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의 남원이야기20
(남원 석돈石墩)
남원석돈(南原石墩)이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하정동 189번지에 있는 당산으로 전북민속자료 제28호(1992년 6월 20일)로 지정됐으며 크기는 가로 10미터에 세로 3.5미터이다. 현재 남원우체국 내에 있는 돌로 쌓은 제단이다. 원래 돌로 쌓은 단 모양의 당산으로서 1986년 우체국을 신축할 때 일부 파괴되었으나 복원하여 지금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남원의 구지(舊誌)인 《용성지(龍城誌)》에 의하면 석돈은 성을 수호하는 당산신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북문을 지키는 당산이라 하였다. 가로 10미터, 세로 3.5미터 가량의 단인데, 기단석은 80×40센티미터 크기의 화강석을 사용하였고 중상부는 30×20센티미터의 직사각형 돌을 쌓았다. 지금은 우체국 건물 옆에 돌난간을 두르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옛날 용성관(龍城館) 후면, 지금의 남원역 관사 부근에 어마 어마하게 큰 돌무덤이 있어 이를 석돈이라 하였는데, 그 위에는 수풀이 무성하고 고목이 우거져 때로는 두견새가 날아와 깃들이고 철따라 두루미도 찾아오곤 하였다 한다. 그런데 시에서 여러 관공서를 신축할 때 이를 헐어 돌은 석재로 사용하고 흙은 골라 평지를 만들자, 이때부터 시세(市勢)가 위축되고 인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남원을 대표하는 당산으로 과거 전국 12당산 중 하나였다.
《남원지》(조성교)에도, 고로(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용성관(龍城館)의 후면에 옛날 어마어마하게 큰 돌무덤이 있어 이를 석돈(石墩)이라 하는데 석돈 위에는 기화요초(奇花瑤草)가 무성하고 고목(古木)이 우거져 때로는 두견새가 날아와 깃들이고, 철따라 두루미도 찾아오곤 하여 자못 이채를 띠웠다. 그 위치(位置)는 용성관 뒤라 하였으니 지금 남원역(南原驛) 관사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부근이다.
남원석돈이 용성관 뒤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잠깐 용성관의 위치와 용도에 대해 살펴보자.《남원지》에 따르면, 용성관은 옛날부터 있어온 객사(客舍)로서 본래 이태조대왕(李太祖大王)의 전패(殿牌)를 모시어 둔 곳이다. 이곳은 남원부사들의 이취임식과 관리들의 접대와 유숙이 행해졌던 곳이다. 용성관은 규모가 웅대하여 전국 객사중 손꼽히는 건물로, 광한루(廣寒樓), 관왕묘(關王廟)와 함께 남원의 고대건축물의 의 3걸이었다. 그러다 정유재란 때 병마사 이복남이 본관(용성관)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태조(太祖)의 전패(殿牌)마져 왜적(倭賊)에게 욕을 당할까 염려하여 불태웠다. 그러다가 광해군 12년(1620)에 부사 최여립(崔汝立)이 재건했으나 낙성(落成)후 화재로 전소(全燒)됐다. 숙종(肅宗)16년(1690)에 부사 정협(鄭悏)이 다시 완성했으나 6.25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 그동안 용성관이 빈터 남아 있다가 907년 4월 1일 용성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됐다. 즉 지금의 용성초교가 용성관 자리라는 얘기다.
《남원의 문화유산》(남원문화원)에서는, 남원우체국 내에 자리한 단모양의 당산으로, 화강석을 이용하여 기단(基壇)을 쌓고 그 위로 직사각형의 돌로 쌓아올린 모습이다.(중략) 1986년 우체국을 신축할 때 일부가 파괴되었는데 이만기, 양창현, 노상준 등의 지역 원로들이 법원에 우체국신축공사중지가처분 신청을 하고 정보통신부에 당산 보존의 당위성을 진정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구하였다. 이 후 남원문화원에서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면서 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인《남원의 삶과 문화, 2005》(남원문화원)에는 새롭게 ‘남원당산 표석(석돈)’ 설치에 대한 경위가 설명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역의 역사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이들 역사문화유산들이 생성된 의미와 가치를 되살려내 형상화하여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물로 활용하자는 목적으로, 연도별 쌈지공원 조형물을 설치했는데, 남원석돈은 지난 1992년에 석돈이 있는 남원부 주당산에 ‘남원당산 표석’(南原府石墩址)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적힌 남원당산 유래와 표석 설치의 취지는 이러했다. “옛날 남원부 성내에는 여러 곳의 당산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미신이라 하여 없애버렸고, 또한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자연 소멸되기도 하여 현재 이곳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곳이 남원부성의 당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못 사람들이 이곳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지라 남원문화원은 우리의 전통을 찾고 선양하기 위해 이 빗돌(남원부석돈지)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남원에 갈 때면 찾아보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이 석돈이다. 온통 현대식 건물과 도로 일색의 답답한 도심속에서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주님의 은총 같이 기쁘고 반갑기 이를 데 없다. 석돈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끈적끈적한 태고적 역사의 신비가 온 몸에 파고드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삶이 공허할 때, 또 원초적 고향이 그리운 자들은 한번쯤 석돈을 찾아가 허허롭고 그리운 마음을 달래보는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2008.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