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自樂)길 걷다가 쉬고, 쉬고는 다시 걸으며 즐기는 소백산 자락(自樂)길은 봉화를 거쳐 마구령-고치령의 고갯길을 지나 다시 국망봉·비로봉·연화봉 기슭을 돌아 풍기·순흥·단산·부석마을 등 아름다운 산간마을을 낳은 평화롭고 아늑한 촌길이다. 선비촌 승운정의 ‘소백남허고순흥(小白南墟古順興)’이라 쓴 글귀처럼 소백 남쪽의 터는 옛날 순흥이라 불렸다. 순흥은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남쪽은 순흥, 북쪽은 송도라 할 만큼 번창했던 고을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세조 3년(1457)에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를 꾀하다 이곳에서 발각되어 피천지가 되었고, 고을은 산산이 쪼개어 이웃의 단양·영월·태백·풍기·예천·봉화로 분산 편입시켜 버렸다. 하기야 혁명은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삼족이 멸문의 화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1683년, 숙종은 순흥부를 절의지향(節義之鄕)으로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이곳 유생들의 곧은 절의가 일제의 눈엣가시가 되자, 고을 전체를 불살라 버린 아픔을 간직한 그런 곳이다. 자락길의 시작, 금성대군신단 소백산 1자락길 시작점은 선비촌에서 제월교(청다리)를 지나 ‘단종 복위운동성지 금성대군신단’이란 안내판이 걸린 자리다. 신단은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화를 당한 금성대군과 순흥 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 그리고 뜻을 같이한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 18년(1742)에 설치한 제단으로 품(品)자 형태로 상석을 설치해 두었다. 내삼문의 금성단(錦城壇)현판의 글씨 중에 단(壇)자가 옆 금성(錦城)의 글씨하고는 특이한 필체라 흥미롭다. 단(亶)의 첫 획이 신단의 의미를 아는지, 힘을 놓고 꼬부라져 있다. 성혈사 나한전의 꽃살문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성혈사((聖穴寺)에는 성혈이 없다.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작은 토굴의 수도처가 어딘가 있었을 텐데, 그러나 세월의 흔적은 성혈은 암자가 되고 암자는 성혈사로 환생한 듯 쇄락해가던 나한전 좌우로 불사가 한창이다. 성혈사의 핵은 나한전 어간의 두 짝 꽃살문이다. 이 꽃살문은 널판에 연꽃과 수금을 통째로 새겨 문짝에 끼운 것으로 각수(나무나 돌을 조각하는 사람)가 4짝 통판을 이어 새겼다. 연지(연못)에는 만개한 연꽃과 마흔여덟 송이의 연꽃봉오리로 절정이다. 유유자적하는 물고기떼며 연잎의 이슬을 굴리는 개구리며 두 마리의 게, 먹이 낚기에 나선 한 쌍의 왜가리, 여의주를 찾듯 물속을 응시하는 작은 용 한 마리 등 나한전 꽃살문의 연지에선 수상 연주회로 한창이다. 그중에도 압권은 연잎에 좌정하고 삼라만상을 즐기는 노 젓는 동자의 모습이다. 바래지고 퇴색된 나뭇결은 흡사 노인의 손등의 정맥처럼 닳아진지 오래다. 언젠가 저 꽃살문도 제 수명을 다해 그 명맥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 걱정스럽다.
중국 돈황 막고굴 원장의 말, “막고굴을 찾을 때마다 나는 지금 2천 년 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의 역사를 찾아가는 일이지요.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의 책임 있는 일이요 보람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처럼 나는 461년 전, 1553년의 나한전 시대에 서있는 걸까? 문화재를 찾아가는 것도 그 시대의 역사를 찾아가는 책임 있는 일이요 보람이라고, 비록 불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자락길을 다시 따라 걷다가 길가 맛자랑 묵집에서 점심 겸 저녁으로 시장기를 때우고 나니 소백태백 양백지간(小白太白, 兩百之間)의 십승지 명당에서 쏘다닌 소백산 자락(自樂)의 하룻길 답사가 그렇게 끝이 났다.
글·사진 박윤호(대구시 수성구 용학로) |
출처: 문화재청 공식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