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있는 임제종 소속의 사찰. 성철스님과 속세 딸의 첫 만남 장소로 알려진 묘관음사.
임제종찰(臨濟宗刹) 묘관음사(妙觀音寺) 전면에는 '妙觀音寺"라는 사명(寺名)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경내 쪽에는 "東國第一禪院(동국제일선원)"이라고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 선사(普愚禪師)가 중국의 석옥 청공 선사(石屋淸控禪師)로부터 임제종의 정통 법맥을 이어받은 후 열반(涅槃)의 미묘한 이치와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석가모니의 깨달음[正法眼藏]’을 스승과 제자가 계속 이어 갔다. 이러한 깨달음은 청허당(靑虛堂) 휴정(休靜)과 환성(喚醒) 지안(志安)을 거쳐 경허(鏡虛)~혜월~운봉(雲峰)~향곡(香谷)~진제(眞際)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묘관음사(妙觀音寺)는 바로 이 법맥을 지키고 이어 가는 사찰이다. 또한 묘관음사는 청담(靑潭), 성철(性徹), 서옹(西翁), 월산(月山) 등 당대의 선지식 승려들도 법을 위하여 몸을 잊고 처절히 수행 정진하던[爲法忘軀] 장소로서 한국 현대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건립 경위 및 변천]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매우 불행한 시기였으나 불교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조선 시대 이래 억불(抑佛)의 한을 일시에 만회하려는 듯 승려 경허를 비롯해 수많은 선지식 승려들이 봇물 터지듯 출현하여 어려운 시기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제도하던 불교의 중흥기라 할 수 있다. 묘관음사는 경허와 혜월의 법맥(法脈)을 이은 운봉선사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전쟁의 참화에 휩싸이게 하던 1941년에 창건하였다. 운봉이 입적(入寂)한 후에 법을 이어받은 제자인 향곡이 중창하였고, 조사선(祖師禪)의 높고 우뚝한 선풍을 선양하면서 30여 년간 수많은 수행승들이 묘관음사에 머물렀다. 1967년 승려 진제가 법을 이어받았다.
묘관음사 경내의 전각은 대웅전, 조사전, 삼성각, 종각 등이 있으며, 당우(堂宇)로는 길상선원(吉祥禪院), 심원당, 산호당, 법중대, 금모대, 행각료와 각종 편의시설이 있다. 또 묘관음사를 창건하고 중창한 승려 운봉과 향곡의 승탑이 모셔져 있다. 승려 향곡과 성철은 불교 정화 운동을 하던 봉암사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승려 향곡, 성철과 절친한 사이였던 청담의 딸인 묘엄이 쓴 책 『회색 고무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인연으로 성철은 묘관음사 길상선원에 머물면서 생식을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동안거(冬安居)를 하였다고 한다.
경내에 있는 ‘탁마정(琢磨井)’이라는 샘은 승려 향곡, 성철과 인연이 깊은 우물로 임제종의 종찰답게 수행과 관련된 일화를 가지고 있다. 두 스님이 수행을 하다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한 스님이 다른 스님의 목덜미를 잡고 우물 속에 머리를 넣고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극한의 상황을 연출하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두 스님의 수행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심원당(尋源堂)
길상선원(吉祥禪院) 대웅전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길상선원(吉祥禪院)이라고 하는 선원이 있다. 선원(禪院)은 스님들이 자신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수행정진하는 곳이다. 선원에서는 안거(安居)라고 하여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기간을 정하여 수행을 하는데,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 10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라 하고, 이 기간중에는 일체 외출을 금한체 수행에만 전념하며, 일정기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기도 한다. 묘관음사가 "東國第一禪院(동국제일선원)"이라고 하는 편액이 걸려있는 이유도 바로 이 선원이 있기 때문이다.
산호당(珊瑚堂) 건축양식이 특이한 모습. 다락방 같은 2층의 채광을 고려해 풍판을 둥글게 도려낸 듯한 느낌을 준다. 원래 풍판은 비바람으로 인한 목조건물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다.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범종각(梵鐘閣)에는 흔히 쓰는 "범어 梵"자가 아닌 "뜰 泛"자로 쓰여진 범종각(泛鐘閣)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 대웅이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하는데서 유래된 부처님의 덕호이며, 대웅전이란 천지간의 대웅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 놓은 집이란 뜻이다.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고도 한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내부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측의 문수보살과 우측의 보현보살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한 켠에는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즉 대승불교의 꽃은 관음보살이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는 아미타불을 근본 스승으로 삼고 항상 모신다는 뜻으로 아미타불의 화불을 모시고 있다. 오른손에는 연꽃봉우리를 들고, 팔목 아래로는 남순동자가 위치하고 있고 왼손에는 감로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조사전(祖師殿) 조사스님들의 진영이 봉안.
삼성각 대웅전 뒤쪽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다. 칠성여래, 독성(나한), 산신을 함께 모신 전각을 삼성각이라고 한다. 불교 고유신앙이라기 보다는 도교나 토착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경우이다. 중생들에게 제물을 주는 산신과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복락을 선사하는 독성 등은 인간의 복을 관장하는 신들이다.
속세의 딸과 성철스님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
성철스님이 속세의 딸 수경과의 첫 만남 장소가 기장 월래의 묘관음사였다. 성철스님은 출가하고 얼마 지나 세속에 떨치고 온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풍문에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따님이 바로 불필(不必) 스님이다. '필요 없는 딸' 이란 법명이다.
불필 스님은 1937년 5월 아버지 이영주(성철스님의 속명)와 어머니 이덕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수경(壽卿) 이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이 사라졌지만, 당시 고향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마을은 아름다운 경호강이 끼고 돌아 마치 강물에 둘러싸인 조용한 섬 같았다고 한다.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할 만큼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일제 식민지 하에서도 수경의 유년시절은 남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뵙기 전까지 수경에게 아버지란 그저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불필스님은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어려서 누군가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그저 동화 그림에서 나오는 사람인가 싶은 정도" 라 기억했다. 문제는 당시 낮았던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이었다. 불필 스님은 "보지도 못한 아버지인데, 스님이라는 게 싫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스님의 딸" 이란 소리를 듣기 싫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는 세상 등지고 가족도 버리고 산속에서 무엇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을 감추고자 했으며, 속으로 감추면 감출수록 아버지와 불교에 대한 궁금증은 새록새록 피어났다. 조숙하고 총명했던 수경은 그렇게 아무도 모를 고민이 많았다. 수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옛말을 인용해가며 "서울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라 상경,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집안 살림이 넉넉했던 가문에서는 흔히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이미 삼촌(성철스님의 동생)이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울 초등학교의 수업은 시골 학교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어린 나이로 서울 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아무도 몰랐기에 큰 짐을 벗은 것처럼 마음은 홀가분해 날아갈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처음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사람은 묘엄(妙嚴.현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스님이었다. 묘엄스님은 성철스님과 절친한 청담(淸潭) 스님의 딸이다. 어느 날 묘엄스님이 다른 비구니 스님과 함께 수경을 찾아왔다. "큰스님께서 경남 월래 묘관음사에 계시니 한번 가서 뵙도록 하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얼떨떨해 있는데, 서울에 같이 유학 와 있던 삼촌이 "담임선생님께 스님을 찾아간다고 허락을 받고 한번 가보자"며 나섰다. "평생 불러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아버지가 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반(半), 자식을 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미움 반(半)에 "얼굴이라도 보자"며 삼촌을 따라 나섰다. 삼촌을 따라가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미워한 아버지인데, 그래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이것도 천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묘관음사에 도착하니 해질 무렵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니 누군지 모르는 무섭게 생긴 스님 한 분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님이 바로 성철스님과 절친한 도반(道伴) 인 향곡(香谷) 스님이었다. 향곡스님이 말했다.
"철수좌(성철스님) 가 오늘 이상한 손님이 온다면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경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친혈육인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쳐 놓은 아버지, 그래서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애써 찾아온 딸을 피해 사라지다니. 향곡스님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성철스님을 찾아 나섰다. 조금 기다리자 향곡스님이 다 떨어진 누더기에 부리부리하게 광채 나는 큰 눈만 보이는 스님과 함께 나타났다. "저분이 내 아버지인가" 하는 순간 눈 큰 스님이 소리를 질렀다.
"가라, 가!"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수경은 그 순간 "삼촌 돌아가요"라며 돌아섰다. 그때 무서운 얼굴의 향곡스님이 부드러운 미소로 붙잡았다. 자그마한 방으로 데려가선 과자며 과일이며 먹을 것을 내놓았다. 이렇게 성철스님과 딸 수경은 첫 만남은 기장 월래 묘관음사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