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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육계》(三十六計, 영어: Thirty-Six Stratagems)는 중국의 병법서이다. 병법에 있어서의 전술 36개를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모은 것이다. 36계는 승전계, 적전계, 공전계, 혼전계, 병전계, 패전계의 총 6개의 큰 줄기에서 각각 6개의 계책이 제시된다.
개요
만들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개 5세기까지의 고사(故事)를 17세기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에 수집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941년, 산시성 빈현에서 재발견되어 시류를 타고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여러 가지 시대의 고사와 교훈이 여기저기 들어있어 중국에서는, 병법서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손자병법》(孫子兵法)만큼이나 일상생활에서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손질이 덜된 부분이 있어 전술이라고는 부를 수 없을 것 같은 것이 포함된 경우도 있다. 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주역에서 인용하며 해설하고 있지만, 모두 좋은 문장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6계 6조의 배열도 바꿔 넣는 편이 낫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삼십륙계가 역사 속으로 묻혀졌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저자
《손자병법》의 이일대로(以逸待勞), 《전국책》(戰國策)의 원교근공(遠交近攻), 두보시(杜甫詩)의 금적금왕(擒賊擒王),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고육계(苦肉計), 미인계(美人計)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어느 한 사람이 지은 것으로 볼 수 없고, 어느 한 시대에 이루어진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옛날부터 전해지는 병서의 정수를 모은 책으로서 다른 병서들에 비해 늦게 나오고 경서나 사서와 같이 정통으로 취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출판된 적은 없다.
사료
1. 《자치통감》(資治通鑑)의 '檀公三十六策 走爲上策 計汝父子唯有走耳'이란 구절에서보면 단도제가 정리했을거란 추측을 할 수 있다. 남북조 시대, 제(齊:南齊, 479∼502)나라 5대 황제인 명제(明帝) 소도성(蕭道成)의 종질로서, 고제의 증손(曾孫)인 3대 4대 황제를 차례로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簒奪)한 황제인데, 그는 즉위 후에도 고제의 직손(直孫)들은 물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잡아 죽였다. 이처럼 피의 숙청이 계속되자 고조 이후의 옛 신하들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개국 공신인 회계(會稽) 태수 왕경측(王敬則)의 불안은 날로 심해졌으며, 불안하기는 명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부 장괴(張壞)를 평동(平東)장군에 임명하여 회계와 인접한 오군(五郡:강소성 내)으로 파견했는데 왕경측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도읍 건강(建康:南京)을 향해 진군하여 불과 10여 일 만에 건강과 가까운 흥성성(興盛城)을 점령했다. 도주에 농민들이 가세함에 따라 병력도 10여 만으로 늘어났다. 한편 병석의 명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던 태자 소보권(蕭寶卷)은 패전 보고서를 받자 피난 준비를 서둘렀으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경측은 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단장군(檀將軍)의 '서른 여섯 가지 계책 중 도망가는 것도 계책[三十六計走爲上計]' 이었다고 하더라. 이제 너희 부자(父子)에게 남은 건 도망가는 길밖에 없느니라." 하는 말에서 많이 인용되었다.
2. 후에 주림(朱琳)이 지은 홍문지(洪門志)에는 청대 초에 홍문회(홍화회)에서 《삼십륙계》를 편찬한 일이 있다고 한다. 홍화회(紅花會), 삼불사(三不社), 천지회(天地會), 가로회(哥老會), 대도회(大刀會) 등 실제로 반청복명(反靑復明) 운동을 했던 단체들이다. 대만에서 명나라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정성공이 이러한 반청복명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만주족의 지배를 물리치고 다시 한족 왕조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3. 풍부한 처세철학을 내포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어서 목판으로 간행하거나 필사되긴 했지만 당시 지식인들이 서가에 놓아 드러내는 것은 꺼려했다고 볼 수 있다.
내용
승전계(勝戰計) : 제1계∼제6계
제1계. 만천과해(瞞天過海) : 하늘을 가리고 바다를 건너다.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하면 나태해지고, 자주 보면 의심하지 않게 된다. 음(陰)은 양(陽) 속에 있는 것이지. 양의 대립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양(太陽)은 태음(太陰)이다.
제2계. 위위구조(圍魏救趙) :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
적을 공격하는 것은 분산시키느니만 못하고,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비밀리에 공격하느니만 못하다.
제3계. 차도살인(借刀殺人) :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해치다.
적은 분명하고 친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남의 힘을 빌려 적을 치는 것은 자신의 힘을 쓰지 않고 '각출'로써 일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제4계. 이일대로(以逸待勞) : 쉬면서 힘을 비축했다가 피로에 지친 적을 맞아 싸우다.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꼭 싸움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효과적인 방어는 강한 자를 약하게 만들고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든다.
제5계. 진화타겁(趁火打劫) : 남의 집에 불난 틈을 타 도둑질하다.
적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적을 패배시킨다.
제6계. 성동격서(聲東擊西) : 동쪽에서 소리치고 서쪽을 공격하다.
적의 지휘가 혼란에 빠지면 앞 못보는 장님과 같다. 이는 홍수가 범람하는 상이나, 적이 자아 통제를 할 수 없는 틈을 타서 그를 멸망시켜야 한다.
적전계(敵戰計) : 제7계∼제12계
제7계. 무중생유(無中生有) :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기만하면서 기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전선에 무언가를 배치하여 적을 이중의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즉 기만적인 외형은 종종 다가올 위험을 감추고 있는 법이다.
제8계. 암도진창(暗渡陳倉) : 한고조가 은밀히 진창으로 진군하여 항우의 기선을 제압하고 한나라를 세우다.
적을 제어하기 위해 행동을 고의로 노출시키고 기습공격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하다.
제9계. 격안관화(隔岸觀火) : 강 건너 불보듯 하다.
적의 연합군 내부에 심각한 내분이 발생했을 때, 조용히 그 혼란이 극에 달하기를 기다린다. 적의 내부의 투쟁이 격화되면 적의 연합군은 붕괴를 자초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 비롯되는 유리한 형세를 면밀히 관찰하여 행동으로 옮길 준비를 한다.
제10계. 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속에 칼날을 품다.
적으로 하여금 우릴 믿게 안심시킨 후 비밀리에 일을 도모한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후 행동하며 변화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부드러운 외형에 강한 내면을 숨기는 것이다.
제11계. 이대도강(李代桃僵) : 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대신 말라죽다.
운세는 반드시 기울기 마련이니, 작은 것을 희생시켜 전체의 이로움을 구해야 한다. →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제12계. 순수견양(順手牽羊) : 기회를 틈타 양을 슬쩍 끌고 가다.
적의 미세한 틈이라도 받드시 장악해야 하며, 조그만 이익이라도 반드시 얻도록 해야 한다.
공전계(攻戰計) : 제13계∼제18계
제13계. 타초경사(打草驚蛇) : 풀을 베어 뱀을 놀라게 하다.
적에게 어떤 의심이 생기면 반드시 가서 살펴보아야 한다. 자세한 정찰 후에 비로소 행동해야 한다. 반복하여 정찰해야만이 적의 숨겨진 음모를 발견할 수 있다.
제14계. 차시환혼(借屍還魂) :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빌려 부활하다.
강한 자는 이용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약한 자는 도움이 필요하니, 이용할 수 없는 것을 빌어서 이용한다. 내가 약한 자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가 나에게 구한다.
제15계. 조호리산(調虎離山) : 범을 산 속에서 유인해내다.
자연조건이 적에게 불리해지기를 기다리고 기만으로 그를 유혹한다. 적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공격하도록 유혹한다.
제16계. 욕금고종(欲擒姑縱) :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풀어주다.
적을 지나치게 몰아세우면 적이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한다. 적을 달아나게 놓아두면 그 기세가 꺾일 것이다. 적을 쫓되 다급하게 쫓지 않고, 적의 힘을 고갈시키고 전투의지를 쇠약하게 만들어 적을 분산시킨 후 사로잡아야 한다. 그러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적을 진압할 수 있다. 즉 공격을 주도면밀하게 지연시킴으로써 적을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것이다.
제17계. 포전인옥(抛磚引玉) : 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다.
지극히 유사한 것으로 적을 미혹시킨다음 공격한다.
제18계. 금적금왕(擒賊擒王) :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는다.
적의 주력을 궤멸시키고, 그 괴수를 사로잡아 적을 와해시킨다. 용도 물을 떠나게 되면 어쩔 도리가 없게 된다.
혼전계(混戰計) : 제19계∼제24계
제19계. 부저추신(釜底抽薪) : 솥 밑에 타고 있는 장작을 꺼내 끓어오르는 것을 막다.
강한 적을 만났을 때는 정면으로 공격하지 말고 가장 약한 곳을 찾아내 공략하라.
제20계. 혼수모어(混水摸魚) : 흐린 물에서 고기를 잡다.
적의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서, 그 약자를 당신의 편에 끌어들여라. 그러면 적은 자멸하게 될 것이다.
제21계. 금선탈각(金蟬脫殼) : 매미가 허물을 벗듯 감쪽같이 몸을 빼 도망하다.
적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진지의 원형을 보존하고 군대가 여전히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하라. 그러면 적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제22계. 관문착적(關門捉賊) : 문을 닫아 걸고 도적을 잡다.
세력이 약한 소규모의 적에 대해서는 포위하여 멸망시켜야 한다. 퇴각하게 놓아두면 섬멸하는 데 불리하다.
제23계. 원교근공(遠交近攻) :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다.
멀리 있는 적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편이 유리하다. 멀리 있는 적과는 정치적 주장이 다를지라도 잠시 연합하라.
제24계. 가도벌괵(假道伐虢) : 기회를 빌미로 세력을 확장시키다.
두 개의 강대국 틈에 끼인 소국이 적의 위협을 받게 되면 즉시 군대를 보내 구해줌으로써 영향력을 확장시켜야 한다.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단지 말만 앞세우면 신뢰받을 수 없다
병전계(竝戰計) : 제25계∼제30계
제25계. 투량환주(偸樑換柱) : 대들보를 훔쳐내고 기둥으로 바꾸어 넣다.
연합군으로 하여금 진영을 자주 바꾸게 하여 그 주력 부대를 빼내게 한다. 그들이 스스로 붕괴하기를 기다려 그 틈을 타 적을 공격한다. 이는 마치 수레의 바퀴를 빼는 것과 같다.
제26계. 지상매괴(指桑罵槐) :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를 욕하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려면 경고를 해야 할 것이다. 강한 기세로 나아가면 충성을 바칠 것이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면 순종하게 될 것이다.
제27계. 가치부전(假痴不癲) : 어리석은 척하되 미친 척하지 말라.
무지한 척 가장하되 무슨 행동을 하지 말라. 총명한 척하며 경거망동하지 말라. 기밀을 누설하지 말고 조용히 계획하라. 천둥번개가 순식간에 치는 것처럼.
제28계. 상옥추제(上屋抽梯) : 지붕으로 유인한 뒤 사다리를 치우다.
고의로 약점을 노출시켜 적을 그대의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적의 응원부대를 차단하여 적을 사지로 몰아 넣어라. 판단착오 때문에 적은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제29계. 수상개화(樹上開花) : 나무에 꽃을 피우다.
허위로 진영을 배치함으로써 실제보다 세력이 강대하게 보이게 만든다. 기러기가 높이 날아오를 때 날갯짓으로 위용을 더하는 것과 같이.
제30계. 반객위주(反客爲主) : 주객이 전도되다.
기회를 엿보아 발을 들여놓고, 관건을 파악한 다음, 차츰차츰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면 마침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패전계(敗戰計) : 제31계∼제36계
제31계. 미인계(美人計) : 미녀를 바쳐 음욕으로 유혹하다.
세력이 강한 군대는 그 장수를 공격하고 지략이 뛰어난 자는 색정을 이용한다. 장수가 약해지고 병사가 퇴폐에 흐르게 되면 전투의지가 꺾이는 법이다. 이렇게 적의 약점을 이용하여 아군을 보전한다.
제32계. 공성계(空城計) : 빈 성으로 유인해 미궁에 빠뜨리다.
아군의 군대가 열세일 때, 방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린다.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상황에서, 이 계책은 교묘하고 또 교묘한 것이다.
제33계. 반간계(反間計) : 적의 첩자를 이용하다.
반간계야말로 적에 대한 기만전술 중 으뜸가는 것이다. 적의 첩자를 역이용함으로써 아무런 손실없이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법이다.
제34계. 고육계(苦肉計) : 자신을 희생해 적을 안심시키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법이므로,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 점을 이용하여 적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믿게 만든다. 진실을 거짓으로 가장하고 거짓을 진실로 꾸며 행동한다.
제35계. 연환계(連環計) : 여러 가지 계책을 연결시키다.
적의 병력이 강할 때는 무모하게 공격해서는 안된다. 적의 내부를 교란시켜 그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 휼륭한 지도자는 하늘의 은총을 얻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제36계. 주위상(走爲上) : 도망치는 것도 뛰어난 전략이다.
강한 적과 싸울 때는 퇴각하여 다시 공격할 기회를 기다리는 것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도주는 자주 사용되는 군사전략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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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있다.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을 만났을 때는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미다. 이는 중국의 병서 가운데 하나인 《삼십육계》에 나오는 마지막 계책이기도 하다. 《삼십육계》는 전술 차원의 계책을 집중탐사한 특이한 병서다. 모두 36가지다. 각 계책마다 ‘미인계’ ‘공성계’ 등의 독특한 명칭을 붙였다.
《삼십육계》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대략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사이에 민간에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렇다고 《삼십육계》가 역사적 연원도 없이 문득 출현했던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연원이 오래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가량 이전인 남북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조의 일원인 남제의 역사를 기록한 《남제서(南齊書)》 〈왕경칙전(王敬則傳)〉에 ‘삼십육계 줄행랑’과 취지를 같이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당초 남제를 세운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은 송나라를 찬탈해 제나라를 세운 후 재위 4년 만인 건원 4년(482)에 병사했다. 56세였다. 장자 소색(蕭賾)이 뒤를 이었다. 제2대 황제 무제(武帝)다. 소색은 54세가 되는 영명 11년(493) 보위를 황태손 소소업(蕭昭業)에게 넘겼다. 소소업의 부친 문혜(文惠)태자는 요절했다. 보위를 이을 당시 소소업의 나이는 20세였다.
소소업은 이목이 수려했다. 서예에 출중했고 특히 예서가 가장 볼만했다. 무제 소색은 평소 손자 소소업을 극히 총애했다. 소소업은 어릴 때부터 변경을 지키는 숙부인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 밑에서 컸다. 어릴 때부터 숙부를 따라 이동한 까닭에 특정 선생 밑에서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그는 20여 명의 무뢰한 좌우와 함께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의 부인 하비(何妃)도 경박한 여인이었다. 심지어 소소업과 함께 놀던 몇 명의 미소년과 사통하기도 했다. 소자량이 도성인 지금의 남경으로 갔을 때 소소업은 그대로 변경인 서주(西州)에 남았다. 그의 행동에 더욱 거침이 없었다. 현지의 부자로부터 돈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고, 좌우의 무뢰배에게는 누런 종이에 미리 관작을 써주었다. 황위에 오른 후 즉각 임명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무제 소색과 부친 문혜태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소소업의 스승은 모두 70세가 넘은 노인이었다. 이 모두 화가 닥칠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소소업에 대한 소문이 마침내 문혜태자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는 은밀히 그 내막을 알아채고는 소소업에 대한 감독을 강화했다. 얼마 후 문혜태자가 중병에 걸렸다. 소소업이 크게 곡성을 내는 등 그럴듯하게 가장했다. 관원 모두 효성스러운 그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문혜태자가 죽자 소소업이 황태손이 되어 동궁으로 들어갔다.
무제 소색은 소소업의 연극에 완전히 넘어가 손자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영명 11년(493) 무제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소소업은 아는 무당 양씨(楊氏)에게 무제가 속히 죽도록 저주를 내리게 했다
그러나 조부인 무제의 병상에서 시중을 들 때면 예외 없이 눈물을 흘리며 효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내막을 알 길이 없는 무제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이같이 유언했다.
“내가 보위를 넘길 터이니 잘하도록 하라. 나를 생각하면 능히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2번이나 한 뒤 이내 숨을 거두었다. 무제의 대렴(大殮)이 끝나자마자 소소업은 악공을 불러 가무공연을 즐겼다. 발상하는 날 궐문 밖까지만 장송한 뒤 곧바로 몸이 아프다며 장지에는 따라가지 않았다.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악공을 불러 풍악을 울리게 했다. 풍악 소리가 궐 안팎으로 퍼지자 대신 왕경칙이 소소업의 측근인 소탄지(蕭坦之)에게 물었다.
“지금 이처럼 음악을 즐기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은가?”
소탄지가 대답했다.
“저 소리는 바로 궐내에서 나는 곡성이오!”
소소업은 보위에 오른 뒤 함께 어울려 지냈던 무뢰배에게 마구 상을 내렸다. 규모도 매우 컸다. 한번 상을 내리면 100여만 전에 달했다. 매번 상을 내릴 때면 발아래에 놓여 있는 금은보화를 내려다보며 이같이 중얼거렸다.
“나는 전에 너희 하나를 얻기도 매우 힘들었다. 이제는 너희를 어떻게 써야만 한단 말인가!”
그가 보위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어고(御庫)에는 8억만 전의 거금이 쌓여 있었다. 금은포백(金銀布帛)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위에 오른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어고의 절반이 없어졌다. 모두 포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기벽도 있었다. 이상한 옷차림과 잡기를 즐겼다. 궁 안에서는 오색찬란하게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었다. 또 장안에서 가장 비싼 싸움닭을 거금을 들여 사들인 뒤 투계(鬪鷄)를 즐겼다. 황후 하씨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매일 소소업의 좌우 측근과 즐겼다. 금위병을 지휘하고 있는 종실 소심(蕭諶)과 소탄지는 소소업이 날이 갈수록 광패한 모습을 보이자 화를 입을까 크게 두려워했다. 이들은 은밀히 서창후(西昌侯) 소란(蕭鸞)과 연결해 폐립을 꾀했다.
소소업이 보위에 오른 지 7개월 째 되는 융창 원년(494) 7월, 소란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갔다. 당시 소소업은 옷을 전부 벗고 총희 곽씨(霍氏)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반란 소식을 듣고 급히 궁문을 닫게 했다. 멀리서 보니 소담이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한 소소업은 이내 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신데다 담력이 작아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소담이 곧 소소업에게 비단을 보내 대충 둘러치게 한 뒤 가마에 실어 연덕전(延德殿)으로 옮겼다. 당초 소담이 병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왔을 때 위병들은 창과 검을 들어 이들과 격투를 벌였다. 이때 소담이 소리쳤다.
“황명을 받고 왔다. 너희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위병들은 소담이 금위병의 수장인데다 황명을 받고 사람을 잡으러 입궁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이내 무기를 내려놓고 원래 위치로 돌아가 명을 기다렸다. 얼마 후 소소업이 상처를 입고 실려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몸을 던져 이를 보호하고자 했다. 이때 소소업이 소리쳤으면 일이 어찌될지 몰랐다. 그러나 소소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거머쥔 채 가마 위에 앉아 있었다. 모두 그가 궁문 밖으로 실려 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금위병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소란의 병사들이 소소업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소란이 곧 태후의 명의로 소소업을 울림왕(鬱林王)으로 봉한 뒤 소소업의 동생인 신안왕 소소문(蕭昭文)을 보위에 앉혔다. 이로부터 4개월도 되지 않아 소소문을 폐해 해릉왕(海陵王)에 봉하고 소란 스스로 보위에 앉았다. 그가 바로 남제의 명제(明帝)다. 보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을 보내 해릉왕을 죽였다. 당시 15세였다.
소란은 소도성의 형 소도망(蕭道望)의 아들이다. 소도망이 일찍 죽은 까닭에 그는 소도성 밑에서 컸다. 소란은 즉위 후 자신이 방계 출신이고, 자식이 어린 것을 걱정했다. 고제 소도성과 무제 소색의 자식들은 점차 성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내 이들을 모두 도륙했다. 소도성의 아들은 모두 19명이었다. 그 가운데 7명은 소란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병사했고, 4명은 일찍 죽었다. 살아남아 있던 파양왕 소갱(蕭鏗)과 계양왕 소삭(蕭鑠) 등 나머지 8명 모두 죽음을 당했다.
소색은 모두 23명의 아들을 두었다. 문혜태자와 소자량(蕭子良)은 일찍 병사했다. 어복후(魚復侯) 소자향(蕭子響)은 무제 때 반기를 들었다가 피살되었다. 4명은 일찍 죽었다. 결국 살아남아 있던 여릉왕 소자경(蕭子卿)과 안륙왕 소자경(蕭子敬) 등 나머지 16명도 이때 모두 도살되었다. 소란은 문혜태자의 두 아들 소소업과 소소문을 죽인 데 이어 다시 문혜태자의 나머지 두 아들인 파릉왕 소소수(蕭昭秀)와 계양왕 소소찬(蕭昭粲)까지 제거했다. 방계 혈통으로 보위를 잇기 위해 소도성의 직계 혈통을 모조리 소탕했던 셈이다.
역대 왕조의 황실 내부 골육상잔 가운데 남제 명제 소란의 경우가 가장 참혹했다. 당시 무제의 13자인 파릉왕 소자륜(蕭子倫)은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그는 피살되기 전에 낭야(琅邪)를 지키고 있었다. 명제는 여법량(茹法亮)을 시켜 독주를 갖고 가 먹이게 했다. 소자륜은 의관을 바로 한 뒤 여법량에게 말했다.
“선하지 못한 짓을 계속하는 집안은 반드시 화가 있다고 했소. 전에 고제가 송나라의 유씨(劉氏)를 죽이고 나라를 세웠소. 오늘의 일은 실로 당연한 것이오.”
이어 독배를 들어 올리며 여법량에게 말했다.
“그대는 우리 소씨 가문의 노신(老臣)이오.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본의가 아닐 것으로 믿소. 이 독배를 당신에게 줄 수는 없지 않겠소!”
말을 마치고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당시 16세였다. 남제의 왕실이 유혈전을 벌이자 북위와 접경한 지역의 장수들이 분분히 북위에 투항했다. 회수 이북의 광대한 지역이 모두 북위의 땅이 된 이유다. 이후 회수 이남이 북위를 저지하는 최전선이 되면서 본래 부유했던 회수 이남이 준 전쟁터로 변했다.
원래 왕경칙은 명제의 측근이었다. 명제가 즉위할 당시 반정(反正)의 공을 인정받아 병권을 장악한 대사마(大司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황실 내에서 유혈전이 빚어지자 크게 두려워했다. 회계태수로 나가 있던 왕경칙의 불안은 날로 심해졌다. 불안하기는 명제도 마찬가지였다. 영태 원년(498) 명제가 병이 나 위독했다. 불안해한 명제는 장괴(張壞)를 평동장군(平東將軍)에 임명하여 회계와 인접한 오군태수(吳郡太守)로 파견했다. 왕경칙이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한 사전조치였다. 왕경칙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결국 그는 크게 화를 내며 휘하의 만류에도 마침내 거병했다. 명제가 급히 좌우에 명해 궁 안에서 벼슬을 살고 있던 그의 자식을 일거에 주살했다. 변방에서 북위와 대치하고 있던 왕경칙의 장남 영삭장군(寧朔將軍) 왕원천(王元遷)은 서주자사 서현경(徐玄慶)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로한 왕경칙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남경인 도성 건강(建康)을 향해 쾌속으로 진군했다. 도중에 농민이 가세함에 따라 병력도 1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열흘 만에 건강과 가까운 곳에서 관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소란은 왕경칙이 반기를 들었을 때 극히 위독한 상태였다. 왕경칙이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정 대신들이 크게 동요했다. 16세의 태자 소보권(蕭寶卷)은 동궁에서 참모들과 대책을 논의하면서 사람을 시켜 궁궐 지붕 위로 올라가 왕경칙의 군사가 몰려오는지 살펴보게 했다. 멀리 정로정(征虜亭)이 불에 타는 모습이 보였다. 왕경칙의 군사가 몰려오고 있다고 말하자 소보권이 황급히 달아나고자 했다. 어떤 사람이 이를 왕경칙에게 고하자 왕경칙이 쾌재를 부르며 이같이 말했다.
“《단공삼십육책(檀公三十六策)》에 따르면 불리할 때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이제 소란 부자는 오직 황급히 달아나는 길밖에 없다!”
‘단공’은 남제의 이전 왕조인 송나라 무제 유유(劉裕)와 문제 유의륭(劉義隆) 때 활약한 명장 단도제(檀道濟)를 말한다. 단도제는 자신이 옹립한 유의륭의 견제에 걸려 죽음을 당했다. 당시 유의륭은 백성의 신망이 높고 병법에 밝은 단도제를 크게 두려워했다. 이것이 사서에 《단공삼십육책》 명칭이 처음으로 거론된 배경이다.
사서의 기록에 비추어볼 때 단공제가 《삼십육계》의 원형을 만들어냈을 공산이 크다. 무녀의 아들로 태어나 병서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왕경칙조차 《단공삼십육책》을 언급했던 것은 당시 그의 계책을 담은 병서가 널리 유포되었음을 암시한다. 나아가 〈왕경칙전〉에 인용된 구절 자체도 현존 《삼십육계》의 36번째 계책과 일치한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후대의 많은 사람이 가필한 점 등을 이유로 단도제가 《삼십육계》의 원형을 만든 점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단도제를 저자로 간주할지라도 큰 무리는 없다.
당시 왕경칙의 반란군 기세가 매우 성했다. 그러나 왕경칙의 뒤를 따른 백성 대부분은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 결국 이들은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왕경칙은 급히 말을 타고 도주하려 했으나 말에 오르기 전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70여 세였다. 명제 소란도 이해 12월에 이내 병사했다. 47세였다. 뒤를 이어 태자 소보권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중국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암군인 동혼후(東昏侯)다.
《남제서》 〈왕경칙전〉에 나오는 단도제의 《단공삼십육책》이 현존 《삼십육계》의 내용과 얼마나 같은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36계’와 별반 다를 게 없는 ‘36책’이라는 용어가 사상 처음으로 언급되었던 점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37책 또는 38책이 존재했는지 여부도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최소한 현존 《삼십육계》의 원형이 남북조시대 때 등장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자치통감》이 〈왕경칙전〉을 그대로 인용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삼십육계》는 여타 병서처럼 병도를 포함해 전략전술의 문제를 깊이 논하지 않고 오직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의 계책만 수록해놓은 까닭에 오랫동안 제대로 된 병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무인들조차 《삼십육계》를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상황이 일변했다. 《삼십육계》가 제시한 계책의 의미를 새삼 깨달은 결과다. 최근 중국과 한국 역시 《삼십육계》와 관련한 해설서가 쏟아지고 있다.
《삼십육계》는 크게 〈승전계(勝戰計)〉 〈적전계(敵戰計)〉 〈공전계(功戰計)〉 〈혼전계(混戰計)〉 〈병전계(倂戰計)〉 〈패전계(敗戰計)〉 등의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3가지 계책은 아군이 우세할 때의 계책이고, 뒤의 3가지 계책은 아군이 불리할 때의 계책이다. 각각 6개의 세부적인 계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문은 글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역》의 괘사(卦辭)나 단사(彖辭), 효사(爻辭) 등을 인용하고 있어 이를 제대로 해석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삼십육계》의 가장 큰 특징은 크게 3가지다.
첫째, 비현실적인 요소가 전혀 없고 합리적인 사고로 일관되어 있다. 둘째, 곧바로 쓸 수 있는 전술에 초점을 맞춘 까닭에 적을 속이는 궤도로 점철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점이 오히려 《삼십육계》의 자랑이다. 삶의 지혜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생사가 갈리는 전쟁터의 궤도를 언급한 덕분이다. 셋째, 기존의 병서에 나오는 병법이론 이외에도 각종 사서에 나오는 전례를 참조해 새로운 병법이론을 만들어냈다. 역대 병서 가운데 역사 속에서 현실에 적용할 만한 이론을 대거 추출해 이론화한 병서는 오직 《삼십육계》밖에 없다. 《손자병법》의 이일대로(以逸待勞), 《전국책》의 원교근공(遠交近攻), 두보 시에 나오는 금적금왕(擒賊擒王), 《사기》에 나오는 위위구조(圍魏救趙), 《삼국연의》에 나오는 고육계(苦肉計) 등이다.
그 내용만큼은 21세기의 군사전략 및 경영전략에 그대로 구사할지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 중국에서는 《삼십육계》가 《손자병법》만큼이나 일상생활에서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