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정을 찾아서
새해가 되어 일월이 중순에 접어든 둘째 화요일이다. 미리 설계한 주간 일정에는 북면 오곡에서부터 창녕함안보를 건너 길곡을 거쳐 부곡으로 가려고 했다. 내가 그곳으로 걸어가려는 뜻은 유황 성분이 함유된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제 예전 근무지 한 동료가 트레킹에 동행하자는 제안이 와 행선지를 바꾸어 김해로 나가 서낙동강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내게 연락이 온 이는 십여 년 전 장유로 출퇴근하던 시절 사귄 동료다. 그는 다가오는 이월 말 정년을 맞으면 나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될 친구다. 이번 트레킹에서 퇴직을 앞둔 소회와 안부가 자연스레 나누어질 듯했다. 우리는 이른 아침 김해로 가는 97번 버스를 타기 위해 창원대 삼거리에서 만났다. 창원 터널을 벗어나 내가 한때 근무했던 장유 신도시에서 김해 시내로 들었다.
김해는 내가 사는 생활권과 다소 가리를 둔 곳이지만 가야 왕도의 웬만한 고적은 샅샅이 다 둘러 현지인들보다 훤하다. 수로왕릉과 왕비 능을 비롯해 분성산성은 금관가야 역사 현장이다. 국립 김해박물관에는 가야 시대 유물들을 소장 전시하였고 봉황동 선사 유적지는 우리나라 사적 2호로 지정된 곳이다. 사적 1호가 경주의 포속정이니 봉황동 선사 유적 의의를 짐작할 만하다.
지기와 이번에 나선 김해 걸음의 서낙동강 산책로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어 대동에서 낙동강을 가로지른 화명대교를 건너 화명에서 구포까지 냅다 걸을 수 있다. 아니면 수안에서 주중천을 거슬러 올라 조선 중기 남명 조식의 유적을 답사해도 된다. 지기와 경전철 수로왕릉역에서 사상 방향으로 가려다가 타고 간 시내버스로 불암동 종점까지 갔다.
지난 연말 불암동에서 서낙동강 하중도인 중사도 트레킹을 했더랬다. 이번에는 서낙동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려니 강기슭에는 산책로가 개설되지 않아 개척 산행이나 마찬가지로 가시덤불을 헤집어 나갔다. 어느 구역은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차도에서 인도가 확보되지 않아 갓길을 조심스레 지났다. 수안마을에 이르러 비닐하우스단지를 지나면서 지기가 가져온 커피와 귤을 먹었다.
들녘에서 주중천 천변을 따라가니 주중마을이 나왔다. 가까이 초등학교가 보이던 한 식당에서 소머리곰탕으로 점심을 들고 앞서 언급한 두 개 선택지 가운데 후자를 택해 남명 조식 유적지 산해정을 찾기로 했다. 성안마을과 인접한 주중마을은 기름진 충적토인 대동 들녘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그곳 주민들은 대규모 화훼농사와 부추를 길러 농가 소득이 높을 듯했다.
찻길에서 이정표를 따라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산해정은 중국 민항기가 떨어졌던 돗대산과 까치산이 감싼 가운데 산봉우리 기슭에 있었다. 개울을 건너는 산해교에는 남명 선생이 평생 실천 덕목으로 삼은 경(敬)과 의(義)를 사자성어로 결합해 성성자 방울과 함께 조형물로 설치해 놓았었다. 남명과 당시 그와 교류한 밀양의 신계성을 향사하는 사당인 신산서원을 겸한 산해정이었다.
서원의 대문 격인 진덕문이 닫혀 있어 연락처로 전화를 넣었더니 인근 시례마을에 사는 촌로 한 분이 차를 몰아와 문을 열어주었다. 서원 경내를 둘러보고 조식과 신계성 위패를 모신 숭덕사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시례마을에서 온 노인은 산해정 바깥 성안이 남명 선생의 처가로 젊은 날 18년 머물면서 학문을 성숙시키고 후학을 길렀다고 했다. 아내 무덤은 앞동산에 있다고 했다.
지역 유림 인사의 도움으로 산해정과 신산서원을 둘러본 뒤 건너편 원동마을로 가니 언덕에는 남방 불교 수행 선원인 싸띠아라마가 나왔다. 뜰에는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치 둥치가 큰 모과나무가 자랐다. 원동 지명은 서원이 자리한 동네라 그렇게 부르는 듯했다. 원동에서 주중문화회관을 거쳐 찻길로 나와 창원으로 복귀하는 98번 버스를 탔더니 하루해는 얼마 남지 않았더랬다. 23.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