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포진
방바닥에 낙타를 그린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모래알 밟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대상행렬이 길어진다
흰모래띠에 포진한 대상들은
누각과 공중을 분간할 수 없는 사구의 새채기
경계가 사라진 문턱을 넘어 낙타를 끌고 간다
낙타의 몸속에는
낙타가 밟지 않은 모래언덕이 있고
터진 모래주머니가 실려 있다
파상의 나는 왜 사막에서 태어난 걸까
밤이었다가 더 깊은 밤이었다가
소소초가 거부하는 사구 위를
구르고 또 구르는 회전초
내장 깊숙이 파고든다
끝나지 않는사막에서 발진하는 달빛
이젠,
방바닥에 무엇을 그려야 하나
리을리을
산의 문을 열고 흘러갑니다
열려도 닫혀 있고
닫혀도 열려 있는 의뭉스러움
오름을 내려온 조랑말의 저녁도
한 호흡씩 들어가고
한 호흡씩 나가야 합니다
방목은 풀어놓는 게 아니라 드나드는 것
흙바람도 자모음을 섞으며
모로 누웠다 모로 일어납니다
바람은 쉽게 겹쳐지지 않습니다
새끼 곁을 떠나지 않는
어미의 선한 꼬리질이
한 계절로 들어갔다 한 계절로 나갑니다
구름이 능선의 고삐를 풀어줍니다
산 한 마리, 산복도로에 이끌려 갑니다
갈기를 눕힌 순결한 산맥이
리을리을 흘러갑니다
리을리을
평지로 흘러갑니다
인기척
비의가 소리를 불러온다
둥근 비의 목소리
바다 밑에서 흐르는 물고기의 말과
계절 너머로 오고 가는 꽃의 말은
다가가도 만져지지 않고
비를 받아쓰느라 짧아지는 연필
쓸쓸한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비는
구름까지 닿는 갈기를 가졌다
밑줄을 지우면
지우개 가루처럼 부스러지는 약속들
보도블럭을 훑고 가는 비와 비의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는 수요일의
늦은 퇴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는
빗소리의 인기척이 가지런하다
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 등단
2022년 <<애지>> 평론 등단
시집<<오후의 지퍼들>> <<The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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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옥주 시집 <<리을리을>> / 권혁재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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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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