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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장원공
조선시대의 과거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식년시(式年試) 외에도 부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증광시, 별시, 외방별시, 알성시, 춘당대시 같은 과거시험들이 있었다. 식년시와 증광시는 소과, 문과, 무과, 잡과가 모두 열렸지만, 별시와 알성시, 춘당대시는 문과와 무과만이 열렸다. 부정기적인 과거를 문과 위주로 간략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증광시(增廣試)는 왕이 새로 즉위(卽位)하거나 즉위한 연수(年數)가 오래된 것을 축하하는 등극경(登極慶)과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작은 경사가 여러 번 겹쳤을 때 열리는 과거시험이다. 증광시는 식년시와 마찬가지로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에 따라 초시, 복시, 전시로 치러졌다. 최종 급제자로 33인을 뽑지만 대(大)증광시인 경우에는 40인을 뽑기도 하였다.
별시(別試)는 국가에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 또는 10년에 한 번 현직 관리들의 승진시험 격인 중시(重試)가 있을 때 실시되었으며 문무(文武) 두 과만 열었다. 처음에는 일정한 시행 규칙이 없었으나, 영조 때 초시와 전시 두 단계의 규칙이 생겼다. 많을 때는 30인, 적을 때는 3인을 뽑기도 하였다.
외방(外方)별시는 한양 이외의 지방에서 실시된 특별 과거다. 능(陵)에 행차하거나 온천에 갈 때 등등 왕이 대궐 밖으로 행차했을 때 왕이 머무르는 행재소(行在所)에서 특별히 치르는 과거다. 합격자에게 급제를 주기도 하고 문과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直赴)’의 특권을 주었다. 또한 지역민심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서도과(西道科), 북도과(北道科)라고 하여 10년에 한 번 별도의 과거를 실시하여 품계와 홍패를 주었다. 강화도, 제주도, 수원에서도 시재(試才)라는 이름의 고시가 실시되었는데 성적우수자 2, 3인을 뽑아 전시에 직부(直赴)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외방별시는 문과와 무과만 열었으며,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었다.
▶시재(試才) : 정식 과거시험은 아니나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 시취(試取). 취재(取才)라고도 한다. ▶직부(直赴) : 과거시험에서 초시(初試)를 면제받고, 직접 복시(覆試)나 전시(殿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것. |
알성시(謁聖試)는 왕이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유생들을 고시하여 성적우수자에게 급제를 준 것으로서, 문무 두 과만 열렸다. 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기에 친림과(親臨科)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응시자격을 성균관 유생에게만 주었으나, 뒤에는 지방 유생에게도 주었다. 이 시험은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는 단일시(單一試)였고, 고시 시간이 짧은 촉각시(燭刻試)였다. 또한, 당일 급제자를 발표하는 즉일방방(卽日放榜)이었다. 식년시는 3일 후에 급제자를 발표하는 3일방방(三日放榜)이었다. 따라서 과거 문제로는 채점에 시간이 걸리는 책(策)은 피하고 채점하기 쉬운 표(表)를 많이 출제하였다. 그러다보니 알성시는 운이 좌우하는 과거라는 생각 때문에 요행을 바라는 응시자들이 많아, 숙종 때의 경우 1만여 명, 영조 때에는 1만7000명 이상이 몰리기도 하였다.
▶작헌례 : 왕이나 왕비의 조상, 또는 문묘(文廟)에 모신 공자의 신위에 왕이 직접 예로써 제사지내던 제도 ▶촉각시 : 왕이 과장에서 고시 내내 머무르기 때문에 시험 시간이 유난히 짧았다. ▶책(策) : 대책(對策)이라고도 한다. 문체(文體)의 명칭으로 중국 한대(漢代)에 관리 등용 시험에서 실제 정사(政事)와 관련한 내용이나 유교 경전의 의미와 관련한 내용을 토대로 한 문제를 내어 응시자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답하게 한 것이다. 책(策)에는 임금이 정책(政策)을 묻는 제책(制策), 관련부처가 정책을 묻는 시책(試策), 그리고 사대부가 개인적인 정견(政見)을 올리는 진책(進策)의 세 가지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문과(文科)의 전시과목(殿試科目)의 하나로써 이를 실시하였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표(表) : 문체(文體)의 하나로,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글을 말하는데, 속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발표한다는 뜻이다. |
정시(庭試)는 매년 춘추(春秋)에 성균관 유생을 궁궐 전정(殿庭)에서 고시하여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전을 주던 시험이었다. 그러다 선조 때부터 정식 과거로 승격되면서 국가에 경사 또는 중대사가 있을 때 실시되었고 문과와 무과만이 열렸다. 정시(庭試)는 알성시와 마찬가지로 단일시이고 촉각시였다. 그리고 왕이 친림할 경우에는 즉일방방(卽日放榜)하였다. 알성시처럼 상피제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로 가면서 시관의 협잡이 심하였다. 또한 운이 많이 좌우하는 시험이어서 응시자가 몰려들어 초시를 두자는 여론이 일어나 영조 19년부터는 초시, 전시의 두 단계로 실시하였다.
또한 여러 군문의 무사(武士)들을 춘당대(春塘臺)에서 왕이 친림하여 시재(試才)하는 관무재(觀武才)때 같이 실시했던 춘당대시(春塘臺試)가 있었고, 그 외에도 성균관, 사학, 지방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절제(節製), 현량과(賢良科), 황감과(黃柑科), 전강(殿講), 도기과(到記科), 통독(通讀) 등의 각종 고시가 있었다. 이들 고시에서는 급제를 시키는 것도 있었고 복시나 전시에 응시 자격을 주는 것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이런 각종 과거시험에 무려 9번이나 장원을 차지한 인물이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년 ~ 1584)다. 그래서 이이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다. 이이는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 나이인 13세에 진사시 초시에 처음 수석으로 입격하였다. 이어지는 그의 장원 급제 이력이다.
13세(1548년) : 진사과 초시(향시)
21세(1556년) : 진사과 초시(한성시)
23세(1558년) : 별시
29세(1564년) : 생원과 초시/ 복시, 대과 초시/복시/전시, 진사과 초시
29세에 진사과 복시에도 응시했으나 입격은 하고 장원은 하지 못했다. 남들은 일생에 한 번도 어려운 일을 그는 30세가 되기도 전에 이런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조선시대에 보통 양반집 자제들은 5살 정도가 되는 때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선 서당이나 자기 집에서 《천자문》 공부를 하고,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같은 초급용 학습교재를 사용하여 한문 읽기와 쓰기의 기초를 세웠다.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도 나중에는 중요한 초급 학습교재로 사용되었다.
이 기초과정을 마치면 학동들은 그 뒤에 유교경전인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교과서로 삼아 경학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과거시험의 기본교재가 바로 사서삼경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20년에서 30여 년간을 그러한 공부에 매진한 뒤에야 비로소 과거급제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몽선습 : 중종 때 학자 박세무(朴世茂)가 학동들을 위해 저술한 초급교재로, 부자유친(父子有親) 등의 오륜(五倫)과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대사실(歷代史實)과 우리나라의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약술한 내용을 담았다.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박세무 외에도 김안국(金安國), 민제인(閔齊仁) 등이 저자로 거론된다. ▶격몽요결 : 이이(李珥)가 1577년, 초학자들의 덕행과 지식의 함양을 위해 저술한 초등과정의 교재. |
그렇다고 사서삼경만을 달달 외우기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한문 고전의 명구(名句)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꾸밀 수 있는 능력도 필요했고, 국가의 과제와 운영에 대한 자기 나름의 소견을 개진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풍부한 학식도 쌓아야 했다.
이이가 23세 때에 별시에 응시했을 때의 시험문제 유형은 ‘책(策)’이었다. ‘책’이란 질문한 사안에 대한 대책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문재(文才)를 총동원하여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시의 창작능력을 과시하는 부(賦)나 개인의 생각을 피력하는 표(表)에 비하여 난이도가 높은 유형이었다. 책은 제시된 사안에 대하여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시제(試題)는 ‘천도책(天道策)’이었다. ‘하늘의 도’에 대한 대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한문으로 된 당시의 시험문제를 번역하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천도(天道)는 알기도 어렵고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하루 낮 하루 밤을 운행하는데,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한 것은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인가. 혹 해와 달이 한꺼번에 나와서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성(五星)이 씨줄[緯]이 되고, 뭇별(衆星)이 날줄[經]이 되는 것을 또한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경성(景星)은 어떤 때에 나타나며 혜성(彗星)은 또한 어떤 시대에 보이는가. 어떤 이는 만물의 정기가 올라가서 열성(列星)이 된다고 하니 이 말은 또한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바람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곳에서 시작하며,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떤 때는 나무 가지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불기도하고, 어떤 때는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불기도하여 잔잔한 바람[少女風]이 되기도 하고, 구모풍(颶母風)이 되기도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구름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흩어져 오색이 되는 것은 어떤 징조인가. 간혹 연기 같으면서도 연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안개는 무슨 기운으로 발하는 것이며, 그것이 붉은색이 되기도 하고, 파란색이 되기도 하는 것은 무슨 징조인가. 혹은 누런 안개가 사방을 덮고, 혹은 짙은 안개가 끼어 대낮에도 어두운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천둥과 벼락은 누가 주관하는 것이며, 또 섬광(閃光)이 번득이고 소리가 혁혁하여 두려운 것은 어째서인가. 간혹 사람이나 물건이 벼락을 맞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서리는 풀을 숨죽이고 이슬은 만물을 적시는데,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남월(南越)은 땅이 따뜻한데도 7월에 서리가 내려 변괴가 혹심하였으니, 그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비는 구름으로부터 내리는 것인데 간혹 구름만 자욱하고 비가 오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농씨(神農氏) 때에는 비를 바라면 비가 왔으며, 태평한 세상에는 열흘에 한번씩 1년에 36번의 비가 온다고 하니, 하늘의 길(天道)도 선인(善人)에게만 사사로이 후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간혹 군사를 일으키면 비가 내리고, 혹은 옥사(獄事)를 판결할 때에 비가 내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초목의 꽃술은 다섯 잎으로 된 것이 많은데, 어찌하여 눈꽃(雪花)만이 유독 여섯 잎으로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눈 위에 눕고[臥雪], 눈 속에 서 있는 것[立雪], 손님을 맞는 것[迎賓], 친구를 방문하는 것[訪友]의 일을 또한 두루 말할 수 있겠는가.
우박은 서리도 아니고 눈도 아닌데 무슨 기운이 모여서 된 것인가. 어떤 것은 말머리만큼 크고, 어떤 것은 달걀만큼 커서 사람과 새, 짐승을 죽인 일은 어느 시절에 있었던 일인가.
천지가 만물(萬象)에 대하여 각각 기(氣)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기가 유행하여 흩어져서 만수(萬殊)가 되는 것인가.
혹 상도(常道)와 위반되는 것은 천기(天氣)가 어그러져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일(人事)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을 것이며, 별들이 제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아니하며, 눈과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아니하며, 모진 바람과 궂은비가 없이 각각 그 진리에 순응하여 마침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잘 자라나게 할 것인가.
제생(諸生)은 널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니 반드시 이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고전번역원
▶구모풍(颶母風) : 구모풍은 ‘태풍의 어머니’라는 의미로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어느 방향에서나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될 가능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바람을 가리킨다. ▶남월(南越): 기원전 2 ~ 3세기경에 중국 남부에서 베트남 북부 지역에 걸쳐 존재했던 왕국. ▶신농씨(神農氏) : 중국 신화(神話) 시대의 전설적 황제로, 전설에 의하면 최초로 나무를 깎아서 호미를 만들었고, 나뭇가지를 구부려서 호미자루를 만든 농기구의 발명자이며, 그것을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주었다는 인물. |
지금 우리의 식견으로는 마치 자연현상에 대한 질문처럼 보일 뿐,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지 조차 파악하기 쉽지 않다. 사실 밤과 낮, 일식과 월식에서 시작하여 비와 눈에 이르기까지 일기현상에 대한 질문은 서두에 불과할 뿐이고, 실제 핵심 질문은 어떻게 하면 재앙이나 천재지변 없이 각각의 질서에 순응하여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잘 자라나게 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대표적 유가(儒家)사상인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設)’에 근거하고 있다.
유교는 공자로부터 시작되어 맹자, 순자를 거치며 크게 발전하였지만 진시황 때에 이르러 한순간에 멸문지화를 맞게 되었다. 이 끊긴 유교의 맥을 전한(前漢) 때에 되살린 인물이 동중서다.
북방의 흉노족을 제압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 전한(前漢)의 7대 황제 무제는 지방제후의 왕권 위협을 근절하고 백성의 동요를 막기 위한 치세책을 ‘책문(策問)’으로 공모하였다.
이때 동중서는 한나라의 일사불란한 통치를 위해서는 ‘학설이 분분하고 정견이 다양한 백가(百家)를 축출하고 오직 유가만을 섬겨야 한다’는 내용의 ‘현량대책’이란 책문을 무제에게 올렸고, 이러한 동중서의 주장이 무제에 의해 받아들여짐으로써 유교는 정식으로 국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이후 2천년 이상 유학은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정통사상으로 계승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동중서는 ‘한대(漢代)의 공자’로 불렸던 인물이다.
동중서는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하면서, 특히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라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을 제일 앞에 내세워 지배와 존속의 관계를 하늘과 땅의 관계로까지 확장하였다. 임금을 하늘과 동일시하는 동중서의 주장이 백성들에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유가가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를 잡아야 했으므로 동중서는 유가를 사상이 아닌 종교로 승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은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사이에는 마치 거울에 비친 듯한 상관관계가 수립된다는 설이다. 원래 춘추시대의 유가는 자연이나 초자연의 문제를 거의 논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만을 다루었다. 반면 음양가는 사회적 문제보다 자연의 물리에 집중했는데 동중서는 이 두 관점을 하나로 합쳐버렸다. 동중서는 음양가의 이론을 유교에 채용하여 세상 만물은 모두 음양오행의 규칙에 따른다고 주장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는 물론이고 예전에도 일일이 따지다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아 천인감응설이 언제나 주장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원칙은 유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전해졌고, 유교적 정치사상에도 반영되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이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과인이 정치를 잘못해서 우주의 질서가 어긋났기 때문”이라며 반성했던 것도 이 천인감응설에 근거한 관행이었다.
천도(天道)를 묻는 질문에 이이는 이렇게 서두를 시작했다.
“상천(上天)의 일은 무성무취(無聲無臭)하여 그 이(理)는 지극히 은미하나 상(象)은 지극히 현저하니 이 설(說)을 하는 사람이라야 더불어 천도를 논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집사(執事) 선생께서 지극히 은미하고 지극히 현저한 도로써 발책(發策)하여 문목(問目)을 삼아서 격물궁리(格物窮理)의 설을 듣고자 하니, 진실로 학문이 천인의 도를 끝까지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를 의논하는데 참여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평소 선각자들에게서 들은 것을 가지고 밝으신 물음에 만분의 일이나마 대답할까 합니다.”
그리고 이율곡 일생일대의 최고의 명문장으로, 훗날 명나라에까지 전해져 중국학자들로부터 ‘해동의 주자’라고 극찬을 받은 그의 답안 ‘천도책’은 이렇게 이어진다.
“생각하건대 만화(萬化)의 근본은 하나의 음양일 뿐입니다. 이기(理氣)가 동하면 양(陽)이 되고 정(靜)하면 음(陰)이 되니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하는 것은 기이고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이(理)입니다. 천지의 사이에 형상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더러는 오행의 정기가 모여된 것도 있고, 천지의 괴기(乖氣)를 받은 것도 있고, 음양이 서로 격돌하는 데서 생긴 것도 있고 음양 두 기운이 발산하는 데서 생긴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월성신이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이나 비‧눈‧서리‧이슬이 땅에 내리는 것이나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나 우레와 번개가 발작하는 것이 모두 기가 아닌 것이 없으나, 이것들이 하늘에 걸리고 땅에 내리고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고 우레와 번개가 발작하는 까닭은 이(理)가 아님이 없습니다.
이기(二氣)가 진실로 조화되면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이 그 도(度)를 잃지 않고, 땅에 내리는 것이 반드시 시(時)에 맞으며, 풍운뇌전(風雲雷電)이 모두 화기(和氣) 속에 있으니, 이는 이(理)의 상(常)입니다. 이기(理氣)가 조화되지 않으면 운행이 도를 잃고, 그 발산함이 시(時)를 잃어 풍운뇌전이 모두 괴기에서 나오니, 이는 이(理)의 변(變)입니다.
...(후략)...
▶괴기 : 정도에 어그러진 기. |
[1558년(명종 13) 이이가 별시해에 장원하였을 때의 답안인 <천도책> 시작 부분. 율곡전서 권14,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이이의 책문은 한자로 2,500여 자에 달한다. 과거 문제를 출제했던 정사룡(鄭士龍)과 양응정(梁應鼎)은 이이의 책문을 보고 “우리들은 여러 날 애써서 생각하던 끝에 비로소 이 문제를 구상해냈는데, 이모(李某)는 짧은 시간에 쓴 대책(對策)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다.”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이의 ‘천도책’은 당시의 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후일, 중국의 조사(詔使)로 온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황홍헌(黃洪憲)이 원접사로 나온 이이를 보고 역관(譯官)에게 “저 사람이 ‘천도책’을 지은 분인가?”라고 물었을 정도로 그 당시 중국의 학계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한다.
현재 널리 알려진 율곡 이이의 영정은 김은호라는 화가가 1965년에 그린 것이다. 김은호는 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영정도 그렸다. 김은호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동시에 우리 전통 한국화에 왜색을 덧칠한 인물이다. 그 역시 다른 친일파들처럼 해방 후에도 비난받는 일 없이 편안히 지내다 갔다. 역사적 가치도 없는 영정을 후손들이 왜 붙들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 하나, 신사임당이 과연 이순신장군이나 정조, 세종대왕을 제치고 5만원권 도안에 오를만한 인물인지 궁금하다. 대학자 이이를 낳은 것 말고 무슨 공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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