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김추자의 노래를 좋아한다.
김추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댄스 가수다.
요즘 가수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춤 실력이지만, 그 시절의 김추자의 춤은 획기적이었다.
주로, 월남전에 관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
‘님은 먼곳에’ ‘월남에서 돌아 온 김상사’ 등.
그녀의 노래를 어릴 때 많이도 따라 불렀다.
특히, ‘무인도’ 는 지금도 나는 최고의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봄비’ ‘꽃잎’ ‘거짓말이야’ ‘그럴 수가 있나요’ ‘왜 아니 올까’ ‘무인도’ 등 그녀의 노래는 발 표 될 때 마다 히트곡이었다.
특히, 그녀의 노래 ‘봄비’는 한국 소울 가수로서는 지금도 따라올 노래가 없다.
신중현 사단의 대표 가수로, 그녀는 젊은 나이에 음악을 그만 두었다.
1971년 여름께 김추자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방송계의 구태를 더이상 참을 수 없고 관행처럼 내려오는 적폐를 묵과할 수 없음이 원인이라고 밝힌 그에 대해 가수협회는 1년 방송활동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린다.
그전에는 KBS에서 촬영무단불참 등을 이유로 1개월 출연정지 처분을 내렸었다. 김추자는 당시 급부상하던 신인 가수로 방송활동은 물론 전국 순회 공연 일정이 빡빡했는데, 지금이야 교통편이 발달해 전국 행사를 하루에 두세 개씩 뛸 수 있지만, 고속도로가 막 뚫리기 시작했었고 고속철도는 꿈에도 꿀 수 없는 당시에는 한번 지방공연을 가면 적어도 하루는 지내야 했다.
당시 김세레나와 배호 등과 부산 공연을 갔던 김추자는 자신만 징계를 받았다며 부당함을 호소했고, 이를 버릇없는 행위로 본 업계가 중징계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김추자도 할 말은 많았다. 당시 가뜩이나 연예인을 딴따라로 지칭하며 사회적 대우도 낮았었고, 게다가 신인의 경우 아무리 출연 제의가 많이 들어와도 실질적인 출연료 수입은 적었다.
게다가 세금도 꼬박꼬박 냈어야 했으니 방송을 많이 하면 인지도만 오를 뿐 실질 수익은 기대하기 어렵고, 오프라인 무대를 돌며 수익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김추자는 이러한 신인 연예인에 대한 불평등을 고발했다. 가수협회도 찔린 게 있었는지 3개월만인 가을께 징계가 해제되고 김추자는 12월에 컴백 무대를 준비한다.
하지만 김추자가 겪은 가장 큰 사고는 아무래도 1971년 12월 5일 오전 11시, 김추자의 매니저인 소윤석이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소주병을 그녀의 얼굴에 휘둘러서 얼굴이 난자당한 사건일 것이다.
사건 직후 그녀는 곧바로 명동 고려병원에 긴급 후송되어 응급수술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그녀는 총 6번에 걸친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고가 난 지 4일 만인 9일 서울시민회관에 등장해 예정되었던 컴백쇼를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물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무대 위에 올랐고 여론의 관심이 뜨거웠다. 이후 무인도 등의 히트곡들을 내놓으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1975년 12월 한국 음악계를 얼어붙게 만든 가요계 정화운동과 대마초 사건에서 그녀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신중현의 사무실에서 한두 번 펴봤으며 자신의 것이라고 지목당한 대마초에는 죄다 곰팡이가 슬은 등, 그녀의 혐의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지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요계를 떠나게 된다.
그녀의 노래와 춤은, 얼어 붙은 박정희 독재 정치를 녹이는 힘이었다.
화려한 가수 생활을 접고 성실한 주부로 사는 그녀의 활동을 기대한다.
그녀의 노래 ‘무인도’를 내일 노래교실에서 부를 것 같다.
https://youtu.be/Kx0bCGcnCd4?si=T-i5I1Nfoa19ry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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