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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산악회 소백산 죽구종주 계획에 따라 '죽령 → 제2연화봉 → 연화봉 → 제1연화봉 → 천동 삼거리 → 비로봉 → 어의곡 삼거리 → 국망봉 → 상월봉 → (늦은맥이재 → 신선봉 → 민봉 → 임도 →) 까칠봉(수리봉) → 적멸궁 → 구인사'의 26km 구간을 12시간 동안 달릴 예정이다. 다만, 코스 중 늦은맥이재에서 임도까지는 비탐 구간이라, 소백산행 경험에 따른 예상으로 반대로 돌거나, 산행팀의 계획에 따라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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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1987년 18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322.011㎢로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에 이어 산악형 국립공원 가운데 네 번째로 넓다. 해발 1,439.5m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국망봉(1,420.8m), 연화봉(1,383m), 도솔봉(1,314.2m) 등이 백두대간 마루금 상에 솟아 있다. 퇴계 이황이“울긋불긋한 것이 꼭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고 호사스러운 잔치 자리에 왕림한 기분”이라며 소백산 철쭉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처럼 수많은 탐방객이 봄철 소백산국립공원을 방문하고 있으며, 겨울이면 장중한 백두대간 위에 설화가 만발하는 절경을 이룬다. - 국립공원공단
이번 8월 15일 광복절에는 한 안내산악회 종주팀이 진행하는 무박 소백산 죽구 종주에 참여하기로 했다. 애초 오대산 호령봉에 오를 생각이었으나, 성원 채우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대안을 찾기 위해 각 안내산악회 게시판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장거리 종주 중 소백산 죽구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소백산 종주의 대명사 죽고 즉, 죽령에서 고치령까지 달리는 종주라 생각해 무시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죽'고'가 아니라 죽'구'다. 혹시 내가 원하는 그거? 아니면, 오타? 당연히 어느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세 내용 페이지로 들어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28인승 버스 두 대를 거의 채워, 빈자리가 몇 개 없다는 거다. 그리고, 코스 소개에는 자세한 내용 대신 그저 '소백산 종주(약 26km/12시간)'라고만 적혀 있다.
코스 란에 구체적인 지점이 아니라, 그저 종주라 쓰고, 거리와 소요 시간 정보만 있다는 건,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안 되는 구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얘기다. 국립공원에서는 비탐 구간이다. 소백산에서 비탐은 늦은맥이재에서 구인사에 이르는 구간이다. 물론 국립공원 범위를 벗어나는 964고지부터 구인사는 대상 지역이 아니지만. 어쨌든 진정한 소백산 종주는 죽령에서 고치령이 아니라, 주요 봉우리가 능선으로 연결된 구인사까지 달리는 거로, 이를 줄여 죽구종주라 부른다. 죽령의 죽, 고치령의 고를 합쳐 죽고종주라 부르듯, 구인사의 구를 합쳐 죽구 종주라 부른다. 그리고 그 종주는 코스가 어렵다기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여건상 쉽지 않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고치령까지 달리는 죽고종주가 대세다.
인생 최초로 소백산에 오른 건 2017년 8월 19일 친구 넷과 구인사에서 비로봉까지 달린 후 어의곡리로 하산하는 계획하에 진행한 산행이다. 계획과는 달리 서울에서 출발이 늦어, 늦은맥이제에 도착한 시간이 6시 20분경이고, 거기에 더해 가랑비까지 내려, 비로봉은 포기하고, 바로 어의곡리로 하산했다. 와중에 가랑비가 폭우로 바뀌며 위험한 상황을 겪기도 한 잊을 수 없는 산행이었다[산행기]. 이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게 아쉬워, 십여 일 뒤인 9월 2일 다시 친구들을 조직해 이번에는 희방사에서 늦은맥이재까지 달린 후 지난번과 같은 코스로 하산하는 목표를 세우고 서울에서 출발했다. 만약 목표를 달성하면, 한번에 한 건 아니나, 많이들 하는 구간을 나눠 진행하는 죽구종주가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적 구성에 문제가 있어 비로봉에서 천동으로 하산했다[산행기].
결과적으로 두 번의 소백산행으로 비로봉에서 국망봉, 상월봉, 늦은맥이재 구간을 밟지는 못했다. 이후 서너 번의 소백산행에서도 그 구간은 끝내 밟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2년 2월 12일 백두대간 연결 산행의 하나로 고치령에서 상월봉, 국망봉을 거쳐 어의곡리로 하산해 첫 소백산행 후 5년 만에 그 구간을 밟았다[산행기]. 하지만, 구인사에서 희방사나, 죽령까지 한번에 달리는 산행이 늘 아쉬웠다. 실제 비박하며 달리는 1박 2일 산행 계획을 세웠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현재까지 왔다. 그 구간을 안내산악회에서 무박으로 달리겠다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당연히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신청했다. 계획된 산행까지 다 취소하고. 그런데, 비슷한 생각이나 환경에 처한 산꾼이 많았는지, 산행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2대의 28인승 버스에 빈자리가 몇 있었으나, 며칠 지나자, 좌석을 다 채우고 취소자를 기다리는 대기자까지 몇 생겼다.
기상청 산악날씨에 따르면 산행 일인 8월 15일 화요일 소백산은 영상 16도에서 21도 사이에, 구름이 좀 끼다가 정오 무렵에는 햇살이 내리쬐고, 2m/s로 바람은 강하지 않다는 예보다. 최근 산행같이 폭염특보가 공포된 상황은 아니나, 산행하기에는 약간 덥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른 산도 아니고 바람 많고 강하기로 유명한 소백산에 2m/s에 불과한 바람이 분다는 게 아쉽다. 무박 산행이라 아침으로 불광역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 사가고, 점심은 늦게 구인사 식당가에서 해결한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12시간 이내에 26km를 달리는 산행이라, 짐은 최소한으로 한다. 해서 배낭도 그동안 무박 산행에서는 가지고 다니지 않던, 숄더힙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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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제와 같이 늦은 저녁을 먹은 후 그동안 냉동실에 보관만 하고 꺼낸 적이 없는 꽁꽁 얼린 1L 물병이 든, 보랭 주머니를 억지로 숄더힙색에 넣고 보니, 다른 짐을 넣을 공간이 없다. 추가로 500mL 얼린 물통 두 개, 비상식과 과일, 삼각대와 이것저것. 물론 불광역에서 산 김밥도 넣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배낭으로 교체하고, 10시 40분경 집을 나서, 마을버스로 불광역으로 향해 55분경 도착했다. 11시 5분 오금행 열차로 양재로 가야 해, 서둘러, 김밥집으로 뛰어가, 그 자리에서 만 김밥 한 줄을 사 들고 나오니, 11시 정각이다. 5분은 충분한 시각이라, 평소 걸음걸이로 역으로 들어가서 보니, 꽤 많은 승객이, 이 시각에 시내로 들어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나처럼 광복절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인가?
책을 보며, 양재로 향하는데, 수면제의 영향인지 목이 말라, 배낭 옆 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려고 순을 집어넣자, 무언가 이상한 게 잡혀 꺼냈다. 지난 8월 13일 일요일 친구들과 북한산 계곡 산행에서, 두고 왔다고 생각한 무기로, 숟가락과 포크가 결합한 스포크다. 산에 들고 다니기 편리해 다시 사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다행이다. 빠지지 않게 다시 옆 주머니에 잘 넣은 후 물을 마셨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양재다. 23시 48분 역에 도착해 바로 12번 출구로 나가, 국립외교원 앞으로 가며, 주변의 상황을 관찰했다. 생각보다 심야 산악회 버스를 기다리는 산꾼이 많다. 해서 산악회 사이트로 들어가 심야에 출발하는 버스가 몇 대나 되는지 확인했다.
지리산 성중 종주는 1시간 이른 23시에 출발했고, 24시에 외교원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설악종주 28인승, 산수도 28인승, 죽구종주 28인승 두 대 등 28인승 4대다. 역시 잘 나가는 산악회다. 서초구청 주차장 석축에 주저앉아, 버스를 기다리니, 23시 57분 산수도행 버스를 선두로 버스가 들어온다. 그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들고, 버스가 정차하는 곳으로 가며 보니, 두 번째 차가, 기다리던 죽구종주 1호차라, 바로 버스에 탔다. 비록 자리는 좁으나, 배낭에서 꺼낼 게 있어, 가지고 탔다. 그리고 배낭을 앞뒤 좌석 사이에 두고, 가장 편한 자세를 잡은 후 잠을 청했으나, 2대의 버스를 통제해야 하는 인솔 대장 덕에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무박 종주를 많이 한 인솔 대장이라, 승객의 편의를 위해 중간에 있는 휴게소가 아니라, 마지막 정차장인 죽전 간이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용인휴게소에서 15분가량 휴식했다. 죽전에서 용인으로 오는 동안, 2호차에서 이번 산행의 코스와 주의 사항에 관해 설명을 마치고, 용인에서 출발하자 1호차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2시 30분 죽령 도착 예정이라, 산행에 12시간을 책정했으니, 마감은 14시 반이다. 그리고, 국립공원 비탐과 구봉팔문 구간은 기복도 많고, 등산로가 좋지 않아, 거리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릴 거란다. 그래서 12시간을 책정했나? 문제의 그 구간을 2017년 8월, 그리고 보니 비슷한 시기에 같은 구간을 간다, 거꾸로 진행했을 때는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생존 본능인 망각 기제가 작동한 건가? 하긴, 라면도 끓여 먹고, 계곡에서 노닥거리며 갔으니!
휴게소를 떠나 죽령으로 향하는 동안, 비몽사몽 상태로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니다. 와중에 이동 시간이 2시간 반에 불과하고, 그중 30분 정도는 정차지 두 곳과 휴게소에서 승객이 오가는 소음과 인솔 대장의 코스 설명 때문에 잠을 잘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고로 순순하게 잔 시간은 1시간이 채 안 되는 거 같다. 이래서 내가 무박 산행을 싫어한다. 어쨌든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버스의 실내등이 켜지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슬리퍼를 벗고, 등산화로 갈아 신은 다음 끈을 조였다. 그리고 바람막이를 벗어 배낭에 넣은 후 그걸 둘러메고 버스에서 내려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기록을 위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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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 등산 앱을 켜고, 현 위치의 고도를 확인했다. 724m, 임도? 천문대를 위한 도로로 제2연화봉까지 올라가면, 소백산행은 거의 반은 먹고 들어간다. 해서 소백산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그 제2연화봉의 높이가 대략, 1,200m대였다고 기억한다(산행 후 확인한 바에 의하면 1,357m). 고로 600m 정도만 올리면 되니, 다른 산에 비해 높은 건 아니다. 일행이 산행 준비를 하는 동안 버스에서 준비를 마쳤고, 주변 기록도 끝나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해서 ‘죽령 탐방로’ 아치문을 통과해 천문대를 위한 포장도로를 따라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가다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랜턴을 안 꺼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주변 일행의 랜턴 불빛에 꺼내지 않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가던 길을 멈추고 배낭에서 헤드 랜턴을 꺼내 썼다.
비록 랜턴 빛에 의지해 첫 번째 봉우리인 제2연화봉으로 호흡을 조절하며 가고 있지만, 보이는 건 빛이 비치는 시멘트 포장도로에 불과했다. 무박 산행의 공통점이나, 다른 산과 다른 건 거의 두 번째 봉우리까지, 7km가 포장 임도라는 거다. 제2연화봉까지는 보이는 것도 없고, 조망도 없어, 그저 시멘트 길만 바라보고 가는데, 50m 이상 뒤에서 출발한 일행이 서서히 추월하기 시작한다. 이런 대간꾼을 따라잡겠다고, 초창기 몇 번 시도했다가, 페이스를 잃고 낙오할 뻔한 다음, 무시하고 페이스를 유지하며 간다. 그런데도, 막상 날머리에 도착해 보면, 선두 그룹이라, 그 이유가 궁금해 한동안 그들을 추월하는 지점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다. 어려운 코스와 휴식이다. 암릉이나, 너덜, 하산 등에서도 페이스가 그대로다. 그리고 20km가 넘는 무박 산행이 아니면 앉아서 쉬지 않고, 앉는다고 해도 채 1분이 되지 않아, 휴식 중인 그들을 추월해 간다.
하긴 그들도, 분명 추월했는데, 암봉을 하나 넘고 나면, 그들 앞에 있으니, 초기에는 이상한 눈초리로 봤다. 하지만, 그렇게 거의 2년 넘게 다니다 보니, 다 익숙한 얼굴이라, 이제는 서로 놀라지도 않고, 당연시하는 사이가 됐다. 어쨌든 그들이 추월해, 거의 중간 정도에서 따라가, 등산 앱이 제2연화봉 반경 50m 내라고 음성으로 알려준 시각이 3시 36분이다. 2시 25분경 산행을 시작했으니, 1시간 11분이 걸렸다. 등산 앱에 의하면, 죽령에서 제2연화봉까지는 4.2km 정도의 거리로, 3.5km 속도로 올라왔다. 역시 경사가 아무리 심해도, 길이 좋으면 속도가 난다. 동영상 촬영을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받았으니, 비록 보이는 건 없으나, 동영상을 찍으며, 백두대간 제2연화봉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가, 3시 37분에 도착했다.
제2연화봉 정상은 천문대와 대피소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아래 주차장 비슷한 곳에 백두대간 표지석이자, 정상석을 세워놓고, 정상을 대신하고 있다. 당연히 거기가 인증 장소라, 먼저 도착한 일행은 표지석 앞에서 인증을 찍고 있어, 그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표지석이자 정상석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다음 봉우리인 연화봉으로 향했다. 인증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도 선두를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미 1,300m를 넘게 올라왔고, 능선상의 나머지 봉우리 높이도 그 내외라, 비록 기복은 있으나, 높낮이는 심하지 않은 완만한 경사의 쉬운 코스다. 특히 여기서 연화봉 직전 천문대까지는 거의 경사가 없다고 할 정도의 임도다. 그 임도를 따라가, 3시 45분경 전망대에 도착했다. 물론 보이는 게 없는 건 마찬가지나, 저 아래 마을과 제2연화봉의 천문대 불빛은 보여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 찍어봐야 소용없는 하늘에서 빛나는 별도! 물론 그 와중에 일행이 추월해, 다시 중간 그룹으로 들어갔다.
전망대에서 사진을 다 찍고, 길을 재촉해 연화봉으로 향해 가자, 등산 앱이 알람을 울려, 꺼내 확인했다. 만보기다. 그런데, 놀랍다. 대략 6.7km 정도 왔는데, 벌써, 만 보?! 만 보를 걸었다는 메시지가 나온 곳에서 조금 더 가니, 연화봉 아래 천문대 건물이다. 임도는 천문대 건물 끝 주차장에서 끝난다. 그 천문대를 지나, 연화봉으로 150여 미터를 가자, 이번에는 이정표다. 비로봉 갈림길이다. 비로봉으로 바로 가려면, 여기서 좌회전해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연화봉은 직진이다. 그런데, 비로봉으로 가려면 연화봉을 찍고, 이 갈림길로 돌아와야 하는지 기억 가물가물하다. 작년, 즉 2022년 2월 백두대간 연결을 위해 죽령에서 어의곡까지 달렸음에도[산행기], 기억이 안 난다. 경험상 정상에는 넘어가는 길이 있는 게 대부분이라, 역시 그럴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연화봉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해도, 남는 게 시간이라 서둘러 비로봉으로 갈 이유도 없다.
갈림길에서 직진해 연화봉 방향으로 70여 미터를 가자, 고지 반경 50m 내라고 음성으로 알려줘, 동영상을 찍으며 올라갔다. 역시 정상에는 앞선 일행이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을 찍고 있어, 그 빈틈을 이용해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미련 없이 연화봉을 떠나, 비로봉으로 향하자, 앞에 이정표가 있다. 역시 예상대로 비로봉으로 바로 가는 길이다. 그 이정표와 풍기읍으로 보이는 동네의 모습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정상에서 내려오자, 임도가 끝나고, 풀숲으로 덮인 등산로가 나타났다. 여기까지는 거저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등산의 시작이다. 다음 봉우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고개로 내려가야 하는 건 당연하나, 그 길이 만만치 않다. 돌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급경사 등산로로, 그 길을 대략 300m 정도 내려가니, 완만한 경사로 바뀐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전망대도 있으나, 보이는 건 별과 달, 마을의 불빛이 다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여명 속에 빛나는 눈썹을 기록으로 남겼다.
초승달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다시 위로 올라, 4시 50분 등산 앱이 제1연화봉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줘, 역시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동영상을 찍으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위에 도착하니, '출입 금지' 경고문이 서 있고, 앞선 일행은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어 잠깐 당황했다. 정상은 더 가야 있는 거 같아, 계속 가려는 데, 과거 산행이 기억났다. 제1연화봉 정상은 올라갈 수 없고, 그 출입 금지 안내문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 해서 출입 금지 경고문으로 돌아가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여기는 백두대간 인증장소라, 인증꾼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제2연화봉이나, 연화봉은 지나칠 수 있으나, 여기는 지나치면 안 된다. 애초 기관의 인증에는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 경고문만 기록으로 남기고 소백산의 상봉이자 정상인 비로봉을 향해 바로 출발했다.
제1연화봉 갈림길 숲을 빠져나오자, 여명 이래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보인다. 비로봉이다. 앞에 있는 게 비로봉이었으면 좋겠지만, 뒤다! 어쨌든 비로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는 경고문에서 밝혔듯이,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이라, 등산로도 갑판으로 바뀌었다. 말인즉 갑판을 벗어나지 말라는 거다. 사진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앞 봉우리 중턱에 있는 전망대를 보니 반갑다. 과거 소백산행 때 저 전망대가 제일 힘든 구간이었다. 해서 이번에도 겁먹고 올랐으나, 생각보다 쉬워 어리둥절했다. 갑판 전망대에 도착해 이유를 생각해 보니, 햇살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 거 같다. 비록 습도가 높아 땀은 비 오듯 하지만,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따가운 햇살은 피할 수 있어, 과거 햇살 아래 산행과 달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을 거라는 게 내 추측이다. 어쨌든, 생각보다 쉽게 정상에 도착해 여명 아래 지나온 능선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정면에서 좌로 조금 벗어난 곳에 보이는 흰 기둥이 소백산 천문대다!
전망대를 떠나, 봉우리를 넘으니, 광활한 수풀 지대고, 그 건너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비로봉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어진 갑판 등산로도. 당연히 그 모습을 놓칠 수 없어, 기록으로 남겼다. 운무에 싸인 저 아래 마을도. 이후 뒤로 돌아 지나온 길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며, 여명이 밝아 랜턴을 끄고, 갑판 등산로로 비로봉으로 향했다. 물론 여명 속 정상에서 움직이는 산꾼의 모습을 보며. 그런데, 생각보다 많다. 추월한 일행이 저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정상으로 향해, 5시 43분 비로봉 반경 50m 내라는 음성 메시지가 나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보이는 게 있으니, 주변의 모습도 동영상으로 찍으며 올라가, 5시 46분경 도착했다. 그런데 서서히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정상에 있는 산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태극기를 든 청춘들이다! 광복절을 기념해, 어느 단체에선가 행사를 진행한 거 같다. 죽령이 아니라, 가까운 어의곡이나 천동에서 올라왔겠지만,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출발했을 거다. 광복절에 태극기를 들고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행사?!
우리 일행도 청춘에게 태극기를 빌리든가, 하나 얻었든가 해, 그걸 들고 정상석 앞에서 인증을 남긴다. 인증을 위한 줄이 길어, 정상석만 기록으로 남기고, 물러나 와 전망대에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하고 사진도 찍었다. 이후 갑판 등산로로 어의곡 삼거리로 향해 내려가자, 오른쪽이 눈이 부셔 쳐다보니, 막 떠오른 해가 구름 속에서 빛나고 있어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계속 가려는 데, 청춘이 다가오더니, 핸드폰을 주고 해를 배경으로 인증을 찍어달라고 해 찍어줬다. 찍어주기도 하고, 찍기도 하며 길을 가, 5시 57분경 어의곡 삼거리에 도착했다. 직진은 어의곡으로, 우회전은 백두대간과 비탐의 신선봉으로 가는 길이다. 물론 그 중간에 국망봉과 상월봉이 있다. 삼거리 이정표에 의하면 국망봉까지는 2.7km에 불과하다. 이렇게 가까웠나? 작년, 2022년 2월 국망봉에서 여기까지는 오는 길은 천리처럼 느껴졌었다[산행기]. 심설이라 그랬나? 아직 눈이 없는 길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뭐라고 결론 내릴 상황은 아니고, 일단 우회전해 국망봉을 향해 내려갔다.
운무에 싸인 능선을 감상하고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며 대간을 따라 북진해, 6시 24분경 퇴계 이황이 다녀갔다는 소백산성에 도착했으나, 어디에도 산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실망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안내문이 있는 곳에서 북으로 10여 미터를 올라가자, 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그것도 기록으로 남기고, 능선 좌우 아래 운무에 싸인 마을을 감상하며 가자, 바위 전망대다. 당연히 그 위에 올라, 지나온 능선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다시 북진해 6시 54분경 초암사 갈림길에 도착했다. 다시 소백산에 온다면, 구봉팔문과 초암사 코스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이미 마누라와 올해 2월 소백산 자락길 1구간 산행으로 지나온 죽계구곡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생각도 있다. 어쨌든 여기서부터 국망봉까지는 0.2km, 즉 200m 거리다. 그런데, 작년 겨울 반대로 갔을 때와는 상태가 다르다. 역시 심설 산행이 생각보다 더 힘들다!
삼거리에는 이정표 외에도 '탐방로 안내도'와 '출입 금지' 경고문이 서 있다. 그런데 탐방 안내도 오른쪽 위에 지도가 붙어 있어, 안내도와 차이가 뭔지 비교했다. 똑같다! 똑같은 지도를 추가한 이유가 궁금해 안내도를 자세히 보니, 붙인 지도 아래 무언가 있다. 그걸 가리기 위해 같은 지도를 추가한 거로 보인다. 뭘까? 그 옆의 '출입 금지' 경고문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신선봉, 민봉 능선이 비탐이라는 걸 알리고 있다. 뭐, 이미 알고 시작한 산행이다! 그리고 전면에 보이는 암봉이 국망봉이다. 그 모든 걸 기록으로 남기고 두 번째 방문인 국망봉 정상을 향해 가자, 등산 앱이 정상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준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해도 정상까지 100m 이상이다. 등산 앱에 많은 걸 바라면 안 된다고 자신을 다독이고, 동영상을 찍으며 올라가, 7시 3분경 정상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정상이 아니라, 정상석이 있는 곳!
정상석을 기록으로 남기며, 음각된 글을 보니, 국망봉의 높이가 1,420.8m다! 예상외다. 1,300m가 약간 넘는 거로 기억하는데, 1,400m가 넘는다. 워낙 많은 봉우리에 올라, 봉우리 하나하나의 높이는 기억하지 못하고 대략 어느 정도만 기억하는데, 그것도 틀렸다. 정상석이 있는 공지에는 먼저 도착한 일행 서너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아침을 먹고 있어, 삼각대를 이용해 인증을 남겼다. 이후 정상석 뒤 바위로 올라가 등산화를 벗고 주저앉았다. 처음 계획은 8시경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으나, 앞으로 남은 구간이 비탐 지역이라 미리 체력을 보충하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에 먹고 가기로 했다. 그래봐야 김밥 한 줄이지만. 그래도 양이 좀 많게 느껴지는 김밥을 먹은 후 자두로 입가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나온 길을 확인했다. 특히 향후 초암사에서 오를 확률이 높은 삼거리의 모습은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국망봉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상월봉으로 향해, 7시 42분 상월봉 직전 우회로 갈림길에 도착했다. 상월봉이 오르는 게 쉽지 않은 암봉이라, 이정표도 왼쪽의 우회로만 안내하고 있다. 당연히 직진해 암봉을 향해 가자, 등산 앱이 7시 43분 정상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줘, 동영상을 찍으며 올라, 7시 47분에 도착했다. 그런데 상월봉에 정상 표지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해서 작년 산행기와 앨범을 찾아보니, 나뭇가지에 한 산악회에서 만들어 매단 표지가 있다. 그 기억 때문인지, 동영상을 찍으며, 주변의 나뭇가지를 섭렵했는데, 없다. 과거에도 없었을 거로 생각하고 정상 표지 찾는 건 중단하고, 정상이자 전망대에서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그리고 먼저 국망봉의 모습을 사진 찍은 후 뒤로 돌아, 가야 할 능선의 모습도 기록으로 남겼다. 왼쪽이 이번 종주 코스인 구인사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오른쪽이 백두대간이다.
기록을 다 남기고, 암봉에서 내려가기 위해 뒤로 도는 순간, 정상 바위에 붙은 정상 표지가 눈에 띄었다. 작년 2월 12일 이후 '한솔섬유(주) 산사랑모임'에서 만들어 붙인 정상 표지다.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시 돌아가 표지를 기록으로 남긴 후 그걸 배경으로 인증도 찍었다. 그리고 정상에서 떠나며 보니, 진정한 전망대는 정상이 아니라 조금 더 내려간 곳이라 거기서 구인사 방향 능선과 백두대간 전체의 모습을 파노라마로 다시 남겼다. 이후 암봉에서 내려와, 7시 56분 반대편 우회로에 도착해 기록을 남기고, 어의곡 갈림길로 갔다. 백두대간을 따라 북진하는데, 저 아래로 건물 같은 게 보인다. 늦은맥이재가 맞아 보이는데, 건물이라니, 그리고 그 방향에서 인기척도 난다. 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할 거 같아 동영상을 찍으며 내려가, 8시 20분경 고개에 도착했다.
늦은맥이재로 향하며 보니, 건물은 아니고, 대여섯 동의 텐트라기보다는 천막이 설치되어 있고, 곳곳에 해먹이 걸려있다. 그리고, 고개 이정표 앞에는 천막은 간이 식당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평상에 조리도구와 라면 등 식재료가 쌓여 있다.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때는 평상에 대여섯의 사람이 모여 앉아 있어, 더욱 식당이라 생각해, '아니, 여기에 식당이? 괜히 김밥을 먹었나?'하며 후회했을 정도다. 하지만, 식당이 아니라, 어의곡으로 내려가는 등산로 정비 작업 중인 인부의 숙소 겸 식당으로 보였다. 이 또한 작년에는 못 보던 광경이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2017년 8월 어의곡리로 하산할 당시 등산로 상태가 좋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 몇 번 있어서다[산행기]. 다만, 천막을 친 저 평상은 작년에도 있던 쉼터다! 물론 2017년 8월에는 없었다!
공사로 어수선한 늦은맥이재를 조용히 떠나, 작년 2월 백두대간 연결 산행 때 봐 두었던, 갈림길을 향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8시 22분경 좌회전해야 하는 길을 목책이 가로막고 있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비록 목책이 길을 가로막고 있으나, 얼마나 많은 종주꾼이 다녔는지 등산로는 백두대간 못지않게 뚜렷하고, 인위적으로 정비한 듯하다. 어쨌든 목책을 위로 넘어가든, 밑으로 기어가든, 너머로 가는 순간 양지에서 음지로 들어가는 거다. 먼저 주변을 둘러보고, 맞은편에 있는 이정표에서 이 방향의 정보가 빠진 걸 아쉬워하며, 목책을 넘어 빠른 속도로 갈림길에서 멀어졌다.
먼저 목책을 넘은 일행을 추월하기도 하며 등산로를 따라가다가, 8시 43분경 갈림길에 도착했다. 물론 이정표 따위는 없다. 우회전은 봉우리로 올라가고, 직진은 우회하고 있다. 그리고 길 상태는 직진 방향이 더 뚜렷하고, 우회전 길은 많이 다지지 않았는지 수풀이 우거져 명확하지 않다. 당연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일행 대여섯은 망설임 없이 직진, 즉 우회로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봉우리로 올라가야 한다. 해서 우회로를 버리고 봉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자, 좀 전에 직진한 그룹의 일원인 한 쌍이 도착해 뒤를 따라오려고 해, 그 그룹은 우회로로 갔다고 일러주고, 봉우리를 향해 올라갔다. 호흡을 조절하며 정상을 향해 가는데, 등산 앱이 고지 반경 50m 내라고 음성으로 알려준다. 현재 시각 8시 47분! 그런데, 이름을 가진 가장 가까운 봉은 신선봉으로 1km 이상 떨어져 있다. 고로 배지 획득 메시지가 나올 만한 봉우리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등산 앱을 확인했다. 신선봉이다!
분명 내가 아는 신선봉은 아직 멀었다. 그럼, 인솔 대장이 버스에서 코스 설명 때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으니 다녀오라고 한 ‘신선암봉’이다. 등산 앱은 신선봉이 아닌 신선암봉을 신선봉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등산 앱이 아니라, 지도 앱을 보면, 둘 다 신선봉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등산로에서 벗어났으니, 왕복해야 한다고 한 대장의 말에 부합한다. 그렇지 않아도 신선암봉을 지나칠까 봐 걱정했는데, 선택을 잘했다고 자찬했다. 그리고 동영상을 찍으며, 암봉으로 향해, 어느 정도 오르자, 사람을 부르는 소리도 들리고 위가 소란스럽다. 소수지만 암봉으로 올라온 일행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 네발을 다 써서 올라가야 하는 암벽이라 동영상을 계속 찍을 수 없다. 해서 촬영을 중단하고 잡을 곳을 찾으며 기어 올라가는데, 옆에서 내려오는 인솔 대장 일행이 보인다. 역시 빠르다.
그들과 몇 마디 나누고 다시 위로 올라가자, 정상 직전 바위 봉우리에 있던, 한 쌍이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안 받는다고 걱정하고 있다. 해서 대장과 통화하려는 거로 생각해, ‘대장은 내려갔다!’라고 알려주자, 그게 아니라, 우리 일행 두 명이 앞에 보이는 암봉을 넘었는데, 반대편에서 비명이 들려 괜찮은지 확인 중이라는 거다. 해서, 가 볼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암봉을 기어올라 정상에 도착할 즈음 반대편에서 아무 이상 없이 두 명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더니 초조하게 기다리던 한 쌍은 안심하고 내려갔다. 나 또한 마음을 놓고, 그들 뒤로 보이는 암봉으로 갔다. 당연히 정상석이나 표지 따위는 없는, 정상 전망대에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사진도 찍었다. 두 번째 사진의 제일 뒤가 비로봉이고, 세 번째 파노라마 사진의 첫 번째 봉우리가 신선봉이다. 고로 두 번째 사진의 능선을 타고 와서 세 번째 사진의 능선으로 끝으로 가는 게 죽구종주다!
마지막으로 신선암봉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신선봉으로 향하는 등산로와 합류하는 지점을 찾아 급경사를 내려갔다. 와중에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파, 준비한 오이 한 조각을 꺼내 먹었다. 그렇게 소백산 주 능선을 찾아가고 있는데, 핸드폰의 알람이 울려 확인했다. 벌 쏘임에 주의하라는 경고다. 그런데. 이미 대장 일행 두 명이 쏘였다. 그래도 경고 메시지에 감탄하며, 신선봉으로 향해, 언제인지 모르게 신선봉을 넘었다. 등산 앱의 메시지도, 정상석이나 표지도 없으니, 언제 넘었는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등산 앱이 고지 반경 50m 내라고 음성으로 알려줘, 응? 하며 확인하자, 민봉이다. 고로 신선봉은 진작에 지나쳤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어쨌든 동영상을 찍으며, 정상으로 향해, 9시 34분경 민봉에 도착했다.
두 번째 방문인 민봉은 처음 왔을 때 나뭇가지에 매달린 정상 표지가 그대로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상이 헬기장이라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정상에 도착하니, 한 팀인 일행 여섯이 2017년에는 없던 정상 표지를 배경으로 인증을 찍거나, 지나온 능선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일단 두 정상 표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그들을 방해하지 않게 그 자리를 뜨려다가, 갑자기 물이 생각났다. 옆 주머니에 넣어둔 500mL 물병이 다 비어, 배낭 속에 든 1L 물통을 꺼내야 했다. 꽁꽁 얼린 물이라, 녹은 것만 비어 있는 500mL 물병으로 옮기는 작업이 필요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평지로 되돌아 그 작업을 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일행이, 아직도 얼어 있는 물을 보고 놀라며 한마디씩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꽁꽁 얼리기도 했지만, 보랭이 잘되는 파우치에 넣어 잘 싸맸기 때문이다. 해서 한여름 무박 종주 때나 들고 다니는 물통이다. 마지막으로 신선봉과 국망봉 사이를 가르는 구름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민봉을 떠났다. 말인즉 늦은맥이에서 어의곡으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는 거다.
민봉을 떠나 다음 봉우리를 향해 가는데,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봉우리를 우회하고,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 직진하는 길은 정상으로 향한다. 물론 대장을 포함 일행 대부분은 오른쪽 우회로를 택했지만, 정상을 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왼쪽을 선택해 올랐다. 그렇게 300여 미터를 가자, 등산 앱이 고지 반경 50m 내라고 음성으로 알려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정보라, 깜짝 놀라 핸드폰을 꺼내, 등산 앱을 확인했다. 잊고 있던, 표대봉이다. 구봉팔문을 부채로 많이 비유하는 데, 9개의 부채살이 모이는 꼭짓점이다. 역시 동영상을 찍으며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50m가 아니라 반경 10m 내라, 찍은 것도 없다. 물론 정상에는 아무도 없고, 표대봉 정상 바위에 매단 정상 표지만 있다. 2017년 8월에 왔을 때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역시 삼각대를 이용해 인증을 남기려는 데, 아래에서 인기척이 들려 바라보니, 일행 중 한 명이다. 반갑게 인사하고 그에게 핸드폰을 주고 인증을 부탁했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표대봉부터는 국립공원 관할 밖이다. 그런데, 그 영역의 시작이 어딘지 확인이 안 된다. 고로 나도 모르게 음지에서 양지로 빠져나온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인증을 남기고, 표대봉을 떠나, 구인사 직전의 까칠봉을 향해 가는데, 또 핸드폰이 알람을 울려, 확인하니 이번에는 폭염경보다! 전날 산악날씨를 보며 폭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재 시각 10시 10분 남은 구간이 지옥이 될 거라는 경고다. 2017년 올랐던 계곡이 있으니, 거기서 폭염도 피하고 땀도 씻을 계획으로 능선을 따라가며, 등산 앱의 지도를 확인했는데, 어느 지점에서 길이 세 갈래로 나눠진다. 가운데는 뒤시랭이봉으로 향하는 능선이다. 생각지도 못한 봉우리다. 하지만, 많이 듣던 봉우리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언급은 없으나, 보나 마나 양쪽은 8문 중 두 개읜 문인 계곡이다. 해서 주의 깊게 그 갈림길을 찾으며 갔으나, 어느 순간 지도를 보자, 이미 갈림길을 지나 뒤시랭이봉이 멀지 않다. 왼쪽이 2017년 올랐던 계곡일 텐데, 아쉽다. 그래도 임도에 도착하면 계곡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것과 초행인지, 2019년 6월 폭우 속에 올랐던 구봉팔문 봉우리 중 하나인지 헷갈리는, 뒤시랭이봉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크다. 그때 산행 준비를 하며 들었던 봉우리 중 하나가 뒤시랭이봉이다. 그리고 당시 산행기를 보면 오른 걸로 기록되어 있으나, 트랙을 보면 착각이다. 만약 올랐다면, 이 길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어쨌든 능선을 따라, 암릉을 기어오르자, 등산 앱이 정상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네 발을 다 사용해야 하는 암벽이라, 동영상을 찍을 상황이 아니다. 해서 핸드폰은 배낭에 넣고, 암벽을 기어올라, 10시 38분경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우리 일행 중 젊은 처자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아래를 감상하고 있고, 나뭇가지에는 소백아!(내 기억으로는 '소백산을 깨우는 아침'의 약자다)이라는 산악회에서 만든 '구봉팔문 제4봉, 뒤시랭이문봉, 958.3m'라는 정상표지가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양한 산악회의 리본이 바람에 나부낀다. 어쨌든 정상에 올라보니, 초행이 확실하다. 결과적으로 구봉팔문 중 4봉 뒤시랭이문봉과 5봉 덕평문봉(2019년 6월)에 올랐다. 산악회 리본과 정상 표지를 기록으로 남긴 후 아래로 보이는 까칠봉 능선도 사진으로 찍었다. 허리가 잘린 능선이 아니라, 그 직전 가장 높은 봉우리가 까칠봉이고, 그 너머에 구인사가 있다. 2019년 폭우 속에 덕평문봉에서 내려가느라 거의 목숨을 걸었던 기억이 있고, 이 봉우리에 올라오는 것도 쉽지 않았으니, 내려가는 길 또한 그 못지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길을 찾아 조심조심 하산을 시작했다.
역시 예상대로 쉽지 않다. 아니, 진흙은 간밤에 내린 비로 미끄럽고, 암벽은 경사가 심해 대단히 위험하다. 직벽에 가까운 암벽에 난 좁은 통로를 통과하기도 하며, 암벽을 내려가자, 다음은 낙엽 쌓인 급경사 진흙 길이다. 다른 등산로와 비슷한 속도로 아래로 내려가며 보니, 청춘 다섯 중 여성 둘이 급경사를 내려가다 말고 쉬고 있고, 그 뒤에 한 친구가 에스코트하듯 서 있다. 아래에는 두 친구가 그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첫눈에 같이 산에 온 대학생 느낌이라, 좋은 때라 생각하며, 그들을 지나쳐 가는데 그중 한 여대생이 길을 묻는다. 젊은 친구들을 못 믿는 분위기다. 해서 표대봉과 구봉팔문, 뒤시래기봉, 구인사 등에 관해 아는 대로 알려주고 그들을 지나쳐, 11시 11분 익숙한 임도에 도착했다.
임도에 도착하기 직전, 청춘 중 한 청년이 뛰다시피 나를 추월하는 폼이, 작전을 변경한 거 같다. 비탐 구역으로 들어온 이후 몇 번 길을 잃고 헤맨 결과 – 청춘 팀과 서로를 추월한 게 몇 번 있다. 내가 추월할 상황이면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맨 후다 - 두 여성 청춘이 그들을 믿지 않고, 중년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자, 선발대를 보내 길을 확인하는 전략으로 수정한 분위기다. 어렸을 때 다 해본 짓이라 안다. 예상대로 이 친구가 임도에 뛰다시피 해 도착했는데, 임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에 임도 아랫마을에 주차한 거로 알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일행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핸드폰을 보며 다시 위로 올라온다. 고로 길을 찾고 있다. 보나 마나 까칠봉 들머리다. 그럼, 우리 일행이다. 버스에 청춘이 있었나? 2호차?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임도에 도착해 계곡 입구가 보이나 확인했다. 뒤시랭이문봉에서 내려와, 임도로 오는 중 왼쪽으로 힘차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를 듣고, 능선에서 바로 내려갈까 생각도 했으나, 경사가 급하고 생각보다 멀어 보여, 임도에서 계곡으로 가기로 하고 포기했다. 그런데 임도가 가까워지면서 물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안 들린다. 그리고 임도에 도착한 이후 계곡 입구는 임도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기억은 오래될수록 왜곡이 심하다. 해서 계곡에서 씻어봐야 까칠봉을 넘는 동안 원상태로 돌아가는 거라, 구인사에서 씻기로 하고, 바로 임도를 건너 '입산 통제' 경고문이 서 있는 옆으로 구인사로 향했다. 그 청춘에게 길을 알려줄까 했으나, 제힘으로 찾겠다는 의지로 묻지도 않은 길을 가르쳐 주는 건 실례라, 그냥 행동으로 보여줬다.
임도를 떠나 앞 봉우리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그 일행이 모두 도착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정상에 도착하자, 두 청춘이 뛰다시피 올라와 추월해 간다. 그들을 보며, 역치 청춘은 다르다 느끼며 고개로 내려가자, 앞에 거대한 봉우리가 버티고 있다. 임도를 떠날 때는 아닌 줄 알면서도 앞에 있는 봉우리가 까칠봉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역시 그 뒤에 더 높은 봉이 버티고 있다. 한국 산은 끝나야 끝난 거다. 고개에서 마지막 봉우리인 까칠봉을 향해 힘겹게 올라가는데, 그 청춘들이 뒤를 따라오고 있어, 길을 양보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100여 미터를 오르자, 등산 앱이 까칠봉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준다. 현재 시각 11시 33분 다 왔다. 구인사에서 주차장까지 거리를 모르지만, 서두르면 12신 반이면 산행을 마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마감 2시간 전에 종료하는 거다.
당연히 동영상을 찍으며 올라가야 하나, 보조 충전기는 방전됐고, 핸드폰 잔존 배터리 또한 15% 내외라 영상을 찍을 환경이 아니라, 그냥 위로 올라가는데, 위에서 사람들의 대화가 들린다. 그런데, 앞서간 청춘이 아니라, 중년의 남녀다. 그리고 여성이 많다. 어떤 상황인지 예측이 안 되는 속에서 마지막 힘을 써 안부에 올라서자, 모든 게 확실해졌다. 잊고 있었지만, 까칠봉 정상 직전에 구인사 '적멸궁'이 있다. 관광객이든 신자든 적멸궁에 왔다가 정상에 올라가 볼까 하고 여기까지 온 거다. 그래봐야 적멸궁에서 100m도 안 되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 도착해 정상 방향을 보니, 구인사의 성지인지 그물망으로 차단했다.
아쉽지만 정상은 포기하고, 그 부근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적멸궁으로 가기 위해 계단으로 가자, 두 여성 청춘만 계단 끝에 앉아, 얼음물을 마시며 쉬고 있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여기가 까칠봉이 맞는지 묻는다. 초행이라면 당연한 질문이다. 어디에도 ‘까칠봉’이라는 정보는 없고, ‘적멸궁’에 관한 정보만 가득하다! 그 질문을 듣자, 청춘 남성들은 없는 안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까칠봉을 찾아간 거다! 해서, '까칠봉이라 까칠하잖아!'라고 답하자, 웃으면서 안심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적멸궁으로 갔다. 그리고 또 깨달았다. 2017년 산행 때 기록을 보면, 적멸궁 사진이 전혀 없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사진 촬영금지 구역'이다. 다른 건 몰라도, 찍지 말라는 건 안 찍는다. 이번에도 역시 사진은 안 찍고, 눈으로만 감상하고, 적멸궁에서 나와 나무 계단으로 구인사로 향했다.
11시 44분경 구인사 갈림길에 도착해, 혹시 씻을 수 있는 환경이 되는지 화장실로 갔다. 예상대로 아니다. 해서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구인사를 향해, 갈지 자를 쓰고 있는 시멘트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 완전체의 청춘이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나를 추월해 가고, 두 여성만 남아서 얘기를 하며 뒤에서 따라온다. 들으려고 해서 들은 건 아니나, 그 청춘들과는 일행이 아니다. 그리고 대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이다. 물론 둘은 동료고. 그리고 이 두 여성은 젊은 산꾼으로 일요일 북한산에 오르고, 화요일 무박으로 소백산 죽구종주에 나섰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도 일요일 북한산에서 노닥거렸다. 어쨌든 조사전으로 향하는 길은 시멘트 계단으로, 등산로는 흙길인 갈림길에 도착해, 당연히 흙길인 등산로 100여 미터를 가자, 아래로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 왔다.
등산로가 끝날 즈음에 전면에 나타난 절집을 보고 놀라는 그들에게 내가 아는 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유일한 절간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과 헤어져 해우소를 찾으며, 주차장을 향해 내려갔다. 여느 절간의 해우소와는 달리, 현대적이라 씻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예상대로다, 초 현대적인 해우소다. 문제는 길에서 벗어나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거. 끝까지 고생이다. 어쨌든 텅 빈 화장실 세면대로 가 먼저 세수를 한 다음 윗도리를 벗어 세면대에 넣었다. 그리고 세면대 아래를 보니, 예상대로 수도와 연결된 청소용 샤워기가 있다. 소나기를 맞을까 생각해 봤으나, 다른 산 계곡에서 한 수준으로만 씻기로 하고, 그 샤워기를 이용해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깨끗이 빤 수건으로 여러 차례 웃통을 깨끗이 닦은 후 빨아서 꼭 짠 옷을 입었다.
해우소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을 향해 내려가는 길목에 공양처가 있다. 현재 시각 12시 10분 점심시간이다. 그 앞을 지나자 공양하고 가라고 부른다. 구인사 공양은 어떤지 맛을 볼까 하다가, 두 가지 이유로 다음으로 미뤘다. 공양 전 꼭 본존불에게 신고하는데, 구인사는 건물의 위세에 눌려, 본존불이 있는 건물을 찾을 생각도 안 했다. 하산주가 강하게 당기는데, 여기서 배를 채웠다가는 하산주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해서 갈증만 해소하기 위해 감로수를 찾으며 가, 12시 12분경 '水供願'에 도착했다. 처음은 물맛이 좋으면 물통에 담아갈 생각이었으나, 폭염이라 미지근해 목만 축이고 말았다. 이걸로 절집에서 해야 할 일은 다 한 거라, 미련 없이 주장을 찾아 내려갔다. 와중에 일주문으로 보이는 곳이 가까워지니, 등산 앱이 고지에 도착했음을 음성으로 알려, 여기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확인했다. 구인사 방문! 별걸 다 인증한다!
일주문을 통과한 후 뒤로 돌아 현판을 보니, 일주문이 아니라 천왕문이다. 역시 구인사다. 이층으로 만들어 그 위에 사천왕을 배치했다. 150여 미터 아래 있는 일주문은 다른 사찰과 같은 모습이다. 아니, 기둥이 다른가? 일주문에서 200여 미터를 내려가자, 거대한 절집이다. 일주문 밖 절집? 뭐지? 정면으로 가, 3층 건물이라 고개를 들어 현판을 보니, '東文堂'이다. 동문당이라, 동쪽 글 집? 그건 아닐 거 같아, 검색해 봤다. 한글로 검색하면 제주도 빵집이, 한자는 일본 학교법인, 문구점, 서점 등만 나온다. 구인사가 일본 계열? 어쨌든 그 건물의 1층이 국내 유일 절간 버스 터미널인 '구인사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동문당에서도 한참을 내려가자, 민가가 보이기 시작하고, 도로변에 식당도 있다. 그런데, 영업하는 집이 없어, 처음에는 당황했다. 하지만, 주차장 부근은 다를 거라는 희망을 품고 갔다. 역시 예상대로라, 문을 연 식당의 메뉴를 확인하며 버스를 찾아 주차장으로 갔다. 그런데, 주차장을 가로질러 제일 끝에 서 있다. 버스까지 안 도와준다. 어쨌든 그 시각이 12시 35분으로 산행이 끝난 시각이기도 하다. 마감 1시간 55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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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도착해 저 멀리 끝에서 기다리는 버스를 향해 몸통을 관통할 것 같은 햇살을 뚫고 가, 먼저 도착한 다른 일행과 같이 배낭을 벗어, 던지듯 앞에 내려놓았다. 물론, 말려야 등판 부분이 강력한 햇살을 받을 수 있게. 그리고 버스에 타 등산화를 벗어 보니, 어제저녁 신은 새 양말에 구멍이 났다. 비탐 구간이 워낙 경사가 심하고 등산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양말에 구멍이 날 정도니, 발가락이 아픈 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 그걸 들고 찜통 같은 버스에서 내려, 배낭 옆에 같이 두었다. 그리고 몇 명이나 도착했나, 배낭의 수를 헤아려보았다. 후미라고 생각했는데, 배낭의 숫자만 보면, 일곱 번째로 산행을 끝냈다.
보조 배터리마저 방전된 상태라, 더는 믿을 수 없는 핸드폰을 대신할 패드를 들고, 일단 식당가로 가 메뉴를 스캔했다. 주차장으로 가며 메뉴를 훑어보고, 다른 지역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이미 파악했다. 하긴 대한민국에서 지역에 따른 음식이 다른 시대는 이미 끝났다. 같은 메뉴의 식당이라면, 음식을 잘할 거 같은 집으로 들어가는 게 정석이라, 그나마 손님이 있는 식당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묵무침과 그에 어울리는 막걸리를 주문하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구인사에서 씻지 못한 다리를 깨끗이 씻었다. 이후 개운한 기분으로 자리로 돌아와, 그 사이 차려진 밑반찬인 무 김치를 안주로 무사 산행을 감사하는 건배를 했다. 그리고 묵무침이 나와 그것과 막걸리를 마시는데,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 실패할 일이 없을 거 같은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된장찌개가 나오는 동안 버스로 가, 충전기를 들고 오니, 된장찌개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해서 같이 나온 밥과 찌개, 가끔 묵무침과 막걸리를 마시자, 포만감이 든다. 역시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막걸리가 떨어졌다. 남은 반찬, 아니 안주를 보자, 술 종류를 더 주문해야 하는데, 몸 상태는 부족한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 주문해야 한다면 이슬이보다는 약한, 막걸리를 주문해, 한 잔을 따라 마시자 토할 거 같다. 임계점을 넘었는지, 쌓였던 피로가 몰려오며 그냥 자고 싶다. 그렇다고, 지금 시동도 걸지 않은 찜통 버스로 갈 수는 없어 폭염 경보 아래, 구인사에 온 관광객? 불자를 구경했다. 물론 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 우리 일행의 숫자를 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몰려오는 노곤함을 버티고 있다가, 마감 19분 전인 2시 11분경 일행이 어느 정도 도착해 버스의 에어컨이 동작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식당을 떠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산행이 힘들었는지, 아직은 승객이 많지 않아 보여, 주차장 옆 소공원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스 방향을 주시했다. 웃기는 건 그 정자에 산꾼은 없고, 나와 두 버스 기사 셋만 앉아, 버스 주변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는 거다. 그리고 25분경 정자에서 내려와 배낭은 짐칸에 넣고, 등산화는 비닐봉지에 넣어 잘 묶은 후 들고 버스에 탔다. 버스 안은 아직 뜨거워 잠을 청할 분위기도 아니었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승객도 있어, 결국 공지보다 6분 늦은 2시 36분경 구인사 주차장을 떠났다.
버스가 출발하자, 어느 순간 잠이 들어 깨어 보니 치악산 휴게소다. 비록 다 마시지는 않았으나, 막걸리 두 병을 마신 상태라, 혹시 불상사가 생길까 봐 조심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으나, 만일에 대비해 화장실로 가 일을 봤다. 그리고 노곤함에 만사가 귀찮아, 바로 버스로 가며, 혹시 더위 먹은 게 아닐까 잠깐 고민했다. 어쨌든 10분가량 휴식한 버스가 다시 달려, 먼저 죽전에서 승객을 내려주고, 5시 26분경 양재 12번 출구 마을버스 정류장에 정차했다. 역 기준 국립외교원보다 200m가량 가까운 곳이다. 교통 사정상 출발은 외교원 앞에서 하더라도, 도착은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하는 건 이 산악회를 잘 아는 노련한 기사라는 얘기다. 덕분에 뜨거운 햇살을 피해 바로 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시 반경 집에 도착하는 거로 무박 소백산 죽구종주를 최종 마감했다.
소백산 죽구 종주 계획대로 '죽령 → 제2연화봉 → 연화봉 → 제1연화봉 → 천동 삼거리 → 비로봉 → 어의곡 삼거리 → 국망봉 → 상월봉 → 늦은맥이재 → 신선암봉 → 신선봉 → 민봉 → 표대봉 → 뒤시랭이문봉(구봉팔문 제4문) → 임도 → 까칠봉(수리봉) → 적멸궁 → 구인사 → 대형주차장'의 26.7km(트랭글) 구간을 10시간 15분 동안 달렸다. 이동 9시간 50분, 휴식 25분!
죽령부터 늦은맥이재까지는 국립공원 등산로답게 3km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나. 국립공원 비탐 구간이 포함된 늦은맥이재에서 까칠봉까지는 2km 속도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6년 전인 2017년 8월 19일 구인사에서 늦은맥이 구간 중 임도부터 표대봉 직전 능선까지는 계곡을 제외하고는 이미 올랐던 코스였으나,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덕분에 초행이나 다름없어, 이 코스만으로도 목표 이상의 즐거움을 느꼈다. 특히 산꾼들 사이에서 신선암봉이라 불리는 신선봉 직전 암봉은 그 중 백미다. 2017년에는 임도에서 표대봉까지 뒤시랭이문봉이 아니라, 그 우측 계곡으로 올랐다.
역시 구봉팔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생한 보람이 있는 봉우리다. 이번에 4봉 뒤시랭이문봉, 2019년 9월 폭우 속 5봉 덕평문봉에 올랐으니, 7봉우리가 남았다. 구봉팔문 종주에 도전해 봐?
무박 산행이라, 비로봉 직전까지 랜턴에 의지해 달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나마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몇 번 달린 구간이라, 새로울 것도 없는 코스다. 그럼에도 폭염 아래 무박 산행이 미친 짓의 최고봉이라는 걸 깨들은 산행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