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도 많고 드넓은 데다가 다양한 언어, 인종, 종교가 얽혀서 돌아가는 인도 또는 인도인을 한마디로 단정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태도다. 북부 라자스탄과 남부 타밀나두는 언어와 인종이 다르고 통합된 국가 안에서 함께 살았던 시간도 짧다. 두 지역 사람이 다른 정도는 이탈리아 사람과 스웨덴 사람이 다른 것 보다 더 차이가 날 수 있다.
이란과 파키스탄 접경지역에는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는 밝은 피부색의 아리안 계열 사람들이, 스리랑카와 남인도에는 짙은 피부의 드라비다 계열의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다. 크게 나누어 그렇다. 매우 이질적인 핏줄을 가진 두 무리가 함께 거주하게 된 역사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조금 다르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우리가 배웠던 바로는 기원전 3,000년 경 인도 북쪽에서 아리아인들이 대거 남하, 기존 문명을 파괴/흡수하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냈다는 설이다. 그러나 그와 관련한 고고학적 자료가 전무하다는 것과 현대 인도인의 유전자에 그 시기 북쪽 아리아인의 유전자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새로 밝혀진 사실로도 남쪽에 치우쳐 거주하는 드라비다족이 북부 인더스강 유역에서 초기문명을 일으킨 것은 이미 알려진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리안의 핏줄은 중앙아시아 쪽에서의 급작스런 침략이 아니라 파키스탄과 이란 접경지역에서 시작하여 동부 지방과 서부 아라비아 해안 쪽으로 느린 속도로 확장되었다는 것이 유전자 분석으로 밝혀졌다. 새로 도래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가까운 곳에 거주하면서 교류하고 있던 아리안의 점진적 이주에 의해 확산 되었던 것이다. 이곳 사학자 중에는 영국이 인도 지배 근거를 역사적으로 합리화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동일한 의도를 가진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인도를 들어다보면 남서부 케랄라주의 유대인으로부터 아라비아, 튀르크, 중앙아시아와 동북 끝 방글라데시 근처 나갈랜드의 몽골인에 이르기끼지 혈연적으로 매우 다양한 종족들이 이주 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접하는 갈색 피부에 커다란 눈동자, 약간 마른 체형의 인도인은 기원전 3,000년에서 1,000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진 아리안과 드라비다의 혼혈인이다. 두 인종 사이에 2,000년이라는 (대규모의 혼혈이 완성되기에는) 짧은 기간 내에 모든 계층에서 급속하게 혼혈이 진행된 이유는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는 수수께끼라고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주로 정복에 의해 다민족 국가로 나아갔지만 인도는 이주로 유입된 이민족이 많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컬럼부스가 인도로 가는 무역로를 개척하려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고 6년이 지나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인도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 바스코다가마가 상륙했던 곳이 코친이다. 그곳에서 구글지도에 <바스코다가마 광장>으로 표시된 곳은 안내 표지 하나 없었다. 혹시 뭔가가 있지 않을까 둘러 보았지만 어떤 기념물도, 표지도 없었다. 평범한 마을 공터였다. 구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걸 믿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그와 함께 이곳에 당도한 이들을 대항해시대를 개막한 위대한 주인공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저 항구를 드나들던 수많은 외국인 무리 중 하나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이후에 이곳에서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애써 기념할 일도 아닐 것이다. 약 500m 떨어진 곳엔 원나라에서 전래된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곳이 있다. 먼저 도착한 독일인 관광객들이 그 앞을 메우고 있었는데, 현지인들은 관광객을 위해서 고기 잡는 시늉만 내고 있었다.
이곳은 바스코다마가 조그만 범선을 끌고 도착하기 거의 1세기 전에 명나라 장군 정화가 317척/27,000여명의 대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원정할 당시 잠시 들렀던 코지코드(당시 캘리컷)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길이가 26m에 불과했던 바스코다가마 주력선에 비하여 그의 보선은 122m에 달했던 엄청난 크기의 함선이었다. 당시 중국과 유럽의 힘과 기술 차이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될만한 사건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힘의 중심이 중국에서 서구로 넘어가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던 상징적인 지역이라 할만한 곳이다. 약 30분 정도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면 로마시대 이후로 얼마 전까지 유대인이 거주하던 동네가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성립한 이후로 대부분 이주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과 교류하고 이주한 역사는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뭉뚱그려 인도라고 하지만 대외관계나 교역에 있어서 인도의 동부와 서부의 역사는 매우 다르다. 동부 인도양 지역이 주로 동남아시아와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반면 서쪽 아라비아 해역은 고대로부터 이집트, 중동, 로마, 아프리카 동해안 지역과 교류가 잦았던 지역이다. 인도는 역사적으로 동서양을 연결했던, 오늘날의 싱가포르와 같은 역할을 한 지역이다.
언어의 다양함은 지구상에서 이곳을 당할 곳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의 뿌리가 이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 놀라운 것은 드라비다 계열 언어인 타밀어에서 한국어와 뜻과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단어가 수없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잠깐 들러서 알게된 것을 몇 개 예를 들면 '엄마', '아빠', '나' 는 뜻과 발음이 같고 쌀-쏘르, 형-언니(어려서 내가 살던 곳에서는 형과 언니를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는 발음이나 뜻이 유사한 단어다. 들은 바로는 그런 단어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고언어학자들의 분발이 필요한, 이상한 일이다.
진•한 이후 강력한 중앙정부 아래에서 하나의 문자로 통합된 문화를 지향하면서 발전해온 중국과 달리 이 나라 역사에는 통합의 역사가 별로 없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더스강에 이르렀던 BC 4세기 경 마우리아 왕조와 17세기 영국이 당도했을 즈음 통일 국가였던 무굴제국이 있었지만 불완전 했을 뿐 아니라 시기도 짧아서 인도가 통합된 문화로 발전할 정도로 강력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인도 미통합의 역사는 언어에 고스란이 남아있다. 현재 인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약 700개에 이른다. 사용 언어가 주 경계의 기준이 되는 나라도 아마 이 나라 외에는 없을 것 같다. 경제 통합까지 이룬 ÈU의 다음 목표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로 분열되어 있는 회원국을 하나의 정치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이미 그것이 이루어졌다. 인도는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 EC와 같은 거대한 정치/경제 공동체라고 표현해야 할 조직체다.
인도에서 온갖 것들이 뒤섞인 것은 침대 버스 안의 기기묘묘한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사람과 문화, 과학, 예술, 종교, 언어가 섞여서 새로운 것으로 녹여낸 용광로 같은 곳이다. 이번 여행 목적이 16세기 이후 인도와 서양의 것이 부딪히면서 변화해온 다양한 흔적을 확인해 보는 것이었는데 기대보다 더 오래된, 더 많은 충돌과 변화의 모습이 화석처럼 남아있는 것을 보고 있다. 여행하면서 겪는 불편으로 힘든 순간도 있지만 그건 얻는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비용이다. 가성비가 꽤 높은 여행을 하고 있다.
2020 01 09 코친