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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의의와 가치
김진섭
우리가 생활에서 오는 모든 속박과 심려를 일조일석에 끊고, 일찍이 보지 못한 자유천지를 표표히 소요할 때 이를 아름답고 신기한 경물이 주는 수많은 신선한 인상은 얼마나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가. 확실히 여행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향락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행은 한낱 향락에만 그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여행은 원래 한 가지 향락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에 의하여 당연히 향락 이상의 무엇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물론 아직껏 엄격한 철인哲人 세네카가 사람 각자에게 요구함과 같은 그러한 동반자를 대동하고 여행에 나갈 수 없다손 치더라도, 우리들은 세상물정을 대강 참작하는 지식인인 이상엔 여행이 가르치는 학문에 전연 무감각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 역시 여행이 하나의 좋은 학문임을 요구하는 자다. 생각하여 보라.
알지 못하는 땅, 보지 못하던 산천, 눈에 익지 않은 생활, 기묘한 언어 풍속의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학문이 아니라면 대체 어떠한 것이 학문이랴!
우리는 여행 그것 때문에 모든 구속을 탈하고 모든 근심을 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행에 의해서 문득 알지 못하는 많은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별로 노력함 없이 무의식적으로 극히 귀중한 얻기 어려운 실재교육을 간단없이 자기 위에 베풀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귀로만 듣는 개념적 교육이 죽은 교육이라면, 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 실험적 교육은 산교육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에 언제든 여행의 학문은 활발한 감흥을 끊임없이 우리 가슴속에 일으키지 않는가.
일찍이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r는 근대교육의 근본적 결함을 지적해서 그것이 너무나 개념적임을 말하고 많은 학교와 아동은, 가령 한 예를 들면 바다라는 실물을 보기 전에 바다의 개념을 주입하기 때문에 그 이지적 발달이 늦음을 논한 바 있었거니와,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여행은 교육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자에 소위 수학여행이 학교교육의 중요한 행사의 한 가지로 된 이유는 실로 참된 견식을 여행에서 구하려는 요구의 표현이나 다름없다.
일찍이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경이 그가 젊었을 적에 이 세계의 많은 곳을 편력함으로 의해 무수한 사실에 면접하지 못했었던들 그의 정신생활은 확실히 지금만큼 넓지 못했으리라하고 술회 했을 때, 이것은 그 상상력이 낯선 땅을 밟고, 고대의 많은 기념물을 보며 가버린 위인의 행적을 회상하며, 말하자면 역사의 영원한 진리에 직면함으로 의하여 얼마나 풍부화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느냐하는 사실을 고백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하나의 경관은 그것이 설사 얼마나 훌륭하고 도취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 움직이고 있고 그 속에 충만 되어 있는 사람과 운명과 생활을 직접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에 비로소 그 최후의 내용을 현시하는 것이요, 또 어떤 경관이 아름답다는 것도, 그것이 인간적 운명과 서로 결합됨으로 하여 애절하고 고귀한 광채를 발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경관이란 있을 수 없다.
한 장의 사진, 한 폭의 그림, 한 권의 지리서, 그것은 결국 이러한 인간적 결함의 호흡을 충분히 나타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실물과 같이 우리를 감동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의 기회를 가짐으로 하여 간혹 어느 경관을 구경할 때, 그것은 흔히 우리에게 명승고적名勝古跡을 찾게 하고 언어 풍속에 유의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지리, 민속, 역사, 예술, 기타 여러 가지의 학문 연구에 대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니, 우리의 정신활동에 대한 여행의 의의와 가치는 참으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
-김진섭의 ’여행의 의의와 가치를 읽고 -
신금철
김진섭 작가는 1903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하여 1950년 8월 서울 청운동 자택에서 납북된 후, 오늘날까지 생사를 알 수 없어 많은 문학인을 안타깝게 한다.
200여 편의 수필과 평론을 발표하고 삶에 관한 생각을 꾸밈없이 엮어낸 그의 수필은 한국 수필문학의 모델로 간주된다. 또한, 작가는 한국 근현대문학에서 수필을 당당한 문학의 장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독문학을 전공한 그는 뛰어난 번역가로 첫 수필집 ⟪인생 예찬⟫에 안톤 슈낙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번역하여 실었다.
열네 시간의 스페인 비행과 4시간 50분의 아이슬란드 비행의 장시간을 대비하여 평소 읽고 싶었던 김진섭의 수필집⟪생활인의 철학⟫⟪백설부⟫⟪김진섭 수필 선집⟫을 구매했다. 목차를 살펴보니 겹치는 수필이 있고 짐이 많아 ⟪생활인의 철학⟫한 권만을 비행기에 실었다. 다소 문장이 길고 한자가 많아 읽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뜻풀이가 되어 있어 이해되었다. 그 중 ⟨여행의 철학은⟩이번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대가 그대의 여행에서 덕을 보지 못했음에도 결코 부당한 일은 아니었오. 왜냐하면 그대는 결국 자신(빈약한 그대 자신)과 더불어 여행 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소크라테스-
작가는 ‘여행의 철학’ 세네카의 여행론에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여행론을 서술했다. 소크라테스가, 여행을 했어도 아무 이익과 소득이 없음을 탄식한 어느 사람에게 남긴 여행에 대한 대답이다.
작가는 무조건 여행만 하면 원래가 빈약한 머리일지라도 금시에 풍부한 정신을 담은 별인간이 되어서 돌아오리란 법은 없다고 했다. 여행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정도와 감성적 직관력의 여하에 따라 헛되지 않은 여행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제외하곤 웬만한 곳은 원 없이 다녀왔다. 여행 초기에는 그저 여행의 설렘, 낯선 나라의 문화와 풍경, 풍물과 유적들이 신기하여 어설픈 감동과 경이로움으로 만족했었다. 작가의 생각처럼 철학이 담긴 여행으로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지식을 넓히며 역사 가치를 통찰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여행이 취미가 되고부터는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충분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현장에서 꼼꼼히 메모하고 혜안과 심안으로 보려고 노력하다보니 전과 다른 무언가가 보이고 느낌도 달라졌다.
여행은 한낱 향락에만 그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여행은 원래 한 가지 향락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에 의하여 당연히 향락 이상의 무엇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끔 여흥을 위한 단체여행을 할 때면 나는 지루함을 느낀다. 가무에 별로 흥미가 없고 아마도 조용한 것에 익숙한 내 성격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 여흥을 통해서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여행의 소득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행이 단순한 여흥과 눈요기로 끝나지 않고 여행을 통해 자기 성찰과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면 더욱 가치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알지 못하는 땅, 보지 못하던 산천, 눈에 익지 않은 생활, 기묘한 언어 풍속의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학문이 아니라면 대체 어떠한 것이 학문이랴!
만일에 귀로만 듣는 개념적 교육이 죽은 교육이라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 실험적 교육은 산교육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에 언제든 여행의 학문은 활발한 감흥을 끊임없이 우리 가슴 속에 일으키지 않는가.
여행은 산교육이다. 낯선 문화, 전시회 등을 접하고 풍물이나 역사적인 유물 유적을 볼 땐 여행지에 대한 충분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현장의 모습을 직접눈으로 보면 더욱 생동감이 있고 진한 감동을 느낄 수가 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임을 실감하게 된다.
여행은 교감交感이다. 여행할 때마다 사진작가인 남편이 아름다운 영상을 사진에 담는 동안 나는 자연과의 교감을 나눈다. 눈으로 보면서 자연과 대화한 내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고, 귀 기울여 들은 자연의 소리는 음성으로 녹음을 하여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 편의 글을 쓴다. 좋은 작품 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자연과의 교감을 기억할 수 있는 자료로 만족한다.
사실 하나의 경관은 그것이 설사 얼마나 훌륭하고 도취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 움직이고 있고 그 속에 충만 되어 있는 사람과 운명과 생활을 직접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에 비로소 그 최후의 내용을 현시하는 것이요, 또 어떤 경관이 아름답다는 것도, 그것이 인간적 운명과 서로 결합됨으로 하여 애절하고 고귀한 광채를 발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경관이란 있을 수 없다.
얼마 전 세계적인 미술관인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하였다. 스페인의 3대 화가인 고야, 벨라스케스, 무리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충분한 공부를 하고 작가의 성격과 화폭에 나타난 그림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미술에 대한 안목과 지식이 부족한 나에게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옷을 입은 마하’ ‘옷을 벗은 마하’로 재판까지 받고 나서 궁중 화가의 지위를 박탈당한 후, 죽음의 색깔로 광기 있는 그림을 그린 고야의 작품 사투르누스(아들을 잡아먹는 아버지)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신의 비참한 노후를 검은색의 그림으로 표출했던 인간적인 고뇌에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림은 화가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게 여행은 기도의 시간이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교회이든 사찰이든 종교시설을 찾을 때에는 낮아지고 겸손하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때로는 절에서도 마음 속 참배를 하고 교회에선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성호를 긋는다. 종교의 지향점은 무한한 선과 자비라 생각하며 때 묻은 내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온전히 비운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의 용서를 구하며 기도 속에 새출발의 의지를 다진다. ‘기도는 해달라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고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라는 말처럼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살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따르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그 의지나 다짐이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 공중분해 될지라도 순간만큼은 욕심을 모두 비워낸다.
우리가 여행의 기회를 가짐으로 하여 간혹 어느 경관을 구경할 때 그것은 흔히 우리에게 명승고족을 찾게 하고 언어 충속에 유의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지리, 민속, 역사, 예술, 기 타 여러 가지 학문 연구에 대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니 우리의 정신활동에 대한 의의와 가치는 참으로 크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생각처럼 여행은 우리의 정신 활동에 큰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삶이 지루하거나 무미건조할 때, 또는 삶에 지치고 힘들 때 과감하게 여행을 떠나라고 권유하고 싶다. 여행하는 동안 보고, 알고, 느낀 것들을 통하여 삶에 지친 머리를 맑히고 묵상 중에 자연과 교감하고 진지하게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삶이 즐겁고 희망찰 것이다.
진선미를 통한 가치 있는 삶의 추구가 인생철학이라면, 여행 역시 자신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과거보다 성숙해지며, 미래지향적인 자신이 되어 돌아오면 이에 여행의 의의意義와 가치價値가 담기지 않겠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 들뜬 마음으로 그저 생각 없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알차게 준비하고 계획하여 여행지로 출발하면 행복이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올 수 있으리라.
'여행에서 지식을 얻어 돌아오고 싶다면 떠날 때 지식을 몸에 지니고 가야한다.'
-사무엘 존슨-
그림의 떡을 맛 보다
신금철
창을 열었다. 사방이 푸른 초원이다. 세계에서 공기가 제일 깨끗한 나라, 개울물을 먹어도 탈이 없는 무공해의 나라, 아이슬란드의 아침을 맞았다. 수돗물 한 컵을 쭈욱 마셨다. 머리도 마음도 산뜻하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눈을 지그시 감으니 여행의 설렘으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꿈만 같았다. 여행 첫날, 아이슬란드의 케플라빅공항에 새벽 1시에 도착하여 동화 속 집처럼 예쁜 숙소에서 단 몇 시간밖에 머무르지 못해 안타까웠다. 아이슬란드 8박 9일 여행 동안 8곳의 숙소를 이용할 만큼 한 장소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동하느라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정이었다.
남한의 면적과 비슷한 나라에 36만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3만 명이 모여 사는 수도 레이캬비크를 제외하고는 차로 서너 시간을 달려도 두럭을 이룬 마을은커녕 집 한 채 보기 어려웠다.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 아이슬란드가 부러웠다.
여행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흠뻑 취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2차선으로 길게 이어진 도로를 달리다, 창밖 경치에 취해 차를 세우고 초원을 거닐며, 멋진 풍경을 사진기에 담기도 했다. 스쳐지나가는 대자연의 경관만 보아도 저절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점점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아파트와 휘황찬란한 도시의 소음, 북적이는 인파, 자동차의 물결은 흔적 없이 내 안에서 사라졌다. 오직 작은 풀들과 키 작은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흔드는 푸른 초원의 정적 속에서 침묵으로 그들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자연 앞에 겸손해지고 속진俗塵을 털어내려 가끔 깊은 숨을 토해냈다.
높은 산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고 화산이 분출하며 굳어진 신비스러운 형상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구릉을 이루고 있다.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한 구릉의 모습은 신이 빚은 걸작이었다. 나는 원 없이 조각품을 감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지금 과학이 발달하여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달나라를 탐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감히 신을 능가할 수는 없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며 교만과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슬란드의 싱벨리르, 게이시르, 굴포스는 골드써클이라 하여 꼭 가봐야 할 여행지이다. 싱벨리르 국립공원은 아이슬란드의 역사적 장소이며 유네스코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처음으로 아이슬란드에 상륙한 사람들이 야외 의회인 알싱(Athing)이 개최된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탄성을 자아낸다. 병풍을 두른 듯 화산의 흔적인 현무암이 협곡을 이루고 있어 마치 과거로 회귀한 듯 신비스럽다. 이토록 아름다운 싱벨리르는 지각변동으로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의 경계에 있어 두 층이 충돌하며 솟아올라 만들어졌다 한다. 두 층은 1년에 2㎝씩 벌어진다니 호기심과 신비함이 어우러져 태고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인간으로서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위대한 자연의 섭리에 다시 한번 나는 작아졌다.
국기가 휘날리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넓은 초원과 습지에는 옹기종기 모인 양들이 풀을 뜯고, 파란 하늘을 담은 강물이 소곤거리며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낮은 키의 풀들이 찬바람을 이기며 겨울맞이 준비를 하고 작은 보랏빛 꽃들은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듯 나풀거렸다. 하얀 십자가를 머리에 인 작은 교회는 파란 풀밭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다워 상상 속의 에덴동산을 연상케 했다. 햇살 마저 포근하여 하늘을 향해 맘껏 손을 저으며 아이슬란드의 매력에 푹 빠져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게이시르는 간헐천이다. 부근 주차장까지 유황 냄새가 심하고 멀리서도 바람에 날리는 연기가 선명하여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다. 바람이 세다. 모자를 눌러쓰고 털장갑을 끼고 추위에 맞서며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뽀골뽀골 푸른색의 물이 끓고 있다. 가끔 고열을 견디지 못한 간헐천은 물대포를 쏘아 올렸다. 신기하여 탄성을 울리는 사람, 재빠르게 순간을 포착하여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사람, 모두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인공분수가 아니다. 지각변동에 의한 자연의 신비다. 인류의 역사 속에 자연의 모습을 바꿔놓는 지각변동과 지진, 태풍, 폭우, 폭설은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신호인 듯했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자연 앞에 겸손하라고….’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를 숙였다.
아이슬란드에는 굴포스를 비롯하여 셀랴란즈포스, 스코가포스 등 상상을 초월한 신기하고 아름다운 포스(폭포)가 많다. 굉음을 내며 낙하하는 굴포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두려움과 놀람, 환희와 신비, 모든 감정을 총동원해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근원은 어디일까? 숨을 헐떡이며 쉴 틈 없이 흐르다 부딪고 놀라 멍든 상처를 안고 낙하하는 순간 폭포는 누런 상처를 안고 신음하는 듯 보였다. 세계 10대 폭포 중 하나인 굴포스는 지구 밖 세상을 보는 듯 벅찬 감동을 주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폭포의 괴력에 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어쩌다 낙오되어 내 우비에 떨어진 작은 물방울조차도 신비스러워 젖은 우비를 살그머니 만져보았다. 물방울은 비록 먼바다까지 완주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기화氣化하고 응결凝結하여 바다를 향한 꿈을 꾸리라.
스코가포스는 수직 폭포로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이 환상적이다. 구릉의 바위에 붙은 이끼와 자잘한 풀들 위에 선명한 색으로 뜬 무지개 모습은 천상의 화원이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지상의 낙원이 또 있을까? 폭포에서 낙하한 물에 손을 담갔다. 온몸의 피로가 풀리는 듯 짜릿했다. 지상에 걸친 무지개는 요염한 몸짓으로 오래 머물며 관광객의 마음을 곱게 물들이고 주체할 수 없이 달뜬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선녀처럼 날개옷을 입고 너울너울 춤추는 무지개를 보며 마음껏 행복을 누렸다.
아쉬움을 뒤로 빙하를 보러 걸음을 옮겼다. 아이슬란드 여행의 백미는 빙하체험이다. 요쿨살론은 수륙양용차를 타고 들어가 집채만 한 빙하를 보며, 녹은 물에 손을 담가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형체의 얼음 조각 작품을 감상하고, 깨지는 빙하의 신음 소리도 들었다. 가이드가 건져낸 얼음 조각을 만져보고,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도 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상승하고 극지방의 동물 생존이 위험하다는 과학적 상식은 잠시 잊고 싶었다. 빙하가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다이아몬드 비치에서 얼음 조각을 종이컵에 넣고 냉커피를 만들어 주던 며느리와의 아름다운 추억은 오래 간직하고 싶다.
“오로라다!” 흥분한 듯 외치는 아들의 소리에 일제히 맨발로 뛰어나갔다. 아이슬란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인 오로라! 추운 겨울에만 볼 수 있다는 오로라를 여름에 볼 수 있는 행운의 티켓을 선물 받았다. 8월 27일 밤, 듀피보구르 지방의 숙소인 통나무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였다. 혹시나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집 밖에 휴대폰을 켜고 카메라를 설치했던 아들은 오로라가 분명하다며 휴대폰 사진을 보여주었다.
육안으로 보기에 약간 푸른색을 띠고 길게 늘어진 오로라는 서서히 밤하늘을 유영遊泳했다. 카메라에 찍힌 짙은 초록빛 의상에 반짝이는 별을 수놓은 오로라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오로라는 환호하는 관객을 의식한 듯 멋진 공연을 펼쳐주었다. 맨발도, 추위도 잊고 오로라의 연기에 취한 우리 가족에게 아이슬란드의 밤은 축제의 장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도 같은 은총의 선물이었다. 은총에 감사하며 기도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림의 떡’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차지할 수 없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희수喜壽의 남편과 종심從心을 훨씬 넘은 나에게 장거리, 장시간의 아이슬란드 여행이 벅찬 줄 알면서도 늘 꿈을 접지 않았었다. 책으로, TV로 아이슬란드의 원초적인 자연에 빠져 군침을 흘리던 우리는 아들 며느리 덕분에 꿈을 현실로 이루었다. 지구상의 보석인 아이슬란드 환상의 도로인 링 로드(Ring Road)를 완주하며 신비에 취해 꿈결 같은 날을 보냈다.
태초의 낙원樂園, ‘그림의 떡’이었던 아이슬란드의 여행은 달콤한 꿀맛이었다.
첫댓글 한국수필의 특집 추억의 명수필은 평론보다 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진섭은 우리 전통수필이라기보다 서구의 에세이를 들여온 분입니다.
인용된 작품도 에세이라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글에 감상평을 쓰고 에세이에 전통 정서를 담아 우리 수필로 용을 그리면서 눈알을 박아넣듯 수필 한편을 명작으로 남기셨습니다.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격려 말씀에 힘이 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들 때 기댈 선생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