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얼이 깃든 화성 용주사(1/2)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에 위치해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화성 용주사(龍珠寺)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갈양사(葛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창건주는 도의국사에 이어 가지산문 제2대 조사이신 염거화상(廉巨和尙)이다. 고려 광종 때는 혜거국사가 머물며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만 갈양사는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용주사 일주문)
갈양사가 다시 중창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제22대 정조 임금 때다. 정조는 즉위 13년을 맞던 해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수원화성과 행궁을 만드는 대대적인 역사를 벌인다. 아버지 묘와 화성의 건설과정을 보기 위해 수시로 이곳까지 거둥하게 되자 아예 시흥으로 질러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안양의 만안교라는 돌다리도 새로 만들어 놓게 된다.
정조대왕과 함께 기억될 스님이 있다. 보일당 사일스님이다. 장흥 가지산 보림사 출신이었던 보일스님은 정조에게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설해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한다. 이에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 주변에 폐사된 갈양사터에 절을 새로 중창하여 용주사라 이름 붙여서 사도세자 묘의 능침사찰로 삼았다고 한다.
용주사는 이렇듯 정조대왕의 효성이 깃든 효심의 본찰이자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 사찰을 거느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오랜 역사와 문화재 그리고 수행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다. 동방지국천왕 용주사 일주문은 천왕문을 겸하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증장천왕 일주문을 지나 입구에 이르면 「到此門來(도차문래)」「莫存智慧(막존지혜)」라 석비가 있고 “도차문래 막존지혜”란 이 문을 들어서면 알음알이(지혜)는 내려놓아라 라는 뜻이다. 세속의 경지가 아님을 의미하는 선구(禪句)인 셈이다. 홍살문과 삼문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 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한 것이다 용주사효행박물관 5층 석탑 용주사에는 모두 2개의 석탑이 있는데 그 하나가 효행박물관 쪽에 위치한다. 전체 높이 4.5m의 이 화강암 5층 석탑은 부근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 대개의 석탑이 가람의 입구나 법당 앞에 위치하는데 반해 이 석탑은 용주사 가람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어 본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이전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일 아래에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하대석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사방 각 면에는 귀꽃모양의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겼고 그 위 기단면석에는 위패(位牌)형의 사각을 모각하였다. 1층 옥신에는 문비(門扉)가 새겨져 삼문 절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궁궐의 정문과 같은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맞게 된다.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습니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이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다.
<용이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 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한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 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하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한다. 천보루와 사리탑 삼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면 한 눈에 대규모의 누각이 정면에 나타난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보루다. 천보루는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간이다.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천 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된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民家)의 건물양식 그대로다.
여기서 특이하게도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안쪽에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 있다. 밖에서는 천보루, 안에서는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진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겠다.
홍제루 현판의 동쪽 종루(從樓) 벽면에는 일제강점기에서 이름 있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을 비롯한 30인의 문인묵객들이 당시 강대련 주지를 위해 기념 휘호한 글들을 모아 판각해놓은 목판이 걸려있다. 창건당시 천보루의 앞뒷면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을 달았었는데 글귀는 다음과 같다.
<앞면 기러기·사자·비둘기 모양으로 나투는 여러 부처, 여러 천신이 영원히 보호하고, 소, 사슴, 양을 탄 선남 선녀가 한결같이 귀를 기울이네. 뒷면 연화게와 패엽경을 불이문중의 하늘 소리이고, 향기로운 밥과 창포떡은 무량겁전의 비옥한 땅이라.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면서 용주사에 자주 참배하였는데 천보루는 이러한 때를 대비해 행궁규모로 지어진 건물이다.> 천보루는 1993년 5월 외부단청을 새롭게 하였다. 세존사리탑 삼문과 천보루 사이에는 효행박물관 앞의 5층 석탑과 함께 또 하나의 5층 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5층 석탑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사리탑 옆에는 「世尊舍利塔(세존사리탑)」「奉安寶塔(봉안보탑)」이란 석비가 세워져 있다.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 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으며 기단갑석 위에는 옥신고임으로 처리 되었다. 옥개석은 처마끝선에서 약간 반전되었고,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인 옥개석의 체감은 비율이 낮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범종각 국보로 지정된 용주사 범종은 여기에 보관되어 있다. 위의 범종은 아마도 이를 모방한 것으로 사료된다. 천불전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이다. 이 자리에 최근 3년 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千佛殿)이라 불렀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룬다. 건물은 석조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마지막 아홉 번째 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하였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였다. 이 삼세불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하여 조성한 것으로 머리 한가운데에는 붉은 계주를 넣었다. 용주사는 초파일을 대비하여 전각 등을 보수하고 있으며 대웅전 앞 마당은 등이 요란하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전각이다.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하여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주련 글귀는 다음과 같다.
『팔만사천 법문으로 다 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대계로 다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成龍海) 총섭(總攝)이 중수하고 1931년에 강대련 주지, 1965년에 전관응 주지, 1987년 서정대 주지께서 수리하였다.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원건축양식을 지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식으로 공포(拱包)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多包系)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웠으며,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 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외벽의 3면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는 57평으로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위엄과 함께 산뜻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1993년 5월에는 모든 전각의 외부에 단청불사를 하였다.
<대웅보전주련> 報化非眞了妄緣(보화비진요망연) 보신 화신이 참이 아닌 망연인 줄 안다면 法身淸淨廣無邊(법신청정광무변) 청정한 법신은 가이없이 넓고 넓구나. 千江有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월) 천강에 물이 있어 천개의 달이요 萬里無雲萬里天(만리무운만리천) 만리에 구름 없어 (푸른)하늘도 만리에 뻗치네 대웅보전내의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다. 대웅보전삼세불상은 경기도유형문화재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세불로서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고 재질은 목조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개금했다. <삼장탱화> 삼장탱은 대웅보전 오른쪽 벽면에 조성되어 있다. 전면의 불상은 보현보살이며 보현보살의 뒤편에 보이는 탱화가 삼장탱이다. 삼장탱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불화이다. 지장탱화가 발전하여 확대된 형태라고 여겨지는 이 불화는 삼장탱화 혹은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라고 불리며 지장도, 십왕도(十王圖)와 함께 지옥계(地獄系) 불화에 속한다.
삼장은 천장(天藏)·지장(地藏)·지지보살(持地菩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 세 보살의 법회를 동시에 한 화면에 도설한 것이 삼장탱화이다. 천장·지지·지장보살은 각각 천상·지상·지하의 삼계교주(三界敎主)로 신앙된다. 사실 이 삼장보살의 명칭이나 도상(圖像)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재래를 수용하여 삼계우주관(三界宇宙觀)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장탱화는 조선중엽 이후 후기에 걸쳐 유행하였는데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이 불화는 가로 318㎝, 세로 173㎝로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화면은 수평으로 이등분하여 상단에 세 분의 보살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권속들을 배치하고 있으며 이 권속들이 상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점이 다른 삼장탱화와 구별된다.
화면의 가운데는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천장회상(天藏會上), 왼쪽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회상(地藏會上), 오른쪽에 지지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지회상(持地會上)을 그리고 있다. 천장회상을 보면 청련 대좌위에 결가부좌한 천장보살이 보주형 신광과 두광에 둘러싸인 채 양손은 경책을 감싸 쥐고 있다. 천장보살의 좌대아래에는 두 보처보살이 있는데 왼쪽에는 진주보살이, 오른쪽에는 대진주보살이 위치한다. 두 보살의 좌우에는 천녀 2위가 보인다. 천장보살의 좌우에는 종(從)으로 배치한 각각 3인씩의 천중이 있다.
화면 왼쪽에 있는 지장회상에는 지장보살이 역시 같은 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대좌아래에는 왼쪽에 무독귀왕(無毒鬼王), 오른쪽에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있다. 그들 왼쪽에는 명부시왕 6위가 있고 왼쪽 제일 상부에는 왼쪽에서부터 명부장군(冥府將軍)·사자(使者)·판관(判官)이 나란히 배치되고 있다.
화면 오른쪽의 지지회상을 보면 지지보살이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광배는 두 보살의 것과 크기나 형식이 동일하다. 왼손에는 경책을 들고 오른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지지보살의 좌대 아래에는 좌우보처로 보이는 신장상이 있는데 왼쪽에는 용수보살(龍樹菩薩), 오른쪽에는 유동보살(儒童菩薩)이 배치되었다. 이들의 오른쪽에는 금강상과 신장상 6위가 있고 지지보살이 신광과 두광 옆에 각각 1위씩의 신장상이 있다.
화기에 따르면 이 불화의 제작에는 총 8인의 화승이 참가하였다. 전체적으로 홍색과 녹색이 주조이나 짙고 탁해서 선명도는 떨어지는 편인데 인물과 옷주름은 도식화가 심해졌고 구도도 다소 느슨해진 감이 있다. 즉 19세기의 형식화·도식화 된 불화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삼장탱화는 18세기말엽을 지나면서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중단탱화(中壇幀畵)로 분류되면서 지장탱화로 독립하거나, 신중탱화 속에 수용되어 그 자취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감로왕탱화> 감로왕탱화(甘露王幀畵)는 조상숭배 혹은 영호숭배의 신앙을 중심으로 묘사된 불화로 영화(靈駕)의 국락왕생을 위한 신앙내용을 도설하였기 때문에 영단탱화(靈壇幀畵)라고도 하고, 아귀나 지옥의 중생에게 감로미(甘露味)를 베푼다는 뜻에서 감로탱화라고도 한다.
감로왕은 바로 극락세계이 주불인 아미타불이며 감로는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의미한다.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중기 이후부터 많이 봉안된 이 감로왕탱화는 불교의 여섯 세계 아귀의 세계를 묘사한 불화로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을 아귀의 세계에서 구하는 것을 주제로 한 《우란분경(盂蘭盆經)》에 근거한다고 해서 우란분탱화(盂蘭盆幀畵)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불교가 유교의 효(孝)사상과 결합함에 따라 우란분회가 널리 성행하게 되었고 그 탱화의 제작 또한 많았는데 감로왕탱화는 지옥이나 아귀도에 빠진 가족친지들을 위해 우란분재를 올림으로써 지옥의 고통을 벗고 극락에 왕생한다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가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이 감로왕탱화를 봉안하였던 것이다. 가로 309㎝, 세로 156㎝로 비단에 채색하였고 1790년 당시 제작에 참여한 화승은 상훈(賞勳)·성완(性琓)·홍민(弘旻) 등 11인이라고 한다.
불화의 도설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상단에는 중앙에 칠여래(七如來) 입상을 배치하였는데 이 칠여래는 망자(亡者)의 영혼들에게 극락왕생의 길을 열어주며 그 명호(名號)는 나무다보여래(南無多寶如來), 나무다보승여래(南無多寶勝如來), 나무묘색신여래(南無妙色身如來), 나무광박신여래(南無廣博身如來), 나무이포외여래(南無離怖畏如來), 나무아미타여래(南無阿彌陀如來)이다.
칠여래 오른쪽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배치되는데 이 보살이 바로 그림 아래에 묘사된 망자의 영(靈)을 맞이하여 극락세계로 내영(來迎)한다. 그 주위에는 천녀와 수레 등이 묘사되어 있으며 칠여래 왼쪽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시립하며 그 주위에 천녀들에게 둘러싸여 극락내영하는 무리들이 묘사되어 있다. 칠여래 바로 아래에는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한 성반(盛飯)이 있고, 그 아래에 제의식(薺儀式) 모습과 상제사인(喪制四人)이 보인다.
성반 왼쪽 아래에는 아귀상이 하나 있고, 극락내영하는 무리들 아래에는 세속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고 반대편의 지옥문을 들어서는 많은 망자들의 행렬 바로 위에는 지장보살이 지옥중생의 구제를 위한 대원(大願)을 세우고 있으며 그 아래에 육아귀가 있고 그 아래에는 줄타기·탈춤 등의 놀이에 모여든 구경꾼과 농부 등이 보이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속계의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복식(服飾)을 하고 있으며 명계(冥界)에 있는 무리들은 고려시대의 복식을 하고 있어서 현실과 과거의 모습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저한 고증과 뛰어난 시대감각이 다시 한 번 이 불화의 가치를 드높인다.
이 감로왕탱화의 설경(說經)인 우란분경은 부모은중경과 함께 불교의 효사상을 나타낸 것인데 부모은중경이 현실세계의 효를 중시한다면 우란분경은 사후나 과거세계의 부모를 위한 것이며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성의 발원이 바로 용주사의 감로탱화이다. <용주사신중탱화> 용주사 대웅보전 내에 봉안된 신중탱화는 대예적금강신을 주축으로 1913년 제작되었다. 가로 210㎝, 세로 198㎝ 비단에 채색한 작품이다. 신중탱화는 상단·중단·하단의 삼단구조로 도설하는 것이 상례인데, 용주사의 신중탱화 또한 이러한 삼단의 구조를 지니며 회학적으로는 수평의 2단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도설의 구조적인 특성을 살펴보면 상단에는 금강 2위, 십대명왕중 명왕(明王) 2위를 배치하고 중단에는 대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동진보살과 금강역사를 하단에는 제신장(諸神將)과 천녀 넷을 도설하였다.
중앙의 대예적금강신은 화염형(火焰形) 거신광(擧身光)을 배경으로 하여 앉았는데 각 네 마리씩의 청룡과 황룡에 둘러싸여 있으며 6개의 손에는 금강저(金剛杵)·금강령(金剛鈴)·법륜(法輪)·보검(寶劍)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4각의 얼굴에는 9개의 눈이 그려져 있고 송곳 같은 긴 치아를 드러내고 있어 불법의 수호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왼쪽의 재석천은 손에 연꽃을 들고 서있으며 왼쪽 상부에는 손에 보주를 든 금강상과 그 아래에 2인의 천녀가, 왼쪽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 중의 1위가 있고 그 아래에 명왕이 있으며 그 왼쪽에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는 3위의 신장상이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의 대범천왕은 합장을 한 채 서있고 오른쪽 제일 상부에는 금강상이, 그 아래에는 2인의 천녀가 있다. 범천의 두광 옆에 신장 2인, 왼쪽 아래에는 명왕, 오른쪽에는 신장을 놓고 있으며, 화면의 하단에는 동진보상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신장 2위, 금강역사 2위가 있으며 오른쪽에도 동일하게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색조는 붉은 색이 주조이며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 등에서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화기에 따르면 고산(故山)·축연(祝宴) 두 분이 탱화불사의 붓을 잡으셨던 것으로 되어있으며 또한 화기에는 불화 제작 당시 절의 대중이 36인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관음탱화> 신중탱화를 마주하고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백색과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관음탱화를 보게 되는데 1971년에 만들어진 이 관음탱은 중앙에 백의관음을 모시고 왼쪽에 선재동자, 오른쪽에 천녀를 두었다. 대웅보전의 닫집은 화려하다. 내부에 들어서면 구조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에 삼세불과 후불탱화를 옹휘하고 있다. 대웅보전의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하였는데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 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다. 불단, 후불탱화가 각각 불국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닫집도 또 하나의 불국토를 의미한다.
대웅전의 닫집 속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을 보면 불상조성의 시말을 알 수 있는데, 불상조성은 상계(商界)·설훈(雪訓)·계초(戒初)·봉현(奉玹) 등 20명의 스님이 참여하여 1790년 8월 16일 처음 시작하여 9월 30일에 완성하였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1일에 나라안의 명승을 초빙하여 점안식을 거행하였고, 또한 위의 기록보다 후에 작성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 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방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波根寺) 통정 봉현(奉絃)이 조성하고, 동방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통정 상식(尙植),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 통정 계초(戒初)가 각 조성하였다. 삼세불상은 이처럼 조각자가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석가여래와 아미타불은 상호가 네모졌고, 약사불은 둥근 형태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각각 전라도와 강원도 조각승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모두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풍만한 얼굴에 짧은 목,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나발에는 정상계주(頂上珠)와 중간계주(中間珠)가 크게 박혀있고 옷주름은 굵고 두터운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수인은 석가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설법인 그리고 약사여래는 오른손에 약그릇을 들고 왼손에 설법인을 하고 있다 .
대웅보전의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는 세로 440㎝, 가로 35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한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신광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주형(舟形)으로 처리하였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에 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시립해 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이 숭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다. 한편 하단 중앙의 문수·보현보살 사이에 라는 은자서(銀字書)의 축원문이 적혀있어 후불탱화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상전하 수만세 (主上殿下 壽萬歲) 자궁저하 수만세 (慈宮邸下 壽萬歲) 왕비전하 수만세 (王妃殿下 壽萬歲) 세자저하 수만세 (世子邸下 壽萬歲)
화면의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역시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좌우에는 화불(化佛)이 보이고 곳곳에 여러 제자와 천녀상이 위치하여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불화는 원칙적으로 한 치의 여백도 없이 꽉 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한 불화는 마땅히 빈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용주사 대웅보전 후불탱은 왕명을 받은 김홍도의 주관 아래 민관·상겸·성윤 등의 25인이 참여하여 제작되었다고 한다. 법고각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단칸 3평의 아담한 건물로 내부에 북이 소장되어 있다. 법고는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보통 북이라고 한다. 북은 예불과 의식에 쓰이는 사물(四物)의 하나로서 짐승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소리를 낸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북은 조석예불에 쓰이므로 대개 사물과 함께 보관되나 용주사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법고각과 범종각이 마주보고 서있다. 이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지옥중생을 위한 범종, 축생을 위한 북, 물고기를 위한 천보루의 목어, 그리고 하늘의 조류를 위한 만수리실의 운판이 함께 어우러져 온갖 중생을 지혜의 세계로 인도함을 의미한다. ~2부로 계속~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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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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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