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긴한 기독교와 필요 없는 신자
우리 주위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찬양을 부르며 간증을 다니면서 사회에 악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정치인, 예술인 등 특별히 유명인들이 잘못할 때에는 많은 피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뜻이 있는 사람들은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많은 우려를 나타내며 이렇게 말합니다.‘이 사회에 기독교는 필요한데 진정성 없는 신자가 너무 많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독교의 근본 진리는 요긴하여 국가의 초석이 될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새 삶을 약속하는 말씀이지만, 자기만 알고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르는 교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리는 한 개인의 소리가 아니요, 이 사회 전체의 소리가 될 때 기독교는 존재자체에 대한 의미조차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본 베드로는“주여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산 밑에서는 간질로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 불쌍한 소년과 그 아버지가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이렇게 고난당하는 이웃을 생각지 않고 은혜의 변화 산에만 거하겠다는 제자들의 생각은 어떻게 보면 기독교 이기주의(利己主義)의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간곳없어지고 그래서 좋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변화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은 황홀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사명도 망각해 버렸습니다. 이렇듯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라는 이름 아래서 저질러지는 잘못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원천이신 주님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산에서 내려와 고난 받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그 산위에 초막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세우기를 거절하셨던 변화 산상의 초막을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이 세우고 있습니다.
그곳에 편히 안주하기 위해 초막을 콩크리트로 건축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상이 망해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형제나 부모가 죽어간다 해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필요 없는 신자가 되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만 은혜 받고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어린 신앙인,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이웃의 소리를 듣거나 돌아 볼 생각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믿음의 가족을 외면하고 누리려는 은혜는 멸망하는 독(毒)과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