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실재론, 반실재론, 인식론, 존재론
아래의 인용문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블로그 글 <<실재론, 인식론, 과학, 그리고 과학주의(Realism,
Epistemology, Science, and Scientism)>>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
[...]
"실재론", "반실재론",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이라는 술어들을 사용하여 가능한 네 가지 입장을 구별하자.
[...]
1. 실재론적 인식론(Realist Epistemology): 실재론적 인식론은 우리가 세계의 객체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
다는 입장인데,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것들 자체와 정확히 같을 것이다. 여기서 정신은, 세계의 객체
들로부터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그저 받은 다음에 충실하게 보고하는, 수동적인 세계 수용자로 취급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Anti-realist Epistemology): 반실재론적 입장은 훨씬 더 복잡하다. 여기서는 인식자가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입력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는데, 개념, 실천, 언어, 사회적 범주 등을 통해 입력을 조직
하여 인식자의 경험의 층위에서 이런 입력에 특정한 형식이나 구조를 부여한다. 여기서 나는, 블랙박스 모형이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실재론적 인식론 사이의 차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장 쉬운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론적 인식론은 수용된 자극을 기록만 할 뿐인 수동적인 수용자로 다루는 반면에,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세계로부터의 자극을 이후에 블랙박스의 구조(언어, 사회적 범주, 정신의 선험적 개념 등)에 의해 처리되는 입력
으로 여기는데, 블랙박스는 자체를 거치는 자극을 처리하여 그것과 다른 출력을 산출한다.
내가 보기에, 블랙박스 모형은 모든 반실재론적 입장에 공통적이다. 그것들이 다른 지점, 그것들이 논쟁를 벌이는
논점은 그 블랙박스가 어떤 처리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반실재론적 인식론은 당연히 인간중심적일 것인데, 지식에 관한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반실재론적 존재론(Anti-Realist ontology): 존재론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이 존재하며 어떤 동역학이 이런 존재자들을 지배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반실재론적 존재론은 존재자들의 존재―존재자들은 무엇인가―를 우리의 작은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시키는 존재론이다. 그 논제에 따르면,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데리다가 <<그래마톨로지>>에서
서술한 대로) 표명, 또는, 칸트가 서술한 대로, 현상―이라는 것이다. 반실재론적 존재론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존재는 두 가지 의미로 진술된다는 점을 유의하자. 한편으로,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된다.
그렇지만 출력은 입력 없이는 블랙박스에 의해 산출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입력은 어딘가에서 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블랙박스(여기서 블랙박스는 정신과 직관의 선험적 범주들, 디페랑스의 작용, 현존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에 대해 입력을 제공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한
유형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요약하면, 반실재론적 존재론들은 헤겔적 또는 버컬리적 경로를 택하지 않는다면
존재를 일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4. 실재론적 존재론(Realist ontology): 반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존재란 (우리에 대한) 현상이다"라고 주장
하는 반면에, 실재론적 존재자들은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자들이(예를 들면, 화폐) 있지만, 이것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창을 통해 나무를 바라볼 때] 나무가 창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
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들도 있으며, 우리는 존재가 의미하는 바의 특질들에 관해 매우 일반적이지만 유의미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인식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을 개략적으로 언급되었으니 이제 이런
입장들의 조합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아챌 것이다. 그런 입장들이 세 가지 있다.
1. 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상 실재론적 인식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반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대륙철학의 지배적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옹호하는 것은 세 번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실재론적 인식론을 소박하며 독단적인 입장이라고 거부한다. 우리가 사물들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나 학문들 내부의 학문분과적 경계들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자신들의 인식론적 탐구에서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현상을 조직하고, 지식을
생산하며, 기타 등등에 있어서 블랙박스에 의해 수행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의 블랙박스가 출력의 산출에 기여하는 바에 관한 이런 논쟁들을 가져야 하고, 반실재론적 인식론의
전통이 발견한 중요한 결과들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과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갈라지는 지점은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에 관한
의문들이 존재들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충분하다라는 논제에 대해서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저쪽에 있는 객체들을 어떻게 아는지에 관한 의문들을 넘어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 관한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문이 여전히 있다. 이 의문은, 로이 바스카를 따르면,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에 의해 철저히 규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객체지향 존재론자는 우리 지식의
한계, 무엇이든 어떤 특수한 유형의 객체를 알기 위해서는 탐구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 기타 등등을 쉽게 인정
하지만, 탐구에서 그리고 탐구를 통해서 발견되는 차이들이 출력의 영역에만 속하는다는 논제는 거부한다.
오히려 실재론적 존재론자는 이런 차이들이 출력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런 차이들을 산출하는, 정신으로
부터 독립적인 입력, 즉 세계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
"[...]
실재계(the real)의 차원은 존재자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존재로서 환원불가능하게 현존하는 방식일 것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박쥐가 매 같은 다른 존재자에 대한 모습
이나 또는 우리가 과학적 분류학으로 분류하는 식으로 환원
될 수 없는 방식을 특징지을 것이다.
상상계(the imaginary)는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을 파악하거나 지각하거나 또는 그것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은 하만(Harman)이 "감각적 객체(sensual object)"(실재적 객체의 내부에서만 현존하는 객쳬)
라고 부르는 것들의 영역일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박쥐는 벌레를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초음파 신호, 즉 박쥐에게
특수한 의미를 갖는 초음파 파동으로서 만난다.
상상계의 영역은 보고스트(Bogost)가 "에일리언 현상학(alien phenomenology)"이라고 부른 것,
야콥 폰 우엑스퀼(Jacob von Uexkull)이 "동물행동학(ethology)"라고 부른 것,
그리고 내가 "선험적 경험론(transcendental empricism)"이라고 부른 것의 영역이다.
에일리언 현상학은 다른 존재자들 또는 모턴(Morton)이 "기묘한 낯선 것(strange strangers)"이라고
부른 것들의 현상학적 세계들을 탐구한다.
전통적인 현상학과는 대조적으로, 에일리언 현상학은 다른 존재자들에 관한 현상학이 아니라
이런 존재자들이 자체의 주변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에 관한 현상학이다.
그것은 사물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그것 모두가 포함되지만―에 관한 현상학이 아니라
세계가 이런 존재자들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관한 현상학이다.
그것은 루만(Luhmann), 마투라나(Maturana), 그리고 바렐라(Varela)가 "이차 관찰(second-order
observation)"―한 사물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그 존재자가 어떻게 관찰하는지에 대한 관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에일리언 현상학은 지금까지 문제되지 않았던,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방식의 총체화
경향을 중지시킨다.
아타리(Atari) 게임기, 갯가재, 박쥐, 바위, 나무, 남자, 여자, 다양한
민족과 경제적 계층 출신의 사람들, 매체 체계, 기업, 군대 등은 각각
세계를 만나는 방식이 있다.
소여는 관련된 존재자에 대해 각기 다르다. [...]
위 그림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꽃 들판의 모습을 묘사하는 반면에,
아래 그림은 파리에게 주어질 꽃 들판의 모습을 묘사한다.
우리는 적절한 조직이 없기 때문에 파리가 경험하는 것을 결코 알 수는
없지만, [...] 파리 행동의 관찰 등을 통해 파리에게 세계가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관한 모든 종류의 것들을 알아낼 수 있다.
에일리언 현상학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라캉은 "모든 소통은 잘못된 소통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는 부분적인 원인은 자신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을 여타의 존재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총체화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한 여성의 남자친구가 자신의 여자친구의 어린 아이에게 소리치며 때리는데, 그는 그 아이가 이런
행위들의 훈육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부유한 보수주의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가난한 사람들과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게으르"며 "품행이
나쁘다"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열심히 일하"고 바른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정치적 활동가들은, [...] 최고경영자는 더 큰 규모의 존재자인 기업의 한 기관일 뿐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최고경영자가 기업 활동을 관장하는 존재자로 취급하면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우리 세상에 거주하는 이런 치명적인 동물들을 다루기 위한
잘못된 종류의 전략들이 만들어진다. [...]
에일리언 현상학은 [...] 기업 같은 적대적인 기묘한 낯선 것들과 더 잘 만나고 그것들에 대해 더
잘 반응하기 위한 일련의 기법들을 제공한다. [...] 현상학이 아니라 현상학들이 존재한다.
상징계(the symbolic)의 영역은 생태적인 것들의 영역이 된다.
생태적인 것은 물러서 있거나 조작적으로 폐쇄된 존재자들 사이의 구조적 결합들의 장이다.
[...] 유클리드적 또는 뉴턴적 공간에서 두 존재자―극락조와 뱀―는 동일한 공간에 거주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매우 다른 영토들에서 현존하고 있다.
[...] 이 두 영토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지만, 그 신호들은 각 영토에서 전적으로 다른 의미들을
산출한다. 나는 야생 유인원에게 미소―내 영토에서는 친근함의 기호―를 품고 다가간다.
유인원의 영토에서 미소와 시선 맞추기는 공격성의 기호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것을 "구조적 결합(structural coupling)"이라고 불렀다
[...]. 마투라나와 바렐라에게, 기계는 조작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반면에 구조적으로는 개방되어
있다. 구조적 개방성은 기계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조작적 폐쇄성은 기계가 자체의 내부적 조직에 따라 이 자극을 통합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구조적 결합은 두 체계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결과적으로 공진화하거나 발달하는 관계인데,
여기서 자극은 두 존재자 각각의 내부 세계에서 매우 다른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다.
예를 들면,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에서 구조적 결합의 관계를
탁월하게 분석했다. 노동자는 C-M-C의 논리 또는 과정을 따르는 반면에, 자본가는 M-C-M의
논리를 따른다.
노동자의 C-M-C 논리에서, 노동자는 상품(C), 즉 자신의 노동을 팔고, 그 댓가로 화폐 또는
임금(M)을 받고, 그래서 음식, 집, 교통 수단 같은 상품(C)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자본가의 논리에서는 화폐가 순환되어(M), 노동 상품을 구매하고(C), 그래서 더 많은 화폐가 축적
될 수 있을 것이다(M).
두 체계가 서로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이 두 논리가 전적
으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만나는 방식과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어긋나는지―자본가는 노동을
구매할 때 비용을 절감하려고 항상 노력하는 반면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팔 때 임금과 수당을
올리려고 항상 노력할 것이다―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들은 이질적인 두 영토, 이질적인 두 우주라고 인식하면서, 마르크스는 이 생태계에는 조화가
없으며―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그런 생태계와 관련된 신자유주의적 환상의 기반을
약화시킨다―오히려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었다. [...]"
에일리언 현상학, 관념론, 그리고 유물론
"[...] 관념론(idealism)은 유물론(materialism)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다른 의미들을 갖는 대단히
다의적인 술어들 가운데 하나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관념론"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1)비역사적이고, 2)실천과 노동 생산이라기
보다 오히려 지성의 견지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입장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헤겔을 물구나무 세울" 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사회적 세계는 역사
전체에 걸쳐 전개되고 있는 정신의 원리들이 아니라 생산양식들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플라톤 같은 인물을 "관념론자"라고 비판할 때, 그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플라톤이 다양한
가치와 생활 방식들이 생산 조건으로부터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관해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형상
들을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SR)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이 관념론을 비판할 때는 그들이 칸트
이후의 대부분의 철학의 기본적 전제라고 믿고 있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
에 더 가까운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칸트는 "정신이 객체들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객체들이 정신에 따른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달리 말해서, 칸트는 저쪽에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와 표상들 사이에 대응 관계가 있다는 테제를
거부하는 듯 보인다.
오히려,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상인 모든 존재자들은 우리의 정신이 우리 주변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결과로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에 한정된다.
그 결과, 칸트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세계가 어떤 모습일 것인지에 대해 언제
까지나 회의적이어야 한다.
칸트는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지만, 그는 이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세계가 도대체 개별적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또는 개별적 항들이 전혀 없는 순수한 흐름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달리 말해서, 그 관념은 사물들
자체가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시사하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칸트가 자유와 결정론에 관련된 세번째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보자.
칸트는 원인 없는 원인이 있다는 테제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테제 둘 다가 참이라고 주장
한다. 이 명제들은 서로 매우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는 듯 보이는데 그는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글쎄, 칸트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을 뿐이라는 테제는 현상계, 즉 우리에게 경험되는
대로의 세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반면에, 우리의 정신들은 감각의 다양체에 인과성이라는 범주를
적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범주들의 정당한 적용은 오직 경험의 현상계에만 들어맞고, 그것 자체로 우리의 경험과
별도로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에는 정당하게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
되지 않는 원인 없는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달리 말해서, 존재자들에 대한 우리의 주장들은 우리의 인지적 구조화의 결과로서 그것들이 우리
에게 나타나는 모습에 한정된다.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또한 이것이 칸트가 신앙에 대한 여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사변적 실재론의 모든 변양태들은, 우리는 사물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테제을 거부하지만, 상이한 방식들로 그렇게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OOO)은 실재론과 관념론이 약간
혼합된 잡종이다.
어떤 존재자도 그것이 우리의 지각, 인지, 언어, 담론 등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테제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실재론적이다.
존재자들은 문화와 사유로 환원될 수 없는 자체의 자율적인 현존을 갖는다.
그렇지만, 객체지향 존재론이 어떤 존재자도 다른 존재자를 그것 자체로 있는 그대로 직접 만나는
일은 결코 없으며, 오히려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을 처리하는 나름의 구조와 방식에 따라서
다른 존재자들을 "왜곡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칸트와 함께 관념론적이다.
차이는, 칸트의 관념론이 인간-세계 관계에서 특별한 것을 포착하고 우리가 결코 다른 존재자들에
직접 접근할 수 없도록 인간들이 다른 존재자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이해하는 반면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런 현상을 모든 존재자들의 경우에 참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세계를 왜곡하거나 처리하는 박쥐의 방식, 박테리아의 방식, 바위의 방식, 태양의
방식 등이 있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존재자들에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경험하는 이런 다른 방식들을 결코 경험할 수는 없지만, 암시와 은유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존재자들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관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존재자들이 세계를 왜곡하거나 재구성하는 방식에 관한 이런 분석을 "이차 관찰(second-
order observation)"이라고 부른다.
이차 관찰에서는 존재자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가 세계를 어떻게 관찰하는지
관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관찰자가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같은 "장애가 있는" 사람을 경험하기보다는
그 대신에 템플 그랜딘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관찰하려고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템플 그랜딘의 연구가 독특한 까닭은, 전통적인 농장주들이 그러했을 것처럼 우리들
에게 소들이 어떠한지에 스스로를 한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는 소들에게 다가가는 더 "소다운"
(인간다운이 아닌) 방식들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소들이 세계를 어떻게 관찰하는지 또는 경험하는
지를 관찰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언 보고스트는 이것을 "에일리언 현상학(alien phenomenology)"이라고 불렀던 반면에
야콥 폰 우엑스퀼은 그것을 "비교행동학"이라고 불렀다.
현상학은 우리가 겪는 경험을 서술하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에일리언 현상학, 이차 관찰(관찰자가
어떻게 관찰하는지 관찰하기), 그리고 비교행동학은 다른 존재자들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얻게 되는 것은 일종의 다원론적 범칸트주의이다. 칸트는 선험적인 인간적 주체와
그 주체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 특권을 부여하는 반면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칸트적 테제를 모든
존재자들에게 일반화하여 그것들이 모두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와 만난다고 주장하며
이런 다른 현상학들에 관한 탐구를 향한 길을 뚫는다(그리고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 점에 있어서
유일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객체지향 존재론은 탈인간중심적이다[...]. 이런 정향의 이점들은 명백하다[...].
첫째, 언어적 전환과 사회 구성주의 같은 20세기를 지배한 상관주의적 철학들에 대해 신랄하게
반응했던 객체지향 철학자들도 있지만,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것들의 발견물들을 전적으로 통합
하고도 남는 이론적 자원이 있다.
우리는 이런 비판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견해로는 그것들을 지양한다.
둘째, 정신들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을 일반화하여 인류 전체에 확장한다는 점에서 칸트 철학과
현상학 같은 틀들은 인류학적 보편자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성학, 퀴어 이론, 장애 연구, 민족
지학, 인종 이론, 후기식민주의 이론, 그리고 연장된 마음 가설 같은 것들이 밝혔듯이, 이런 주장
들은 논란의 여지가 대단히 많다.
에일리언 현상학은 이런 종류들의 부당한 일반화를 벗어나는 수단을 제공하고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한 더 큰 감수성을 계발한다.
세째, 에일리언 현상학은 우리의 프톨레마이오스주의를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고, 다른 동물들.
기후, 생태계, 기술 등 같은 다른 존재자들의 세계들을 개방하며, 그것들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
하거나 만나는지 시사한다. 내가 보기에, 진정한 적은 관념론이나 상관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
예외주의 또는 인류중심주의이다.
이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실재론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내가 인식론적 실재론이라고
불렀던 것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존재론적 실재론이 있다.
인식론적 실재론은 아무튼 우리가 세계에 직접 접근할 수 있으며 우리의 표상들이 세계 속의 다른
존재자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테제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이 어떤 존재자도 다른 존재자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한, 당연히 객체
지향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실재론자일 수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브라시에(Brassier) 같은 사변적 실재론 이론가의 과학주의와 객체지향 존재론 사이
에 논쟁거리가 있다.
브라시에는 인식론적 실재론자인 반면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인식론적으로 반실재론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존재론적 실재론은 어떤 존재자도 그것에 대한 다른 존재자의 표상으로 환원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의 테제는, 존재자는 그것이 표상되고, 지각되고, 이야기
되고, 관련되고, 맥락화되는 방식을 넘어서고 벗어나는 것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관찰자를 벗어나는 것이 항상 있다.
여기서 다시 객체지향 존재론의 칸트적 유산에 해당하는 것이 보인다.
물자체는 현상계로 결코 환원될 수 없고 현상에는 소여와 현상화를 벗어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항상 있다고 칸트가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객체지향 존재론은 존재자는 그것이
파악되거나 다른 존재자와 관련되는 방식을 벗어나는 것이 항상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객체지향 존재론이 존재론적 시각주의―존재자들은 다른 존재자들이 지각하는 모습
이라는 테제―와 맹렬히 싸웠다면, 이것은 우리가 존재자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다고 하는 근거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정반대이다―그런 태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존재자도 다른 존재자들이 파악하거나 접근하는 방식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근거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런 점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지배와 표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겸손을 지향한다. 모턴이 서술
했듯이, 모든 존재자는 다른 모든 존재자들에게 기묘한 낯선 것이다. 우리는 사물들이 다른 존재
자들에게 어떤 모습일 것인지에 관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들에 대한 더 동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들의 심층을 철저히 캘 수도 없고, 혼자 힘으로
이런 경험을 겪을 수도 없을 것이다.
객체지향 존재론 내부에서 유물론에 관한 쟁점은 성가시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내 자신의 틀―"기계지향 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 MOO)―속에서 나는 엄격한 유물론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유물론은 물질적 존재자들, "재료"로 만들어진 존재자
들만이 존재한다는 테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존재자들은 다양한 규모의 층위들에서 존재하고(창발성), 역사, 생성, 그리고 물질적 관계의
흐름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두 존재자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려면 어떤 식으로 접촉해야 한다.
그 결과, 나는 가지성에 의해 규정되고 "역사" 또는 물질적 과정들의 외부에 있는 플라톤적 형상
같은 것들의 존재를 거부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object-oriented philosophy, OOP)은 비물질적 객체들이
존재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데, 그러므로 물질적 존재자들 너머 존재하는 보편자들의
존재를 단언하는 플라톤적 실재론에 호의적일 것이다."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번역: 김효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