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104주년, 부끄럽지 않아야지
삼일절 104주년, 부끄럽지 않아야지
우리 국경일 중 가장 뜻있는 날이 삼일절이 아닐까. 개천절은 막연한 신화 속의 날이지만 가장 역사가 깊은 날이고, 광복절과 제헌절은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민주공화국을 세운 날들로 80주년 안팎이지만 삼일절은 104주년이나 되는 데다 국권을 회복하려는 2천만 온 민족이 몸부림으로 저항한 살아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대구에서도 1919년 3월 8일을 기해 박태현, 김삼도, 이승욱 등 계성학교 학생 46명, 이재인 교사와 임봉선, 이선애 등 50명의 신명학교 학생들, 계성학교 교사였던 최상원은 대남여관 주인의 아들 대구고보 4년생 허범과 접촉해 신현욱, 백기만, 하윤실 등 간부 학생에게 거사 계획을 알려 200여 명의 대구고보(현 경북고) 학생이 동참했고, 동산성경학당 강습생 20명도 동참하였다.
전날, 밤을 새워가며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에서 만든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동산 선교사 집 숲속에 집결하여 90계단을 따라 내려와 왼쪽으로 꺾어 옛 동산파출소 강씨 소금집 앞에서 집결하였다. 이윽고 서울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읽었는데 그 주인공은 김태련 조사였다. 이보다 앞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이갑성은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였고, 3월 2일 이만집 목사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으로부터 ‘독립선언문’을 받아 왔던 것이다.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숫자는 금세 800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도 가만있지 않았다. 달구지 위에 선 김태련 조사를 끌어내렸다. 끌려가면서도 독립만세를 외쳤고, 그 빈자리에는 이만집 목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중부경찰서 앞에서 우회전하여 종로를 따라 약전골목→옛 중앙파출소→옛 대구백화점 앞까지 진출하였다. 시위 군중은 점점 늘어났고, 상인들, 기생들, 지겟꾼, 농민들이 서슴없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던 헌병과 80연대 병력은 일본 경찰과 함께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김태련 조사의 아들 용해는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고 저항하다 심한 매를 견디지 못하고 실신하였다.
만세운동은 10일에도 계속되었다.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 및 김삼도 등 학생들이 남산교회 부근에서 2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65명이 잡혀갔다. 이틀 동안 225명이 검거되었고, 주동자 이만집, 김태련은 징역 3년, 2.5년 형을 받았다. 김영서, 백남채, 최상원, 박재원, 최경학 등은 1.5년, 이재인, 임봉선, 신현욱, 허범, 김삼도 등은 10개월, 백기만은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3‧8 대구만세운동 여파는 대단했다. 경북 전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10일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계성학교 학생들은 김수길, 이영식 등이 비밀결사 조직인 혜성단(惠星團)을 만들어 격문살포 등을 했고, 시장철시, 반민족행위 규탄 등을 전개했다. 대구고보는 만세운동 가담자를 퇴학시켰지만, 동맹휴학 등으로 맞섰다.
대구 삼덕동에 삼덕교회가 우뚝 서 있다. 옛 대구형무소 사형장 자리다. 일제가 실질적인 지배를 하던 1908년 대구감옥이란 명칭으로 현 중부경찰서 뒤쪽에 개청했다. 그 외에도 경상감영 시절 감옥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 감영 북쪽 대안성당 등이 있는 곳에도 있었다. 1910년 삼덕교회 자리 일대에 대구 감옥을 신축해 이전했다. 1923년에 대구형무소로, 1961년에 대구교도소로 바꿨고, 1971년 화원으로 신축이전하였으며, 달성군 하빈면 신축교도소로 옮길 예정이다.
삼덕교회 벽에 대구교도소를 생각할 작은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며칠 전 방문해 사진 몇 장을 찍어왔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교도소 철거 전 높은 벽돌담을 끼고 골목길을 걷던 생각이 난다. 친구가 운영하던 경북학원도 부근에 있었는데. 당시는 카메라도 귀했지만, 역사적 장소를 기억 속에 남긴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른 뒤 흔적조차 없어진 대구형무소를 오늘은 이렇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서대문형무소(195명)보다 더 많은 206명의 독립운동가가 처형되었는데 서대문형무소는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조성되어 찾는 이를 가슴 뭉클하게 해 주지만, 대구형무소 자리에는 교회 등 주택과 상가가 들어섰고, 형무소가 있었단 자리를 안내하는 표지판조차 찾아볼 수 없다. 독립운동의 자취를 남기는 것도 지방차별을 한단 말인가.
그나마 교회 벽에 추모의 공간을 마련해 두어 찾는 이를 맞는다. 물론 자료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206명 순국 지사들의 명단이라도 알 수 있어 다행이다. 206명 명단은 대구형무소 수형 중에 순국한 분이다. 그중 몇 분을 소개해 볼까 한다. 무작위 검색으로 찾아낸 분들이다.
①김용해(金湧海 1895∼1919.3.29.)
아버지 김태련 조사와 함께 대구 3.8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 끝에 빈사상태가 되어 20일 만에 가출옥했으나, 다음날 사망했으며 당시 24살. 김태련은 감옥에서 아들의 죽음을 알고 복역 기간 동안 그물을 짜서 3원 50전의 돈을 마련했다. 출옥 후 아들 무덤에 ‘기미년 3월 초하루 의로운 피가 질퍽했나니 아비의 괴롬에 찬 품삯으로 아침 햇살 아래 이 돌을 세우노라’ 김씨 부자의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틀림없도다. 24살 청춘이 만세소리와 함께 사라지다니.
②장진홍(張鎭弘 1895∼1930)
1895년(고종 32) 6월 6일에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 문림(文林)마을에서 장성욱(張聖旭)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에 만주·러시아 등지에서 한인들을 군사 훈련 시켰으며 1927년 조선은행대구지점에 폭탄을 터뜨리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1930년 7월 31일에 옥중에서 자결·순국하였다.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의 주인공인 장진홀 투사의 거룩한 뜻이 무엇일까요.
③김기용(金基用 1883∼1938)
김기용은 대구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한 주모자 장진홍과 군자금 모집 및 부호가를 폭파할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장진홍이 사형 집행을 앞두고 옥사하자 수감자 1,500여 명과 항의하면서 옥중 시위를 주도한 일로 가중형 8개월 형이 선고되었다.
*말하자면 교도소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니 장하도다 김기용.
④윤대규(尹大奎)
1940년 울진 지역의 비밀결사인 창유계(暢幽契)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3년 일본 경찰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산되었다. 이때 102명이 체포되고 그 중 22명이 송치되어 16명이 희생되었는데, 윤대규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1944년 잔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이런 고문은 일제만 한 게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버젓이 횡행했으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대표적이다.
⑤신경수(申敬守 1876∼1909)
한말 김영백 진영에서 활동한 의병. 총기를 휴대하고 흥덕군(현재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일원) 반룡리와 북상면 송산리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복역 중 옥사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호남 출신 의병이 영남에서 순국하다. 영혼이라도 고향에 머물기를.
⑥안규홍(安圭洪 1879~1910)
머슴 출신의 조선 후기 의병장.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수비대·기병과 교전했고 일진회 회원을 사살했으며, 의병 278명으로 순천을 습격했다. 광양군 백운산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사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머슴이 따로 있나요?
⑦박상진(朴尙鎭, 1884~1921)
대한광복회 총사령관(1921년), 울산 출신으로 허위선생 문하에서 공부,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 수학, 1910년 판사 시험 합격했으나 평양법원 부임 거부. 1912년 대구에 尙德泰商會 운영, 곡물상 가장 연락처로 삼아 군자금 마련. 1915년 안일사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창설, 대한광복회 조직 회장
무장한 후 세금 압수 등으록 군관학교 설립, 지역별 조직,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를 이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다.
*판사시험 합격 후 평양법원 발령 받고 부임하지 않을 정도의 심지가 굳은 분이네요. 우리기 이런 분을 어떻게 본받아야 할까요.
잠시 지역 역사를 살펴 보았습니다. 나라가 없어진 후 도로 찾는 독립운동, 당연히 해야지요. 그러나 망하지 않도록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독립운동 못지 않게 중요하답니다. 위로는 대통령부터 장삼이사에 이르기까지 꼭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해서는 안 될 일에 손을 떼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공감하십니까!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렸습니다.
<여기 이름을 올린 206명의 순국지사 명단>
<17은 17번 옥살이, 27은 1927년 첫 수감(수인번호 264), 30은 1930년 첫 시작품 발표, 44는 1944년에 북경감옥에서 순국(40세)>
<삼덕교회 건물, 동쪽 벽면인데 창이 별로 없어 교도소 같은 느낌>
[출처] 삼일절 104주년, 부끄럽지 않아야지|작성자 주윤 joo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