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12. 31 주일예배설교
성도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룻기 4:1-6)
서론
인간의 대표적인 권리 가운데 ‘행복추구권’이라는 권리가 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행복한 삶을 위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개인의 권리만을 주장해서 다른 사람들과 이권다툼이 일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손해보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 자신의 권리를 찾아 행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의 행복을 위한 권리보다 더 중요한 권리가 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권리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성도의 권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성도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제 이후로 이 권리를 통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는 기쁨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본론
본문에는 룻에게 한 기업 무를 자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사랑과 열정으로 일하는 보아스의 모습이 나타난다. 즉 그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나간다.
보아스는 사실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를 자 1순위자가 아니라 2순위자였다. 따라서 기업 무를 자 1순위자에게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를 우선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권리를 포기해야만 보아스가 그 기업을 무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가 그 기업을 무르려면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했다. 그것은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를 만나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를 지의 여부를 알아봐야 하고, 만약 그가 그 권리를 포기하면 성읍의 장로들을 증인으로 세워 그 기업 무를 권리를 합법적으로 취득해야 했다.
따라서 보아스가 처리해야 할 일들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보아스는 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아주 신속하고 성실하게 처리해 나간다.
그는 서둘러 성문에 올라가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를 오랫동안 기다리다 만났고(1절), 또한 성읍의 장로 10인을 증인으로 초청했으며(2절),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기업 무를 자 1순위자에게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를지의 여부를 묻는다. 그리고 만일 그가 기업을 무르지 않으면 자신이 무르겠다는 선언을 한다(4절).
룻기 4: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보아스의 질문에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는 처음에는 자신이 기업을 무르겠다고 말한다(4절 마지막 부분). 하지만 그는 그 기업을 무를 때,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이름으로 그 기업을 이어야 한다는 보아스의 단서 조항(5절)을 듣고, 곧 그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즉시 포기한다. 그리고 그 권리를 보아스에게 넘긴다.
* 그러면 왜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는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 처음에는 기업 무르겠다고 이야기했다가 나중에는 무르지 못하겠다고 변덕스러운 반응을 보였을까?
➝ 그것은 그가 오직 자신의 이익과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계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는 먼저 보아스가 자신에게 한 말에 솔깃한 것을 알 수 있다.
룻기 4:3에 보면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하므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은 기업 무를 자 1순위자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율법에 의하면 한 성인 남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그에게 속한 밭은 우선 친척들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친척이라고 해서 아무나 선착순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촌수가 가까운 사람부터 밭을 무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1순위자에게 엘리멜렉에게 속한 밭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귀가 번쩍 뜨였을 것이다. 더욱이 그 밭을 나이 많은 미망인 나오미가 팔려고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음에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밭을 사는 우선권이 기업 무를 자 1순위자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는 즉시 자신이 무르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룻기 4:4 마지막 부분“····내가 무르리라”
이 사람은 머리 속에서 철저히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그 땅을 사는데 돈이 든다 하더라도, 거기서 나오는 소산으로 땅값을 변제하고 늙은 과부를 먹여 살리는 데 충분할 것이요, 게다가 나오미가 나이가 늙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므로 그녀가 죽으면 그 땅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되어 자신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다가올 엄청난 이익을 기대하며 보아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신이 그 밭을 무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보아스가 그를 향하여 한 가지 단서조항을 이야기한다.
룻기 4: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세워야(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이 이야기를 들은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는 이제 다시 머리 속에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선 그 땅값을 지불해야 하고, 두 여인을 먹여 살려야 한다. 게다가 만약 자신과 룻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클 때까지 양육을 해야 할뿐더러, 그 땅은 그 아이의 소유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 엄청난 경제적 손해가 따를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발뺌을 한다.
룻기 4:6 “그 기업 무를 자(기업 무를자 1순위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것(권리)을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여러분! 우리는 이 기업 무를 자 1순위자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 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세우는 ‘기업 무를 자’라고 하는 소중한 권리보다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행복에만 우선권을 둔 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1순위자의 이러한 행동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왜냐하면 한 순간의 이익을 위해 기업 무를 자 최우선권자라고 하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기업 무를 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바로 세우는 참으로 소중한 권리를 가진 자이다.
따라서 기업 무를 1순위자의 기회주의자적인 행동은 소탐대실의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까?
이 땅의 것만 움켜지기에 급급하여 하나님 나라를 잃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이 많으면 믿음의 공동체는 그 앞날에 소망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이와 정반대되는 사람이 존재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바로 세운다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에 그 주인공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가 바로 ‘보아스’이다. 그는 자원해서 나오미의 가정의 기업을 자신이 책임지고 무르려고 했다.
여러분! 보아스는 좀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까? 자신의 기업에 어떠한 손해가 있을지 전혀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 말이다. 하지만 보아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그 역시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를 경우 경제적인 손해가 있을 것을 분명히 계산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지혜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 동안의 그의 언행이나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룻기 3:13-14 책임감 있고 주밀한 사람
2) 룻기 4:1-2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리분별이 분명한 사람
* 그러면 과연 보아스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 것을 알면서도 굳이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르려고 했을까?
☞ 그것은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권리의 소중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보아스가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르는 행위는 분명 자신의 기업에 경제적인 손해가 되는 일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기업 무르는 행위야말로 무너진 믿음의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부여하신 아주 소중한 권리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권리임을 알았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보아스로 하여금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르는 희생적인 행동, 즉 인애의 삶을 베풀게 한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위의 두 사람 중 누구와 같은 사람인가요? 기업 무를 자 1순위자와 같은 존재인가요? 아니면 보아스와 같은 존재인가요?
여러분! 명심하라. 성도의 참된 권리는 내 이익을 먼저 계산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인 나에게 주신 귀중한 권리이다.
우리가 이 권리를 감당할 때, 무너진 공동체가 다시 세워지고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엄청난 손해를 보셨다. 아무런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위를 스스로 버리시는 희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희생적인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회복하기 위한 참으로 소중한 권리를 이행하신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희생을 하나님의 아들만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로 인식하셨고, 그 권리를 사용하여 마침내 죄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처럼,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보아스가 우리에게 본을 보여 준 것처럼 인애와 희생적인 삶을 통해 믿음의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권리임을 기억하자.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애의 삶을 통해 믿음의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부름 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내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인애의 삶을 포기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외면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최선을 다하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 직무유기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임을 기억하자.
예)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의 고백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중에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던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이것은 실화를 다룬 영화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이요 실재 인물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현장 속에서 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내었지만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이렇게 절규한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을 썼더라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오스카 쉰들러의 고백 속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과 성도의 권리를 다시 한 번 묵상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제부터 인애의 삶을 통해 남에게 유익을 주고 공동체를 바로 세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성도의 권리를 다하기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께 잘 했다 칭찬받고, 영광의 면류관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