권을 보내왔다. 그중 한 권은 「위대한 유산」이란 제목인데 사회 저명인사들이 말하는 부모에게 받은 유산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에 대한 글이다. 공직 생활을 하고 있는 고건 전 국무총리의 부친은 ‘누구 사람이란 낙인찍히지 마라’ ‘남의 돈 받지 마라’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고 강조하셨다 한다. 이쪽이나 저쪽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항상 중용을 잃지 말고 평형을 잡고 살라는 가르침은 그분의 생활 지침이 된 듯하다. 또 화가이자 갤러리 ‘숲’의 대표인 임종열 씨의 경우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선친은 ‘항상 모든 일을 할 때 매듭을 풀 사람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한다. 보자기를 묶을 때도 방문을 여닫을 때도 풀 사람과 안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하라 하셨다 하니 나 보다는 주변을 챙겨 생각하라는 그 말씀에 참으로 공감이 간다. 디스크 수술이 잘못되어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주변을 외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선친의 그 가르침 때문이라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친정어머니는 한 번도 말씀은 않았지만 내 집에 온 사람은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밥솥에 밥이 있어도 항상 새 밥을 지어서 따뜻한 국과 함께 대접했다. 밥을 짓는 일은 집을 짓듯 시를 짓듯 눈물을 짓듯 마음이 담겨야 한다. 어머니가 말하고자 한 것은 결국 사람을 섬기라는 뜻임을 뒤늦게 헤아린다.
재봉틀 소리가 멈춘다. 쪽가위로 실밥을 정리한 남편은 아이를 불러 복숭아씨 바로 밑까지 잘록 잘려진 바지를 입어보라고 한다. 딸애는 땡칠이가 입는 바지 같다고 재봉틀이 멈추는 듯 툴툴댄다. 단정함을 강조하는 남편과 개성을 주장하는 딸아이의 실랑이는 어설픈 재봉틀처럼 멈추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다 멈춘다. 돌아가는 재봉틀이 서툴게 수놓은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걸 딸 아이는 언제쯤 알게 될까? 언젠가는 이 날도 소중한 그리움이 될 것이다. 면면히 이어지는 것은 진솔한 삶이다. 가르치지 않아도 전해지는 생활 속 마음의 가르침은 통장의 잔고나 등기필증의 개수로 대신할 수는 없다.
어느 가을날, 내게 툭 던져진 관상쟁이의 말은 곰곰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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