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萬歷 甲戌 賜額後 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西 宣賜 사액 후 266년 되는 1839년에 불에 타 다시 썼다. 선조대왕이 내려 주었다."
강당 앞 가운데 두 기둥 사이 창방에 걸린 현판 玉山書院은 秋史 金正喜(1786~1856)가 썼다.
바라보아 왼쪽에 작은 글자로 "萬歷 甲戌 賜額後 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西 宣賜 사액 후 266년 되는 1839년에 불에 타 다시 썼다. 선조대왕이 내려 주었다."라 했다.
萬曆은 명나라 제13대 만력제 神宗(1573~1620 재위)의 연호다. 만력 걉술은 1574년이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인 54세 때 쓴 것이다.
...........................
추사는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한다. 그해 그는 동지부사인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들어간다. 청나라 학문을 직접 접할 기회였다. 추사는 그곳에서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특히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을 스승 삼아 그들의 학문을 받아들인다. 옹방강은 추사와 필담을 나누다가 박식과 총명함에 놀라 그를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칭찬했다.
...........................
옥산서원 · 독락당 편액 구경 (tistory.com)
옥산서원 · 독락당 편액 구경
추연욱 2023. 1. 23. 20:17
옥산서원 · 독락당 편액 구경
1.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다.
晦齋 李彦迪(1491~1553)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회재가 돌아간 지 20년 뒤인 1572년 경주부윤 이재민이 지금의 자리에 회재를 추모하기 위한 묘우로 건립하였다.
1574년에는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 2019년 6월 30일부터 에제르바이젠 바쿠에서 개최된,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6, 30.~ 7, 10.)는 현지 시각으로 7월 6일 오후,
"한국의 서원 Seowon, Korean Neo Confucian Academies"을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한국의 서원"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 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옥산서원을 포함한,
소수서원 · 병산서원 · 도산서원 · 도동서원 · 남계서원 · 필암서원 · 무성서원 · 돈암서원 등 9곳이다.
옥산서원을 구경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뜻있는 일이다.
먼저 서원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서원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先學後廟라 하여 앞쪽에 강학공간,
뒤쪽 높은 곳에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
서원의 이런 구조는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정형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대개 비슷비슷하다.
옥산서원은 사실 매우 불친절한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매우 폐쇄적이다.
자연과 통하는 건물인 무변루마저 문을 막아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내부로 시선을 향하는 선비의 자세를 표현한 것이라 해도 보는 나로서는 답답하다.
옥산서원에서 뺄 수 없는 즐거움은 편액들을 구경하는 것이다.
조선 중 · 후기 내로라하는 문인 · 학자들이 쓴 편액들이 있으니 말이다.
나로서는 그 글씨의 아름다움을 맛보거나 예술적 완성도를 평가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이 명인들의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보람있는 일이다.
● 옥산서원 정문 역락문
"亦樂"이라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人不知不溫 不亦君子乎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는
<論語>, 첫머리의 말에서 따 왔을 것이다.
편액은 石峯 韓濩(1543~1605)가 썼다.
● 정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 無邊樓가 나타난다.
<玉山書院記, 1574>에는,
건립 당시에는 대사성이었던 草堂 許曄(1517~ 1589)이 納淸樓라 이름 하였다 한다.
뒤에 우의정 穌齋 盧守愼(1515~ 1590)이 無邊樓로 바꾸었다.
편액은 石峯 韓濩(1543~1605)가 썼다.
부기에 “靡欠靡餘 罔終罔始 光歟霽歟 游于太虛,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라 썼다.
● 한석봉은 개성에서 태어났다.
1599년 司御가 되었다. 가평군수 등 지방관을 지냈지만 그의 使命은 따로 있었다.
글씨를 잘 써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썼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항상 그가 나아가 글을 써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중국에 사신이 갈 때는 의례 서사관으로 파견되었다.
<中京志>에 의하면,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집을 나가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에다 글씨 연습을 했다"고 한다.
국민학교 때 국어책에서 읽은 이야기.
한석봉이 어린 나이에 글씨 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갔다.
3년을 공부하고는 집이 그리워 보따리를 사 들고 돌아왔다.
그러자 떡장수인 어머니가,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자신은 떡을 설고, 석봉에게는 글씨를 쓰게 했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반듯반듯 크기도 일정한데, 석봉이 쓴 글씨는 삐뚤삐뚤, 들쑥날쑥이었다.
그제서야 석봉은 자신의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 공부했다.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어 틀에 맞추려는 듯한 글씨,
외형을 다듬는데 머물러 품격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는 듯하다.
金正喜는 <阮堂集>에서 "<石峯帖>은 매우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극히 속된 것도 있다"고 평했다.
석봉의 글씨는 짜임새가 좋고 붓에 힘이 있다. 중국의 글씨체를 뛰어넘어 독창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추사 김정희와 함께 쌍벽을 이룬다.
글로는 <石峯書法> <石峯千字文> 등이 전한다.
● 求仁堂은 강당이다. 다시 말하면 교실이다.
강당 앞 가운데 두 기둥 사이 창방에 걸린 현판 玉山書院은 秋史 金正喜(1786~1856)가 썼다.
바라보아 왼쪽에 작은 글자로 "萬歷 甲戌 賜額後 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西 宣賜 사액 후 266년 되는 1839년에 불에 타 다시 썼다. 선조대왕이 내려 주었다."라 했다.
萬曆은 명나라 제13대 만력제 神宗(1573~1620 재위)의 연호다. 만력 걉술은 1574년이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인 54세 때 쓴 것이다.
● 秋史 金正喜(1786~1856) 자는 원춘,
호는 추사, 완당, 예당, 시암, 노과, 농장인, 천축고선생, 보담재 등 백여 가지나 된다.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대왕의 둘째 따님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月城尉에 봉해진다.이렇게 훈척 가문이 된 경주 김씨 문중에서, 병조판서 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 앞으로 양자로 들어갔다.
추사는 어릴 때 月城尉宮(영조가 월성위를 위하여 한양에 집을 주었다)으로 한양으로 이사해서,
楚亭 朴齊家(1750~1805)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인해 추사의 학문은 실학파에 속하게 된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25세에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 연경으로 갈 때에 그 자제군관으로 동행하게 되면서 그의 예술은 비로소 궤도에 오른다. 그는 스승 박제가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당대 석학인 翁方綱(1733~1818)과 阮元(1764~1849)을 만나 이들로부터 한나라와 송나라때의 碑帖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과 실사구시학을 배운다.
당시 78세로 청나라 제일의 석학이었던 옹방강은 이 젊은 조선 청년을 ‘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칭찬하였다.
추사는 이 인연을 소중히 여겨 호를 옹방강의 호 覃溪와 寶蘇齋를 본떠 ‘寶覃齋’라고 하였으며,
완원의 ‘阮’자를 따서 ‘阮堂’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말 세도정치 시대 추사는 풍양 조씨와 가까웠다.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헌종 6년(1840)에는 동지부사로서 다시 연경에 다녀온다.
이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추사를 제거할 목적으로 10년이나 지난 尹尙度의 獄事를 들고 나온다.
추사는 이에 관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햇수로 9년, 7년 3개월 동안 제주도로 유배된다.
추사는 귀양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들러 친구 초의선사(1786~1866)를 만난다.
그는 대둔사에 걸린 員嶠 李匡師(1705~1777)가 쓴 ‘大雄寶殿’ 현판 글씨를 보고는 ‘촌스러운 글씨’라고 하여 자신이 글씨를 써 주어 바꾸어 걸게 했다.
이광사는 동국진체의 완성자로 이미 명인의 반열에 오른 대선배이다.
동국진체는 민족적 색채가 강한 글씨이니 추사가 보기에는 촌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귀양살이 하는 도중 부인이 돌아갔으며, 환갑을 맞이해도 찾아주는 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도 변함없이 책을 구해다 주는 제자 藕船 李尙迪에게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그려준다.
그림 오른쪽 위에 그림의 제목과, "藕船是賞 阮堂 우선 보시게나 완당"이라는 글과 款識가 있다.
"藕船"은 이상적의 호, "阮堂"은 "秋史" 다음으로 널리 쓰인 김정희 호이다.
연경에서 만나 스승으로 모셨던 阮元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스스로 지어 쓴 것이다.
우선은 당시 북경을 드나드는 行首譯官이자 시인이었다.
우선은 <세한도>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북경의 문사 18가의 칭찬을 받고 다시 가지고 왔다.
그림 왼쪽 끝에 "阮堂老人書" 라는 발문이 있다.
국보 <세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길이가 14m쯤 되는 두루마리 형식의 그림이다.
그림의 크기는 가로 69cm, 세로 23cm쯤 된다.
그림 외 나머지의 대부분은 그 그림에 대한 절절한 찬사를 담은 청나라 문인 16명과,
국내 전문가 4명의 감상 글로 채워져 있다.
“중턱이 부러진 노송의 亭亭은 그믐달의 광채 그대로다. 앙상하게 드리워진 한 가지는 아직 예전의 창창함을 자랑[誇]하고도 남는 자신의 표상이요 거기에 어울려 그려진 세 그루의 소나무, 안마당에 서 있는 한 그루는 시봉의 구실을 도맡은 듯 자못 의젓하고, 바깥의 두 그루도 주위 환경에 아랑곳없이 당당하다. 하늘과 땅이 백설로 한빛이건만, 싱싱한 솔잎에는 절조가 드높다. 맞추어 세상을 잊은 토담집, 인기척조차 감감한 그 지붕 위에 눈이 하얗다. 이 모두가 완당의 강직한 삶이요, 그의 오롯한 으름장이다.
……그 우람스런 붓은 대하는 이의 손까지 꿈틀거리게 한다. 게다가 세한도에 덧붙인 전아한 제발은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눈이 와도 하냥 푸른 소나무로 하여금 인간의 비정을 돌아보게 한다. ‘날씨가 차가와진 뒤에야 송백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松柏之後凋]’고 한 공자의 말보다도 ‘권세와 이해로 야합하면 그 권세와 이해가 다하면 교분이 성겨진다[以權利合者權利盡 交疎]’고 한 사마천의 말보다도 그 의태를 승화시킨 떳떳한 내재에 오히려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병주, <고인과의 대화>에서.
"세상은 권력과 이익을 좇아 도도히 마음과 힘을 쏟아붓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권력과 이익을 따르지 않고 바다 밖의 초췌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권력과 이익을 따르듯 하는가?"
<세한도> 발문의 일부이다.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제주도 대정에서 圍籬安置의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제자 李尙迪은 중국 연경에서 구한 귀중한 책들을 보내 주는 등 따뜻한 정을 베풀었고,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에게 주었다.
새하얀 설원 위에 자리잡은 토담집 한 채, 그 집을 둘러싼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 네 그루는,권력보다 의리를 택한 이상적의 변함없는 신의를 가리키고 있다.
<세한도>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더욱 푸르른 빛을 발하던 우선과 완당 두 사람의 아름답고 따뜻한 인연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 歲寒圖(국보 제180호), 그 우여곡절
1. 秋史 金正喜(1786~ 1856)가 제주도 유배 시 그려렸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잊혀졌다.
2, 그러다가 1944년경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했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 1948년 사망]가 중국 베이징의 한 골동품상으로부터 입수해서, 그림을 가슴에 품고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3. 이에 전라남도 진도 출신의 갑부이면서 고미술품 소장가였던 素筌 孫在馨(1903~ 1981)이 1944년 일본으로 후지스카를 찾아가 그림을 넘겨 달라고 간청했다.
“이 그림에는 조선 선비의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닌 거지요.”
수십 번을 거부하던 후지즈카는 손재형의 三顧草廬에 끝내 굴복했다.
“당신의 열성에 내가 졌소. 가져 가시오.”
손재형은 그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얼마 후 후지즈카의 집이 폭격을 맞아 불탔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그는
다시금 가슴을 쓸어내렸다.
4. 정치에 투시해서 재산을 탕진했던 손재형은 결국 그림을 고리대금 업자에게 넘겼다. 하지만 돈을 갚을 길이 막연해지자 소유권을 포기, 개성의 갑부 손세기씨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 창근씨가 소장하고 있다.
<중앙일보>, 2012년 4월 5일.
산설고 물설은 만리타향 제주도에서 7년 3개월 동안 귀양살고 1848년 12월 63세로 풀려난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둔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난다.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였소. 내 글씨를 내리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어주시오.’
귀양가는 주제에도 그 시퍼렇던 서슬은 사라지고 이제 인간으로, 예술가로 원숙한 경지에 들었다.
삶의 자세에, 눈을 떴고, 글씨도 완성했다.
그게 바로 추사체다.
지금 대둔사 대웅보전에는 이광사의 글씨 "대웅보전",
승방에는 추사가 쓴 "무량수각"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 원교 이광사는 강진 백련사 "大雄寶殿", "萬景樓" 편액도 썼다.
당시 이광사는 신지도에 귀양 와 있었는데 해남의 대둔사, 백련사의 승려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의 글씨는 구불구불하다.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강직한 느낌을 준다.
구례 천은사 일주문 현판도 이광사의 글씨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
백련사 만경루 편액
천은사 극락보전 편액
1851년 영의정이었던 친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난다.
그후 그는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기거하면서,
봉은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다가 1856년 71세로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추사 김정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철종 7년, 10월10일 甲午, 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石文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 해서 · 전서 ·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
● 봉은사 "大雄殿"과 '板殿"의 편액도 추사가 썼다.
판전의 편액은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은 마치 어린아이의 글씨와 같다고 한다.
이 편액 왼쪽에 “七十一果 病中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추사가 돌아간 것은 71세인 1856년 10월 10일이다. "판전"이란 글씨는 추사가 죽기 3일전에 쓴 것이다.
● 대청 안쪽에 걸린 "求仁堂"이란 편액 역시 한석봉이 썼다.
한석봉이 쓴 편액을 하나 더 보기로 하자. 덕유산 백련사 대웅전 편액.
● 바로 뒤쪽에 "옥산서원"이라 쓴 편액이 하나 더 있다.
이 편액은 이토정의 장조카이며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鵝溪 李山海(1593~1609)의 글씨이다.
왼쪽 "舊額摸揭"란 작은 글자가 있다.처음 선조가 사액하면서 이산해에게 명해 쓰게 했는데, 그것을 다시 새겨 건 것이다.
● 이산해는 韓山 이씨로, 고려말 李穡의 후손이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궁중의 식료품과 옷감을 관리하며, 연회를 맡는 관청의 정3품 관직이었던 內資寺正[내자시정] 李之蕃,
어머니는 宜寧南氏 사이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토정비결>을 지었다는 저 유명한 작은아버지 之菡 土亭에게 학문을 배웠다.
6세 때부터 글씨를 썼다.
장안의 명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한다. 명종에게 불려가 어전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
11살 되던 명종 4년(1549)에 소과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보령으로 이주했다.
158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1591년 아들 慶全을 시켜 松江 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강계로 유배시키고,
그밖의 서인 영수급을 파직시키거나 귀양 보내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했다.
선조25년(1592)년 4월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왕을 모시고 피란가는 중에 개성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맞게 하였다는 중신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평해로 귀양간다.
3년 뒤인 1595년 귀양에서 풀려 영돈녕부사로 복직 되어 대제학을 겸한다.
이때 북인이 다시 소북 · 대북으로 갈라지는데, 그는 이이첨 · 정인홍 등과 어울려 대북파의 영수가 된다.
1599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1600년(선조 33) 1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4월 곧 파직되었다. 변덕스러운 임금 선조는 정승 임명에도 이처럼 변덕이 죽 끓듯했다.
1609년 8월 71세로 돌아갔다.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군 주포면에 있다.
그는 저서로 <아계집 鵝溪集>을 남겼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漢陰 李德馨(1561∼1613)이 이산해의 사위이다.
● 體仁廟
편액은 石峯 韓濩(1543~1605)가 썼다.
● 회재 신도비는 옥산서원 체인묘 왼쪽 비각 안에 있다.
비문은 高峰 奇大升(1527~1572)이 지었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 고봉 기대승은 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에서 태어났다.
1558년 식년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 · 이황 등과 만나 太極說을 논한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퇴계 이황을 찾아가 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고봉은 퇴계와의 이 만남에서 사상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퇴계는 처음 "四端(仁義禮智)은 理가 發한 것이고, 七情(喜怒哀樂愛惡慾)은 氣가 발한 것"이라 했다.
새파란 젊은 학자 고봉은 무엄하게도 대가의 학설에 "理와 氣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는 理氣共發說로 반론을 제기한다.
공리공론 같은 이 문제를 두고 퇴계와 26세 연하의 고봉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1559부터 1566년까지 무려 8년 동안 끈질기게 사색하고 토론했다. 이것을 四七論辯이라 한다.
퇴계는 제자를 '從遊'라 했다. 함께 노닌다는 뜻이다. 그러니 고봉은 퇴계의 제자이며 친구이다.
이 토론을 통해 퇴계는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하여 기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기 발현하여 이가 거기에 올라타는 것”이라 하였다.
四七論辯은 문답의 질이나 그 진지하면서도 개방적인 자세는 중국 선유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위대한 자세다.
또 한국 사람의 강인한 사색벽과 정치한 철학적 이론은, 철저히 연구하여 현대에 계승해야 하지 않을까.
고봉은 그 후 사정 · 우부승지 · 대사성 등의 벼슬을 지냈다.
성격이 강직하여 몇 번의 삭직과 해직, 복직을 거듭했다.
1572년 다시 대사간을 되었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전북 고부에서 45세의 젊은 나이로 객사했다.
2. 독락당(보물 제413호) 회재 이언적은 41세때인 1531년, 당시 실력자였던 김안老의 재임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한다.
그리하여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7년쯤 은거 생활을 했다.
이때 그가 살던 집 사랑채가 독락당이다.
● 편액 "玉山精舍"는 퇴계 이황의 글씨이고, "獨樂堂"이란 편액은 鵝溪 李山海(1539~1609)의 글씨다.
● 독락당의 별당 계정에 “溪亭”이란 편액은 한석봉이 썼다.
자계천 관어대에서 본 계정
● 계곡 쪽을 보고 있는 편액 "智仁軒" 역시 한석봉이 썼다.
● 계정 옆으로 덧붙인 곳에 있는 작은 방문 위에 養眞菴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은 퇴계 이황(1501~1570)이 썼다.
이 작은 방은 회재선생이 정혜사 스님을 위한 배려로 양진암이라 했다.
그래도 선비 체면으로 "養眞庵"이라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당대 최고 지성인, 최고로 존경받는 선비 회재선생과, 천민 대우를 받던 스님이 만나 진리를 논했을 것이다.
그렇게 회재선생은 학문의 폭을 넓혀갔을 것이다.
● 당시 부윤 이안눌의 글도 걸려있다. 李安訥(1571~1637), 호는 東岳이다.
유명한 李荇의 증손자이고, 李植의 從叔이다.
1607년에 동래부사, 1613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
● 독락당에서 왼쪽으로 자계천을 끼고 마을길로 옥산서원으로 가면, 왼쪽으로 매우 큰 마을숲이 나타난다.
마을숲이 끝나는 곳에서 내리막을 따라 가면 자계천을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나온다.
이곳이 龍湫다.
● 오른쪽 중간쯤에 "龍湫"란 음각 글씨가 보인다.
● 용추에 걸린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곧 넓은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이곳이 세심대이다.
세심대는 회재선생이 이름을 붙인 五臺의 하나다.
회제선생은 자계천의 경치가 뻬어난 다섯 군데에 이름을 붙였다.
洗心臺 마음을 씻고 정진하는 곳,
觀魚臺 물고기를 보는 곳,
澄心臺 마음을 맑게 하는 곳,
纓臺 갓 끈을 씻고 여미는 곳,
詠歸臺 시를 읊고 돌아오는 곳이다.
세심대 · 관어대 · 징심대는 많이 변했으나 흔적은 남아있고, 다른 두 대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바위에 새겨진 "洗心臺"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세심대는 서원 杏壇 아래에 있다.
넓고 평평한 큰 돌로 깔려 있는데 주위가 매우 넓다.
퇴계 선생 李滉이 "洗心臺"라고 크게 세 글자를 돌의 남쪽 면에 새겨놓았다.
시냇물이 산골짜기에서 반석 사이로 흘러 폭포를 이루고,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어 龍湫라 부른다.
양면이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있는데, 길이가 4~ 5丈에 달하고, 너비는 一丈정도 된다.
역시 퇴계 선생이 쓴 "龍湫"라는 큰 두 글자가 못 서쪽 면의 돌 위에 새겨져 있다.
물이 넘쳐흘러 부딪쳐서 "龍" 자의 오른쪽이 닳아 없어졌다.
용추 기슭에는 장성한 느릅나무가 줄을 이루어 그늘을 지어 반석을 덮고 있다.
閔周冕(1629~ 1670), <東京雜記>, 정창은 옮김, 지만지, 2009. 勝地
세심대에서 본 옥산서원
옥산서원 주변의 나무들
2018년 9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